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참여적인 시>
-시창작의 길잡이 17쪽-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농촌 경제가 무너짐)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화장/분노-중의적 표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세우고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조선시대 의로운 적(임꺽정)/불의와 타협함)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신의는 없으나 임꺽정 밑에서 문사 즉 모든 계획을 세우는 사람)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한테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역설-분노의 고조)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반어적 의미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반어적 의미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반어적 의미
ㅡ신경림 <농무> 전문
*농무-민중시의 기틀을 마련함
입국장
김이듬
미국 국적 친구를 기다린다
심야 공항 터미널은 지나치게 환하다
그녀에게 이 도시를 어떻게 소개할까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파묵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
맞은편 의자에 앉아 통화하는 사람은 미소를 띤다
왼쪽 옆으로는 불매운동중인 제과업체의 체인점이 있다
빵공장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플라스틱 빵처럼 내 표정은 굳어 있다
밝은 조명 아래 내 우울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습관처럼 깊이 눈을 감는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습격한다
밀려내려가다 꼼짝없이 매몰되었던 사람들
필시 친구는 알고 있을 텐데
이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경악했을 텐데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는
그 도시가 더이상 자동차의 도시는 아니라고 했다
파산 직전의 공장들과 슬럼가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었다
그녀에게 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설명할까
자동차가 아닌, 사람의 도시라고
최소한 총성이 울려퍼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일까
자질구레한 것들을 치운 내 방에 그녀의 잠자리를 만들었고
베지테리언 식당도 알아봤지만
말할 수 없겠지
내가 사랑하는 도시라고
트렁크 끌고 공항철도를 타며
말해야 할까
화장실에서는 불법 카메라를 조심하라고
알려줄 것들이 조각케이크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기만 하다면
이즈음 나는 어두운 방에 나를 가둔 채 발작하지 않았겠지
신경안정제 부작용인지 부은 얼굴로 너를 마중하러 나오지는 않았겠지
네가 예민한 건 아니야
친구가 와서 나를 안아주면
환영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지
-계간 《시산맥》(2024, 여름호), 제14회 시산맥작품상 수상작
김이듬 / 2001년 계간 《포에지》를 통해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등.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올해의좋은시상, 22세기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전미번역상,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 올해의양성평등문화인상, 시산맥작품상 등.
진단
신동혁
머리를 자르면 물고기가 된 기분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고 마지막엔 바다가 온다는 말을
소금기가 남은 꼬리뼈를 믿습니다
훔쳐온 것들만이 반짝입니다
지상의 명단에는 내가 없기에
나는 나의 줄거리가 됩니다
나는 맨발과 어울립니다
액자를 훔치면 여름이 되고 비둘기를 훔치면 횡단보도가 되는
낯선 버스에서 승객들이 쏟아집니다
멀리서 보면 선인장 더미 같습니다
서로를 껴안자 모래가 흐릅니다
모래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듯
빈 침대는 바다에 대한 추문입니다
나는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습니다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는 가장 뜨겁습니다
지도를 꺼내어 펼쳐봅니다
처방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호주머니가 깊어집니다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당선소감>
문학은 상상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는 길잡이
돌이켜 보면 내 마음속에 이러한 낯설고 막연한 꿈들을 심어줬던 건 문학이었다. 내 손을 잡고 매번 나를 가장 먼 곳으로 데려갔던 것도 문학이었다. 사실은 꽤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지내고 있었다. 세상과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새로움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붙들고 있었던 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분명 양치기를 꿈꾸던 그 때의 두근거림을 기억한다.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 실제로는 드넓은 초원도 양떼도 본 적이 없지만 다시 한 번 믿고 싶다. 시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기를.
다음 주면 이사를 하게 된다. 2년간 살았던 달동네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고 한다. 모두가 떠난 집 앞 골목길에 버려진 가구들이 즐비하다. 익숙한 것들을 버리는 건 참 힘들다.
그러나 어쩌면 삶은 존재보다 더 많은 부재로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곁에 있어준 사람들과 떠난 사람 모두에게 감사하다. 저를 호명해 주신 황현산, 정끝별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오랜 세월 제게 시가 되어 주신 이천호 선생님 그립습니다.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박찬일 교수님, 블랙러시안 같은 오양진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수명 선생님 감사합니다. 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과 듬직한 동생 우람이, 나의 피비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1990년 경북 구미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 >
새로운 발화… 표현 밀도 높고 대상·심상 결속력 뛰어나
‘틀의 변화’는 시대의 화두다. 하지만 시조의 길은 좀 다르다. 선험의 틀을 지키되, 그 속에서 갱신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율 속의 자유, 균제 속의 자재를 이야기한다. 관건은 대상에 대한 낯선 관점, 새로운 해석이다.
숙독 끝에 세 편의 작품이 선자의 손에 남았다. 세 편 다 시의 발화가 새롭고, 시상을 밀고 가는 힘이 좋다. 장윤정의 ‘뭉크의 오후’는 뭉크의 절규 이미지에 노숙의 풍경이 겹친다. 종장의 밀도를 초·중장이 받쳐 주지 못한 게 흠이다. 정영희의 ‘어름사니’는 꽃과 어름사니의 비유를 통해 빛과 어둠의 경계를 짚고 있다. 문제는 시어의 반복이 시상의 전환을 막는다는 점이다. 우리 곁에 온 또 한 사람의 시인을 박수로 맞으며, 모든 투고자들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박기섭 시인, 이근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