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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해방의 본성 /롬8:1-9/ 곽선희 목사
2014-11-23 10:05:18
캐나다에 빅토리아 대학의 교수로 있는 K. R. Bradley 교수님께서 Slaves and Masters in Roman Empire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저술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년간 로마의 문화를 깊이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의 문화라는 것은 곧 노예와 주인의 문화다. 그 관계에 있다' 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로마를 방문하면 2000년 전에 있었던 굉장한 문화 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원형극장을 비롯해서 그 많은, 엄청난 그 장엄한 유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합니다만은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건 전부 노예가 만든 것입니다.
노예가 설계하고 노예가 지었고요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많은 노예가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그 노예들의 핏자국을 보는 겁니다. '인류가 무엇을 건설했다'고 볼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하는 그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올시다.
그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fides 와 obsequium,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충성과 복종' 오직 '충성과 복종'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습니다. 저들은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철학자들의 글 속에도 나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나귀는 내 말을 못 알아 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 이렇게까지 말했어요. 우리는 보기가 민망해서 혹은 그림이라던가 영화로 나올 때 보면 간단하게 옷을 그 치부를 가리운 옷을 입혀서 나옵니다만은 원래 노예는 옷이 없었어요.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그렇게 해서 일을 시키고 그리고 집이라고는 그저 움막 같은데 외양간처럼 만들어 놓고 지푸라기를 넣어 줬어요. 거기서 그대로 자야 했고요. 노예가 서로 말을 하면 거기서 또 문제가 생기니까요 일체 말을 못하게 했어요.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하게. 그래서 말을 아예 못 배워 버려서 그냥 "웅웅웅" 이렇게 했던거죠, 동물처럼. 말도 언어까지도 빼앗아 버렸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 이것만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같은 로마의 운명을 이루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안듣던가 하게 되면 뭐 체형을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이거나 팔아먹던가 정 고약한 노예라고 하면은 일벌백계로 길거리에다 세워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요.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그의 지식도, 그의 건강도, 그의 정조도, 그의 도덕성도 다 주인의 것이요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이것이 노예입니다. 생각하면 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노예생활 속에도 "노예 해방"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어요. 이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루어진 수단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주 당근과 같은 거예요. 고분고분하게, 온유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면 주인이 자비를 베풀어요. 그 어느 순간에 좋은 주인을 만나면 노예에게 자유를 줍니다.
더구나 세상 떠나기 전에 자기를 위해서 한평생을 수고한 가장 충성된 노예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주면서 자유하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다" 이러한 노예 해방의 특권을 얻기 위하여 생각이 있는 노예들은 더욱더 충성을 다했다는 거죠. 한평생 충성을 다했어요.
자유의 길을 바라보고. 언젠가 자유의 특권이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충성을 했다. '그 충성이 오늘의 로마의 문명을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것 같아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길들여진 노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문화화 된 노예. 이제 해방이 되었지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은 그는 절대로 자립할 수가 없었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만 해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래서 모처럼 자유를 얻었다가도 자립할 수 없어요.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없어서 다시 옛주인에게 가서 "나를 노예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다시 노예 생활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 얼마나 비참한 얘기입니까? 또는 밖에 나와서 성공한 노예가 있었어요.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힘써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수고해서 부자도 되고, 지위도 얻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아는 유명한 예술가들 가운데도 노예 출신이 있고요 심지어는 노예 출신 가운데 왕도 있어요. 자,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노예 생활에서 노예화된 노예의식 때문에 욕망과 무질서와 폭력과 나태, 방탕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타락의 노예가 되요. 네로 황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결국은 노예에서 황제까지 올라갔지만은 그 마음속에는 여전히 노예 근성이 있더라고요.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자기도 말할 수 없이 괴롭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죠.
오늘 본문에 보면은 인간의 노예상태를 간단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다' 하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혹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자유하고 싶지만은 가난하다 보니 이 소중한 자유를 반납해 버리고 얻어먹을 수밖에 없잖아요. 무식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한 자에게 매여 살 수 밖에 없잖아요. 더 중요한 것은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말씀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 이라고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그 마음을 다스릴 때, 그는 저주 의식에 매입니다. 가책 의식에 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노예상태에 살아갑니다. 어느 사이에 거듭거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말이에요. 그런 상황 속에서 끌려가게 된다는 말씀이죠.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네가지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투기적 자유입니다.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미래를 향해서 자기 몸을 던져버릴 수 있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던지는 그런 자유, 통쾌한 자유지요. 그러나 여러분,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이 어디 있습니까?
또 하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넓은 선택의 영역을 지니고 살아갑니까? 흔히 말하는 영어의 "I have no choice"라는 말이 있어요. 선택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 순간 노예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선택의 여유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재적으로. 간혹 그런 분들이 있더만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요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이 사람하고 안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만부득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선택이 없습니다. 이거 뭐 팔자거니 하고 삽니다.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소, 그게 바로 자유인입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현재적으로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미 선택한 데 대해서 나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사는 데까지 살자.'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계속적으로 넓은 중에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번째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됩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책임을 지는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선택을 어정쩡하게 해놓고 책임을 안지겠답니다. 책임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내 책임을 내가 넉넉하게, 그것도 기쁨으로 져야합니다.
그 사람이 자유인이요. 뿐만 아니라 연대성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내가 자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줘야 됩니다. 그런 자유여야 참 자유죠. "나는 자유다" 하고 휘젓고 다니는데 많은 사람에게 억압을 주고 불행함을 주고 불편함을 준다면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명예욕과 지위욕과 물욕을 극복할 수 있으면 달인이 된다" 하는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새도 보면 그 별것도 아닌 명예욕의 노예가 되가지고 어느 사이에 저렇게 비참해지는 것을 보고요. 지위욕, 그거 대단합니다.
좌우간 국회의원에 한번 출마했던 사람은 죽기 전에는 그 욕심을 못 버린대요. 아편보다 더 하다고 그러대요.
