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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확대의 시대
序. 역사를 말해 주는 것들
Ⅰ. 시대의 피조물 몽골
1. 몽골 울루스의 탄생
여명(黎明)
어둠에 싸인 고원
늙은 잿빛푸른이리
칭기스에게 요구되었던 것
순박한 유목민(遊牧民)과 마음씨 나쁜 이웃
몽골 울루스의 모습
제1차 대금(對金)전쟁
서쪽으로!
오아시스의 태양 호라즘샤
몽골은 ‘파괴’하지 않았다?
풀냄새 나는 제국(帝國)
2. 세계정복의 길
두려운 후계자 선택
주목할 만한 제2차 대금(對金)전쟁
인구압작전(人口壓作戰)
조작된 미담
거추장스러운 존재를 없엔 삼두체제(三頭體制)
초원의 메트로폴리스
서기국(書記局)의 실태
중앙과 속령(屬領)
화북(華北)재편
세계전략
몽골군 소년부대
최초의 대실패-쿠츄의 남정(南征)
루시의 대지(大地)-바투의 서정(西征)
동방으로부터의 광풍
거대한 조치 울루스
3. 제국의 동요
어지러운 상속인
노웅(老雄) 옫치긴의 야망
두르게네의 도박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들
지나치게 유능해서 일어난 비극(悲劇)
제2차 세계정복계획
4. 유럽과의 만남
프레스타 죤의 전설
동경과 공포의 동방
마슈 파리스의 증언
거인 인노켄티우스 4세
행운의 사나이 칼피니
구육의 답장
불행한 사절단
성왕(聖王) 루이의 좌절
루부릭의 여행
Ⅱ. 세계사의 변모
1. 쿠빌라이의 권력 탈취
쿠빌라이와 프레그
격동(激動)의 해
확집(確執)
몽케의 급서(急逝)
후계의 자격
운명의 도박
장강변(長江邊)
황제 아릭 부케
마이너스 유산
차아다이가의 반란
쿠데타정권
2. 프레그의 선회(旋回)
서정(西征)의 목적
이란과 그 저쪽
암살교단
알보르즈의 눈
바그다드 함락
운명의 선회
미완의 원정
아인 쟈루트의 참패
3. 다극화시대의 개막
사문(査問)
꿈속의 통일 쿠릴타이
제국과 세계의 행방
변모의 시기
세계경영의 시대
Ⅲ. 육지와 바다의 거대제국
1. 세계의 개조자
제국의 2중구조화
지나치게 거대해진 부담(負擔)
노인 황제 쿠빌라이
대통합계획
여름과 겨울의 순행(巡行)수도권
쿠빌라이 왕조의 3대․2소 왕국
세계제국의 수도
바다와 육지에로의 기점(起點)
위대한 텡그리의 나라
2. 초원의 동요
풍운아 바라크
탈라스회맹(會盟)의 실상
우구데이가의 복권(復權)
회맹(會盟)의 의미
바라크의 꿈
아바가의 함정
어지러운 중앙아시아
새로운 도식(圖式)
3. 대하(大河)의 나라로
학경(郝經)의 안서(雁書)
이단(李王亶)의 ‘反亂’
사변(事變)의 파문
변하는 화북(華北)
남송작전(南宋作戰)의 방침
양번(襄樊)포위작전
전쟁의 시스템화
서쪽에서 온 신병기(新兵器)
여문환(呂文煥)의 선택
대진공(大進攻)
남송접수(南宋接收)
4. 해상발전의 노정(路程)
바다의 시대로
한반도의 비극
쿠빌라이와 왕전(王倎)
몽골에 의한 ‘왕정복고(王政復古)’
지나친 ‘국서(國書)’해석
제1차 일본원정의 의미
제2차 일본원정의 참모습
몽골습래여파(蒙古襲來餘波)
유라시아 대교역권(大交易圈)
Ⅳ. 느슨해진 대통합
1. 내륙쟁란에서 동서화합으로
첫번째의 동요(動搖)
나얀의 거병(擧兵)
쿠빌라이 최후의 출진(出陣)
카이두의 초초함
사상최대의 몽골전투
동서화합(東西和合)
두아의 중앙아시아 찬탈(簒奪)
‘황태후(皇太后)’ 부르간의 책동(策動)
카이샨의 탈권(奪權)
‘팍스 몽골리카’의 도래(到來)
왕조에 드리우는 그림자
2. 제국의 경제시스템
기업가들의 무리
‘올톡’이 맺어준 유라시아 대교역권(大交易圈)
은(銀)이 순환하고 세계는 돈다
의외의 문서(文書)중심행정
대카한에 의한 ‘대통령제’
연회정치(宴會政治)
1. 천력(天曆)의 내란
어리석은 황제 이순 테무르의 죽음
카이샨의 남은 아들들
양경내전(兩京內戰)
형제 ‘중도(中都)’에서 싸우다
잃어버린 대통합(大統合)
2. 기울어 가는 몽골세계
3대 울루스의 동요(動搖)
순제(順帝) 토곤 테무르의 말세(末世)
강남결전(江南決戰)의 패자(覇者)
지는 해
3. 몽골의 후예들
아시아에 남겨진 4개의 제국
암흑의 상속인 ‘명(明)’제국
북(北)으로 돌아간 몽골인들
청조(淸朝)를 살아간 몽골
근현대의 회오리 바람
역사라는 이름의 꾸려나감
뒷글
군사확대의 시대
序. 역사를 말해 주는 것들
토프카프의 집사(集史)
튀르크공화국의 이스탄불. 오스만조의 고도(故都)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끼여 있는 보스포라스해협에
석양이 진다. 그 옛 시가지의 토프카프 사라이(궁전)는 오스만조의 고궁이다.
많은 관광객으로 혼잡한 한쪽에 석조의 극히 조촐한 도서관이 있다. 여기만은 방문하는 사람도 없이 쥐죽은 듯
고요하다. 오스만조의 6백년 동안에 수집된 수많은 서적․고사본이 잠들어 있다.
몽골제국의 연구에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최고․최량의 고서본이 여기에 있다.
라시드 압딘의 집사(集史).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이 역사서는 인류사상, 최대의 역사서라고 해도 좋다.
집사는 이란방면의 몽골정권인 ‘프레그 울루스’, 속칭 일한국에서 만들어졌다.
1295년, 군사쿠데타로 제7대 프레그 울루스 군주(칸)가 된 ‘가잔’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국가의 근본개조와
행정개혁에 나섰다.
그 개혁을 진행한 바질 즉 재상(宰相)으로 지명된 자가 자신의 시의(侍醫)이기도 하였던 라시드 압딘이다.
서부 이란의 하마단출신인 라시드는 실은 유대인이었다고도 한다.
가잔과 라시드는 프레그 울루스의 재흥을 위해 힘을 합쳐 매진함과 동시에 몽골제국의 역사편찬에도 뛰어
들었다.
그 목적은 몇 가지 있었다. 이미 칭기스의 창업이래 9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 갔고, 몽골은 유라시아의 동서에
걸친, 문자그대로의 세계제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몽골들 특히 프레그와 함께 ‘대서정(大西征)’의 군대로 ‘이란의 땅’에 도착했던 몽골들은 자신들
의 유래나 역사에 관해서 점차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도대체 어떠한 인간일까? 왜 ‘이란의 땅’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동방의 종주국인 ‘大元 울루스’를 비롯
하여 그 땅의 울루스에 있는 몽골들과 어떠한 인연 혹은 혈맥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가잔은 자신이 즉위하기 바로 전 해에 죽은 쿠빌라이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었다. 쿠빌라이가 만든 ‘대원
울루스’를 모범으로 하여, 강고한 국가와 정권을 자신도 만들려 하였다.
이러한 의기를 불태운 가잔은 ‘세계’에 분산된 ‘몽골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몽골이라는 것의 자각을
일깨우려고 했다. 특히 자신의 신하인 이란방면의 몽골들에 대해서는 현재의 영광과 부귀의 근본은 직접적으
로는 프레그와 그 혈통을 중심으로 한 결속에 있는 것을 알리려고 했다.
가잔이 라시드에게 요구했던 것은 그러한 ‘몽골사’의 편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가잔의 정치적 입장과
그 자신의 견해가 짙게 투영되어있다.
가잔은 단지 편찬의 명령자에 머물지 않았다. 반이상이 가잔 자신이 저자이며 편찬자였다.
