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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5(음0115) SUN 낙동강(洛東江|Nakdonggang River)
█ 나의 하루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도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며
저녁 잠자리에 들 때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게 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19950101(음1201) SUN
Mundy Sung
█ 처녀 뱃사공-황정자/오유진/송가인
트롯 공주님의 무대 보고 오시죠♨ ‘오유진 - 처녀 뱃사공’ [트롯매직유랑단] | KBS 210421 방송 - YouTube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트롯여신 송가인이 부르는- [처녀뱃사공♬] | KBS 방송 - YouTube
■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
- 靑馬 유치환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 꽃잎이
흘러 흘러 三浪(삼랑)의 여울목을 떠 내릴 적은
기름진 옛 駕洛(가락) 백리 벌에
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나일」이여,「유프라테스」여, 「간지스」여, 「황하」여,
그리고 동방의 조그만한 어머니 낙동이여
저 천지 개안(開眼)의 아득한 비로삼날부터
하늘과 땅을 갈라 흘러 멎음 없는 너희는
진실로 인류의 거룩한 예지의 젖줄
여기는 아시아 노 대륙!
일찍 북방의 암울한 삼림과 야성을 미워하던 한 젊은 족속이
검은 산맥을 넘어 햇빛 바른 복된 땅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헤메이다가
마침내 창망(滄茫)한 대해로 환히 열려 트인 작은
반도도 남쪽 자락,
물 맑고 줄기 순한, 여기 너의 가슴을 터잡고 깃든 그날로
낙동의 어진 흐름이여, 차라리 너는
순탄하고 가난한 계레와 더불어 그 애달픈 삶을 바닥하고
저 이름도 없는 외로운 부족에서
변진(弁辰)으로, 가락(駕洛)으로, 신라로, 고려로, 또 조선으로
만년을 세로 용용히 오늘토록 흐르거니,
흘러 흘러 쉬임없는 가람이여,
너의 줄기찬 흐름 곳
슬고 일던 뭇 왕조의 흥망과 교체사
너 위에 생겼다 사라지는 속절없는 소용돌이 물거품!
그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질탕한 연월(烟月)의 침부(沈浮)에도
애달픈 족속은 오직 너를 젖줄하고 면면히 목숨 하여 왔거니
짐짓 가는 자 밤과 낮을 가리잖아
이같이 어제 물이 오늘 물 아니요
오늘 사람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로되
너와 더불어 이뤄진 허구한 영욕(榮辱)의 사모친 기억인즉
너만이 길이길이 간직하고 전하리라.
너그럽고도 복된 낙동의 가람이여.
연연 칠백리 그리운 너의 품안으로 안겨드는 무수한
사랑인 노래들--
眉川(미천), 胃川(위천), 甘川(감천), 會川(회천), 春陽川(춘양천), 乃城川(내성천),과 潁江(영강), 黃江(황강), 南江(남강),
琴湖江(금호강), 密陽江(밀양강)
다시 그들에로 달려오는 작고 큰 뭇 개울이며 하천은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철 따라 명암하는 강산의 저 골짝,
이 들녘, 그 언덕
아침 안개 저녁 놀에 펼쳐지는 죄 없는 삶들의 변죽을
굽이굽이 씻어 흘러
가난하고도 후덕하고 숫되고도 완고하고 슬기롭고도
무지하고 어질하고도 비굴하고 대범하고도 용렬하고
질기고도 인종(忍從)하므로
무수히 빚어나는 웃음과 울음과 한숨과 노염과 그
가지가지의 애락을 어루만지고
달래고 또한 깡그리 거두어
저 망각과 귀일(歸一)의 지역, 창망(蒼茫)한 대해로
너는 흘러 보내거니
그러나 끝내 어질지만 않았다 노여운 강물이여,
물을 다스리는 자 천하를 다스린 다거니
네가 가긍하여 젖 주는 이 겨레의
두고두고 가난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
마침내 도도히 부풀은 탁류(濁流)의 분노로써
그 애달픈 전지(田地))며 가재며 불쌍한 생령마저
몇 번이나 너는 하루 아침 여지없이 헐벗겨 앗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보다 큰 인자한 다스림의 한 소치(所致)!
그러기에 노염에서 돌이킨 하나 뉘우침조차 없는
다시금 유유히 포옹하여 변함없이 흘러 있는 모습이여,
아아, 너는 진실로 겨레의 크낙한 어머니---
낙동(洛東)의 가람이요, 영원한 겨레의 젖줄이여,
사랑이여! 노래여!
█ 부산 문학에 비춰진 낙동강
우리는 흔히 낙동강(洛東江)을 민족의 젖줄이라 부른다.
강원도 태백산 줄기에서 발원하여 부산 명지, 하단포에 이르기까지 늠실늠실 유장하게 흐르며 많은 생명들을 잉태하고 살찌우기에 그렇다.
낙동강의 풍부한 수원으로 다양한 ‘강 것’들을 기르고, 비옥한 토지에서 풍성한 ‘먹거리’들을 생산해 사람들을 먹인다.
물줄기 곳곳에 마을을 만들고 너른 평야를 통해 오곡백과 풍요로운 곡창 지대를 들여앉혔다.
여러 나루와 장(場)에는 백화 만물(百貨萬物)이 넘쳐나고, 그 물자들로 사람들의 도시를 키워 냈다.
이렇듯 넉넉하고 풍성하여 ‘어머니’ 같이 자애로운 강이 바로 낙동강이다.
그러나 정작 낙동강 사람들의 삶은 곤고했다.
넉넉하고 풍성한 ‘어머니의 강’ 이면에는 잦은 홍수와 강의 범람 등 사납고 거친 자연재해가 도사리고 있었고, 강을 통한 외부 세력의 침략으로 수많은 약탈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낙동강의 면면한 흐름 속에는 ‘자연재해’와 ‘전쟁’, ‘침략’과 ‘수탈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이렇게 부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낙동강 유역의 사람들은 꿋꿋하게 이 강에 터를 잡고 끈질긴 삶을 이어 왔다.
현대에 와서는 산업화 과정에서의 오염원 유입과 낙동강 정비 사업 등 인위적인 토목 사업 등으로 인해 낙동강은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낙동강의 흐름을 후세들에게 맑고 푸르게 전해 주기 위한 문화 예술인들의 수많은 노력들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도 낙동강은 민족 역사의 희로애락을 떠안고 유구히 흘러왔고, 결국 그 역사의 흐름이 우리 민족의 구구절절했던 삶과 오버랩 되기에 낙동강은 우리 민족을 대변하는 민족의 강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의 낙동강은 부산 문인들에게도 여러 성격으로 비춰졌다.
‘유장 천 삼 백리’의 도도한 흐름의 장대함, 비옥한 토지의 풍요한 젖줄이 되어 주는 ‘대지의 어머니’ 등으로 묘사되는 반면, 모든 것을 쓸어 가는 냉혹한 약탈자의 모습으로도 변이된다.
또한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맞물려 민족의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매개물로 치환되기도 한다.
☼[한시에서 그려지는 낙동강 하루]
문학 속 낙동강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철마다 얼굴을 바꾸는 자연환경과 수많은 지리적 여건, 물길 따라 정착한 낙동강 사람들의 삶과 지역적 정서, 일제 강점기부터 6·25 전쟁, 근대화 과정의 역사적 사건 등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오롯이 담아 흘렀던 강이기에 그러하겠다.
낙동강은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그 유역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시대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끊임없이 내어 주는 넉넉한 젖줄이자 삶터였다.
강역에서 소금을 만들고, 오리 사냥과 고기잡이로 생업을 꾸려 갔던 것이다. 이러한 낙동강의 역동적인 삶을 옛 사람들도 주옥같은 시편으로 남기고 있다.
노지오염만곡우(鹵地熬鹽萬斛優)[염전에서 굽는 소금 만 섬이 넉넉하니]
일연강반상강주(一秊强半上江舟)[일 년의 거의 반은 배 타고 살아가네].
☛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시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 중에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과 녹산동의 강가 마을들은 낙동강의 완만한 흐름으로 하중도가 잘 형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바다와 맞닿은 명지도(鳴旨島) 등 하중도에는 깨끗한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 산업이 널리 발달했다.
특히 가마솥에서 구운 명지 소금은 맛도 좋고 품질도 최상품이라, 낙동강 하구의 생산품 중에서도 귀하고 중요한 특산품이었다.
‘소금 만 섬’에 ‘일 년의 거의 반’을 배로 부릴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던 것이다.
층명호묘출원하(層溟澔淼出圓荷)[구비진 바다 가득히, 둥근 연잎처럼 솟은 곳]
사십부연십백가(四十釜煙十百家)[마흔 개의 소금가마 연기에 수백 집이 먹고 살아 가네].
☛ [허훈의 시 「명호염연(鳴湖鹽烟)」 중에서]
허훈(許薰)[1836~1907]은 ‘둥근 연잎’ 모양을 한 명지도[현 명지동]와 그곳에서 염전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마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흔 개의 소금가마’에서 피어오르는 ‘소금가마 연기’는 명지도 마을의 독특한 풍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일가가사압귀(至日家家射鴨歸)[동지 되면 집집마다 오리 사냥 그만두니]
내주시후매전희(萊州市後賣全稀)[동래에선 동지장 지나면 전혀 사지 않는 때문이리]
이래흡유어장신(邇來恰有漁場信)[그래도 이 이후론 때마침 어장이 형성되어]
대구신상분외비(大口新嘗分外肥)[대구어의 새로운 맛 본래보다 더 살찌다네].
☛ [이학규의 시 「금관기속시」 중에서]
낙동강 포구에 오리가 많아 오리 사냥도 이 지역민들의 좋은 생계 수단이었는데, 이 오리의 수요지는 주로 동래였다.
왜인들이 오리 고기를 좋아하였으나 동지가 지나면 고기의 맛이 떨어진다 하여 매매가 중단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는 대구가 진해만 쪽으로 모여드는 계절이라, 대구잡이로 또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도두정마환호공(渡頭停馬喚蒿工)[나루터에 말을 매고 사공을 부르니]
강녀조주불외풍(江女操舟不畏風)[아낙네가 바람 두려워 않고 배 저어 오네]
어포범장노엽외(漁浦帆檣蘆葉外)[어촌 포구 배의 돛대는 갈대 잎 밖으로 보이고]
주촌리락행화중(酒村籬落杏花中)[주막 촌 울타리가 살구꽃 속에 있네]
산배칠점성형열(山排七點星形列)[산은 일곱 점의 별 모양으로 벌여 섰고]
수작삼차자화동(水作三叉字畵同)[물은 셋으로 갈려 글자 획과 한 가지로구나]
각망봉래지불원(卻望蓬萊知不遠)[봉래가 그리 멀지 않다는 걸 알겠네]
취량동반해연공(鷲梁東畔海連空)[취량 동쪽 가로 바다가 하늘에 이어졌네].
☛ [신익황의 시 「칠점산(七點山)」 중에서]
많은 선비들과 시인 묵객들이 수려한 낙동강의 절경에 반해 강을 노래했다. 신익황(申益愰)[1672~1722]도 칠점산과 삼차수 주변의 아름다운 낙동강 풍광을 잘 그려 내고 있다.
낙동강의 한가로운 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시편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 말을 매고 사공 아낙네의 배를 부르는데, 배 뒤로 멀리 살구꽃 핀 포구의 주막 촌이 정겹기만 하다.
나루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감동진(甘同津)의 구포 나루였으리라.
☼[풍요롭고 자애로운 어머니]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산 줄기에서 기나 긴 물길을 연다.
물길은 새로운 큰 물줄기를 만들고 일천삼백 리를 도도히 흘러 생명의 젖줄이 된다.
때문에 낙동강은 마치 어머니 품 같이 푸근한 사랑으로, 어릴 적 떠나왔던 꿈의 고향으로 풍요롭고 자애롭게 다가온다.
낙동강 명지 포구 느린 물길 앞에 눕다./ 대마등 샛바람이 억새밭으로 서걱서걱/ 어두운 귀 하나 맑게 씻어내다/ 모래톱 사이 늙은 어선 두어 척/ 물길 거슬러 명지도로 돌아가다./ 포구는 여인처럼 그 허벅진 몸 열어/ 낙동강- 참 오래된 길손과 긴 잠을 청하다/ 부화한 숭어 새끼 떼는 찰박찰박~/ 글썽이는 물결에 제 몸들 부비고/ 종소리로 우는 명지 앞바다/ 깊은 밤 내내 젖몸살로 뒤척이다.
☛ [최원준의 시 「북망(北邙) -명지 포구」 전문]
포구 마을은 평온하고 풍요롭다.
하구에 몸을 눕힌 강은 생명의 기운으로 ‘젖몸살’을 앓고, 갓 부화한 ‘숭어 새끼 떼’를 ‘찰박찰박’ 키워 낸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어선’에게 길을 열어 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귀’를 연다. 자애롭고 포근한 어머니의 전형이다.
꼬리 긴 물살이 지나간다./ 흘러가는 소리를 먹고 사는/ 때묻은 바람이 지나가는 둔치/ 물너울에 옷깃을 적시고 있다./ 은구슬처럼 날아가는 물수제비/ 오래 된 마을에 피는 무지개를 본다./ 물수제비 뜨는 소리로 피는/ 오래된 마을 흠뻑 무지개에 뜬다.