그 지위에 대한 정치적인 욕망, 여기에 노예가 되어가지고 처절해지고 제 명에 못 가는 사람 많죠. 어찌 생각하면 그것도 큰 병입니다, 이게. 물욕, 욕심이 그렇게 많아요. 이게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 네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여자와 술과 마약과 도박. 그 중에 제일은 도박이니라. 여러분 무슨 말인 줄 알겠습니까? 잘 모르시죠? 도박이라는 거, 생각하면 그 얼마든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안하면 그만 아니요. 그런데 아니치 못하는 거예요. 이거 한번 빠진 사람, 죽기 전에 못 고칩니다. 정말 힘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걸 못 고치는 거예요. 담배 그것도 그렇잖아요.
담배 하나 끊는 것, 아니 그까짓 것 안피우면 그만이지 뭐. 근데 그걸 못 끊는 거예요. 그리고 비행장에 가보면 한쪽 구석에 앉아가지고 요렇게 하고 빨고 있는 거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고. 왜 이 모양이요?
사람들이 말이요…… 이게 노예가 된 거예요. 어찌 생각하면 우리 자유인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요. 안하면 그만 아니오 그까짓 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남의 얘기처럼 들립니까?
여러분 마음속에도 뭔가, 지금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을 가고 있어요.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 있어요. 당연히 해야할 일은 또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깊은 죄악이요.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깊이 빠져 들어가서요 어느 사이에 이렇게 비참해졌는데 내 스스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의식이 노예화 되고 성품까지 노예로 바꾸어졌을 때, 다시 돌이키기가 어려워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1958년인가 봅니다. 그때 서울 안에 십자매 바람이 불었어요. 모조리 십자매를 키우면 돈 번다고 해서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여전도사님이 혼자 사는데 방안에다가 십자매를 엄청나게 많이 키웠어요.
그거 치우라고 그래도 "아이구 뭐 심심한데 뭐." 그러고 키우더니 이게 값이 떨어졌어요. 아주 망조가 들었는데 할 수 없이 십자매를 놓아주었지요. 새장 안에서 태어나 자라난 십자매를 이제 창문을 열고 나가라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이 자유, 십자매가 새장 안에 있을 때는 쿠렁쿠렁 하더니 이걸 열어놓고 나가라고 그러니까요 나가 가지고 뱅뱅 돌다가 다 집안으로 다시 돌아 왔더라구요. 그리고 살지 못하더라고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어느 사이에 우리가 노예화 되어가지고 살았어요. 자유하지도 못할뿐더러 자유를 지킬 수가 없어요.
공산주의 치하에 있던 나라들을 방문해 봅니다. 공산주의 40년, 50년동안 했지요. 이제 자유를 얻었어요. 해방이 됐는데 왠걸요. 어느 사이에 인간성이 완전히 타락이 되어 버렸어요. 변질돼 버렸어요.
하나같이 게으르고 불신실하고 무책임하고. 공산주의의 이론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한 이유가 부자 때문이라는 거죠. 그게 바로 혁명이라는 거요. 혁명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그만 체질이 돼 가지고 자기 책임을 질 줄을 몰라요. 무책임해요. 그리고 소리만 지르면 뭐가 되는 줄 알아요. 우리도 간간이 보면은 나라를 향해서 뭐 달라, 뭐 달라. 그거 누가 주는 겁니까? 나라가 줄려면 세금 받아야지요. 주는 자 없이 어떻게 받는 겁니까?
기회의 평등은 잃어버리고 성과의 평등만 주장하는 거예요. 달라고 소리만 지르는데 뭘 가지고 주자는 얘기요? 일도 안하고 월급은 달라구요? 어디 이런 세상이 있습니까? 그 강도지! 이게 그만 체질화 되어버렸어요. 어느 사이에 성품화 되어버렸어요. 그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의 역할이 있고야 자유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인자가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할 때만이 자유하리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충족케 하시고 비로소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성령과 말씀으로만이 자유를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거예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자유하는 게 아니요.
그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죠. 내가 스스로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이 길 외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입니다. 이 속에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자유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의 자유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이기는 확실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해방 56년 동안 자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자유라고, 경제적인 자유를 얻어보겠다고 '잘 살아보세'를 외쳐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유했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기 전에는 자유는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었고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권력의 보좌에 앉아서도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부자라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하다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한 사람만이 자유인입니다.
여러분, 옛날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그러나 옛날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옛날에 아팠던 사정, 그 과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만은 그것에 매여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지불된 엄청난 대가를 다시 확인하면서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의 길과 사랑의 길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와 사랑과 생명과 성령의 역사 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알고 여러분, 세상이 어떻게 흔들려도 여러분의 심령에는 무한한 자유함이 있어요. 거기에 창조적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고 오늘의 이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아직도 얻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고 또 자유를 지키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주여, 시기와 질투, 그 많은 욕심, 분쟁과 그리고 교만과 나 자신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은 이렇게 혼란하지만은 주께서 주신 자유를 끝까지 지켜가며 온전한 해방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생명의 성령의 법/롬8:1-9/ 곽선희 목사
2014-11-25 21:15:52
지난 4월 28일 저와 몇 신학교 교수님들과 목사님들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그것은 중국 당국이 지금 종교문제로 많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사이비종교 이단들이 점점 만연해 가고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너무너무 고심하던 나머지 당국에서 연구원을 만들기도 하고 연구실을 만들고 또 이것 때문에 특별한 조처를 할려고 애를 쓰는중에 저희에게 요청을 해서 와서 좀 종교문제좀 같이 세미나를 했으면 좋겠다.
그 주제는 뭐냐하면 다시말하면 종교란 뭐냐? 하는것이고 또 한가지는 어떻게하면은 이단과 사이비와 참좋은 종교를 구분할수있을까 이걸 분리생각해야 하는데 이분들이 분리할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이단사이비종교와 참된 종교를 구분하는 그런, 그러기위해서는 참종교가 뭐냐 하는것도 알아야 할것입니다.
자 이런문제로 같이 진지하게 사흘동안 토론을 하고 세미나를 했는데 이걸 총주도하는 책임자되는 분이 이름이 특별해요. 당회장입니다. 당씨거든요. 당위장인데 처음엔 이상했어요. 아무튼 당위장이란 분인데 그분이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한국에 와봤어요.
