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와 재콩나물 / 정선례
가을 햇살에 잘 여문 알곡을 추수하는 날이다. 들밥을 내가야 한다. 간편하고 맛있는 메뉴가 뭘까 콤바인 날을 받아놓고 생각하다 꼬막 비빔밥을 하기로 했다. 비빔밥은 궁중에서나 일반 가정이나 즐겨 먹었던 우리의 전통음식이다. 밥맛이 없을 때 물김치에 대충 비벼 먹는것부터 시작해 산채 비빔밥, 전주 비빔밥이 유명하다. 비빔밥은 잘 버무려도 못 비벼도 자연의 건강식으로 맛있다.
장날에 꼬막을 사 와 살짝 벌어지게 삶았다. 씨알이 통실통실하다. 해산물을 좋아해서 자주 사온다. 산에서 직접 채취한 취나물, 표고버섯, 노란색, 빨간색, 파프리카와 당근, 호박 채를 썰어 넣고 한우 고기도 볶아 준비했다. 밥은 흰밥에 고슬하게 지어야 한다. 달걀도 넉넉히 부쳐 차에 실었다. 참기름도 물병에 덜어 챙기고 대파 듬뿍 넣은 시래기 된장국도 식지 않게 보온병에 담았다. 앗! 약방에 감초가 빠졌다. 비빔밥에 콩나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앙꼬없는 찐빵이 되고 만다.
멀건 줄기에 노란 머리를 달고 키가 길쭉 자라는 콩나물을 어릴 적에 자주 먹었다. 또 그런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즐겨 먹는다. 솜씨 정갈한 어머니는 가을이면 갓 수확한 콩나물 콩을 한 가마 따로 대청 마루에 보관해 두셨다. 그리고 겨우내 쟁반에 흩뜨려 돌과 벌레 먹고 덜 여문 콩을 골라내는 선별 작업을 해서 햇콩이 나올 때까지 시루에 안쳐 콩나물을 기르셨다. 수북히 자란 콩나물을 뽑아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싸주셨다.
콩나물 기르는 데는 몇 가지 점검이 따른다. 우선 국산 햇콩을 써야 한다. 묵은 콩을 사용하면 발아율이 떨어진다. 백태보다는 콩나물 콩을 써야 한다. 콩나물 기르는 데 필요한 도구는 시루, 나무받침대, 흐르는 물을 받쳐줄 그릇, 햇볕을 차단해 주는 검은색 면보와 깨끗한 볏짚이 필요하다.
우리 집 안방 윗목에는 콩나물 시루가 함초롬히 항상 자리잡고 있어 이른 아침 잠결에 콩나물시루에서 또르르 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어머니께서 새벽 단잠을 물리치고 맨 먼저 일어나 차고 깨끗한 물을 시루 위에서 손등을 흔들면서 골고루 뿌리셨다. 물줄기가 좌르르 콩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집에서 키우는 품종은 콩나물 콩으로 꼬부리다.
콩나물은 어둡고 습해야 잘 자란다. 식물이기에 햇빛을 보면 광합성작용을 하여 초록색으로 바뀐다. 추석이나 설 또는 잔치를 일주일 쯤 앞두고 어머니는 콩을 하룻밤 담가 물에 뜨는 콩과 상한 콩을 건져 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옆의 다른 건강한 콩도 썩어버린다. 뿌리가 나지 않은 콩도 습기 때문에 상한다. 콩나물은 계절에 상관없이 키울 수 있지만 여름철에는 온도와 습도가 높아 속에서 열이 나고 물받이에서 거품이 생겨 비릿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더울때는 서늘하고 빛이 들지 않아 통풍이 잘되는 자리에 시루를 둔다.
남부 지방에서 많이 기르는 재콩나물 기르는 방법을 소개하려 한다. 먼저 똘똘한 콩을 물에 잠기도록 한나절 불려놓는다. 아궁이가 아닌 마당에서 볏짚을 태워 새까매진 재를 만든다. 그 이유는 볏짚을 태운 재가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항아리에 담기 위해서다.
콩이 시루 구멍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바닥에 모기장이나 면보를 깐다. 그 위에 시커먼 재를 가만히 얹고 불린 콩을 한 줄 뿌려준다. 다시 재를 한 겹 얹고 콩 뿌리기를 세 번 정도 반복한다. 키가 시루 절반 정도 올라오게 안친다. 맨 위에도 재를 뿌려주는데 물을 줄 때 한쪽으로 콩이 쏠리지 않고 물이 골고루 스며들도록 주의한다. 지푸라기를 삼등분으로 잘라 지그재그로 얹는다. 이때 호스로 물을 듬뿍 주고 빛이 들지 않도록 검은색 면보자기를 덮는다. 이 방법은 전통 방식으로 널리 이용된다. 특히 수분 유지가 되어 콩이 겉마르지 않고, 살균작용이 되어 뿌리가 잘 썩지 않는다. 무공해 유기농 재배인 것이다.
