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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88. [역경의 열매] 이광희 (1-21) 톤즈에 희망의 교회 종소리 멀리 퍼져 나가길…
월드비전 통해 배우 김혜자와 찾은 톤즈… ‘희망고 빌리지’ 만들어 재봉기술 가르쳐
이광희 디자이너가 지난해 희망의망고나무 프로젝트 10년째를 맞아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해 10월 충청도의 한 창고. 나는 긴장이 감도는 표정으로 바닥에 묵직하게 놓인 종을 보고 있었다. 햇빛을 받으며 고운 자태를 드러낸 종. 힘껏 줄을 당기자 종이 앞뒤로 움직였다. 뎅, 뎅, 뎅…. 창고를 가득 채우는 종소리를 듣는 순간 ‘됐다’ 싶었다.
나는 40여년간 대한민국 오트 쿠튀르를 상징하는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68)로 불렸다. 이제는 사단법인 희망의망고나무(희망고) 대표, 아프리카 동북부의 남수단 톤즈에서 ‘마마 리(Mama Lee)’라 불리는 게 더 좋지만.
지난해 디자이너 40년, 희망고 10년을 맞아 올해는 안식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렇다고 마냥 쉴 생각은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창고에서 들었던 그 종소리를 톤즈에서 듣고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해 톤즈에 한센인들을 위해 세운 교회에 바로 그 종을 달기 위해 지난 2월 출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톤즈의 인연은 2009년 시작됐다. 배우 김혜자 선생님과 함께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을 통해 톤즈를 찾았다. 건기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걸 보면서, 망고나무를 심을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 땅에서 ‘망고나무가 뿅뿅 솟아나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런 내게 김 선생님은 “너는 참 신기하다”고 했다. 황무지에서 망고나무를 떠올리니 그럴 법도 했다.
생각을 현실로 옮겼다. 4만 그루의 망고나무를 심었고 자립을 위한 복합교육센터 ‘희망고 빌리지’를 만들었다. 2014년부터는 한센인 마을에 교회도 세웠다. 지난해 4월 교회 완공을 앞두고 톤즈를 다녀온 뒤 종이 떠올랐다. 어릴 적 새벽마다 교회에서 들리던 종소리, 그 소리는 사람들의 하루를 깨웠다. 1인당 국내총생산 275달러의 극빈국 남수단, 거기서도 가장 소외된 한센인들이 울리는 종소리가 시계 하나 없는 광야에 울려 퍼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종 만드는 사람을 찾아 제작하는데 꼬박 4개월이 걸렸다. 지난해 10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새겨 넣은 140㎏짜리 종이 완성됐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시작이었다. 종은 우간다에서 사업하는 분의 도움으로 컨테이너 한편에 실어 톤즈로 보냈다. 다음은 종탑. 종의 무게도 무게지만 칠 때마다 흔들리는 충격을 버텨야 하는데 그걸 만들 기술이 톤즈에는 없었다. 높이 8m의 종탑까지 만들어 보냈다.
이런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왜 수단이냐는 핀잔부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라는 지적까지. 분명한 건 ‘가치를 보면 비용은 문제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왜 그런 어려운 길을 가냐’고 묻는다면 농담으로 답을 대신해 보려고 한다. “부모님 잘못 만나서 그런 것 같다”고.
이광희 디자이너 약력=이화여대 법정대학 졸업, 국제패션연구원 수료. 88서울올림픽 기념패션쇼 개최, 아시아패션진흥협회 선정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 산업자원부 ‘신지식인상’,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산업포장 대통령상’ 수상.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한복 특별전시회’ 참여. ‘희망의 망고나무’ 설립.
◇약력=이화여대 법정대학 졸업, 국제패션연구원 수료. 88서울올림픽 기념패션
* [역경의 열매] 이광희 (1) 톤즈에 희망의 교회 종소리 멀리 퍼져 나가길…
* [역경의 열매] 이광희 (2) '낮의 목회자'와 '밤의 목회자'… 부모님은 내 삶의 멘토
* [역경의 열매] 이광희 (3) 하나님 뜻 실천하신 '한국의 그룬트비' 나의 아버지
* [역경의 열매] 이광희 (4) 함석헌 선생, 존경하는 여성으로 내 어머니 꼽아
* [역경의 열매] 이광희 (5)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로 맺어진 부모님
* [역경의 열매] 이광희 (6) 어머니가 '밤의 목회자'라 불린 사연은
* [역경의 열매] 이광희 (7) 아버지 목회에 그림자처럼 내조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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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광희 (20) 삽과 호미가 선물한 '달콤한 수박과 오이'
* [역경의 열매] 이광희 (21·끝) '희망고'는 어머니의 꿈… 내 안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역경의 열매] 이광희 (2) ‘낮의 목회자’와 ‘밤의 목회자’… 부모님은 내 삶의 멘토
지역 사회와 교계에서 존경받는 부모님… 자녀인 나에게는 늘 큰 부담으로 자리해
‘한국의 그룬투비’로 불린 이준묵 목사가 1999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뒤 김수덕 사모와 넷째 딸인 이광희 디자이너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부모님 잘못 만나 그런 것 같다’는 말은 부모님을 향한 존경을 극대화하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다. 아버지 해암 이준묵 목사와 어머니 김수덕 여사는 한반도 땅끝인 전남 해남에서 평생 고아와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며 사셨다. 해남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낮의 목회자’와 ‘밤의 목회자’라 불렀다.
지역 사회와 교계에서 존경받는 분들이었지만, 자녀인 내겐 가슴 한편을 누르는 부담으로 자리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가 이준묵 목사’라고 세상에 밝힌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부모님 이야기부터 꺼내는 이유는 그분들이 내 삶의 정신적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이 희미하기에 여러 사람에게 들은 얘기들을 모아 보았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일생을 기독교 가르침 안에 사셨다. 한 언론사 기고문에서 아버지는 7살 때 겪었던 고난을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다리에 고름이 차 걷지 못하게 됐다. 어머니가 다른 치유 방법을 찾지 못해 굿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굿을 할 수는 없다’며 어머니를 설득했고, 결국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던 광주 제중병원을 찾아가 수술을 받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 수술비는 선교사들이 대신 부담했다. 학업도 중학교 2학년을 마친 뒤 중단했다. 대신 광주YMCA에 들어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농촌에서 일을 도우며 선교했고 밤에는 빈 창고에서 기도했다. 아버지가 목회를 위해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22살 되던 해인 1932년이다.
후원자는 아버지에게 하나뿐인 형이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나는 육의 지도자가 될 테니 너는 영의 지도자가 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큰아버지는 일본의 공장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운 뒤 고국으로 돌아와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분이 바로 호남비료와 아세아자동차를 세운 이문환 회장이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일본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의 연을 맺게 한 것도 큰아버지였다. 부모님 모두 하나님 일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해 결혼엔 뜻이 없으셨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광주 제중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소개했고 두 분은 1939년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는 빈민 목회를 위해 결혼하자마자 신부를 홀로 둔 채 중국으로 떠나셨다. 2년간 중국에서 빈민 사역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해방되던 해 정월 해남읍교회에 파송됐다. 해남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교회는 초가지붕의 초라한 건물이었고 할머니 교인 10여명이 전부였다. 어쩌면 내가 2009년 남수단 톤즈의 황폐한 땅을 만났을 때와 같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그곳 해남에서 정년퇴직까지 50여년간 한 교회만 섬기셨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3) 하나님 뜻 실천하신 ‘한국의 그룬트비’ 나의 아버지
평생 해남읍교회 한 곳만을 섬기고 목회 외에도 교육과 농촌계몽에 기여… 행동으로 이웃 사랑 보여줘
이준묵 목사가 1960년대쯤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전남 해남의 집 앞마당에서 찍은 사진.
아버지는 평생 땅끝인 전남 해남, 한 곳만 섬기셨다. 해남읍교회 목회 외에도 ‘하나님 사랑·땅 사랑·이웃 사랑’이라는 모토 아래 삼애농민학원을 세워 영농기술을 보급했고 해남에 기독교청년회(YMCA)도 설립하셨다. 6·25전쟁 후 1953년부터는 해남등대원을 세워 고아들을 보살피셨다. 등대원은 지금도 운영된다. 과부나 장애인은 물론 소록도에 못 들어간 한센인들까지 3년간 해남에서 손수 돌보셨다. 해남유치원 해남고등공민학교 해남수성경로대학 해남장애인종합복지관 등을 설립하거나 운영하셨다.