편찬에 있어서는 몽골 제실(帝室)공유의 알탄 뎊 테르 즉 몽골어로 금괘(金櫃)의 비책(秘冊)이라는
비밀의 사서(史書)도 사용되었다.
‘대원 울루스’에서 ‘이란의 땅’으로 보내진 프라도 승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러 정보제공자도 협력했다.
몽골 각 부족에 전해진 ‘구사(舊辭)’나 계보 등도, 서전(書傳)과 구전(口傳)을 가리지 않고 이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층 더 핵심부분에 관해서는 몽골의 여러 일이나 비사(秘事)를 숙지하고 있던 가잔 자신의
구술(口述)에 기초한 곳이 많았다고 라시드는 기록한다.
편찬장관이 되었던 라시드는 간부들에게 맡겨두려고 하지 않고, 극히 바쁜 서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새벽에
이르도록 붓을 잡고, 때로는 이동할 때의 말등에서도 구상을 가다듬는 등으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 주인인
가잔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단의 완성을 보기 전인 1304년, 가잔은 격무로 인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곧이어 가잔의 후계자가 된 그 동생인 올제이투에게 봉정(奉呈)된 사서는 가잔의 역사 혹은 가잔의 행복한
역사라고 이름 지워지는 ‘몽골사’였다.
실은 당시의 정세를 냉정하게 조망하면 가잔이 이 ‘몽골사’의 편찬을 생각해 낸 때 프레그 울루스라는 유목민의
연합체는 엉성해져 있었다. 국고는 거의 비었고, 유목기사들을 계속 머물게 할만한 경제력도, 국가재정도 고갈
상태였다. 울루스의 창시자 프레그가 휘하의 서정군을 데리고 1260년 ‘이란의 땅’에 사실상의 정권을 수립한 이래,
이렇다 할 확실한 국가기구를 정비하지 않고, 되어 가는 대로 흘러온 것의 대가가, 번번히 그리고 심한 내분과
상승효과를 이루어, 신군주 가잔의 앞에 던져진 것이었다.
그러한 국가와 정권이 이어져 갈 것인가. 끓어질 것인가라는 때에, 이전의 부족연합의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가잔은 ‘역사편찬사업’에 나섰다.
단순한 ‘문화사업’은 아무래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필요에 따라서 ‘몽골사’의 편찬을 기획했다. 오히려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야말로 이루어진 역사편찬이었다. 그 의미에서 한없이 정치색이 진한 ‘국가정책’이었다.
게다가 그것에는 또 한가지 가잔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가잔의 입장에서는 그때까지의 프레그 울루스의
왕위계승은 지나치게 극히 복잡했다.
가잔의 친조부인 아바가(제2대), 부친인 알군(제4대)의 사후(死後)는 각각 동생에게 왕통이 옮겨졌다.
가잔의 자신이 ‘반란’을 일으켜 넘어뜨린 제6대 바이두는 완전한 서류(庶流)의 인물이었다. 가잔은 프레그-아바가-
알군-가잔의 직계의 장자에 의한 왕통이야말로 프레그 울루스의 정통이라고 선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논리에 의거해 ‘프레그 울루스’의 부분을 편찬케 한 것이다. 원래 가잔 자신은 쿠데타에 의한, 부당한
찬탈자가 아니라 본래 당연하고 정당한 왕위이며 ‘적통’ 가잔의 아래에서 이제 추진되려고 하는 국가개조야 말로
프레그 울루스를 재흥시킬 성스러운 공훈이라고 주장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가잔이 타계하고 ‘몽골사’가 완성되려는 동안에 제국과 세계의 정세는 크게 격심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몽골제국을 흔든 중앙아시아의 분란은 카이두의 죽음을 경계로 1303년부터 4년에 걸쳐 급속하게 진정되고 몽골
의 동서는 완전히 화합했다.
유라시아세계는 다시 하나가 된 몽골을 중심으로 원만한 평화상태가 되었다. 인류사상 전에 없는 거대한 지평이
여기에 펼쳐져 있었다.
몽골의 눈으로 보면, ‘세계’는 몽골의 손아귀에 장악된 듯한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제국과 세계정세의 현저한 변화를 받아, 제8대 프레그 울루스 군주인 올제이투는 더욱이 여기에 ‘몽골사’
의 이외에 당시의 ‘세계’의 주요한 ‘종족’의 역사도 추가편찬 하도록 라시드 압딘에게 의뢰했다.
가잔시대와 마찬가지로 재상의 임무를 맡고 있던 라시드는 그 땅의 학자만이 아니라 히타이(중국)나 케시미르
등지에서 불승(佛僧) 이외에 크리스트교도, 유대인학자 등도 간부에 추가했다.
조상 아담에게서 시작하는 히브리의 예언자들과 고대유대인의 역사, 고대 페르시아의 왕조사, 예언자 무함마드
에게 시작하는 칼리프들의 역사 및 몽골이 멸한 호라즘샤 왕조나 이스마일교단에 이르기까지의 이슬람 여러
왕조의 역사, 전설의 오구즈한에게서 시작하는 튀르크족의 역사, 역시 전설의 조상 ‘반고(盤古)’에게서 시작하여
남송(南宋)의 마지막 소제(少帝)에 이르는 히타이(중국) 여러 왕조의 역사 나아가서는 ‘프랑크’라는 이름의 유럽
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석가와 불교의 역사를 포함한 인도사도 만들어졌다.
여기에 가잔의 ‘몽골사’를 중핵으로 갖가지 ‘세계’ 여러지역의 역사를 모은 일대 사서가 출현했다.
그것은 몽골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를 이미 당연한 전제로 하여 여기에 이른 ‘세계의 역사’를 사상처음으로
체계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가잔에 의한 ‘몽골사’와 올제이투에 의한 ‘세계사’의 사이에는 몽골제국 그 자체의 심대한 변화가 배경
으로 존재한다. 바로 ‘세계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헤지라력 710년, 즉 1310년 내지 1311년, 올제이투
에게 바쳐진 확대 ‘신판’은 ‘제사(諸史)를 모은 것’이라는 의미로 쟈미 압타 바리프 즉 집사(集史)로 이름
지워졌다.
집사는 당시의 권력자인 몽골이 페르시아어로 만들게 한 거대한 ‘몽골정사(正史)’이다.
그것과 동시에 14세기초에 이르기까지의 유라시아 여러 지역에 관한 종합사(綜合史)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빠뜨
려서는 안될 것은 그 한편으로 프레그 울루스와 그 재편사업에 관해서 가잔과 라시드라는 두사람의 당사자 자신
이 말하는, 둘도 없는 완전 동시대사라는 측면도 함께 가진 점이다.
페르시아어의 사서라고는 하지만 실은 수많은 몽골어, 튀르크어 용어에 가득하고, 더욱이는 한어(漢語), 티벳어,
산스크리트, 라틴어 등에서 유래하는 단어마저도 전해지고 있다.
만약 집사가 없다면 몽골제국사는 말할 수 없다. 그것뿐일까? 중앙유라시아에서 전개한 튀르크․몽골계의
유목민들의 역사도 재구성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이슬람사․이란사도 실은 큰 사료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집사는 인류사상, 전에 없던 사서였다.
그리고 그 후에도 실은 그 규모와 시야의 광대함,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 자료가 가진 근본성에 있어서 이것에
필적할 역사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을까? 바로 몽골이라는 일찍이 없던 정권과 시대
였기 때문이야말로 출현한 미증유의 일대 역사편찬물이었다.
그것은 또한 몽골이 ‘세계’라는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던 흔들림 없는 증거가 된다.
인류의 역사는 몽골시대에 이르러 분명히 그 이름다운 그대로의 ‘세계사’를 가졌다. 조촐한 본서도 또한 이 집사
에 큰 도움을 받으며 시간을 초월한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몽골과 그 시대라는 인류사상 드물게 보인 ‘시간’
으로의 여행이다.
콜럼버스의 꿈
1492년 콜럼버스는 ‘구란칸’ 즉 대카한인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동방의 대제국으로 향해 서방항해로 나섰다.
그것이, 보통 말해지는 것처럼 ‘지팡코’나 ‘인도’를 찾아 출항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항해일지의 첫머리를
보면 바로 알게된다.
그는 에스파니아의 여왕 이사벨라로부터 아득한 저쪽, 카타이의 땅에 있는 대카한에 전할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1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의 인물이 보고들은 동방여행기 일 밀리오네 즉 백만(百萬)의
서(書)의 1485년판이었다.
