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재벌 전국 곳곳에서 폭식증…'제2의 SSM 사태' 부르나?
김현일 기자 2012-02-06
식품업계의 ‘공룡기업’인 대상그룹이 식자재 도매사업에 뛰어들면서 전국 곳곳에서 영세 도매업자와 갈등을 빚으며 ‘제2의 기업형 수퍼마켓(SSM) 사태’로 확산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대상그룹은 자본력과 인적자원,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전국 20여 곳에서 식자재 도매 유통사업을 시작했거나 진출을 시도 중이다. 특히 대상은 전국 각지에서 중규모 유통업체를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그 업체명으로 위장해 매장을 개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되면 “대상이 아니다”라고 우기기 때문에 대응도 쉽지 않아 영세도매업자들이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연간 식재료 시장규모는 약 20조원. 대형마트와 SSM은 포화상태이고 상생법 등에 가로막혀 확장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골목수퍼와 음식점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도매업은 새로운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대상을 비롯한 재벌기업의 진출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대상 “대형매장 입점 철회하라”
새해 벽두인 지난 1월2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청주시농수산물도매시장 인근에 대상이 대형 식자재 매장을 기습적으로 오픈하려 하자 주변 영세상인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대상이 새해 연휴를 틈타 물건을 들이고 기습적으로 매장을 오픈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천막을 치고 공사를 하고, 한밤중에 매장을 정비하고 새벽에 간판을 달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충북경제정의실천연합회와 인근 상인들이 크게 반발했다. 경실련과 상인들은 1월2일 청주 농수산물도매시장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도소매 유통시장까지 집어삼키는 대상)을 규탄한다”며 “대상의 식자재 대형매장 입점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청정원’ 브랜드로 알려진 대상이 청주시 농수산물도매시장 코앞에 980㎡(300평) 규모의 식자재 대형매장인 싼타종합유통(주)을 차리고 기습적으로 간판까지 달았다”며 “SSM이라는 이름으로 골목수퍼를 고사시킨 대기업이 이젠 도매 유통시장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또 “대상은 대전 오정동 농수산물시장에 ‘청정물류센터’라는 식자재 매장을 차린 뒤 자금력을 동원한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유통질서를 뒤흔들고 있다”며 “도소매 중소상인들을 다 죽이는 것이 과연 유통시장의 새 바람이며 청정원이라는 브랜드를 팔아주고 이용해 준 대가가 바로 이것이냐”고 규탄했다. 이어서 “지난달 30일 청주청원 도소매생활용품유통사업협동조합이 대상에 대해 사업조정을 신청한 결과 사업일시정지가 내려졌다”며 “그런데도 대상측은 대형매장이 아니라 창고라고 발뺌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상인들은 “대상은 전국 각지의 중규모 유통업체를 사들이고 그 업체 명의로 매장을 개점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문제가 되면 자기네 기업이 아니라고 우긴다”며 “그러나 이들은 모두 대상 자회사인 대상베스트코(옛 다물에프에스)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이른바 ‘손자회사’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상(주)이 입점 철회를 하지 않을 경우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상은 식자재 유통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대상베스트코를 설립하고, 전국 중소형 식자재 도매상들을 인수합병하는 전략으로 도매업 진출을 시도하는 중이다.
원주 중소 유통업계도 ‘비상’
대상은 원주지역에서도 ‘청정원식자재유통센터’를 설립하려다 중소 도매상인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대상이 원주와 인근 지역은 물론 도내 전체와 충북지역을 대상으로 식자재를 평균 판매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것으로 알려지자 상인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원주지역 W물류센터(원주물류사업협동조합)와 유통업에 종사하는 중소상인 등에 따르면 대상은 지난해 12월26일 단구동에 1100㎡ 규모의 청정원식자재유통을 열고 식자재 8000여 품목을 판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역 상인들이 이에 반발해 중소기업청에 사업조정신청을 준비하고 대상 물품 불매운동 등을 벌일 움직임을 보이자 매장 오픈은 보류된 상태다.
이에 앞서 대상은 원주 호저면에 위치한 1만여㎡ 규모에 냉동창고 등 물류 시스템을 갖춘 기존 지역 업체를 사실상 인수했으며 유통센터 개점에 맞춰 소매업소, 식당, 수퍼마켓은 물론 일반 소비자까지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식자재 판매를 할 계획이었다.
W물류센터와 소상공인들은 청정원식자재유통이 개점하면 중간 유통 상인은 물론 재래시장까지 매출 급감이 예상되는 등 대형마트 입점보다 피해가 훨씬 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특히 대상은 원주에서도 식품 납품 영역까지 독점하기 위해 지역 유통업체를 인수한 후 간판을 바꾸는 편법을 동원해 지역 상인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하태준 원주물류사업협동조합 대표는 “대전 등에서 대상이 식자재유통센터 오픈 후 중간 유통인들의 50% 이상이 휴·폐업을 한 것으로 나타났고 폐해가 너무 심각해 중기청도 유통센터를 사업조정신청 대상에 포함시켰다”며 “지역 상인들을 최대한 지원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인천 상인 “밥그릇 뺏길 수 없다”
인천시 부평구 삼산농산물도매시장 앞. 대상그룹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660㎡ 규모의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오픈을 준비 중인 중부식자재 매장을 중소상인들이 매일 순찰을 돌고 있다. 대상그룹이 중부식자재라는 계열사를 통해 식자재를 유통하려는 시도는 지역 중소상인들의 사업조정 신청으로 진행이 일시 정지된 상태다. 하지만 대상그룹이 편법 운영 등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어 주변 상인 200여 명이 돌아가며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상기업 식자재 납품업 진출 저지 인천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과 인천 부평구 삼산도매시장 상인들에 따르면 대상은 경기도 시흥시에 소재한 다물식자재의 지분 70%를 인수했으며, 다물은 중부식자재 지분 100%를 인수했다. 이 중부식자재가 삼산도매시장에 식자재 대형 매장을 세웠기 때문에 사실상 대상이 운영하려는 식자재 매장이다.
