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보는 아이 -공짜는 없다 1-
세상에 거저되는 일이 없음을 깨닫는다.
학교 졸업 후 40 여 년의 세월 동안 나 자신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일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면서 살아왔다. 사람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참으로 유장하다. 아직 회고의 시간은 아니지만 잘 견디며 이기고 살아 온 나 자신이 기특하고 고맙다.
한 번도 자기 관리나 극기를 위한 특별한 훈련이나 교육, 세미나를 받은 적이 없지만 나는 그 어느 훈련과도 바꿀 수 없는 고강도 훈련을 어린 나이부터 받았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다시 돌아가고픈 행복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에 나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맏딸로서 받은 그 엄청난 훈련이 나를 두려움 모르는 일꾼으로 만들어 주었다. 주어지는 일들을 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어영구영 대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마루지 않고 부지런히 열심히 한 것이 일에 대한 나의 자세와 태도, 능력과 집념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정말로 인생에 공짜는 없다!
주어지는 일을 겁내거나 피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반응하는 능력과 의지. 자세와 태도,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 조절과 제 시간 안에 끝내는 단호함, 부족한 것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협력 추구, 책임감과 도움을 주는 분들에 대한 깊은 감사. 미지의 세계와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 끊임없이 연구 노력하는 면학의 자세와 창의성 등등 것들이 맏딸로서 사는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맏딸로서 살았다는 것이 , 살아냈다는 것이 나를 나되게 만들었다.
맏딸로 살 수 있도록 믿음과 눈물의 기도를 주시고 일기를 쓸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40대 어느 날 갑자기 초등학교 취학 이전의 어린 나에게 매일 밤마다 닭장 문과 대문을 체크하도록 만든 엄마의 소위가 너무 괘씸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보통의 엄마 같으면 딸보다는 아들을 내보내거나 아니면 어른인 자신이 손수 할 터였다. 그러나 엄마는 밤마다 나를 지목하여 불렀고 나는 엄마의 말에 순종해서 나가서 닭장 문과 대문을 다시 잠그고 들어 와야 했었다. 안드라푸라데쉬 데칸고원을 순회하며 다니게 된 어느 날 부턴가 밤중에 닭장 문을 잠그러 가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보여서 나는 그 소녀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회가 되면 어린 소녀를 대신해서 엄마에게 딸만 그 일을 시킨 이유를 묻기로 하였다. 5년 전에 기회가 되어서 말문을 열었다.
“엄마는 무슨 마음으로 어린 저에게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마다 닭장 문과 대문을 잠그라고 하셨어요? 오빠도 할 수 있고 엄마 자신도 할 수 있는데 왜 꼭 저에게만 하라고 하셨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라고 대답하고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초등학교 취학 전부터 시작한 밤의 대문 단속은 고 3때까지 계속 되었다.
엄마의 대답을 듣는 순간 너무 허탈해서 “허!” 하고 웃었다. 그리고 어린 소녀가 나이 맞지 않는 고된 훈련을 잘 견뎠고 결과적으로 담대해져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지를 겁 없이 돌아다니는 것으로 감사하기로 하였다. 세상에 결코 공짜는 없는 것이다.
맏딸인 나는 예닐곱 살 때부터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었다.
