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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2020년 12월 6일, 강림절 제2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0년 12월 6일, 교회력으로 강림절 제2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강림절 제2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11장(홀로 한 분 하나님께)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 시편 85:1~2, 8~13절까지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8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2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 함께 기도합니다. [자넷 몰리, (Janet Morley), 요약함]
주님의 오심은 갇힌 자에게 자유와 같고
오랜 포로들의 귀환과 같습니다.
주님은 제가 잊고 있던 춤의 동작이며
충족된 갈망의 표정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제 영혼이 주를 위해 동요하니
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제 열망을 보셨고
주의 눈이 사랑으로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주의 열정은 무덤보다 끈질깁니다.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제가 치유될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은 낯선 사람의 손길이나
주님의 음성은 제 집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후서 3:8~18절입니다. (성경)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 특별 찬양] 예수를 바라봅니다 (by 정선균)
*. 말씀 선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 들어가는 말
강림절 제2주를 맞이합니다.
시간을 깊이 성찰하면, 시간을 토대로 하는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미도 잘 새길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대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시간 속에 담겨있는 (담겨있어야 할) 마음을 함께 살펴봅니다.
2.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첫째, 인간의 이해 속에서, 시간은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 시간으로 나뉩니다. 모두에게 같은 절대적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인간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의미의, 상대적,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합니다. [*. ‘국방부 시계는 여전히 돌아간다’고 했을 때는 크로노스로서 시간을 의미하고, 말년 병장 때 느끼는 (시간이 안 가는 듯한 느낌의) 시간은 카이로스로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나 크로노스 모두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절대적인 크로노스의 시간과 상대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나누어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에 있어서 시간은 카이로스나 크로노스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빌려 이야기 하면, 때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8)고 하면 카이로스의 의미로서의 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10)라고 하면 이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 나뉘어서 표현하지만 사실 하나님께는 같은 의미가 됩니다. 두 의미가 같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 속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늘 인간에게 ‘신비’입니다.
둘째, 인간의 이해 속에서,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제를 갖습니다. 이 세 가지의 시제가 없으면 인간은 시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같습니다. [혹은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습니다’ 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시간이라는 것이 큰 하나의 통이고, 인간은 그저 그곳을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로(迷路)를 공중에서 보는 것과 땅에서 보는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마치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사람을 하늘 꼭대기에서는 그 모습을 다 볼 수 있지만, 인간은 서울을 떠나 대전쯤 가면, 서울은 과거가 되고, 대전은 현재가 되고, 부산은 미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어떤 별은 과거의 별이고, ‘지금’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보이지 않으나 어떤 별은 미래의 어느 때에는 빛날 것입니다. 아주 세밀하게 빛의 속도까지 계산해서 살펴보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여러분도, (앞에 앉으신 분은) 과거, (중간에 앉으신 분은) 현재, (멀리 앉으신 분은) 미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
인간의 이해 속에서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을 이렇게 분리해서 살펴보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시간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가 따라가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쫓아, 하나님의 시간에 눈 떠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시간 개념에 눈을 뜨게 되면, 우리도 주님이 오신다는 때가 ‘더디다고 더딘 것이 아니고, 이르다고 이른 것이 아닌 것’(9a)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도적(손님)같이 오시는 주님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kairos)이면서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 읽기