미리... 한국에 와서 다 돌아보았거든요. 그중에 이 예수소망교회 왔었어요. 그랬는데 이분이 자기 왔던 경험을 여러사람들 앞에서 저를 소개하는중에 아주 진지하게 말씀을 하는거예요. 아주 참 시쳇말로 감동먹었어요.
왜냐하면 이분이 생전처음 일생처음 교회라는 곳을 온거예요. 물론 동시통역을 하지마는 통역이 뭐 그렇게 완전한건 아니죠. 어쨌든 그분얘기는 들어와서 본인얘기가 그래요. 기분이 시원해지고요 아주 신비로운 느낌과 정신이 맑아지고 하는 그런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경험했대요.
예배를 마친다음에 특별한 일이 이루어졌어요. 본인으로서는 심각한거예요. 그게뭐냐하면 50년간 피워오던 담배를 끊었어요. 담배냄새가 싹 싫어지는거예요. 그순간부터... 그래서 자기가 이걸 끊을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못끊었는데 하루에 세갑씩 피웠대요.
아 이 담배를 깨끗이 끊었다고 아 그리고 고맙다고악수하자고... 너무너무 감격해하는거예요. 아 그 신비로운거라고... 싹 싫어지는데 다시 담배를 안피우게 되었다 하는얘깁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설교 끝났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얘기가 더 어디 있습니까? 이게 교회요 이것이 성령의 역사예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게 성령의 역사예요. 너무 따질려고 들지말고 너무 비판할려고 하지 마세요.
비판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납득했다고 해서 납득이 전부가 아네요. 그 아무것도 아네요. 자 여러분 보세요. 알면 뭘해요? 실천할 수있어요? 결심하면 뭘해요? 사흘도 못가는거... 결국은 우리 마음을 성령이 포로해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역시 신비로운 것이예요. 그것이 성령의 역사예요.
카나다 빅토리아 대학교수인 K. R. Bradley라고 하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의 저서는 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Slave and Master in Roman Empire. 로마제국의 노예와 주인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옛날 로마제국은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로마에 가면 그 많은 옛날 그 건물들 2000년전에 있었던 굉장한 것들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역사적인 유물을 보는데 그러나 한편 생각을 돌려보세요. 노예문화입니다.
전부 노예가 만든겁니다. 엄격히 말하면 사람이 만든게 아닙니다. 노예가 만든겁니다. 저거 만드느랴고 얼마나 많은 노예가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숫자를 셀수가 없습니다. 이게 종래의 문화입니다. 종래의 역사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노예가 뭐냐 이거죠.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요? 동물취급받았으니까요.
노예에게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왜? 귀찮으니까...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합니다. 말을 안하다보니 못하게 되고 벙어리가 되어버렸어요. 그냥 무무무무 이러는 거예요. 그렇게 됐어요. 철저하게 동물화 했어요. 물론 방에서 자는게 아네요. 외양간에서 자고신발이 없어요. 이게 인간입니까? 이렇게해서 뭐 그 긴얘기 할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노예란 사람이 아네요. 그래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철학자도 말했어요. 노예와 당나귀의 공통점이 있다. 둘다 사람이 아니라는것이구요 당나귀와 노예와 차이가 하나 있어요. 그것은 당나귀는 말을 못알아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이정도로 노예는 완전히 동물취급을 가축취급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그는 본래 노예냐? 물론 노예의 집에 태어나서 노예예요. 노예로 태어난 노예가 있지마는 이보다 심각한 것은 전쟁에 패할 때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는거예요.
또는 여기저기서 전쟁을 하고 사람을 포로해다가 노예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백성들에게 배급을 줬어요. 이게 노예예요. 때로는 돈을 갚지 못할 때 빛대신에 자식이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본래적인 노예도 있지만 노예는 본래 노예가 아네요. 사람이 노예가 된거죠.
옛날에 드라마가 한번 오랫동안 있었죠? 쿤타킨데... 이름이 이상해서 기억이 있는데 쿤타킨데라는 것이 뭡니까? 그사람 노예가 아네요. 귀족이예요. 아프리카에... 그런데 붙들려와서 노예가 됐어요.
그 자존심이 오죽하겠습니까? 이 꺽어지면서 노예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그 드라마의 총주제였습니다.
여러분 이 멀쩡한 사람이 노예가 된다? 자 어떨 것 같습니까? 쇠사슬에 묶어서 쇠사슬을 달고다녀요. 그리고 내리치면서 체형을 당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차차차차 익숙해 갑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길들면 이제 쇠사슬을 풀어놓습니다.
또 좀더 길들면 어떤때는 내버려둬도 자동적으로 노예가 됩니다. 저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언젠가 한번 그 산책을 하면서 저녁노을에 골프장근처에 갔는데 머리가 하얗게 쉰 할아버지가 골프채를 매고 지금 한 20살되었을까?
아가씨 하나랑 골프를 치는데 골프채를 메고 예스맨 예스맨 하고 따라다니는걸 보았어요. 너무 신기해서 교수님들에게 물어봤어요. 저게 뭔소리냐고... 노예해방된지가 100년이 됐는데도 자자손손 저사람들은 자기가 노예인줄 생각하고 지금도 그 집에서 충성을 다한다고...
노예로 살아가는거예요. 노예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사람대접을 해도 자기는 노예가 더 좋대요. 이렇게 사는 거예요. 철저하게 노예화된 인간... 생각해보세요. 길들여진 노예...
자 오늘은 노예제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마는 보이지 않게 노예제도가 있습니다. 자 잘못된 문화의 노예가 됐죠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됐죠. 잘못된 습관의 노예가 되었어요. 이렇게 철저하게 노예가 되고 보면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도 몰라요. 불편함도 없어요. 이 사람이 비참한거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비참한거 아니겠습니까?
좀 미안한 얘기지만 요새와서는 아내한테 잘 길들여진 남자들이 있더만요. 참 내 생각 같아선 부끄러워 할 것도 같은데 아 부끄러움도 몰라요. 당연히 그러해야될 것처럼 시중드는 것 보면 참 이게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됐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주 잘 길들여졌어요. 아주...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됩니까? 그러면 자기도 불편함을 모릅니다. 노예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라는 책에서 그는 삶의 형식을 말합니다. 사람은 첫째 욕망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 쾌락과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런 인간 둘째는 이익적 삶, 이익 지향적 삶이예요.