지금 전해진 그 책 가운데에는 곳곳에 콜럼버스 자신에 의해 덧붙여 써진 것이 보인다.
특히 ‘칸 바리크’라는 곳에는 그 좌측의 여백에 주의표시, 그리고 그 아래에는 ‘넘쳐나는 상품’이라는 메모가 덧붙
여져 있다. 칸 바리크 그것은 제도(帝都) 즉 ‘대도(大都)’이다.
마르코 폴로라는 인물이 과연 정말로 실재했을까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베네치아 공문서관에는 확실히 마르코 폴로의 ‘유산문서’가 남아있다. 그것에 의하면 고만고만한 자산가였다.
그러나 확실하게 14세기에 존재한 이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의 인간이 유명한 여행기의 마르코 폴로와 동일인물인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당시의 북이탈리아에는 폴로를 성(姓)으로 내세우는 집안은 몇 개나 있었다고 말해진다.
마르코라는 이름도 극히 흔한 이름이다. ‘마르코 폴로’는 한사람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백만의 서의 가운데에는 다른 확실한 역사문헌으로부터 흔들림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사나 서술
이 몇 개나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발걸음 빠른사람만으로 구성한, 필시 엄정함을 가진 특수부대의 지휘관의
이름이 스스럼없이 이야기되고 있다.
대카한인 쿠빌라이의 신변에 붙어 쫓아다니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다. 그 인물의 존재와 직무는
극히 최근 어느 페르시아어의 연대기(年代記)와 한문기록의 조합에 의해 막 증명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르코 폴로’라는 한사람의 인물이 실재했던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그 아버지와 숙부와 함께 인도양상의 루트로 귀국한 때의 기술이다. ‘대원
울루스’의 쿠빌라이의 아래에서 프레그 울루스로 시집가는 몽골 공녀(公女)를 ‘이란의 땅’으로 데리고 가라고
쿠빌라이로부터 위임받았다고 ‘마르코 폴로’는 말한다.
그 선단(船團)에 탄 정사(正使) 1명, 부사(副使) 2명의 이름은 라시드의 집사에 버금가는 페르시아어의 사서
밧사프사가 기록한 3명의 이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전후의 사정도 거의 부합한다. 다른 것은 단지 한가지 ‘마르코 폴로’일가의 모습만이 밧사프사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백만의 서의 가운데 꽤 나오고 있다. 기사가 어떻게든 정확하고 상세하더라도, 아니 상세하면
상세할수록 중요한 ‘마르코 폴로’들의 모습은 뒤로 제쳐지고, 흐릿하게 보여 잡힐듯하면서 아무래도 잡히지 않는다.
‘마르코 폴로 밀정설’ 특히 교황이 동방탐사를 위해 파견한 밀정이라고 하는 설이 나와 있는 이유이다.
결국 백만의 서의 저자 ‘마르크 폴로’는 존재증명이 확실한 인물로써는 집사나 원사(元史)를 비롯한
정식적인 역사문헌 속에서 전혀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근본이 되는 체험이나 지식을 가진 인물이 단수 혹은 복수, 어쨌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어떤 인물로,
어떠한 이름이었던가는 베일에 싸여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 칭하는 사본은 유럽 각지에서 갖가지 다른판으로 존재한다. 우리들이 현재 읽고 있는
백만의 서는 금세기의 문헌연구자와 역사연구자가 각 사본에서 뽑아 조합해 만든 교정본이며, 그 역주본이다.
“꼭 이러했을 것이다”라는 상정아래에서 만들어진 ‘완본(完本)’이기에 그러한 ‘책’이 역사상 정말로 존재했다는
확정은 없다.
‘마르코 폴로’는 그 인물도, 그 여행기도 안개속에 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영향력은 별개의 것이다.
14세기 후반 이후의 유럽에서는 ‘마르코 폴로’는 존재했다.
콜럼버스가 출항할 때는 이미 쿠빌라이가 건설한 제국 ‘대원 울루스’는 지상에서 소멸하고 없었다.
그러나 필시는 마르코 폴로와 그 일가에 가탁된 복수의 유럽인의 체험이나 지식은 백만의 서가 되어, 이미
많은 유럽의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그것은 15세기에 구텐베르크에 의해 개발된 활판인쇄에 힘입은 바
크다. 백만의 서는 그러한 최초기의 베스트셀러였다.
그 중에서도 유럽인의 독자를 매료한 것은 대도(大都)를 중심으로 이야기 된 동방의 부였으리라. 백만의 서
가운데 뛰어나게 상세한, 정채(精彩)하게 풍부한 것은 정연한 통제미와 놀랄만한 번화함에 가득찬 동방의 거대
도시 ‘대도’에 관한 부분이다. 백만의 서라는 제목에 부끄럽지 않은 거대한 규모의 이야기가 빈번히 나온
것도 대도에 관한 부분이 많다.
동서가 연결된 몽골시대, 몽골의 치하에서 공전의 번영을 보인 동방에 비교하여 유럽은 조촐한 존재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유럽의 사람들은 다투어 ‘마르코 폴로’를 읽고, 그는 ‘실재’가 되었다. 몽골시대는 지나갔
어도, 동방의 부의 매력은 현실의 것으로써 유럽의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콜럼버스도 또 ‘마르코 폴로’가 말
하는 이야기를 믿었다. 그는 대카한의 나라와 무역루트를 개척하려고 출범했다. 동경과 시대를 초월한 기억이
인간을 끌어 움직인 것이다.
현실에는 쿠빌라이의 제국이 해체한 후 그 제도는 ‘베이징(北京)’이라고 이름을 고쳐, 명제국의 수도가 되어 계속
이어졌다. 그렇지만 물론 콜럼버스는 그것을 알 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신에 거대한 다른 선물을 유럽에
가져오게 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이미 긴 역사를 가지고 독자의 세계를 영위하고는 있었다고는 하지만, 유럽인의 눈으로 본
다면 풍부하고 거대한 아메리카대륙이 거의 손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인 채로 그들 앞에 있었다.
그래서 인류사상으로도 최대판의 ‘정복’이 개시되었다. 유럽은 너무나 야만적이고 행운이었다. 행운으로는 너무
지나친 행운이었다.
유라시아의 변경 유럽이 아메리카를 얻었을 때 인류사는 크고 격심하게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유럽의 침략’
은 콜럼버스의 꿈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는 대카한의 나라를 찾으려고 해서, 아메리카를 얻었다. 단지 콜럼버스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겨우 다다른 카리브해의 섬들을 대카한의 나라의 일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유라시아를 하나로 한 몽골과 그 시대. 그 기억과 유산이 좋든싫든, 지구상을 하나로 하는 다른 시대를 개척케했다.
역사는 종종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결과를, 커다란 부정할 수 없는 필연으로 한다.
발트리드 생애의 도전
19세기의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러시아에서 위대한 한사람의 역사가가 나타났다. 그 이름은 발트리드이다.
그는 페르시아어의 문헌을 중심으로 아라비아어․튀르크어 등 갖가지 언어로 기록된 원전의 근본사료에서
아시아사를 연구했다.
특히 유라시아의 안쪽에서의 역사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극명하게 재구성하려고 했다.
보통이 아닌 능력과 센스를 가지고 보통이 아닌 노력과 연찬(硏鑽)을 쌓아갔다. 그것은 그때까지 있었던 역사
인식에 대한 근본부터의 의문이며, 근본부터의 도전이었다.
와시리 우라디미르비치 발트리드. 1869년에 태어나, 1930년에 타계한 그의 인생은 연구에서 연구로의 날들이
었다. 특히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1901년. 뻬테르부르그대학 교수가 되고부터는 완전히 그것만으로 매진했다.
혁명도, 소련의 성립도 그의 인생을 바꾸지 못했다.
연구는 어떠하던지간에 몽골시대가 중심이 되었다. 사료가 많은 점, 동서고금이 조망되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몽골시대가 다른 것을 압도한 중요한 시대이라는 점 등 때문이었다.
몽골침입시대의 투르키스탄은 이러한 걸작의 하나이다. 4백 편을 넘는 그의 방대한 저작은 러시아어의
전집10권으로 집대성되어 독자를 압도한다.
그의 연구에 의해 그때까지 확실한 근거와 일관된 맥락으로 거의 다루어질 수 없었던 중앙 아시아․내륙아시아
세계의 역사가 훌륭하게 부상했다.
