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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과제와 제도를 표방한 시조 창작 -1950‧60년대의 문단 지향-
장성진(창원대 교수)
1. 문학적 환경과 시의 경향
근대 이후 시조 작가들은 줄곧 시조를, 전통이라는 통시적 정체성과 국민문학이라는 공시적 폭으로 정립하려고 애썼다. 이를 위해서는 논쟁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계몽적 태도도 곧잘 표방하였다. 앞 시기 시조부흥론은 이러한 태도가 프로문학파와의 대립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예이다. 그렇지만 1950년대의 문학적 상황은 급변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50년대의 출발점에서 발발한 6‧25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이 한국에서 일어난 매우 복잡한 전쟁이었다. 여기에는 한국의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과 지역 확대 의지와 함께 2차대전 이후 전개된 세계적 이념 대립, 세계 지역의 패권의식 등이 두루 개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국인의 선택도 복잡하고 강경하였으며, 여기에 문학인들도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참여하게 되었다. 전쟁이라는 상황의 급박함은 즉각적으로 밀려오는 감정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의미화할 수 있는 장르를 요청하기 마련이이서, 전시문학의 대표적 형태는 다연 시이다. 50년대 시의 성격을 논의하는 데 전쟁 기간과 그 후의 시기를 구분할 필요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전쟁의 종료는 전쟁 원인의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을 더 강하게 확인하는 계기였으며, 방식은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휴전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행위가 중단되었을 뿐 전쟁 상황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50년대 시의 중요한 경향은 두 가지로 분명하게 갈라졌다. 전통 서정의 강화와 모더니즘의 진화가 그것이다. 서정성 짙은 경향의 작가들은 이미 광복 전 《문장》지를 통해서 예술성을 추구하여 왔다. 광복 직후 《청록집》을 발간하여 청록파라는 이름을 얻은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과, 생명파라고 불린 서정주, 유치환 등은 오래 창작 활동을 해 온 인물들이며, 이들은 지속적으로 이 경향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창작의 바탕을 달리 설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란 후의 폐허 속에서 무언가 영원하고 완전한 것에 관심을 두고, 그를 통해 새로운 생명과 감성을 확인하고 회복하려고 하였다. 박목월의 향토성 짙은 민요적 서정과 율격, 조지훈의 선비적 교양과 절제미, 박두진의 기독교적 윤리의 견고한 이상 추구 등은 직접 현실 대응 의지를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정서적 가치를 발견하여 어루만지려는 노력을 잘 보여준다. 특히 자연의 변함없는 질서와 회복력에 기대어 인간의 삶도 그러하기를 소원하는 화해의 미학을 중시하였다. 한편 서정주는 미학적 토대를 역사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역사적 인물과 설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시켜 되살리려는 노력이 그의 초기작에서 한 특징을 이룬다. 이를 통해 생명의 무한한 재생과 불변하는 동질성을 보여 주며, 그것을 민족 정서로 확인하려 한 것이다. 신라의 설화는 그가 찾은 민족문화의 한 원형이었다. 그리고 일제 시기에 만주 체험을 하는 등 민족 의식을 강하게 가졌던 유치환은 삶에 대한 의지와 견고한 자기 점검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자연에 대한 지향을 잘 보여 주었다. 이 시기 모더니즘 경향은 광복 직후인 1948년 ‘신시론’ 동인들의 활동을 계기로 추진되어, 1949년 김수영, 박인환 등이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함으로써 그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이들은 다시 전쟁 기간 중 부산에서 “후반기”라는 명칭을 쓰면서 본격적인 모더니즘론을 내세웠다. 이들은 30년대 모더니즘과의 차별성을 내세웠는데, 이른바 기법으로서 모더니즘에서 시대정신으로서의 모더니즘 운동이었다. 그렇지만 전후 상황에서 이들이 특별히 내세울 시대정신이란 것이 주장처럼 분명할 수는 없었다. 현실은 날카로운 대립을 끝내지 못하였고, 민생은 여전히 어려운 현실에서 도리어 기법으로서의 난해성만 가중시킨 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대립적 문학론은 1960년대로 고스란히 이어지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60년대는 4․19와 5․16이라는 서로 다른 격랑을 겪으면서 출발하였으며, 이는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의 가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대외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리하는 소위 한일협정이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맺어져 커다란 저항은 물론 미해결의 과제를 남겼다. 이렇게 헝클어진 상황을 밀쳐둔 채 ‘조국 근대화’와 ‘민족 주체성’을 내세우면서 한국 사회는 폭발력과 억제력이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초등의 의무교육과 대학 교육이 급격히 팽창함으로써 지식의 질량이 급상승하였으며, 이는 문학을 포함한 문화의 각 영역에서 서로 다른 주장과 표현이 활발해지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60년대 시는 많은 문예지 간행으로도 그 풍성함을 알 수 있다. 이전의 《현대문학》, 《사상계》 등이 계속 간행되는 상황에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같이 뚜렷한 경향을 지닌 문예지가 속속 나왔으며, 시 전문지도 여러 종류 새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작가가 증가하고 문예지가 다양해지면서 시적 지향의 편폭도 넓어졌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두 가지 용어 곧 ‘참여시’와 ‘순수시’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과제를 분리 담당하여 시대적 특징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참여시는 문학이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었다. 김수영을 비롯한 《현대시》 동인들이 대표적이다. 김수영은 모더니즘 경향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그 바탕이 되는 문명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그것은 사회의 민주적 질서와 맞닿아 있었다. 이는 신경림이나 고은 등의 이른바 민중시와도 공통 영역을 가지며, 조태일이나 이성부 같은 이들에게서는 저항성이 더 강화되었다. 이에 비해서 이른바 순수시를 추구한 시인들은 주로 언어와 이미지 같은 미적 성취에 몰입하였다. 자아 탐구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이승훈의 비대상시, 언어의 궁극에서 언어의 의미를 제거하려는 김춘수의 무의미시, 현실 문제를 바탕에 두면서도 언어의 관념화와 도구화를 극복하려고 한 오규원의 날이미지 등이 그러한 시도를 잘 보여준다. 참여시 계열의 작가들이 폭넓은 문학내외적 동지들을 규합해 간 반면, 순수기시계열의 작가들은 비평가와 제자들을 확보하여 이른바 강단문학을 주도해 나갔다. 이 두 경향은 민족시를 내세우는 시조단에 수용과 극복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제시한 셈이다.
