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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기원전 57년 ~ 935년(992년) 기원전 57년- 기원 후 500년까지는 중국의 서 신라 시대.
기원 후 500년 지증왕부터 - 935년 경순왕까지는 한반도
수도: 서 신라 금성(김씨의 성, 지금의 상해 인근))
동 신라(경주)
공용어: 신라어
정부 형태: 군주제
초대 군주: 박혁거세
최후 군주: 경순왕
신라 역대왕
1대 혁거세(赫居世) (B.C.57) : 성씨 박(朴), 이름 혁거세 또는 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세간)
홍수 이후 기원전 만 4천 년 경부터 바이칼 일대의 삼 조선(삼한)인 막조선(莫朝鮮), 진조선(眞朝鮮), 번조선(繁朝鮮) 중 고비 사막 타림분지 신강성 청해성 운남성을 통해 따뜻한 곳으로 남하한 진 조선의 제사장 집단의 대표
벼농사를 시작한 시대부터 벼(木)를 위해 점을 치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 박(朴)을 성씨로 한데 기인
2대 남해(南解, A.D.5) : 박, 차차웅
3대 유리(儒理, A.D.24) : 박, 이사금
4대 탈해(脫解, A.D.57) : 석, 이사금, 토해(吐解). 최초의 페르아(또는 인도 계: 속칭 물길족=말갈족)계 왕으로 보임
5대 파사(婆娑, A.D.80) : 박,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대 지마(祇摩, A.D.112) : 박, 이사금, 기미(祇味).
7대 일성(逸聖 ?- A.D.134) : 박, 이사금, 유리의 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8대 아달라(阿達羅, ?-A.D.154) : 박, 이사금.
쫓겨 일부는 한반도(가야)또는 일본으로 가고 아달랴 왕은 산맥을 따라 온 곳으로 되돌아 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고대 삼한 인)의 두목 앗틸라의 상징이 된 것으로 판단
* 아달랴왕과 앗틸라와의 연관성 판단의 근거
1) 아달랴라는 이름과 앗틸라라는 이름이 유사하다
2) 신라인이 훈(원래는 한)족으로 중국에서 흉노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
3) 신라 아달랴 왕(AD 154)의 후대에 아틸라라는 이름의 훈족의 마지막 왕이 기록에 나타난 점
4) 신라인들이 한반도에 가서도 화랑도를 만든 것처럼 수천-수만 년 간 산에서 살아온 진한 인들에게 양자강이나 히말라야 산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 아달랴 왕도 마찬가지 경우다. 내륙에서는 수나라의 위협이 해안으로는 페르시아의 위협이 있는 해양국가의 왕조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9대 벌휴(伐休, A.D.184) : 석,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대 내해(奈解, A.D.196) : 석, 이사금, 벌휴(伐休)의 손자.
11대 조분(助賁, A.D.230) : 석,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대 첨해(沾解, A.D.247) : 석,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대 미추(味鄒, A.D.262) : 김,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이 때부터 북방 찰기 기마 무사들이 신라의 권력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 단군 조선의 김씨들이 삼한인(샤먼 민족)들의 거주지역인 중국 황해 해안을 통해 남하하여(한 나라 또는 낙랑을 거쳐) 신라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
14대 유례(儒巤, A.D.283) : 석,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대 기림(基臨, A.D.298) : 석, 이사금, 기립(基立). 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 걸숙(乞淑)
16대 흘해(訖解, A.D.310) : 석, 이사금, 내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于老).
* 물길족과 김씨 왕들이 혼재
17대 내물(奈勿, A.D.356) : 김,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이 Ei부터 북쪽 마한 출신 김씨들의 왕권이 확립되었다.
18대 실성(實聖, A.D.402) : 김,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 대서지 이찬.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는 고구려에, 셋째 아들 미사흔은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19대 눌지(訥祗, A.D.417) : 김, 마립간, 내물왕의 장자.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20대 자비(A.D.458) : 김, 마립간
21대 소지(炤知, A.D.479) : 김, 마립간, 비처(毗處).
22대 지증(智獞, A.D.500) : 김, 마립간, 휘(諱)는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拱)의 아들.
* 백제가 망한 다음해(AD501년)에 왕실을 한반도로 옮김.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사 기록에 의하면 21대 문자왕(419년~519년) 때 494년 물길 족들에게 멸망한 남부여(신라)의 왕(22대 지증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같은 시기에 페르시아 인 들로 같은 시대에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와의 전쟁이 있었고 인도는 굽타 왕조(AD 320-550) 시대이다.
