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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이들 제 165호 내가 만드는 두 사람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신 이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주셨을 때는, 그의 지상 봉사가 마지막에 이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분은 죄를 담당하실 자로서 그가 져야 할 그 죄악의 무거운 짐을 온전히 깨닫고 십자가의 그늘 아래 계셨습니다.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기에 앞서, 그분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베푸시려고 하신 아주 필수적이고 완전한 선물에 대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통하여 그들은 그분의 무한한 은혜의 근원에 이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구주께서는 그의 대리자이신 성령께서 강력한 사업을 행하시러 오실 그 때를 가리키고 계셨습니다. 수세기 동안 축적되어 온 죄악이 성령의 능력으로 격퇴될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약속은 어떤 시대나 어떤 족속에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거룩한 감화가 세상 끝 날까지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순절 때부터 지금까지 보혜사 성령은 자신을 주님과 그분의 사업에 온전히 바친 모든 사람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은 권고자로, 성결케하는 자로, 인도자로, 그리고 증인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할 때 그들은 구주의 사랑과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더욱 힘있고 분명하게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기에 걸친 박해와 시련의 시간 동안 남녀들은 그들의 생애에 성령의 임재를 크게 누렸으며 세상 가운데 이적과 기사를 베푸는 자들로 섰습니다. 그들은 천사들과 사람들앞에 구속하시는 사랑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보혜사이신 성령님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3).
만약 우리가 다음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시련의 날에 우리가 어떻게 설 수 있을까요?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5,26)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시기로 선택하신 주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 앞에 드넓은 진리의 대지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었고, 보혜사 성령께서는 모든 것들을 기억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주신 위로는, 하나님의 감화하심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마지막까지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 약속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지도 않으며, 교회의 경험 가운데서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도 못합니다. 교회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약속을 별반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는 문제로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끼치지 못했으며, 그 결과로 예상되는 것은 영적인 가뭄과 암흑, 쇠퇴 그리고 죽음뿐이었습니다. 사소한 문제가 마음과 영혼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번성에 신령한 능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했더라면, 다른 모든 축복들이 연이어 가져왔을 신령한 능력이 부족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소한 것에 만족해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것을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선물이야말로 마음을 정결케 유지해 줄 방편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것에 대해 굶주려 하지도, 갈급하지도 않습니까?
신앙 1부: 유다와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 연구해 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이르지 않게 하는 죄의 차이 I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성경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의 죄와 구원받은 사람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구원은 이 차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죄를 지어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가 있는데, 이 죄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예로 들어보면 우리가 실질적으로 이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킨 대표적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유다와 베드로이다. 둘 다 부족과 허물이 많고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지은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였던 반면, 유다가 지은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였다. 그 차이는,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게 하였고,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게 내어준 살인자로 생을 마감하게 하였다. 그들의 생애를 조명해보며 구체적으로 이 주제를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자.
* 유다와 베드로는 둘 다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러나…
1)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르셨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 4:19~20).
베드로는 교육을 받지 못한 비천한 어부였다. 무식했고 성급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가졌던 베드로는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그분의 제자로 부르셨다. 베드로는 일찍이 침례 요한의 전도를 듣고 그에 반응한 신실한 사람이었으며, 예언을 연구하며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랍비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쓸 데 없는 인간의 유전과 전통과 가르침에 있어서 다른 유대인들보다 자유로웠고, 당시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사상이 덜 오염되어 있었다. 급한 성격을 가졌지만, 단순하고 진리에 쉽게 감응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베드로는 하늘의 위대한 교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으면 변화되어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완수할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위대한 복음 사업을 위하여 비천한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 베드로를 보셨을 때에 그분은 신성의 안목으로 베드로의 성품과 모든 생애의 역사를 읽으셨다. 그의 충동적인 성질, 따뜻하고 인정이 많은 마음, 그의 야심과 자만, 그의 타락과 회개, 그리고 복음을 위한 사역의 활동과 순교의 죽음의 역사 등, 이 모든 것을 구주께서는 읽으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말씀하셨다(요 1:42). 침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할 때에, 침례 요한의 제자이던 안드레와 요한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이 과연 메시아인가를 물었고 확신을 얻게 되었다. 안드레는 기쁨에 넘쳐 그 형제 시몬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치기에 이른다. 시몬은 두 번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구주께로 급히 갔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해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따르지는 않았다.