☛ [유병근의 시 「호포에서」 중에서]
삼랑진 가는 낙동강변/ 강가에 늘어선 물버들의 파란 싹들이/ 강에다 연두색 풀물을 들이고 있다.// 얼음물에 속옷을 헹궈 내던 어머니의/ 손마디마다 풀물이 배어든다.// 유년의 삶이 봄 햇살을 타고 강물 위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정오// 오십 년 전 앵돌아져 간 그가/ 봄 한나절 푸른 물든/ 저 강을 보고 있을까.// 강물이 지난 상처를 끌어당겨/ 흐르고 있다.// 물안개 일 듯 강바닥에 드리운/ 겨울 그림자들이 푸른 하늘 속으로/ 속속 빨려들고 있다.
☛ [이해웅의 시 「봄강」 전문]
한편 유병근, 이해웅의 시를 보면 낙동강은 대대손손 우리 민족이 살아왔던 곳이자 살아가야 할 곳이다.
이곳에는 ‘무지개가 뜨는 오래 된 마을’과 ‘속옷을 헹궈 내던 어머니’가 ‘지난 상처를 끌어당겨 흐르는’ 낙동강과 함께 길고 긴 역사로 흐른다.
대를 이어 가며 강변 마을에 살면서, 유년의 기억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살아 출렁이는 강물’로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이다.
☼[꿈속 고향 같은 이상향]
낙동강 대저 방면 제방[강서구 대저 2동]에는 낙동강을 주제로 아름다운 우정을 시로 나눈 시비가 하나 서 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과 박목월(朴木月)[1916~1978}의 시편들이다.
강은 봄물 들면서부터 푸른 바람과 맑은 물길을 내내 흘려보내고, 해가 저물고 밤이 오면 나그네 하나 반가이 맞이하는 마을을 하나 따뜻하게 내어 준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은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조지훈의 시 「완화삼」 전문]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의 시 「나그네」 전문]
박목월과 조지훈은 강 마을의 정한을 시로써 서로 화답하며 이상향을 노래했다.
‘물길 칠백 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그네 긴소매’가 꽃잎에 젖고 저녁노을의 강 마을에는 술이 익는다.
그 길 따라 나그네는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구름에 달 가듯이’ 이상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과 함께 평화롭게 흘러온 강을 떠올리면, 마치 꿈속 같이 편안하고 한 폭 그림처럼 그윽하다. 마치 두고 온 고향 마을이나 풍요로운 이상향의 장소와 다름 아닌 것이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변주]
낙동강의 그 깊고 은근한 흐름은 변치 않는 지고지순한 여인의 모습으로도 변환된다.
저물 무렵의 강을 지나며, 옛사랑을 못 잊어 ‘불에 덴 가슴’은 노을이 들고, 또 다시 그 가슴에 뜨겁게 ‘불’을 지피고 ‘피’를 지진다.
그해 가을의 강(江)이/ 필름을 감고 있다.// 차창이 바꾸어 찍는/ 몇 장 사진으로도/ 뜨거워라 불아 덴 가슴/ 갈피마다 노을이 든다.// 어디서 하늘이 밀려와/ 여기 이 江心을 태우는가.// 이제 안타까울 것도 없는/ 옛 낙형(烙刑)의 흔적 위에/ 누가 다시 불을 지피는가/ 단풍이 피를 지지는데.
☛ [김창근의 시 「물금을 지나며」 중에서]
한 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 이의 사랑하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마디 말없이 사랑하다가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 없이 송두리째 헤어지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비명 없이/ 찢어지기/ 강은 그렇습니다.
☛ [신진의 시 「강·헤어지는 사랑」 전문]
사랑하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마음은 어느 수줍은 첫사랑의 여인이나 강심(江心)이나 다를 바 없다.
속으로만 앓아오다 결국은 사랑의 고백조차 못하고 ‘송두리째 헤어지는 사랑’을 시인은 절정의 아름다움이라 노래한다.
☼[자연의 준엄한 심판자]
자애로운 ‘이상향의 고향’ 낙동강은, 한 번씩 대자연의 경외함을 잊지 말라는 듯 인간의 삶을 힘들게 옥죈다.
혹독하고 거친 분노의 화신으로 다가와 인간의 무지와 안일을 ‘자연의 재앙’으로 꾸짖는 준엄한 심판자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경배의 제단을 쌓게 하거나 제상(祭床)을 올리게 한다.
하늘 밖에서/ 강물이 타고 있다.// 개를 잡아/ 제사를 올리면/ 3일 만에/ 하늘로 부활하는 강물// 밤이/ 먹물을 풀어/ 높은 것 낮은 것 다 지워버려도/ 하늘 끝으로 이어지는/ 우리들의 숨줄이야 어쩌리// 말라붙은 물줄기를 따라/ 낙동강은/ 한 타래 순대국으로 끓고 있다.
☛ [박현서의 시 「낙동강·46 -제상(祭床)」 전문]
하늘이 가물어 인간의 세상에는 ‘강물이 타고’ 있다. ‘한 타래 순대국으로 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젖줄처럼 강물이 불어나기를 기원하며 ‘개를 잡아 제사’를 올린다.
강을 기대 사는 사람들에게는 ‘물줄기’가 ‘숨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유월 어느 날/ 낙동강 홍수 끝나고// 강변 모래톱에/ 꽃고무신 한 짝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네.// 아무도 모르리/ 강 건너 뱃사공 집 어린 소녀가/ 홍수에 떠밀려 죽어간 줄을// [중략]// 유월 어느 날/ 낙동강 홍수 끝나고// 강변 모래톱에/ 빈 물새 알 하나가/ 물결에 밀리고 있었네.// 아무도 모르리/ 어미 물새 슬피 울며 갈밭을/ 헤매다가 헤매다가 날아간 줄을.
☛ [이달희의 시 「홍수 끝나고 -낙동강·6」 중에서]
가뭄 뒤에는 또 홍수가 마을을 휩쓴다. 이렇듯 강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제물을 삼는다.
그것이 ‘뱃사공 집 어린 소녀’이든, ‘강변 모래톱에 빈 물새 알’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홍수는 인간이 강을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된 자연의 선전 포고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이기에 파국으로 맞서다]
이러한 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분별한 산업화와 난개발은 강을 ‘경외의 대상’에서 ‘이기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물길을 막아 물을 가두고, 낙동강 주변마다 공단이 들어선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많은 지류에서는 공단 폐수와 생활 하수를 낙동강으로 끊임없이 쏟아낸다.
하여 낙동강 주변 생태계는 숨이 막혀 ‘기침’을 하거나 아예 ‘흐르지 않는 강’이 되어 갔다. 강은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밤마다 강물은 기침을 한다./ 새들도 밤새도록 기침을 한다./ 작은 섬들도 따라 기침을 한다.
☛ [박철석의 시 「을숙도에서·2」 전문]
수만 년을 흘러서/ 오늘 이 하구(河口)에 다다른 너의 긴 여로는/ 죽음과 고뇌와 번민으로 시름하여/ 너의 말간 얼굴은/ 어느덧 타 버렸다.// 잃어버린 꿈과 같이/ 가슴에 흐느적거리는 슬픔을 안은 여인같이/ 너의 끊임없는 흐름을 멈추게 한 상채기/ 전신에 진창을 뒤집어씌우고/ 흐를 수 없게 먹물을 뿌린 사악한 손들/ 그것은 영혼을 뱉아 버린/ 마음이 가난한 백성들의 소행이었다.// 옛날에 흐르던 강은 멎고/ 지금은 남루한 삶의 찌꺼기/ 파멸한 삶의 목소리만 아우성친다.
☛ [김규태의 시 「흐르지 않는 강(江)」 전문]
새들은 더 이상 날아들지 않을 것이다./ 섬에서 불어오는 갈대바람과/ 어머니 살속 같은 모래벌에 유년을 부비며 커온/ 이곳 장림동(長林洞)의 아이들까지도/ 까마득히 잊게 될 것이다./ 태초에 새들이 살았고/ 새들 따라 정처 없이 떠나온 사람들/ 언제부턴가 땅을 일구며 살아 왔다는 것도/ 끝내는 잊게 될 것이다./ 어제의 새들이 어디론가 떠나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 [최영철의 시 「을숙도 근처」 전문]
인간의 오만한 자연 훼손은 결국 인간의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새들’과 ‘새들 따라 정처 없이 떠나온 사람들’도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죽음의 강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어머니의 살속 같은’ 강이 우리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죽음의 늪’으로 변해 감을 경고하고 있다.
☼[낙동강 보호에 목소리를 높이다]
이에 낙동강을 걱정하는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대한민국 최초의 순수한 민간 환경 단체인 낙동강보존회를 출범시킨다.
여기에서 특기할 부분은 「낙동강보존회 선언문」이다.
낙동강보존회에 의하면 「낙동강보존회 선언문」은 “환경 선언문으로는 대한민국 최초의 것이고, 1990년대에 들어와 활발하게 일어난 수많은 환경 운동의 정신적 정초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낙동강은 천연(天然)의 빛과 숨소리를 잃어가고 있다./ 푸른 하늘과 구름이 맑게 투영되던 강심(江心)은 이제 흐려져, 그 하늘빛과 그 구름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수려한 강변과 모래톱은 남루하여 강은 애타게 신음하고 있다. 푸르른 강물에 독(毒)한 갖가지 폐수를 버리는 저 자연 파괴의 손길 때문에 어족(魚簇)들은 병들어 가고, 새들은 오염된 강구(江口)의 모래톱에서 사라져 가는 먹이를 찾아 방황하고 있다. 빛과 푸름과 생기(生氣)와 숨소리를 잃어가는 낙동강을 살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고유한 임무요, 권리이다./ [중략]/ 한번 잃어버린 생태계는 복원되지 않으며, 어떤 대가(代價)로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자연의 평형이 깨뜨려지고 생태계(生態系)가 허물어진 곳에서는 조수(鳥獸)는 살 수 없으며, 조수가 살 수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우리 인간(人間)도 살아갈 수 없음은 자명(自明)한 일이다./ 자연 보호는 바로 인간의 보호임을 소리 높여 외치며, 다음과 같이 공동의 확신을 선언한다./ 낙동강은 우리 고장의 식수원(食水原)이기 때문에 당대(當代)와 후대(後代)들의 생존환경 확보를 위해서 최대한 보전(保全)되어야 한다./ 낙동강은 물, 토양, 대기(大氣), 어패, 조수류(鳥獸類)와 자연 생태계의 중요한 표본 종을 수용하고 있는 천연자원의 보고(寶庫)이므로 수질 오염, 대기 오염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낙동강의 환경은 그 환경의 자정(自淨) 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고농의 유독(有毒) 물질이 방출 투기되어서는 안 되며, 그로 말미암아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해독을 가져와서도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해독 작용, 오염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정당한 투쟁은 반드시 지지를 받아야 한다./ [중략]/ 낙동강은 유구한 흐름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고대 문화(古代文化)의 발상지이자 영남 문화권(領南文化圈)을 잉태한 중심적 입지 환경이므로 문화사적(文化史的) 견지에서도 보전(保全) 발굴되어야 하며, 미래의 영남 문화권 개발을 위해서도 환경 생태계는 지켜져야 한다.
☛ [낙동강보존회 「낙동강보존회 선언문」 중에서]
이러한 문화 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강을 막아 하구언을 만들고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미명하에 강을 뒤엎고 보를 세우는 등, 계속해서 강의 숨길을 조여 대고 있다.
이에 문학인들은 우리 생명의 모태, 어머니 ‘낙동강’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큰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
산을 구비 돌아/ 들판을 가로질러/ 유장하리니 산하의 앞길.// 뜻밖에 가로질러/ 앞길 자르며 만나게 된 것들/ 반 자연의 제방 또 제방/ 인공의 제방.// [중략]// 목이 콱콱 막힌다./ 긴 터널 지나며/ 시궁창 땟국에 얼죽음이 된다./ 자유에 도달하기 전/ 앞서 찾아온 사지마비.// [중략]// 흐르는 것은/ 불모의 노래/ 그마저 잃어버린/ 우리들 미래의 꿈의 뼈 부스러기/ 그 부스러기의 흐느적거리는 흐름.// 하구언 안에서 허우적이며 맴돈다./ 유치장에 갇혀/ 폐수 마시고 죽은/ 물의 영혼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라앉아 원혼으로 쌓인다.
☛ [강남주의 시 「흐르지 못하는 강」 중에서]
장강(長江)의 쓰러지는 앞 물결을/ 뒷 물결이 추스르는 따뜻함도/ 이제는 덧없는 일이다.// 속절없이 하구언에 갇혀서/ 통곡 한번 못하고 썩어만 가는/ 저 눈물의 흰 뼈를 보라.// 을숙도를 갈아엎는 진홍의 노을 속에/ 철새들은 떼 지어 높이 날지만/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도 않는/ 저 녹슨 풍경을.