23대 법흥(法興, A.D.514) : 김, 왕, 휘(諱)는 원종(原宗). 연호는 건원(建元)
24대 진흥(眞興, A.D.540) : 김, 왕, 휘(諱)는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연호는 개국(開國)
25대 진지(眞智, A.D.576) : 김, 왕, 휘(諱)는 사륜(舍輪). 진흥의 2자.
26대 진평(眞平, A.D.579) : 김, 왕, 휘(諱)는 백정(白淨). 진흥의 태자 동륜의 아들. 연호는 건복(建福)
27대 선덕(善德)여왕(A.D.632) : 김, 왕, 휘(諱)는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연호는 인평(仁平)
28대 진덕(眞德)여왕(A.D.647) : 김, 왕, 휘(諱)는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연호는 태화(太和)
29대 태종무열(武烈, A.D.654) : 김, 왕, 휘(諱)는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
* 태종무열왕
본명 김춘추(金春秋) 재위 654년 ~ 661년
별명 태종공(太宗公), 태종 춘추공(太宗春秋公), 춘추지(春秋智)
출생일 진평왕(眞平王) 25년(604년) 사망일 661년 음력 6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 ~ 661년)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은 김(金), 휘는 춘추(春秋)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김용춘(金龍春)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 선덕(善德) · 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자임하였다. 진덕여왕 사후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대륙 백제와 한반도 백제 반군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서의 대륙에서 피난 온지 160년 만에 새로운 신라의 기틀을 다졌다. 신라의 역사에서 최초로 묘호(廟號)를 받은 왕으로서, 한국의 역사에서 조종(祖宗) 법 묘호를 받은 첫 군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본명 김법민(金法敏) 재위 661년 7월 ~ 681년 7월 21일 종교 불교 왕후 자의왕후 부왕 태종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 )은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 누이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고구려 땅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한반도와 고구려 땅인 중국 북부를 통일한 왕이다. 대신 옛 고조선의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를 당나라에 내어 주었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31대 신문(神文, A.D.681) : 김, 왕, 휘(諱)는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대 효소(孝昭, A.D.692) : 김, 왕, 휘(諱)는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대 성덕(聖德, A.D.702) : 김, 왕, 휘(諱)는 흥광(興光). 신문의 둘째 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대 효성(孝成, A.D.737) : 김, 왕, 휘(諱)는 승경(承慶). 성덕의 둘째 아들.
35대 경덕(景德, A.D.742) : 김, 왕, 휘(諱)는 헌영(憲英). 효성의 이복 동생.
36대 혜공(惠恭, A.D.765) : 김, 왕, 휘(諱)는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대 선덕(善德, A.D.780) : 김, 왕, 휘(諱)는 양상(良相). 내물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사찬효방(孝芳).
38대 원성(元聖, A.D.785) : 김, 왕, 휘(諱)는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대 소성(昭聖, A.D.799) : 김, 왕, 휘(諱)는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대 애장(哀莊, A.D.800) : 김, 왕, 휘(諱)는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대 헌덕(憲德, A.D.809) : 김, 왕, 휘(諱)는 언승(彦昇). 소성의 동복아우.
42대 흥덕(興德, A.D.826) : 김, 왕, 휘(諱)는 수종(秀宗). 헌덕의 동복 아우.
43대 희강(僖康, A.D.836) : 김, 왕, 휘(諱)는 제륭(悌隆). 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대 민애(閔哀, A.D.838) : 김, 왕, 휘(諱)는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45대 신무(神武, A.D.839) : 김, 왕, 휘(諱)는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 상대등 균정(均貞)의아들.
46대 문성(文聖, A.D.839) : 김, 왕, 휘(諱)는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대 헌안(憲安, A.D.857) : 김, 왕, 휘(諱)는 의정(誼靖). 신무의 이복 아우.
48대 경문(景文, A.D.861) : 김, 왕, 휘(諱)는 응렴(膺廉). 희강의 아들 아찬 계명(啓明)의 아들.
49대 헌강(憲康, A.D.875) : 김, 왕, 휘(諱)는 정(晸). 경문의 태자.
50대 정강(定康, A.D.886) : 김, 왕, 휘(諱)는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대 진성(眞聖, A.D.887) : 김, 왕, 휘(諱)는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대 효공(孝恭, A.D.897) : 김, 왕, 휘(諱)는 요(嶢). 헌강의 서자
53대 신덕(神德, A.D.912) : 박, 왕, 휘(諱)는 경휘(景暉).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
54대 경명(景明, A.D.917) : 박, 왕, 휘(諱)는 승영(昇英). 신덕의 태자.