사람들은 교육과 농촌계몽에 나서며 ‘덴마크의 아버지’라 불린 니콜라이 그룬트비 목사의 이름에서 따 아버지를 ‘한국의 그룬트비’라 부르곤 했다.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도 격동의 현대사를 살며 만나거나 겪은 100인의 인물을 쓴 ‘100년의 사람들’에서 아버지를 “해남사람치고 이준묵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기억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우체국에 도착한 편지의 겉봉엔 수신인 주소도, 우표도 없이 ‘하나님 전 상서’라고만 쓰여 있었다. 우체국장은 어떻게 처리할까 망설이던 중 해남읍교회 목사가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있던 터라 편지를 가져왔다.
편지에는 “하나님! 저는 지금 공부를 무척 하고 싶습니다.… 그 길이 열린다면 신명을 바칠 테니 부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처럼 도와주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학업을 이어가고 싶은 아이의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수소문해서 편지를 쓴 사람을 찾았다. 해남읍내에서 한참을 더 들어간 산골 마을에서 만난 소년은 집이 워낙 가난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소년을 데려와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 전남대 의대에 들어갔다.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신학 공부부터 해야 한다고 판단한 청년은 한신대에 진학했다. 이후 스위스 바젤대에서 신학을 공부해 한신대 총장의 자리에 올랐다. 오영석 전 총장 이야기다.
아버지는 늘 꾸준하셨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일생 새벽기도를 거르신 적이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 3시면 일어나 미암산이라는 뒷산에 올라 늘 같은 바위에 무릎을 꿇고 깊은 기도를 드리셨다. 오 총장도 새벽기도에 오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고 했다. 오 총장은 고등학생 시절 새벽기도를 따라다니며 아버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아버지 등이 백설로 덮이기도 했단다.
아버지의 끈질김은 일기를 봐도 알 수 있다. 10대 말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70여년 동안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쓰셨다. 지금 펼쳐보면 믿음의 다짐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까지 솔직하게 쓰신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아버지는 197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취임해 교단을 이끌었고, 7년간 한신대 초대 이사장을 지내셨다. 그러나 목회는 해남읍교회만을 섬기셨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4) 함석헌 선생, 존경하는 여성으로 내 어머니 꼽아
안동 김씨 유교집안에 시집 온 외할머니, 딸 교육시키기 위해 기독교에 입문
이광희 디자이너의 외할아버지(왼쪽)와 외할머니.
어릴 적 우리 집은 인권운동가이자 기독교 문필가인 고 함석헌 선생,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들의 사랑채였다.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쓴 ‘내가 본 함석헌’엔 이런 내용이 있다.
“함 선생님은 평생 존경한 여성을 두 명 꼽았는데 한 명은 자신의 어머니였고 다른 한 명은 김수덕 여사였다.”
김수덕 여사는 나의 어머니다. 함 선생님이 ‘존경하는 여성’이라 말한 어머니는 40㎏도 안 되는 가녀린 체구에도 수십 년간 수천 명이 넘는 해남등대원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느라 조리사부터 청소부까지 모든 일을 홀로 감당했다. 어머니를 그런 강단 있는 여성으로 키워낸 분은 열행비문(烈行碑文)까지 받은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 이야기는 1980년대 라디오 드라마였던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올 법했다. 인동 장씨 양반가에서 태어난 외할머니는 전남 고흥군의 안동 김씨 유교 집안으로 시집갔다. 일제 강점기에도 끝까지 상투를 고집할 정도로 완고한 선비들의 마을이었다.
언젠가 외할머니는 몸져 누운 외할아버지를 살리겠다며 자신의 허벅지살을 두 번이나 떼어내 먹이셔서 살리셨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성균관에 상소를 올렸고 나라에선 열녀문을 내렸다. 지금도 고흥에 가면 마을 입구에 그 열녀문을 볼 수 있다.
막내딸이었던 어머니에게 학업의 길을 열어주신 것도 외할머니였다. 완고한 반촌마을에서 여자가 공부를 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 외할머니는 선교사에게 보내면 여성도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학업을 할 수 있게 기독교에 입문하셨다. 그 덕에 어머니는 순천 매산여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1910년 미국남장로회 한국선교회가 기독교 교육을 위해 개교했다.
외할머니는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셨다. 이런 일화가 있다. 경남 남해에 살던 아들의 집에 기거했을 때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때도 두려움 없이 경찰서 앞과 산에서 엎드려 매일같이 기도했다. 보다 못한 일본인 경찰서장이 하루는 엎드려 기도하는 외할머니를 때리고 발로 찬 뒤 돌아갔다. 그 후 서장은 시름시름 아파 드러눕게 됐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차도를 보이지 않자 부하 경찰이 외할머니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부하 경찰의 간곡한 부탁으로 외할머니가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놀라운 일이 생겼다. 서장은 건강을 되찾았고 외할머니를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광복 직전에 고흥으로 돌아온 외할머니는 처음에 다니던 관리교회에 일본인들이 빗장을 쳐놓은 걸 보셨다. 빗장을 뜯고 들어가 기도하는 가운데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외할머니는 유교 사상에 따라 생활하면서도 지역의 과부와 극빈자를 돌봤다. 여성 차별이 심하던 시절 여성들만의 신앙모임을 마련하셨고 딸의 공부를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기도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외할머니의 삶은 어머니, 그리고 내게도 영향을 줬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5)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로 맺어진 부모님
독신으로 복음 전하겠다는 어머니와 빈민사역 준비하던 아버지의 만남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사모가 1936년 5월 결혼식을 올린 뒤 찍은 기념사진.
어머니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학교에 들어갔지만, 학비는 직접 벌어야 했다. 손뜨개질을 하고 자수를 놓고 삼베를 짜기도 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자신의 학비를 대는 것은 물론 어려운 친구를 돕는 데도 사용했다. 학교에서는 종을 치는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어머니가 “종을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시험 볼 때가 가장 힘들었다. 종을 치려면 남들보다 시험을 빨리 봐야 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어머니는 학창 시절부터 일평생 마음속에 새기고 외우는 말씀이 있었다.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였다. 간호학생 시절 기숙사 벽에 이 말씀을 적어서 붙여 놓고 늘 보면서 지내셨다고 했다.
매산여학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는 광주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의 간호훈련소에서 자격을 취득해 간호사가 됐다. 우리나라 1세대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셨다. 결혼은 평생 하지 않을 생각이셨다. 신학을 공부해 온 세계를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딸의 결정을 존중하셨다. 지금의 부모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아버지는 당시 고베신학교의 파송을 받아 만주에서 빈민사역을 하기 위해 선교사로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다. 결혼한 첫날 밤 각자 좋아하는 성경말씀을 외웠는데, 아버지가 통곡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독신으로서 오직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했는데 결혼을 했으니 예수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 울었다고 했다.
박근원 한신대 명예교수는 부모님의 결혼을 ‘진취적 독신을 꿈꿨던 어머니와 신앙적 유형이 비슷한 아버지가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두 분의 신혼은 짧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사흘 뒤 아버지는 혼자 중국 산동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걸인과 길거리 청년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했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가서 어려운 병자들을 위해 일하셨다.
1945년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오시면서 두 분은 외진 곳이었던 땅끝 마을 해남으로 내려가셨다. 그 땅에서 해남읍교회 사역뿐 아니라 지역사회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업들을 시작하셨다. 6·25전쟁 직후 고아와 거지, 과부, 정신병자들이 쏟아졌던 암흑의 시대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중 하나가 해남등대원이다. 고아원 대신 등대원이란 이름을 쓴 것은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세상을 밝히는 등대가 돼라’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놀라운 사역에 그림자처럼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오로지 깊은 기도와 침묵, 그리고 미소로 내조하셨다. 아버지도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나의 목회 70%는 아내가 해 준다”고 말씀하셨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6) 어머니가 ‘밤의 목회자’라 불린 사연은
밤이면 산모나 병든 사람·굶는 사람들 집 찾아다니며 쌀·옷 등 슬며시 두고와
1956년 전남 해남 사택에서 집안일을 하는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사모의 모습을 등대원 학생이 지켜보고 있다.
