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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간 시행된 477회 무과급제자 3만 2327명 완벽 분석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틀에 비춰본 조선 후기 새롭게 보기
조선의 무과武科는 체제 수호를 위한 완충장치
‘문화’로 읽어낸 조선 후기 역사
조선의 역사는 1392년부터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왕조이지만 식민지배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에 그동안 조선 역사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의 역사가 끝나다보니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은 조선시대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무인의 역사를 통해 상기한 이분법적인 통설에 기반하여 조선 후기역사를 이해하는 큰 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 조선 조정은 무과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는지 그리고 백성들은 합격하더라도 무관이 될 수 없었던 무과에 왜 백성들이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었는지 조선 후기 무과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저자는 무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종종 간과되어왔던 방법론과 이론적인 이슈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1608년부터 1894년 사이 실시된 총 477회의 무과에 대해 현존하는 자료를 기반으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무과와 같은 조선 후기의 특정 제도들이 어떻게 피지배층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그리고 정부의 부정부패와 농민의 몰락과 같은 문제가 계속되는데도 왕조가 지속되는 데 어떻게 공헌했는지를 설명한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유진 Y 박
저자 : 유진 Y. 박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지역학 전공으로 석사,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펜실베니아대Upenn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0년부터 동 대학의 제임스 주진 김 한국학 프로그램 디렉터 보직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Between Dreams and Reality: The Military Examination in Late Chos?n Korea, 1600~1894, A Family of No prominence: The Descendants of Pak Tokhwa and the Birth of Modern Korea, 엮은 책으로 Peace in the East: An Chunggun’s Vision for Asia in the Age of Japanese Imperialism(Yi Tae-Jin, Kirk W. Laesen과 함께 엮음) 등이 있다.
역자 : 유현재
한림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로 문학석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경교대, 서울교대, 서울대, 조선대, 한림대, 펜실베니아대Upenn에서 강의했다. 대표 저작으로 〈조선 후기 주전鑄錢 정책과 재정財政 활용〉(박사학위 논문)과 조선 후기 화폐 및 군문軍門의 운영에 대한 논문이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한글어판 서문
서문
1. 조선 초기 무과제도
고려의 무과와 조선의 건국 / 국가를 위한 군대 /
새로운 무과제도 / 무과급제자들의 추락하는 정치적 위상 /
귀족들의 지속적인 무과 장악 / 소결
2. 벌열 무반의 대두
1592년 이후의 무과 / 무과제도에 대한 조선 후기의 비판 /
벌열 무반가계의 형성 / 왜 전문화specialization인가 /
벌열 무반과 정치 / 소결
3. 향촌 지배층과 무과
영호남 지방의 양반 / 개성의 지배층 /
평안도와 함경도의 유력층 / 소결
4. 피지배층과 무과
혼인관계 / 양자 입양 / 문·무관 소속의 다양성 /
매관매직 / 신성불가침한 귀족 / 소결
5. 피지배층과 무과
17세기 피지배층의 정치 참여에대 한 민담과 법적 조항 근거들 /
《무과방목》을 통해 살펴본 비양반층 과거 응시의 실제 /
피지배층과 조선 후기 사회변동 / 사회적 성공으로 이끄는 무과의 한계 /
피지배층의 열망 / 무인의 기풍과 통속문화 / 소결
결론
주
참고문헌
부록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1402년 2월에 처음 무과가 시행되면서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년시에서는 대체로 경서에 관한 시험(강서講書, 강경講經)과 무술시험을 치렀다. 식년시의 예비단계에서 응시자들은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騎擊) 등 총 여섯 가지 무술 실력을 평가받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응시자들은 무술 실력을 다시 한 번 평가받을 뿐 아니라《경국대전》과 고전에 대한 지식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경전은 사서오경 중 한 권,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한 권, 그 외에 여러 고전에서 한 권씩 선택할 수 있었다. …… 마지막 단계인 전시를 치를 때 응시자들은 임금 앞에서 격구와 보격步擊 등의 기예를 선보여야 했다(40쪽).
15세기에는 두 차례의 무과에서만 100명 남짓 되는 합격자가 배출된 것과는 달리, 16세기 조일전쟁 전까지 무과는 적어도 여섯 차례 이상의 무과를 통해 100명 이상의 급제자를 양산했는데, 모두 16세 기 중반 이후에 시행된 것이었다. …… 당시 개혁적인 신진사대부 관료들은 대부분 문무과가 과하게 시행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왕과 공신들은 이 시험들이 단지 일종의 자격을 조금씩 나누어줌으로써 사람들을 달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이를 장려했으며 실행에 옮겼다(44쪽).