갈릴리 해변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던 낮,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배를 바다 쪽으로 띄워 그물을 던져보라고 분부하셨다. 수확 없는 수고의 밤을 지나며 지친 제자들은 아직도 그들의 어선을 호수에 띄우고 있는 중이었다.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는 낙심해 있었다. 그는 감옥에 갇혀 홀로 괴로워하고 있는 침례 요한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침례 요한의 투옥은 그에게 매우 쓰라린 실망으로 다가왔고, 요한의 전도의 결과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모든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대적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걸 수 있는 소망은 거의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빈 그물을 보면서 기약이 없는 장래에 대해 낙담하고 있었다. 그 때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별로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부에 순종했던 그는 그물에 가득 찬 고기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고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는 분을 보았다. 신성의 순결하신 임재 속에 드러난 자신의 부정함을 보고 그는 구주의 발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부르짖었지만, 그의 손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그는 동역자로서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행하시는 많은 이적들을 목격하였고, 그분의 교훈에 귀를 기울였지만 이전의 생업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이적을 보여주시며 베드로에게 이전 생애를 버리고 그분을 따르기를 요청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맹세했으며,그때로부터 예수님의 수석 제자가 되어 복음 사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2) 유다는 예수께서 부르지 않으셨다
유다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안수하기 위하여 준비하실 때에 부름을 받지 않았던 한 사람이 제자들 사이에 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가룟 유다였는데, 예수님 앞으로 나와 이 핵심적인 모임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매우 열렬하게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신실하게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배척도 환영도 않으시고 다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없다”(마 8:19,20)는 슬픈 말씀만을 하실 뿐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유다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유다가 그들의 동료가 되기를 매우 원했다. 제자들은 유다는 예리한 식별력과 행정적인 재능을 가진 유능하고 이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유다를 이 사업에 크게조력할 사람으로 예수님께 추천했다. 예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들여다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 못하는 한, 유다가 빠져 들어갈 죄악의 깊이를 아셨다. 그의 이기심과 탐욕과 그리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까지 나타날 그의 야심과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성정을 보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다가 매일 당신과 연결을 맺게 하셔서 날마다 그분의 이기심 없는 사랑에 접촉하며 감명을 받게 하셨다. 만일 유다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 문을 연다면 하늘의 은혜가 이기심과 탐욕을 쫓아낼 것이며 그는 하나
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유다는 예수께서 메시야가 되심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합류함으로 새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얻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큰 이적을 목격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일찍이 그가 들은 모든 가르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크신 선생님을 사랑하였으며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그는 자기의 품성과 생애가 변화되기를 바랐고 자기 자신을 예수님과 연합시킴으로 그 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 했다. 구주께서는 유다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열둘 중의 한 자리를 유다에게 주셨고 그에게 전도 사업을 하도록 위탁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 그는 세속적인 야망과 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의 지위는 받아들였지만, 참된 제자를 만드시기 위해 구주께서 하시는 인격 형성에 자신을 복종시키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지냈지만 참 제자의 정신과 마음에서는 멀었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그의 생애로 그 사실을 극명하게 증거하고 말았던 것이다.
신앙 2부: 유다와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 연구해 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이르지 않게 하는 죄의 차이Ⅱ
예수님의 제자로서 똑같은 기회와 시간, 그리고 똑 같은 축복과 은혜를 누렸던 유다와 베드로였지만, 이 두 사람의 생애의 결과는 너무나 판이한 차이를 가져왔다. 이 두 사람의 생애와 운명은 우리에게 큰 교훈과 경종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택과 마음의 태도에 따라 우리의 운명과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 결정지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생애의 결과를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의 태도와 방향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 사이의 차이를 만들며 또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한다. 유다와 베드로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작용한 것이 바로 이 차이였던 것이다.
* 유다와 베드로는 둘 다 죄를 지었다. 그러나…
1) 베드로의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였다
베드로만큼 충동적이고 많은 실수를 많이 저지른 제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므로 모든 것, 곧 직업과 재물과 전토와 가족과 안일함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항상 앞장서서 복음 사업에 자신을 투신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실수와 허물과 오점투성이였다. 더구나 그는 다른 제자들이 결코 저지르지 않은 실수,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죄에 빠졌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실수를 저지른 베드로의 죄와 허물들이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가 될 수 있었는가?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실수를 많이 하였지만 실수를 통해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갔다. 그는 교만과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려고 끝까지 고집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 배우고 회개하며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베드로는 예수님의 책망과 견책을 받을 때 얼른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겸비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으며, 쓴 뿌리나 원망을 마음속에 기르지 않았다. 비록 충동적이고 급한 성격 때문에 시험을 받고 유혹을 당하여 쓰러지기는 하였으나, 마귀가 그의 속에 들어와 자리 잡게 하지는 않았고, 끝까지 아집을 부리며 사단의 지시를 따르는 자리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부드러운 예수님의 견책과 권고를 들으면서, 그 때마다 그는 항상 뉘우치고 금방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였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뜻보다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몰랐다. 그의 생애에 실수가 그렇게 많았던 것은 그 실수들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영적으로 자라가기 위함이었다. 실수의 경험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갔으며, 점점 더 예수께서 꼴 지으시려고 하는 연단의 과정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베드로는 연약해서 죄를 지었지만 그 때마다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므로 곧 회개가 뒤따랐고,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운 쓰라린 교훈과 자신의 부족으로 주님을 슬프시게 했다는 자책감과 후회때문에, 점점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며 영적으로 자라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의 결말을 보면, 베드로가 지었던 죄는 그를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베드로의 실수, 범죄, 그리고 회개