게다가 그때까지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같이 생각되어 오던 내륙의 세계와 서아시아․중동․인도․서북유라시아
등의 ‘문명권’의 역사가 사실은 불가분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라시아의
내륙세계가 인류사의 위에서도 열쇠가 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 그의 저작을 읽는 사람은 부인하지 않고
엄연한 사실로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것은 동시에 오랜동안 ‘세계사’라는 것을 성립시켰던 자는 도대체
누구였던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는 발트리드가 태어난 무렵 시대는 ‘제국주의’열강에 의한 아시아 분할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아시아내측
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유목민들은, 변두리적인 존재였다. 그 때문에 내륙세계나 유목민들이 역사상에
이루어 왔던 의미나 역할도 변두리화하여 다루었다.
그러한 이미지는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잡고서 놓지 않았다. 사상가․이론가 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헤겔은 말할 것도 없고, 랑케, 마르크스, 슈펭글러 등의 세계와 세계사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그들은 유럽을 선두로 한 ‘문명세계’의 우월을 소박하게 믿고, 그 체계에 속하지 않는 내용에 관해서는 이해할
의지도 방법도 없었던 것 같다.
발트리드는 그러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던 것 같다. 그는 엄밀 극히 순수한 원전연구에 의해 그러한
‘통념’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해인가를 결과로써 나타낸다.
사람들의 인식을 뿌리에서부터 바꾸었다. 아니 변화시켰음에 틀림없다.
이 무렵 내륙아시아의 각지에서 출토문서나 신발견의 자료가 속속 나타나, 유럽의 학계에서는 일종의 붐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연구자의 속에는 러시아의 라드로프, 프랑스의 샤반느, 조금후는 샤반느의 후계자 뻴리오
등의 두드리지게 우수한 거장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아시아사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초
의 유럽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그러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말하면, 발트리드야말로, 다른사람을 훨씬 초월한 최고의 역사가였다.
그는 중앙아시아사 뿐만아니라 인류사와 세계사에 없어서는 안될 큰 ‘기둥’을 만들었다. 그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세계의 가치관에서 연결된 이미지화 된 역사상이 아니라 유라시아를 완전히 있는 그대로 균등하게
다루어, 그 위에서 장대한 이야기로써 서술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발트리드는 수수하다고 하면 완전히 수수한 원전연구의 세계로 오로지 그 몸을 던졌다. 경조부박(輕佻浮薄)한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연구를 통해서 후세의 인간에 큰 선물을 남겨 주었다. 그의 연구가 없으면
지금 보통 생각되고 있는 세계사의 모습은 실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렇게 의식하고 있는지 여부는 따로
하고, 발트리드가 생애를 걸고 갈고닦은 성과에 의지하고 있다.
시대라는 이름의 그 무엇
13세기, 몽골은 인류사상에서 최대의 판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14세기의 후반까지 약 1세기반정도의 동안 세계와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 인류와 세계의 추이는 이 ‘몽골
시대’에서 근본부터 크게 변했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세계에서 흥망한 유목국가, 초원제국의 정점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몽골시대의 후반에는
농경세계를 취해 해양세계에도 진출하여 전에 없던 육지와 바다의 거대국가가 되었다. 몽골을 중심으로 유라시
아세계는 사상 처음으로 느슨하지만 동서에 넓게 연결되었다.
세계와 세계사는 이때 처음으로, 전체로써 정리된 모습으로 조망되는 하나의 전체상을 가졌다.
몽골제국을 생각하면 하나하나의 일들에도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사실의 대부분은 지금도 아직 20여
개 국어에 이르는 많은 언어이라는 원전문헌의 큰 바다속에서 그 의미를 알아내지 못하고 확정하지 못한 채
‘발견’될 것을 기다리고 해도 좋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의 수수께끼나 미해결의 것을 관통하여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시대’이다.
왜 인류의 역사는 이 때 급속하게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려고 한 것일까? 마치 그때까지의 긴세월은 이런 ‘시대’
를 만들기 위한 전주곡이기라도 하였던 것처럼. 그리고 몽골시대의 후 ‘시대’는 잠시 정체의 속에 스스로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 티무르조의 아래에서 이상할 정도로 빛난 중앙아시아만을 거의 유일한 예외로 한다.
그것은 더욱이 새로운 ‘시대’이다. ‘대항해시대’를 낳기 위한 거대한 복선이기도 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몽골이 무엇인가 ‘시대의 사명’이라도 해도 좋을 것을 짊어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본래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몽골은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지평과 전개를 가져왔다. 그것은 큰 의미에서도 작은 의미
에서도 현대에 이르는 세계와 그 추이에 부정하기 어려운 큰 영향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시대’라는 이름의 그
무엇에 관하여 조촐한 데셍을 하고 싶다. 그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1) 페르시아어로 ‘이란 자민’이라고 한다.
2) 集史라는 이름의 사본 가운데 이스탄불本과 프랑스國立圖書館所藏의 이른바 파리본은 가잔의 역사라고
칭한다. 다른 사본에서 ‘무바라크(행복해지는)’라고 하는 것은 이미 死去한 가잔에 대한 경의를 나타낸다.
3) ‘가잔의 몽골사’라는 편이 보다 정확할지 모른다.
4) 중국, 엄밀히는 북중국을 가리킴. 10세기부터 12세기에 강성을 자랑한 키탄遼帝國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아어로
히타이 혹은 하타이로 발음되어 그것이 서방으로 퍼졌다.
5) 東方見聞錄은 그 속칭.
6) 이것을 몽골어로는 ‘구육치’라고 했다.
7) 이와 관련하여 페르시아어에 의한 基本史書로써 라시드의 집사의 다음에 위치하는 밧사프사의 본래의
서명은 타쥬지야트 알 아무사르 바 타즈지야트 아르 아사르 즉 지역의 분할과 세월의 추이이다. 지나치게 긴
제목이어서 흔히 저자인 ‘시하프 압딘 시라지’가 본서를 프레그 울루스칸인 올제이투에게 봉정한 때에 수여받은 ‘밧사프
알 하즈라트’ 즉 ‘폐하의 頌詞作者’라는 칭호때문에 타리프 이 밧사프(밧사프)사라고 불리운다. 頌詞作者의 역사
라는 의미이다. 더욱이 여기에서 저자인 시하브는 밧사프라고 통칭되고 있다.
Ⅰ. 시대의 피조물 몽골
1. 몽골 울루스의 탄생
여명(黎明)
9세기부터 10세기, 유라시아의 각지는 변동의 시기를 맞았다. 그 시작은 중앙유라시아의 초원에서 일어났다.
당조에서 일어난 안록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반란을 진정시킨 이후, 약해진 당왕실을 도와, 유라시아
동방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위글 유목제국이 840년 일거에 와해되었다. 위글 연합체를 만들고 있던 사람들은
‘몽골고원’을 뒤로 하고 각지로 이동했다.
이것을 계기로 튀르크계의 사람들이 중앙아시아, 더욱이 서아시아, 중동으로 진출해 가게 되었다. ‘튀르크족의
서진(西進)’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이미, 훨씬 이전부터 튀르크계의 사람들이 널리 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이후 완전히
튀르크족의 세계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들의 대부분은 결국 이슬람을 믿게 된다. 서아시아, 중동으로의 파도는 ‘이슬람세계’의 구조를 근본부터 바꾸어
튀르크족의 군사력에 의한 정권이 오히려 당연시되었다. 셀쥬크조, 가즈나조, 호라즘샤 왕조, 그리고 오스만조
등이다.
인도도 또한 북반의 힌두스탄 평원은 튀르크계 이슬람정권이 장악하게 되고, 골 왕조로부터 데리 살타나트 여러
정권을 거쳐 결국은 무갈조에 이른다. 인도의 북반은 중앙아시아와 같은 정치구조가 된다.
동방에서도 파도가 일어났다. 하나의 주역은 튀르크계의 사다족(沙陀族). 또 하나의 주역은 몽골계라고 생각되는
키탄족이었다. 모두 당․위글 협력시대에는 정치의 표면에는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위글해체 후, 당조의 권위가 완전히 실추해간 가운데 부상했다.