어머니는 등대원 아이들과 당신 자식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푸셨다. 아니 등대원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셨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우셨던 것 같다. 1968년 어머니의 일기에도 등대원 아이들을 향한 애달픈 마음이 녹아있다.
“나는 언제나 등대원의 아이들이 걱정이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인정이, 그리고 사랑이 결핍돼 있다.… 병들고 무능한 엄마라도 아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랑의 대상일 것이다.”
어머니는 등대원 아이들의 자긍심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뜻한 바에 의해 태어난 귀한 사람”이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해주셨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졌다.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홀로 피난온 10살 아이는 등대원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군에 입대했지만, 상사들의 괴롭힘에 탈영했다. 어머니는 청년이 심한 벌을 받을까 몹시 걱정됐다. 1960년대는 탈영병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무겁게 처벌받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솜으로 바지 안에 넣는 엉덩받이를 만드셨다. 부대에 복귀하면 엉덩이에 매를 맞는다는 말씀을 들어서였다.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엉덩받이 선물을 받았고 부대로 복귀한 뒤 무사히 전역했다.
어머니의 사랑은 고아나 가난한 이들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해남은 소록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한센인들 사이에 “이준묵 목사님 집에 가면 재워주고 먹을 것, 차비도 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우리 집을 찾은 그들을 어머니는 거리낌없이 씻겨주고 먹이고 재우셨다. 해남에 있는 양로원 ‘평화의 집’과 어린이집 ‘천진원’도 어머니가 만드셨다.
가난한 시골 교회라 가족조차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몰려왔다. 어머니가 당시 쓴 기도문을 보면 이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을 저한테 손님으로 보내 주셨으면 저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건강과 물질도 저한테 허락해 주세요. 하나님의 심부름을 더 잘할 수 있게요.”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하실 때는 그 일을 할 사람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셨다.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심부름이라 생각하셨던 어머니는 그 심부름을 잘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셨다.
밤이면 동네도 거니셨다. 산모나 병든 사람, 끼니를 굶는 사람의 집 앞을 찾아다니며 쌀과 옷가지 등을 슬며시 놓고 돌아오셨다. 이런 일도 있었다. 누군가의 대문 앞에 봇짐을 두고 돌아서려는데 신음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온 가족이 앓아누워 있었다. 간호사 출신인 어머니는 이들을 응급조치하고 돌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순찰을 돌던 경찰에게 통행금지 위반으로 걸려 하룻밤을 경찰서에서 보내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밤의 목회자’라 불렀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7) 아버지 목회에 그림자처럼 내조한 어머니
예배 때 추위에 떠는 할머니들 외투 사주고 교회 떠난 장로에겐 돌아오라 눈물로 호소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사모(두 번째 줄 왼쪽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1972년 해남읍교회 앞마당에서 교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어머니의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성도들의 어려움을 살피기 좋은 뒷자리였다.
1950~60년대 교회에는 할머니와 과부들이 많았다. 할머니들이 돈이 없어 새벽기도와 수요 저녁 예배에 외투도 입지 못한 채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볼 때면 어머니는 몹시 괴로워하셨다. 그래서 4~5시간 걸리는 광주까지 가서 털실과 옷감을 구해 스웨터도 짜고 외투도 만들어 이들에게 주셨다. 그렇게 한 벌, 두 벌 전해지니 모든 성도가 어머니가 손수 짓거나 사주신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마련해 준 옷을 입고 예배당에 오신 분들을 보면 가장 즐겁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목회에서 어머니는 말없이 행동하는 조용한 내조자였다. 장로님 한 분이 ‘해남읍교회에 다니지 않겠다’며 교회를 떠난 적이 있다. 그는 6·25전쟁 때 북에서 내려와 해남에 정착해 교회에 출석했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폐병에 걸린 장로님을 위해 약을 구해 주고 간호하셨다.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그는 아버지께 구두 수선을 배워 장사를 시작했다. 교회 일도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동갑인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다 문제가 생겼다. 당회에서 아버지의 제안을 자주 희화화하고 농담으로 넘기면서 엇박자를 내곤 했다. 너무 심해져 아버지가 꾸짖자 장로님은 “다른 교회도 얼마든지 있다”며 떠나셨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떡이며 과일 등을 이바지처럼 준비해 장로님 댁을 찾으셨다. 한 사람의 마음을 잃은 것은 천하를 잃은 것보다 더 큰 손해라는 신념이 있기에 주저하지 않으셨다. 장로님을 마주하자 어머니는 “교회로 돌아오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장로님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울며 사과한 뒤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훗날 이 장로님은 어머니의 이해심과 겸허한 마음, 사랑과 포용이 마음을 움직였다고 간증하셨다.
어머니는 교육이 ‘미래의 투자’라 생각하시고 해남등대원 아이들이 한껏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셨다. 첫 열매는 1954년 해남중학교에 입학한 네 명의 아이들이었다. 1년 전 해남등대원이 문을 열 때 들어온 이들에게 어머니는 “너희 첫 열매 넷은 등대원의 희망이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받은 이 나라의 소망”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한 소년은 그날부터 설레는 꿈속에 살면서 문자 그대로 ‘꿈꾸는 소년’으로 성장했다고 고백했다.
네 명의 아이는 교과서 한 벌로 공부해야 했지만, 우등을 놓치지 않았다. ‘꿈꾸는 소년’은 아프리카 케냐에 선교센터를 세우고 에이즈와 한센병 환자들을 어루만지는 선교사가 됐다. 다른 소년들은 교수와 목사가 됐다.
1968년 2월 어머니의 일기에는 ‘섬김’이 주는 기쁨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운 일이라면 하기 싫어도 하기 어려워도 억지로라도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할 일들을 더 제시해 주신다. 그리고 큰 기쁨을 주신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8) ‘꽃 사람’ 되고 싶다던 어머니, 평생 베푸는 삶
교인들 선물·별미 보내오면 어김없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해 ‘사람은 사랑과 배려 먹고 산다’ 가르쳐
2002년 전남 해남의 사택에서 기도하는 김수덕 사모의 손을 넷째 딸인 이광희 디자이너의 남편 홍성태 한양대 명예교수가 촬영했다.
어머니는 90 평생 ‘꽃 사람’이 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쓰신 일기에서도 어머니는 꽃을 이야기하셨다.
“꽃을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는데, 사람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나도 꽃 한 송이 같은 꽃사람이 되고 싶다. 식물꽃은 땅속 진액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꽃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야만 된다.”(1968년 1월 22일)
어머니는 꽃처럼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셨다. 교인들께 선물이 들어오거나 별미의 음식이 들어오면 식구들에게는 ‘눈으로만’ 먹게 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내셨다. 자식 입장에선 때로 섭섭했다. 5남매인 우리는 왜 그렇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주냐고 불평 아닌 불평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못 먹어서 탈 나는 게 아니고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거야. 보는 걸로 이미 배불렀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딸이 패션 디자이너인데, 정작 어머니는 고운 옷을 입으신 적도 없다.
어머니는 6·25 전쟁 때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성들의 애통해하는 마음에 함께하기 위해 무색 무명옷을 평생 입고 지내신다고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평소와 전혀 다른 옷감의 옷을 입고 서울에 오신 적이 있다. 무명옷만 입으시던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지하실에 버리려고 놔뒀던 커튼 천을 가져가신 것이었다. 곰팡이가 피고 해진 천을 깨끗이 빨고 삶아 곱게 옷을 지어 입으셨다. 내가 마지막까지 본 어머니의 옷들 중에는 30~40년 돼 누덕누덕 덧대고 기운 한복 두 벌과 커튼으로 만든 옷 한 벌 등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삶 속에는 늘 기도가 있으셨다. 하루를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를 나가셨던 아버지 옆에는 늘 어머니가 함께하셨다.
어머니는 “기도는 호흡과 같다. 마치 영이 숨 쉬는 밥과도 같다”고 일기장에 적으셨다.