이 도매시장에는 식자재 등을 다루는 도매점이 36곳이나 된다. 이들 도매상점은 2001년 삼산농산물도매시장이 문을 연 뒤 업체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해 지역에서 대표적인 식자재 도매상점 구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곳 상인들은 대상그룹이 막강한 자본력과 인적자원, 파격적인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영업을 시작하면 언제 장사를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공포감에 짓눌려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상인들은 대상이 삼산동에서 성공하면 구월농산물도매시장과 부평 전통시장 등에도 대형 식자재 매장을 개설할 것으로 보고 있어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대상의 공습으로 대전도 ‘초토화’
대전지역에서는 대상그룹 계열사가 식자재 유통을 시작하면서 지역 도매시장은 초토화됐다.
대상그룹이 대전 오정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인근에 식자재 전문점을 오픈한 건 지난해 5월. 대상그룹의 다물FS(대상베스트코)는 매장면적 1300㎡ 규모의 청정물류시스템을 오픈하고 도매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대전 식자재 납품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청정물류 시스템은 농수산물에서 육가공까지 1500여 가지의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저렴한 가격에 물품을 공급 중이다.
대전 지역의 도매상인은 다물 에프에스가 도매가보다 10%를 밑도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시장을 어지럽힌다고 반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해찬들 태양초 같은 물품은 도매상인이 4만4000원에 들여와 5만원 수준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대상은 3만8000원에 판매하고 있어 가격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영세상인들의 하소연이다.
상인들에 따르면 청정물류시스템에서 아침 9시면 골목수퍼와 음식점 상인들에게 가격비교 문자 메시지를 발송해 가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더구나 청정원(대상) 대리점 상인들까지 장사를 할 수 없어 완전히 망해가고 있다고 도매상인들은 반발했다. 전국유통상인연합회 배재홍 사무국장은 “대전 지역 같은 경우 대상 때문에 기존 도매상인들의 매출이 50% 이상 떨어지고 있으며 이미 도산하는 중소상인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 지역 중소상인들이 대상그룹의 식자재 유통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중소기업청은 입점 뒤 90일 이내에 조정신청을 하지 않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상황이다.
대상그룹은 전남 여수 한려종합식품, 경기 하남 예름에프에스, 강원 원주 만세종합유통, 서울 강서구 송정유통, 서울 동대문구 대한식자재유통 등 전국 주요 식자재 도·소매업체 20여 곳을 인수해 도·소매 유통망을 넓혀 나가는 중이다.
대상 등 식자재 도매업 잠식
전국 곳곳에서 영세상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면서 이들의 반발로 차질을 빚고는 있지만 대상그룹의 식자재 도매업 진출은 앞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식재료 시장이 연간 20조원 규모로 매력적인 시장이라 식자재 제조가 주력인 대상그룹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상뿐 아니라 CJ프레시웨이·LG그룹 계열의 아워홈 등도 식자재 도매업을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다. 식자재 유통 부문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CJ프레시웨이는 외식업체와 급식사업 식자재 유통에서 지역 유통업자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지방 등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프레시원이라는 도매업체에 지분투자를 해 중소형 식자재유통업 진출을 본격화했다. 프레시원은 기존에 중소형 식당에 식자재를 유통한 중소업체들을 통합한 회사로 CJ프레시웨이와 물류센터를 공유하고 있다. CJ는 경기도 일산·안양과 광주광역시에 식자재 물류센터를 지었다. 아워홈도 도매업 진출을 위한 대리점 모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폭식증에 걸린 대기업의 식자재 도매업으로 무차별 공습에 위기감을 느낀 영세 도매상인들이 물리적·법적 대응에 나서고는 있다. 국회를 찾아가 중소상인 적합업종 관련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고, 공익 소송도 진행할 계획이다. 또 도매상인사업협동조합 설립 등 자구책 마련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 소비자들의 도움 없이는 영세 상인들의 움직임은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 앞발을 들고 덤비는 사마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세납품업으로 분류되는 4인 이하 음식료품 도매업은 전국에 3만9000여 곳이 되고 8만5000여 명이 생존을 의지하고 있다. 이들이 망하면 대한민국의 모든 도소매 유통산업은 대기업에 장악될 것이다. 이미 오픈프라이스 정책으로 대기업이 가격결정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하고 있어 몇몇 물품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훨씬 웃도는 오름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식자재 도매시장까지 대기업이 장악하면 독과점이 심화돼 담합하면 소비자 가격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는 중소상인 보호가 한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정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의 독식은 경제의 기반을 형성하는 납품 제조업체와 상인 등의 몰락을 불러와 내수 시장의 기반을 붕괴시키는 독초이기 때문이다.
독과점에 의해 건전한 시장경제 질서가 무너지고 국민경제 차원에서도 산업 간, 대중소 간의 균형발전이 파괴되면 그 피해는 중소상인뿐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중소영세 유통업체의 사업영역 보호와 생존권 보호 차원에서 도매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회 차원에서도 발의돼 있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보호 특별법 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중소상인들의 생존권을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중소상인들의 바람이다.
특히 내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대상그룹 입장에서도 영세 상인들의 생존권 박탈은 그 재앙이 부메랑이 될 수밖에 없다. 내수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처지에 영세 상인들의 폐업은 곧 소비 감소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골목수퍼나 식당 업자 입장에서도 대기업이 오래 기간 밑지고 장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당장의 염가에 현혹될 일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