907년, 염적(鹽賊)출신 주전충(朱全忠)이 완전히 명목상의 존재가 되어 있던 당조를 멸하고 황하중류 유역의
개봉을 수도로 후량(後梁)을 세워, 황제를 칭하자, 키탄족의 정치연합체를 수립하고 있던 야율아보기(耶律阿
保機)도, 내몽골지역의 열하지방을 본거지로 즉위하여, 대키탄제국이라고 칭했다.
한편, 산서(山西)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사다족은 실질상의 초대, 이극용(李克用)기에는 개봉의 주전충정권을
타도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의 아들 이존욱(李存勗)대가 된 923년, 후량에 대신한 후 후당(後唐)이라고 칭
하고, 화북의 중원정권이 되었다.
오대(五代)의 시대 후당․후진․후한(後漢)은 어느것이나 튀르크계의 사다정권이었다.
튀르크계의 사람들이 ‘중국’을 크게 바꾼 것이다.
960년, 화북에서 한족출신의 왕조, 송이 성립하자, 그대로 북의 키탄요(遼)조와 남북대립의 형세로 고정되었다.
키탄제국은 본거지인 열하초원 이외의 ‘몽골고원’의 동반을 간접통치하고, 발해를 흡수하여 만주지역 전역이나
중화본토의 북쪽 ‘연운16주(燕雲十六州)’도 영유했다. 키탄의 무력은 송을 압도하여, 10~11세기의 유라시아
동방은 키탄시대라고 해도 좋은 상황이 되었다.
더욱이 12세기의 초, 키탄제국은 내부분열이 주요한 원인으로 만주에 출현한 쥬센(女眞)족의 신흥국가, 금조에
흡수되었다. 1125년, 키탄연합체는 해체되어, 반은 금조에 투항하고, 그 유력한 군사력이 되고, 관료도 되었다.
그 일부는 야율대석(耶律大石)에게 이끌려 ‘몽골고원’의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아시아에 들어갔다.
그리고 1132년, 파미르의 동서에 걸친 제2차 키탄제국을 수립했다. 보통, 이것을 역사상 ‘카라 키타이’라고 한다.
단지 그것은 조금 정확함을 결여한다.
키탄족은 자칭․타칭 모두 ‘카라 키탄’ 즉 ‘검은 키탄’이라고 했다. ‘카라 키타이’는 그 페르시아어풍의 명칭이다.
이슬람사료에서는 키탄족이라면 어느 것이나 ‘카라 키타이’라고 적혀 있다.
이 서방의 요조는 몽골의 중국에서는 ‘서요(西遼)’라고 중국식 이름이 지워져 있다.
중앙유라시아의 정치구조는 크게 변화했다. 야율대석과 셀쥬크조의 산쟐이 사마르칸드 근교의 카투완평원에서
회전한 것처럼, 동서의 세력이 직접 맞부딪히는 사태마저 출현했다.
아시아의 동서를 통해서 시대의 표면에 튀르크계, 혹은 몽골계의 유목세력이 확실히 부상했다.
또 키탄제국이 그 전형이지만 유목국가 그 자체는 이전과 비교하여 몇단계나 강고한 국가체계를 정착시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시대의 조류가 되었다.
더욱이 눈을 서쪽으로 옮기면, 11세기 말에는 유럽의 크리스트교 세계는 ‘십자군’이라는 미명아래 동지중해연안
으로 공격해 왔다. 그것도 또한, 일과성의 것이 아니라 역시 두세기 정도에 걸치는 시대의 조류가 되었다.
동에서 서, 서에서 동-유라시아의 왕래는 확실히 많아졌다. 전에 없는 것이었다. 시대는 크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12세기의 유라시아는 아직, 어디에도 대형의 정권, 큰 단위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대는 마치 무엇
인가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둠에 싸인 고원
지금, 그곳을 ‘몽골고원’이라고 한다. 단지 그 이름에 어울리는 현실을 동반하게 된 것은, ‘대원 울루스’를 구성
하고 있던 몽골의 가운데 반이, 이 고원으로 퇴각하여 이 고원을 주된 생활무대로 정해진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몽골시대의 후이다.
그러나 편의상, 지금은 ‘몽골고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몽골고원에는 유라시아에서 최대․최량의 초원이 펼쳐진다.
훨씬 옛날의 흉노이래 이 고원을 압도한 것이 유라시아의 초원세계의 대표자가 되어 갔다.
그런데 위글 유목제국의 해체이후, 이 고원을 통합하는 자는 없었다. 3세기반이나 되는 오랜동안의 분열과 할거
가 계속되었다. 사상 전에 없는 것이었다.
이 동안 우선 키탄제국의 힘이 고원을 덮었다. 계속하여 금제국의 힘도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특히 동부몽골지역
에 까지는 이르렀다. 사료상에서는 추측의 여지가 없지만, 이른바 ‘카라 키타이’ 즉 서요의 영향력도 중․서부의
몽골지역에는 미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것이나 고원의 유목민들이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적어도 유력한 세력이나 유목민 영웅이
나오면, 다른 대항마를 찾아내어, 그것을 지원하여 양자를 싸우게 했다. 대립항쟁을 계속해 연출했다. 때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대군을 북벌시켜, 직접쳤다. 간섭은 강약 양면으로 계속해서 행해졌다.
이 동안 고원에 그 나름대로 유력한 세력은 때때로 나타났다. 그러나 지속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실제로도 그리고
사료상에서도 고원은 어둠으로 계속해 덮혀 있었다.
늙은 잿빛푸른이리
이 역사의 어둠속에서 13세기초 칭기스칸이 이끄는 몽골이 거의 돌발적으로 부상했다.
몽골이라는 이름은 그렇더라도 당대정도부터 적지만 기록에 그것다운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칭기스칸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알 수 없다. 너무나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원래 그는 테무진이라고 했다. 몽골고원의 동북부, 몽골부라는 작은 집단의 가운데 캬토씨의, 그 또한 볼지긴씨
라는 가계에 태어났다. 부친은 에수게이 바아토르. 모친은 호엘룬. 족장의 방류라고 할 정도의 집안이었다.
평민은 아니라고 하지만, 유목민귀족으로써는 특히 뛰어난 존재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혈통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산더미같은 저술이 동서고금의 사람에 의해 이야기 되어져 있다.
읽을 것으로써는 뛰어난 것도 많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어느 것이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것은 칭기스칸에
관한 사료가 너무나 거짓과 사실이 섞여, 어디까지가 전설이나 창작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기 때문
이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의 자손들이 만들게 한 동서문헌의 가운데 말해진다. 한문정사인 원사.
몽골어를 한자로 표기한 원조비사. 그리고 페르시아어에 의한 몽골정사인 집사. 이 3가지가 기본사료가
된다. 그밖에 몇가지의 문헌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이빨이 맞지 않는다. 특히 권력자로 부상하기까지의 시기에
관해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지금까지의 저작은 3가지의 기본사료의 어느것인가 하나, 혹은 두가지에 기초한다. 그러나 역사연구로써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칭기스칸전을 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더라도 최소한 한문․몽골문․페르시아문을 자유자재로
읽게 될 필요가 있다. 3가지 모두를 근본부터 엄밀히 읽어 상호의 일치․불일치를 망라하여 어디에 어느만큼의
문자와 수수께끼가 있는 것인가 그 윤곽을 흐린곳없이 지적한다는, 당연한 기초작업은 애석하지만 지금까지 되어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이미 있는 가지가지의 훌륭한 저작이나 의견도 그 연구자나 역사가의 뛰어난 개성에 의한
견해․감상․평론․이야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된다.
단지 하나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확실한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여러 사료에 거의
일치하게 1203년의 가을에 케레이드의 옹칸을 타도하고 몽골고원의 동반(東半)의 패자가 되고 부터이다.
결국 권력자가 되어 주변지역부터도 주시되었다고 여러가지 사료는 거의 일치한다. 그는 1227년에 타계한다.
칭기스를 실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25년 정도라는 것이 된다. 그것은 군주로써의 세월이다.
여기에서 주의하고 싶은 것은, 칭기스는 권력자로써 역사의 표면에 부상한 때, 이미 나이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출생년도에 관해서는 1155년, 1161년, 1162년 등 몇 개의 설이 있다. 각각 1203년에는 48세, 42세, 41세가
된다. 어느것이라도 40대이다. 엄혹한 자연환경과 끊이지 않는 이동생활에 시달리는 유목민들은 노화가 매우
빠르다. 40대는 충분히 ‘노인’이다. 잿빛푸른이리 칭기스칸은 실은 늙은 이리였다. 이것이 가진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칭기스에게 요구되었던 것
왜 조촐한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몽골부가 고원의 유목민 연합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왜 칭기스는 3세기반
이나 되는 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유목민 통합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 잘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말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억측이 섞인 결과론이다.