뭐 많이 가지는거... 집도 가지고 땅도 가지고 뭐 가지는거 그게 소원이예요. 뭐든지 많이 가질려고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한평생 사는 그런사람... 또 정치적인 삶이 있다고 합니다. 뭐 명예와 정치와 권력 거기에 노예가 되서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도 있고 네 번째 인간다운 사람 하나가 있다.
그것은 관조적인 삶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 질적인 생을 추구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사람 그리고 그의 정신이 자유한사람 좌우간 물리적이건 물질적이건 환경이야 어쨌든간에
그 정신이 아주 자유한 가운데 마치 세상을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관조하며 명상하며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람 이 사람만이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느 수준에 있습니까? 노예상태... 오늘 본문에서는 이 노예상태를 고발합니다.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전권적 역사가 아니면 누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의 속박에서... 죄를 짓는자마다 죄의 종입니다. 죄를 또 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말한사람마다 또 거짓말합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좋지 않은얘깁니다마는 오래전에 제가 어느 때 형무소에 가서 전도를 한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한테 세례받은 사람이 나왔어요. 출소해서 제게 찾아와서 얘길하는데 자기 소개로 그래요.
자기가 7범이래요. 전과7범... 그래 내가 아니 감옥이라는데가 한번만 가면되지 뭐 일곱 번씩이나 갔나? 그렇게 물어봤더니요. 그러믄요. 아 거기 여러번 갈때가 못되지요... 본인이 그래요. 그래서 다시는 죄 안짓겠다 생각을 했대요.
아 그리고 전철을 탔는데 이렇게 보니까 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이 다 보인대요. 저 핸드백에 들어있는거 저 주머니에 들어있는거 환하게 보인대요. 그걸 안봐야 하는데 그걸 요렇게 보다보면 어느사이에 손이 쓱 나간대요.
나도 그래서는 안될줄 압니다. 그러나 어느사이에 또 이래서 7범이 됐다는거예요. 자기도모르게... 이게 문제라니까요. 내가 나를 제재할 수가 없어요. 죄를 짓는자마다 죄의 종이다. 죄의 노예다. 자유가 없다. 그런고로 이 자유는 하나님의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 첫절에 있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풀어주고 하나님이 용서해야 합니다. 의롭다 하실때에 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유인으로 다시 시작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 귀중한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가 뭐냐하면 용서를 믿지 않는거예요. 용서했다는데 안믿는거예요. 용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보배로운 마음이예요.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데 그 믿음 예수그리스도의 사죄권을 믿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십자가안에서 내 모든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수용하는 받아들이는마음 그게 믿어지는 마음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한 오늘 성경에 보면 성령의 법이 너희를 자유케했다 그랬습니다. 질서의 두가지... 율법적인 질서와 성령의 질서, 율법이라고 하는 법과 성령의 법 자유의 법이 있다. 노예의 법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의 법이 있어요. 두법을 말합니다.
오늘 16절 다 본문에서 보신바와 같이 16절로 돌아가서 본문을 좀더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여기에 성령받은사람의 새로운 세계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두 가지 걱정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 그건 안됩니다.
우리는 천당 갈 사람들이니까 그 걱정하면 안되죠. 두 번째 그것은 바로 내가 저주받을까 하는걱정,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까 하는 이런 저주의식 형벌의식은 절대 안됩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니까... 우리는 노예가 아녜요.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해도 이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시련이예요. 뭔가를 인도하고 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라는걸 잊지말아야되요.
자녀... 자 보세요. 확실한 내가 자녀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무슨말을하던 어머니가 무슨 잔소리를 하던 이건 다 나를 위한거예요. 나 괴로우라고 하는거 아네요. 나 고통당하라고 주는게 아네요.
전부가 다 나를 위해서 주시는거예요. 이렇게 받아들이는것처럼 우리가 성령을 받은자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성령이 계속 계속 확증해 주시는거예요. 내가 어떤 때 병들어도 성령은 말씀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랑이요.
내가 실패해도 성령은 말씀합니다. 이건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비상조치다. 여러분 이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하십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박사의 그 부인이 있었는데 어떤 때 기자들이 부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부인께서는 아인슈타인박사의 물리학 이론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화닥닥 놀라면서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합니까?
딱 한가지 아는거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거... 이것만 알면 됩니다. 그 이상은 알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요것만 알면 됩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신다. 너무 알려고하지 마세요. 머리만 복잡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성령이 계속 증거해 주십니다. 그 속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이끌어주십니다. 오늘 9절에서 보니까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와 함께계셔서 신비롭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놀라운겁니다. 신비롭게 변합니다. 입맛도 변합니다. 취미도 변합니다. 생각도 변합니다. 의지도 달라집니다. 이 변화를 느끼면 간증하며 즐기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예요. 때로 우리는 스스로 결심한다고 합니다만 그건 아네요.
저는 가끔 여러분들 기도하시는거 혹은 어떤 목사님들 축도하시는데 그 내용중에 제가 좋아안하는게 있어요. 그건 왜냐하면 아마 제가 조직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까다롭게 따지는거 같습니다마는 그러나 축복하면서 예수믿는사람으로 바르게 살기로 결단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있기를... 결단이 은혭니까?
결단은 내 마음이예요. 결단은 신앙이 아네요. 뭐 결단 결단 결심 여러분 지금까지 했는데 뭐 되는게 있어요? 아니올시다. 이건 꼭 잊지말아야 합니다.
신비롭게 내 결심과도 관계없이 내 생각과 의지와 감성이 돌아가면서 성령에 이끌리어 삽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성령안에서 희생하며 오히려 기뻐하며 삽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싸르트르의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네가지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말할 때 투기적인 자유, 막연하지만 과거에서 끊어서 미래로 지향하는 그러한 투기적 자유가 있고 하나는 선택적 자유, 자유를 선택해놓고 이것 때문에 고민하며 사는거예요.
또 하나는 책임을 지는 자유, 자기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을 지는거예요. 아주 힘든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연대적 자유, 나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요 자식에게는 부모입니다. 이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의 관계 사랑할때만 자유인이다. 그 사랑을 누가합니까? 이게 성령의 역사해주시는겁니다.