1. 물 위를 걷던 베드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가다가 물에 빠진 일처럼 그의 성급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드러낸 사건이 없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을 해산시키시고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라고 명령하시자 그들은 불만을 품고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큰 능력이 있음에도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때문에 시험에 들었던 제자들을 깨우듯 갑자기 사나운 폭풍이 몰아 닥쳤다. 안간힘을 다했지만 파도에 삼키어 거의 죽게 된 순간, 제자들의 눈에 희미한 빛이 물위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자 베드로는 놀라 기뻐하며 “주여! 만일 주시여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소리쳤다. “오라!” 하시는 주님의 분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안심하며 물 위를 걸어갔다. 그러나 자만하는 마음이 생겨 잠시 배 위에 있는 동료들을 돌아보자 그의 눈은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게 되었고, 사나운 바람과 파도가 높이 솟아 주님과의 사이를 막아 보이지 않게 되자 겁이 나서 물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즉시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다. 주님의 손을 잡고 함께 배 안으로 들어온 베드로는 말이 없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랑할 이유가 없었는데, 불신과 자고심 때문에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성질이 급했지만 단순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고 했고 또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자만과 과시하고 싶은 연약성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었다. 베드로는 그 경험에서 항상 시야에서 예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과, 늘 겸손하게 낮추며 주님을 따라 가야 할 것,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과 그러나 주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할 때에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2.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은 베드로
베드로는 실수가 많고 성격이 급했지만 충성된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다윗의 보좌에 앉기를 열렬히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가자,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슬프게 물으시던 예수님을 향해 베드로는 저 유명한 신앙 고백을 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이어 그는 “우리가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부언하였다. 예수께서 당신의 놀라운 이적을 목도하였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을 때에도 베드로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말함으로써 제자 된 믿음을 표시하였다. 신실했던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그의 충절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고백은 이런 칭찬을 받았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의 믿음의 고백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받는 동시에 예수님의 심한 책망도 받았다. 그 때까지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것을 일체 알리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숙한 믿음의 고백을 받으신 후,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 성급한 베드로는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치 절박한 죽음에서 끌어내려는 것처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해진 불신의 발언이었다.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사랑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당신을 고난에서 막겠다는 욕망을 나타낸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서 십자가와 고난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은 큰 고난을 앞둔 예수님과 사명에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구주께로부터 가혹한 책망의 말을 듣게 되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하는 자로다!” 충동적인 베드로는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단은 예수님을 낙심하게 만들어 그분을 사명에서 돌아서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으며, 베드로는 그의 맹목적 사랑으로 유혹의 말을 하므로 사단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베드로를 흔들려는 사단에게 하신 것이었다. 베드로는 통렬한 책망을 받았지만, 그 책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을 선택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끝까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분의 생애의 교훈을 배웠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길이 고난과 어려움으로 점철된 길이라는 사실은 베드로에게 쓰라린 교훈이었고 처음에는 그는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결국 계속되는 연단의 불 속에서 그는 그 축복을 배웠다.
3. 자신을 과신했던 베드로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 후 예수께서 깊은 슬픔에 잠기신 목소리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단호하게 부인하였다. 예수께서 열둘 중의 한 제자가 당신을 배반할 것과 또한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적인 안목으로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선언하며,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경고를 부인하였다. 베드로가 옥이나 죽는 데까지도 주를 따르겠다고 말했을 때 그 모든 말을 진심으로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상황의 부추김으로 인해 나타날 악의 요소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구주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까지라도 억눌러 버릴 이기주의와 철면피함이 베드로에게 있는 것을 보셨다. 많은 결점, 억제하지 못하는 죄, 주의성 없는 정신, 성화되지 못한 성질, 시험에 뛰어드는 부주의성 등이 그의 생애 가운데 나타났다. 베드로는 자신을 불신임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더욱 깊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만일 베드로가 겸손히 그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시험에서 보호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겸손하게 살피는 대신 자신이 불신임을 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마음이 상해 더욱더 자신을 고집스럽게 과신하게 되었다.
3)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의 결과
1.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
예수께서 잡히셔서 심문을 당하시던 마당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 불꽃이 군중에 섞여 태연한 듯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의 얼굴을 비추자, 한 여인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다. 집요하게 묻는 물음에 군중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베드로는 화를 내며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못하노라”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고 곧 닭이 울었다. 그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베드로는 주님의 심문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잔인한 욕설과 학대와 고통을 당하는 주님을 보고 슬픔에 짓눌리자 베드로에게 주의가 집중되고 다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맹세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어떤 사람이 동산에서 베드로를 보았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버럭성을 내며 저주와 욕설을 섞어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닭이 크게 우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베드로는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비열한 저주의 말이 베드로의 입술에서 발해지며 목청껏 울어대는 닭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그의 귀에 울리고 있을 그 때에, 구주께서는 깊은 동정과 부드러운 표정으로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창백하고 고통에 차 있는 얼굴과 떨리는 입술과 동정과 용서의 정이 서린 그분의 모습은 화살처럼 베드로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어둠을 헤치고 주님이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 달려와 쓰러져 얼굴을 땅에 대고 죽기를 원했다. 그는 사랑하는 구주의 굴욕과 슬픔에 가장 무거운 짐을 더했다는 사실에 통곡하고 울며 회개했다.