자식들에겐 삶의 이정표를 세워주시는 말씀을 나누시곤 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지혜를 깨닫도록 유도하셨다.
한번은 어머니가 이런 질문을 하셨다. “사람은 사람을 먹고 산다.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도 살지만, 먹을 사람이 없으면 죽는다. 너는 사람에게 먹혀 봤느냐.”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과 배려를 먹고 산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씀에 ‘과연 나는 누구에게 얼마나 먹혀 봤을까’ 물음이 들었다.
한번은 내가 어려운 일이 있어 장거리전화로 하소연했더니 “오늘도 참아 봤느냐”라는 말씀만 답변으로 돌아왔다. 더 여쭤봐도 “그냥, 참아봐라….” 그게 전부였다.
나이가 먹고서야 그것이 엄마의 각고의 경험에서 나온 말씀임을 알았다. 인내하며 주신 대로 받고 감사하며 살라는 어머니의 말씀들은 내 삶의 기준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9) 어렵고 힘든 일 생기면 항상 ‘어머니 교훈’ 떠올라
삶 속에서 체득하고 실천한 어머니 말씀 힘든 가운데 얻는 것 있다는 믿음으로 어려움 잘 헤쳐 나오게 돼
2001년 남편인 이준묵 목사의 묘 앞에서 미소 짓는 김수덕 사모의 모습을 막내딸인 이자희 전 우송대 교수가 촬영했다.
내 삶의 뿌리는 어머니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 이정표이자 내 마음의 지주였다.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생각할 때 대답의 기준이 되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내게 어머니 이상의 훨씬 더 높은 절대적 존재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살면 위선 없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셨고 그 문제와 평생 씨름하면서 사셨다. 어머니가 자주 하신 말씀이 있다.
“위선 없이 하나님을 모시고 멋지게 살아라. 그러면 어떤 일이 닥쳐도 아무 걱정 없다.”
어머니는 나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사셨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패션 일을 하면서 항상 어머니의 교훈을 떠올리며 살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혼을 박아서 해라.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온 우주보다 크다. 그래서 한 마음을 잃는 것은 온 우주를 잃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작은 일이 큰 가르침으로 온다.”
평생 힘든 삶 가운데서 체득하고 실천해온 신념이시리라. 어머니의 이 세 말씀이 나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항상 모든 것에 초연한 듯 보였다. 어머니의 일기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절대자 앞에서 인간이 무력하듯이 시간 앞에서도 인간은 무력하다. 시간은 절대자와 함께 있다. 인간이 잘되려면 절대자에게 순종해야 하듯이 시간에도 순종해야 한다. 시간은 보이지 않게 흘러가지만,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내느냐로 확실한 결과물이 나온다. 시간이 주는 해답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인내하라. 인내는 성공의 근본이다.”
어머니는 오늘을 조용히 살고 내일을 태연히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성공의 근본임을 시간을 통해 아셨나 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하루를 25시간으로 사는 사람 같았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그 어려움 가운데는 분명 교훈이 있다. 그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게 하나님께서 주신 진짜 이유다.”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이 말을 떠올리면 나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힘든 만큼 얻는 것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을 잘 넘기면 더 좋은 깨달음과 교훈이 있다는 생각에 힘든 일들을 은혜 안에서 잘 헤쳐 나왔다.
어머니가 사람을 위로하는 말들도 생각난다. 한번은 너무 안 좋은 일이 있어 침울해할 때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 좋은 일은 안 본 듯이 하고, 괜찮은 것은 더 잘 본 것처럼 해라.”
지금도 마음이 상할 때 그 말들이 나를 위로해 준다.
참는다는 게 단순히 화를 누르고 보아도 못 본 척, 싫어도 아닌 척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아닐까. 나중에 나이가 먹고서야 알았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0) 어릴 때 난 씩씩하게 인사하고 생글생글 웃는‘방울새’
등대원 아이들에게 먹을 것 양보하고 스스로 공부해 명문 전남여중 들어가
이광희 디자이너가 6살 때였던 1958년 해남의 사택 앞마당에서 아버지 이준묵 목사의 등에 업혀 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해남등대원을 설립하기 1년 전인 1952년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쟁 직후 고아와 과부, 한센인들에게 우리 집은 쉼터였다. 당시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던 함석헌 선생님, 장공 김재준 목사님도 우리 집 단골이셨다.
함 선생님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세상은 그분을 ‘행동하는 지성’이라 했지만, 내겐 그저 하얀 두루마리,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였다. 선생님은 당신의 무릎에 앉아 놀던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 한번은 함 선생님이 인형을 선물로 주셨는데, 눕히면 눈을 감고 세우면 눈을 뜨는 인형이었다. 장난감이 없던 시골에선 신기한 것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교회와 손님,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시는 부모님을 나는 ‘엄마’ ‘아빠’라 불러본 적이 별로 없다. 나까지 그렇게 부르고 찾으면 왠지 더 힘들게 해드리는 것 같았다.
어릴 적 함께 살던 친척 언니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그때의 내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희 어머니가 등대원 아이 중에서 약한 애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게 하셨어. ‘아무리 내가 잘해도 사랑이 부족하다. 사랑을 줘야 한다’며 마음 아파하셨지. 너희 형제들과 등대원 아이들에게 밥도 같이 먹이고 비타민 같은 약도 똑같이 나눠주셨어. 그런데 너는 주는 약이며 밥을 다 안 먹고 ‘등대원 친구들이 더 먹어야 한다’며 갖다 주는 거야. 어린애가 양보를 잘했던 모습이 이상해서 기억이 난다.”
부모님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해야 했다. 당시로선 큰 수술이라 광주까지 가야 하는데 구급차도 택시도 없었다. 트럭에 탄 채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덜컹거리며 5시간을 달려 광주로 갔다. 밤늦게 수술이 끝났는데 의사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픈데 울지도 않고 참는 게 어른 같았다고. 그런 나를 사람들은 ‘방울새’라 불렀다. 친척 언니가 그 의미를 알려줬다.
“마을 어른들에게 씩씩하게 인사하고 생글생글 웃는 게 ‘방울새’ 같았지. 항상 웃는 낯이니 ‘늘 좋은 일이 있구나’ 생각할 정도였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부담을 지워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공부도 스스로 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리지 않았지만, 성적은 꽤 좋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의 큰아버지 댁에 가서 살게 되면서 지방과 도시의 학력 격차를 경험했다. 해남에선 덧셈 뺄셈만 배우고 갔는데 광주에선 이미 비율이며 소수 같은 것을 배우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해남초등학교에선 공부를 꽤 했는데, 광주에 가니 열등생으로 밀려났다. 학급석차대로 앞에서부터 앉혔는데 내 자리는 뒷문 바로 옆이었다. 6개월 뒤 전남여중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 전남에선 최고로 꼽히던 명문학교였다. 우리 반에선 나를 포함해 단 5명만 합격했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1) 호텔 지하에 의상실 열고 디자이너로 첫 발
부모 보살핌 없이 지내던 학창시절, 절제하며 모범생으로 지내…졸업 후 국제복장학원 입학
이광희 디자이너가 1971년 서울 이화여고 시절, 교정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시던 부모님은 당신 자식들을 광주 큰집에 보내 자라게 했다. 자식들과 편애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로 간 뒤 부모님의 보살핌 없이 해야 할 일들을 홀로 알아서 했다. 학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전남여자중학교 2학년 때였다. 선생님이 선행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니 시상식에 참석하라고 했다. 학교에서 주는 상이 아니었다. 지금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이름을 바꾼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전라남도 지역 학생 중 한명만 뽑아 주는 상이었다. 그런 큰 상인데도 받지 않겠다며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단순한 반항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왜 그런 상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크고 작게 남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굳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더구나 성경은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 상을 받는 것이 괜스레 쑥스러웠다.
서울에 올라와 이화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일찍 어른이 된 것 같다. 목사의 자녀라는 책임감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갖게 됐다. 그때 스스로 여러 가지 절제 시험을 했다. 기억에 남는 테스트는 일주일간 묵언으로 지내보기였다.