☛ [이상개의 시 「낙동강 1」 중에서]
가만 두어라 가만가만 두어라/ 한없이 부드럽고 질긴 곡선 속에도/ 먹줄을 놓고 한 획으로 내리그은/ 준엄한 말씀의 뼈가 있다 누가 거역 하겠는가/ 바람의 길과 물의 길은 사람의 길과는 달라/ 막거나 자를 수도 없는 천명이니/ 그 천명의 심줄 앞에 누가 삽질 하는가/ 갇힌 물은 물이 아니므로 흘러야 하고/ 떠나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다는 거/ 강은 인간을 살리나 인간은 강을 살릴 수 없다는 거/ 눈 있고 귀 있는 자(者 )들어 보라/ 낙동강 금모래 은모래 우는 소리/ 살아서 서럽고 외로운 우리 어머니/ 어찌 살고 어찌 살고 다리 뻗고/ 북가슴 치며 우는 소리.
☛ [박정애의 시 「낙동강·1」 중에서]
그리하여 시인은 낙동강을 위해 모두가 화해하자고 한다.
‘호흡 곤란으로 뒤척이는 낙동강’에게 ‘네 피’와 ‘내 피’로 ‘수혈’을 하자고 한다.
사람과 자연이, 정부와 국민이, 상류 사람과 하류 사람이, 낙동강과 더불어 다 함께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호흡 곤란으로 뒤척이는 낙동강에/ 네 피와 내 피를 조금씩 덜어/ 수혈을 하자.// 푸른 날개를 달고 기슭에 무, 배추, 벼, 보리, 밀 우리들의 양식을 기르고/ 을숙도에 새들을 불러 모으고/ 밤이면 별들에게 속삭일 수 있을 때까지/ 푸른 피를 나누어 주자.// 눈 뜬 그대는/ 낙동강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가.
☛ [강영환의 시 「낙동강에 수혈을 하자」 중에서]
☼[수탈이 악순환 되는 질곡의 장소]
예부터 낙동강은 물자의 주요 운송로였다.
구비마다 마을과 나루가 만들어졌고, 크고 작은 장과 객주가 들어섰다.
이 지리적 요충지를 침략자들은 그들의 약탈의 전진 기지화 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이들의 수탈에 견디지 못한 양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칠백 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 [중략]/ 초조와 불안과 공포가/ 나흘 낮 사흘 밤/ 우리들의 앞가슴을 차고 뜯고/ 울대처럼 선 왼 산맥의 침묵이 깨어질 때/ 뻣뻣한 대지를/ 고슴도치처럼 한 손에 휘어잡고 메어친/ 꽝하는 너의 최후의 선인은/ 우리들의 절망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아! 그리운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너는 왜 말이 없느냐/ 너의 슬픔은 무어며/ 너의 기쁨은 무어냐.
☛ [김용호 장시 「낙동강」 중에서]
김용호(金容浩)[1912~1973]는 1938년 『사해공론(四海公論)』에 197행으로 된 장시 「낙동강」을 발표했다.
일제의 수탈을 못 견디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민족의 참상과 애환을, 민족의 강 낙동강을 배경으로 노래한 것이다.
“우리 조마이섬 사람들은 지 땅이 없는 사람들이요. 와 처음부터 없기싸 없었겠소마는 죄다 뺏기고 말았지요. 옛적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젖줄같이 믿어 오는 낙동강물이 맨들어 준 우리 조마이섬은…….” 건우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개탄조로 나왔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 자기 것들이라 믿어 오던 땅이, 자기들이 겨우 철들락 말락할 무렵에 별안간 왜놈의 동척 명의로 둔갑을 했더란 것이다……. 건우 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다시 국회 의원, 다음은 하천 부지의 매립 허가를 얻은 유력자……. 이런 식으로 소유자가 둔갑되어간 사연들을 죽 들먹거리더니, “이 꼴이 대고 보니 선조 때부터 둑을 맨들고 물과 싸와가며 살아온 우리들은 대관절 우찌 대능기요?”
☛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 중에서]
부산이 낳은 한국리얼리즘 문학의 거장,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1908~1996]은 그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에서 ‘조마이섬’이라는 낙동강 하중도 마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기구한 삶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상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모래톱에서, 자손 대대 낙동강과 싸워가며 일궈낸 자신들의 땅이, 그들과 무관한 사람들에 의해 소유가 바뀌어 가는 모습에서, 낙동강 사람들의 신산했던 삶과 질곡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들판 끝 마을/ 죽어서 묻힐 묘지 설 땅이 없다./ 무가 빠져나간 무밭과/ 배추가 빠져나간 배추밭/ 위로 모래가 뿌옇게 일어서고 있었다./ 얼지 않는 강물이 차갑게 밤 속으로 흘러갔다./ 마른 삼다발이 뒤꼍에서 부스럭대며/ 지난여름의 무성함을 이야기하고/ 명례는 강가에서 늘/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다.
☛ [이유경의 시 「명례(明禮)에서」 중에서]
그리하여 정작 강 주변의 땅에는 낙동강 사람들이 묻힐 곳조차 없다. ‘지난여름의 무성함’만 안타까이 읊조리며, ‘모래가 뿌옇게 일어서’는 ‘강가에서 늘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면면히 이어지는 낙동강 사람들의 끈질긴 삶]
이렇게 예고 없는 자연재해와 외부인들의 수탈, 산업화에 의한 강의 오염 속에서도 낙동강 사람들은 낙동강에 기대어 끊임없이 낙동강과 관계하며 고단한 삶을 이어 가고 있다. 혹독한 환경의 삶터에서도 툭툭 털며 꿋꿋하게 다시 일어서, 여봐란 듯이 생업을 준비하고 또 낙동강 물길을 묵묵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어둠 찍어 올린다./ 창날보다/ 질긴 손가락./ 낙동강(洛東江) 칠백 리(七百里)/ 친친 감기는/ 그 끝/ 물방울/ 가락지보다 빛나고 있다./ 철새 한 마리/ 물방울 사이의/ 햇살을 쪼다가/ 끝내/ 건너편 바다로/ 날아간다.
☛ [양왕용 「재첩잡이 여인- 하단사람들·7」 전문]
물에 물살이 부딪쳐 이루는 작은 그늘에 숭어가 썩고 몰리는 일웅등 첫물까지 파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이응벽이 삭고 다시 사람들이 일어서고 하는.
☛ [박태일의 시 「명지 물끝·1」 중에서]
장어발이 통발 멀리 드문드문 갈잎이 되받아 주는 청둥오리 울음소리 마지막 찌 끝에 몸을 얹고.
☛ [박태일의 시 「명지 물끝·5」 중에서]
어디선가 날려 오는 연기 속에 소금기가 가득하니/ 이 인근이 옛날 소금 많이 만들던 명지도가 아니던가/ 소금가마 솥단지마다 흰 연기 물씬물씬 났다더니/ 새떼가 까르륵 웃고 지나간다.
☛ [조해훈의 시 「명지에서」 중에서]
낙동강 사람들은 낙동강의 물길 속에서 재첩을 캐고, 소금을 굽고, 파를 키우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의 그 유장하고 넉넉함을 배워서일까? 그들의 삶은 끊이지 않는 낙동강의 흐름처럼 질기게 이어져 가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과 낙동강]
일제 강점기에서 겨우 해방되고 난 이후, 곧이어 우리 민족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맞게 된다.
남과 북이 낙동강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강물 위로 우리 겨레의 젊은이들이 꽃잎처럼 흩어져 흘러갔고, 강물은 내도록 붉은 피비린내로 점철되었다.
낙동강 푸른 물줄기 굽이 흘러 칠백 리/ 고요한 찬 밤은 짙어 가는데/ 달빛 어린 강물은 정회를 자아낸다.// 오랑캐들의 더운 피로 물들었던 이 강물/ 코 찌르는 피비린내 가시기도 전에/ 내 다시 강을 지켜/ 이지러진 달빛 아래 보초를 섰다.// 강이여 말하라/ 이 겨레의 슬픈 운명을/ 아 비장한 내 노래야/ 흘러 흘러 내리어라/ 저 강물 물결 타고.
☛ [양명문의 시 「낙동강」 중에서]
김용호의 「낙동강」이 일제 침략의 산증인이라면, 양명문의 「낙동강」은 동족상잔인 6·25 전쟁을 견뎌낸 강이다.
두 작품 다 붉은 피로 얼룩진 낙동강의 슬픈 현대사를 노래했다.
그 핍박과 침탈의 역사가 우리 기억에 남듯, 낙동강 골골의 물길 위에도 각(刻)을 새기듯 깊게 패어 있는 것이다.
나룻배는 끊어지고/ 강나루에는 고무다리가 놓였다고 했다.// 그 고무다리 위로/ 검은 안경을 쓴 흑인 병사들이/ 무서운 탱크를 몰고 줄지어 건너갔다./ 누나 등에 업혀 움츠린 채 바라보던/ 낯 선 그 풍경!// 아재도 사촌 형도 전쟁에 가고 없고/ 강물은 점점 붉어지고 있다고 했다.// [중략]// 신작로 큰 길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울리며/ 어디론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고// 잠들기 전까지 삐이 이십구 소리가/ 지붕 위에서 웅웅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붉디붉게 흘러넘치는 강물을 건너/ 붉은 황칠을 한 귀신들이 꿈속으로/ 무시무시하게 헤집고 들어왔다.
☛ [이달희의 시 「고무다리 -낙동강·17」 중에서]
이달희의 시에서는 어린 유년 시절의 전쟁을 생생하게 목격한 내용을 진술하고 있다.
낙동강 다리가 끊어진 후 고무다리로 흑인 병사가 탱크를 몰고 낙동강을 건너고, B-29 폭격기는 지붕 위로 웅웅거리던 유년 시절의 공포는, 꿈마다 흘러넘치는 강물을 건너는 ‘붉은 황칠을 한 귀신’을 만나게 된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밤마다 악몽을 꾸곤 했을까?
☼[다시 돌아와 쉬는 안식의 강]
이렇듯 수많은 희로애락의 역정을 흐르고 흘러 낙동강은 바다 앞 하구에 몸을 누인다.
넉넉한 품성으로 편안하고 풍요한 저녁을 맞는다.
사람과 물이 함께하고, 노동과 휴식이 같이하며, 화합의 물길을 이루고 고난과 핍박의 역사를 흘려보낸다.
그리고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평화롭고 안락한 잠을 청한다.
모든 이들이 물로 되돌아오는/ 저녁 강가/ 나는 물이 되어/ 물과 더불어/ 돌아오는 모든 이들을 기다린다.// 더디게 어둠이 발목사이로 고이고,/ 속죄의 귀가를 서두르는/ 우리의 그리운 사람들은/ 저녁 안개처럼 다가온다./ 아무도 올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을 지나/ 강가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삽질을 거두어/ 강에 씻고/ 그 강(江)은/ 그들과 함께 붉게 물이 든다.// 머리카락마다 배어있는 고난도/ 물따라 흘러가고/ 그들이 기다리는 그리운 사람은/ 물따라 되돌아온다.// 모든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깊은 어둠의 강가/ 나는 어둠이 되어/ 물과 더불어/ 잠들어 있는 그들 곁에 누워 잠을 잔다.
☛ [최원준의 시 「저물 무렵」 전문]
강은 생명의 탯줄이자 모태이다.
거친 물 돌이로 흐르다 전쟁의 붉은 피를 적시고, 질곡의 현실에 목 놓아 꺼이꺼이 울다가도 술 익는 하구 마을에 와서는 한없이 풍요롭고 자애로워진다.
그리고 ‘어머니 품’ 같은 바다와 합치면서 아름다운 흐름의 최후를 맞이한다. ‘비로소 자기를 완성’ 하는 것이다.
서걱이는 갈숲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처럼/ 강의 최후는/ 부드럽고 해맑고 침착하다.//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니/ 일곱 가지 슬픔의 어머니.// 죽음을 매개로 한 조용한 전신(轉身)./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 [허만하의 시 「낙동강 하구에서」 중에서]
강을 향해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우리의 심장에서 낙동강의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서로 소통하며 흐르는 낙동강의 그 유장한 물길의 소리가…….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 [강은교의 시 「물길의 소리」 중에서]
☼[면면히 이어온 민족의 젖술]
낙동강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영욕의 세월을 함께 안고 흐르고 있다. 때문에 낙동강의 길고 긴 물길의 여정은 끝이 없다.
궁극에는 빛나고 영광의 길을 걷게 될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면면히 이어온 민족의 터전을 노래하며 희망찬 미래를 강에 풀어놓는 것이다.
보아라 가야 신라 빛나는 역사/ 흐른 듯 잠겨 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 말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산 돌아 들을 누벼 일천 삼백 리/ 구비구비 여흘여흘 이 강 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들을 무찔렀나니/ 오! 낙동강 낙동강.
☛ [이은상의 시 「낙동강」 중에서]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민족의 빛나는 역사와 함께 유장히 흐르던 낙동강을 ‘사나이’들의 ‘혈관에 피’로 묘사하며, 낙동강을 ‘애국 애족’의 발원지로 노래하고 있다.
유치환은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를 발표하여 낙동강을 ‘겨레의 어머니’로 비유하며 애절한 낙동강의 사랑을 읊었다.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꽃잎이/ 흘러흘러 삼랑(三浪)의 여울목을 떠 내릴 적은/ 기름진 옛 가락(駕洛) 백리벌에/ 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나일’이여, ‘유프라테스’여, ‘갠지스’여,/ ‘황하’여/ 그리고 동방의 조그만한 어머니, 낙동이여./ 저 천지 개안(開眼)의 아득한 비로 삼날부터/ 하늘과 땅을 갈라 흘러 멎음 없는 너희는/ 진실로 인류의 거룩한 예지(叡智)의 젖줄./ [중략]/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 낙동강의 어진 흐름이여/ 차라리 너는 순탄하고 가난한 겨레와 더불어/ 그 애달픈 삶을 바닥하고/ [중략]/ 아아, 너는 진실로 겨레의 크낙한 어머니/ 낙동의 가람이여/ 영원한 겨레의 젖줄이여/ 사랑이여, 노래여.