2. 충성스러운 사도 베드로
베드로의 성격이 강했던 만큼 그의 실수와 범죄와 회개는 전격적이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는 큰 실수와 죄를 범했지만, 그런 후에야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있었으며, 이제 그는 자신을 불신하고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겸손하고 인내 있는 사랑의 사도로 변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해변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세 번의 거듭된 질문으로 시험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열두 제자 중의 그의 자리를 회복하였다. 베드로가 부목자로서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후의 일이었다. 그가 자기의 연약함을 배우기 전까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알 수 없었다. 베드로는 그에게 위임된 양무리를 충성스럽게 돌봄으로 자신이 구주께서 주신 명령과 책임에 합당한 사람임을 입증하였다. 그리스도를 부인한 후 그의 지위를 회복한 이래 베드로는 확고부동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갔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주를 전파하는 일에 고상한 용기를 나타내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선고를 받았다. 한때 그처럼 십자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그는 이제 주님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되었고, 주님을 부인하였던 자신이 주님이 죽으신 동일한 방법으로 죽는 것은 너무나 큰 영광이라고 느낄 뿐이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성실히 회개하였으나 예수님을 부인한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지막 부탁으로 그를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 줄 것을 사형 집행자들에게 간청하였다. 그 요구는 수락되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는 한 때 그가 부인했던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의 끝마침은 그의 생애의 변화의 전 과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비록 큰 실수와 죄를 저질렀지만 그 때마다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여 회개하였고, 자아의 고집과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므로, 그의 죄가 그를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가 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으로 일하다가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나가게 되었는데, 그의 선택과 그 선택이 만든 차이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 3부: 유다와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 연구해 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이르지 않게 하는 죄의 차이 III
유다의 생애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던 삶의 슬픈 종말을 보여 준다. 만일 유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 전에 죽었더라면, 그는 아마 열두 제자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믿음을 가진, 예수님의 사업에 훌륭한 영향력을 끼진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또한 수 세기를 통하여 나타난 그를 따라다닌 증오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생애의 전 과정을 통하여 역사하시던 성령의 호소와 음성을 조금씩 거절하므로, 그리하여 최후의 성령의 역사까지 무시하고 자신의 선택을 따른 결과로 빚어진 유다의 비극적인 생애의 결말은 우리에게 교훈과 일종의 경고가 되고 있다. 함께 유다의 생애를 조명해 보며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 유다와 베드로는 둘 다 죄를 지었다. 그러나…
1) 유다의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였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에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정체, 곧 유다의 마음 상태와 의도, 그리고 그의 목적과 야망과 배반할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음을 말해준다. 예수께서는 유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간절하게 원하셨는데, 만일 그가 계속해서 성령을 무시하고 그 역사를 부인하면, 그리하여 성령의 최후의 경고를 거절하므로 더 이상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 영원히 빠져 버릴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1. 유다의 교만
유다는 제자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유다는 자신의 자질에 대해 스스로 높이 평가하고, 동료 제자들의 판단력과 능력은 매우 열등하며,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르는 근시안적인 사람들로 여겼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업은 이런 사람들로는 결코 번영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급하여 생각 없이 날뛰는 베드로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에만 관심이 있는 요한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또한 유다는, 모든 일에 정확하고 유별나게 정직한 마태는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너무 심사숙고하고 집중하기 때문에 민첩하고 긴 안목을 요하는 사업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모든 제자들을 하나씩 헤아려 보면서 자신의 수완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업은 혼란과 실패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우쭐했다. 유다는 자신을 실패를 모르는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예수님의 사업에 영예를 더해 주는 사람으로 나타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동료들을 저울질 하며 비평하고 비난하는 성질을 길렀다.
무아의 희생을 나타내시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은 때로 유다의 교만을 건드렸다.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실천을 몸소 목격할 수 있는 똑같은 기회를 가지고, 똑같이 귀중한 교훈을 들었던 유다는그러나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진리의 실천, 곧 겸손과 희생과 사랑의 생애를 살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바치지 않았다. 그의 교만과 정반대가 되는 예수님의 정신과 생애의 교훈, 그리고 하늘의 성품과 지혜를 받기 위하여 유다는 자기의 생각을 굴복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유다는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기를 계속 거절하고 자신의 길과 고집을 선택하므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 빠지게 된다.