언젠가 함석헌 선생님이 아버지께 편지를 쓰신 적이 있다. 아버지의 성함, 이준묵 중 마지막 ‘묵’이 좋다는 내용이 있었다. 바로 한자의 ‘잠잠할 묵(默)’이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평소 말을 적게 하고 절제하셨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침묵하는 모습이 닮아있었다. 입술로 말하지 않고 몸으로, 행동으로, 실천으로 말씀하셨다. 나도 말만 많이 하고 실천하지 않는 어른이 되지 않도록 가끔 말 안하고 일주일간 지내기를 시험해보곤 했다.
이 밖에도 추운 겨울 외투를 입지 않은 채 교복만 입고 추위를 견뎌보기, 똑바로 앉아서 두세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기 등 스스로 절제하는 훈련을 했다. 어린 마음에 나름 치열한 훈련이었고 그때의 경험 덕에 절제하는 습관이 몸에 배이게 됐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대학 입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대학에 가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평생의 직업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졸업 후 시집 잘 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대학에 간다는 게 나로서는 회의가 들었다.
마침 큰 오빠가 졸업 후에도 사회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실용학문을 배우라며 이화여대 비서학과를 추천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 생활엔 큰 흥미가 없었다. 당시 인기 있던 ‘메이데이 축제’에도 가지 않고 책만 읽었다. 졸업 후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 국제복장학원에 들어갔고 졸업 후 1979년 하얏트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었다. 그렇게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2) 정도 지키며 옷 만들다 보니 어느새 ‘톱 디자이너’
역대 퍼스트레이디 옷 가장 많이 만들어 드라마서 배우 입고 나와 대중에게 인기
이광희(왼쪽) 디자이너가 2000년 대한민국 디자인상을 수상한 뒤 국제복장학원 설립자인 한국 패션계 대모 최경자 선생과 찍은 사진.
대학교수로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은 남편은 가끔 나를 ‘둔순이’라고 놀린다. 성격이 털털해 뭐든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색을 구별하거나 조화를 보는 눈은 놀랍다고 한다. 나의 감각이 그런 방면으로 쏠린 모양이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전공과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섰다. 패션이었다. ‘남의 글 타이핑 치는 것보다 내 일을 하자’며 진로 고민을 하던 중 ‘좋아하는 게 힘’이라는 생각에 자연스레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
국제패션연구원에서 의상을 공부하고 1979년 하얏트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었다. ‘당신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 드립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자작부인이란 뜻의 바이카운티스 부티크를 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톱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대 중반, 조금은 이른 나이였다.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맞춤복’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로 알려지면서 상류층 여성들이 찾기 시작했다. 대기업 오너 부인들은 단골손님이 됐고 유명 음악가들은 연주복으로 입기 시작했다. 앙드레 김과 함께 ‘오트 쿠튀르’를 상징하는 디자이너가 됐다.
3김 시대 정치인 사모님들도 찾아왔다. 이희호 여사와 김윤옥 여사의 의상은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전부터 담당했고 나는 역대 퍼스트레이디의 옷을 가장 많이 만든 디자이너가 됐다.
대중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1984년 당시 최고 인기드라마였던 ‘사랑과 진실’에서 배우 원미경이 내 옷을 입은 뒤 ‘이광희’란 브랜드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 선을 볼 때 ‘이광희’ 옷을 입고 나가면 혼사도 잘 이뤄지고 결혼하면 잘 산다는 말이 회자됐다.
이렇게 ‘톱’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마음에 간직했던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 원칙은 아버지와 어머니 말씀이다. 평생 ‘참’을 찾아 사셨던 아버지는 내가 디자이너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오직 ‘정도를 걸어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혼을 박아서 일하라’는 어머니의 말씀과 함께 내가 일하는 방법으로 자리했다.
두 번째 원칙은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7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처럼 일을 하는 방법에서 선택의 순간이 있을 때면 쉬운 길 대신 어려운 쪽을 선택했다.
정도를 지키고 혼을 담아 어렵게 옷을 만든다는 것은 정성을 다해 옷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유명세를 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상류층 패션 디자이너라는 일이 내게 맞는 일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스웨터와 외투를 만들어 주시는데, 그 딸은 최상류층이 찾는 비싼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됐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명쾌한 답을 주셨다.
“너는 너대로 거기서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여기 해남에서 일을 하는 건 네 역할이 아니다. 네 역할은 디자이너라는 너의 직분을 잘 해내는 것이다.”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일을 맡긴다’는 해법을 주셨다. 그렇게 답은 찾았지만,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3) 패션 디자인을 예술로… 선구자·개척자의 삶
내 이름 건 브랜드로 패션쇼 큰 성공 후 유명 예술인들과 작품·무대장치 콜라보
이광희 디자이너는 1993년 대전엑스포 문화행사 대표로 패션쇼를 진행하면서 우제길 화백 작품의 주제인 ‘빛과 그림’을 옷과 무대장치에 적용했다. 국민일보DB
1980~90년대는 패션을 과소비나 사치를 조장하는 사업으로 여기던 때였다.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편견도 컸다.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패션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생활문화의 한 영역이라는 인식을 심는 게 내게 주어진 임무라 여겼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옷을 만들겠다’는 평소 기도제목과도 일맥상통했다.
패션을 예술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은 86년부터 시작됐다. ‘이광희 룩스’라는 내 이름을 건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진행한 대규모 패션쇼였다. 국내 디자이너로선 처음으로 정기 컬렉션을 하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윤형주씨가 총감독을, 김중만 작가가 사진 작품을 맡았다. 의상에 걸맞은 무대장식부터 테이블 세팅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하게 종합예술의 면모를 갖추도록 노력했다.
88년 서울올림픽기념 초청패션쇼에선 ‘살아 움직이는 전시회’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가로 15m, 세로 9m에 달하는 무대 위 대형 배경막(백드롭)에 재불 화가 이항성 화백의 순수 회화작품 40여점을 올렸다. 국내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선생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이 함께하는 패션쇼로 진행해 화제가 됐다. 지금이야 장르 간 융합인 콜라보레이션이 일반화됐지만, 33년 전 이러한 시도는 문화적 충격을 줬다.
93년 대전엑스포에서는 문화행사 대표로 참석해 우제길 화백의 주제인 ‘빛과 그림’을 옷과 무대장치에 도입했고 김창희 윤영자 선생님 등 조각가,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지속했다.
92년부터는 남산자락에 ‘갤러리 룩스’를 오픈해 살롱문화를 보급했다. 크고 작은 패션쇼와 음악회 미술전시회 문화강좌 등을 열면서 패션이 생활문화의 한 장르임을 알리려 했다.
창작활동을 인정받아 94년 아시아패션진흥협회가 정한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상’의 국내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고 2000년 대통령 산업포장을 받았다. 클래식 공연에만 무대를 내줬던 호암아트홀이나 예술의전당 등에서도 패션쇼를 개최할 수 있게 됐다. ‘패션이 예술이냐’는 비판을 도전과 노력으로 뒤집은 것이다.
2000년엔 해외 명품들이 장악한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의 파라디아 명품관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국내 브랜드에는 명품이 없다는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때 백화점 입점을 위해 인터뷰했던 내용도 기억이 난다.
“일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백화점 사장의 질문에 나는 “원래 사는 게 힘든 것 아니냐”고 답했다. 일을 쉽게 하지 말고 편한 것을 견제하자. 이게 일천한 경험을 통해 얻은 내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쉽게 하는 방법들에 유혹도 받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어떻게 사느냐’와 같은 과제라고 생각했다. 일을 쉽게 하려는 것은 내 삶을 쉽게 던져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기며 나 자신의 마음을 다지곤 했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4) 화려함 뒤에 숨은 시련… 어머니 말씀 떠올리며 이겨내
성격부터 맞지 않았던 패션사업 억울하고 힘든 일 생길 때마다 ‘주신대로 받아라’는 말씀 버팀목
이광희 디자이너가 2009년 패션쇼에서 선보인 웨딩드레스. 어머니 김수덕 사모가 일생동안 품었던 십자가의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
화려해 보이는 디자이너로 승승장구했던 이야기만 하니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다. ‘내 것’이라고 이뤄놓은 물질들을 다 흘려보낸 적도 있다.