2. 시조론의 전개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950년대와 60년대의 시단은 전반적으로 새로움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어 여러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경향은 시조를 중심에 둔 민족, 전통, 정형 등 종래의 쟁점은 부각될 여지를 심하게 축소시켰다. 마치 정형이나 전통 담론은 현란한 문학의 장에서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는 듯하였으며, 시조가 문학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한 인상도 주었다. 이러한 때 이전 시기부터 시조를 창작하던 이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 문제를 끌어오기도 하고, 나름대로 설정한 시대적 과제를 웅변적으로 추구해 나가기도 하였으며, 시조를 통해 현대적 미의식을 더욱 추구하기도 하였으나, 이론화를 통한 주류계 진입은 시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문학 또는 시 전체에서 위치를 설정하려는 노력보다 시조를 독립된 하나의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 제2차 시조부흥론
앞 시기의 시조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밝혔듯이, 1920년대 중반에 시조를 둘러싼 논쟁이 한 차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부정론을 펼치던 카프의 해체로 더 진전이 없었지만, 이는 시조혁신론을 포함하여 시조의 방향 정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50년대에 시조부흥론이 다시 제기되었는데, 논쟁적이기보다는 계몽적이었다. 전쟁 중인 1953년 1월 피난지 부산에서 고두동을 발행인으로 하여 《시조연구》가 간행된 것이 그 계기였다. 이 책은 1회 발간으로 끝났지만 시조에 대한 관심과 방향을 설정하려는 노력을 잘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시조 논문 8편, 작가 12인의 작품 22편, 학생 작품 5편 등이 실려, 시조에 대한 종합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병기의 <역대시조의 작풍>, 이희승의 <시조감상>, 이주환의 <시조창의 개설>, 정병욱의 <삼대시조집의 전승체계 소고> 등 논문이 8평 수록되어 고시조를 대상으로 문학적 음악적 연구에 주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소박한 채 창작에 대한 글도 포함되었다. 고두동의 <시조작 소고>, 이태극의 <시조부흥론> 등이 그것이다. 이태극은 “국민문학 육성과 발전에 전력하여 문학적 일분야인 시조부흥에 호보조를 맞출 수 있어야 하겠다.”고 의의를 천명한 다음, “평시조 기준 형태에 의존한 신시조 창작”을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그 선봉적 역할을 자처하였다. 전체적 지향에서는 20년대의 시조부흥론과 별 차이가 없다. 국민문학, 표준, 선봉 역할 등 계몽적 요소가 진하게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일간지를 통해서 시조에 대한 견해가 가끔씩 제시되었다. 이태극은 1955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에 <문화재건과 시조문학>이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1952년 9월에 국어국문학회가 발족되고 10월에 시조연구회가 조직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 시조문학을 대상으로 한 회와 회지의 첫 번 일”이라고 문화사적 의의를 천명하였다. 같은 해 4월 27일자 경향신문에 국문학자 김동욱은 강력하게 현대시조의 부흥을 부정하였다. “이제 사취(死臭)가 촉비(觸鼻)하듯이 기식(氣息) 엄엄(奄奄)하고 있다. 누가 이를 회사소생(回死蘇生)시킬 것인가......낡은 회고주의가 시조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한 것 자체가 시조문학을 올바른 위치로 정립시키는 마당에 오히려 암적존재이다.”라고 극언하였다. 이듬해인 1956년 6월 《신태양》지에 정병욱은 절충에 가까운 현대시조론을 게재하였다. “평시조형도 응당 그 역사적인 기능을 상실한 오늘날에 있어서는 본격적인 문학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대의 총아인 현대시에게 그 자리를 비켜 주어야 마땅하리라......본격적인 예술문학으로서의 시는 현대시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시조는 제2 예술로 은퇴하여 하나의 道(말하자면 국민적인 교양으로서의)의 경성(境城)으로 그 자리를 옮김으로 말미암아 부흥의 길을 찾음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과 절충의 발언에서, 이 시기 시조에 대한 전망이 엇갈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핵심 취지를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김동욱의 부정론은 고시조의 시대적 문예적 가치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현대는 삶의 바탕이 달라졌기 때문에 시조 물려놓고 다른 시를 써야 한다는 뜻이다. 정병욱의 절충론은 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고시조도 그것이 창작될 당시에는 시대상을 잘 반영하였으므로 보존할 가치가 있고, 현대시조는 하나의 도 즉 일상의 교양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이는 예술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고시조가 사대부들의 생활의 일부로 성장하였듯이, 현대시조도 생활의 일부로 삼자는 주장이다. 