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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말씀: 갈라디아서 6:1-10】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말씀나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힘을 모아 서로 협력하면 훨씬 더 쉽다는 말로 협력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속담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중요시하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레나 품앗이 등의 풍습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회규범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집성촌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처럼 거대가족 형태의 마을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종가집 며느리’라는 말도 이러한 거대가족 문화의 특성에서 발생한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이러한 거대가족 개념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마을이 함께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한다!’는 말도 이러한 실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는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서울지역에서는 ‘우리동네키움센터’와 ‘우리동네 공동육아방’이라는 돌봄 지원을 시범 제공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동네 어른들이 골목에 모여 뛰어 놀던 아이들을 돌보아 주던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개인에게 전가되어있던 보육부담을 함께 나눠지며세대 간 소통을 도모하는 이러한 제도는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특히 요즘 다시 조명 받고 있는 두레와 같은 협력 시스템은 우리 사회가안고 있는 인구 감소와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분문도 협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강조하고 있는 교회가 나눠져야 할 짐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교회의 본질에 더 충실 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하는 지에 그 지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가정교회 성도들의 모범적인 삶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라 할지라도 사람인지라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성도들 중에서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면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화내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여 부드러운 말로 대하라는 의미일까요?
성경에서 온유라는 단어는 대부분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성품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온유한 심령으로 대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주님의 마음으로 범죄한 성도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디모데후서 2:25에 보면,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범죄 함은 곧 주님의 지체들에게 범죄 한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을 온유함으로 훈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마음으로 훈계하라는 말씀입니다.
님의 마음으로 훈계하는 이유는 그가 훈계를 받음으로 회개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마음으로 훈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심으로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회개 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철저히 한 영혼을 구원하고,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온유함 보다는 분노로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야고보서 1:20에,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라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질낸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정싸움으로 번져서 상황을 더 악화 시킬 뿐입니다.
오늘 본문 2절 이하에 보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생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부연 설명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범죄한 성도가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때 이 어려움에 대해서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이 그 짐을 나누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짐을 나누어진다는 것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뒷수습에 참여하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의 문제도 함께 지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렇게 문제를 나누어진다고 해서 각 개인의 죄의 문제와 책임이 사라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5절에 보면,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라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 짐을 져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문제를 일으킨 성도에 대해서는 주님의 마음으로 훈계하여 회개하게 하고, 그 일로 인해 발생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공동체 전원이 동참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킨 성도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사고 치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 사고로 인해서 고통 받고 스트레스 받으며, 한편으로는 원망도 쏟아 놓을 수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을 분담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적인 가족입니다.
그러니 함께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서로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인 가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곧 사랑을 의미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3:34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야 하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9:21의 말씀을 통해서도 그 원리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즉, 이러한 모든 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을 곧 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잘 실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을 감찰하여야 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즉각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는 내 유익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지체들의 유익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감찰하였을 때,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자랑할 것이 나와 관련된 것 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동안 내 자신을 속이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가면서 맺는 열매는 모두 어둠의 열매뿐이고 생명의 열매는 찾아 볼 수도 없는데도 어둠의 열매들을 생명의 열매로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스스로 감찰하여 이러한 문제를 발견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업신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의미로 번역된 원어는 코웃음치다, 비웃다, 조롱하다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보면,
적들을 비웃을 때, 이방신들을 조롱할 때, 하나님의 징계를 정면으로 대항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잠언 1:30에 보면,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업신여기다는 단어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어떤 자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육적이고 죄악 된 본성을 신뢰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것, 또는 죄악 된 삶의 태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의 주권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말로만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 태도로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은 삶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를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내가 썩어질 때 수많은 생명이 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밀알이 되어서 이 땅에 심겨지는 일은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배워야 합니다. 신앙은 훈련 받아야 합니다.
배운 만큼 성장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신앙 훈련을 받는 다는 것은 믿음의 선생들이 자신의 믿음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생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우매한 일을 경계하고 오직 하나님이 내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그 말씀을 어떻게 분별해야하는지 겸손한 자세로 배워야 합니다.
교육과 훈련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군대 입대를 하게되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신병 훈련소입니다. 신병 교육소가 아닙니다.
훈련이라는 것은 배운 것을 몸에 익숙해지도록 숙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생방 훈련을 하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유격에 참여하여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훈련을 받는 당시에는 교관에 대한 분노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어엿한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처럼, 신앙의 훈련이 끝나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수준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 받기만 하던 삶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삶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빌립보서 4:15에 보면,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올라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선교비를 지원하는 일로 사도바울의 사역의 짐을 함께 나누어 졌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고통분담이 바로 9절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선을 행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9절에서 말씀하시는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불우이웃을돕는 차원이 아닙니다.