여진족과 왜구가 침입하면서 국가 안보에 위기가 나타났고 이전보다 자주 대규모의 무과를 시행할 필요가 생겼다. 조선 초기의 양인개병제가 붕괴된 이후 무과제도는 필요한 군사를 확보하는 데 임시방편으로 활용되었다. 국가에서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전 시기의 정책에서 벗어나 한량과 서얼, 심지어 노비에게까지 규제를 풀어 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65쪽).
1402년부터 1591년까지는 무과급제자가 7,758명이었지만, 1592년부터 1607년까지는 대략 2만 명에서 4만 명 정도의 응시자들이 무과에 합격했다. 1608년에서 1894년 사이에는 그 수 가 12만 1,623명이나 되었다. 무과급제자의 마지막 숫자는 1592년 이전 조선 초기와 비교할 때 15배 증가한 수치이다. …… 1402년부터 1592년까지 대략 160번 정도의 무과가 치러졌는데, 1592년부터 1894년까지는 적어도 535번이 시행되었다. 대략 15개월에 한 번에서 6개월에 한 번씩으로 시행횟수가 증가한 것이다(73쪽).
조일전쟁 중 정부는 적어도 세 번의 무과를 시행했으며 각각의 무과에서 천 명 이상의 합격자를 양산했다. …… 1593년 왜군에게서 서울을 되찾았을 때부터 1597년 왜군의 공격이 재차 발발하기까지 4년 동안, 궁술시험에서 화살을 과녁에 한 개라도 적중시킨다면 강경을 보지 않고도 무과에 합격할 수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1592년 여름 사간원의 상소에 따르면, 무과에서 요구하는 기준이 너무 낮아 응시자들 중에는 활을 한 번 잡아보지도 않은 자들이나 노인들 혹은 연약한 아이들까지도 있었다고 한다(74쪽).
북쪽 국경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1619년 조정에서는 전국에 승지承旨를 급파해 긴급히 무과를 시행하라는 어명을 전달했다. 결과적으로 1620년에 만 명이 넘는 무과급제자가 양산되었으며, 이에 연원을 둔 ‘만과萬科’라는 용어가 나타나게 되었다(76쪽).
송시열이 소疏를 올리기를, “무인의 만과萬科는 오늘의 난처한 폐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 수효가 2만에 가까운데, 모두 서울로 몰려와 벼슬에 등용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나라를 원망하니, 서울의 쌀이 귀한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며, 농민도 점점 감소되어 가고 있습니다. ……”(83쪽)
숙종은 1676년 무과에서 선발된 1만 7,000여 명의 합격자 중 양반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을 확인한 후, 1686년에 국가를 위해서는 문무를 모두 중요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자식이 여럿 있는 관리들에게는 그 아들 중 일부는 무예를 익히도록 하는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87쪽).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19세기 초에 저술한 《목민심서》에서 당시 무과에서 뚜렷하게 문제가 되었던 다섯 가지 사항, 즉 격축擊逐, 공로空老, 징포徵布, 만과萬科, 무액無額에 대해 밝혔다. …… 격축은 지방민들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서울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인 공로는 지방 출신의 무과급제자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헛되이 늙는 현실을 말한 것이다. 세 번째 징포는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세금으로 부과 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 만과는 필요 인원보다 너무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액은 대리시험을 보는 자들을 고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당시 대리시험의 가장 흔한 형태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무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활쏘기 시험을 대사代射하는 것이었다(87쪽).
1637년에 열린 전시에서의 약 5,500명의 합격자 평균연령을 조사해보니 37.7세였으며, 1784년 열린 전시에서 합격한 2,692명의 평균연령은 34세였다. …… 급제자들의 높은 평균연령은 무과가 확실히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훨씬 유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89쪽).
무과급제자들의 진로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출세한 진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낮은 직급의 관리에 만족해야 한 자들, 그것도 아니면 급제한 사실에 만족해야 했던 자들이다. 두 번째는 미리 정해진 기간 동안의 역을 치르거나 각 군영의 경연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둠으로써 장교가 되고 결국 매우 명예로운 벼슬이나 높은 지위의 관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다. 세 번째는 소위 별천別薦을 통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천거되어 시험을 통과한 뒤에 높은 지위의 문관이나 군영 장군직을 받기 전 일련의 지방관이나 무관직을 받는 자들이다(105쪽).