카이로스(kairos)에서는 시간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마치 말년 병장에게는 그 마음이 이미 사회로 나가있기 때문에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처럼, 왜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말년 병장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9절 후반부의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b).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로 ‘모두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게’ 만드는 것입니다. [*. 이 구절을 크로노스 개념으로 해석하면 바로 삼천포로 빠지는 것입니다.] 의인을 생각하면 (보고 싶으신 마음에) 천 년이 하루 같고, 죄인을 생각하면 (보기 싫으신 마음에) 하루가 천 년 같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모두 멸망하지 않고 회개시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의인과 죄인을 대하는 마음에 따라, 시간은 천 년이 하루 같기도 하고, 하루가 천 년 같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날이 언제나 그렇게 의미의, 카이로스의 시간으로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카이로스는 곧, 크로노스이기도 하기에,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으로, 결국은 도적(믿는 이에게는 ‘손님’입니다)같이 올 것이라고 하는 10절 앞부분의 말씀을 엄중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10a). 여기 크로노스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 일이 그 시간에 일어날 뿐입니다. 말년 병장의 하루가 천 년 같더라도, 국방부 시계는 돌고 돌아 결국 제대 날은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고자 하는 마음을, 그러나 크로노스에서 도적(손님)같이 임하는 주의 날을 마음 가운데 두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 오심의 성탄을 기다리는 시간, 설렘의 시간인 동시에, 깨어 맞이해야 하는 엄중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 찾기: 구술(口述)과 기술(記述)
위에서 말씀 드렸듯,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염려하듯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16절 후반부입니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16b)
설교를 하면, 노트를 펴고 적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구술(口述)하고 있고, 노트를 펴고 적는 이들은, 저의 구술(口述)을 기술(記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살펴 볼 요량으로 적기는 하는데, 조금 지나면 사실 잘 안 보게 됩니다. 본다고 해도, ‘무슨 말이더라...’하면서 그 뜻을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시간이 1년도 아니고, 십 년, 백 년 혹은 그 너머 천 년, 이천 년 지나고 나면 기술된 내용에서 구술의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집니다. 해석학이 요구되고, 해석학의 방법에 따라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본래 구술(口述)의 의미를 찾기는커녕, 엉뚱한 것 가지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성경이 기술된 때는 오래된 것은 몇 천 년까지 헤아려야 합니다. 그 의미를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전에 기술(記述)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뜻을 헤아리려면 ‘지금’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바로 구술(口述)의 의미를 살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놓치면 곧, 구술(口述)의 의미를 놓치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 아래는 라즈니시 오쇼의 <영혼의 마피아>에 나오는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물에 빠졌습니다. 불교 승려가 지나갑니다. 살려달라고 하자, 승려가 이야기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받아들이고 만족하시오, 다음 생에서 당신은 천 배나 보답 받을 것이오.” “그러지 말고 좀 살려주시오.” “다른 사람의 행위와 그 결과에 간섭하는 것은 내가 믿는 종교가 반대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전생에 나쁜 죄를 지었나 보군요. 우물에 빠진 이상 죗값을 치르고 처벌이 끝난 것에 만족하시오. 그래도 나는 꺼내주지 않겠소. 내일 당신이 누군가를 죽이면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오? 나는 그 어떤 살인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겠소.“ 승려는 매정하게 가버렸다고 합니다. 불경의 내용을 억지로 풀다가는 이런 꼴이 날 수도 있음입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공자를 모시는 유교 선비가 지나갑니다. 우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합니다. 선비가 말합니다. “보시게. 당신은 내 스승님의 말씀하신 내용의 산 증인이로군. 내 스승님은 우물 주변에 담을 쌓으라고 하셨지. (과거 중국에는 우물에 벽을 쌓지 않아서 사람들이 우물 속으로 빠지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게. 내가 온 나라에 혁명을 일으켜서 모든 우물에 담을 쌓아 보호하도록 하겠네.” 우물 안의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그 혁명은 언제쯤 일어날까요? 모든 우물에 언제쯤 담을 쌓을 수 있을까요? 그때쯤이면 나는 죽어 없을 겁니다.” 선비가 말했다. “자네쯤은 문제가 아니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가겠지. 사회 전체의 문제라네. 우리는 한 개인을 신경 써 줄 수 없다네. 우리는 문명 전체를 생각해야 하거든.” 그는 혁명을 일으키러 가버렸다고 합니다. 유교 경전의 내용을 억지로 풀다가는 이런 꼴이 날 수도 있습니다.
[뭐~ 기독교라고 딱히 예외가 될 수도 없겠지만, 여기서는 삼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4. 우선 순위
앞에서 이야기 한 카이로스(kairos)와 크로노스(chronos)를 지평으로 삼는다면, 카이로스는 구술(口述)이고, 크로노스는 기술(記述)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는 두 의미가 같은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나뉜다고 하였습니다.