시조를 전체적으로 또 통시적으로 살핀 안목으로 현대시조의 앞길을 제시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시조를 생활과 유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시조 작가들에게 거부감을 주었고,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견해가 선택되지 못했지만, 그로 인해 시조가 삶의 현장에서 외면당하는 일도 감내할 수 밖에 없었으며, 오늘날도 별로 다르지 않다. 1958년 《현대문학》의 설문은 다소 부정적 시각에서 기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조의 현대적 의의와 그 부활에 관한 각계 의견”을 물었다. 설문 목적이 “시조는 국문학사상의 하나의 기념물로만 남을 것인가, 현대인의 사상과 감정을 능히 표현할 수 있는 현대시의 한 형식으로도 존속될 수 있을 것인가?”를 알아본다고 한 것인데, 편집자가 정리하기를, “이곳에 제출된 각종 의견은 대체로 시조의 고전적 역사적 의미는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하되, 그 현대적 의의와 부활의 가능성에는 거의 부정적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실제 설문에 대한 답을 다소 왜곡했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시기 시조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얼마간 수세적 처지에 있었으며, 이는 시조의 독자적 영역화를 지향하는 공세적 전환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 문단 강화와 전문지 간행
이 시기 시조문학의 장르 내외적 성격을 결정지은 가장 큰 계기는 시조 전문지 발간이다. 이는 긍정과 부정 양면에 열린 채로 후대의 시조문학 전개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시조 전문지인 《시조문학》은 1960년 6월에 창간되었다. 이병기, 이희승, 조윤제, 양주동 같은 당시 원로 학자들과 주요한, 박종화, 김광섭 같은 문인들을 고문으로 세우고, 조종현과 이태극이 발행과 편집을 맡았는데, 이태극은 1997년까지 줄곧 이 문예지의 발간인으로서 집필은 물론 운영 전반을 주관하였다. 창간 당시 중요 문예지가 《현대문학》과 《자유문학》 정도로서 시 전문지보다 시조 전문지가 먼저 창간되었다는 점은, 창간 주체의 자부심 표명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정체성과 위상에 얼마간 불안감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창간 당시에는 단행본 형태였으며, 1973년 제 32집까지는 줄곧 그 방식을 유지하였다. 1974년 8월에 정기간행물로 등록하였는데, 이는 관계 법령이 바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사이에 시조문단이 성장한 데서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는 몇 차례의 합본 간행을 제외하고는 정기적 간행이 이루어졌다. 통계에 의하면 1998년 겨울호인 129호까지 통틀어 8810편의 시조가 발표되어 매호 70편 정도가 된다. 이 중 부정기간행물 시기인 73년까지 1864편이 발표되어, 10여년 사이에 급격한 양적 증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기존 작가의 작품, 신인의 추천과 등단 작품, 작가가 아닌 사람들의 작품, 기획 작품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편집진의 다양한 의도를 반영하였다. 다시 말해서 시조문학지는 단순히 작품을 창작하고 논의하는 문예지에 그치지 않고, 추천권을 행사하여 작가로 등단시키는 교육과 권력 기능도 가지면서, 여기서 양성된 작가들로 하여금 시조단의 방향을 결정하는 집단적 지향성도 분명히 목적으로 가졌다. 시조문학의 창간 단계에서부터 제일 힘을 기울인 분야는 작가 양성과 저변 확대였다. 이미 창간호에서 “본지는 시조동인 전체의 소유이므로 신인을 대망하여 마지않는다. 널리 강호의 동인을 구하는 바이니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이는 다음 규정에 의하여 누구나 응모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여 “규정”과 “누구나의 응모”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부정기 간행 기간에 3회 추천완료를 실시하여 40여 명의 작가를 배출하였다. 이는 창간 전까지 시조를 발표한 전체 작가보다 많은 숫자이니, 그 양적 증가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등단한 김준, 김제현, 이상범, 서벌, 한춘섭, 김교한, 김동준, 김호길, 윤금초, 김춘랑, 조오현, 유제하, 석성우, 유상덕, 유자효, 유재영 등 많은 작가들은 다음 시기에 시조단의 주역으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친 사람들이다. 이만큼 규모가 크고 지속적이지는 않았지만 60년대에는 많은 시조 동인회가 조직되고 전문지가 간행되었다. 새솔회, 울림회, 청자시조창작동인회와 <청자>, 율동인회와 <율>, 향토시조문학동인회, 영남시조문학회와 <낙강>, 시혼동인회와 <회람동인지>, 시조예술동인회와 <영산강>, 창호지시조문학동인회와 <호지>, 토요동인회와 <삼장시>, 한국시조시협 전남지부의 <녹명>, 현대율동인회와 <현대율>, 현대시조연구회, 전남학생시조협회의 <풍토시>, 부산시조문학회의 <볍씨> 등이 그것이다. 이는 60년대 들어서 시조에 대한 열정과 고민이 대폭 증가했음을 말해 주는 예이다. 50년대의 일간지가 신춘문예 등을 통해 확대시킨 시조의 영역이 전문지로 계승된 것이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지역 단위의 시조회가 결성되었고, 학생이나 젊은층에서 적극 참여한다는 점이 시조의 지속적 발전에 대한 기대를 증가시켰다.
