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영천시장 앞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 2층. 열 평 남짓한 강대건치과의 문을 두드렸다. 올해 81세의 강대건 원장은 40년 넘게 이곳에서 환자를 받고 있다.
“환자요? 보지요. 제 친구들 중에는 이제 개업한 사람들도 있는데요? 틀니처럼 젊은 의사들이 하지 않는 영역, 그건 지금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고 있어요.”
지난여름까지 강대건 원장은 이곳 치과의 문을 열 새가 없었다. 전국으로 진료를 다니기 바빴기 때문이다. 49세에 한센인을 위한 무료 봉사를 시작, 그 생활을 30년 넘게 지속해온 그는 지난 9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십자가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뒤늦게 알려진 선행과 언론의 주목은 그의 관심 밖이다. 조용히 봉사하다 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는 반평생 가까이를 한센인과 함께했다.
우연히 시작한 봉사, 반평생 이어지다
“저도 한센병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그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알게 된 것이죠. 착하게 살라는 건 말로만 배웠지 실제 피부로 와 닿게 배운 적은 없었거든요.”
그가 한센인을 위한 봉사를 처음 시작한 건 1979년. 치과 동료들을 멋모르고 따라 나선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50세가 다 되었을 때 봉사를 시작했어요. 그때는 치과 의사가 환갑이면 상노인이라는 게 통념이었어요. 60세만 되면 치과 의사는 개업을 접고 죽는 날만 기다리는 시대였다고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60세가 돼도 끄떡없고 70세가 돼도 괜찮고 80세가 돼도 안 죽어서 지금까지 하게 된 거지요. 애초에 계획적으로 언제까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게 아니고, 열심히 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당시로 치면 의사 인생 말년에 시작한 봉사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한편으론 개인적인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기도 했다.
“종교계에서는 흔히 죄인이라고 하잖아요. 죄 많은 인생을 마지막 10년 동안 열심히 살고 저세상 가고 싶었어요. 절대자 앞에서 떳떳이 살다 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한센인, 그러니까 손과 발이 썩어 문드러지는 나병 환자들과 접촉하는 일이 잦은 만큼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당시 한센인에 대한 인식이 지금 같지 않았다는 걸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 시대는 아무도 한센인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특히 치과는 일반인도 치료를 받기가 어려웠어요. 이가 아파도 그저 약방에 가서 진통제 사 자시고 하던 그런 시대였다고요. 돈이 많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한센인은요, 6·25전쟁 전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는 ‘젊은 양반이라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며 한센인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전혀 다름을 누차 강조했다. 당시 그가 두 눈으로 목격한 한센인들의 삶이란 그토록 처절했다.
“6·25전쟁 전에는 한센인들이 문전걸식을 하며 살았어요. 전쟁 끝나고는 한센인끼리 모여 살며 밥을 얻어먹었지요. 그 양반들이 육체가 성한 사람이 아니니까 노동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닭이나 돼지, 소를 키우면서 목축업으로 겨우겨우 끼니를 때웠죠. 나는 그 시대에 봉사를 했다고요. 요즘은 점잖은 말로 한센인이라고 합니다만 조금 더 앞선 시대에는 ‘문둥이’라고 했어요. 문둥이라고 하면 가장 더럽고 전염시킬 수 있는 환자라는 말이죠. 문둥이가 옆 동네에 산다고 하면 반대하고 일어났거든요. 그래서 도시 구석구석으로 전부 떼밀려갔지요. 요즘은 30년 전하고는 세상이 다릅니다. 지금은 의료보험이 돼서 나환자가 이가 빠졌다고 하면 ‘너는 어느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라’ 하고 보건소에서 돈을 줍니다. 그 정도로 (나라가) 부자가 됐어요.”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그가 처음 봉사를 간 곳은 경기도 포천의 한 정착촌이었다. 그는 그때 자신이 얼마나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센인들을 진료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거(두려움)는요, 말로 설명 못합니다. 처음 진료할 때만 해도 이 뽑아주는 것만 했습니다. 그때는 그 양반들이 이 뽑을 데가 없어서 못 뽑고 있었어요. 아무도 안 해주니까요. 처음엔 두려웠죠. 발치하면 피가 나잖아요. 고무장갑을 끼는데도 걱정이 됐어요. 음성 환자는 전염이 안 되지만 양성 환자는 언제든지 전염될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만둬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은 늘 있었죠. 해야 된다, 말아야 된다 하면서 노상 왔다 갔다 했어요.”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이어나갔다.