몇가지 칭기스의 우수함, 인심수렴의 교묘함을 말해, 그가 조직한 ‘네겔’ 즉 ‘요우(僚友)’관계로 맺어진 막료․신신
(信臣)들의 결속력의 강함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것에도 그러한 유목영웅의 후보자는 있었을 것이리라.
왜 이 때, 이 사람, 이 집단이 아니면 안되었을까라는 설명은 어렵다.
칭기스의 제패는 우연의 요소가 많다. 옹칸을 무너뜨린 것은 기습이었다.
옹칸은 분명히 테무진의 주근(主筋)이었다. 그 옹칸의 아래에 고원통합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
것은, 테무진은 주인을 무너뜨려 가로치기 한 형태였다. 단지 테무진휘하 몽골부가 운좋게 몽골고원의 동반을
제압했을 때, 고원전체의 유목민들의 대부분이 이 지도자와 집단에 기대를 걸 것은 확실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후 겨우 2년만에 오랜 대립의 갈림길에 있었던 고원이 단숨에 통합될 리가 없다.
무엇인가 요구되었다. 필시 그것은 통합 그것이었다. 고원에 몸을 둔 인간의 손에 의해, 고원이 통합․조직화된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끊이지 않는 목지다툼이나 무력투쟁은 없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목민들의 힘이
하나로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주변지역에 대해 강력한 것일까, 유목민들이 잘 알고 있던 것이리라.
그런 조건이라면 고원동부의 패자가 된 후의 테무진이라는 인물은 꼭 걸맞았던 것이다.
우선 지도자라고 받들여짐에 족한 혈통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앞서 내세우고, 자랑할만큼의 명문은 아니다.
나이도 어느정도 많고, 고생도 어느정도 했고, 경험도 풍부하다.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고, ‘이르’ 즉 동료가 된
인간에는 매우 극진했다. 유목민상호의 분쟁조정의 능력도 풍부했다.
그것에 원래 몽골부가 원래는 정말로 조촐한 집단이었던데다가 큰 세력이 된 것도 매우 최근이라는, 말하자면
제때의 신흥세력인 것도 오히려 통합의 중핵에 어울린다.
요약하면, 통합의 기회는 우연이나 운, 결과에 의해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합으로의 욕구는 고원의
유목민들에 공통하여, 칭기스와 몽골은 그것에 어울리는 자격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순박한 유목민(遊牧民)과 마음씨 나쁜 이웃
칭기스칸 시대인 1221년에 남송의 사절이 몽골령을 방문했다.
그 실견기 몽달비록(蒙韃備錄)에 의하면 몽골 유목민들은 실로 순박하였다고 한다. 거의 같은 것을 11년
후인 1232년 및 그 얼마후에 제2대 황제 우구데이의 궁정에서 벼슬한 사람들도 흑달사략(黑韃事略)의
가운데에서 내비치고 있다.
자칫하면, 유목민을 실제보다도 나쁘게 말하기 쉬운 중국 사대부가 말하기 때문에 믿어도 좋다.
그렇지만, 두 책 모두 역시 일치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이 좋은 몽골 유목민들을 ‘조종하는’ 일단의 ‘마음나쁜’
사람들의 존재이다. 칭기스칸이나 우구데이 등 몽골 권력자으로의 험담은 의외로 적다. 지탄의 표적이 되는 것은
키탄인과 여진인이다. 그들에 대해 남송사절들의 붓은 신랄하고, 매우 준엄하다. 칭기스칸의 참모중의 참모라고
할 수 있는 야율아해(耶律阿海), 야율독화(耶律禿花)의 형제는 그 필두이다. 덧붙여서 우구데이시대의 서기국에
있던 야율초재(耶律楚材)나 점합중산(粘合重山) 등 실권은 거의 없는 ‘비치쿠치’ 즉 서기계층의 사람들에 관해
서도 남송의 사절들은 좋은 인상을 받고 있지 않는 듯하다.
이것은 일면의 진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칭기스칸은 테무진의 시대부터 키탄인이나 여진인, 더욱이는
무슬림까지 그 막료로써 데리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쟈발 호쟈 등의 무슬림은 어쨌든, 키탄인이나 여진인
은 가장 적성세력일 터인 금조에서 이탈한 인간이었다.
그들의 가운데 상당한 자들은 테무진과 그가 이끈 몽골이 아직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여기에 걸었다.
유목민 통합이 성공하자 그들은 칭기스에 진언하여 대외원정으로 이끌었다. 금조에 대한 원정은 키탄인의 복수
라는 요소도, 물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의 있는 그대로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전부 말할 수 없다.
개인의 야망도 역시 크다. 그들로써 몽골의 발전은 자신과 그 가계나 집단의 성공이기도 하다.
몽골고원의 주위에는 금제국, 서하(탕구드)왕국, 천산위글왕국, 천산칼룩왕국, 그리고 이른바 ‘카라 키탄’과
가지가지 ‘마음나쁜’ 이웃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혜도 경험도, 정보도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술책이나 사술, 사람을 조종하는 능수능란함은 몽골 유목
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한 이웃들에 대항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을 필요로 한다. 칭기스와 몽골에 도박
을 건, 인간쪽도 자신들의 가치를 충분히 알리고 있었다.
특히 언어도 몽골어와 거의 다르지 않고 게다가 유목민으로써 제국통치의 위대한 선배이기도 한 키탄족은 몽골
의 교사라고 해도 어울린다. 그 나름대로의 사람이라면 중국어․여진어에도 통하고 있었다. 여러나라 말을 할 수
있는 ‘문명인’이었다.
소박한 마음과 우수한 전투력을 가진 전사군에 정략․수완․야심에 가득찬 각종의 ‘문명인’들이 연결되었다.
세계제국 몽골의 기초는 그런 집단이었다.
몽골 울루스의 모습
1206년의 봄, 오농강의 상류에 가까운 초원에서 즉위식을 올린 테무진은 새롭게 칭기스칸이라고 이름붙였다.
‘칭기스’의 뜻은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잘 알 수 없다. ‘칸’이라는 것은 원래 중앙유라시아의 튀르크․몽골계 등의
사람들이 ‘군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칭기스는 이미 유목민의 조직화에 돌입했다. 휘하에 들어온 유목민들을 95개의 천호군(千戶群)으로 재편성했다.
천호의 아래도, 백호(百戶), 십호(十戶)라는 짜임새로 10진법 체계로 조직화하였다. 이 방법은 흉노이래의 초원
국가의 전통이고, 고원통합 이전의 타타르, 메르키드, 케레이드, 나이만 등의 여러 세력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직
되어 있었다.
칭기스는 그것을 모두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형태로 재편성한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천호장을 임명했다.
칭기스의 제패에 협력한 족장들은 그대로 천호장이 되었다. 한사람으로 몇 개의 천호를 가진 자도 있다.
대개는 칭기스의 ‘네게르’들로부터 천호장이 임명된다. 어느 인물이 칭기스의 명령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같은
부족의 사람들을 모아 천호장이 된 경우도 있다. 백호장․십호장은 천호장의 추천에 의해 임명되었다.
천호의 재편과 천호장의 임명이 일단락 지워진 어느 때, 칭기스는 일족에 부족을 나누어 주었다. 3명의 아들,
조치, 차아다이, 우구데이, 각각 4개의 천호를 나누어주고, 왕국의 서방, 알타이산 방면에 배치하여, 우익의
여러아들 울루스로 삼았다. 또 3명의 친동생 카사르, 카치운, 옫치긴의 계통에게는 각각 1개, 3개, 8개의 천호를
주어, 고원의 동방을 경계로 하는 ‘카라운지둔’ 즉 흥안령의 방면에 두어, 좌익의 여러 동생 울루스로 삼았다.
이 동서 합쳐 6개의 일족왕가의 한가운데 칭기스와 그 막내아들 톨루이가 있는 형태가 되었다.
칭기스에 직속하는 많은 천호군은 더욱이 서쪽에 보오르추, 동쪽에 무칼리라는 2명의 숙노의 아래에 역시 우익․
좌익의 형태가 되어 크게 분속했다. 칭기스는 천호장․백호장․십호장의 자제들을 모아, ‘케시크’라는 근위군단을
만들어 네군데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오르도’라고 불리는 천막군의 ‘유목궁정’을 지키게 했다.