1620년에 아마도 강력한 정치적 연줄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주 출신 한 명이 국가에서 시행한 무과에 급제한 최초의 북쪽지방 출신이었다. …… 이렇게 규모가 크고 중요한 위치에 있는 평안도의 국경도시에서 17세기 초까지 한 명의 과거급제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과거를 통해 정부 관료로 입문하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다(139쪽).
조선 군사체계의 주안점은 전반적으로 군사의 징집과 훈련보다는 과세제도로 옮겨갔다. 정규군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정부는 전체 군적에 올라 있는 정규군의 숫자를 늘리는 데에 실패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무과는 이러한 변화와 별로 관계가 없었다.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 나중에 정말 무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가와 관계없이 무과는 그들에게 그저 국가에서 인정하는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146쪽).
조선 정부는 일찍이 16세기부터 이전에는 과거 응시가 금지됐던 서얼과 천민 출신도 곡물로 값을 치르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의 신분 상승은 대부분의 노비들에게는 너무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 1583년부터 실시된 납미허통제納米許通制, 즉 서얼이 기부금을 내고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서얼들에게 억울함과 굴욕감을 안겨 주는 이유가 되었다. 오랜 논의 끝에 조선 정부는 1696년 납미허통제를 폐지하여 서얼도 기부금을 내지 않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162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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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무과의 역사, 체제의 완충장치
임란 이후 조정에서는 공로가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전과 달리 무과를 대규모로 시행했고 북쪽 변경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1620년의 무과에서는 만 명이 넘는 합격자를 양산하여 ‘만과萬科’라는 별칭까지 얻고 있었다. 1609년부터 1894년 사이 실시된 무과 가운데 254번의 무과에서는 한번에 100명이 넘는 많은 합격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 합격자들이 실제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해도 합격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과는 더 이상 국방을 위한 순수한 의도로 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관의 지위하락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무과응시에 더욱 열을 올렸고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를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즉, 체제의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조선 조정은 무과를 통해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빈번한 무과의 설행이 관직 권위의 실추 등 또 다른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조정이 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층들은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화적 자산을 일부만 공유함으로써 유연하게 사회위기를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배층들은 독점적으로 향유했던 문화의 일부 특히 과거 합격이라는 중요한 관문 특히 무과의 관문을 피지배층에게 조금씩 양보하며 체제불만이라는 충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통념에 대한 도전
저자는 한국사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했던 보편적인 개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양반’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원문에서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을 ‘귀족aristocracy’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조선의 양반을 귀족으로 지칭하기 위해서는 양반의 성격이 고려시대의 지배층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조선시대 지배층이 어떻게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과와 무인들이 어떤 역할과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통사적으로 설명하면서 간접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양반 특히 문신으로 불리는 이들이 어떤 사회적 제도를 이용하여 특권을 유지하며 세습해 나갔는지 과거科擧, 결혼, 입양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연대기 자료를 포함해 문?무과 급제자의 합격자 명단을 바탕으로 저자의 해박한 보학譜學 지식을 더해 인적 네트워크를 밝히고 그 네트워크가 어떻게 양반을 귀족으로 불리도록 만들었는지 꼼꼼하게 밝히고 있다.
한 사회의 지배층을 ‘귀족’으로 정의할 것인지 여부는 그 사회 전체의 성격규정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제로 한 동안 한국사학계에서 활발하게 검토되지 않았던 거시적인 문제였다. 저자가 조선의 지배층의 호칭에 대한 보인 관심은 500년이나 지속된 조선왕조의 성격규정과 관련된 큰 틀에 대한 거시적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탄탄한 자료 분석으로 뒷받침
저자의 조선 후기의 위기와 무과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탄탄한 한국사 자료 이해에서 그 견고함을 더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한국사 공부를 하여 전산화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대기자료(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를 비롯하여 각종 방목榜目(문?무과 합격자 명단)과 같은 관찬사료뿐만 아니라 지방지, 문집, 호적戶籍, 민담, 소설, 회화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여 그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첫 번째로, 조선시대 전체 무과급제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2,327명의 무과급제자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이러한 자료 구성은 무과급제 연구에 대한 분석 중에서 가장 방대한 샘플이다.