2. 유다의 탐욕
유다가 자신의 품성의 결함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알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그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 그것은 곧 회계로서 그 적은 집단의 필수품을 준비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책임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통하여 유다는 이기심 없는 정신을 계발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고 그분의 무아의 생애를 보면서도 유다는 탐욕적인 기질을 버리지 않았다. 주의 사업을 위하여 손에 들어오는 돈이 그에게 계속적인 유혹이 되었고, 자주 그 자금에서 이런 구실 저런 구실로 자신이 한 봉사와 수고의 대가를 챙겼다. 유다는 본래 돈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나 도적의 행동을 할 만큼 부패되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은 탐심이 생길 때 그것을 제지하지 않고 그 악한 탐욕의 정신을 그대로 길러 마침내 그런 행동이 그의 생애의 주된 목적이 되도록 방치했고, 돈에 대한 애착이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을 능가하도록 자초했다. 한 가지 악의 노예가 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을 사단에게 넘겨주어 죄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실 때마다 매번 탐심을 뿌리째 없애야 할 자선과 베풂의 원칙을 설명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다의 탐심을 날카롭게 책망하지 않으시고 인내로써 거듭 과실을 범하는 그를 참으셨지만, 주님께서는 때때로 유다의 마음을 펼쳐 놓은 책을 읽듯이 읽고 계시다는 증거를 그에게 보이셨다. 유다는 자신의 품성이 묘사되고 죄가 지적된 것을 여러 번 인식하였지만, 그의 불의를 자복하거나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유다는 자부심이 강하였으며 유혹에 대항하는 대신에 부정한 행습을 계속 따랐다. 만일 유다가 성령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면, 산 모본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사랑의 성품과 무아의 희생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훈에 교훈이 주어졌지만 유다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다는 예수님을 공공연히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빛을 겉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 때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가 구주의 발에 기름을 부었을 때에 유다의 탐욕적인 기질은 숨길 수 없이 나타났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그는 원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상처받은 자존심과 복수심이 작동하여 그만 오랫동안 품고 있던 탐욕이 완전히 그를 지배하도록 자신을 내주고 말았다. 성령의 호소에 거듭 반역하고 나가는 정신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반역하는 정신이 크게 자리잡았다.
3. 유다의 야망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주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유다는 기분이 상했다. 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어느 가르침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을 믿었으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새 왕국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리라는 기대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업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께서 그분의 사역을 유다 자신의 계획과 구상대로 진행하시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면서 그분의 사업을 하시는 반면, 유다는 세속이고 인간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의 사업에 펴려고 하고 있었다. 한 예로, 유다는 침례 요한이 옥에서 구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구상을 해놓았지만 요한은 목베임을 당하도록 버려둔 바 되었고, 예수께서 당신의 왕권을 주장하고 요한의 죽음을 복수하는 대신 제자들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셔서 조용히 복음을 전파하시자, 그는 그 사실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유다는 보다 더 적극적인 투쟁을 원했다. 만일 예수께서 그의 계획을 막지 않으신다면 사업이 더욱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유다는 유대 지도자들이 적개심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요구할 때에 예수께서 그 도전에 임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았다. 왜 예수께서는 용기 있게 그들을 꺾어버리시지 않는가? 그의 마음에는 점점 불신과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왜 그분은 당신 자신과 제자들에게 시련과 박해에 대하여만 예언하시는가?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의 권세를 구하시지 않는가? 유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단정은 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 하시리라는 생각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배고픈 군중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고 유다는 이 일을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유다는 떡덩이의 이적으로 일어난 군중들의 열광을 이용하려고 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유다는 강제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강력하게 그 일을 무산시키셨고, 그의 희망이 컸기에 실망은 더 쓰라렸다. 생명의 떡에 관한 그리스도의 강론은 유다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구하시는 것이 세속적 유익과 권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은 아무런 명예도 갖지 못할 것이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 또한 세상의 높은 지위나 명예에서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2) 유다의 배반과 영원한 운명의 결정
그러나 유다는 아직 마음이 완전히 굳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두 번이나 구주를 배반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한 후에도 회개할 기회는 있었다. 유월절 만찬 때에 예수께서는 유다의 의도를 아신다는 사실을 알리심으로 그분의 신성을 증거하셨다. 예수께서는 친절하게도 당신을 배반하고 팔 유다의 발도 씻기셨다. 그러나 마지막 사랑의 호소는 무시되었다. 바로 그때 유다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예수께서 씻기셨던 그의 발은 그분을 팔기 위하여 나아갔다. 유다는 무모하게도 자기의 배반으로 어떤 것을 얻으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주님을 팔아도, 예전에 돌을 던지며 죽이려고 하던 유대인들로부터 여러 번 피하셨던 예수께서 능력과 지혜로 이번에도 분명히 빠져나가 잡히시지 않을 것이라고 유다는 생각했다. 또한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체포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어 있다면 결국 그렇게 될 것이며, 만일 예수께서 죽지 않도록 되어 있다면 이 일은 오히려 그분 자신을 구원하게 만들 것이니, 예수님을 파는 대가는 대가대로 챙길 수 있는 이 빈틈없는 거래야 말로 꽤 괜찮은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또한 유다의 배반에는 예수님에게 한 가지 교훈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왕국을 세우시려고 하지 않는 예수님의 지나친 겸손이 예수님의 부귀영달의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그런 것을 탈피하도록 만들어드리겠다는 의도였다.
