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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충돌은 참혹하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17명이 죽으면 110명을 죽이고 다시 77명을 살해하고, 이런 폭력의 반복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는 난민들이 늘어난다. 떠나간 아랍인들의 빈 집을 유대인들이 차지한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면 땅과 집이 생깁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유대인 지도부의 홍보 문구이다. 아랍인은 줄고 유대인은 늘어난다.
양측의 충돌이 격렬해지고 아랍인 전체의 반감이 심각해지자, 영국과 미국은 팔레스타인분할안의 실행을 연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부가 사회주의 성향을 띄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소련은 언젠가는 사회주의 국가로 전향할 것을 기대하면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적극 지지한다.
'분쟁의 시작'
1948년 5월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렇게 쓴다.
"오후 4시 유대인의 독립이 선포됐고 국가가 세워졌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은 무장병력의 손에 달려 있다."
벤구리온은 32분간의 짤막한 건국 선포 행사를 마치고 곧바로 텔아비브 해변의 작전사령부로 달려간다.
상황이 긴박하다.
이미 이집트, 요르단 등은 '유대인 국가의 건국을 선포할 경우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해둔 상태이고, 아랍연맹 연합군은 공격 개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 군대도 완전히 철수한다. 이스라엘의 친소련 성향의 지도부를 의심하는 미국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이 어떤 공격을 당해도 미국은 책임지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아무도 예상못했던 국제사회에의 첫 걸음이다.
이스라엘 건국 다음날 오전 5시, 아랍 연합군들이 요르단 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한다.
1차중동전쟁이다.
이스라엘 군 머리 위로 아랍 연합군들의 폭격기들이 날아간다. 누가 봐도 거인과 난쟁이의 싸움이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등이 참전한 아랍 연합군에 비해 신생 이스라엘은 너무 초라하다. 이스라엘의 우위를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랍 연합군이 반드시 우세한 것만은 아니다. 병력이 모자라는 이스라엘은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모든 인력을 투입하여 3만명 정도를 유지한다. 반면 아랍 참전국들은 소수 인원의 군대를 투입한다. 다 합하여 약 2만5천명 정도이다. 물론 정규군이고 훈련이나 전투장비는 월등하다.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정도의 이스라엘 군대에 비해 아랍 연합군은 야포와 탱크, 폭격기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전쟁터에 나서는 의지가 다르다. 이스라엘 국민은 벼랑끝이라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여기저기서 차출되어 온 아랍 연합군들은 같은 무슬림을 돕는다는 명분은 알지만 자기 목숨을 바치려는 사명감은 분명치 않다. 참전한 아랍국가들의 지도자들도 내심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겠다는 서로 다른 꿍꿍이 속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상황이 더 극적으로 변한다. 해외 거주 유대인들의 참전으로 이스라엘 병력이 계속 늘어난다. 6개월 후에는 10만명 정도까지 이른다. 골다 메이어는 미국으로 날아가 무기 구매를 위한 거액의 모금을 구해온다.
물론 이스라엘군도 고충이 많다. 오래 전부터 아랍인들의 잦은 공격으로 지쳐있는 국민들, 언어소통이 안되는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 병사들, 쉽게 지치는 팔레스타인의 무덥고 건조한 기후. 첫 한달은 이스라엘의 뚜렷한 열세이다. 악착같이 버티지만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전세의 변화, 그리고 휴전협정'
전쟁 초기, 이스라엘은 고전을 면치 못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바로 그때 유엔이 휴전 중재를 나선다. 이스라엘은 대환영이고 한창 유리한 전세를 이어가던 아랍 연합군은 거부한다. 거부하면 제재를 가하겠다는 유엔의 으름장에 아랍연합군은 마지못해 한달동안 휴전한다는 중재안을 받아들인다.
이스라엘군은 휴전 기간동안 해외에서 무기를 급하게 사들이며 군무장을 다시 챙긴다.
휴전 종료일 이틀전, 모세 다얀 소령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은 아랍군을 기습 공격하여 이후 10일 동안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이를 기점으로 전세가 서서히 이스라엘로 넘어간다.
뚜렷한 승패도 없이 해를 넘기는 전쟁은 피로감을 가져다 주기 시작한다. 아랍연합군 참전국가들도 서로 의견이 달라지면서, 이집트를 시작하여 6개월에 걸쳐 차례차례 휴전협상에 서명한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더 늘어나고 이집트와 요르단도 국경선을 넓힌다. 최대의 피해자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다.
'1차중동전쟁의 결과'
전쟁의 승자는 결국 이스라엘이다. 새로 세운 나라를 지켜냈고 거기에 영토까지 넓혔다. 비록 많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전 국민이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서 강력한 결속력을 이루고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가지게 했다.
반면에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아랍국가들은 저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결국 이스라엘에 연속해서 패배한다.
전쟁이 끝난 1950년 이스라엘은 '귀국법'을 통과시킨다. 이스라엘의 법안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귀국법은 전세계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하고 국가 건설에 참여하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국민군 제도를 더욱 체계화시킨다. 남성 군복무기간은 6년 여성은 1년 내지 2년으로 하고, 군 복무기간 동안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공용어인 히브리어를 가르친다. 1949년 통계에 의하면 이스라엘 국민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무려 20가지에 달했다. 심각한 의사소통 문제가 일어나자 군복무기간 동안 히브리어 교육을 하기로 한 것이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인구 비중에도 영향을 끼친다. 중동 여러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유대인들이 전쟁때문에 이웃으로 지내던 아랍인들에게 불편한 배척을 받게 되어, 결국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다.
중동 유대인과 유럽 유대인은 언어나 사상 문화 등 심지어 사고방식, 생활방식, 교육수준이 서로 다르다.
중동지역 유대인은 훨씬 더 유대교를 중시하고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하층 노동자들이 많은 반면
이스라엘 건국의 주축세력인 유럽 유대인(아쉬케나지)은 서구적인 계몽주의를 경험하고 고학력 고소득이 대부분이다.
이들 사이의 사회적 계층적 갈등이 점점 커진다. 또한 중동 출신 유대인들의 인구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유대교를 중시하는 문화 역시 높아진다. 점차 이스라엘의 유대교 근본주의와 세속주의 간의 갈등으로 비화된다.
추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하여 세가지 방안이 자주 거론됩니다.
하나는, 한 국가 해법(one-state solution) 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방안입니다. 이는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이스라엘이 반대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통합할 경우 인구 비중의 우위를 빼앗기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둘째는,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 입니다. 1947년 유엔은 각각의 국가를 세우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국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아랍인들이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1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한 팔레스타인은 오히려 기회를 놓친 셈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은 찬성하고 이스라엘이 반대합니다.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받을 경우 그들의 민병대가 정규군으로 승격하고 군사력이 지금보다 강해질 것을 우려하기때문입니다.
세번째는 세국가 해법(thre-state solution) 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웨스트 뱅크)를 요르단에, 가자 지구를 이집트에 합병시키자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오랫동안 그렇게 유지되어왔던 구조입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안전과 생활이 보장되고, 요르단과 이집트는 영토가 늘어나고, 이스라엘은 두 나라와의 좋은 관계로 무력충돌이 줄어들거고, 다만 두 지구를 각각 장악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정부(PA) 와 하마스(Harmas)가 거부하고 있고, 이집트 정부도 가자 지구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음은 2차중동전쟁 수에즈운하전쟁입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