55대 경애(景哀, A.D.924) : 박, 왕, 휘(諱)는 위응(魏膺). 경명의 동복아우. 견훤에게 죽음
56대 경순(敬順, A.D.927) : 김, 왕, 휘(諱)는 부(傅). 문성의 후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왕건에게 신라의 토지 문서를 갖다 바치고 귀순
신라의 연혁
- 건국: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는 대륙에서는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는 약 500년 동안, 한반도의 동남부 일대에서는 약 천년 동안, 소위 삼국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와 만주, 중국 북부지역을 약 500년 동안 지배하였던 국가이다. 국호인 ‘신라(新羅)’는 '신이 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 신라는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 계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되었으며, 박(朴), 석(昔), 김(金)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된 것으로 미루어 건국 토기의 권력 구조를 짐작하게 한다.
우선 박(朴)씨는 성 자체가 점치는 사람임으로 진한의 제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박씨 제사장을 중심으로 홍수 이후 삼한의 백성들이 과거 4천 년 전에 이룩했던 진한의 장강 문명의 전통을 이어 받으려고 한 것으로 보이고 상해에서 40킬로 떨어진 곳 우물의 알에서 박씨가 나왔다는 전설로 미루어 보아도 상해 이남이 건국 지역임이 틀림없다.
석(昔)씨는 페르시아 상인들로 동서양 무역로를 따라 이동해 온 사람들로 보인다. 이들이 왕이 된 시기가 박씨 신라가 장강 내륙의 기반을 상실하고 상하이 인근 해안에서 번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신라 유물에서 로마의 것이 발견되었다.
김(金)씨의 경우 기록에는 4대 탈해(脫解, A.D.57) 때 광서성 자치구의 계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상자에서 찾아내었다고 하나 현재 밝혀진 바로는 후한 때 흉노에서 귀화한 김일재의 후손이라는 설과 단군 조선의 낙랑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을 때 황해 연안을 따라 남하한 철기를 사용하는 무사 집단이라는 설이 있는데 필자의 생각은 후자를 포함하여 중국 황해 샤먼지역을 따라 순차적으로 남하한 철기 사용 집단의 대표로 보인다. 그래서 성씨를 황금이라는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쇠(金)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무사가 많다. 이들 진한 출신 김씨의 세력은 13대 미추(味鄒, A.D.262)을 끝으로 약화되고 이방인인 석씨들이 신라(원래 진한 후에 진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자 북방 철기 무사집단인 김씨들이 군사적으로 신라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300년 간 계속된 초기 신라 권력쟁탈 전은 결국 조선 계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그 후 신라는 200년 간 안정되었으나 중국에 동족인 선비족의 북위가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남하하고 북쪽 백제가 망하자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 한 반도로 이동
중국에서 춘추 전국 시대가 끝나고 진, 한을 거쳐 농경 화 하 족의 대표격인 북위가 건국되자 중원의 대세가 북방민족 중심의 농경민족에게 넘어갔음을 깨닫고 북경 인근을 점령하고 있던 샤먼국가인 백제(중부여)가 먼저 영토를 포기했는데 그 시작이 제 24대 동성왕이 AD 500년에 7명의 태수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것이었다. 그러자 신라(남부여)의 22대 지증왕도 채 1년도 안 된 AD 501년에 대륙 신라를 포기하고 당시 고구려 땅(원래 마한 땅)이었던 한반도 경주지역으로 피난을 하면서 대륙 신라의 한반도 이동이 시작되었다.
지증왕은 한반도 이동과 동시 우두머리의 명칭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는 등 모든 국가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그 후 23대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24대 진흥왕 대에 이르러 첫 번째 전성기를 맞아 7세기경 한반도 내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隨)와 그 뒤의 당(唐)과 동맹(나 · 당 연합)을 맺은 신라는 660년에 대륙 백제의 잔존 세력을,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한반도 이전 후 180년 만에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한반도와 만주를 동시에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를 나당 전쟁을 통해 몰아내고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고구려멸망 약 30여 년 뒤 698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 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 · 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립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892년 견훤이 대륙에서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만주에서 태봉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진한, 진 조선)가 대륙에서 한반도로 영토를 옮긴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신라는 원래 삼한 중 진한으로 홍수 이전의 12연방이 동방에서 축소된 이름이었다. 즉, 만리장성 북쪽 지역을 모한 또는 마한, 막한(막조선, 후에 고구려가 일어남)이라고 부르고 황하에서 양자강 지역(동쪽은 황해 서쪽은 청해까지) 지역을 번한(백제)이라고 불렀으며 양자강 남쪽을 진한(신라)으로 나누었는데 이 때 치리는 제사권의 경우 소도에서 단군이 관리를 하고 관경은 따로 화백을 두어 관리하도록 했다.(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 35p)
2. 당시 신라는 소도는 양자간 중류 동정호 인근 충칭에 있었고 관경 관리는 양자강 하류나 해안에 있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가 기원 후 2세기까지 신라의 일식과 월식 등 신라의 지상 천문 관측 지점이 충칭 인 점이 이를 증거 한다.
