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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밥으로 되게 유명해진 회사가 있습니다. 송정훈 씨가 대표로 있는 유타 컵이라는 회사예요.
이 회사에서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면접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게 가장 중요한 이 회사의 면접 질문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직원으로 뽑는다고 합니다. 학벌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뽑았더니 더 열심히 일을 하고 더 선한 영향력을 끼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신입사원을 면접할 때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행복하십니까? 행여나 이 행복을 잊어버렸다면 다시 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라 모습이라는 찬양단이 부른 찬양곡 중에 주의 사랑을 입으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 영상 초반에 이런 글이 있어요. 오늘 예배 전 긴 대기 시간에 계속 그 찬양을 틀어놨었는데 영상 초반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주님의 옷깃에 손을 대는 믿음만으로 해결되었던 것처럼, 우리를 가로막는 어떠한 문제일지라도 사랑의 주님께서 마침내 평안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영상 끝부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따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누가복음 7장 40 8장 48절 말씀도 함께 기록돼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 찬양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됐어요. 그래서 계속 목양실에 있으면서 찬양을 틀어 놓고 찬양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하고 또 감정적인 힘든 것들도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면서 좀 옛 생각이 나더라고요. 오늘은 저의 옛날 이야기를 하더라도 용서하시고 들으십시오.
제 옛 이야기는 대부분 축축하고 어두컴컴 이런 거예요. 그래도 제 삶의 일부니까 대학 시절 목요일 저녁은 저에게는 위로의 날이었습니다. 목요일마다 열리는 경배와 찬양 집회에 매주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긴 시간을 두고 보면 대학 시절은 저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어요. 가장 포기도 많았던 시간이기도 하고 또 가장 좌절이 많았던 시간이기도 했어요.
사람이 포기가 많고 좌절이 많으면 좀 위로가 필요하잖아요. 근데 이 위로를 친구들이나 사람들에게 받는 건 되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 목요 찬양 집회에 거의 매일 참석했습니다. 이 시절 저를 위로했던 것은 찬양과 기도였습니다.
사역과 공부로 인해서 이게 목요 찬양 집회를 참석하지 못하게 됐을 때는 가세 테이프를 다 구입해서 정말 그게 따라서 뜯어져서 또 새롭게 구입해야 할 만큼 계속해서 찬양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찬양을 듣고 이렇게 차를 몰고 가다 보면 이게 위로가 임해서 운전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 차를 안전한 곳에 세우고 제가 여러 번 텅텅 운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소리를 제가 들은 건 아니지만 찬양이 저에게 흥 위로가 되었고, 많은 상처로 인해서 공허해하는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렇게 위로받고 다시 평안을 찾으면 또 사역의 현장으로 가고 그래서 열심히 사역했던 기억이 납니다.
만약에 이때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으면 없었더라면 저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을 거예요. 이때 하나님의 이루가 저에게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열등감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다면 지금의 평안 만약에 제가 불안한 존재이긴 하지만 목회자로서 그래도 목회와 사역을 만약에 안정적으로 하는 영역이 있다면 그때의 위로 때문일 것입니다. 위로가 저에게 평안을 줬고, 이 평안이 저를 어느 정도 안정하게 했던 겁니다.