☛ [유치환(柳致環)[1908~1967]의 시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 중에서]
나일강과 유프라테스, 갠지스, 황하 등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와 낙동강을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인류의 거룩한 예지의 젖줄’로 찬양하고, 민족의 영원하고 유구한 발전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 우리 민족과 함께 ‘진실로 겨레의 크낙한 어머니’로 흘러온 장강. 그 유장하고 끝없는 흐름의 역사는, 실로 우리 부산의 창대한 미래를 꿈꾸게 한다. 낙동강이 끝까지 흘러 바다로 흘러들 듯, 낙동강에 기대어 사는 부산 사람들도 그 ‘낙동강의 어진 흐름’을 좇아, 끝까지 흐르고 흐를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인생의 큰 바다로 흘러들 것이다.
☛ 기사 출처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9018
■ 人生(인생)
人生事(인생사) 先後(선후) 緩急(완급) 輕重(경중)이 있습니다.
우리네 人生(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 주거나 누구도 대신 아파 주거나 죽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을 때 가지 않으면 가고 싶을 때 갈 수가 없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하고 싶을 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奇跡(기적)은 아무에게나 어디서나 함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꿈과 희망을 먹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면 計劃(계획)과 實踐(실천)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잘 생각하고 判斷(판단)해서 몸 가는 대로 行動(행동) 하고 實踐(실천)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될 것입니다.
다만, 嚴重(엄중)한 現實(현실)앞에 우선순위를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가에 愼重(신중)을 기해서 責任(책임)과 義務(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人生事(인생사) 刹那(찰나)와 彈指(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最善(최선)입니까?
인생의 眞理(진리)는 오직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건강하세요.
가족의 健康(건강)과 가정의 幸福(행복)을 축원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19991212(陰1105) SUN
Mundy Sung
■ 낙동강(洛東江|Nakdonggang River)-국가하천
1. 개요[편집]
낙동강 하구
⇨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낙동강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강으로 한반도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다음으로 길고 남한에서는 가장 긴 강이다.
발원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역이 경상도에 있기 때문에, 일명 영남의 젖줄로 불리기도 한다.
남한에서 한강(경기도), 금강(충청도), 영산강(전라도)과 함께 4대강으로 꼽힌다.
한국에서 중요한 강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은 고대부터 존재했으며, 신라와 조선에서는 낙동강을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강으로서 사독(四瀆) 중 하나로 지정해 국가적으로 중사(中祀) 제사를 지냈다.
2. 명칭
삼국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당시 이 강의 이름은 황산강이었다.
현재 명칭인 낙동강의 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과거 바다에 접하던 김해 지역에 위치한 금관가야를 뜻하는 다른 말(가락국, 駕洛國)인 가락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해석이 있다.
둘째는, 경상북도 상주시의 옛 이름 중 하나인 낙양(洛陽)에서 온 것으로, 상주(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으로 '낙동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에도 이 흔적은 남아 있어서, 상주에 '낙양동'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다. 그리고 낙동면도 있다.
3. 발원지
낙동강의 발원지는 태백시 매봉산(梅峰山) 천의봉(天衣峯)에 있는 너덜샘이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1486년)을 비롯하여 《척주지》, 《대동지지》 등 한국의 여러 고서에서는 태백시 황지동에 있는 황지연못을 낙동강의 발원지로 기술하며, 지금도 태백시에서는 황지연못을 낙동강의 발원지라고 홍보하고 있다.
아마도 관광객 유치를 위한 홍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황지 연못은 옛날부터 신령스러운 곳이라 하며 수량이 어느 정도 되는 큰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너덜샘은 산중에 있는 흔한 약수터 샘물처럼 조그마하다.
사실 황지 연못보다 훨씬 상류로, 그리고 고지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황지천이 엄연히, 너무나도 확연히 존재하는데 지리적으로는 황지 연못이 발원지일 수가 없다.
그리고 당연히 강의 발원지는 강 하구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가장 고지대에 존재하는 물줄기 끝이다.
어지간하게 특수한 지질구조이지 않는 한 물이 펑펑 쏟아져나오는 발원지는 많지 않다.
4.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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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유역도.
⇨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너덜샘에서 발원한 황지천은 태백시 시내를 거쳐 남류하다가, 구문소에서 산을 뚫고 지나며, 도강산맥이라는 특이한 지형을 만든다.
그리고 바로 철암천과 합류하는데, 여기서부터 낙동강이라고 불린다.
이후 계속 남류하여,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에서 경상도로 들어가고, 봉화를 지나면서, 남류 혹은 남서류 하다가, 청량산을 지나서, 안동시 도산면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안동댐을 지나, 안동 시내 근처에서 반변천이 합류한다.
계속 서류하며, 많은 곡류(ex> 하회마을)를 이루고, 예천군과 의성군의 경계를 이루다가, 예천 풍양에서 내성천과 금천이 합류한다.
최후의 전통 주막으로 알려진 예천 풍양의 삼강주막은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 이 세 강이 합쳐진다고 해서 삼강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삼강리를 지난 낙동강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방향을 바꾸자마자, 문경시의 영강이 합류한다.
이 후 지속적으로 남류하며, 상주시와 구미시, 칠곡군을 지나는데 상주에서 병성천과 위천이 합류하며, 구미 선산에서 감천이 합류한다.
칠곡을 지난 후, 성주군과 칠곡군(왜관), 고령군과 대구광역시의 경계를 이루며 남류하는데, 대구 달성군 다사읍에서 금호강이 합류한다.
고령 우곡면과 대구 구지면을 지나서, 낙동강은 경상남도로 들어가는데, 경남, 경북 경계에서 회천이 합류한다.
경남으로 들어간 후에는 합천군과 창녕군, 의령군과 창녕군의 경계를 이루면서 계속 남류하는데, 합천에서 황강이 합류한다.
낙동강은 창녕 남지를 지나면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이제는 동쪽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때 의령군과 함안군 경계에서 남강이 합류 한다.
방향을 동쪽으로 바꾼 낙동강은 창녕군과 함안군, 창녕군과 창원시, 밀양시와 창원시의 경계를 이룬다.
이 후 낙동강은 밀양시와 김해시의 경계를 이루는데, 여기서 밀양강이 합류한다.
이 후 양산시 원동에서 양옆의 평야가 산으로 바뀌며, 깊은 계곡을 이루는데, 여기서부터 방향을 남쪽으로 서서히 바꾸어, 양산시 물금읍에서 완전히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양산 물금에서 양산천이 합류하며, 이 후 낙동강은 부산광역시로 들어간다.
부산광역시로 들어가자마자 서낙동강이 분기 되고, 김해 삼각주를 이루며,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서 남해로 들어간다.
바다와의 공식적인 경계는 을숙도의 낙동강하굿둑으로 본다.
역사적으로는 1935년까지 서낙동강이 본류였다고 한다.
1935년 대저수문과 녹산수문이 설치되면서 낙동강의 본류는 동쪽 낙동강으로 바뀌어 흐르게 되었다.
5. 특징
낙동강은 한국의 다른 큰 강과 비교해 물길의 경사도가 매우 완만하다.
태백시에서 발원하는 최상류 지역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조금만 내려가면 물길의 경사도는 대부분 1만분의 3 이하로 떨어진다.
특히 하류 160 km 구간의 경사도는 거의 0에 가깝다.
이로 인해 하류지역 밀양시 삼랑진읍~양산시 물금읍 사이 구간은 강물이 잘 흐르지 않아 댐이 건설되기 전 과거에는 홍수가 자주 났고 바닷물이 거슬러오는 현상도 심했다.
이런 특징이 단점만 된 것은 아니라 상류지역인 안동시까지도 고도가 완만해서 물길을 이용한 수로교통이 고대부터 발달했다.
낙동강 유역을 처음 통합했던 신라가 한반도의 첫번째 패권을 쥘 수 있었던 것에는 낙동강 수계의 풍요로운 농업 생산력이 기반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강보다도 하상계수의 차이가 심각하여, 갈수기에는 졸졸 흐르던 냇물이 장마 때만 되면 넘치기 직전까지 넘실넘실거린다.
1920년의 대홍수 때는 유역 근처의 모든 건물을 싹 쓸어버린 것으로 유명했다.
4대강 정비 사업 등으로 보 건설과 강 바닥 준설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홍수는 발생하지 않지만, 이러한 하상계수의 차이는 놋다리밟기의 전승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황하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낙동강 삼각주인 김해 평야는 면적은 작아도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토지를 갖고 있다.
하류에는 남한에서 유일한 삼각주 지형이 있다.
부산 강서구의 대부분 지역이 이 삼각주의 일부고, 현대에도 퇴적이 계속되고 있어서 하류 끝에는 대마등이나 백합등 같은 새로운 모래섬이 퇴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6. 4대강 정비 사업
4대강 정비 사업 문서로.
7. 유역
상류 지역 :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 경상북도 울진군, 봉화군, 안동시, 예천군 - 의성군의 행정구역 경계선, 상주시 (화령재 동쪽)
중류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성주군 - 고령군 - 대구광역시의 행정구역 경계선, 경상남도 창녕군 - 합천군 - 함안군 - 창원시 - 밀양시의 행정구역 경계선
하류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양산시의 행정구역 경계선 - 부산광역시 일원
대부분의 강이 그렇지만 특히 하류 쪽으로 내려갈수록 물이 더러워지는 편이다.
그 이유는 상, 중, 하류 유역에 있는 도시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상류에 있는 도시들은 모두 농촌 위주의 중소도시로서 오염원 배출이 적지만 중류의 대단위 공업도시 구미시와 대도시 대구광역시를 지나며 더러워지고 최종적으로 하류의 창원시, 김해시, 양산시 일대의 대단위 인구 밀집지를 지나기 때문이다.
부산 사람들은 아예 '낙똥강'이라고 칭한다.
공단 등 공업지구를 관통하다 보니 위험한 화학물질이 유출되는 심각한 오염 사고도 잦다. 1991년, 2008년에 페놀 유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1년의 사건은 두산전자가 일부러 페놀을 정화하지 않고 방류한 것이라 '유출'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구미 불산가스 누출 사고 등도 일어났다.
덕분에 부산의 상수도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한다.
일단 부산의 또다른 강인 수영강을 식수원으로 보호하고 있지만 수영강의 규모가 작아 부족하기 때문에 낙동강도 사용하는데, 애초에 상수도 수원의 수질이 3급수다.
본래 3급수는 공업용수로나 쓰는 정도로 원칙적으로는 식수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놀라운 수준일 수밖에.
단적인 예로 부산보다 물 상황이 그나마 나은 대구지역의 정수장(매곡, 문산 등 대구 서부지역정수장)에서도 염소는 기본이고 플루오린(흔히 불소로 알려진 것), 오존, 그 외의 모든 소독기능이 있는 물질을 총동원해서 처리한다.
대구와 부산 사이의 위천산업단지 건설문제 때문에 지역 갈등의 사례로도 종종 나온다.
또한 낙동강의 최상류 봉화군 석포면에는 영풍석포제련소가 면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데, 제련소가 강 최상류에 있는 것도 특이하지만 제련소가 원석과 물 수급이 용이한 곳에 위치하고, 또한 기피시설임을 생각해 보면 납득은 간다. 하지만 제련 과정에서 생성되는 각종 오염물질들을 안동호로 밥먹듯이 흘려보내서 경상도 환경단체나 언론에 찍힌 지 오래이며, 이에 대한 건 석포면 항목으로. 석포면 근처 낙동강에 중금속이 장난아니다.
8. 생태
낙동강에는 많은 습지가 있다.
강 유역에 창녕 우포늪, 창원 주남저수지 등이 있다.
낙동강 하구에는 모래톱이 많다.
이곳에 많은 철새들이 날아드는 주요한 지역이어서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로 보호되고 있다.
하지만 과거 습지에 비해 많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정작 철새 도래지는 을숙도나 삼락생태공원처럼 많은 부분이 공원화 되어 정작 붙잡아야 할 철새가 떠나고 있다.
부산시는 낙동강 하구에 람사르 습지 등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매번 지지부진하다. 지역주민의 생계 때문에 반대도 심하다.
오히려 명지경제자유구역을 설정하고 개발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등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낙동강 하구에는 삼각주가 크게 발달해 있는데, 김해 평야가 위치한다. 삼각주 특성 상 비옥하지만 침식이 자주 일어나고 지반이 연약하다. 하지만 침식을 막고 개발을 하기 위해 낙동강의 많은 부분을 재정비 하였다.
낙동강하굿둑 건설이나, 댐과 보 건설, 하구 매립, 4대강 정비 사업이 그 일환이다.
하지만 많은 보 건설로 인해 모랫톱은 사라지고, 유속이 느려지며 녹조화 현상이 심해졌다.
낙동강 지류가 특히 심각한 편이다.