3) 시조론 전개
60년대에는 시조 전문지가 간행되고 시조에 대한 논의는 활발해졌다. 여기서 활발해졌다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이 시조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언급하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뜻이지, 논의의 장이 뜨거웠다는 뜻은 아니다. 시조를 하나의 독립된 갈래로 규정하고,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모이자는 것이 이 단체의 취지였기 때문에, 다른 갈래 또는 다른 경향의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으며 시조론은 내부 담론으로 축소되어갔다. 《시조문학》의 초기, 즉 부정기 간행 기간에 수록된 시조론은 고시조를 대상으로 하여, 작품의 발굴과 소개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다음이 창작 강좌류이며, 비평적 고찰이나 현대문학적 이론을 적용하는 논의는 아직 영성하다. 그것은 1960년대까지 문학 연구의 주대상이 고전문학이었으며, 민족주의 문학론의 영향으로 작품의 발굴과 고증 등 국문학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민족과 전통을 불변의 가치로 내세우는 시조계에서 고시조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시조 창작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바탕에 깔고 있다. 제 5집(1962. 7)에는 이태극의 시조 창작 방법에 대한 글이 실렸는데, 현대시조는 고시조와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너무 지나친 파격을 일삼는 경향들을 삼가야 될 줄 믿는다.”고 하였다. 이어서 “시조는 신시에 아부할 필요도 없고 추종할 필요도 없다. 시조라는 시로 현대시 대열에 보무당당히 진군하여 나아갈 뿐이다.”라고 하여 자유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제 10집(1964. 11)에 실린 이병기의 권두언도 같은 내용이다. “새 형식이라고 마구 자수를 깨뜨려도 좋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요즈음 시조를 보니 신시인지 시조인질 가리기 어려운 것들도 있으니 주의하여야겠다.”는 것이다. 이는 젊은 작가들이 가세하면서 다양한 형식적 시도가 이루어지는 데 대한 우려이다. 이 우려 속에는 다분히 시조가 자유시의 자장 속으로 다가가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고시조의 전범을 중시하자면 시조가 현대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약화되고, 새로운 형식적 요소를 중시하자면 정형성이 약화되어 자유시의 영역으로 접근해 가게 되니, 실제로 시조의 정형성과 현대적 새로움을 동시에 추구하기란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내보인 것이다. 한편 제 5집부터 이우종의 <표현의 다양성>, 유성규의 <현대시조의 특질> 같은 글이 실리면서 비평적 관심이 생기고, 29집에 이르면 김동준의 <시조비평의 논리적 기초> 같은 글이 실려서, 젊은 학자들의 논의가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제하나 김제현의 <현대시조의 문제점>도 그러한 경우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시조의 시조다움이라는 내부적 검토와 시조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계몽적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3. 작품의 지향
전쟁 기간 중 시조 창작은 활발하지 않았다. 견고한 정형의 구조를 통해 완결된 세계를 드러내는 시조가,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와 파편화된 삶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시조 작가들이 현실을 외면했다는 뜻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정형시가 그 본래의 장르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현실 참여의 방향을 모색한 의미도 있다. 이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수동적으로 진행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후의 시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사회적으로 전쟁의 원인과 진행이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결 과제로 남았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시조단도 여러 가지 과제를 설정하는 데 이때의 경험이 계승과 극복의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1) 국민문학의 자장
전쟁 시기에 필요하던 강렬한 애국적 지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간 대표적 작가는 이은상이다. 그는 전쟁 기간 중에도 직설적이고 격정에 찬 애국심을 잘 보여준 사람이다.
바라보라 저 산과 바다 저 하늘과 들판 내 역사와 전설이 고였고 대대로 누려온 곳 조국아!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밖에 또 뉘게 주랴
네게서 내 뼈와 살 받고 그리고 내 생명 길러 내 누구 위해 이 살과 뼈 던져 바치리 조국아!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밖에 또 뉘게 주랴
운명의 발 아래 너는 지금 짓밟히는데 네가 없다면 구구한 일생 무엇하리 조국아!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밖에 또 뉘게 주랴 이은상, <조국아>(1950. 12. 31) 전 8연 중 제 1,2,3연.
전시에 쓴 작품이어서 예술성보다 목적의식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이은상에게 이런 애국심을 표출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전 8연의 종장이 반복된다는 것은 목적성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보여주는 예이다. 이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성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당연히 “우리”로 치환되어야 하며, 그 범위는 바로 국민 또는 민족이다. 일제 시기에 이은상의 작품에서 보이던 섬세한 감성과 치밀한 구조는 강한 주제 표출을 위해 모두 유보되었다. 그에게 시조 창작은 일종의 사명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은상은 특별한 작가이다. 일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나이 들수록 현실에 대한 격정적 태도가 줄어드는데, 이은상은 오히려 시조를 통해 현실을 드러내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애국심의 표출은 특정 시기 또는 특정 작가에 한정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아니 전쟁이 잠시 중단되고 나서도 전사들을 기리거나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작가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 상황이나 작가 개인의 성향이기도 하지만, 역시 시조라는 장르에 대한 관심도 관계가 깊다. 집단적 정서 또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시조의 전통이 현대에도 유효하였기 때문이다.
나도 푯말되어 너랑 같이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드면 노래하고 춤도 추략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속 골속 울어도 보고.
5월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쇠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던 그 용자.