물 긷기, 아기 보기, 방 청소, 젖은 짚단 널기, 마른 짚 묶어서 부엌에 싸놓기, 마당 쓸기, 닭 모이 주기, 토끼풀 뜯기, 토끼 밥 주기, 돼지 밥 주기, 개 밥 주기, 오리 몰기, 설거지, 불 때기. 재 푸기, 밤중에 닭장 문 닫기, 대문 잠그기, 막걸리 사오기, 점방에 다녀오기, 밤중에 약 사오기, 새 보기, 농약 주기 등등 엄마가 시키는 일을 한 번도 No라고 대답한 적이 없고 꾀병을 부린다거나 어영구영하고 피일차일 미룬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보기 시작한 아기를 중학교 2,3학년 때 까지 보았다. 그런 후유증인지 아기를 안아주기는 해도 업어주는 것은 싫어하는 버릇이 생겼다. 초등학교 1,2,3,4학년 때 해마다 5월과 6월에는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한 손에는 책보를 들고 한 손에는 남동생을 붙잡고 유강리에 큰댁에 가서 할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가서 밥을 먹이고 학교가 끝날 때 다시 가서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방과 후, 친구들은 고무줄놀이며 팔방을 하면서 재밌게 노는데 나는 아기를 업고 친구들이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언니나 고모가 있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노는 친구들이 몹시 부러웠다. 여름 방학 때는 아기를 업고 있다가 땀이 나고 지치면 나무 그늘 아래 내려놓고 혼자 놀게 하였다. 나는 겨울을 좋아 했다. 11월에 추수가 끝나면 엄마의 농사 일이 끝나기 때문에 아기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겨울이 좋았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동생 때문에 야단을 맞아서 엄마가 계모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집을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아침 일찍 작은 보따리를 싸들고 나갔는데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철도 파수막을 넘어서 만경강 다리 쪽으로 가다가 얼어 죽을 것 같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 바로 들어가기 싫어서 동구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눈을 맞으며 한창 서성거렸다. 집에 돌아오니 아궁이에서 빨간 불이 잦아들고 있었고 밥 냄새가 구수하였다. 상차림을 마친 엄마가 동태가 된 나를 보고 아침부터 어디 싸질러 다니다 왔냐며 야단을 쳤다. 왈칵 눈물이 솟았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보퉁이를 살짝 풀고 밥상에 끼어서 밥을 먹었다.
나는 맏이로서 동생들을 내리 업었지만 막상 아기인 나는 농번기에 보아 줄 사람이 없어서 큰 집 오빠가 봐주거나 엄마가 논둑에 놓고 일하셨다고 한다.
큰 집 큰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다. 오빠가 어린 아기인 나를 보는데 두세 시간 등에 업고 있어도 아기가 기척이 없어 죽었는가 놀라서 자주 꼬집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기가 꼬집어도 울지 않아서 진짜 죽은 줄 알고 놀라서 띠를 풀어 보면 히죽 웃고 있어 “이 놈의 지지배야. 꼬집으면 좀 울어라. 죽은 줄 알고 놀랐잖아.” 라고 소리 지르며 볼기짝을 때렸다고 했다. 한 번은 조그만 도랑이 있는 곳에서 나를 내려놓고 잠깐 쉬는 사이에 내가 사라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오빠는 도랑 속에서 물풀을 뜯고 흙을 먹으며 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혼비백산 하였다고 했다.
엄마는 큰 집 오빠에게 나를 맡기지 못하면 논에 데리고 가서 논둑에 놓고 일을 하곤 하셨다.
피사리를 한 두 시간 계속해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혹시 무슨 일이 생겼는가 놀라서 나와 보면 내가 도랑 속에서 풀을 뜯고 흙을 이기며 놀고 있었다고 하였다.
우리 집 막내는 겨울 방학 기간 중, 눈이 펄펄 내리는 날에 태어났다. 엄마가 몸을 푸시면서 할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해서 눈을 맞으며 가서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3월부터 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오후 4, 5시 정도에 집에 오므로 그 때까지 바로 밑의 여동생이 아기를 보았다. 여동생은 나만 오면 아기를 내려놓고 도망을 가서 그 때부터 아기를 업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 때부터 성경 읽기를 시작하여서 아기를 업고 기도하며 찬송을 많이 불렀다. 아기가 요셉처럼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하였고 아기가 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주기도문을 암송시키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막내가 만 3살이 되어 나는 비로소 아기 보는 일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큰 집 큰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가 나를 업어주었으면 희택 오빠는 누가 봐주었어요.”
“희택이는 할머니가 주로 보았지. 근데 이뻐서 인기가 좋아서 사람들이 서로 보려고 했어.”
“나는요?”
“너는 메주여서 아무도 안 봐주었어. 작은 엄마가 너랑 희택이 놓고 가면 나는 그 날은 너 보느라고 죽었어.”
2020.1.18.토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