본래 낙동강 등 동해로 흐르는 하천에서는 살지 않았던 어종들과 외래어종이 패키지로 유입되면서 생태계교란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그중에 강준치와 끄리가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엄청난 먹성으로 낙동강 고유 생물들을 몽땅 싸그리 먹어치우고, 어떻게 되먹은지 알 수 없는 정신나간 번식력으로 개체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낙동강을 거의 매우다시피 하고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수질악화와 댐건설로 인해 유속이 느려져 강준치가 살기 적합한 환경으로 변해버렸다.
토종생물이 자국의 생태계 일부를 교란시키고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제아무리 같은 토종생물이라도 국내에서 서식지가 아닌 곳에 유입되면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 이들은 수산자원들은 모조리 닥치는대로 잡아먹어 어업에 크나 큰 방해가 되면서 어민들에게는 애물단지이자 증오의 대상.
아예 잡히는 어종의 8~90%가 강준치와 끄리일 정도.
개체수에선 그 배스와 블루길마저 압도하는 수준.
하물며 민물고기가 다 그렇지만 얘네들은 그 정도가 워낙 심해 흙내와 비린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데다 살은 별로 많지 않으면서 잔가시만 쓸데없이 많아 어족자원으로도 적합하지가 않다.
낙동강 어민들의 냉동창고에는 잡아올린 강준치로 포화가 되어있다.
돈이 될 만한 자원(붕어, 새우, 장어, 쏘가리 등)들은 안 잡히고 강준치와 끄리만 주구장창 잡히니 어민들의 속만 타들어갈 뿐이다.
낙동강에는 멸종위기종인 백조어가 서식한다.
강준치와 빼박일 정도로 닮았지만 보호종이기에 강준치로 오인하고 포획했다간 적발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하자.
9. 오염
낙동강은 부산, 울산, 대구, 구미 등 경상도의 중요한 식수원이지만 공단 폐수와 가축 폐수, 생활하수로 인해 수질 오염이 심각한 문제다. 몰래 폐수를 버리는 일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앞선 낙동강 녹조화도 큰문제. 녹조의 남세균이 청산가리 100배 수준 독성물질 '마이크로시스틴'을 만들었는데 그게 농산물에 나왔다.
'녹조라떼' 드립이 탄생했는데 아무리 드립이래도 문제는 심각한 편이다.
낙동강에서 각종 유해물질이 발견되는 일도 심심찮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1차·2차)
2008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구미 불산가스 누출 사고
10. 여담
낙동강 하류에 있는 철새 도래지(을숙도, 주남저수지)가 유명하다.
낙동강 하구에는 모래톱이 발달하였다.
모래톱이 있는 하구 부분(부산광역시)의 낙동강을 가끔 동낙동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서낙동강과 구분하기 위함인 듯.
양산시 원동면 가야진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해마다 낙동강에 사는 3마리 용에게 가야진용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관련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승하 시인이 이 강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다.
4대강 정비 사업의 규모가 가장 큰 강으로서 피해를 많이 본 곳이기도 한데, 보 건설로 녹조의 창궐 및 낙동강 보 주위 농토에 지하수 수위가 크게 상승해서 침수되기도 하는가 하면 준설작업으로 인해 낙동강의 많은 모래톱이 사라졌으며, 창녕군에 있는 낙동강의 본포를 이번 4대강 정비 사업 중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친수공간'이라는 이름으로 1700억원을 들여 인공모래섬을 만들었는데 그조차 폭우로 유실되었다.
이곳은 원래 희귀종인 재두루미 100여마리가 거쳐가는 곳이었다.
그래도 정비 사업으로 인해 기존 강변 쪽에 대규모 공원이 조성되어 뜬금없이 관광 명소가 되긴 했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에 가서 사진을 찍으면 꽤 예쁘게 나온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큰 강인데도 불구하고, 그에 비해 인지도나 명성은 많이 밀린다.
대도시를 낀 큰 강 하면 대부분 서울의 한강을 떠올린다.
굳이 남한에 한정짓지 않는다면, 평양도 있긴 하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대동강이 평양 사이를 흐르고 있다.
여기엔 사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부산은 강보단 해운대, 광안리 같은 해수욕장이나 바다로 많이 알려져있는 도시이기도 하고, 한강은 도시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특성 때문에 부산의 낙동강과 비교했을 때 주변 풍경이 전혀 다르다.
한강은 도시 어느 곳에서든 접근성이 좋은 편이라 강변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근처에도 각종 고층 빌딩을 비롯한 건물과 시설들이 어우러져 대도시와 큰 강의 만남이란 그럴싸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에 비해 낙동강은 서부산 지역으로 일단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서면~동래를 기준으로 해도 거리가 멀고, 이들보다 더 동쪽에 있는 해운대를 기준으로 하면 더욱 멀다.
거기에 아직 강변 유원지 개발이 빈약하고, 낙동강에 인접해 있는 강서구 및 북구, 사상구, 사하구 일대는 부산 중심가에 비하면 여전히 개발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라 풍경이 밋밋하다. 고층 건물,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수영강과 비교를 해도 차이가 꽤 크다. 즉, 큰 강이긴 한데 대도시의 풍경까지 담아내기엔 솔직히 아직 그림이 안 나오기 때문에 외면받는 실정인 것.
낙동강이 중심부를 관통하는 곳은 다름아닌 위에서 언급한 서부산인데, 그것도 친절하게 서낙동강과 본류의 양쪽을 통해 서부산을 3할시켜 준다.
문제는 서낙동강은 본류보다도 훨씬 존재감이 없다는 것.
대구 역시 분지로 유명할 뿐더러 부산과 마찬가지로, 아니 부산보다 더 도시 주변부로 낙동강이 흘러갈 뿐더러 강폭도 상대적으로 좁기 때문에 근처는 황량한 경우가 많다.
물론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들도 있긴 하지만, 낙동강만큼 크지는 않다.
다만 서부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된다면 향후 낙동강 주변 풍경이 변화될 여지는 있다.
서울도 오랜 기간 개발의 결과로 지금의 한강 풍경이 나온 거지, 한강시민공원이 지어진 1980년대까지만 해도 꽤 황량한 편이었다.
물론 부산의 낙동강은 서울의 한강과 입지 조건 자체의 차이도 있는만큼 한강 풍경과는 꽤 다를 확률이 높지만 말이다.
이런 인지도나 풍경을 떠나 낙동강의 중요성은 두 말하면 잔소리인데, 과거에나 지금에나 낙동강은 근처 지역에 대량의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에 낙동강 주변에는 고대국가의 유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특히 가야 국가들의 수도는 대부분 낙동강 근처에 있었으며, 이 외에도 성주군의 성산동 고분군, 대구광역시의 불로동 고분군, 고령군의 지산동 고분군, 창녕군의 교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 고대의 왕릉급 고분들이 아직도 낙동강 유역 도시에는 많이 남아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낙동강 유역은 신라와 가야의 발상지였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여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사진 출처 : 나무위키
6.25 전쟁의 격전지이자 당시 남한 연합군의 최후 전선이기도 했다.
일명 낙동강 전선. 이때의 상황을 묘사한 군가로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흘러가라 우리는 전진한다'는 가사로 유명한 '전우야 잘자라'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때도 낙동강이 아닌 지역의 경계선이 훨씬 길었지만, 낙동강이 지나면서 육로교통의 요지인 칠곡, 대구 일대가 방어전선의 중심격이었고 다부동 전투 등 혈투가 워낙 인상깊어 이름이 이렇게 붙어 통용되고 있다.
한편 북한은 이렇게 낙동강에서 엄청난 병력 소모를 했음에도 차마 한번도 점령하지 못한 점과 강 유역 전체가 남한에 속해있는 점 등을 이유로 역대급으로 오염된 강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미제가 낙동강에 일부러 오염물질을 부어 생명이 전혀 살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 남한이 낙동강에 원전(...)을 건설해서 방사능 폐기물이 가득하다는 식의 흑색선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진다.
낙동강과 관련된 표현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이 유명하다.
그 외 정치계 용어로는 낙동강 벨트라는 말이 꽤 인용된다.
2010년대 초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단어로 이때 낙동강 벨트란 낙동강 하구의 부산광역시 서부 몇몇 구와 김해, 양산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곳의 특징은 보수정당이 주로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경상도에서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선전하거나 당선되기도 하는 지역이란 점이다.
과거 영남 지방에서 선전하던 진보적 후보들은 창원, 울산 등 공단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많이 받은 후보였지만, 낙동강 벨트는 부산의 교외화와 서부 지대의 개발로 인한 젊은 층의 유입, 친노 등 PK 민주화 세력의 영향력 등으로 민주당계 정당의 영향력이 상승한 곳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경상도에서 어쩌면 거의 유일한 스윙보터였던 지역. 기타 자세한 내용은 낙동강 벨트 문서로.
낙동강 하류를 기준으로 동쪽은 부산광역시, 서쪽은 경상남도로 갈라지기 때문에 대한민국 프로스포츠에서 부산광역시 연고팀과 경상남도 연고팀의 더비 매치를 언급할 때 이 강의 이름이 등장한다.
양 팀의 사이를 언급할 때면 '낙동강 라이벌'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며 KBO 리그에서는 롯데 자이언츠와 NC 다이노스의 매치업을 낙동강 시리즈라고 부르고 K리그와 KBL에서는 공히 낙동강 더비라고 부른다.
다만, K리그의 경우 부산 아이파크가 1부리그에 있고 경남 FC가 2부리그에 있어서 FA컵이 아닌 이상 2020년에는 축구장에서 낙동강 더비를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부산이 강등되고 경남이 K리그1 승격에 실패하면서 2021시즌 K리그2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에 낙동강역이라는 이름의 경전선 역이 있다.
2010년 이후 여객 취급이 중지되어 여객열차가 무정차 통과한다. 현재는 역사마저 철거된 상태.
11. 지류
낙동강은 지류가 매우 발달해 있다.
유역 모양이 직사각형 모양이라 그런듯하다.
국가하천 급의 지류만 10개에, 유로연장이 100 km 가 넘는 위천이 포함된 지방1급 하천 지류가 3개이다.
무수히 많은 지방 2급 하천 지류 중에도 반변천 같은 경우에는 댐(임하댐)도 갖고 있으며, 유로 연장이 109.4 km 에 달한다.
11.1. 제1지류
낙동강의 지류는 상류에서 부터 다음과 같이 있다.
낙동강의 지류
명칭 관리 수준 길이(Km) 유역 면적(km²) 비고
반변천 국가 하천 109.4 1,973 임하댐
내성천 국가 하천 106.3 1,814 영주댐
영강 지방 하천 78
병성천 지방 하천 32.3
위천 지방 하천 113.5
감천 국가 하천 76.6
금호강 국가 하천 116 2,053 영천댐
회천 지방 하천 78
황강 국가 하천 111 1,339 합천댐
남강 국가 하천 186.3 3,467 남강댐
광려천 지방 하천 26.30
밀양강 국가 하천 101.5
화포천 국가 하천 18.5
양산천 국가 하천 32.3
서낙동강 국가하천
이 가운데 반변천, 내성천, 영강, 병성천, 위천(낙동강), 감천, 금호강, 회천, 밀양강이 경상북도의 주요 하천을 이룬다.
남한에서 4번 째로 긴 하천인 섬진강이 길이 225.3 km 에 유역 면적 4,896 km² 인 것을 감안하면 남강, 금호강, 반변천, 내성천 등 낙동강의 주요 지류가 웬만한 다른 지역 주요 하천 만큼 길고, 유역면적이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11.2. 제2지류
길안천 - (지방 2급 하천) 반변천의 지류. 75 km
영주 서천 - (지방 하천) 내성천의 지류
신천 - (지방 2급 하천)금호강의 지류, 27 km
달서천 - (지방 하천) 금호강의 지류
신녕천 - (지방 2급 하천) 금호강의 지류, 27.5 km
임천강 - (지방 2급 하천) 남강의 지류
거창 위천 - (지방 하천) 황강의 지류
덕천강 - (국가 하천 - 하지만 대부분이 지방 2급 하천에 속함) 남강의 지류, 46.7 km
함양 위천 - (지방 하천) 남강의 지류
영천강 - (지방 하천) 남강의 지류
함안천 - (국가 하천) 남강의 지류, 22 km
단장천 - 밀양강의 지류
유산천- 양산천의 지류
12. 시설물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경상북도 상주시에 위치한 환경부 소속 공공기관. 담수생물을 전문으로 연구한다.
12.1. 낙동강/교량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낙동강/교량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둘러보기
■ 출처 : https://namu.wiki/w/%EB%82%99%EB%8F%99%EA%B0%95
☞ 위키백과 : 낙동강 - 나무위키 (namu.wiki)
█ 배띄워라-송소희
■ 기적
있는 대로 보고 보이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살자.
기적(奇跡)은 아무 때나 일어나지 않고 누구에게나 함부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20190101 TUE
Mundy Sung
■ 낙동강(洛東江)
분야 : 지리/자연지리
요약 :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발원하여 영남지방의 중앙저지를 통해 남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본류의 길이는 525.15㎞로, 남한에서는 제일 긴 강이며 북한을 포함하면 압록강 다음으로 길다.
총유역면적은 2만 3860㎢로 남한 면적의 4분의 1, 영남 면적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낙동이란 명칭은 가락의 동쪽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가야와 신라 천년 동안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서려 있고,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강이다.