우선 성격부터 사업과 맞지 않아 힘들었다. 패션사업이라는 게 미적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영업과 판매 감각도 필요한데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많아 사람들에게 말도 걸지 못했다. 고객이 오면 화장실에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얼굴을 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말이 없으니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희망고를 시작한 뒤 예전과 비할 수 없이 외향적으로 바꼈지만, 낯선 사람들과 말을 많이 나눈 날은 아직도 힘들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다행히 내 인생철학은 남의 시선보다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에 더 집중했다.
고객이 옷 한 벌을 맞추면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선보이기 위해 정기컬렉션도 1년에 2~3회씩 열었다. 작업량도 많고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부담이 컸지만 말이다.
디자이너 일을 한 지 20년째 됐을 때다. 내 것이라고 어렵게 하나 갖게 된 것이 바로 남산의 본점이었다.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공들여 가꿔놨던 본점을 1995년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을 위해 서울시에 내놔야 했을 때는 서운하고 아쉬웠다.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은 언젠가는 두고 가는 것이고 그 시기가 조금 빨리 온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자유로워졌던 기억이 난다
디자이너 40년, 이처럼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날 버티게 한 건 어머니의 “주신대로 받아라”는 말씀이었다. 덕분에 힘들 때마다 나는 “나라고 이런 일 겪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이 일을 통해 내가 배우고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려움도 해결되곤 했다.
언젠가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옛날 어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일이 많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깊은 산으로 길을 떠났단다. 그런데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더 성가신 것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피하고 싶은 역경이나 힘든 고비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성경은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난을 주신다”(고전 10:13)고 하셨다. 어려움도 다 감당할 만큼 주신다.
‘창조적 고통’을 쓴 폴 투르니에는 고통을,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했다. 고통 자체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 없이는 인간이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상처가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치료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구름이 각양각색이듯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고비도 다양한 형태로 온다. 나는 언젠가 구름이 꼭 걷히어 해가 날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산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5) 어머니 “선한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 당부
패션은 아름다움 추구하고 나누는 것… 자선쇼 열어 소외된 이웃에 나눔 실천
이광희 디자이너가 2009년 11월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희망의 망고나무 심기 패션쇼’가 끝난 뒤 모델들과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 모델의 옷 가슴 부분에 어머니 사진이 있다. 국민일보DB
생전의 어머니가 아흔이 되실 무렵의 일이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드렸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세요.”
어머니의 답은 의외였다. “너는 지금 어느 선(線)에 서 있느냐”를 자문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나는 지금 어느 선에 속해 있는지 생각하고 있다”고 첨언하셨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경계 가운데 지금 내가 어느 경계, 어느 선에 서 있는지를 어머니는 묻고 계셨다. 그 경계에서 내가 선택해야 할 답은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말씀해 오셨다.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내일로 미루지 말아라. 내일로 미루면 악한 일이 된다”고 말이다.
디자이너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선쇼였다. 1992년 서울 힐튼호텔에서 무의탁 노인을 위한 기금 마련 패션쇼를 연 뒤 다양한 주제로 자선쇼를 열었다.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장애인 치료센터와 발달장애인 재활시설을 건립하기 위해 기금을 모았다. 신장병 어린이와 루푸스 환자, 아버지를 기리는 이준묵목사재단, 한국유방재단을 돕기 위한 패션쇼도 열었다.
단순히 어머니의 말씀 때문에 자선쇼를 열었던 건 아니었다. 소외된 이웃을 도울 방법을 찾던 중,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은 어디에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실천 방법을 몰라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패션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나누는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 고객과 주변 지인들 모두가 동참할 방법을 고민했고 그렇게 찾은 답이 자선쇼였다.
디자이너의 삶을 두고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고민하던 것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기 위한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선쇼는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 2000년부터는 연말마다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전시회도 열었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누구나 다 좋아하는 날이다. 이런 날 예수님 오심을 알리고 축제를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겠다 싶었다. 자선쇼 마스코트인 ‘수호천사 인형’은 인기리에 팔렸고 그 수익금은 해마다 결손가정 노인 100가구 이상을 돕는 데 사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선쇼와 전시회 덕에 희망고 프로젝트를 쉽게 시작한 게 아닐까 싶다. 달라진 게 있다면 수호천사가 망고나무 심어주기로 바뀐 정도니 말이다.
사람들은 나눔이, 주는 게 아니라 얻는 것이라 한다. 시간이 흘러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풍족하게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풍성한 존재가 돼 있기를 소망해 본다.
‘디자이너의 길이 내 길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의 답도 찾았다. 2009년 희망고를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기 위해 외교통상부 담당 국장과 인터뷰 자리를 가졌다. 유명 디자이너가 생뚱맞게 아프리카를 돕는 NGO를 만들겠다고 한 이유가 궁금했던 국장은 나와 한참 대화를 한 뒤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이걸 하려고 패션을 했나 봐요.” 그러고는 사단법인을 승인하는 서류에 결재를 했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6) 헐벗은 톤즈 살릴 망고나무 심기를 시작하다
은퇴 생각할 무렵 떠난 아프리카 봉사… 고통에 허덕이던 톤즈와 운명적 만남
이광희 디자이너가 2010년 8월 아프리카 동북부 남수단의 톤즈에 ‘희망의 망고나무’ 프로젝트인 망고나무를 심기 위해 묘목을 들고 있다.
눈 씻고 봐야 먹을 것이라곤 풀뿌리도 없었다. 고기는커녕 계란도 없었다. 힘들게 구한 계란 한 알, 껍데기를 ‘탁’하고 깼다. 그릇 위로 주르륵 힘없이 쏟아지는 흰자, 허전했다. 노른자가 없었다. 아프리카 동북부 남수단 와랍주 톤즈는 그런 곳이었다. 닭조차 뜨거운 날씨에 시달리고 제대로 영양도 섭취하지 못해 노른자 없는 달걀을 낳는 땅.
그런 톤즈를 2009년 3월 운명처럼 만났다. 60세가 넘어 은퇴하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무렵이었으니 운명처럼 만났다는 말이 적확할 것 같다.
평소 친분이 있던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이 월드비전 봉사를 가신다기에 호기심에 따라간 곳이 톤즈였다. 남수단은 30년 넘게 내전을 치르면서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가 하필이면 한창 건기였다. 성경에 나오는 광야가 이럴까. 뙤약볕에 바싹 마른 땅과 들판에는 먹을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천막을 방문했더니 아버지는 전쟁, 엄마는 에이즈로 잃은 남매 4명이 있었다. 아이들은 쌀 한 줌으로 건기인 2개월을 버텨야 했다.
강물을 마시고 콜레라로 800여명이 죽었다는 톤즈 강에서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났다. 강가에 앉아 쉬고 있는데 바닥이 보일 듯 말라버린 강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주운 소년이 흡족한 표정으로 내 앞을 지나갔다. 장난으로 “그 물고기 나 줄래”라고 했더니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배시시 웃으며 불쑥 생선을 내밀었다. 그 순박함에 나도 모르게 꼬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척박한 그 땅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섬겼던 해남등대원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만약 이 땅의 아이들을 봤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니 내가 해야 할 일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건기에도 먹을 수 있는 것부터 찾았지만 막막했다. 어느 날 망고가 눈에 띄었다. 망고는 열량과 영양이 풍부한 데다 심으면 7년 뒤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해 100년 동안 해마다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톤즈 사람들에게 망고나무를 갖는 것은 가게 하나를 갖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망고나무조차 드물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망고나무 몇 그루 덕분에 아이 셋을 키웠다는 한 과부의 이야기가 내게 용기를 줬다.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고린도전서 3장 7절 말씀이 떠올랐다. 황량한 톤즈 땅에서 망고나무가 뿅뿅 솟아나는 게 보이는 듯했다. 당장 수중에 있는 돈을 털어 100그루의 묘목을 심어줬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예전과 다른 나였다. 귀국 다음 날 적은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치질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라고.