저는 친구들, 선후배들로부터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괴롭힘의 결과 제 내면에는 아주 강한 분노와 그리고 큰 슬픔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만약에 지금 제 안에 정의로운 모습이 조금 보인다면 신념이나 신앙 때문에 정의롭기도 하지만 그때의 분노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외면당하는 이 상처는 사람으로부터 위로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다가 서로 상처받고 받고 서로 상처를 주게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한 많은 상처들은 사람이 치료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모여서 아이고 상처 때문에 힘드시죠 이렇게 하다가 잘못하다 보면 더 상처를 주고 더 상처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이 저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는 찬양 가운데 큰 위로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찬양의 힘을 믿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도 어쨌든 이 찬양적인 부분에 있어서 좋은 퀄리티를 가지려고 나름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기도하려고 하고 여러분에게 기도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찬양 중에 위로와 기도 중에 위로가 상처로 깨어졌던 저의 내면의 평안을 조금씩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는 하늘로부터 임하은 위로의 크기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교회는 오고 예배 때마다 위로받길 원하지만 아직 우리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강력한 위로를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좀 더 예배에 그리고 좀 더 찬양에 좀 더 기도에 그리고 좀 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 많이 집중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으면 위로를 경험하기 어려워요. 제가 경험한 위로는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이 극대화되었을 때 강력하게 임한 것을 경험했어요.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이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없고, 예배하려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그분의 위로가 임하는 것은 정말 은혜인 거고 그런 위로는 우리가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이루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께 집중되었을 때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근데 이 위로는 사람에게 받을 수 없어요. 받다가 오히려 상처가 되고 받다가 오히려 아픔이래요. 그럼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위로받으려면 이 하나님께 좀 더 집중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을 예배한 일에 하나님께 기도한 일에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교회와 사역에 우리가 좀 더 집중해야 하늘로부터 임하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임한 평화는 여러분의 삶에 깨어진 평안을 회복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평안은 여러분 인생의 그림자들을 하나하나 몰아낼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그림자들이 참 많이 있어요. 이 그림자가 내 인생을 자꾸 어둡게 하는 거예요.
내가 힘든 삶을 경험하고 그 인생의 그림자를 갖게 되고 이 인생의 그림자가 많아지면 내 삶 자체가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돼요.
그런데 이 인생의 그림자 어두운 이 그림자들은 오직 하늘로부터 임한 평안을 통해서 우리가 몰아낼 수 있다는 거예요. 이 하늘로부터 임한 평안이 나의 근심을 몰아내고 나의 걱정을 몰아내고 나의 아픔을 몰아내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림자를 하나씩 다 쫓아낼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혈루증으로 삶의 평안이 깨어진 여인이 있습니다. 혈루증으로 인해서 일상에 삶의 일상이 완전히 깨워졌어요. 가족과의 관계도 깨워졌고요. 공동체로부터도 쫓겨났을 거고요. 일상도 전혀 누릴 수 없어요.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도 할 수 없었던 여인이었어요.
이런 상태를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받았다 이렇게 말해요. 우리가 육체가 사망 선고도 받지만 우리가 관계 사망 선고가 있어요. 관계가 다 끊어지면 곧 관계 사망 선고를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사회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사망 선고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살아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모든 것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을 그리고 평안히 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이 여인의 삶 어디에도 평화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평화는 안정이 되어야 누리게 되는 감정이에요. 혈루증을 앓은 기간도 12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혈루증 때문에 병 낫기를 구하고 또 실패하고 구하고 실패하기를 너무 오랫동안 해서 이 여인의 절망도 완전히 고착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 여인은 어떤 사고를 해도 아마 절망적인 사고를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26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 같이 읽습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자신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의사들로부터 오히려 고통을 당했어요. 그 결과 육체적인 고통은 점점 더해졌고 경제적인 고통까지 추가되었던 거예요. 심지어 상태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 희망이 사라졌고 희망이 사라진 것으로 인해서 이 여인의 평안도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물질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지더라고요. 상태가 악화되면 절망도 더 커져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상태도 점점 악화되었죠. 물질도 다 사라져 버렸죠. 그래서 완전히 평안히 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럴 때 평안이 다 깨어진 상태일 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요. 