3. 당시 중국은 진시왕의 진나라가 망하고 춘추 전국시대 중 군웅할거가 가장 심했던 오호 16국시대로 농경민족의 관심이 황하에서 양자강 쪽으로 점점 내려오고 있었던 관계로 한인 시대부터 삼한의 소도와 관경 전통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대 제사장 나라 진한(眞韓)의 입장에서는 영토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같은 한웅의 땅인 마한에 진한이 피난한 것이었다.
4. 그래서 신라는 한반도에 와서도 소도 관경의 전통인 소도, 천신제사, 화랑도, 화백제도, 원화, 단오등 한인시대, 한웅 시대를 거쳐 내려온 민족의 전통을 비롯하여 민족의 혈통을 굳게 지키게 되었다.
- 신라의 만주와 한반도 통일 과정
현재까지 역사 기록에 의해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한반도 내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했다고 알고 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사실은 다르다. 당시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백제는 산동 반도에서 기원 후500년 24대 동성왕 때 이미 일차적으로 망했다가 그 아들 무왕(무령왕 일명 사마왕)이 한반도에 와서 죽었는데 무왕의 아들 26대 성왕 때 다시 산동 반도 사비성을 탈환하여 백성의 주력은 산동성에 거주하고 한 반도에는 무왕을 따라왔던 유민들 일부가 남은 상태였다. 신라는 서 신라(기원 후 501년 22대 지증왕이 한반도로 피난 온 후 남은 유민들의 나라)와 동 신라(지증왕 이후의 반도 신라)로 나뉘어져 있었고 원래 이들 고구려와 신라, 백제는 고조선의 마한, 진한, 번한의 삼한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였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1993년 삼국유사등 사기에 기록된 일식과 월식 등 각종 천문현상의 지상 관측 지점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역 추적 한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측지점이 전술한 바와 같이 모두 대륙이었다.
이를 근거로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초기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삼한으로 분리되었을 때는 황하 북쪽의 경우 마한, 즉 고구려이고 황하에서 양자강 사이는 번한으로 백제였고 양자강 이남은 진한으로 신라가 위치해 있었다.
그 후 화하족의 농경 문명이 번성하여 단군 조선의 관경이 영토로 변경되고(기원전 5세기) 후기 고조선 시대에는 통치 지역이 전체 대륙에서 중국의 동해안과 한반도를 포함하는 황해 연안으로 좁아졌고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영토도 북쪽부터 황하(만리장성) 이북(고구려), 황하에서 양자강 북쪽(백제), 양자강이남(신라)으로 각각 축소되었다.
여기서 보면 삼한 시대의 관경 지역은 넓고 삼조선 시대의 영토지역은 좁은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에 관경 이었다가 농경군주의 영토에서 농사를 짓게 된 농민의 경우와 같다. 현대적으로 설명한다면 회교도가 미국에 사는 경우와 같은 것이고 분쟁의 화근이 된다. 삼조선이 인접해 있는 중국의 경우라면 당연히 분쟁을 고토 회복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건국 이후 한나라, 연나라, 북위, 수, 당 나라, 백제와 분쟁이 계속되었고 백제도 서쪽으로는 당나라와 남쪽으로는 신라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나라와 고구려 간 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불붙기 시작한 삼조선과 중국과의 전쟁은 고구려와 백제는 고토 회복전쟁이었지만 신라로서는 단군이 물려준 만주를 비롯하여, 산동, 하북 등 중국 내 모든 조선 땅을 양보하고 반도내의 백제 유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 반도 남쪽 땅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그 동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박창범 교수의 삼국의 천문관측 지점 분석 결과를 비롯하여 삼천 궁녀의 낙화암 자살, 의자왕의 아들 풍까지 북경 인접 북망산에 묻힌 점, 근초고왕과 개로왕의 북경 인근에서의 수많은 전투들, 의자왕의 사비성 전투, 황산벌 전투, 나아가 백제 31대 왕 중 무령왕 이외의 모든 왕릉이 중국에 있는 점 등 모든 백제의 주요 역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 신라의 한반도 선점 전쟁
1). 지증왕 때 신라 정부를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동