우박같이 퍼붓는 총탄 번개같이 반격하고 최루탄 포연 속을 비호같이 날아갔다 별보다 눈부신 공훈 해요 달을 겨누는 총성
칼날에 목숨 걸고 죽음과 마주쳤다 콧날 치깎는 강추위에 싸웠었다 화톳불보다 뜨거운 펄펄 뛰던 그 정신
방울쇠 한 방이 평화를 불러오고 방울쇠 또 한 방이 빼앗긴 자유 도로 찾고 콩튀듯 방울쇠 겨레행복 부어주다 조종현, <나도 푯말이 되어-국군묘지에서>
조종현은 국가나 시사에 그리 깊은 관심을 가진 작가가 아니다. 그는 17세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20대 초반에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후에는 이태극과 함께 《시조문학》을 창간한 사람이다. 60대에 교장으로 정년하고 80세에 불교 한 종파의 종정으로 취임하였으니, 이러한 경력에 걸맞게 성찰과 사색적인 작품이 많은데, 한편으로는 애국적 격정을 읊은 작품도 적지 않다. 위의 작품은 “국군묘지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전사한 군인들을 애도하려는 의도로 창작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제 1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군의 애국심에 대하여 칭송하는 내용이다. “파란눈”으로 상징되는 젊은이의 용맹성, 총탄 속에서 세운 공훈, 죽음을 마주하고도 뜨겁게 뛰는 정신 등을 병렬로 읊었다. 이러한 용기와 충성심은 맹목에 가깝다. 개인의 선택과 고민, 죽음에 대한 애도 등은 긴 작품의 어디에도 없다. 마지막 연은 그러한 맹목성을 잘 드러낸다. 국군이 쏜 총탄이 평화를 불러오고, 또 쏘면 자유를 되찾고, 총탄을 쏟아부으면 겨레가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없고 오로지 충성심만을 칭송하고 있다. 애국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을지라도, 죽은 자를 대하는 태도로는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았을 때 조국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은 만큼, 그들이 죽었을 때는 조국이 그들을 위로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서정성은 초장에만 있다. 무덤 앞에서 죽은 자를 향해 나도 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하고, 밤이 들면 별들과 함께 노래하고, 철따라 산새와 같이 울고 싶다고도 하였다. 앞서 말한 죽은 자에 대한 태도는 이렇게 화자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다소 해소된다. 아무리 현실의 실제 상황을 나열해도 시조가 서정 갈래라는 점이 확인되는 예이다.
2) 사회의식 표출
시조부흥론쟁이 촉발된 1920년대에, 카프파가 시조를 공격한 근저에는 시조의 사회성에 대한 불신과 폄하가 전제되어 있었다. 물론 시조부흥론자들은 카프파의 극단적 투쟁론이 문학의 예술성과 민족문화를 동시에 허물어뜨린다는 점에 대하여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양극단의 대립은, 역설적으로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 시조시인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를 주제화화는 데 주저하게까지 하였다. 부흥론자들이 신시조, 시대성 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지만, 이는 사회 문제보다 새로운 감성과 소재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광복 이후 시조의 근대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시기에 전쟁이 발발하여 사회 문제는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시조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낮다. 광복 직전의 민족주의 시인들이 쓴 시 또는 옥중시 등에 비해서도 그렇고, 70년대 이후의 작품에 비해서도 그렇다. 몇몇 작가들이 소재 차원에서 4.19를 다루기는 하였으나, 동시대의 다른 사건은 소재로도 거의 선택되지 않을 정도이다. 아마 5.16 이후의 사회상을 다루기에 외적 제약이 있기도 하였을 터이고, 그런 상황에서 시조는 굳이 장르 전통을 거슬러 가면서 사회 문제를 다룰 의지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조 혁신론이 주로 형식과 표현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친 점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중에도 부담 없이 다룰 수 있는 사회 문제는 정치와 관련이 적거나, 가치 판단이 선명한 사건이었다. 그 대표적 주제가 애국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감성적 애국만 내세우지 않고 사회 또는 인간성의 문제로 접근한 작품들은 큰 의미를 지닌다.
깃발! 너는 힘이었다. 일체를 밀고 앞장을 섰다. 오직 승리의 믿음에 항시 넌 높이만 날렸다. 이날도 너 싸우는 자랑 앞에 지구는 떨고 있다.
온몸에 햇빛을 받고 깃발을 부르짖고 있다. 보라, 얼마나 눈부신 절대의 표명인가. 우러러 감은 눈에도 불꽃인 양 뜨거워라.
어느 새벽이드노. 밝혀든 횃불 위에 때묻지 않은 목숨들이 비로소 받들은 깃발은 星霜도 범하지 못한 아아 다함없는 젊음이여. 이호우, <깃발>. 전선문학 1, 1952. 4.
전쟁 중 종군작가단에 참가하여 썼고 군에서 간행한 책에 실렸으니, 전쟁문학의 중심부에 놓인 작품이다. 당연히 격정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렇지만 자유시에서 흔히 보이던 전투 장면이나 극단적 적개심 같은 감정의 유출은 자제되고, “깃발”이라는 상징적 어휘가 전체를 이끌어 간다. 이 점은 작가 이호우의 개인적 성향과 선택에 따른 표현 방식이지만, 시조라는 장르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깃발은 분명히 이념을 상징한다. 그것을 힘이며 절대이며, 때묻지 않은 목숨들이 받든다고 단정하였다. 승리에 대한 확신은 오직 이념의 올바름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시조의 유교적 이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고시조의 조정과 왕실이 국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애국이나 조국이라는 말이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 국가를 이루고 지키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다. 마지막 수의 중장에 나오는 때묻지 않은 목숨과 종장의 다함없는 젊음을 통해서 드러날 뿐이다. 그만큼 사회적 합의라는 현대적 가치가 강조되는 것이다.
무슨 업연(業緣)이기 먼 남의 골육전(骨肉戰)을
생때 같은 목숨값에 아아 던져진 삼불(三弗) 군표(軍票)여
그래도 조국(祖國)의 하늘이 고와 그 못감고 갔을 눈. 이호우, <삼불야(三弗也)>, 현대문학, 1996.1.
