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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집 모음 스크랩 우암 송시열 유적(1) - 화양서원/암서재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66 12.09.13 19: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암 송시열 유적(1) - 화양서원/암서재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375-3 외

 

우암 송시열 유적은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중심으로 암서재, 읍궁암, 애각사적, 묘소와 신도비 등 송시열과 관련된 사적들로 구성되었다

 

1. 화양서원

화양동과 우암 송시열. 이 두 단어는 충북의 유학을 대표한다. 이 둘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로, 화양동은

바로 조선말의 거유(巨儒) 송시열이 노년을 보내던 곳이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화양동에 칩거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주장했다. 이후 그 제자들이 바로 그곳에 우암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으니, 그것이 곧 화양동서원이다.

 

화양서원은 노론의 집결지였다.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에는 거대한 경제조직으로 변모해 많은 문제점과 피폐성이 들어나, 마침내 고종8년(1871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2년후 이항로, 최익현 등이 항소하여 부활되지만, 순종2년(1908년)에 다시 철폐된다.

 

'연경재전집'과 '화양지'에 의하면, 화양서원은 서원과 삼문인 承三門이 있고, 그 앞에 由義齋와 巨仁齋가 있으며 治堂, 제주기고, 대전판각, 소양재, 항묘고직사, 서원고직, 열천재, 초당이 있으며 부속건물로 창고와 포주간, 목욕소, 마구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문으로 진덕문이 있고, 그 앞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으며 진덕문 안으로 개래문과 이름이 없는 협문 들이 몇동 보인다.

 

폐허된 채 방치되다 1982년 만동묘 발굴에 이어 1997년 3월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서원지를 발굴하여 서원지와 삼문의 유구는 확인 되었고, 하부 각 부속건물지는 유구가 완전히 파괴되어 당시 유구를 확인 할 수 없었다.

초석만 남아 있던 화양서원은 2001년 부터 만동묘와 함께 복원공사를 시작, 그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다. 

 

 

 

 

 삼문.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집.

 

 

 

  

 

  발굴된 초석들과 유물들.

 

 화양서원 묘정비

 

 

2. 암서재

 화양동의 경관 중에도 바위와 물이 절묘하게 건물과 함께 어울어져 있는 곳이 바로 암서재이다.

암서(巖棲)는 암반 위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마치 산새가 바위 속에 둥지를 틀 듯, 화양동의 풍광속에

둥지를 틀 듯, 화양동의 풍광 속에서 깃들여져 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바위 위의 보금자리는 제자인 권상하가 우암이 머물렀던 곳에 서실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암서재 우측 암벽에는 "忠孝節義", "蒼梧雲斷", "武夷山空" 등의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금사담(金沙潭) 암반위의 암서재 원경.

 

 

 

 

 

  

 

 

 

 

 

"忠孝節義"는 명太祖 高皇帝의 필적으로 1913년 정해용이 모각한 것이다.

 

  "蒼梧雲斷", "武夷山空"은 "임금이 묻힌 창오산에 구름이 끊어지고 朱子 계시던 무이산도 비어 있구나"

 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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