이상하게도 톤즈 생각이 자꾸 났다. 그곳에서 봤던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무엇 때문일까. 다시 가고 싶고 그들과 함께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을 꽉 메웠다. ‘심장이 뛰는 일’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7) 톤즈 주민 꿈과 희망 안고 ‘희망의 북소리’ 둥둥둥
‘현지 주민에 실질적 도움 주자’ 목표로 ‘희망고’ 세우고 망고나무 심기 시작
이광희 디자이너가 2010년 8월 ‘희망의 망고나무’ 프로젝트를 위해 찾은 아프리카 동북부 남수단의 톤즈에서 아이를 안고 밝게 웃고 있다.
톤즈를 보며 떠오른 생각, ‘어머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는 희망고의 시작이 됐다. 희망고의 중심엔 ‘엄마의 마음’이 자리했다.
희망고는 ‘희망의 망고나무’ ‘희망의 북소리’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브랜드 전문가인 남편 홍성태 한양대 교수가 만들어준 이름이다.
희망고를 운영하기 위해 목표도 세웠다. ‘누구도 가기 어렵고 힘든 곳을 찾아 작은 힘이지만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도와주고 싶은 것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들과 함께 꿈과 희망을 만들겠다’는 다짐도 했다.
2009년 11월 외교통상부 산하 비영리민간단체인 희망고를 세우고 그리워하던 톤즈 주민들을 만나러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
그곳에서 예상 밖 광경을 만났다. 1년여 전 사막처럼 황량하고 마른 잡초만 무성했던 들판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기 때 톤즈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다. 소가 먹을 거친 풀은 풍성한데 사람 먹을 채소 한 뿌리 구경할 수 없다는 게 신기했다. 만약 내가 1년 전 건기가 아닌 우기 때 이곳에 왔다면 망고나무를 심어줄 생각은 못 했을 것 같다. 하나님이 나를 건기에 보내주셨음에 감사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내게 묻는다. 그곳 주민들은 왜 망고나무 심을 생각을 안 했냐고 말이다. 당시 내가 썼던 메모가 답이 될지 모르겠다.
“왜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고 무지하다고 하지. 그냥 그들의 시간은 늦게 가고 있을 뿐인데. 지금 그들의 모습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있었지 않았을까. 먼저 배운 우리가 시행착오 없이 가르쳐 주면 된다. 결국, 우린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니까.”
실제 그들의 시간에 망고나무는 없었다. 당장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나무를 키워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지역은 비가 내리면 땅이 움푹 팰 정도로 억세게 쏟아졌다. 묘목도 폭우를 버티지 못해 다 죽었다. 때로 염소가 뜯어 먹기도 했다.
그들의 시간에 망고나무를 심고 키우는 방법까지 알려주기로 했다. 농사 전문가들에게 물어 비를 피할 수 있는 묘목장부터 만들었다. 씨앗을 심어 묘목을 키우는 방법, 묘목을 심기 전 땅을 파서 소와 염소의 배설물로 땅을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도 교육시켰다. 30㎝ 정도 되는 묘목을 심은 뒤엔 가축들이 해치지 않도록 대나무 울타리를 치는 법도 가르쳤다.
그렇게 한 그루, 두 그루 심기 시작해 지금까지 4만여 그루를 심었다. 1992년부터 열었던 자선쇼는 ‘희망의 망고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 더 크게, 더 자주 열었다. 15달러 정도의 망고나무 한 그루로 한 어린 생명이 평생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다.
어렸을 적 할머니랑 같이 불렀던 찬송가 233장(새찬송가 242장)이 시나브로 떠오르곤 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맑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
***[역경의 열매] 이광희 (18) 망고 열매가 열리기까지 7년… 경제적 자립 도와
꾸준히 봉사하는 모습에 군수 신뢰 얻어 무상으로 땅 제공 받아 NGO 인증 받고 ‘희망고 빌리지’ 완공
이광희 디자이너로부터 재봉 기술을 배운 톤즈 주민들이 2013년 4월 ‘희망고 마을 축제’에서 직접 만든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축제는 2010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남수단 톤즈를 ‘나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으로 바라보니 톤즈의 주민들은 나의 형제요 자매였다. 망고나무를 심어주는 데서 나아가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기로 했다.
2011년 8월 큰아들과 톤즈를 다시 찾았다. 남수단이 수단으로부터 독립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톤즈 군수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NGO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묘목인 망고나무가 자라 열매 맺기까지 걸리는 시간, 7년을 위해서였다. 망고 열매가 열리기 전까지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싶었다. 희망고의 설립이유가 ‘엄마의 마음’인 것처럼 초점도 톤즈의 아이들이 아닌 엄마에 맞췄다. 엄마 한 명이 자립하면 아이 열 명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군수에게 “당신과 내가 가족 같은 마음으로 시스터와 브라더라고 생각하고 믿는다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나도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군수도 “좋다. 지난 3년간 마마 리는 최선을 다해 약속을 지켰다”는 말로 화답했다. 마마 리(Mama Lee)는 톤즈에서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실 2009년 나를 처음 만났을 당시 군수는 톤즈를 돕겠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도움을 주겠다며 찾아온 외부인 중 다시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니 나 역시 그럴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3년간 나는 망고나무 묘목을 들고 꾸준히 톤즈를 찾았다. 실과 바늘도 부족한 그곳에서 여성 주민들에게 옷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망고나무 심는 날엔 함께 음식을 준비하며 ‘희망고 마을 축제’도 열었다. 축제에선 ‘서머 톤즈 룩’이라는 패션쇼도 열었다. 트럭 짐칸 위에 마련한 간이 무대였지만, 그들이 직접 만든 의상에 톤즈 사람들은 환호했다.
군수가 신뢰를 보여주자 용기가 생겼던 것 같다.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면서도 “오늘 중 땅을 결정해줘야 한다”고 했다. NGO 허가를 받으려면 당장 토지가 필요한데 내일이면 나는 한국으로 떠나야 해서다.
군수가 바로 땅을 보러 가자고 했고 우리 아들이 동행했다. 그날 저녁 아들이 토지서류를 흔들며 나에게 뛰어왔다. 1만평의 땅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톤즈에서 구호단체는 물론 개인에게 이런 큰 땅을 허가하기는 처음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 소중한 땅에 ‘희망고 빌리지’를 세우기로 했다. 엄마들은 재봉과 미용기술 등을 배우고 아이들은 바로 옆 탁아소에서 놀고 아버지는 작업장에서 의자나 침대 등 가구를 만드는 곳, 그곳이 바로 희망고 빌리지였다.
2011년 10월 우리나라 단체로는 처음으로 국제NGO 인증을 받았다. 그리고 1년 뒤 희망고 빌리지가 완공됐다.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에 엄마가 만든 교복을 입고 등교해 목공 기술을 배운 아빠가 만든 책걸상에 앉았다.
희망고를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때 외교통상부 담당 국장으로 만났던 조대식 전 리비아 대사는 국제NGO로 발돋움한 것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20년간 사람들 겉모습에 아름다움을 채웠고 이제는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채워주시네요. 한결같이 아름다움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시는군요”라는 그의 격려에 내 가슴은 불이 붙은 듯 뜨거워졌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19) 사진 속 한센인 생각에 온종일 눈물이…
톤즈에서 미처 돌보지 못한 사람 찾다 한센인 발견하고 복합센터 지어 후원
이광희 디자이너가 지난해 2월 남수단 톤즈의 한센인복합센터 공사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 사람들이 해가 질 무렵 사물의 윤곽이 흐려져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뜻으로 쓰는 표현이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의 광야에 그 시간이 찾아왔다. 톤즈에서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찾아 트럭에 싣고 온 밀가루를 나눠주고 현장에서 막 철수하려던 참이었다. 저 멀리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성큼성큼 내가 탄 트럭으로 다가왔다. 190㎝를 넘는 딩카족 남성은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한쪽은 녹은 것처럼 무너져 눈도 사라졌다. 왼쪽 팔도 없었다.
나를 해칠 늑대라 여겼을까, 섬뜩했다. 조심스럽게 차창과 문을 잠갔다. 잠시 후 그 남자가 밀가루를 받지 못해 절박한 심정으로 트럭을 찾아 왔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2015년 2월 그 남자와의 만남은 새로운 시작이 됐다. 한센인을 위한 공간을 짓는 일 말이다.