나뉜 두 지평에, 우선 순위가 있는데, 인간은 크로노스보다 카이로스를 먼저 우선 순위로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평에서 크로노스를 살펴야 합니다. 기술보다는 구술에 더 마음을 쓰고, 그 구술의 지평에서 기술을 살펴야(만)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그 지평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처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비로소 복음의 참 맛이 돌고, 복음의 신비가 그 빛을 드러냅니다.
[*. 아래는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소설의 주요 테마를 이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0:19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19).
창세기 3장 15절 말씀입니다.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가톨릭 전통에서 성모 마리아가 뱀을 밟고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뱀과 전갈을 밟는 권세를 주십니다. 뱀과 전갈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혜’를 상징하는데, 곧 기술(記述)이 됩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것을 밟고 있습니다. 여인이 그것을 밟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밟을 권세를 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주셨기에 그것을 밟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여인의 지평으로서 ‘사랑’입니다, 곧 구술(口述)입니다. 지혜가 기술(記述)의 지평에 가 있다고 하면, 사랑은 구술(口述)의 지평에 있습니다. 뱀을 밟고 있는 성모 마리아(여인, 혹은 제자)에게서 ‘지혜’를 밟는 ‘사랑’이 혹 느껴지십니까? 기술(記述)을 밟고 있는 구술(口述)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 같은 것이라도, 인간은 그 우선 순위를 잘 헤아려, 볼 수 있는 지평을 찾아야 합니다. 우선 순위가 바뀌어지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새겨야 합니다. [*. God의 순서를 반대로 하면 Dog이 되듯이 말입니다.]
기술(記述)이 구술(口述)에 우선하면 안됩니다. 기술(記述)은 오직 구술(口述)의 지평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이를 놓치면 망하는 것입니다. 기술해 놓은 것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아니 많이 있습니다. 이를 억지로 풀려고 하다가는 스스로 멸망에 빠진다고 전해줍니다. 그렇다면 경전을 해석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요? 모르는 것은 그냥 내 버려두라는 건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구술(口述)의 의미를 상위에 두라는, 지평으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선 순위에 두시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구술(口述)이 우선이고, 그 지평에서 기술(記述)을 읽으시라는(해석)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놓친 상태로 기술(記述)을 억지로 풀려고 하면, 그 결과가 엉뚱한 데로 가, 스스로 멸망할 수도, 아니, 멸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렇게 기술(記述)되어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말의 때가 도둑같이 오고,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되리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10-11a) 했습니다. 이것은 ‘억지’로라도 해석해야 할 구절이겠지만, 구술(口述)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11절 중간부터 13절까지입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1b~13). 거룩한 행실, 경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는 마음, 의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시선... 마땅히 인간이 먼저 우선 순위로 가져야 할 마음, 곧 구술(口述)이요, 지평(paradigm)이요, 성령의 음성이 됩니다.
5. 나가는 말
인간에게는 크로노스(chronos),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이해가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크로노스이면서 동시에 카이로스입니다. 인간의 이해 속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시간에는 그런 나누어짐이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같거나 아예 없습니다. 카이로스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새겨야 하고, 크로노스에서는 깨어 도적(손님)같이 임하는 그 날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선 순위는 카이로스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이고, 이 마음으로 크로노스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이들이 회개하여 멸망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 이 지평에서, ‘도적(손님)같이 임할 그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주님 오시는 그 날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이 지평에서 우리는, 억지로 말씀을 풀어 기술(記述)의 오류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술(口述)의 말씀을 늘 들어야 합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에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구술(口述)과 기술(記述), 그 의미와 관계를 잘 새기시면서…
성자하나님 손 꼭 붙들고, 성령하나님 가슴에 꼭 모시고, 성부하나님 찾아 가시는 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 찬송가 203장 (하나님의 말씀은)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1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헌금 기도합니다.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455장(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