물이 콩을 적시고 밑으로 빠져나간다. 계절에 따라 기온에 따라 물 주는 횟수가 달라지는데 보통 세 번 준다. 시루 위에 손바닥을 쫙 펴고 손을 흔들면서 손등에 뿌려야 시루 가운데 후끈한 열기가 빠져나가 썩지 않는다. 물을 흠뻑 자주 줄수록 잔뿌리가 생기지 않는다. 1일 차가 되면 하얀 뿌리가 옆구리에서 삐죽 보인다. 3일 차에는 개구리 뒷다리처럼 뿌리가 쑥 나와 콩나물의 형태가 되어 조금씩 자라는 것이 보인다. 그러다 어느 사이 쑥쑥 자란다. 4일 차에는 뿌리는 가지런히 아래로 내려가고 머리는 일제히 위를 항해 있다. 5일 차에는 한 가운데를 쑤욱 뽑아 된장국을 끓인다. 일부 뽑아내면 통풍이 되어 더욱 무럭무럭 자란다. 국거리용은 덜 자라야 부드럽다. 6일째쯤 아침에 보면 시루가 가득 찬다. 일제히 솟아 올라온 콩나물이 검은색 면보를 받들고 있다. 그저 물만 줬을 뿐인데 작은 콩알이 싹이 터서 이렇게 자라는가 싶어 신기하다. 이쯤 되면 아낌없이 뽑아 쓴다. 시중에 나와 있는 통통한 콩나물과 달리 집에서 기른 것은 물로만 키운 탓인지 가늘고 질기다.
재콩나물은 여러 번 씻어도 새까만 잿물이 나오고 콩나물 색깔이 가뭇하다. 하지만 시중에 파는 콩나물보다 고소하고 영양도 풍부해서 맛이 좋다. 값도 싸고 아삭 씹히는 맛이 은근히 입의 만족도를 높인다. 거의 매일 대파 듬뿍 넣어 국을 끓이고 무침이나 찜을 해서 상에 올린다. 섬유질이 풍부해서 변비 예방에 도움이 되고 뿌리에는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해 숙취 해소에 좋다. 알긴산 성분은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재콩나물은 칼로리가 낮아 체중 관리에도도움이 된다. 칼륨, 마그네슘, 미네랄은 심장과 뼈를 튼튼하게 해주는 성분이 있다. 콩나물 삶을 때는 굵은 소금을 슴슴하게 뿌려야 제 맛이 난다.
콩나물은 광선을 쬐지도 않고 발아시키는 나물인데도 담백하면서 비타민까지 제법 많이 함유하고 있는 식품이다. 눈으로 보기에 단순소박한 나물이라 하여 어찌 그 가치를 낮게 평할 수 있을까?
콩나물찜, 콩나물 비빔밥, 콩나물국, 김치콩나물국, 맑은 콩나물국 등 종류마다 사랑 받기에 족할 미덕을 갖추고 있는 나물이 틀림없다.
콩나물 시루는 하늘나라 요정들이 농부의 가난을 돕기 위해 내려준 선물이란 말이 있다. 투박한 인상을 주지만 시루는 여러 미덕을 갖춘 콩나물을 소중하고 알뜰히 가꾸어 밥상 위에 고유한 맛을 차려놓도록 역할을 다한다. 나 또한 농촌의 아녀자로서 비록 소박한 삶이지만 주변에 상큼한 맛을 선사하는 콩나물 시루다. 내 안에 세상에 나아가 늘 영양가를 제공하는 콩나물 같은 마음이 쑥쑥 자라도록 긍정과 열정의 시루로 남고 싶다.
첫댓글 저희 할머니도 재콩나물 늘 하셨어요. 정말 어른들은 부지런하세요. 정선례 선생님도 큰농사 지으시면서 글도 잘 쓰시고 살림까지 대단하세요.
어렸을 적 어머니가 키우던 콩나물 시루가 떠오르네요. 직접 키워 먹으니 더 아삭했던 것 같아요. 이제 추억의 한 장면이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맞아요. 겨울 동안은 콩나물 시루가 방 한구석 딱 차지하고 있었어요. 국 끓여서 차게 놓고 먹으면 진짜 맛있었는데. 지금은 그 맛 안 나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이쁜 단어들을 골라서 곳곳에 잘 사용하시는지 감탄합니다.
우리도 직접 재배한 콩으로 자주 길러 먹어요. 가게에서 사 먹는 것과는 맛이 다르죠.
어릴 때 방 한 귀퉁이에서 콩나물 키우던 기억이 납니다.
재콩나물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어서 낯섭니다.
콩나물 요리, 저도 좋아합니다.
어떻게 이리 세세히 기억할 수 있는지 놀랍니다.
명절이 다가오기 전 준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볏짚을 태운 재가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항아리에 담았지요.
재콩나물 처음 들어봅니다. 신기하네요. 선생님 글 읽으니 먹어보고 싶네요.
어머니표 콩나물 시루,
명절을 앞두고 안방 한 구석을 차지했었지요.
재콩나물은 처음 들어봐 낯설지만 정감이 갑니다.
소박한 삶이지만 주변에 상큼한 맛을 선사하는 콩나물 시루란 표현에서 선생님의 진면옥을 보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