박용숙교수의 샤먼제국에서 보듯이 5세기 즈음에 한반도에 신성한 제기나 의례기구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주장과 함께 이 때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많은 고인돌 등 샤먼의 유적들이 한반도 남쪽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이는 4,5세기경에 어떤 종교세력이 한반도로 밀려 왔다는 것으로 박창범 교수의 신라의 천문 지상관측 지점이 양자강 중류 충칭에서 한반도로의 이동해 왔다는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의 천문 관측지 이동 결과와 일치되어 신라의 한반도 이동이 증명된다. 그 종교의 실체는 소위 샤머니즘(삼한주의)이다. 19세기 초에 서구 학자들이 샤머니즘이 미개 종교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데 이 샤머니즘은 미개 종교가 아니라 앞서 설명했듯이 호모사피엔스의 기본적인 심성 곧 양심이었고 불교, 유교, 기독교, 회교의 근본이었으며 이때 한반도로 이동한 신라가 바로 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교리로 믿었던 제정일치의 사회의 원형이었다. 삼한 중 진한이 신라 지증왕의 주도로 대륙 신라를 한 반도로 옮겨 원래있던 마한과 결합함으로써 번한(중국)이 만든 농경 인본주의의 오염에서 삼한을 구한 것이다. 그 후 150년이 지나 신라의 한반도 정착이 완료되자 648년 김춘추가 당태종을 만나 나당 연합 조약을 맺고 654년 그가 왕이 된 다음 본격적인 대단 통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어 대륙의 서 신라와 대륙백제를 포기하는 대신 고구려 땅의 대부분과 한반도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던 것이다.
* 지증왕
출생-사망 : 437 ~ 514, 재위기간: 500년 ~ 514년
본명: 김지대로, 김지도로, 김지철로, 별칭: 지증마립간
본래의 칭호는 지증마립간(智獞麻立干). 성 김(金). 휘(諱) 지대로(智大路)·지도로(智度路)·지철로(智哲老). 갈문왕(葛文王) 습보(習拱)의 아들. 어머니는 눌지왕(訥祗王)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 소지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왕위에 추대되었다. 502년 순장법(殉葬法)을 폐지하고 농사를 장려, 우경법(牛耕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503년 국호를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德業日新), 사방을 망라한다(網羅四方)'는 뜻의 '신라'로 개정하였다. 또, 왕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왕이라고 칭하게 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504년 상복(喪服)제도를 제정하였고, 다음해에 주(州)·군(郡)·현(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에 군주(軍主)를 두었다. 512년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공취(攻取)하였다. 죽은 뒤에 지증(智獞)이란 시호(諡筃)를 받았는데, 이것이 신라 시법(諡法)의 시초이다. 지증왕은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여 신라가 국가 체제를 갖추도록 하였으며 법흥왕은 이러한 지증왕의 업적을 토대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증왕 [智獞王] (두산백과)
요약하면 김춘추의 한반도 확보를 위한 대 고구려, 대 신라 전쟁은 샤먼 신라의 존속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대륙의 단군 조선 땅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춘추에 의한 전쟁의 대 단원은 백제에 대해서는 황산벌 전투와 사비성 전투이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평양성 전투인데 이 전투 지역이 모두 대륙이다. 황산벌전투(660년)의 황산은 안휘성 황산으로 대륙백제와 신라의 국경이며 사비성(660년 사비성 전투)은 북경 인근으로 고구려, 백제, 당나라의 접경지역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고 중국 요녕성 요양이다
* 사비성 전투
660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 합하여 18만의 군사가 백제의 수도(북경)로 쳐들어갔다.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마강(황하) 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하남성 낙양시 맹진현) 쪽으로 쳐들어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의자왕은 대소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편과 지연작전을 써야 한다는 편이 나눠 다투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 황산벌 전투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660년 8월20일 계백은 5천 김유신의 신라군 5만 명이 중국 안휘성 황산(양자강, 상해 인근,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의 경계지역)에서 싸워 신라군이 이겼다.