또한 마지막으로는 성령은 증거하게 해주십니다. 성령에 고용되어 성령에 붙들리어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 은사적인것입니다. 여러분 동물은 육체의 욕망에 이끌리어 삽니다. 인간은 지성과 자기가 세운 문화에 끌려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이끌리어 삽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는대로 성령이 깨닫게해 주는대로 성령에 이끌리어 살 때 성령에 완전히 붙들려 살 때 거기에 온전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온전한 자유... 그리스도안에 성령안에 그 놀라운 은사속에 내 삶의 가치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 도-
하나님아버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저희를 구원하사 하나님의 법을 알게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되게도 하시며 우리는 계속 세상으로 기울고 있건만 주는 신령한 세계로 인도하시며 영원한 세계로 우리생각을 이끌어 성령의 은사중에 하나님의 자녀된생을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더 충만케 하사 우리의 생각과 의지 우리의 문화 모두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사는 그 자유함이 있게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령이 계십니까? /롬8:9/ 김형익 목사
2021-05-11 04:34:50
1. 질문의 의미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떨까요? 어쩌면 여러분은 약간 당혹스러워할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하는 질문과 “성령이 계십니까?”라는 질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의 질문은 내 결정과 내 행위를 묻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뒤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내게 그리고 내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행위를 묻는 것으로 들립니다. 만일 기독교가 인간의 종교적 선택의 문제라면 앞의 질문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물론 두 질문의 의미는 같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쩌면 “당신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까?”
혹은 “당신은 진짜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부연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셔서 내주하시며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성령님이 계신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행위를 했는가 보다는 그래서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이루시고 계신가’에 더 가까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성령님은 반드시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일?거룩한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이 계신지 어떻게 아는가?
지난 주일에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거룩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그 거룩한 감정을 내 안에 만들어내시는 분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천성은 결코 자연적으로 거룩한 감정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감정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야 하기 이전에 거룩한 감정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제가 강조하였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우리가 노력해서 그런 사람이 되라는 새로운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중생한 사람의 특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룩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아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상당히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증거들을 가지고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고 가르치고 주장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과는 둥글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둥근 모든 것은 사과다라고 말하는 식의 태도가 만연하다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이 계시는 확실한 증거가 아닌 것들
여러분이 성령님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개념들이 무엇입니까? 방언과 같은 어떤 은사들입니까? 이적과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입니까? 기도 많이 해서 쉰 목소리입니까?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면 우리는 성령님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성령님으로 인한 역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마귀가 모방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든 현상들 자체는 다 마귀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도 이런 일들을 행하실 수 있으나 마귀도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이비 이단 집단들에서도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A. 방언
방언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교회에서는 정기적으로 가지는 집회에서 방언이 터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복음을 분명하게 들었고 그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하는 모든 것들을 제쳐둔 채,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또 어떤 특별한 현상을 체험했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속고 있는 것이고 그 당사자를 속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순복음교회는 방언이 참된 믿음의 증거이고 성령 받은 증거이므로 방언 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심각하게 위험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언을 연습과 훈련까지 시켜서 하게 하는 기현상까지 낳게 된 것입니다. 방언뿐 아니라 몸에 어떤 이상한 현상, 진동이나 쓰러짐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성령이 계신 증거로 보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실제로 이슬람권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이것들은 현저하게 마귀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이런 현상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지라도,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계시는가, 성령님이 내주하시는가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인데, 성령님께서는 구원의 은혜와 무관하게 소위 ‘일반적’ 은혜를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 어떤 현상을 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울 왕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을 잡으러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갔다가 옷을 벗고 예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삼상 19). 이 현상으로 사울이 성령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B. 성경구절들이 떠오르는 경우
그렇다면 좀 더 성경과 연관이 있는 현상을 생각해보지요. 꿈에서 혹은 갑자기 어떤 성경구절이 떠올랐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떠오른 것이 불경의 구절이나 세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성경구절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증거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마귀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그 말씀을 찾아서 읽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깨닫고 그로 인하여 크게 위로와 은혜를 받는가, 아니면 그것이 떠오른 말씀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말씀에 위로를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기뻐하고 흥분하는 것이 말씀이 떠올랐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씀에 담겨 있는 내용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를 우리는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일 때 이런 속임의 현상은 더욱 심각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어떤 성경구절이 떠오르게 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현상에 의지하여 자기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거짓 확신에 이르도록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발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까지도 했던 사람입니다(민 24:17). 하지만 그것은 성령님의 일반적인 역사였을 뿐,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은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C. 환상과 같은 자극
때로는 환상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았다거나 혹은 천국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성령님이 계신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을 때에도 주님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마 4:8)
. 만일 우리가 이런 환상을 본다면 은혜롭게 여겨 간증을 하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은 우리를 자칫 참된 신앙 감정보다도 더 흥분하게 하고 고양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등장 인물 중에 ‘온순(Pliable)’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영적 실재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절망의 늪에 빠지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되자 천국의 소망과 영적 실재에 대한 기쁨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옛 삶의 자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상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처럼 유도하는 목회의 기술들도 오늘날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과연 바른 성경적 가르침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성도들은 얼마나 될까요? 이것은 정말 악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D. 능력 있는 사역
우리가 성령님이 계신 확실한 증거가 아닌 것으로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능력 있는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의 증거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봅니다.
성경은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가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의 증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룟 유다만 하더라도 그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등의 사역을 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마 10:1). 하지만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귀였습니다(요 6:70).
외양적으로 능력 있는 사역을 한다는 것이 곧 성령이 계신 증거요, 그 사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4. 성령님이 계신 확실한 증거
그렇다면 성령님이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성령님을 가리켜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말씀했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인의 삶이 얼마나 거룩한 삶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그리스도인은 어떤 위치에 서 있는 자냐 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분, 위치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계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A. 성령님은 하나님의 도덕적 본성을 성도의 심령에 주신다.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그를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게 될 때 성령님은 그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의 도덕적 본성을 계속해서 전달해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이 성도의 심령 안에 계속적인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방언이나 어떤 현상이나 능력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외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의 심령 안에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역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님께서는 성도를 성화의 은혜로 이끌어가십니다. 이전에 즐기던 것들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사모하게 하시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지고 싶은 소원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압니다.