결국 칭기스의 신왕국은 남쪽을 보고 가장 바깥쪽에 좌우 3개씩의 일족 왕가, 그 안쪽에 또 좌우의 천호군,
그리고 모든 것의 중앙에 칭기스 자신과 4개의 ‘오르도’를 지키는 ‘케시크’라는 구조가 되었다. 학이 좌우의 날개
를 크게 펼친 것 같은 구조가, 신흥국가 몽골의 형태였다. 이것이 이후의 몽골 울루스의 모든 것의 원형이 되었다.
국가의 이름은 ‘에케 몽골 울루스’ 즉 ‘대몽골국’이다. 이 신국가에 참가한 모든 구성원들은 설령 출신․언어․용모
가 다르더라도 모두 ‘몽골’이 되었다. 이 때 ‘몽골’이라는 것은 아직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민족집단’이라는 것은 오해이다. 대몽골국은 다종족혼합의 혼성집단이며 몇개의
일족 울루스를 내포하는 다중구조의 연합체로써 출발한 것이었다.
제1차 대금(對金)전쟁
조직화와 내정정리가 일단락되자 칭기스는 곧 대외전쟁에 들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국가가 공작을 하거나
무너뜨리기 때문에 내응하는 자가 나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대외전쟁에 의해 유목민들의 전리품획득의
기대에 응하고, 아울러 막 통합하였을 뿐인 국가를 전시체제하에 두어 완전히 통솔․장악할 수 있는 점.
이것이 칭기스왕국으로써 유목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1211년부터 1215년까지 해수로 5년에 걸쳐 대금전쟁은 거국일치의 대전쟁이었다. 칭기스는 몽골본토에는
약간의 병사만 남기고, 나머지 전군을 들어서 고비의 남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내몽초원에 주둔하고 5년 걸려
금조를 계속 공격했다.
제1단계는 내몽초원과 그곳에 전개하는 키탄계 유목군단의 흡수였다. 야율아해와 야율독화의 형제의 인솔에
의해, 그것은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내몽초원에 펼쳐지는 금조의 관유목장과 방대한 전마도 접수했다.
금제국은 전쟁초기부터 애지중지하는 전투부대와 기동력을 잃었다. 새로 가입한 키탄군단은 그대로 ‘몽골’이
되었다.
제2단계는 금조치하의 만주와 화북의 2방면에 있어서 초토화 작전이었다. 도시 하나하나에 억매이지 않고,
몽골군은 몇갈래로 갈려 질풍처럼 찾아와, 거칠게 돌고는 곧 다음의 지방으로 갔다. 약탈만을 했다.
그 결과 금의 수도인 연경(燕京) 즉 중도(中都)는 고립되었다. 그때까지는 예정대로였다.
제3단계는 아마 예상착오에서부터 발생했다. 고립한 중도를 예정대로 포위한 몽골 전군은 그곳에서 금조에
‘성하의 맹’을 요구했다. 금조는 부득이 그것에 응해 공녀와 은․비단을 주로 하는 공물을 바쳤다. 이 공물은 이후
매년 세폐로써 보내질 터이었다. 칭기스는 전군을 내몽초원으로 이끌었다. 그로써는 이것으로 충분할 터이었다.
그런데 금의 선종(宣宗)은 남쪽의 개봉(開封)을 향해서 달아나, 중도에는 전선사령부를 남겼다. 분명한 위약이
었다. 게다가 선종이하의 행렬이 중도남교의 양향(良鄕)에 이른 때, 같이 따라다닌 ‘주(幺)’라는 군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키탄계 등 여러 종족의 혼성군이었던 주군(幺軍)은 중도를 공격함과 동시에 칭기스의 원군을
바랬다. 필시 칭기스의 당초의 의도는 금조의 섬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격을 주어 군사상의 위협을 없앰과
동시에 경제상의 지원을 약속받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급변했다.
칭기스는 생각지도 않고, 중도를 함락하게 되었다. 대금전쟁은 반은 성공, 반은 소화되지 않고 끝났다. 금조는
정우(貞祐)2년(1214) 5월, 황하의 북쪽을 완전히 버리고, 남으로 도망갔다. 이래서 하남과 섬서를 가진 지방정권
으로 전락했다. 황하의 북쪽의 지역은 무정부상태가 되고, 크고작은 무장세력이 자연발생했다.
몽골은 내몽초원과 이전의 ‘연운16주’를 손에 넣었다. 금조의 본토 만주지역은 금조정부와 연락을 잃고, 몽골에
투항한 집단이 이어졌다. 이렇게 몽골은 아시아동방의 패자가 된 것이다.
서쪽으로!
금국원정에서 귀환한 칭기스는 즉각 서방의 호라즘샤왕국으로의 원정준비에 돌입했다. 1216년에 고비의 북
으로 돌아가자, 다음해 쟈라일족 출신 숙장인 무칼리에게 ‘태사․국왕’의 칭호를 주어, ‘오투하(五投下)라고 불리
우는 5개의 유력부족집단을 비롯하여 좌익의 가운데 24개의 천호와 새로 편성한 키탄․주군(幺軍) 20개의
천호를 배속시켜, 중국방면을 위임했다. 칭기스 자신은 남은 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몽골을 2개로 나눈 것이다. 참모장격인 야율아해는 칭기스와 함께 서쪽으로 동생인 야율독화는 무칼리의 부장이
되어 동쪽으로, 각각 갈렸다.
그리고 전몽골군에게는 1216년부터 2년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다음의 대원정으로의 준비가 유목민사회의 곳곳
에서 진행되었다. 서방으로는 첩보․조략을 목적으로 하는 통상단이 보내졌다. 서쪽의 목표는 ‘카라 키타이’
그리고 호라즘샤 왕조였다.
그런데 그 서요국은 거의 자멸해 있었다. 칭기스의 고원통합의 최종단계에서 무너진 나이만족의 가운데 왕자
쿠츌크가 이끄는 잔존부대는 1208년, 서요국에 영입되었다. 구츌크는 국왕 칠크의 사위가 되었다.
다음으로 구츌크는 장인을 배신하고 서요국을 찬탈했다.
네스트리아파 크리스트교도였던 쿠츌크는 서요국왕의 사위가 되자, 키탄족의 불교로 개종하여 스스로 국왕이
되고부터는 강경하게 불교억압정책을 실시했다. 필시 키탄족으로의 인기획득을 노린 것이겠지만, 너무 지나쳐
재지의 무슬림들로부터 총반발을 샀다. 1218년, 칭기스가 부장 제베에게 2만기를 주어 먼저 출발시키자,
쿠츌크는 손에 막 들어왔을 뿐인 권력을 버리고 도망했지만, 파미르산중에서 잡혀 살해되었다.
제베와 쟈바르호쟈가 쿠츌크의 머리를 잘라들고 각 도시의 성문에 도착하자, 환호의 가운데 환영받았다.
동투르키스탄의 전역은 자연히 몽골의 영토가 되었다. 이미 천산위글왕국과 천산칼룩왕국은 몽골에 신종(臣從)
하고 있었다. 특히 천산위글왕국은 몽골과 일체화했다. 오아시스 통상국가로 변신해 있던 위글의 사람들의
지혜와 정보가 몽골과 연결했다. 키탄족과는 다른 의미에서 위글는 몽골의 두뇌가 된 것이다.
오아시스의 태양 호라즘샤
시르강의 하류 호라즘지방을 근원지로 1077년에 성립한 튀르크계의 군사정권 호라즘샤 왕조는 13세기에
들어서 눈부시게 세력을 확대하였다. 군주는 알라 압딘 무함마드 2세. 그는 칭기스 휘하의 몽골의 발흥에 휩싸
이는 불운이 없었더라면 중앙아시아사상 뿐만 아니라, 이슬람사상, 더욱이는 어쩌면 세계사상으로도 큰 발자취
를 남기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나이만의 쿠츌크와 연결되어 ‘노대국’ 서요의 종주권을 배제하는 전후부터, 술탄 무함마드의 활동은 격심하게
되었다. ‘마와라안나푸르’ 즉, 아라비아어로 ‘강건너의 땅’이라고 불리우는 암강과 시르강 가운데의 대오아시스
지대를 제압했다. 다음으로 아프가니스탄 방면에 있던 수수께끼에 가득찬 정권, 오르조(朝)를 억눌렀다.