평양성전투(신라)
[ 平壤城- ]
668년 9월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전투로 655년 고구려의 집정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독재정치의 후유증으로 집권층 내부에서 심각한 정권쟁탈전이 전개된다. 장남 남생은 동생인 남건과 남산의 내분이 그것이다. 이 같은 고구려 내부의 약점이 노출되자 당은 이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략케 하였고,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 또한 북진해왔다. 668년 7월 말 당의 선발대가 먼저 평양성 외곽에 도착했고, 신라군도 평양 근교의 사천벌판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평양성(지금의 지린성 지안)에 다다랐다. 나당연합군은 그 후 1달간 평양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구려 보장왕은 저항을 포기한 상태로 남산과 수령 98명 등을 보내 이적에게 항복 의사를 표했으나 남건은 이에 반대하여 평양성의 문을 굳게 닫고 항거했다. 이로써 9월 평양성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이 바라다보이는 사수(蛇水)에 집결했다.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급박해진 남건이 한 번의 결전으로 승부를 결판내기 위해 성문을 열고 고구려군을 내보냈다. 그러나 기병의 규모가 약세에 있던 고구려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신라군이 사수의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격하여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고구려군의 군영은 의외로 쉽게 무너졌고, 패잔병들이 성문 안으로 몰려들어갔고, 평양성 안에 있던 사람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9월 21일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에워쌌고 신라군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5일 동안 맹렬한 공격을 받는 가운데 고구려 저항군 수뇌부에서 변절자가 나왔다. 저항군의 최고지휘자인 남건의 심복인 승려 신성이 평양성의 성문을 열었던 것이다. 신라군 기병 500이 먼저 평양성 안으로 들어와 길을 열어놓자. 당군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는 이로써 멸망하였고, 당은 보장왕과 남건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 후 당나라는 과거 백제 땅인 산동 반도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661년에 복신·도침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 전개하였으며 663년에는 당나라가 만주에 계림대도독부 설치하여 만주까지 점령을 시도했으나 675년 신라군이 요하 인근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어 676년에 기벌포(요하 하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의 세력을 완전히 만주에서 제거, 요서 지역으로 후퇴시키고 지증왕과 김춘추의 170여 년에 걸친 진한의 한반도 이전 작업이 완성되었다.
신라의 한반도 이동 및 통일의 의미
1. 신라의 반도 통일을 두고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고구려 땅을 당나라에 내어 주고 호남지역을 평정한 반민족적인 처사라고 하고 둘째는 고 조선의 황해 연안에 있었던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 그리고 고구려까지 포기한 막중한 실패작이라고 하며 셋째는 조상들의 정신인 샤머니즘을 살리면서 조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인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고 육지에서는 목축을 하며 사는 조상들의 뜻을 살리려고 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데 필자는 세 번째 견해에 찬성한다. 그 이유는 지금도 우리는 해양에서 살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육지와도 교역을 하고 바다로도 교역을 하는 그러한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역사 왜곡 내용과 실례
- 역사 왜곡 내용
1. 신라는 한반도로 국토를 옮기면서 중국에 있던 고구려, 백제 등 고조선과 한인 및 한웅 시대의 중국 내 삼한의 역사를 모두 포기했다.
2. 백제인들이 주가 되어 선비 족들이 만든 이세민의 당나라 왕을 하느로 모시고 인간 황제를 신으로 섬겼다.
3. 피난 온 샤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초기에는 샤먼을, 후기에는 불교를 장려했다.
- 역사 왜곡 실예
두보와 함께 당나라 때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태백은 일반적으로 시선(詩仙)이라 부르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태백의 시를 좋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이태백이 고구려와 신라에 관련된 시를 남겨놓은 것은 잘 모른다. 이태백은 8세기의 당나라 때의 사람으로서 이미 멸망한 고구려나 또한 발해와 신라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태백이 남긴 ‘고구려’라는 시가 이태백 문집에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金花折風帽(금화절풍모) 절풍(折風) 모자에 금화(金花)를 꽂고 白馬小遲回(백마소지회) 백마(白馬)를 타고 머뭇거리며 돌아들고 翩翩舞廣袖(편편무광수) 넓다란 소매를 펄럭이며 춤을 추니 似鳥海東來(사조해동래) 나래를 펴고 해동(海東)에서 날아온 새 같구나! 여기에서 절풍(折風)은 고구려 사람들이 쓰던 모자이다. 위의 시를 보면 우리가 벽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구려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시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때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北史) 권94 고구려 편에는 위와 같은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쓰는데 모습은 변(弁)과 같고, 선비들은 두 가닥의 새 깃털을 모자위에 꽂는다. 귀족들이 쓰는 관(冠)을 소골(蘇骨)이라 하는데 자줏빛 비단으로 많이 꾸미며 금과 은으로 장식된 옷은 소매와 적삼이 크며 꾸밈이 없는 통이 큰 바지를 입는다. 가죽으로 된 띠를 두르고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부녀자들은 비단으로 겹쳐 만든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다.”라고 하여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상과 모자 그리고 의복에 관하여 자세하게 전하고 있으며 화려했던 고구려의 옛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경주 인근 중심 신라 강역 주장, 다시 살펴야 이태백이 썼다는 신라에 관한 시는 후대에 주해를 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어느 시기까지는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남아있지는 않다. 