물론 도덕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하나님의뜻이 포함되있습니다. 즉, 한 생명을 살리는 일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적들의 방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심한지 낙심이 되고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견디어 내면 돌이켜보면 그만큼 내가 성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헬스장에서 무거운 역기를 드는 훈련을 할 때, 나의 한계에 도달할 때 근육이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역기를 들 때 열심히 하면 근육이 강해지긴 하지만, 정말 근육이 커지려면 역기를 더 이상 못 들어 올릴 것 같은 경지를 지나서 몇 번 더 들 때에 근육이 커집니다. 의학 서적에도, 역기를 들 때 아주 심한 무게일 때 우리의 몸은 극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위기를 느껴 몸에 호르몬이 나오게 되는데, 그래야 근육이 커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훈련은 각 개인의 신앙을 훈련시켜 믿음의 성장을 이루게 하지만, 믿음의 공동체의 성장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우리들의 대적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듯이 우리들도 기회가있을 때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이어진 10절 말씀은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말씀들의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회가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여기서 언급되는 착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이미 믿음의 가정들에게 복음을 또 전하라는 말일까요? 이 말씀은 디모데후서 4:2과 연계하여 생각할 때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결국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함께 하며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우선 적으로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같이 나가서 전도하라는 말씀으로 국한 시키는것이 아니라복음을 전하기 위한 모든 일에 협력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코로나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예배당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교회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 우주적인 교회의 관점에서 그 교회가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장소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장소에 제한이 있다면,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가정교회 사역원에서는 예배 공간 공유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가정교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배 공간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광주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나눔교회는 2015년 1월 4일, 양지문교회(정만영목사) 본당에서 오후 2시에 예배를 드리며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2월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입당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지금은 또 다른 교회(FollowChurch)가 이 교회에서 예배 공간 공유를 통해 교회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체를 성공시키는 차원을 지나 한 교회를 세우고 성공시키는 사역을 하는 것이 가정교회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서로 짐을 나눠지는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들도 서로 짐을 나누어 져야 합니다.
짐을 나누어진다는 것을 거창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실시해야 합니다.
목장에서 가정에서 내가 나누어져야할 짐이 무엇이 있을까요?
목장 모임 때 각 가정에서 반찬 한 가지씩이라도 해가지고 모여서 모임 장소로 자리를 마련한 가정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고,
각 사역의 분담 차원에서 목장별로 찬양, 전도, 친교, 교육 등등의 담당을정해서 작은 교회로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게 협력하는 일, 또는 목자․목녀 집에서만 모임을 가질 것이 아니라 목원들이 각자의 가정을 오픈하는 것도 함께 짐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오픈하는 것은 단순히 짐을 나누어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2-3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오픈한 가정에임하는 것입니다.
과거 저의 부모님 세대는 목회자의 심방과 구역 모임의 장소를 제공하는 일을 매우 거룩한 일이라 생각하여 사모하였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중에도 섬기는 것을 사모하여 매년 초에 심방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식사 준비하지 말라는 광고가 지속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섬김의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가정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는 남자 장년만 해도 5,000명이 넘는 교회였습니다.
남녀 노소의 인원을 다 합치면 적어도 2만 명이 넘는 매가처치였습니다.
그런데도 가정에 모여서 떡을 떼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6-47에 보면,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각 가정에서 성찬과 애찬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가정교회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아 성도들의 행렬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오픈하여 예배를 드린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가정도 주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삶 공부에 참여하여 은혜를 나누고, 때로는 삶 공부의 인도자가되어서 삶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기쁨을 나누는 것도 짐을 함께 지는 것의 일환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목장에 충실하는 것이 곧 주님께 충성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시는 사랑으로 서로의 짐을 나눠진다는 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 있습니다.
서로 복음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도록 서로를 돌아보아서 어려운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눔의 목적은 한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에 있습니다.
이 일은 혼자 할 때는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함께 나눠지고 하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개인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에 주신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우리가 나누어 질 수 있는 짐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작정하여 함께 짐을 나누어진다면, 결국 여러분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지체의 짐을 나눠짐으로 결과적으로는내 짐이 가벼워지는 선순환이 우리 교회에서, 그리고 목장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서로의 짐을 함께 나눠지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무리 가벼운 짐이라고 해도 함께 나눠지면 더 쉬워집니다.
사랑으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짐으로 목장마다 수많은 생명을 거두는 은혜를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찬양】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C), 은혜(C), 오직 예수뿐이네(D), 나를 받으옵소서(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D), 그 날(사망의 그늘에 앉아)(A), 하루의 은혜(A), 동행(Bb) //
찬송가: 505장 온 세상 위하여,
결단찬양: 밀알 https://youtu.be/fq4xDW8lj1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