다시 없던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더 간절한 존재였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이제 희망할 수 없는 시점이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더 간절한 존재였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여인이 간절하다고 해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가까이 갈 수 있었냐 그것도 아니었어요. 너무 많은 무리가 예수님 주변에 있어서 여인이 가까이 갈 수 없고 그래 가서 자기의 상황을 다 말할 수도 없었어요. 예수님 저는 이런 뻑뻑한 여인이에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예요. 너무 사람이 많아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또 나의 상태를 말해야 예수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잖아요. 그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그래서 이 여인이 마지막 생각을 했어요. 혹시라도 내가 사람들의 사이를 뒤집고 손을 펼쳐서 예수님 옷자락에 손만 닿으면 혹 내 병이 낫지 않을까? 다른 그런 희망으로 많은 사람들을 겨우겨우 뒤집어서 손을 내밀고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혈루증이 즉시 멈췄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빠져나가 그녀의 혈루증을 고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이 임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혈루증으로 인해서 평안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두려워 떨며 떠는 떨며 예수님 앞에 서 있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따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근데 여기에 보면 그냥 보면 아무렇지 않은데 좀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게 있어요. 내 병이 나았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평안해졌다. 내가 너를 구원했으니 이제 평안히 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말씀을 근거로 봤을 때 이 여인은 자신의 질병 때문에 자신의 상태 때문에 엄청나게 불안해했던 여인으로 보여요. 그러니까 상처가 회복이 되지 않고 이제 광제로 사망 선고를 받고 이제 의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모든 재물을 다 잃게 되면서부터 이 여인은 불황이 점점 더 가중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병이 나은 이 여인을 보고 평안히 가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병이 이 여인의 평안을 깬 거예요. 삶의 어려움들, 삶의 고통들이 이 여인의 평안을 꿰뚠 것입니다. 질병으로 인해서 영적인 영역에서 불편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 불편해하던 것이 평안을 깨던 것이 주인의 삶도 동일하게 문제였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눈에 이 여인의 내면이 보였던 거죠. 피가 멈춰지지 않는 질병도 보였지만 평안히 깨어진 이 여인의 내면도 예수님이 보신 거예요. 그래서 이 여인에 대해서 평안히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도 죄를 지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에게도 평안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도 동일하게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장 37절에 등장하는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수식어가 있어요. 죄를 지은 여인 다른 번역 성경에 보면 더러운 죄를 지은 여인, 더러운 여인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죄로 인해서 평안히 깨어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평안을 깬 것은 죄였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여인의 죄가 평안을 깼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죄가 뭔지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지 않았지만 유추할 수 있어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50데나로인과 데나로리온과 50 데나리온 빚진 자를 비교해요.
근데 이 비교회의 분위기상 500데나리온 빚진 자가 이 여인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인의 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우리가 죄에 대한 제목은 없지만 비유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봤을 때는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죄가 심각한 죄가 이 여인의 삶의 평안을 깨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아셔야 할 것은 죄는 우리의 평안을 뗍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를 불안한 존재로 만들어요. 죄가 많을수록 더 큰 죄를 지을수록 우리는 더 불안한 존재가 되고 더 혼란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 여러분의 저의 삶에 큰 문제가 없는데 평안히 깨어졌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삶 어딘가에는 반드시 죄가 자리잡고 있을 거예요. 만약 우리가 정상적이라면 이 예배를 드리면서 평안을 누려야 정상적인 것이고, 우리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우리가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정상이에요.
근데 이 평안이 깨워져 있다면 내 삶의 어느 공간에는 내가 죄를 지은 범죄한 우리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잘못된 감정을 만들고 그 감정으로 사람들은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죄로 인해서 평안히 깨어져서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 대해서 평안히 가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두 사건을 통해 비교했을 때 평화는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평화는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거예요. 평안이라는 단어가 에렌이라는 단어인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의 수준보다는 훨씬 더 높은 상태의 평안을 의미해요. 평안히 가라고 했을 때 그냥 조금 여유 있게 마음을 먹고 살아라 이런 개념이 아니라는 거예요. 니가 평안해져라라고 했을 때 니가 마음이 좀 느슨해지고 불안해지 않아라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에덴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냐 하면 나라 안에 한 국가 안에 전쟁과 다툼이 없는 걸 말해요.