명(明)나라 양신(楊愼)이 찬한 『단연적록』과 『단연총록』에 이태백의 시와 신라와 관련된 것이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백이 쓴 시(詩)의 주(註)에 신라국은 해홍(海紅)이 많이 나는데 당나라 사람들이 그 것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해홍은 융왕자(월지국에서 나는 꽃의 종류)와 같은 종류이다. 또한 감귤에 관하여 기록한 『귤보(橘譜)』에 해홍이 보인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해홍은 무엇일까? 조선시대에『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은 양신의 위의 책을 인용하여 해홍에 관하여 식물부 과일 편에서는 꿀처럼 단 맛을 내는 감귤의 종류로 보았으며 또한 훼목부 꽃 편에서는 남해안 해변에 피는 동백으로 보고 있어 신라에서 많이 났다는 해홍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한 해홍을『태평광기』에서는 신라에서 온 바다 석류화라 보고 있고 『흠정속통지』에서는 중국 절강성 온주지역의 유감(乳柑)과 동정호 지역에서 나는 동정감(洞庭柑)과 함께 해홍을 해홍감(海紅柑)이라 하여 감귤의 종류라고 하는 등 해홍에 관하여 앞서와 마찬가지로 꽃과 감귤로 나뉘어져 있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 해홍에 관하여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만약 이수광의 말대로 남해안 인근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동백꽃이라면 그 꽃의 아름다움이 멀리 대륙에까지 미쳤을 것이지만, 해홍이 감귤의 일종이라면 현재 한반도 경주 인근 유역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강역과 인문지리를 다시 살펴야 할 것이다.
중국 절강. 복건성, 신라 관련 지명.유적 유난히 많아 중국에서도 감귤이 생산되는 지역이 한정되어 있음을 볼 때 해홍이 감귤이라면 『흠정속통지』의 기록처럼 지금의 절강성과 복건성 유역에서 생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절강성과 복건성 유역에는 신라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유난히 많다. 대만과 마주하고 있는 복건성에는 지금도 ‘신라’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중국 복건성 용암시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신라라는 지명>
현 중국 복건성 용암시(龍巖市) 신라구(新羅區)가 바로 그 곳이다.
용암시정부에 의하면 ‘신라’라는 이름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736년 당나라 때 신라현을 설치한 것으로 1997년 3월 용암시에 신라구를 설치되었으며, 3 개 향과 12개의 진과 12개의 가도 사무소가 있고 면적은 2,677 평방미터이고 인구는 45만 명이며 홍콩, 마카오, 대만과 해외에 거주하는 신라현 출신의 동포가 10만 명이나 되며 이곳은 아름다운 토지와 산이 푸르고 물이 수려하여 4계절이 봄 같으며, 기후는 사람이 살기 적당하다. 위 신라 현에 대한 기록으로는 『진서(晉書)』지리(地理)하편에 “진안군(晉安郡)은 진나라 태강3년(282년)에 설치하였는데 8개의 현(縣)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신라현(新羅縣)이다.”라고 되어 있어 이곳에 신라현이 설치가 된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대에 교간된 <진서>에는 천주에 있는 신라 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아 놓았는데 “신라성이 정주부의 동남에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정주(汀州)는 신라현이 표기된 곳 바로 서북에 있는 현 복건성 장정(長汀)을 말한다. 그 동남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말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신라현이 있었고 지금도 신교(新橋)와 나방(羅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 북쪽에 신라산이라고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 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의 임해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때의 기사에 “15년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비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문무왕이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이라는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30대 소성왕 2년의 기록과 46대 문성왕 때의 기록에는 “평의와 임해의 두 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절강성 및 복건성 등지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신라가 대륙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청 한림원 편찬 <만주원류고>, 만주도 신라 강역에 포함된다. 아니다. 우리는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강역이 대동강 유역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의 남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배워 왔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설로 보고 있지만 청나라 시대 건륭 42년(1777년) 한림원에서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의 강역을 현재의 만주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구당서』를 인용하여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삼고 그 왕 김법민을 계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신당서』를 인용하여 신라왕은 금성(金城)에 거처하며 금성의 둘레는 8 리이며 그 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함께 신라는 동서 천 리, 남북 3천 리였다는 내용으로 볼 때 신라의 계림은 현재(청나라 시기)의 길림 지역이라 하였다. 계림(鷄林)과 길림(吉林)은 우리 발음으로는 달리 부르지만 중국 발음으로는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으며 현 길림이라는 지명이 신라의 계림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라의 구주(九州)를 설명하는 항목에서는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오늘날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의 2개의 도를 아우르고 서북쪽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 개원 철령에 가깝다.”라고 하였으며 “개원(開元) (당나라 현종 713 ~ 741)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고 하였으며 신라의 구주(九州) 설치는 동쪽으로 길림에 이르고 서쪽으로 광녕에 이른다고 하여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길림에서 서쪽은 개원 철령까지라고 하였다.
