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이 되는 교회, 본이 되는 성도
데살로니가전서 1:2~10
바울의 감사이유
오늘 본문에는 위대한 삶을 살다간 한 스승과 그 스승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제자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데살로니가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아덴에 이르렀을 때, 그는 황급히 떠나야만 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핍박을 못 견디고 세상을 흩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노(老) 사도의 마음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신뢰하던 제자 디모데를 서둘러 데살로니가에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젊은 디모데는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주변의 핍박 속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히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균형 잡힌 교회로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너무 기쁜 나머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의 믿음을 칭찬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 첫 번째 편지가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회상합니다.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마다 너희를 기억함은…(2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고,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기억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대목은 3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함께 한 음성으로 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이 말씀에 보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왜 단순히 믿음, 사랑, 소망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그 앞에 수식어들을 붙였을까요?
감사하게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할 정도로 성경은 믿음에 대해 강조합니다. 중풍병자를 침상 위에 누인 채, 예수님 앞에 나왔던 친구들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 친구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예수님이 계시던 집의 지붕을 뚫어 끈을 매달아 침상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중풍병자가 침상에 매달려 지붕에서 내려오는 순간,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친구들의 믿음이 중풍병자의 치유라고 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비록 바울이 떠났다 할지라도, 데살로니가 교인들 역시 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기적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또한 사랑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남의 집 기와를 뜯어내는 수고를 감당했고, 모든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도 그 집의 기와를 원상복구 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수고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 친구들의 믿음이 한 중풍병자의 병을 고침 받게 했지만,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분명한 동기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랑의 동기로 행하는 행동들이 치유의 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와 헌신에는 이타적인 사랑의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가족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예수님께 이끌기 위해서도 이타적인 자기 희생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개인주의가 일반화 되어 있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웃과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축복된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는 자기희생이나 사랑의 수고를 악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범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6-37절은 다음과 같이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우리는 그 축복된 열매를 얻기 위해 인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다림과 인내하는 일을 어려워합니다만, 인내의 과정 없이 값진 결과물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내의 과정들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만, 그들이 그 모든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자! 오늘 여러분에게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졌던 이러한 신앙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주님으로부터 사데교회 성도들이 받았던 책망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니 죽은 자는 아니십니까?
자, 어떻게 하면 우리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균형 잡힌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의 확신
5절에서 바울은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함께 5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확신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확신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확신 있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오랜 연구 끝에 인류의 특정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의약품을 발명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마도 이 의사는 자신이 발명한 약이 정말 그 질병에 특별한 효과가 있는지를 확신하기 위해 수많은 임상실험을 거칠 것입니다. 수많은 임상실험을 걸쳐 놀랍게도 이 약이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발명가는 1,000명 중의 한 명 정도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부작용이 두려워 이 약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려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자신이 위대한 발명품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발견한 발명품에 먼저 확신을 갖진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인류의 모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내가 믿는 복음에 대한 강한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5절에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을 가리켜 “우리 복음”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 “아니, 복음이면 그냥 복음이지, ‘우리 복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이야기는 위대한 치료제를 발견했어도 아직 그 치료제에 대한 확신을 스스로 갖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바울은 그 무엇보다 복음을 믿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강하고 확신 있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이 태도가 냉담해지고, 핍박의 강도가 더 거세어져도, 바울은 한 번도 자신이 믿고 체험하고 증거하고 있는 복음을 의심하거나, 그 확신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시종일관 복음에 대한 이러한 태도와 확신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덧붙여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확신 있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1~1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자신의 모든 삶을 주님을 위해 바치기로 확신 있게 결단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결단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거나, 다른 사람의 허락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결단하는 삶! 이것이 복음전도자 바울의 결단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자발적 결단은 세상을 복음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확신과 결단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의 복음”이라고 확신 있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만으로 내가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이겨내리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천에 가면 부광감리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섬기시는 김상현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데, 이 분이 2004년에 출석성도 1,500명이던 교회에 부임해서 9년이 지난 지금은 3,500명으로 성장시킨 열심 있는 목사님입니다. 이 분이 「세상 자랑 다 버리고 복음만 자랑하라」는 책에서 이런 내용을 썼습니다.
이 교회는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 120분을 위해 매일 도시락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집집마다 배달한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미용실을 만들어서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이발을 해주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방문하시는 어르신들이 너무 감격스러워 “그래, 교회는 이래야 해!”라고 칭찬을 하신다고 합니다.