두 번째로, 이전에 간과되었던 법전, 호적戶籍, 읍지, 문집, 방목榜目, 그리고 족보 등무과제도 관련 자료에 대해 보다 비판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해 보았다. 이전 연구에서는 이러한 자료들이 충분히 이용되지 않았거나 심지어 빠지기도 했다.
세 번째, 구전되거나 기록으로 전해지는 자료를 분석해 무과제도가 당시의 서민문화를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고찰했다. 본래 무과의 기능은 국가가 중앙관직의 무관을 뽑기 위한 가장 주요한 수단이었으며, 이는 1894년 무과제도가 폐지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군담소설 등을 분석해 평민들이 말 타기와 활쏘기 같은 기능을 시험하는 무과를,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책속으로 이어서]
무인귀족들은 문과급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보武譜》를 편찬함으로써 자신들을 차별화시켰다. 명망 높은 무반가문 출신의 입신양명한 무과 급제자들을 족보에 기록할 때는 평민 출신뿐 아니라 서얼, 기술직 중인, 지방 향리 출신을 모두 배제했다. 19세기에 5만 명이 넘는 무과급제자 중 현존하는 무과급제자 족보에 기록된 인원은 겨우 3,700명이 조금 넘는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170쪽).
중앙 무인귀족들의 족보는 ‘유장儒將’으로서의 이상을 존중하는 양반사회에서 무인들이 스스로를 양반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유장은 단순히 신체적으로 뛰어나거나 무기를 잘 다루는 전사나 병사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교양 있는 학자여야 했으며,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전략을 짜내는 박식한 전략가여야 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무관의 초상화들에서 모두 갑옷이 아닌 무관복을 입고 있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171쪽).
백성들은 무과급제를 통해 신분상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무과급제 자체만으로 관직을 얻거나 하물며 정치적인 권력을 보장받지는 못했다. 예를 들면, 선전관으로 진출하곤 했던 중앙의 무관가문은 점차 서울에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다수의 급제자들이 급제 자체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군직으로 많게는 수십 년을 복무했다(201쪽).
무과에 지원하는 이들이 다양한 무술기능을 갖추는 것은 실질적으로 문화자본이 체화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자본이 무과응시자에게 체화되고 제도화된 상태가 된다면 이들은 무과에 급제하는 것만으로 제도화된 상태의 문화자본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결국 무과에 급제하는 것은 무과급제자가 국가로부터 문화적인 배경을 인정받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신분도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다주고 있다(205쪽).
새로 급제한 이들을 결속시키는 소속감은 평생 지속되었다. 같은 차수의 과거에 급제한 경우 같은 방목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동방同榜’ 혹은 ‘동년방同年榜’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특별한 일이 생길 경우 모이기도 하고 방목을 다시 간행하기도 하고, 급제한 이후 60년이 지났을 때 ‘회방回榜’이 라고 하여 서로 축하하는 모임을 갖는 등의 행사를 통해, 형제와 같은 결속 감을 유지했다(209쪽).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국가는 무과급제로 수여하는 직위와 무과제도를 피지배층 사이에서 잠재적인 체제 전복적 요소들이 봉기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망으로 사용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직위와 같은 자격 부여가 넘쳐나고 그 결과 가치가 하락하게 되면 이는 구조적으로 불변의 상태structural constant가 된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자격을 얻는 기회가 부르주아와 같은 사회적 지배층의 모든 새로운 세대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동안 다른 계층도 이러한 자격에 접근하는 절대적인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226쪽).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정부는 마지막 무과를 시행했다. …… 이런 불만을 가진 자들이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이렇게 불만이 널리 퍼져 있는 와중에도 국가가 많은 이들이 갖고 있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제한적으로라도 해결해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30쪽).
한국의 근현대사 과도기를 거치며, 박성빈의 신분상승에 대한 바람이 초라하게 마무리된 반면, 그 아들인 박정희는 최고의 국가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대격변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보다 앞서 조선 후기 무과제도가 출세의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231쪽).
첫댓글 좋은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아래 논문이 조선, 특히 초기 무과제도와 무인들에 대해 너무 복잡하지 않게 잘 소개해 놓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무과제도의 상대적 약화가 임진왜란 및 일제강점기의 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되어 소개해봤습니다. 체덕지 사상이 뿌리내리길 기대합니다.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100a8fa6397d1028ffe0bdc3ef48d419&keyword=%EB%AC%B4%EA%B3%BC%EC%A0%9C%EB%8F%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