“아, 이것은 예전에 내가 자연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그런 착한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신 결과다. 이것은 나의 의지나 마음 먹기 정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면서 그에게 거룩한 감정, 신앙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더욱 주님을 갈망하게 되고 은혜가 없이는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의존하여 살게 됩니다.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던 것들이 이제는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일들이 싫어집니다. 비로소 죄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비록 세상의 유혹이 그치지 않고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높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고 그 일로 인하여 희열을 느꼈는데,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예롭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성령님께서 또 일으켜주십니다.
B. 성령님께서 주시는 확신(롬 8:16)
성령님이 신자 안에서 하시는 일은 이와 같이 그 안에 거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심령에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성도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언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증언한다’는 말은 법정에서 증인으로서 증거를 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법적 효력을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거짓말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성도의 영과 함께 증언을 하신다고 말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이 성도의 영혼이 체험할 수 있는 성령의 증거 가운데 최고의 수준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확신입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일각에서는 이것을 직접 계시의 차원으로 이해를 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직통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는 없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단이거나 이단적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요 14:17).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요 15:26; 16:13~14).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 구주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가르쳐주십니다(요 14:26). 즉 성령님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언하신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어떤 구절이 떠오르게 하거나 환상을 보게 하거나 혹 방언이 터지게 하거나 몸이 떨리는 이상 현상을 경험하게 하거나 혹 직통 계시를 주시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주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그리고 복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이 되는지를, 십자가가 얼마나 놀랍고 복된 구원의 복음인지를 보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어떻게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게 됩니까? 성령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그 선하심을 알고 그 영광에 감격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성령님께서는 이미 우리 영과 더불어 “얘야, 내 사랑하는 아들/딸아!”라고 확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앞에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할 이유를 너무나 분명하게 주지 않습니까?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라면, 참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이라면 그는 은사를 추구하고 은사 집회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이 길을 따라 성령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5. 성령이 계십니까?
성령이 계십니까?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 와 앉아계신다고 해도, 여러분이 오래도록 교회 생활을 했고 많은 봉사를 했다고 해도, 여러분이 어떤 교회의 직분을 가지셨다고 해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껍데기를 가진 종교인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의 사람이어야 하고 참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성전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계시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주께서 오라고 부르시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말씀 속에서 복음의 영광을 발견하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말씀하시는지 성령의 증거를 듣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도 없는 역사입니다. 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하시기를 구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자유 /롬8:1-11/ 이재훈 목사
2023-12-28 06:33:07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독일의 루터파 경건주의자 필립 슈패너는 “로마서가 바울의 전체 서신중에서 보석과 같다면, 8장은 보석 중에 진주와 같다”고 언급했습니다. 유명한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예수 나의 기쁨’이라는 칸타타를 오늘 본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구원의 안전함과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해서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 끝납니다.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1절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정죄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39절도 ‘없습니다’라는 단어를 강조합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고, 결코 끊을 수 없다는 그 사이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성도들의 구원이 단순한 소원이나 소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 온전한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이 확신은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성도의 탄식과 대조를 이룹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죄 아래 탄식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 나는 비참합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것입니까?”라는 탄식은 바울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옛 자아의 영향력과 옛사람의 끊임없는 공격 속에 있는 거룩한 성도들의 탄식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탄식이 로마서 8장에 이르러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7장에서 나타난 성도의 거룩한 탄식이 8장에서 성도의 영원한 안전이 됩니다.
이것을 시편 23편에 대입해 보면 7장에 나타난 성도의 거룩한 탄식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습니다. 로마서 8장의 성도의 영원한 안전은 시편 23편의 마지막 구절인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는 구절에 대입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성도의 거룩한 탄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면, 로마서 8장에서 성도의 영원한 안전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안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별명을 붙인다면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나 다른 로마서에는 성령의 은사를 중심으로 설명했고,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했다면, 로마서 8장에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성령님이 직접 행하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암송을 많이 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이 행하신 일들을 요약하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키신다”(2절), “율법의 요구를 이루도록 도우신다”(4절), “육신의 행실,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도우신다”(12절),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이 상속자임을 증언하신다”(16절), “성도의 연약한 기도를 도우신다”(26절), “성도가 영화롭게 될 것을 보증하신다”(30절)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성도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것을 증언하시고, 확신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과 11절이 그 출발이 되는 진리를 말씀합니다. 그 진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1~2절).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으로 죄 없는 자로 여겨지는 ‘칭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째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정죄가 취소되고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과 6장에서 말씀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입니다. 그 대상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서 옛사람이 함께 못 박힘을 경험하고, 그분의 부활과 연합해 부활 생명이 있는 자, 믿음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순종하고, 기쁨과 확신이 없습니다.
죄의식에 빠져 죄책감으로 봉사합니다. 두려워서 섬기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생활, 율법적인 생활, 나아가 종교가 중독되는 것은 1절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복음입니다. 이 말씀에 “아멘”이 나와야 그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로마서 7장까지의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로마서 8장부터의 말씀은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정죄 받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욱 적극적입니다. 구원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죽음의 법’이라는 말씀에서 ‘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와 방식을 의미합니다. ‘영향력’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어 이제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는 것을 체험하려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삶을 체험해야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성령님이 생명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근거가 되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근거가 되셨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나눠 주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의 원리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했습니다. 죄와 율법의 굴레에 사로잡혀 죽음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인해 연약해져서 할 수 없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량해 주시려고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서 죄를 심판하셨습니다”(3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그 아들 안에서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던 죄와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죄가 있는데 눈감아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인데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심판을 받은 자이기에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은 노예 생활하던 히브리 민족이 의기투합해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고, 그들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민족의 승리와 쟁취를 이룬 역사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보여주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바로가 그의 백성들을 내어주지 않았을 때 열 차례 재앙이 있었고, 그 마지막 재앙은 애굽에 처음 난 것을 모두 죽이는 심판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처음 난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서 처음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든 어떤 민족이든 애굽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가정에 처음 난 것은 죽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면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이 약속을 믿지 않고 참여하지 않으면 재앙이 임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더라도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애굽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도 이 약속을 듣고 따른 자들은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 증거가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개역개정에서는 ‘수많은 잡족’이라고 표현했습니다(출 12:38).