유다는 그 문제를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예수께서 참으로 메시야라면, 백성들을 위해 그렇게 큰 일을 하신 예수를 유대 지도자들이 잡으려고 할 때에 백성들이 그 일을 저지하고 그분의 주위에 모여 들어 그분을 왕으로 선언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유다는 다윗의 보좌에 왕을 즉위시킨 공적을 인정받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이 일은 그로 하여금 새 왕국에서 그리스도 다음가는 높은 자리를 얻도록 해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의 얄팍한 변명과 약삭빠른 계산으로 스승을 배반하기 까지 이른 자신의 악한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사로 가장한 유다의 입맞춤은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잡으라는 신호가 되었고, 무장한 폭도들과 함께 등장한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나왔다. 그러나 사태는 유다의 상상과는 달랐다! 폭도들과 제사장들에게 순순히 잡히시도록 허락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다는 경악하고 말았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단단히 포박하는 자들을 바라보았고, 구주께서 자신을 끌어가도록 놔두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는 근심하면서 동산에서부터 재판정까지 그리스도를 따라갔는데, 그러면서 매순간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원수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모든 음모와 권세를 무색하게 하며 원수들을 놀라게 하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예수께서 당신에게 퍼붓는 모든 욕설을 묵묵히 참으시며 고문과 심문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유다는 무서운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재판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자 유다는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어 대제사장 앞으로 달려간다. “그는 무죄합니다. 오! 가야바여! 그를 살려 주소서!” 유다의 목쉰 음성이 갑자기 재판정을 울리고, 대제사장 앞에 예수를 판값으로 받은 은전을 내던지자 모든 사람들은 놀랐다.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부르짖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마 27:4)는 대제사장의 조소 섞인 대답만이 그의 귀를 울릴 뿐이었다. 유다는 이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면서 그분께 당신 자신을 구원하시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당신을 판 자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다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고, 그의 자복 역시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부인한 일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죄에 대한 공포와 장차 받을 심판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임을 아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죄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측은한 마음으로 유다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때를 위하여 세상에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자기의 간청이 헛된 줄 알고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고 부르짖으며 재판정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살아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 중에 나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얼마나 무서운 죄악의 결과인가! 오랜 시간 동안 역사해 오시던 성령님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무시하여 완전한 영적 흑암에 빠져버린 죄인의 얼마나 가련한 최후인가!
신앙 4부: 유다와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 연구해 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이르지 않게 하는 죄의 차이 IV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의 생애를 조명해 보며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이 두 죄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떻게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한 사람의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가 되고, 한 사람의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가 되는가? 그 차이는, 그 죄가 성령을 거스리는 죄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이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것은 “성령을 거스른 죄”라고 할 수 있다.
1. 성령을 거스른 죄 =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
성경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구절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말씀들이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3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막 3:2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막 12:31).
또한 사도 바울도 그 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그렇다면 성령을 거스리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 죄가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죄는 다르다. 그런데 성령을 거역하는 죄, 곧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므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 빠지는 데는 시간이 요한다. 즉 그 일은 단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인 과정을 밟다가 최종적인 결말에 이르게 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에 역사하시며 죄인을 책망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계속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호소를 거절하면, 그리하여 마지막 최후로 주어진 자비의 간청과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거절하므로 그 선을 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위하여 더 이상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지막 방편이 끝난 것이다. 이제 범죄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고 죄는 그 자체를 치유할 방법이 없어지며, 그 이상 더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이다. 그리하여 “버려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성령을 거역한 사람의 최후의 몫이 된다. 그 후에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 27).
2. 점진적이고 고의적인 거절
부연해서 다시 설명하면, 성령을 거역하는 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밟게 될 때, 다시 말해서 성령의 호소를 무시하고 그분의 음성에 굴복하는 일을 고의적으로 계속 거절할 때에,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강퍅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루신 일을 유대인들이 바알세불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간주했을 때에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람과 교통하시는데, 이 역사를 사단의 것이라고 고의로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과 하늘 사이의 통로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귀 들어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치시는 이적을 두 번째로 행하셨을 때에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마 9:34)는 비난을 되풀이한 바리새인들의 예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거듭 범하는 실례의 본보기가 된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이 마음속으로 자신들의 비난을 그대로 다 믿은 것은 아니었다. 