“봉사가 ‘고민과 땀의 결정체’라 합디다. 가만 생각해보면 참말로 맞아요. 이 두 가지 생각을 두고 할 건지 말 건지 고민하면서 봉사했어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나를 속이는 거죠. 어디 그뿐입니까? 정착촌에 가면 그 양반들(한센인)이랑 하루를 꼬박 지낸다고요. 그럼 고민이 없을 수가 없지요.”
기차를 타고 저 멀리 전라도, 경상도 정착촌으로 진료를 갈 때마다 이 같은 고민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특히 아내와 네 딸이 눈에 밟혔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내 죽을 때까지 못 갚아요. 부모와 자식이 놀러 다니는 게 가족 아닙니까. 근데 주말은 자기네끼리 놀게 놔두고 나는 봉사를 하러 갔어요.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날 때마다 가장으로서의 임무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항시 중압감에 시달렸어요. 그런 고민과 땀의 결정체가 봉사지요. 장난삼아 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참말로 내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한센인들을 찾아갔지만 고민은 이내 사라졌다.
“그곳에 가면 나나 저 사람이나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저 사람은 한센인이 됐고 나는 안 됐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사람은 운이 없고 재수가 없어서 한센인이 됐겠지? 그럼 멀쩡한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줘야지 하는 사명감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명감이 모든 고민을 덮어버렸어요.”
그렇게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치료한 한센인이 무려 1만5천 명, 틀니만 약 5천 개를 해주었다. 진료는 무료, 틀니는 재료값만 받았다.
“진료를 보다보면 줄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어요. 어떤 때는 점심도 안 먹고 한다니까요. 나중에는 한센인 수가 줄어들어 직접 찾아다니면서 진료를 봤어요. 지금은 1년에 환자 발생률이 전국적으로 7명, 많아야 채 10명이 안 되거든요. 이젠 한센병도 희귀병이죠.”
자동차가 없는 그는 수십 년째 기차로 진료를 보러 다녔다. 이제는 연로한 탓에 거동이 쉽지 않다. 지난해 봉사를 접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젠 나이가 들었잖아요? 그만둘 때가 됐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12년에 끝냈어요. 서운하지요. 서운합니다.”
한센인 환자들과의 추억
강대건 원장에게 한센인은 환자 이상, 아니 친구에 가깝다. 10년 이상 방문한 정착촌도 있다니 환자와의 유대가 얼마나 깊었을지 가늠이 간다. 한센인의 삶 깊숙이까지 들어간 만큼 누구보다 그들의 삶을 잘 알고 있는 것도 그다.
“나병이라는 건 손이 오그라들고 팔이 굽고 눈썹이 없어져요. 눈썹이 빠지니까 미모 이식 수술을 합니다. 머리털을 눈썹 부위에 이식하는 거지요. 우리는 눈썹이 안 자라잖아요? 한센인은 머리카락을 이식했기 때문에 눈썹이 자랍니다. 그럼 가끔 가다 잘라줘요. 그 정도로 한센인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만날 보고 이야기하니까요. 봉사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에요.”