여러분 이런 나라를 보셨나요?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죠. 저도 이 나라에 태어나서 50년이 넘었는데 한 번도 이 나라가 그런 적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하는 이 평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평안이에요. 그래서 이 평안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되면 영원히 위로를 받게 되고 삶이 샘을 얻게 되고 새로운 목표를 발견하게 되는 거 이게 힘이 있기 때문에 에렌에는 그냥 힘 없는 평안 힘 없는 만족 힘없는 뭔가가 아니에요. 힘이 있는 아주 강력한. 그래서 이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면 공동체가 회복이 되고 삶이 회복이 되고 가정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전에 어떤 상처가 있었든지 이전에 어떤 아픔이 있었든지 이전에 어떤 괴로움이 있었든지 평안할 수 있다는 거예요. 기억나지 않는 평안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는 거예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평안히 깨워지셨습니까? 저처럼 과거의 아픔 때문에 혹시 평안히 깨워진 채로 너무 오래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무엇 때문에 평안히 깨워지셨습니까? 질병 때문이십니까? 물질 때문입니까? 자녀 때문입니까? 아니면 오랫동안 여러분의 삶에 머물고 있는 잘못된 감정 때문에 여러분의 평안이 깨지셨습니까? 아니면 혹 죄 때문은 아니신가요?
평안이 없다는 건 평안이 없다는 건 이런 것들 중에 하나가 지금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깨어진 평화는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인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온전해지고 다시 진실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평안이 이 공동체와 여러분의 삶에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간절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해요. 그리고 이 온전한 관계 속에만 우리가 평안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뜨거운 찬양, 뜨거운 예배가 평안을 경험케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관계가 온전해지고 예배가 온전해져야 참 평화를 누리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평안 하려고 교회를 와요. 우리 행복하려고 교회를 와요. 정작 우리가 평안과 이 행복한 감정을 못 누리고 갈 때가 많아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지금 온전하지 않기 때문인 겁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이 연결고리인 수도관이 깨끗할 때 여러분 저도 혈압약을 먹어요. 혈관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혈압이 좀 높게 올 때도 있고 안정될 때도 있고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혈관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인 거예요. 언제든지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저인 거죠.
근데 혈관이 깨끗해야 피가 잘 통해요. 온몸이 건강해질 수 있는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온전해지지 않으면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가 어려워요. 정말 평안을 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간절함인 거예요.
그러니까 간절함이 하나님과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요. 따라 하겠습니다.
간절함이 온전하게 만듭니다.
할렐루야 내가 예배에 대한 간절함이 있으면 하나님 예배를 통해서 나를 온전케 하시고 온전케 된 나에게 평안을 주시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면 하나님이 나를 온전케 하시고 내가 상처 때문이든 내가 아픔 때문이든 내가 어려움 때문에 경험하고 있는 삶의 불안들을 하나님의 평안으로 다 몰아내어주시는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간절함이 여인에게 평안을 선물했습니다. 더러운 죄를 지은 여인의 간절함이 죄로 잃어버렸던 평안을 다시 찾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세상에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의 평안은 아주 강력한 거예요. 어디 가서 며칠 쉰다고 주어진 평안이 하나님의 평안이 아니라는 거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사람과 어울려서 얻는 그런 평안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평안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평화는 절망을 하찮은 것으로 보이게 하기도 하고요. 하나님의 평화는 슬픔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도 하고요. 하나님의 평안, 내 마음에 잘못된 감정들을 다 듣고도 남을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수십 년 받은 상처들을 다 덮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는 평안인 거예요. 이 평안이 날마다 이 제단 위에 내려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해지는 것,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왜 찬양을 집중해야 되느냐 찬양을 통해서 온전케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셔요. 우리가 예배를 왜 더 잘 드려야 되냐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셔요. 우리가 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고 간절히 해야 되느냐 이 기도를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또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인 겁니다. 우리가 왜 열심히 죄를 회개해야 되느냐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죄사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목장 교회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이 여러분과 저와 성도의 교재 안에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 평안을 다시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다 보면 수많은 슬픔들이 닥쳐와요. 이 슬픔을 우리가 어떻게 이겨낼까요? 우리가 말로 되게 도움으로 조금조금씩 위로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인 슬픔은 하나님 외에 위로하실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안을 빼앗는 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평안을 깨뜨리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오늘 여러분과 제가 샬롬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에이레네의 히브리 버전이 이게 샬롬이에요. 그리고 이 샬롬의 헬라어 버전이 에덴입니다. 오늘 이 샬롬이 여러분과 저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