물론 그 남자 때문에 즉흥적으로 결정한 건 아니었다. 매년 톤즈를 찾던 나는 1년 전인 2014년 무릎 수술을 받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를 대신해 희망고 직원을 톤즈에 보내며 숙제를 줬다. 그곳에서 우리가 돌보지 못한 어려운 사람이 누가 있는지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직원이 가져온 사진에 한센인들이 있었다. 의료사업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했고 사진만으로도 보기 부담스러워 덮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후 처음 톤즈를 다녀왔을 때처럼 뜨거운 눈물이 온종일 쏟아졌다. 새벽녘에는 특별한 꿈을 꿨다. 사진 속 한센인들이 말 그대로 ‘퍽퍽’ 내게 안기는 꿈이었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남편은 희망고 때와 달리 한센인 봉사는 말렸다. 그럴 만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한센병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는 한센인이 내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꾼 이후 두려움이 씻은 듯 없어졌다. 간절히 만나고 싶은 마음만 강해졌다.
목발을 하고 한센인들을 만나기 위해 톤즈로 떠났다. 그렇게 이 남자를 만났고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렸다. 600여명이 사는 한센인 마을에 예배 공간과 교육 및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마을에 사는 아이들을 위해 유치원도 준비하기로 했다.
2019년 8월 한센인 복합센터를 완공하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한국과 케냐의 유명 건축가와 선교사들이 사명감을 갖고 현장을 찾았다가 여러 이유로 돌아서면서 책임자가 여섯 차례 바뀌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세운 건 톤즈 사람들이었다. 벽돌을 날라 쌓고 정성껏 페인트칠하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내가 힘을 얻었다. ‘희망고 빌리지’ 재봉학교 졸업생들은 옷과 침대커버를 만들어줬다. 완공에 앞서 찾은 한센인 마을에서 그들은 내게 “너를 보내주신 하나님은 거룩하고 위대하시다” “약속을 지켜줘 고맙다”고 했다.
한센인 마을 가정에 두 달 치 밀가루를 준 뒤 그들과 신명 나는 잔치를 벌였다. 김혜자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너 정말 대단하다. 바늘로 바위를 뚫었구나” 말씀하셨다. 바늘로 옷을 만들던 내가 바늘로 바위를 뚫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20) 삽과 호미가 선물한 ‘달콤한 수박과 오이’
작물재배 불가능한 땅에 과일·채소 심어 스스로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
이광희 디자이너가 남수단 톤즈에 보낸 수박과 오이, 피망 씨앗은 2012년 9월 희망고 빌리지에 뿌려진 지 2개월 만에 열매를 맺었다.
올해 초 아프리카 동북부 남수단 톤즈의 한센인 마을에 대형 화물을 컨테이너에 실어 보냈다. 한센인 복합센터의 교회 옆에 세울 종탑의 철골 구조물이었다. 컨테이너에는 삽과 호미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전까지 삽과 호미는 톤즈에 필요 없는 물건이었을 것 같다. 건기 때 태양은 모기조차 살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우기엔 땅이 움푹 팰 정도로 강한 비가 쏟아졌다. 주민들은 채소나 과일을 키우는 건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삽과 호미는 그 땅에 농업을 알려주기 위한 시작이었다.
그동안 진행해 온 프로젝트 중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어려운 일들을 무수히 겪었고 식은땀 흘리며 잠 못 이룬 날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무슨 일인들 어려울까.
나를 믿고 후원해주신 분들을 향한 마음의 빚을 저버려선 안 되겠기에,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은 말이 있었다.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포기한 톤즈 땅에 작물이 자라는 것을 허락해 주실 것만 같았다. 그런 믿음에 신념을 더해 준 건 8년 전 경험이었다.
2012년의 일이었다. 망고나무 열매를 먹으려면 7년을 기다려야 하는 톤즈 주민들에게 또 다른 농작물을 선물하고 싶었다. 나눔이란 게 그랬다. 기회를 알려주는 것, 척박한 톤즈에 사는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길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과 한국의 농업 전문가들을 찾아가 톤즈에서 농작물을 키울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너무 더운 지역이라 작물 재배는 불가능하다’는 답만 들었다. 억울했다. 포기하기엔 광활한 대지와 태양, 비가 아까웠고 배고픈 사람이 너무 많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하늘이 알아서 키워주는 ‘뜰에 핀 백합’ 같은 과일과 채소를 찾았다. 물기가 많아 목마름을 달래줄 수박, 오이, 피망의 씨를 구해 톤즈의 희망고 직원에게 보냈다.
희망고 빌리지 한편에 뿌린 씨앗은 그해 9월 우기 때 폭우에 떠내려간 듯 보였다. 그런데 2개월 뒤 예상치 못한 광경이 톤즈 땅에 펼쳐졌다. 씨앗에서 싹이 나더니 열매가 맺혔다. 단물이 흐르는 수박은 일곱 덩이나 열렸고 길쭉한 오이도 줄기에 달렸다. 이메일로 사진을 받은 나는 감격에 겨워 며칠 밤잠을 설쳤다. 사진 속 땅은 마치 나에게 “왜 이제야 씨앗을 뿌렸냐”고 말을 거는 듯했다.
“오이가 열렸네. 그 덥고 메마른 땅에서 오이 한 입만 먹어도 살 일이지. 아프리카를 살린 거야.”
톤즈의 척박한 환경을 같이 봤던 김혜자 선생님도 내 손을 어루만지며 감격했다. 와랍 주지사도 이메일로 “세계에서 가장 굶주린 주민들에게 엄청난 소식을 줬다. 수백만 번 기쁘고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2015년 남수단 현지 언론인 주바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지인들이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더 창의적이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돼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삽과 호미는 바로 그런 날을 앞당겨 줄 존재였다.
***[역경의 열매] 이광희 (21·끝) ‘희망고’는 어머니의 꿈… 내 안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
망고나무 프로젝트 진행하며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 말씀 되새겨… 아프리카 식구들 삶에 희망 샘솟기를
이광희 디자이너가 2013년 4월 아프리카 동북부 남수단의 톤즈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국민일보를 통해 희망고를 소개할 기회를 갖게 됐을 때 가졌던 마음이다.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많은 분과 나누며 흐트러졌던 내 마음을 바로잡고 나아가길 하나님이 바라셔서 허락해주신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재하면서 그동안 드러내놓지 못했던 걸 말하게 하시고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잘못과 실수들을 떠올리며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 같아 감사했다.
나는 적성에 맞지도 않는 사업이라는 걸 하면서 수많은 일을 겪었고 마음고생도 제법 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하나님이 당신한테 무슨 일을 맡기시려고 이렇게 많은 연단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며 위로했다.
마침내 만난 게 희망고였다. 희망고는 어머니의 꿈이었음을 알게 됐고 지난 10년간 진행한 ‘희망의 망고나무 프로젝트’는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한 세월이었던 것 같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을 ‘장한 사람’이라 부르시곤 하셨다. 만약 어머니가 배고픔, 아픔, 고통의 앞에서도 태연하게 견디며 웃고 춤추고 노래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셨다면 장한 사람이라며 얼마나 칭찬하셨을까 상상해 본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신 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가 우리에게 주신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분이 “왜 하필 아프리카냐, 애 하필 한센인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냥 심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하니까 보고 싶고 가고 싶었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손잡고 해보고 싶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많이 하신다. “어떤 외부의 어려움보다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이라고 말씀드리곤 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내가 끝까지 투쟁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두려움이 사라졌다.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희망고를 진행하면서 내가 의지했던 구절이다. 희망고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분께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알기에 담담하게 일할 수 있었다.
올 한 해 안식년을 가지며 나는 톤즈에 가 있으려고 했지만, 코로나로 무산됐다. 모든 길이 막혀 언제 갈 수 있을지 막연한 가운데 오늘도 기도 내용은 한결같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제게 주신 시간 안에서 아버지께서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그 안에 숨겨진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잘 깨달을 수 있는 성숙한 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제게 맡겨주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무조건 감사히 받고 기쁘게 순종하리라 다짐합니다. 그리고 제가 잘못할 때는 용서하지 마옵시고 심하게 꾸짖고 벌을 주시어 빨리 바로 잡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프리카 식구들에게 ‘희망’이란 단어가 그들 삶의 중심이 되는 날을 꿈꾸며 나의 얘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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