오늘날은 특히 우리나라 근대화와 산업화의 동맥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본류의 길이 525.15㎞. 남한에서는 제일 긴 강이며, 북한을 포함하면 압록강 다음으로 길다.
총유역면적은 2만 3860㎢로 남한면적의 4분의 1, 영남면적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함백산에서 발원한 본류는 남류하다가 안동 부근에 이르러 반변천(半邊川, 116.1㎞)을 비롯한 여러 지류와 합류, 서쪽으로 흐르다가 함창과 점촌 부근에서 내성천(乃城川, 107.1㎞)과 영강(穎江, 69.3㎞)을 합류한 뒤 다시 남류한다.
이 유로(流路)에서 상주와 선산에 이르러 위천(渭川, 117.5㎞)과 감천(甘川, 76.6㎞)을 합하고 다시 대구광역시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 118.4㎞)과 합류한다.
경상남도에 접어들면서 황강(黃江, 116.9㎞)과 남강(南江, 193.7㎞)을 합한 뒤 동류하다가, 삼랑진 부근에서 밀양강(密陽江, 101.0㎞)을 합친 뒤 남쪽으로 유로를 전환하여 부산광역시 서쪽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낙수(洛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되어 있다. 본래 낙동이란 가락의 동쪽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영남지방의 거의 전역을 휘돌아 남해로 들어가는 낙동강은 가야와 신라 천년간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서려 있고,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영남인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왔다.
오늘날은 특히 우리 나라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동맥으로서 낙동강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 자연환경
유역의 자연
본류의 주방향은 남북이나 두 구간에서는 지질구조의 지배를 받아 동서 방향으로 흐른다.
즉, 안동 부근에서 점촌까지는 안동 단층곡(斷層谷)의 지배를 받아 서쪽으로 흐르고, 점촌 부근에서는 변성암지대와 중생대 퇴적암의 지질경계를 따라 남류하며, 남강의 하류지점에서부터는 동서구조선(東西構造線)의 지배를 받아 다시 동쪽으로 흐른다.
부산 서쪽에 이르러 언양 단층선의 남쪽 연장선을 따라 남류하여 바다로 흘러든다.
낙동강은 경사도가 극히 완만하여, 하구에서 약 344㎞ 상류에 있는 안동 부근도 하상고도(河床高度)가 90m에 불과하다.
하상의 평균경사는 1만분의 17로서 압록강보다 완만하다.
전 유로 가운데 가장 경사가 급한 곳은 태백산지중의 유로로 경사도가 1만분의 46에 이르며, 네 곳에 경사의 천이점(遷移點:경사가 급변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태백산지를 지나 경상누층군(慶尙累層群)의 퇴적암지대로 들어서면 하상의 경사는 1만분의 3 정도로 완만해진다.
이에 따라 중류나 하류는 평형상태에 달하고 흐름이 완만해지며 사행유로(蛇行流路)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마지막 160㎞ 구간에서의 경사는 1만분의 1 정도로 극히 완만하다.
이렇게 유로의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안동까지 배가 올라갈 수 있어서,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내륙수로교통의 동맥이 되었다.
하안에 발달한 하단(下湍)·구포·삼랑진·수산(守山)·남지(南旨)·율지(栗旨)·현풍·왜관·낙동·풍산·안동 등은 과거의 나루터취락이거나 선착장들이었다.
낙동강은 구릉성의 저산성산지(低山性山地)를 흐르기 때문에 상류에서 왜관까지는 분지성평야나 소규모의 곡저평야(谷底平野)를 이룰 뿐이지만 하류 쪽으로는 자연제방과 배후습지 등 범람원의 경관이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고령 부근부터 삼랑진까지에는 자연제방 후방에 배후습지성 소택지(沼澤地)가 무수히 분포하는데, 용호(龍湖)·우포(牛浦)·사몰포(蛇沒浦)·춘산호(春山湖)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대개 소지류가 본류에 합류하기 수킬로미터 전에 나타난다. 이것은 후빙기(後氷期) 해면상승으로 지류들이 침수된 뒤 본류의 자연제방이 막았기 때문이다.
하류인 삼랑진에서 물금(勿禁) 사이의 약 19㎞ 구간은 홍수 때 강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협곡(峽谷)을 이루고 있어 남강댐과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범람이 심하였다.
낙동강의 하구에는 삼각주(三角洲)가 발달하여 우리 나라 최대의 충적평야인 김해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양산협곡을 벗어난 본류는 구포의 상류쪽 2㎞ 지점에서 2대 분류로 갈라지며, 이들 분류는 다시 2차적인 분류로 갈라진다. 갈라진 분류는 하류에서 다시 만나면서 대저도(大渚島)·맥도(麥島)·일웅도(日雄島) 등의 하중도(河中島)를 형성한다.
이 삼각주는 전체적으로 동서 16㎞, 남북 18㎞의 대충적지를 이룬다. 20세기 이후에는 홍수방지와 삼각주개발을 위하여 인공제방을 많이 축조하였으므로, 수향(水鄕)과 같은 경관이 나타난다.
최근에는 염해(鹽害)의 방지와 용수공급을 목적으로 하구에 거대한 하구언(河口堰)을 건설하였다(1987년 11월 완공).
낙동강 유역은 서쪽과 북쪽은 소백산맥, 동쪽은 태백산맥으로 막혀 있고 남쪽은 남해에 열려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분지상(盆地狀)을 이루며, 여기에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종관한다.
유역 내에는 기류의 유입 방향, 지형, 해안과의 거리 등에 따라 기후의 지역차가 나타나지만, 전체적으로는 내륙적 분지성 기후의 특성이 현저하다.
연평균기온은 12∼14℃이며, 최한월(最寒月)인 1월 평균기온은 -3.0∼2.2℃, 최난월(最暖月)인 8월은 25∼26℃가 되어, 겨울이 여름보다 지역차가 크다.
특히 전형적인 내륙분지인 대구는 우리 나라의 극서지(極暑地)로서 일최고기온이 40℃를 넘는 때도 있다. 그러나 하구 주변의 남해안지역은 겨울이 비교적 온화한 해양성기후의 특성을 가진다.
강수량의 분포는 지형과 기류의 방향, 또 온대성 저기압이나 태풍 등의 통과 위치에 따라 지역적인 차가 크다.
연강수량의 분포를 보면, 대구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지역은 소백산맥·태백산맥의 우음작용(雨蔭作用)으로 인하여 900㎜ 이하의 과우지역을 이루는 데 반하여, 하류 유역으로 갈수록 여름 남서기류의 바람받이지역에 해당하고, 또 남해해상을 빈번히 통과하는 온대성 저기압이나 태풍으로 인하여 1,400㎜ 이상의 다우지를 이룬다.
계절적으로는 동계에 강설량이 적어 우리 나라의 과설지역(寡雪地域)이 되고, 하계에는 전선이나 태풍의 통과로 인한 집중호우가 빈번하여 매년 범람과 침수의 피해가 크다. 일조율과 증발량의 분포를 보면, 대구를 중심으로 한 내륙분지지역이 높고 하류지역이나 주변 고산지역이 비교적 낮다.
최근 안동댐의 건설로 안동지역에 안개일수가 증가하고 있다.
낙동강 유역의 주요 식물상을 보면 중류·상류 유역은 남부난온대낙엽·활엽수림대, 하류유역은 조엽수림대(照葉樹林帶)에 속한다. 전자는 주로 온대성 식물과 만주계식물(滿洲系植物) 및 한국고유식물이 혼재하며, 극히 일부 난대성 식물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온대성 수종으로는 잣나무·육송·구상나무·노간주나무 등의 침엽수와 굴피나무·박달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느티나무 등의 활엽수가 있고, 만주계식물은 전나무·분비나무·사시나무·가래나무(산추자)·피나무·물푸레나무 등이 있다. 한국고유식물로는 떡졸참나무·참조팝나무·떡갈매나무·철쭉나무·개나리 등이 있다.
최근 낙동강 하류의 식물조사에 의하면 총 151과 910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낙동강 하류의 명지(鳴旨) 지역에서만 74과 366종의 식물이 조사되었는데, 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해안식물로는 갯줄고사리·갯메꽃·보리사초·좀보리사초·왕보리사초·달뿌리풀·모새달·갈대·갯잔디·갯갓사초·갯논쟁이·나문재·수송나물·갯솔나물·갯질경이·갯씀바귀 등이 있다.
이 지역에 많은 식물이 분포하는 원인은 내륙성 식물이 이 강물에 의하여 운반되고, 또 대한해협의 조류(潮流)나 철새에 의하여 일본·시베리아 등 해외의 식물이 운반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물상(動物相)으로 유명한 것은 하구 일대의 철새떼이다. 낙동강하구의 을숙도(乙淑島)에서 사자도·십리 등과의 사이에 펼쳐진 갈대밭과 모래톱은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로,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하구 일대는 다른 하천과 달리 넓은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는데다 수심이 얕고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기 때문에 각종 동·식물성 플랑크톤, 연체동물, 갑각류, 소형 어류, 그 밖에 여러 해조류가 번식하고 있어 조류의 먹이가 풍부한 곳이다.
또 겨울이 비교적 온화하고 여름은 시원한 해양성기후에 속하므로 겨울철새의 월동지, 여름철새의 번식지로 매우 적합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조류는 약 120종으로, 이 가운데 사철을 두고 머무는 텃새[留鳥]가 10여 종이고 나머지 110여 종은 철새[候鳥]들이다.
텃새로는 참새·꿩·때까치·매비둘기·딱새·노란턱뫼새·붉은머리오목눈이 등이 손꼽힌다. 이들 텃새 중 겨울에는 주변의 갈대밭에서 머물다가 여름에는 산에서 서식하는 종류도 있다.
겨울철에 오는 새는 10월 상순부터 3월 중순까지 머무는데 백조와 오리종류로, 청둥오리·흑부리오리·쇠오리·고방오리·흰쭉지·쇠기러기·큰기러기·두루미·저어새·느시·아비·농병아리 등이 있다.
여름철새는 대체로 4월부터 9월 사이에 볼 수 있는 새들로, 백로·황새·왜가리·듬불해오라기·게게비·흰물떼새·뜸부기·쇠제비갈매기·물총새 등이다.
이 밖에 우리 나라를 통과하면서 봄·가을 동안 잠깐씩 머무르다 가는 나그네새로서 마도요·뒷부리도요·노랑발도요·좀도요 등의 도요새무리와 왕눈물떼새·검은머리물떼새·게꿩 등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완전 멸종되어 현재 3점의 표본으로 남아 있는 원앙이사촌 두 마리가 우리 나라에서 포획된 것인데, 그 가운데 한 마리는 1913년 12월 낙동강하구에서 잡힌 것이다. 그러나 1970년을 전후하여 이들 철새류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
중류와 상류나 부산 주변의 공업단지에서 배출되는 여러 가지 오염물질과 농업 및 생활폐수의 유입, 인위적인 남획 등으로 철새수가 급격히 감소하는데다, 을숙도를 지나는 하구언의 건설로 철새가 정박할 터전이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 역사와 문화유적
낙동강 유역에는 역사시대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다.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중동(中東) 일대는 특히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구미산업단지가 건너다보이는 낙동강 동편의 중동 일대에서 구석기인들이 사용하였던 돌망치 등 석기가 발굴되었다.
이들 석기는 구석기시대 중기의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유역의 선사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한반도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를 거쳐 두만강으로부터 들어왔다면 영남지방의 신석기문화는 낙동강 유역에서 비롯되었다.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로 대표되는 빗살무늬토기는 압록강·대동강·한강·낙동강·서남도서(西南島嶼)·두만강 등의 여섯 군으로 나누어진다.
낙동강 유역에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서생(西生)과 부산 영도의 동삼동과 조도(朝島:아치섬)·다대포(多大浦) 등지의 패총이 신석기시대 유물의 출토지이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낙동강 유역의 영남지방은 특히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다.
이 시대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대구·영천·경주 일대로, 이곳은 대동강 유역을 제외하면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다.
철기문화와 병행하여 삼한이 형성되는데, 대체로 마한이 경기·충청·전라도지방을, 진한이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지방을, 그리고 변한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지방을 각각 차지하였다.
따라서 삼한 중 진한과 변한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역사의 터전을 잡은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변한조에 따르면 3세기 중엽에 진한과 변한에는 모두 24개의 국가가 있었다.
사실 1세기 무렵부터 낙동강 유역의 변한과 진한지역은 상당한 수준의 철기시대를 맞게 된다. 울산·동래지방의 제철유지(製鐵遺址) 등이 철기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또 김해 등지의 김해식토기와 사천·진주·고성·밀양·동래 등지의 패총·지석묘·옹관묘 등에서 출토되는 석검·철검 기타 철제유물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김해패총 등에서는 탄화된 쌀알이 나와 이미 저습한 충적평야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특히 낙동강 하류지역은 남쪽 바다를 끼고 있어 해륙교통의 요충지였고, 또한 비옥한 충적평야와 이어져 있어 농경생활이 발달하였다.