책으로 쓰면 소설 한 권은 족히 된다며, 그는 기록으로 남겨두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를 묻자, 한센인 남자와 결혼한 일반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경상도, 전라도에 나환자가 많아요. 따뜻한 남쪽으로 갈수록 한센인이 많거든요. 한번은 전라도에서 진료를 보는데, 60세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를 만났어요. 근데 경상도 말을 합디다. 내가 경상도 말 들으면 한 번에 알거든요? 알고 보니 경상도 포항 사람인데 그곳 영암에 와 있더라고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더니 전라도에 시집을 왔다는 거예요. 본인한테 바로 묻기는 그렇고 접수받는 현지 사람한테 슬쩍 물어봤어요. 저 사람이 나환자입니까, 아닙니까. 근데 아니래요. 보니까 남자는 한센인이고 여자는 아니었어요.”
알고 보니 중매인의 거짓말에 속아 시집을 온 여성이라고 했다. 그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진료를 하루 이틀 더 끌었다.
“(한센인에게 시집온 후에) 얼마나 애를 태웠겠어요.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었더니 중매인에게 속아 왔대요. 일단 결혼시키면 같이 살 수밖에 없다고요. 물론 헤어질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근데 자식 낳고 하니까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가까이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한센인의 삶. 그런 면에서 그는 이젠 죽고 없는 많은 한센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한다.
“소록도 나환자촌에서는 남자들에게 정관 수술을 시킵니다. 자식들까지 살기 어려우면 안 되니까요. 근데 그 정관 수술을 하기 싫어서 섬에서 탈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을 격리시키면 절대 전염되지 않아요. 근데 귀엽다, 귀엽다 하면서 손도 만지고 목욕도 시켜주고 상처 난 곳 치료도 해주다보면 병에 걸린다고요. 자기 자식인데 그렇게 안 하겠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도리 아닙니까. 그래서 안양 라자로마을에서는 한센인이 자식을 낳으면 미국에 입양시킵니다. 그런 자식들이 미국 가서 출세해서 온다고요. 그렇게 출세한 자식이 부모 보러 한국에 찾아와 만난 경우도 나는 봤습니다. 무궁무진한 그들의 삶을 봤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일기로 적지 못한 대신 손때 묻은 진료기록부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가 보여준 기록부에는 한센인들의 신상 명세부터 정확한 날짜와 치아 상태까지, 꼼꼼히 적혀 있다. 강대건 원장의 30여 년 봉사의 흔적을 담은 낡은 종잇장이다.
“내가 죽으면 치과의 발전사를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치과 박물관에 갖다주려고 열심히 적어놨지요. 내가 이제 발음은 제대로 못하지만 (한센인들의 이야기는) 하루 종일 이야기하라고 해도 합니다. 내 체험이고 경험이기 때문에 숨김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거라고요.”
한센인들에게 강 원장은 가족 같은 존재다. 그의 도움을 받은 한센인들은 멀리 있어 보지는 못하지만 애써 일군 농작물로 마음을 대신한다.
“주로 전라도 익산에 있는 정착촌에 가곤 했는데 지금도 익산에서 가을만 되면 감자라든지 고구마, 옥수수 같은 걸 택배로 보내줘요. 물질은 물질대로 받아서 좋은 것이고, 가끔씩 전화로 안부를 물어보면 굉장히 흐뭇하죠. 틀니를 해줘서 고맙게 음식을 먹고 산다, 이런 얘기를 해주면 얼마나 좋은지요. 치과 의사에게 그 이상의 고마움은 없어요. 저한테는 돈보다도 더 좋은 이야기예요. 그 고마움을 먹고 살았다고요. 그런 흐뭇한 이야기들로 고민들을 상쇄했어요. 아무리 해도 아깝지 않았어요. 그것이 사명감이죠.”
올해로 여든한 살, 그의 주름진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더 이상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한센인을 찾기 힘들 만큼 시대가 변했고, 그의 두 발이 기차로 몇 시간을 왕복하기에 버거울 만큼 나이가 들었다. 이젠 서대문의 작은 치과 진료실만이 그의 유일한 치료 공간으로 남았다.
“상을 준 사람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나는 상이 필요 없어요. 상은 하늘에 가서 받으려고요. 소록도에 봉사 왔다가 말없이 가는 독일 수녀같이, 말없이 하고 가는 것이 저한테는 훨씬 좋아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제가 원하는 바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