시조가 사회 문제의 범위를 국외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중요한 일이다. 베트남 전쟁은 어떤 이유에서든 한국이 개입했기 때문에 남의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인간의 가치와 그를 대하는 사회적 정책을 폭넓게 비판하고 있다. 작품 앞에, “1966년 1월 2일, 중앙일보 越南現地報道. <베트콩>과 최전방에서 싸우는 병사들은 하루에 一弗. 청룡부대 K하사가 <캄란>에 상륙한 지 사흘만에 죽었다. 부대 재무관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K하사의 유해 위에 三弗을 올려 놓고 눈물을 뿌렸다. 사흘 복무했으니 三弗이 나왔던 것이다.” 라고 기록하여 현실 문제임을 부각시켰다. 초장에서는 남의 골육전이라고 분명히 밝혀, 거기에 개입하는 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청우(聽雨)> - “1961년 가을, 미소원폭실험경쟁(美蘇原爆實驗競爭)에 즈음하여 - 에서 더욱 확대된다. 미국과 소련의 핵 경쟁은 한국과 직접 관계가 없지만 국제 문제의 핵심임을 간파하고, 그것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관건이라고 읊었다. “두어도 백년을 채 못할 네나 내가 아닌가”라고 하여 “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바로 국가 곧 강대국이라는 사회이다.
옳아! 장했거니 너 푸르른 불꽃들이여
타고 또 타다 못해 터지고 밟힌 이름들이여
앳되고 여린 가슴이 불러 깨어난 이 조국이여
조국은 하나여도 가슴마다 가진 조국
자다가 불러 봐도 아늑한 이름이여
품안에 안긴 조국을 너희들은 보는가 장응두, <송가(頌歌)> - 4.19에 붙여
이 시기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4.19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조국”이라는 시어가 네 차례나 나오면서, 4.19를 앳된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애국심을 실천한 일로 규정하였다. 그것도 그들이 조국을 품고, 조국을 불러 깨우고, 조국을 품는다는 문장 속에서. 4.19가 큰 의미에서 조국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국가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를 책임진 독재 정권에 항거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조국, 애국 등의 관점에서 청년들을 칭송함으로써 사회 문제나 정치가들에 대한 접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시기 작가들이 사회 문제를 외면했거나, 다른 가치 속에 묻어 버린 경향을 읽을 수 있다.
3) 생명의 본질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의 파탄과 경제적 궁핍, 인구의 도시 집중화로 인한 개인의 존엄성 훼손 등은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 심각하게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나 이향은 사람 관계는 물론 삶과 죽음, 그것의 원천인 의식주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전혀 다르게 바꿔 놓았다. 전래의 한국 농촌 사회는 강력한 혈연과 지연의 공동체였다. 사람이 태어나는 단계에서부터 각종 통과의례를 거치고 마침내 죽은 후에도 여전히 혈연과 지연 공동체의 처리에 의존했었다. 그러나 전쟁과 이주는 사람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대중들의 일시적 관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여기 한 사람이 이제야 잠 들었도다
뼈에 저리도록 인생(人生)을 울었나니
누구도 이러니 저러니 아예 말하지 말라. 이호우, <묘비명(墓碑銘)>
일생을 살고 죽음에 든 사람에게 누구도 무슨 말도 하지 말라고 단언함으로써 생명이 절대적임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초장에서 “한 사람이” “이제 잠들었다”고 함으로써 죽음 앞에서 인간 모든 차이를 초월한 그저 동일한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살아서 가진 차이는 본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장에서는 뼈저리게 인생을 울었다고 하였다. 삶은 근원적으로 슬프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초장에서 보여준 차별 없음이 중장에서는 울음으로 구체화하였으니, 이러한 비관적 인생관은 삶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종장에서는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삶에서 짓고 겪은 모든 상반된 가치가 포함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묻어두려는 휴머니즘이 보인다. 이것이 생명의 절대성이다. 이 시기의 시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지만, 사람의 생명을 시조라는 짧은 형식에 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자칫 직설적 어법의 서정적 거시(擧示)가 되기 쉬운 까닭이다. 그래서 시조가 즐겨 선택하는 소재인 자연에 기대어 간접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많다.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詩도 읊고 싶고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太陽이 그대로라면 地球는 어떨 건가 水素彈 原子彈을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이병기, <냉이꽃>
이병기는 지속적으로 시조의 혁신을 부르짖은 인물이다. 일제 시기에 시조의 이론과 창작을 통해 민족 문학 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복 후에는 문학사 저술을 포함해 문학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창작의 경향에서는 사회 문제와 생명의 근원을 즐겨 찾았다. 인용한 시는 흔하고 작은 냉이꽃을 통해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드러낸 작품이다. 첫 연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일상을 노래하였다. 매일 밤 잠을 자고 매일 낮 밥을 먹어야 육신이 살 수 있으며, 때로 시를 읊어서 정신을 고양켜야 한다. 둘째 수는 매일을 매년으로, 사람을 동식물로 확대하였다. 지난해에 피었던 진달래와 지난 여름 울었던 꾀꼬리는 올해도 피고 우는데, 시간을 격한 사물은 개체로서 새로우면서 종으로서 동일하다. 셋째 수에서는 시선을 다시 우주로 확대하였다. 태양과 지구가 그대로라고 하였다. 우주가 그대로이면 우주에 속한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이 우주에 미증유의 파괴력을 가진 수소탄과 원자탄의 충격을 가하지만, 이 파괴력이 생명체를 어찌할 수는 없다. 작고 보잘것없는 냉이꽃 한 잎에조차 목숨을 넣을 수 없다. 넣을 수 없다는 말은 뺄 수 없음을 포함한다. 그래서 생명은 그 자체로서 무한한 것이지 인공의 그 어떤 사물도 파괴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이란 외적 조건에도 견뎌내는 절대적 힘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본질에 대하여 정밀하게 관찰하고 외경하는 생각이 잘 드러난다. 이 시기 많은 작가들이 유독 매화와 난초를 읊은 것도 이런 의식 다양하게 드러낸 것이다. 매화와 난초는 고시조에서 즐겨 사용하던 소재인데, 현대시조는 꽃의 그 고결함보다 생명력에 의미를 두었다. 가장 일찍 피는 매화의 속성과 향기를 지닌 난초의 속성을 통해 생명의 무한한 가치를 표현한 것이다.