<만주원류고 등을 중심으로 본 신라의 강역>
이러한 신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만주원류고』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가 세운 나라의 역사인 『요사(遼史)』나 신라의 후손인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金)나라의 강역을 설명하는『금사(金史)』나 중국의 사서 어디를 보아도 통일신라의 강역이 현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른다고 한 사서는 단 하나도 없다. 신라의 영토였다는 현 부산에서 대동강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천 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역사 강역에 대한 설정의 오류는 비단 통일신라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와 그리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해상 왕국을 지향한 신라
신라에 대한 의문이 몇 가지가 있다. 신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배치된 가장 중심이 되는 소도 관경인 진한(진짜 하늘 나라 제사장)인데 한인 시대인지 한울 시대인지 모르나 왜 진한을 중원대륙의 맨 남쪽에 배치했을까? 에 대한 의문을 가져 본다 그 이남을 우리는 왜(倭)라고 불렀다. 그 답은 진한 지역은 해상으로 나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두 번 째 의문은 왜 단군이 중국 내륙의 진한 관경(양자강 유역 전 지역)을 버리고 황해 연안을 통치 지역으로 선정했을까? 그 해답도 역시 바다에 있다. 육지의 강 유역이 홍수로 위험한 속세 지역이라면 바다는 풍랑이 있지만 예측만 잘 하면 예고 없는 재난을 치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의 터전이라고 본 것 같다. 나아가 부족한 물자를 해상 무역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 번째 의문은 황해 연안 단군 조선을 버릴 때 신라 지증왕은 왜 한반도를 새 터전으로 택했을까? 그 해답은 첫째 첩첩이 산맥과 강으로 막혀 북쪽에서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고 사방이 바다여서 안전하고 둘째는 집단 농경 보다 어업과 무역이 민족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그랬을 것이다. 역시 바다가 해답이었다. 한민족의 오래된 바다로의 진출 염원은 그 후에 여러 번 나타나는 미스터리한 동서 해상교류의 흔적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1. 그래서 김수로와 석탈해는 초기 신라 왕조의 구성원인데 김수로와 허황옥의 가야의 존재는 신라시대 훨씬 이전부터 인도, 동남아, 중국 동해안, 한반도, 일본에 이르는 철기 문명을 가진 해상세력이 존재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해상 루트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페르시아(수메르)까지 포함되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까지 닿을 수 있었으리라 본다.
2. 그래서 신라 황남 대총에서 1940년에 발굴된 금관이 로마에서 만든 것임이 증명된다.
3. 그래서 한인과 한웅시대 부터 민족의 염원이었던 해상 진출을 반대하는 내륙집단 농경 주의자들의 방해가 계속되었는데 제일 큰 것이 상하이를 통해 최고의 해상 비단길을 완성시킨 왕건의 고려사를 말살시킨 이성계와 이방원 이도(세종) 등 이씨 왕조이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그 마지막 발악이었다.
4. 장보고는 중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해상을 개척하려 했던 위인인데 당시 친 선비 족 주의자들인 신라 왕권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신라 국민들은 이세민을 천자라고 불렀다(정수일 저 신라와 서역 교류사 참조)
5, 거북선은 신라의 오래된 귀면 선박에서 유래되었고 조상들의 혼이 깃든 무기이며 현재 우리 라 조선 공업의 기반도 이 조상들의 염원에서 형성된 것이다.
6. 게르만족의 대 이동의 단초가 된 훈족의 유럽 진출 시 지도자인 앗틸라를 두고 신라의 제 8대왕 아달야(서 신라시대 왕 상하이 인근 금성에 주둔)이라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앗틸라의 서진은 신라의 체계적이고 강력한 해상 지원의 힘을 입었으리라 판단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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