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로 인해 마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각은 2003년 9월 14일(일) 오후 3시 35분경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한 PC방입니다.
(집의 컴퓨터는 아이들이 점령하여 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아직 마산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애초 계획은 오늘 아침 일찍 내려가는 것이었으나, TV 뉴스를 통하여 태풍 ‘매미’의 피해가 가장 큰 곳이 바로 우리 집이 있는 마산 해운동이라는 소식을 계속 듣고 있고, 또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통화가 된 우리 아파트 이웃의 말이 아직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돗물도 안 나온다고 하니, 걱정이 되신 부모님께서 더 있다 가라고 잡는 바람에 결국 더 머물게 된 것입니다. 마침 나는 내일은 주간 강의가 없고 야간 강의만 있어 내일 출발해도 별 문제가 없으며,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하루 결석시킬 생각입니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우리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TV 화면을 통해서 본 마산 해운동 우리 동네는 가로수가 다 뽑히고 원목과 컨테이너 박스가 도로 위를 뒹구는 등, 마치 전쟁터 같았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자주 가던 롯데리아가 들어있는 건물인 댓거리 ‘해운프라자’ 지하에서 지금까지 8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아르바이트생들의 희생이 많았다고 하니 경남대학교의 내 제자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일 학교에 가 보아야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겠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TV에서 ‘마산 해운동’이 이렇게 많이 언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하필이면 왜 이런 안 좋은 일로인지 속이 상합니다. 다음에는 좋은 일로 매스컴을 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컴퓨터 이용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이만 마쳐야 되겠습니다.
곧 마산에서 뵙죠.
(2003.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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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어제(2003. 9.15.월) 오전 10시 40분에 서울을 출발하여 오후 3시 50분쯤 서마산 IC를 통해 마산으로 돌아왔다. 추석 전날 서울로 올라간 우리 가족은 모두 남겨두고 나 혼자 차를 몰고 내려온 것이다. 출발 직전까지 다 함께 오느냐, 나 혼자 출발하느냐를 놓고 아내와 옥신각신, 갈팡질팡하다가 마산 이웃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아직 전기, 수도, 전화, 엘리베이터 모두 불통이니 아이들은 내려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결국 나 혼자 내려오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마산 시내로 들어와 종합운동장까지는 가로수만 몇 그루 부러졌을 뿐 뉴스를 통해 보고 듣던 것과는 달리 큰 문제는 없는 듯 보였으나, 해안로로 들어서자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였다. 신호등이 작동되지 않아 경찰이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느라 차들이 밀리고 길가 상점들은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한 몰골이었다. 어시장 근처에 가자 군데군데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부패의 악취가 풍기고, 시청 공무원들은 방역을 하느라 온 사방으로 허연 연막 소독약을 뿜어대며 돌아다녔다. 양쪽 도로변에는 뻘로 뒤덮힌 차들이 제멋대로 방치되어있는가 하면 상인들은 점포 정리와 청소에 정신이 없고 지원 나온 군인들은 도로 정비를 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이며 하늘에는 헬리콥터까지 떠있었다.
그걸 보니 덜컥 우리 집이 걱정되어 부지런히 해운동 우리 동네로 달려갔다. 집 가까이 갈수록 도로변 여기저기에 원목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가로등도 중간이 부러져 쓰러져 있는 등 상황이 더욱 처참하였다. 집에 도착하니 동네 전체가 마치 전쟁터와 쓰레기장을 뒤섞어 놓은 꼴이었는데, 사람들은 군데군데 무더기로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 곁에서 뻘흙으로 범벅이 된 자동차의 본넷을 열고 물로 씻고 닦는가 하면, 좁은 도로로는 수도 없이 많은 견인차들이 빵빵거리며 침수된 차를 끌고 가느라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 여자와 아이들은 경비실 옆에 장사진을 치고 배급하는 물을 받고, 물통을 아파트 계단으로 들고 오르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추석 연휴 끝에 오랜만에 보는 이웃들인데도 뭐라 인사해야 할지 말조차 잃을 지경이었다. 마침 물을 받고 있는 선우 친구에게 상황을 물어보니 전기, 수도, 전화 모두가 여전히 불통이라고 한다. 헉헉거리며 계단을 올라 16층 우리 집 문을 열어보니, 아, 이게 웬일인가? 놀랍게도 유리창 하나 깨진 곳이 없이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다만 정전 때문에 냉장고 속의 음식이 부패했는지 집안에 악취가 조금 차 있고, 방충망 하나가 바람에 뒤틀렸는지 움직이지 않았으며, 햄스터 두 마리가 죽어있고,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다 살아있는데 태풍 소리에 놀랐는지 오랜만에 먹이를 주어도 밑바닥에 오골오골 몰려있을 뿐 먹으려 하지 않았다.
집안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 새 오후 6시가 다 되어 대학원 야간강의를 하려고 서둘러 학교를 향했는데, 가는 중에 속으로는 ‘상황이 이러니 오늘 강의는 휴강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강의실에 가 보니 내 예상과는 달리 수강생들이 빠짐없이 모여있어 내심 놀라움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강의를 끝내고 차를 몰고 귀가하니 주변의 두산 아파트는 여전히 깜깜한데 우리 아파트만은 다행스럽게도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니 그건 작동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수리하려면 며칠 걸릴 거라고 한다. 다시 헉헉대며 올라가기도 싫고, 올라가 봐야 물이 없으니 밥을 끓이는 것은 고사하고 화장실 사용부터 불편할 것 같아서 연구실에서 자기로 마음먹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서울에 전화하여 상황을 보고하니 아내는 아이들 등교가 걱정이라면서 내일 당장 기차를 타고 내려오겠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하니 만약 그렇다면 수도물도 안 나오고 엘리베이터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매일 내가 물을 몇 통씩 지고 16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제발 엘리베이터가 작동할 때까지만이라도 며칠 더 있다가 내려오라고 사정사정을 하였다. 그리고는 연구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웬 모기가 그리 많은지 밤새 온몸을 긁어대느라고 자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는 밥 먹기도 귀찮아 연구실에 멍하게 앉아있었더니, 9시 출근 시간이 지나자 적지 않은 동료 교수들이 직접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 ‘김 교수가 사는 아파트가 마산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는데 그 동안 연락이 안 돼 걱정했다’면서 안부를 물어왔다. 그래서 내가 우리 집 피해가 너무 심해 도저히 지낼 수가 없어서 학교에서 잤으며 아직 아침도 못 먹었다고 하니 모두들 동정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대화 중에 태풍 불 때 나는 서울에 있었고 그런 덕에 자동차조차 침수되지 않았으며 망가진 것이라고는 방충망 한 쪽뿐이고 가족은 아직 모두 서울에 남아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 사람 순 나이롱 수재민이구만’하면서 안색을 바꾸고는 다들 제 연구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졸지에 외로워진 나는 그 뒤에 대고,
“사람들이 저렇게 모질 수가 있나? 태풍 때문에 이산 가족이 되었고 식수조차 구하지 못해 학교로 대피했으며, 아침 식사도 못해 쫄쫄 굶고 있는 사람에게 나이롱 수재민이라니? 오늘 점심은 여러분이 사야 돼”
하고 외쳤다.
(2003. 9.16.)
(경남대 김원중)
첫댓글 '나이롱 수재민'맞네요. ㅎㅎ
16층 높은곳에 사는 효과가 이런곳에서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