구주께 마음이 끌리지 않은 성직자들은 없었고 모두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공식적으로 예수를 거절한 후에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들의 발을 이미 불신의 길에 들여놓았고 잘못을 자백하기에 그들은 너무 교만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점 진리를 피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맹렬히 반박하였고, 그들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그분의 능력과 이적에 대해 격노하였으며, 침묵시킬 수 없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자각시키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대적해야만 하였고, 매번 그들은 마음속에 속삭이시는 성령의 호소를 묵살시켜 버렸다. 인간의 마음에 감명을 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능력이 그들로 더불어 싸웠지만 그들은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죄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의 단적인 예가 되고 있다.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시정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빛을 보내신다. 그런데 눈이 멀고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이 빛을 거절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흔히 그 과정은 점진적이며 거의 알아챌 수 없이 행해진다. 빛이 하나님의 말씀과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혹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사람에게 임할때에 그 한줄기의 빛이라도 무시하면 영적 감각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어 두 번째에 나타나는 빛은 그만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영혼의 영적 암흑은 증가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지만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성령의 역사를 사단에게 돌리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거역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단에게 굴복하였으며 그 때 이후로 사단의 능력에 완전히 지배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와 함께 유다의 생애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 곧 성령을 거역하는 죄의 대표적 본보기가 되었다. 유다가 처음 예수님과 사귀었을 때에는 그는 주님의 사업에 축복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귀중한 품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유다가 기꺼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고 그분의 멍에를 메었다면 사도들 중에 수석의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결점이 지적당할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교만과 반항심을 품고 자신의 이기적인 야심의 길을 선택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사업에 자신을 부적합한 사람이 되게 했다. 예수께서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하늘의 빛을 주셨지만 유다는 빛 가운데 행하는 대신에 자신의 결함을 그대로 지니기로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악한 욕망, 교만과 탐심, 복수심과 지배욕 등, 죄악적인 생각이 마음속에서 자라나 마침내 사단이 그를 완전히 지배하기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유다는 그리스도의 원수의 대리자 대 반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3. 선택이 만드는 두 사람
지금까지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의 생애를 조명해 보면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에 대하여 연구해 보았다. 그 두 죄의 차이는 선택이 만든다. 유다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 빠지든가, 아니면 죄를 짓더라도 용서를 받으므로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되든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여 그의 생애를 반역의 길에서 돌이키든가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계속 반역의 길로 나가는가 하는 것은 유다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같은 생애를 사는가, 아니면 유다의 삶을 사는가의 차이는 우리의 선택이 만든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매일의 삶과 신앙생활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선택에 의하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다. 유다가 태어나든지 베드로가 태어나든 지의 차이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유다와 베드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다 있다. 차이는 성령의 호소에 계속 굴복하고 하나님의 편을 택하며 올바른 길로 가는가, 아니면 성령의 음성을 계속 거절하고 자아의 욕심대로 육신의 길을 고집하며 가는가 이다. 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이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호소하시지만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택할 수 있는 힘, 곧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여 매일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유다와 베드로 중 어떤 사람을 내 속에 만들어가는가 하는 것은 바로 이 선택에 달려 있고, 이 선택의 차이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매일 올바른 선택을 하므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생활이란 어떤 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로 사단의 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편을 택하는 것, 사단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승리하는 것이며, 이 일은 우리의 의지의 작용과 선택에 의하여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사랑의 편지: 마음 밭에 심겨진 것
꽃을 심는 사람들은 믿으며 심습니다.
씨앗이든 뿌리든 심으면 그것에서 예쁜 꽃이 피어날 것을…
보잘것없는 갈색 구근에서 빨간 튤립이 나오고
수염 난 거친 뿌리에서 새하얀 백합이 나올 것을…
꽃을 심는 사람들은 압니다.
그 뿌리를 심으면 그 꽃이 나온다는 것을…
저 뿌리는 저 꽃의 뿌리이기 때문에 저 꽃을 피울 것이고
이 뿌리는 이 꽃의 뿌리이기 때문에 이 꽃을 피울 것을…
씨앗이든 뿌리든 그 속에는 꽃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믿는 진실입니다.
마음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아는 진실이 있습니다.
마음에 심겨진 것이 꼭 밖으로 나온다는…
마음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믿는 진실이 있습니다.
마음에 심겨있지 않고는 절대 겉으로 나올 수 없다는…
아름다운 생각을 심으면 아름다운 말이 나오고
좋은 생각을 심으면 좋은 말이 나옵니다.
선한 생각을 심으면 선한 행동이 나오고
악한 생각을 심으면 악한 행동이 나옵니다.
사랑이 심겨진 마음에서만 사랑이 나오고
믿음이 심겨진 마음에서만 믿음이 나옵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에서 억지로 사랑이 나올 수 없고
믿음이 없는 마음에서 억지로 믿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생각은 미움의 싹을 틔우고
용서 못하는 마음은 원망의 뿌리를 퍼치며
욕심의 마음은 탐욕의 잡초를 내려
마음 밭이 온통 가시 밭이 되면
거두는 것은 쓴 엉겅퀴, 바람결에 날리는 독한 내음.
모든 생각은 가지고 있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모든 행동은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모든 말은 생각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눈빛은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뿌리에서 그 꽃이 나오는 것처럼
그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당신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당신의 마음 밭에는 어떤 생각들이 심겨져 있나요?
많은 사람들은
마음 밭을 바꾸지 않고
심긴 것을 파내지 않고
올라오는 싹과 줄기만 자꾸 잘라내려고 합니다.
밭이 변하고
심겨진 것이 변해야
나오는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당신의 마음 밭에 심겨진 것은 무엇인가요?
라이프 토크: 저항력, 면역 시스템이란?
면역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면역 시스템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잠시 살펴보자.
