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T발, 너 C야?” 공감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젊은 사람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면박을 줄 때 하는 말이란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M.P.T.I 궁합이라는 게 있다. 자신에게 처음부터 성격적으로 어울리는 사람과 사귀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지난번 측정 때는 ESFJ더니 오늘은 ISTJ란다. 어찌 측정 결과가 이렇게 다른 것인가? 설문에 따라서 자기도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겠는가? 마음을 어디다 묶어 놓지 않은 이상 오늘은 이것을 선택했다가 내일은 저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한번 재미로 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마치 변하지 않는 운명인 것처럼 믿음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전통 의학에는 사상의학이라는 게 있다. 이 사상의학은 인간을 사상, 곧 태양(太陽)·태음(太陰)·소양(少陽)·소음(少陰)으로 분류하여 이를 체질에 결부시켜 태양인·태음인·소양인·소음인으로 구분하였다. 그래서 태양인에게는 뭐가 맞고 뭐는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음식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이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 사람마다 체질이라는 게 있어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려면 그 체질에 맞춰서 조심해서 먹고 마시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마치 불변의 무엇인 것처럼, 운명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의 성격도, 체질도 변할 수 있고 또한 변한다. 성경을 벗어난 종교의 특징은 주로 운명론적이다. 미신도, 샤머니즘도 마찬가지다. 타고났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타고났으니 너는 평생을 조심하고 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세포는 변하고 달라진다. 음식도 우리 장내 미생물들에 의해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성격, 체질 운운하면서 계속 그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점점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상태로 고정되고 만다. 사람은 바라보는 대로 변화된다. 비록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그런 특별한 체질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노력하면 체질도 변하고 성격도 변할 수 있다.
사탄은 우리에게 운명을 믿게 하고 자신이 타고난 본성에 젖어 살도록 유혹한다. 자신의 감정과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판단이나 양심 같은 걸 표준으로 삼도록 재촉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자신 이상으로 향상할 수 없도록 묶어두게 된다. “너 자신을 믿어 봐! 너는 네 감정에 충실하기만 하면 돼!” 이렇게 말하면서 응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재의 상태에 매여서 머무르도록 계획하지 않고 더 높고 나은 이상으로 부르신다. 우리는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람의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매일 선택하는 선택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가 오늘 더 나은 것을 선택한다면 내일은 좀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며 요청한다면 성령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돕기 위하여 은혜의 조력자로 우리 곁에서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운명론 따위에 휘둘리지 마라. 우리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은 귀한 존재들이다. 성경은 말합니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 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아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타고난 성정, 체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 새로운 변화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의 속사람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믿고 순종하오니 오늘도 새롭게 하소서. 전적으로 주님의 신뢰함으로 오는 참된 평화 우리에게 가득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