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駱山) 아래 소용동(所用洞)에 과부 안씨가 살았다. 집에서 염불을 하며 채식만 하고 늘 흰 승복을 입고 풀로 엮은 둥근 모자를 쓰고 지냈다. 나이 육십이 넘어 죽었는데, 자녀는 없고 조카가 있어 그 집에서 살았다.
몇 년이 지나 마루에서 사람 소리가 나서 조카가 나가보니, 안씨가 흰 승복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온 집안 사람들이 당황해하며 늘어서서 절을 올리자 귀신은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청했다.
그 집에서 성찬을 차려 올리니, 상에 가득한 음식을 잠깐 사이에 다 비우고, 또 음식을 청하기에 다시 갖추어 대접했다. 이와 같이 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어느 날 귀신이 말했다.
바야흐로 봄철이라 두견화가 산에 가득하여 참으로 좋으니, 떡을 만들어 먹고 싶구나.
그 집에서는 기름을 사서 전을 부쳐 몇 그릇 가득히 올렸는데 이를 또 다 비우는 것이었다. 이로 부터 날마다 진기한 음식과 색다른 맛을 요구했는데, 갖추어 올리면 한 번에 다 먹어 치웠고, 주지 않으면 당장 화를 내어 괴이한 짓을 벌였다.
어린 남종을 때리기도 하고 자식들에게도 해가 미치니 그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재물이 다 떨어지면 음식을 계속 바치기가 어려워질 것을 걱정해 은밀히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살기로 의논했다.
그런데 귀신이 말했다.
"주인, 지금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나 역시 따라 가려네."
그리하여 결국 그 계획을 그만두고 말았다.
안씨 귀신이 말했다.
"내가 여기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주인을 많이 괴롭혔다.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니 원컨데 술과 음식을 넉넉히 갖추어서 동소문 밖 커다란 소나무 아래 개울물 흐르는 곳에서 나를 전별해 다오."
주인은 몹씨 기뻐하며 재물을 전당 잡혀 전별 음식을 장만하고, 동소문 밖 산수가 정결한 곳에서 이바지하였다.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기에 집안 사람들이 서로 축하했다.
그런데 십여 일이 지나 홀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종이 나가 보니 한 사내가 있었는데, 검은 얼굴에 수염이 많이 났으며 머리에는 흰 대나무 모자를 쓰고 새끼줄로 갓끈을 매고 있었다.
그가 절을 하고 말했다.
사장(舍長) 안씨가 오셨다.
얼마 안 있어 흰 승복에 둥근 모자를 쓴 안씨 귀신이 웃으며 들어와 대청에 앉았다. 그 밖에 봉두난발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은 남녀 귀신들이 대청과 뜰을 가득 채웠다.
이들은 밥과 고기를 달라며 떠들썩하게 재앙을 일으켰다.
그릇을 부수고 사람들을 구타하며 온 집안에 놓아 두고 쓰는 물자와 상자에 쌓아 놓았던 것을 휩쓸어 가 남은 것이 없었다.
쇠똥과 말똥이 방과 창문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거처할 수가 없었다.
온 집안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 달아나 피했지만, 가는 곳마다 따라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몇 년 사이에 죽는 자가 계속 이어져 낙산 아래의 집은 텅 비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