이 같은 여건에 힘입어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가야와 신라문화가 발달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경상남북도 일대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삼국시대 이전의 유적은 고분유적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보아 각 군마다 몇 군데씩 군집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며, 특히 경주·대구·고령·의성·상주 등지에 무수한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고분 중에서도 적석목곽분은 경주시내에 집중되어 있고, 간혹 유사한 것으로서 대구 구암동과 의성의 탑리에 유존한다. 특히 3면의 벽과 천장을 먼저 쌓고 관을 측면 입구로 넣은 뒤, 입구에서부터 돌을 쌓아 벽으로 만든 횡혈식(橫穴式)이 낙동강변에 간간이 분포하고 있다.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은 그 구조가 석실로 되어 있어 일찍부터 도굴당하기 쉬웠으나,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지방의 경우는 묘제가 도굴하기 어려운 적석목곽분이고, 또 냇돌벽으로 된 석곽이어서 많은 유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4세기까지 낙동강을 경계로 한 사로국은 강 서쪽의 대가야 등 비교적 큰 국가와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세기 중엽인 560년대를 전후하여 낙동강 유역은 신라의 핵심 부분이 되어 이를 바탕으로 1세기 뒤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삼국통일로 커다란 영토를 지배하게 된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새로운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 5소경제도를 채택하였다.
9주 가운데 옛 신라 및 가야의 땅인 낙동강유역을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삽량주(歃良州:지금의 양산)·강주(康州:지금의 진주)의 3주로 나누었다.
낙동강 유역의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가 신라인 데 반하여, 이보다 앞서 순전히 낙동강 하류에서 이 강을 중심으로 산재하여 있던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이 이룩한 나라가 가야국이다.
가야는 42(?)∼562년 사이에 융성하였던 나라로 금관가야(지금의 김해)·아라가야(지금의 함안)·고령가야(지금의 진주)·대가야(지금의 고령)·성산가야(지금의 성주)·소가야(지금의 고성) 등 6개 국으로 분립되어 있었다.
이 가야국의 건국과 관련된 유적인 구지봉(龜旨峰)과 수로왕릉이 김해시에 있고, 수로왕비인 허왕후(許王后)가 아유타국에서 돌배를 타고 육지에 처음 상륙하였다는 곳이 낙동강 하구인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다.
낙동강 연안의 주요 사적지를 상류로부터 헤아려 본다면, 제일 먼저 부석사(浮石寺)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손꼽힌다.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1963년 지정된 사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세워진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주자학의 전래자인 안향(安珦)의 학풍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 부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550년(명종 5)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온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명종이 ‘소수서원’으로 사액하였다.
이 서원에는 안향 초상(국보, 1962년 지정)·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1968년 지정)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부석사는 영주시의 소수서원보다 북쪽에 있는 사찰로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화엄종(華嚴宗)을 열었다.
이곳의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962년 지정)은 고려 때 건조된 건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또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962년 지정)·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부석사 조사당(국보, 1962년 지정)·부석사 조사당벽화(국보, 1962년 지정) 등 모두 5개의 국보가 보존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서 안동쪽으로 가까이 가면 조선 유학의 거봉 이황이 그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낙동강변에 세운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다.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는 하회탈(국보, 1964년 지정)이 전해 오고 있는데, 이 곳 동민들이 음력 정월 2∼15일 사이 동제(洞祭)를 지낼 때 사용하던 탈이다.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는 직지사(直指寺)가 있고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는 고려 때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쓴 인각사(麟角寺)가 있다.
인각사에는 일연이 열반한 지 3년 뒤인 1295년(충렬왕 21) 그의 문인 법진(法珍)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높이 190㎝, 너비 1m의 크기였는데 파손되어 높이 120㎝로 줄어들었다.
충렬왕은 일연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을 정조탑(靜照塔)이라 하였다.
낙동강이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는 도리사(桃李寺)가 있다.
도리사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온 아도(阿道)가 맨 먼저 자리잡고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선산 금오산 기슭에는 고려왕조의 신하로서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끝내 뿌리치고 은거하며 살았던 길재(吉再)를 기리어 지은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경상남도로 접어들면서 황강 상류에 합천 해인사가 있고, 그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황강이 낙동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의 삼각주가 밤마리라고도 불리는 율지리(栗旨里)이다.
이 곳에서 오광대(五廣大)가 시작되어 「진주오광대」·「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로 전파되었고, 낙동강의 동편인 부산으로 전래되어서는 「동래야류 東萊野遊」와 「수영야류 水營野遊」로 연희되었다.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는 신라진흥왕이 중신들을 거느리고 국내를 순수하며 민심을 보살피고, 그곳에 국방요새를 설치하면서 세운 기념비에 해당하는 순수비가 있다. 국내에 있는 4개의 순수비 가운데 창녕의 순수비는 너비와 높이가 비슷한 167㎝, 두께 30㎝ 크기에 모두 27행이며, 각 행마다 18∼27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561년(진흥왕 22) 2월 1일에 세웠다는 연대가 적혀 있어 사료적 가치가 가장 높은 것으로 지적된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변에는 진주성과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진주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곳은 예로부터 왜구를 방비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김시민(金時敏)이 왜군을 크게 무찔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軍官民) 6만여 명이 최후까지 항쟁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 무렵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당시 도요토미(豐臣秀吉)의 15만 대군이 부산항으로 몰려왔을 때 죽음으로 저항하던 곳이 동래·부산지방의 전투였다.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적에 대항한 주민들 중에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부녀자와 관기(官妓)들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이 동래성 항전을 기리기 위하여,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순직한 지 13년 뒤인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윤훤(尹暄)이 송공사(宋公祠)를 건립하였다.
그 뒤 인조가 충렬사(忠烈祠)로 사액하였다.
이 밖에도 밀양시의 영남루(嶺南樓)와 조선유학자 김종직(金宗直)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그리고 수영성(水營城) 등 많은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다.
☞ 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시의 세계에서 낙동강은 민족이 발을 붙이고 사는 생활의 터전, 젖과 꿀이 흐르는 민족의 샘 혹은 어머니와 사랑 등으로 추구되고 있다. 김용호(金容浩)는 1938년 『사해공론 四海公論』에 197행으로 된 장시(長詩) 「낙동강」을 발표하여, 일제의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유랑의 길을 떠나는 민족의 참상과 애환을 노래하였다.
“……북쪽은 구름이 깃들인 고향/우리들은 구름의 의도를 따라/북쪽으로 간다.”바로 생명이나 다름없는 토지를 빼앗기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처절한 모습을 낙동강을 통하여 절규한다.
“……내 사랑의 강!/낙동강아!/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 (중략) ……/초조와 불안과 공포가/나흘낮 사흘밤/우리들의 앞가슴을 차고 뜯고/울대처럼 선 왼 산맥의 침묵이 깨어질 때/뻣뻣한 대지를/고슴도치처럼 한 손에 휘어잡고 메어친/꽝하는 너의 최후의 선인은/우리들의 절망 바로 그것이었다. …… (중략) …… 아! 그리운 내 사랑의 강!/낙동강아!/너는 왜 말이 없느냐/너의 슬픔은 무어며/너의 기쁨은 무어냐…….”
유치환(柳致環)은 1950년대 중반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를 발표하여 낙동강에 대한 사랑을 읊었다.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 꽃잎이/흘러흘러 삼랑(三浪)의 여울목을 떠 내릴 적은/기름진 옛 가락(駕洛) 백리벌에/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중략) ……/낙동의 어진 흐름이여, 차라리 너는/순탄하고 가난한 겨레와 더불어/그 애달픈 삶을 바닥하고/…… (중략) ……/아아, 너는 진실로 겨레의 크낙한 어머니/낙동(洛東)의 가람이요, 영원한 겨레의 젖줄이여, 사랑이여, 노래여.”
이달희(李達熙)는 「낙동강」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를 이어 열한편의 연작시를 수록한 시집 『물의 상징법』을 1971년에 펴내었다.
그의 시 「낙동강 4」에는 낙동강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우리 겨레의 한(恨) 같은 것이 깔려 있다.
“싸르륵 싸르륵/마른 갈밭을 헤치는 회오리바람을 지나/모랫바람이 불꽃처럼 확확 타오르는 강변을 지나/대한(大寒)날/얼어붙은 낙동강을/홀로 건너가시던 할머니/호호 언 손 불어주시던/사천년의/그 면연(綿延)한 사랑…….”
그리고 1915년 경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최화국(崔華國)은 일본에서 「낙동강」이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 낙동강은 향수의 거울이 되고 있다. “…… 가을의 호수처럼 깊게 맑은 눈동자의 당신/당신 때문에/가여은 조국마저 빛나 보였다. …….”이 밖에 전상렬(全尙烈)이 1971년 『낙동강』이라는 시집을 발표하였다.
소설 속에서 낙동강은 그 강을 이웃하여 살아왔고, 또 착하게만 살고 있는 강변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의 무대로 자주 다루어져 왔다. 김정한(金廷漢)은 강변에 깔린 민중의 소리를 소설로써 형상화하였다. 「모래톱이야기」·「뒷기미나루」·「두메」·「산서동 뒷이야기」·「수라도 修羅道」 등이 모두 그러한 작품이다.
「모래톱이야기」는 낙동강 하류의 어느 외진 모래톱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로, 소수 유력자와 선량한 다수 민중 사이의 동태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수라도」는 여주인공 가야부인의 친정이 바로 이 강가이고, 시가 역시 강건너마을에 있다. 이 강가에서 벌어진 허씨 일가의 4대에 걸친 민족의 수난사가 그 줄거리이다.
「뒷기미나루」는 열여섯 살의 나이로 낙동강 상류 뒷기미나루의 뱃사공이 된 여인의 궁핍한 삶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착한 민중의 수난상을 낙동강변의 무대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즉, 작가는 낙동강변의 문학을 통하여 역사 속에 흐르는 민중의 피맺힌 소리를 집단사회의 실태로서뿐 아니라 인간구원의 보편타당한 문제로 들고 나옴으로써 민중문학의 기반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낙동강이 소재가 된 옛 시가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어부사 漁父詞」가 손꼽힌다. 조선조의 어지러운 당쟁을 피하여 조용히 자연으로 찾아드는 선비들에게 낙동강은 안식처와 귀의처가 되었다.
백구와 물고기, 그리고 너울너울 흘러가는 뜬구름 속에서 세상의 소용돌이를 잊고 한가로이 강호가(江湖歌)를 읊조리며 소요하는 선비들의 심경이 낙동강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이중에 시름 없으니/어부의 생애로다/일엽편주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두고/인세를 다 잊었거니/날 가는줄 알랴.”
낙동강이 크게 아홉 굽이를 돌아흐르는 구곡장류(九曲腸流) 중 세번째가 월천(月川)이고 네번째가 분천(汾川)이다.
도산서원 앞을 지나는 강을 분천이라 하는데, 이 일대에서 조선시대 강변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부사」가 집대성되었다.
이현보(李賢輔)는 조선 명종 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분천 근처로 내려간 뒤 자연을 노래하며 저 유명한 「어부사」를 재구성하였다.
「어부사」는 고려 충목왕 이전부터 불린 노래였으나, 이현보가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여 ‘닫드러라 닫드러라’, ‘이어라 이어라’, ‘지국총 지국총 어서와’ 같은 「배따라기」의 후렴을 1장씩 섞어 엮었다.
“낚싯대 한 끝에 만사를 잊으니/정승벼슬을 준대도/이 강산과 바꾸잖으리.”이현보의 「어부사」를 효종 때 윤선도(尹善道)가 다시 우리말로 다듬어 「어부사시사」 40수를 지었다.
분천에는 이현보가 가사를 읊조리던 ‘농암’이라는 바위와 그를 기리는 애일당(愛日堂)이 있었으나 안동댐공사로 수몰되었다.
또한 이규보(李奎報)도 한시 「낙동강」을 노래하였다.
이 밖에 낙동강유역권은 아득히 가야·신라 문화의 발상지인 만큼 가야국의 개국을 예고하는 노래라 할 수 있는 「구지가」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에서 「구지가」가 불렸고, 거기서 나온 금합(金盒)에서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구지가」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또 신라의 「처용가」를 낳게 한 처용암도 낙동강문화권의 울산 앞 개운포(開雲浦)에 있다.
미술작품에서의 낙동강은 극히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노송(老松)이 우거진 절경이나 배 위에서 유유히 낚시나 즐기는 그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낙동강에 대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로서의 본격적인 그림이 완성되었다.
부산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박정규(朴正圭)는 1984년 낙동강 1,300리를 세로 80m, 가로 1.1m의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하였다.
발원지인 강원도 황지로부터 부산의 다대포 앞 하구에 이르는 낙동강 전역을 한장의 화선지에 그려 「낙동대장강 洛東大長江」이라 하였다. 이 그림은 크기에 있어서 우리 나라 최대로 기록된다.
그림은 굽이굽이 산과 들을 감돌아 흘러내리는 낙동강 전역을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를 통하여 기록성과 사실성·회화성에 최대의 역점이 주어졌다.
나룻배가 있고 철교가 있고 전통촌락이 있는가 하면, 공장의 굴뚝이 숲을 이룬 공업단지와 고속도로가 있다.
특히 강의 하류인 을숙도 부근에는 하구언이 건설되기 이전의 풍경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어 변하기 전의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그림 가운데에는 이의주(李義柱)의 그림도 손꼽힐 만하다.
1982년도 기록화로 그린 이 그림은 강 하류인 하단(下湍) 앞의 하구를 그린 것으로 크기가 500호에 이른다.