4) 전통에 대한 고민과 미적 형상화
이 시기 시조의 미적 형상화에 대한 관심과 그 성취, 특히 영향력에 대하여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정완영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정완영류”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작시 경향은 후배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고 성취한 시조 미학의 근원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무예에 시조 <해바라기>가 당선되고, 두 해 뒤 조선일보에 <조국(祖國)>이 당선되어 활발한 창작을 이어갔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정완영, <조국(祖國)>
제목은 조국인데 제재는 가얏고이다. 그만큼 작품 전체에 상징성이 들어 있다. 첫 수는 가야금을 안고 줄을 고르는 화자와, 잘 골라진 줄이 손끝에서 애절히 우는 완벽한 일치의 경지를 읊었다. 둘째 수는 가야금 소리가 하늘의 달과도 조응하고 땅에 꽃잎도 피우고, 마침내 정이 가득 담긴 흰 옷을 보여준다. 두말할 필요 없이 흰 옷은 우리 민족이다. 짧은 형식에 천지인(天地人)이 합일하는 상태 즉 완전한 우주가 성립된다. 셋째 수는 통곡을 다 못하여 하늘마저 멍이 들어도 가야금 열두 줄은 애정을 놓지 않는다. 그렇게 진한 애정이지만 청산이 여위여가는, 다시 말해서 조국이 왜소해져가는 슬픔은 어쩌지 못한다. 여기서 왜 가얏고가 조국인지 드러난다. 가얏고는 가야국 멸망의 아픔을 지니고 신라로 건너온 악기이다. 소리가 아름답지만 망국의 회한이 들어있어서 그 소리는 슬프다. 이 작품에서 화자가 품고 울려서 완벽하게 합일할 수 있는 가얏고이지만, 그럴수록 운명처럼 여위어가는 조국의 청산을 확인한다. 이런 점이 정완영 시조의 완결성이자 표현 미학이다. 한편 앞 시기에 전통적 소재와 정서를 시조로 형상화하는 데 크게 공을 들였던 김상옥은 이 시기에 와서 그 경향을 현대화하는 데 실험적 태도를 드러낸다. 1947년에 간행된 그의 시조집 《초적(草笛)》은 전통적 소재와 정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봉숭아>에 드러나는 전통적 가족애와 소박한 정서는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성취하였으며, <누이의 죽음>도 동시대의 가족애적 공감대를 자극하였다. 그런가 하면 <청자부>, <백자부>, <추천>, <옥적> 등 이 시조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은 마치 한시의 악부(樂府)를 시조로 옮겨 놓은 듯이 영사성(詠史性)과 기속성(紀俗性)이 두드러진다. 이 점은 동시대와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상옥 자신은 《초적》 이후 자유시와 동시(童詩)에 공을 들이다가 1973년에 다시 <三行詩六十五篇>이란 시조집을 내었다. 여기에서는 소재가 다양해지지만 여전히 전통적 소재를 다수 활용하였는데, 기법은 현대성을 지향하였다.
접었다 편친 華扇 춤출 때 알아봐라! 日月도 三角山도 파르르 떨고 만다 노잣돈 챙기던 處容, 온데간데 없어라.
으스름 달빛 아래 방울소리 요란하다 人造라 人工이라 요사스런 귀신들아 새벽이 열리기 전에 탈을 벗고 앉아라. 김상옥, <巫歌>
무속적 전통에 대한 불신과 폭로로 일관하였다. 첫째 수에서는 무당이 굿을 할 때 자세히 보면 그 허위를 알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일월과 삼각산을 그려 넣은 부채가 파르르 떤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 무당은 노잣돈이나 챙기고 도망간 처용으로 설정하였다. 처용은 신라에서는 물론 고려와 조선에까지 이어지면서 궁중의 나례(儺禮)를 행할 때 쓰이는 춤과 음악으로서 한국의 전통적 마스크이다. 이 처용을 당대에 거짓 무당으로 환생시킴으로써 전통에 대하여 강하게 부정한다. 둘째 수에서는 귀신들을 향하여 직접 명령한다. 굿을 하는 주체가 정말 무격이 아니라 인조와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탈을 쓴 자들이라고. 그러니 무당은 새벽이 오기 전에 탈을 벗고 나오라고 요구한다. 무당이 인간과 신을 연결하면서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하면서 명령하는 일반적 굿의 형식을 뒤집어, 무당이 귀신 흉내를 낸다고 폭로한 것이다. 이 점은 전통의 묵수가 아니라 전통을 시대적 안목으로 재해석하려는 새로움의 한 모습이다.