그 단어를 나중에는 ‘다른 종족들’, ‘다른 여러 민족들’로 바꾸었습니다. 모세의 아내가 다른 민족 아닙니까?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된 민족이었지만 다른 민족들도 있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 역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모형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그 집에 있음을 보고 죽음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된 것입니다. 피는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을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고, 그 제물이 그 집의 장자에게 심판이 집행된 것으로 여기고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의 심판을 이미 완전히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것이 로마서 7장까지의 메시지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었지만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집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복음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단순한 진리, 모두 들어서 아는 진리라고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 들었지만 팽개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집행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는 단순한 복음의 소식을 가슴 깊이 새기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고, 율법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나의 죄에 대한 심판이 집행되었기에 나는 정죄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을 믿는 것에서부터 자유가 출발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것처럼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애굽으로부터 나온 것, 정죄 받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자유
우리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절 이하에서는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대조합니다.
“이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4절).
‘율법의 요구’란 율법의 의로운 요구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의로운 요구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육신’은 우리 몸이 아니라 타락한 옛 자아의 영향력, 옛사람에게 남아있는 흔적들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성도가 거룩한 탄식을 하게 만든 살아있는 육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끝까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합니다. 그 모습이 로마서 7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식에서 머무는 인생이 아니라 확신에 이르는 인생을 살도록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는 성령을 따라 사는 자유입니다.
여러분, 여행을 갔을 때 유능한 가이드를 따라가는 것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따라가는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자유입니다. 육신을 따라 가면 자유가 아니라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고, 출애굽은 했지만 여전히 광야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의 습관, 사고방식, 탐욕에 묶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광야를 지나며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인도받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생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정반대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성령의 일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육신은 죄와 죽음의 법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법은 강력한 영향력입니다. 마치 중력의 법칙과 같습니다. 어떤 원리에 적용을 받습니다. 지구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서 떨어집니다. 그런데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하늘을 나는 새가 있고, 비행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공기 역학의 법칙을 이용하면 계속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와 죽음의 법을 따라 움직이는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자유의 길인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영원에 속한 것을 갈망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는가?’ 등 자신의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늘 평안이 있습니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6절).
정죄 받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평안입니다.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고, 모든 염려와 불안을 내어 쫓고 평안합니다.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도 평안합니다.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을 알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요동치는 세상 한복판에서도 평안합니다. 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하늘이 진동하고, 요동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관계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은 두려워 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언젠가 이 지구는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하늘이 진동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흔드는 때가 올 것입니다. 불태우시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도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유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몸은 죄로 인해 죽으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기 영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10~11절).
10절은 현재 일어나는 일이고, 11절은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현재에 일어나는 일은 몸이 죄로 인해 죽는 것이고, 영은 의로 인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태입니다. 몸은 죽은 상태입니다. 살아있으나 실제는 죽은 것입니다. 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면 잠시는 자랄지 모르지만 죽는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순간 아담 안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의 종착지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몸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성령으로 인해 인간의 거듭난 영이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살아났습니다. 몸은 죽었으나 영은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현재의 상태입니다.
미래는 어떤 상태입니까?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으로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몸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은 현재의 확신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자유입니다.
왜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까? 우리의 현재 상태와 미래 상태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정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 몸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각오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 몸의 부활이 약속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각오하면 안 됩니다. “살기밖에 더하겠어?”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정죄 받지 않았기에 자유롭고, 우리에게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자유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자유가 우리의 삶 속에 충만히 흘러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영의 사람으로” /롬8:5-11/ 박형근목사
2023-11-26 16:16:47
우리는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요. 어떤 분은, 신앙생활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집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지, 세상 삶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말은 그리 하지 않더라도, 교회의 거룩한 삶과 세상 삶에 큰 차이가 있는 이들이 있는데, 아니지요.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은, 세상에서도 거룩하게 삽니다. 거룩은, 세상에서 안 믿는 이와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교회에서 거룩의 훈련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거룩하게 살지요.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은, 오늘날 세상을 보며 거룩한 성도들이 힘쓸 일이 있음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나는, 온갖 이단 문제지요. 정명석이란 이는, 성추행으로 10년 징역을 살고 나왔는데, 또 그런 죄로 구속되었는데도, 많은 교인들이 남아서‘이런 소란은 잠시 후 사라질 것이니 조금만 참으면 돼.’한답니다. 심지어, 딸이 성폭행을 당한 부모들 조차 은혜에 감사한다 하지요. 왜들 그럴까요? 뭔가, 그들을 유혹한 신비한 일이 있다고 봅니다. 악한 영이 역사하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머리를 크게 다쳐 다 죽어가던 짐승이 다시 살아나거나, 돌 우상이 말을 하니, 많은 이가 섬기며 따른다 하지요. 오늘날 어디에 있는 돌이 말을 한다면, 사람들이 몰려가겠지요? 지금은 성령과 악령이 싸우는 시대인데, 거룩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 속에 말씀에 굳게 서서, 악한 영의 역사인 이단 설침을 막아야 합니다. 또 하나 사회 문제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과 신생아 태어남이 주는 거지요. 여러 이유가 있으나, 사람들이 돈에 너무 매여 사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뉴스를 보았는데, 봄이 되어 각 학교에서 열린 학부모회에, 어머니들이 차려입고 나가는 비용이 7백만 원이나 든다고 합니다. 옷, 가방, 신발, 등에 그리 돈을 들인다고 하니, 자식 하나 키우려면 돈 많이 든다 하지요. 교회 다니는 이도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성도의 거룩한 삶에서 가능한 돈을 떼어 놓았으면 합니다. 어렵겠지요. 돈이 필요한 곳도 많고, 돈이 많으면 좋은 것은, 말로 할 필요가 없지요.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니, 무조건 돈을 멀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사람이 누리는 유익과 복이 엄청남을 깨달으면,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음을 나누려는 거지요. 롬 8장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성령이 함께하는 성도가 누릴 복이 자세히 나옵니다. 먼저, 1,2절에, 영의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지요.
이는 8장 마지막에보다 자세히 설명합니다. 38,39절을 보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예수 믿고 영의 사람으로 사는 성도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롬 8:35에‘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그러니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 당당했습니다.