갈대밭과 농가의 채소밭, 모래톱, 물살이 주요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 그림 역시 하구언을 건설하기 이전의 하구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 자원과 이용
낙동강의 연평균 유출량은 약 110억㎥로 추산되나, 해에 따른 변동이 커서 다우년(多雨年)에는 200억㎥를 상회하지만, 과우년(寡雨年)에는 40억∼50억㎥로 떨어진다.
이 연간 유출량도 3분의 2에 해당하는 물이 6∼9월 사이의 4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흘러가 버리고, 나머지 3분의 1 정도의 수량이 8개월 동안에 흐른다.
그러므로 3분의 2에 해당하는 절대량의 물이 홍수가 되어 일시에 흘러가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낙동강 유역의 강우특성 때문인데, 연강우량의 66%가 6∼9월의 우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건조기인 10월부터 3월까지의 6개월 동안은 연강우량의 18%가 내리고 이앙기인 4월과 5월에는 연강우량의 16%가 내린다.
또한 낙동강은 홍수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데다가 물의 유황(流況)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가 어려운 하상(河床)으로 되어 있다.
하상과 강우형태, 그리고 주변 산지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총유사량은 연간 약 1천만 톤으로 추정되고 있다. 1㎢의 하상에는 연간 400t에 해당되는 토사가 유출된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유사량은 풍화 및 분쇄된 기저암층의 심도가 커서 침식작용이 쉽게 일어나는 본류의 서쪽지역에서 유출된 것이다.
이 같은 낙동강의 수자원, 이를테면 홍수와 갈수의 자원화를 위하여 국제연합개발기구(UNDP) 낙동강유역조사단이 5년간의 조사를 마치고 1973년도에 출간된 『낙동강유역개발지원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유역 내에 30개 댐지점을 선정하고 이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18개 댐과 1개의 하구언후보지를 지정하였다.
18개 댐의 후보지 중 안동·합천·임하의 3개 댐은 본류연안개발에 가장 적합한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15개 댐은 지류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지류연안개발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같이 본류든 지류든 간에 댐건설의 적지가 상류에 위치하여야 하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18개 댐이 전부 개발된다 하더라도 집수면적상(集水面積上)으로는 전 낙동강 유역의 31.5%, 유량조절면으로는 연간 유출량의 22.4%의 조절능력밖에 가지지 못한다.
이들 18개 댐 가운데 안동댐은 저수지의 규모와 조절면적 및 유량조절능력이 가장 큰 댐으로서 18개 댐군(群)의 31%, 21%, 23%를 각각 차지한다.
그리고 안동·합천·임하댐 등 3개 댐이 18개 댐의 조절량의 50%를 상회한다.
실제로 1969년에 건설된 남강댐과 1976년에 건설된 안동댐은 홍수와 갈수의 조절 및 전력을 생산하여(남강댐:1만2600㎾, 안동댐:9만㎾) 유역의 농업과 공업의 발전은 물론 생활용수의 이용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포장수력면(包藏水力面)에서 보면 낙동강·한강·금강·섬진강의 총포장수력은 약 300만㎾이며, 낙동강은 그 가운데 약 13%인 38만㎾의 포장수력을 가지고 있다.
낙동강의 또 하나의 특성은 하류지방에서 염분 피해가 많이 나타남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벼생산량에 대한 염분 피해가 컸던 1965년에는 1ha당 2.5톤의 수확량을 거둔 데 비하여, 피해가 거의 없었던 1971년도에는 5.4톤으로 두 배 이상의 증산을 볼 수 있었다.
염분피해는 벼농사에 대한 피해도 심각하지만 부산시의 상수도원으로서의 피해도 크다.
이와 같은 피해를 종합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 하구에 하구언을 건설하여, 1987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이 밖에도 수자원으로 내수면어업(內水面漁業)이 있다.
『국내 내수면자원의 잠재력조사서』(1970)에 따르면 낙동강의 담수어 총생산능력은 1만1900t이며, 1970년도의 어획고는 370t 정도로 전국 내수면어획고의 약 30%에 이른다.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의 전환을 전국에서 맨 처음 시작한 곳으로, 1919년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에 잉어양식장이 설치되었다.
이 밀양양식장은 1922년도의 대홍수로 유실되고, 6년 뒤인 1928년도에 진해에 다시 대규모 양식장이 세워졌다.
1968년도부터 밀양에 다시 양어장이 설치되어 연어의 회귀성 등 생태를 추적하고 있다.
낙동강유역권은 관광자원의 면에서 볼 때 어느 지역보다도 다양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동댐과 대구·경주·부산의 해변까지 실로 관광자원으로서의 입지적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영주 부석사와 희방사(喜方寺), 그리고 순흥의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상류지역의 관광권이 높이 평가된다.
이 유역권에는 풍기의 특산물인 인삼도 관광자원으로 큰 몫을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안동댐과 도산서원 그리고 댐 주변의 민속촌이 큰 관광자원으로 등장하였고, 안동권으로서 하회민속마을이 각광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고가(古家), 하회별신굿, 하회탈, 쥐불놀이 같은 민속자료를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면 보다 괄목할 만한 자원으로 각광을 받을 것이다.
구미의 금오산도립공원(金烏山道立公園)과 김천의 직지사, 상주의 문장대(文藏臺)도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경상남도로 접어들면 합천댐을 중심으로 하는 호반관광지가 조성되었다.
합천댐은 창녕 부곡온천(釜谷溫泉)과 합천 해인사, 멀리 경주 일원을 1일관광권으로 등장시켰다.
경부고속도로와 구마고속도로 및 88올림픽고속도로가 서로 연결되고, 그 밖의 각 국도가 확장되고 정비됨으로써 안동댐·대구·해인사·부곡온천·부산을 연결하는 낙동강유역권의 관광자원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지리산과 남해안의 한려수도, 그리고 경주 일원까지 연결시켜 광역의 관광권이 형성되었다.
특히, 1987년에 완공된 낙동강 하류의 하구언과 주변의 긴 갈대밭, 그리고 철새도래지 등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산업관광자원면에 있어서도 낙동강유역은 어느 지역보다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구미산업단지와 포항제철, 그리고 울산·온산공업단지, 창원의 기계공업단지 등이 모두 낙동강의 수자원을 이용하여 산업기지화하였다.
이와 같이 낙동강유역은 천연적인 자연경관과 문화·역사적인 풍부한 유산 및 현대화된 산업시설이 어울려 우리 나라 제1의 관광권을 이루고 있다.
낙동강유역권인 경상남북도에서는 전국 광물채굴량의 약 19%를 생산하고 있다.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발행한 『낙동강유역개발지원조사보고』에 따르면 석탄과 흑연은 낙동강 북단과 북서쪽에 있는 쥐라기와 오르도비스기의 암층에서 주로 생산되며, 이 지역의 석탄 총생산량은 전국의 3분의 1로 추산된다.
석회석 및 시멘트 생산지역도 유역 북부의 쥐라기 암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색 고령토는 유역내에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
중요한 금속광물은 텅스텐·납·주석 등이며, 구리·아연·망간·몰리브덴·철·은 등도 다소 생산된다. 비금속광물로는 운모·규사 및 장석 등이 소규모로 산출되고 있다.
☞ 하구의 녹산공단
낙동강 하류지역은 남해안의 다도해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광활한 갈대밭과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어 철새 도래지로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부산시는 하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가덕도를 부산신항항만지역으로 정하고 거대한 항만시설을 계획하여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
부산신항은 환태평양시대의 국제물류항으로 개발, 싱가폴과 일본의 고베항을 비롯한 세계의 유수한 항구와 경쟁력을 갖는 규모로 건설될 전망이다.
부산신항을 기점으로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일대의 2백10만 평 규모에 7천4백억 원을 투입한 녹산공단이 1990년 착공하여 1999년에 완공되었다.
이 공단에는 1천여 개의 기업체가 입주할 예정이며, 삼성자동차가 입주해 있다.
녹산공단에 이어 강서구 신호동 일대에는 신호공단이 조성되었고, 명지에는 대규모 주거지역이 조성되 있어 낙동강 하구일대가 공단의 배후주거지가 형성될 예정이다.
부산신항과 녹산·신호공단 그리고, 지사첨단과학단지 등을 연결하는 배후 산업도로망이 부분적으로 완공, 개통되었다.
배후도로가 완공되면 가덕도의 부산신항으로 수송된 컨테이너 물량이 녹산공단과 신호공단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망이 개설 중에 있다.
또 한편으로는 건설 중인 국내 최대 규모의 광안대로를 통하여 경부고속도로로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
부산시는 낙동강 하구지역인 서부산권을 공업지역과 항만물류지역으로 개발하고 동편인 해운대·송정을 거점으로 하는 동부권은 관광벨트로 개발하고 있다.
☞ 현황과 전망
4대강유역권의 개발로 국토개발의 웅지(雄志)가 전개되었던 낙동강유역권은 실로 국토개발의 가늠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유역권의 공업지구, 이를테면 구미·포항·울산·마산·창원·진주·사천 등은 낙동강을 전제로 도시화·공단화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유역권은 국내 최대의 공업지역으로 조성된 만큼 수질오탁(水質汚濁) 또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낙동강과 유역권개발에 철학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생태계로서의 환경기준과 오탁원(汚濁源)으로서의 배출기준이 전 하천 유역에 걸쳐 전체적이고도 종합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낙동강의 경우 강원도·경상북도·경상남도의 3개도와 대구·부산의 2개 광역시를 흐르는 동안 각 행정 단위별로 단편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전유역이 일괄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은 낙동강홍수관리사무소가 담당하고 있는 홍수에 관한 것뿐이다.
사실 낙동강은 각 지역에 필요한 물을 제공하여 주지만 일단 제공한 물이 사용되고 난 뒤에는 그것을 오탁된 상태로 되돌려받는다.
풍요를 구가하는 평야에서는 농약오염을, 또 물질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와 공업지역에서는 중금속의 하수와 폐수를 되돌려받는 고통이 따른다.
강연안의 개발이 어려운 점은 이와 같은 데도 있다.
낙동강의 개발에서 가장 큰 초점은 홍수를 자원화하는 데 있다.
낙동강을 통하여 흘러내리는 물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물이 홍수 때 일시에 바다로 흘러가 버린다.
따라서 다목적댐과 다목적저수지의 개발이 필연적이며 최우선순위로 지적되었다.
낙동강다목적댐의 주목적은 홍수조절에 있으면서도 홍수의 요보호지역(要保護地域)인 하류에서 댐의 적지(適地)를 찾을 수 없는 데 연안개발의 어려움이 있다.
또한 홍수관리의 어려움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물부족현상이다.
처음부터 수자원개발에 있어서 물이용의 형평을 유지하는 점이 구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했다.
최우선 순위를 용수공급과 홍수방지에 두고 있으므로 유역권의 물부족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하류지역, 특히 부산의 식수와 김해대동(大東)·대저(大渚)·녹산(菉山)일대의 평야에서는 갈수기의 물부족이 염수침입현상(鹽水侵入現象)으로 나타난 지 오래되었다.
대구시에서도 금호강의 오염으로 인하여 상수도공급에 타격을 받고 있다.
산업수준의 발달은 각종 용수의 급증현상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갈수현상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하류지역에 초당 40톤 정도의 유지수량이 흘러야 한다.
그러나 심한 가뭄이 닥쳤을 때는 유지수량이 초당 10톤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상류에서 초당 20∼30톤의 물을 흘려 보낼 수 있는 댐과 저수지가 세워져야 갈수기대책이 수립될 수 있다.
이보다 실질적인 문제는 물부족일수가 80∼240일로 추정되기 때문에 장기간의 물 방류를 댐이 감당해낼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낙동강유역권은 개발의 측면에서만 다룰 수는 없다.
역사시대 이전부터 낙동강은 우리 문화가 싹터 온 요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의 원류가 강 연안 곳곳마다 서려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문화적 유적을 보존하는 데도 중점이 주어져야 한다.
일찍이 우리의 불교문화를 정착시켰고, 조선유학이 크게 번성한 곳이 바로 낙동강유역이다.
강에서 조개를 잡던 태초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강과 연안을 면면히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숨결, 그와 같은 낙동강의 풍물들이 우리의 정신문화를 형성하여 온 것이다.
개발은 그러한 문화유산을 파괴하기 쉽다.
실제로 안동댐은 조선 유학의 고장들을 많이 수몰해 버렸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이 있다는 안동·예안·도산 일대의 많은 지역이 수몰된 것이다.
낙동강에는 동양 최대의 철새보호지역이 있는데, 하구 일대의 보호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낙동강 전수계(全水系)가 철새의 낙원이고 그곳에서 서식하는 모든 담수어의 요람이 될 때, 낙동강은 유역의 인간에게도 쾌적한 생활환경으로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새가 살 수 없는 환경에서는 인간은 더욱 살 수 없다.
낙동강 하류는 물론 강연안 전체에 찾아들고 있는 철새떼가 모조리 발길을 끊었을 때 이미 그때의 환경을 다시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강의 개발, 더 나아가 국토개발에 철학이 요구되는 까닭은 이러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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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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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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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리지(擇里志)』(이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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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하구의 조류연구」(우용태, 『낙동강』, 낙동강보존회, 1983)
・ 「낙동강하류의 식물상」(강태석, 『낙동강』, 낙동강보존회, 1983)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1565
한국학중앙연구원자세히보기
■ 20230205(음0115) SUN 낙동강(洛東江|Nakdonggang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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