역 면 시스템(저항력)은 우리 몸의 저항력을 결정하는 시스템으로서, 두가지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는 몸 안으로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막 을으며, 둘째는 몸 안에 존재하거나 자라나는 불순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유지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는 이 더럽고 오염된 환경에서, 몸 안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는 것들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 할 수 있도록, 우리 몸에 튼튼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여 놓으셨다. 이 시스템은 가벼운 감기로부터 무서운 암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병에 대항하여 강력하고 성공적으로 저항 할 수 있는 방어망이다. 한 국가를 방어하는 국방부 안에 육군과 해군과 공군이 있듯이, 이 방어 시스템에도 5가지의 중요한 군대들이 있다. 예를 들면, B림프구, T림프구, 식세포, 살해 세포(Killer cell), 자연살해세포(NT세포)들이 있다. B림프구는 일반적인 감염과 싸우는 여러 가지 항체를 생성해 내지만, 나머지 4가지 면역 세포들은 암세포나 AIDS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몸 안에 병균이 침입하였거나, 암세포가 증식할 때에, 이러한 원수들과 강력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3x1014개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의 백혈구 방위군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들은 세균의 위급한 침입을 대비하여 24시간 비상 대기하고 있으며, 항상 6x1013개의 백혈구들의 숫자와 에너지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 증강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절한 물의 사용, 운동, 신선한 공기, 태양, 평화스러운 마음, 그리고 올바른 식사 등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의 방위 시스템은 기능이 너무도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각종 병에 걸리게 된다. 감기뿐만 아니라 암이나 AIDS 역시 면역 시스템이 약화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질병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방위부대를 강력한 정예부대로 만들 수 있을까?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로 이 문제가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면역 시스템은 신체의 각 부분과 밀접하게뒤섞여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 상태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스트레스가 우리의 저항력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콜로라도 대학의 스타우트 박사와 브룸 박사는 신경이 예민하고 긴장한 사람이 감기에 더 잘 걸리는 것을 알아내었다. 또한 잘알려진 것처럼, 스트레스는 콜레스테롤의 숫자를 증가시킨다. 또한 배우자를 잃어버려서 슬픔에 잠겨 있는 아내와 남편에게 있어서, 백혈구의 숫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발견하였다. 마음 속에 있는 죄책감은 슬픔과 유사한 결과를 나타낸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하나님과 분리됨을 느끼게 됨으로써, 우리의 면역 시스템의 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시편의 기자인 다윗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과학적인 간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악취가 나오니… 내 등이 심히 아프고 구부러졌으니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기력이 쇠하였으며,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시 38:3~10).
다윗은 범죄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면역 시스템을 저하시켰던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책감은 면역 시스템에 가장 부정적이면서 강력한 악영향을 주는 감정인 것이다.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면역 시스템의 기능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는 용서의 길을 열어주시고, 또한 죄를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면역 시스템과 저항력을 강화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이다. 회개한 다윗의 회복된 기쁨과 건강한 소리를 들어보라“.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8,12).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의학에 새로운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건강 정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용서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치료법을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최적의 건강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치료법은 신비가 아니라 너무도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치료법이다. 단순한 마음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죄를 고백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저항력의 회복을 놓치지 말자.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비결 13가지
라이프 토크: '뇌'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클라리넷을 멋지게 부는 백발의 노신사! 만일 사람들이 악기를 부는 노인을 본다면 ‘나도 저렇게 멋진 노년을 보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런 멋진 노인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에모리대 신경학과 “브렌다 한나 플래디” 박사팀은 학술지 “신경심리학” 최근호에, 악기를 다룰 줄 알거나 노래를 자주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인지능력이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또 공간에 대한 기억력, 사물의 이름을 맞추는 것, 새로운 정보에 대한 대처 능력 등이 모두 뛰어 났다고 발표했다. 소리의 파동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와 귓속의 고막을 두드리는 순간 인간의 뇌는 그 음악 소리와 만날 준비를 한다. 이런 과정은 뇌의 어느 특정 부분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다. 음악듣기, 악기연주 등, 음악이나 소리에 관련된 모든 활동은 전두엽을 비롯해, 청각과 기억에 관여하는 측두엽, 근육운동과 공간감각에 관여하는 두정엽, 시각에 관여하는 후두엽, 정서와 운동계획에 관여하는 소뇌에 이르기까지 뇌 전체 에서 일어난다.
뇌가 좋아하는 소리
목소리도 근육을 사용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웃을 때와 울 때 사용하는 근육의 쓰임새가 다르다. 크고 시원하게 웃고 나면 목 안이 편해지고 목소리가 더 맑아진다. 몸뿐 아니라 뇌도 웃는 목소리를 좋아한다. 뇌는 불평이나 험담하는 목소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뇌의 자율신경계는‘누가’라는 주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이“. A씨는 건방지다”라고 험담을 한다면, 당신의 자율신경계는‘건방지다’라는 말에만 반응해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착각한다. 그 결과 뇌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는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우리 뇌는 자신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반대로 우리 뇌를 작용시켜 보자“. A씨는 친절하다”라고 칭찬을 한다면, 당신의 자율신경계는‘친절하다’라는 말에만 반응해, 자기 자신이 칭찬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어 행복해 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상대방을 칭찬해서 좋고, 자신이 행복해 져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뇌는 좋은 소리를 좋아한다.
뇌가 좋아하는 음악
우리가 노래를 들을 때나 부를 때 뇌는 좋아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뇌에서 행복감을 증진시켜주는 도파민의 분비가 늘어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캐나다 몬트리올“맥길”대학교“바로리 사림푸어”박사팀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온몸이 짜릿해질 정도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선조체”(striatum)라는 뇌 부분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등 신체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감정이 자극되어 도파민이 증가되는 것”이라며 “음악은 뇌의 보상반응을 이끌어 내는 신경화합물질과 연관이 되어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짜릿한 감동과 기쁨을 느낀다. 그 때에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이라는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그렇게 되는 기전은 바로 우리 뇌가 아름다운 소리와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매일 찬송을 부르고 매일 좋은 말을 하자! 그러면 우리 뇌가 좋아할 뿐 아니라 몸까지 건강해질 수 있다. 또한 그 찬송을 듣는 주위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