5) 일상의 반추
앞 시기에 프로문학파와의 논쟁을 벌일 때 방어적 차원에서도 시조혁신론이 강조되었으며, 이 혁신론의 핵심은 당대적 정서와 현실 생활을 담는다는 것이었다. 또 50년대에 시조부흥론이 제기되었을 때 시조를 옹호하는 쪽은 물론, 시조를 당대의 문학으로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고전문학 전공자들도 하나의 교양시이자 생활시로 시조를 인정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고시조와 달리 현대시조가 일상의 삶에 밀착해야 한다는 요구가 증가하였다. 물론 일상이라고 하는 것의 경계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종잡기 어렵지만, 고시조의 한정된 주제를 생각해 보면 일상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공감될 수 있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슬었나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이영도 <보리고개>
가난한 농가의 봄날 일상적 삶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초장에서 화자는 가난한 집의 살림살이를 매우 상징적으로 포착하였다. 사흘 동안 사용하지 않으니 솥에 녹이 슬었다고 하였다. 주제어는 “녹슮”이지만 의미상 이것은 하나의 자연스런 귀결이고, 핵심은 사흘 동안 솥에 불을 때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땟거리가 없어서 사흘을 굶었다는 뜻이다. 중장은 화자의 독백이다. 보릿고개의 하루는 해가 길다는 말을 통해서 배가 고프더라도 잊을 수 있는 밤을 기다리는 절박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종장에서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감꽃만 줍던 아이이다. 아이가 감꽃을 주워서 먹어 보지만 끝내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고, 솥이 비었음을 뻔히 알면서도 두껑을 한번 열어 본다는 것이다. 초장과 중장에서 솥을 비워두고 보릿고개를 탄식하던 화자가 결국은 굶은 아이 때문에 힘들어 하였음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가난 체험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시기 모두가 가난하였으므로 민족적 감성일 수 있다. 작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감성적 개입을 자제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일상을 직시하였다. 이 점이 고시조에서 항상 가난을 초월적 태도로 대하거나 더욱 수양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관념적 태도를 극복한 현대적 가치로 확인된다.
한 십년 살다 보면 가난도 길이 들어 열두나 다랭이가 줄이 죽죽 금이 가도 당신이 웃는 동안은 청산 위에 달이 뜬다.
이직은 두메산골 덜 익은 가을인데 사랑이 응어리로 터져 오는 밤이 오면 보리를 쌀이라 해도 묻지 않는 양(羊)이여. 이우종, <산처일기(山妻日記)> 전 3 연 중 제 1,3연 (1966)
이우종은 시조문학지에 많은 이론을 게재하고, 특히 시조의 형식적 특성과 내용적 현대성을 강조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비록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사람의 정을 따뜻하게 지니면 된다는 긍정적 태도를 잘 드러내었다. 첫 수는 가난을 극복하는 마음가짐이다. 가뭄으로 논바닥에 금이 가서 한 해 농사를 망치지만, 가난도 어지간히 길이 들어서 견디는 힘이 생겼고, 아내의 웃음으로 청산의 달을 바라볼 여유를 찾는다는 것이다. 셋째 수는 그러한 흉년의 가을이 되어 채 익지 못한 곡식을 추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보리를 쌀이라고 거짓으로 말하면 알면서도 그렇게 긍정하고 살아가는 양같이 순한 아내를 그렸다. 굳이 쌀과 보리를 알거나 모르거나가 중요하지 않고 그 말을 곧이듣고 묻지 않는 사람들의 순박한 인정을 선명하게 그려서 일상의 소중함을 깨우쳤다.
사람이 얼마든지 미천할 수 있다는 걸 알려거든 각설하고 통금위반쯤으로 즉결심판소에 가서 소매치기 들치기 날치기 좀도둑 그들의 왕초인 깡패들과 매춘부와 그들의 끄나풀과 포주와 그밖에 온갖 잡것들이 우글거리는 철창 안 짐승 우리에서 하루쯤 지내 보라.
영하 십 몇 도에 저녁 아침 점심을 굶으면 한약국 파리똥 앉은 천장의 대못 끝에 매달려 한들거리는 하눌타리 빛 바랜 종이 쪽지엔 ‘국수 40원, 계란 20원.......’ 장순하, <배리(背理)>
장순하는 50년대에 등단하여 40년 이상 창작 생활을 이어가면서 다양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조의 전통적 소재인 자연과 역사를 즐겨 활용하였지만, 서술 방식에서는 감성이 절제된 묘사를 중시하여 주지적 경향을 보였다. 1996년의《묵계(黙契)》, 1974년의《백색부(白色賦)》 등에 수록된 작품에서도 이런 경향은 잘 드러난다. 위의 작품은 일상을 소재로 하면서도 비일상적인 면, 곧 숨겨진 일상을 포착한 사설시조이다. 사람이 고양된 삶을 지향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미천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도처에 있는 미천한 삶도 실존이다. 다만 숨겨지고 외면당할 뿐이다. 숨겨진 실상을 체험하는 것도 삶에 대한 탐구이다. 중장의 여러 인간들은 그 실체이다. 통금 위반이라는 간단한 행위로도 철창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실존이다. 둘째 수도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굶주림이다. 하루만 굶어도 한약국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의 하눌타리 약재가 음식으로 보이는 데 이른다. 작자는 화자의 입을 통해 이러한 비일상적 일상을 냉정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있는 삶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60년대의 시조는 일상의 여러 가지 면을 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일상을 예사로 생각하게 하거나 다소 극단적인 가난이나 빗나간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는 소재의 확장을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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