또 매주 화요일마다 노인대학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역에 계신 1,600여 명의 어르신들이 매주 나오셔서 노래도 배우고, 게임도 배우고, 식사도 대접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어르신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래, 교회는 이래야 돼!”라고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김상현 목사님의 말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절대사명은 오직 복음전도이다. 복음전도는 교회가 아니면 어느 기관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에게 관심을 갖는 곳, 복음을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은 복사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구령에 대한 열정이 불타야 한다. 구령의 열정 없이도 재산을 나눌 수 있지만, 구령의 열정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환란, 큰 기쁨
이런 사람들에게 임하는 놀라운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쁨입니다. 많은 분들이 맨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기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마음을 터놓고 어려움을 나누고, 정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처음 나왔더니 정말 천사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성도들이 있어서 삶에 활력소가 생기고, 일시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기쁨을 지속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깊이 알고 보니 그렇게 천사처럼 보였던 교우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합니다. 아니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위선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처음에 가졌던 그 뜨거운 열정이 식어지고, 점차 신앙생활이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으로 변합니다. 말씀을 통해 받는 은혜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의 관계도 더 이상 깊어지지 못합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입니까?
복음을 더 깊이 경험해야 하는데, 복음 보다는 주변의 것들에 더 관심을 두어서 그렇습니다. 복음은 한 번 경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경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깊이와 넓이와 폭이 매우 넓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깊이 잠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아! 저게 바다구나. 참 넓다.” 그렇게 감격하고는 은혜의 바다에 발목만 담구고 첨벙거리다 돌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급 한우는 씹으면 씹을수록 깊고 오묘한 맛이 나듯이, 은혜의 물결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왕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막은 겉으로 보면 어두컴컴하고 보잘 것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막제작을 명하실 때 사막의 모래와 먼지, 흙과 열기, 건조한 바람으로부터 성막을 보호하기 위해 성막의 겉 표면을 해달 그러니까 물개가죽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렇고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시시는 분들을 보면 술도 안마시고, 노래방도 안가고, 무슨 재미로 교회에 나가느냐고 빈정거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교회와 신앙생활은 검은 빛을 띤 딱딱한 해달가죽처럼 재미없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막의 지붕은 모두 네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막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덮게는 얼마나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는지 모릅니다.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아진 천사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지성소 안쪽에는 겉과는 다르게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주는 유익이요 기쁨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도 없습니다. 신앙의 초보 단계에서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이러한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기에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여러분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환난이 더욱 많아지는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인생을 살다보면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얼마나 더 많이 있습니까?
어제 어느 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분은 아직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분이신데 곧 결혼을 시켜야 할 과년한 딸을 두고 계신 가장이셨습니다. 그 분이 대화중에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저 직원들 월급주고, 월세와 관리비를 내면 거의 남는 게 없지요. 그런데도 제가 왜 이 사업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일생을 일하던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고 그나마 이 사업이라고 갖고 있지 않으면 제 딸 시집보낼 때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직 이 사회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가 아닙니까? 사돈댁 되시는 분이 제 딸에게 아버지가 무엇 하시느냐고 물었을 때 그나마 아버지가 놀지 않고 남 보기에 번듯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해야 무시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실제로는 남는 것 하나 없어도 이렇게 간신히 사업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참 안타깝지요? 딸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만 실제로는 이것이 현실이고 비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라고 별수 있나요? 우리도 엄연히 이 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도착했을 때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세 안식일에 거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바울을 시기하던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이끌고 바울을 잡기 위해 야손의 집에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발견하지 못하자 유대인들은 야손과 그리스도인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누명을 씌워 고소했습니다. 이 일로 야손과 그리스도인들은 보석금을 주고 풀려났고, 바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밤중에 데살로니가를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어디 바울뿐입니까? 데살로니가에 있던 성도들도 바울과 동일하게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4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너희들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다고 바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려면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환난이 많을수록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 또한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개척교회를 목회하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시느냐고 위로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그분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고, 성도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목사로서 큰 위로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목회하고 있는 이 목회의 현장이 다른 그 어떤 목회 현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행복하고 귀한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복음의 확신을 갖고 있다면, 또 그 복음을 위해 나의 삶을 드리겠노라는 분명한 결단만 서 있다면 성령께서 큰 기쁨으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갈릴리의 험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함을 잃지 않으심으로 잠을 주무실 수 있었던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고, 그녀가 구원받자 이 세상의 음식으로도 줄 수 없는 영적인 기쁨과 만족을 느끼셨던 예수님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성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사도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7절과 8절 말씀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인근 마게도냐와 아가야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원근각처로 흩어져 결국 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내가 복음을 전하고 양육했던 제자들이 내가 떠난 뒤에도 교회를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처럼 사역자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이곳에 앉아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믿음의 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 주변에 있는 교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 사회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복음을 전한다고 물리적인 핍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사회는 복음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인내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각자가 복음의 확신으로 무장되지 않는다면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렸던 데마처럼, 저와 여러분도 십자가를 내려놓고 세상의 넓은 길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복음으로 여러분을 무장시키십시오. 복음을 전하십시오. 아울러 이 세상의 많은 환란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환난 가운데 주어지는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을 본받아 믿는 자의 본이 되십시오. 우리교회가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성도,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어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