성도가 누릴 두 번째 복은, 14,15절에‘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교회 다니는 이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많은 이가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모릅니다. 고 박 영출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 소개합니다. 옛날 어느 집 머슴이 주인집 아들들이‘아버지, 아버지’하는 것이 부럽지만, 종이 주인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지요.
그래서, 근처 숲속에 가서 목청껏‘아버지, 아버지!’소리쳐 불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자주 부릅니까? 그저 아버지도 아니고‘아빠 아버지’라 하는데, 히브리말이 우리와 비슷한 것이 몇 개 있는데‘아바’가 아빠입니다. 어린애가‘아빠’하듯 친근히 부르라 합니다. 천지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됨은 생각할수록 엄청난 은혜지요. 자주 불러서 많은 은혜를 누려야지요. 오늘 주보에 올린‘우리가 영원히 부를 이름’을 읽기 바랍니다.
아이가 필요할 때‘아빠’부르면, 아버지가 달려와 돕듯, 사랑의 하나님은‘아빠’라 불림을 기뻐하며 도우십니다. 육신의 아빠는 아이가 자랄수록 해 줄 것이 줄어들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궁무궁 하시지요. 롬 8:32에‘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아들 예수까지 우리에게 내주신 하나님께서‘아빠’라 부르며 청하는 자녀에게 아끼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 번째 성도가 누릴 복은, 26절에,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한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성령님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기도를 도와주시지요. 우리가 아픔이나 환난에 너무 힘들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합당한 기도를 하며 이겨내도록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항상, 모든 면에서 돕고 계십니다.
지금 사순절을 지나며 예수님의 십자가로 베푸신 은혜를 되새기고 있는데, 바로 지금 말씀드린 것이지요.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영의 사람이 되어, 귀한 것을 누리는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영의 사람은 육의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삽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 5절 이하에서 설명합니다.‘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생각을 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경에서, 사망은 몸의 죽음과 영 죽음을, 생명은 몸이 사는 것과 영생을 말하는데, 말씀의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할 때, 영 죽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의 생각은 영생을 누리며 주의 평안을 누리지요. 그 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 법, 말씀을 따르지 않고, 따를 수도 없으니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거지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명하신 두 가지 법은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육신을 좇아 사는 이들은 이리 살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비판받는 이유는, 기복적이고 이기적이라 하지요. 세상 복을 좇고 자신과 가족만 챙기기 때문입니다. 교회 자녀도, 영의 사람이 덜되었기 때문이지요. 영의 성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내가 너희를 십자가로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를 따르려 합니다.
여기서 잠시 살필 것이,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영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결코 쉽지 않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몸을 갖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영적인 대화나 추구가 거의 없고, 다들 육체에 따라 살지요. 성경은 이것을,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하는데, 육체의 정욕은, 몸을 갖고 살기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성숙한 남녀는 이성을 추구합니다. 그것을 나쁘다, 죄라 할 수 없지요.
안목의 정욕, 사람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좋으면 탐을 냅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선 그것을 이용해 잘 팔리는 상품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지요. 눈에 보이는 걸 탐낸다, 역시 나쁜 게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어린아이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듯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나쁜 것이 아니나, 너무 지나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좇을 때 문제가 되지요. 성경은 탐욕이 우상 숭배라 하지요.
몸을 따르는 이는, 때로, 성령조차 자기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쓰려 합니다. 전에, 숭덕교회에서 수고하신 유 목사님은, 미국서 성령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니, 여러 교회에서 초대하더랍니다.‘나, 한국사람들이 성령에 관심이 많구나.’했지요. 그런데, 몇 교회에 가서 설교하며, 느낀 것이, 자신은 중세 수도사들의 가난과 고난 속의 영적 수련을 연구했는데, 듣는 교인들은 성령을‘금 나와라 뚝딱’도깨비방망이로 알더란 것이지요. 미국서 연구했으니 더 좋을 거라 생각하더랍니다. 성령은, 우리를 영의 성도로 인도하는 분이지, 육신의 욕망을 채우게 돕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을 바로 알고 믿고 의지해야지요. 마 12:31에‘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성령님이 우리를 적극 도우시는데‘난 성령이 나와 함께하심을 못 믿어.’한다면 그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요? 성령의 도우심을 인정하며 구하지 않으면,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길을 막아버리니, 사함을 받지 못하지요. 영의 사람이 누릴 복도 없지요.
또, 사도신경에 하나님, 예수님은 길게 고백하는데, 성령에 대해서는‘나는 성령을 믿으며’세 단어로 간단한 것은, 성령을 믿으면, 그 다음은 성령이 알아서 해 주시니, 긴 설명이 필요 없지요. 이렇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귀하기에 롬 8:9에‘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다 성령입니다.
교회에 다니나, 내 속에 성령이 계심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합니다. 교회 다녀도 헛일이란 것이지요. 성령이 귀함은 요 3장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네가 거듭나야 하리라.’하시며, 성령이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데, 성령이 오게 하기 위해 당신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셨지요. 오늘의 주제인,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우리가 영의 사람으로 변하며 자라가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두 가지만 마음에 꼭 담기 바랍니다. 하나는 신앙생활은 우리 삶의 전체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 따로 믿음 따로, 교회 모습 따로 세상 삶 따로의 따로 국밥이 되어선 안 됩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은 억지로, 겨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영의 사람이 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복을 누림을 알고, 주님 은혜 감사하며, 즐거이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거룩한 삶으로, 주위에 믿음의 좋은 본을 보이지요. 믿는 이가 그리 살면, 이단들은 제풀에 겪여 사라지고, 자살률이 낮아지며, 아기 태어남은 늘 것이라 확신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는 것이 복되기 때문이지요. 사순절이 끝나 갑니다. 우리가 영의 사람이 되어 큰복을 누리는 시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신을 돌아 보며, 육신을 따르는 것, 육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영의 사람으로 살기 바랍니다. 우리말에‘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하지요. 사랑의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 앞에 귀한 복을 펼쳐 놓으셨는데, 우리가 외면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영의 사람으로 자라가며, 하나님을‘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평안과 기쁨과 영생의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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