더욱이 이란방면으로 세력권을 확대하여 실권회복의 조짐을 보였던 바그다드의 칼리프정권 압바스조 마저도
틈을 엿보는 자세를 취했다. 호리즘샤 왕조는 이슬람세계의 패자에 올랐다고 해도 좋다.
13세기의 초 유라시아는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었던 것이다. 동쪽의 몽골, 서쪽의 호라즘샤 왕조. 양자의 격돌은
불가피하였다.
1219년 가을 칭기스 휘하의 몽골군은 막내인 옫치긴에게 몽골고원의 수비를 맡기고, 서정(西征)을 떠났다.
이 원정의 이유에 관해서는 종래, 전년인 1218년, 호라즘샤 왕조의 동방국경선에 있는 오트랄의 마을에서 칭기
스파견의 통상단이 전원학살당한 사건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보복의 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칭기스는 금국원정에서 귀환한 1216
년부터 서정의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카라 키타이 정벌로부터 호라즘샤 왕조로의 공격이 일련의 작전행동인
것은 라시드의 집사가 밝히고 있다.
학살당한 통상단은 적정 시찰의 스파이 집단이고, 호라즘측이 살해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몽골의 공격은 실로 통제되어 있었다. 미리 정해진 계획에 따라서, 호라즘측의 국경선의 도시․요새를 착실하게
포위하여 함락시키고 있었다.
맞는 술탄 무함마드의 기본작전은 수비위주의 방어였다. 그것도 각 도시마다 분산방어하는 방침이었다.
그것은 종래 이슬람사가들의 강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필시 그것은 방법이 없었다.
무함마드 휘하 호라즘샤 왕조의 급격한 대두의 배경에는 아랄해의 북방에 유목하는 날렵하고 사나운 튀르크계
칸크리족의 무력이 있었다. 그런데 칸크리족이 직접의 주인으로 받든 것은 간크리출신의 무함마드의 친어머니
테르켄하툰 그 사람이었다.
호라즘국내는 이 친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사실상 이분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무함마드로써는 병력을 집중하는
그것이 두려웠다. 칸크리족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호라즘샤 왕조의 치명타가 되었다. 용이주도한 사전공작․정보수집을 행하고 있던 몽골측은 호라
즘샤 왕조이 ‘종이호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한 내부교란을 일으켰다. 조략의 손은 무려 테르켄하툰
에 까지 미쳤다.
몽골 기마군을 맞아들여 장기전에 들어가, 적쪽이 피곤하여 철퇴하는 것을 단숨에 반격․섬멸한다.
- 이러한 무함마드의 생각은 무너졌다. 몽골이 공격전에도 훌륭한 대응능력을 보인 것을 본 무함마드는 1220년
4월 옛날 카라한조의 후손들로부터 탈취하여 막 수도로 하였을 뿐인 사마르칸드에서 스스로 탈주했다. 암강을
건너, 오로지 서쪽으로 도망했다. 술탄 무함마드는 여러쪽에 흩어져 있던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후퇴를 지령했다.
놀랄만큼 재빠른 도주는 작전상 후퇴일 가능성이 있다. 몽골을 암강의 남쪽 내지 서쪽으로 유인하여 게릴라전
으로 뒤집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국왕 스스로의 극히 이상한 도주는 원래 여러 세력이 ‘나무쪽세공’처럼 연합되어 있던 호라즘샤 왕조을
붕괴로 이끌었다. 몽골은 실전개시후 겨우 1년반 여 만에 마와라안나푸르로부터 호라즘권력을 쫓아낸 것이다.
몽골은 ‘파괴’하지 않았다?
전장은 동부이란의 호라산 아프가니스탄 방면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몽골군의 행동은 의문부호가 붙은 것이었다. 일전하여 행동에 계획성이 없어지고, 무의미한
전투나 공격, 살해도 볼 수 있게 된다. 필시 사전조사 없이, 도망한 호라즘병에 이끌려 얼떨결에 들어섰기 때문
일까 칭기스의 호라산아프가니스탄작전은 수렁이 되었다.
이때 몽골군에 의한 주민의 대살육이 행해졌다고 한다. 그것은 이슬람사서가 백만단위의 학살이 각지에서 행해
졌던 것처럼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래 그대로 받아들여져 몽골을 ‘학살자’, ‘문명의 파괴자’라고 하는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원래 그렇게 많은 인구는 없었다. 이슬람사서의 수자표기는 한자리 내지 두자리 정도가 더 많다.
다분히 기분이다. 몽골측에 정리된 이슬람사서에도 굉장한 수가 기록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이상하다. 당시의 군기물에 있어서 ‘파괴’나 ‘살육’은 나쁜일이 아니라, 공적이다.
가능한한 부풀려 말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인본주의는 근현대의 산물이다.
원래 몽골 자신이 ‘대살육’, ‘대파괴’를 선전했다. 공포의 이미지를 퍼뜨려, 싸우지 않고, 항복시켰다.
‘공포의 전략’을 의도적으로 연출하였다. 물론 몽골은 파괴도, 살육도 했다. 단지 종래 말해진만틈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우선 파괴하고, 살육되어 버렸다면 뒤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폐허와 사체를 손에 넣더라도 방법이 없다.
실은 중앙아시아는 몽골 도래 이후도 번영을 계속했다. 파괴되어 버렸을 터인 헤라트나 니샤프르는 몽골시대부터
더욱이는 티무르조의 시대에도 건재했다. 단지 그것들을 파괴후에 재건된 다른 시가라는 이론 혹은 유보의 여지
는 원래 있을 수 있다. 문헌과 유적의 쌍방의 자료를 무리없이 정합하게 해석하는 것은 자료자체의 동요와 폭이
있어 극히 확인하기 어렵고, 완전한 단정은 불가능한 것이 실정이다.
1222년 여름, 칭기스는 반드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었던 호라산 아프가니스탄작전에 단념하였다. 전군에게 선회
를 명하여, 천천히 몽골본토로 퇴각했다. 본거지인 대오르도에 돌아간 것은 1225년 음력 2월의 일이다.
마와라안나푸르는 야율아해의 손에 맡겼다. 그는 술탄 무함마드의 왕궁에서 지휘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술탄 무함마드는 도주의 결과 1220년 12월 약간의 수행원에게 둘러싸여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적막하게 타계하였다. 영웅이 될 뻔했던 인물이었다.
풀냄새 나는 제국(帝國)
칭기스는 서둘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대원정의 전후에는 2년간의 준비와 휴식을 주지만, 1226년 곧장, 서하
(西夏)국으로의 원정에 나섰다. 그것도 스스로 선두에 섰다. 명목은 서하국이 서정으로의 종군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서하원정은 수수께끼가 많다. 우선 칭기스자신의 행동이 이상하였다.
서하국의 각 도시를 함락한 후 몽골군은 황하변의 수도 흥경(興慶)을 포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스 자신
은 남하하여 육반산(六盤山)의 남쪽산록에서 야영했다. ‘피서’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몽골정사’인 집사에
의하면, 이때 칭기스는 ‘난키아스’ 놀랍게도 남중국의 남송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그 도중에서 육반산에서 하영한 것이라고 한다 진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227년의 8월 15일 칭기스는 육반산의 남쪽산록 청수하(淸水河)의 땅에서 타계했다. 그 3일후에 서하의 국도는
성을 열었다.
칭기스는 어디까지나 초원세계의 주인공이였다. 또한 그럴려고 했다. 그 때문에 키탄제국의 조직이나 체제를
대폭적으로 도입하여, 몽골은 동서로 확대했다. 야율아보기와 야율대석은 칭기스칸의 선구자였다.
몽골어로 ‘쟈무’, 튀르크어로 ‘야무’라고 불리우는 역전제(驛傳制)를 비롯해, 후에 확실한 것이 되는 제국의 여러
제도는 실은 칭기스의 시대에 그 싹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 칭기스는 정복만하다 죽었다. 그의 시대의 몽골은 풀냄새가 짙게 나는 제국이었다.
제국의 행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2. 세계정복의 길
두려운 후계자 선택
칭기스 사후, 2년간은 톨루이가 국권을 대행했다. 톨루이는 101개의 천호를 장악한 거대한 ‘중앙 울루스’의 우두
머리였다. ‘쿠릴타이’라고 불리우는 몽골의 국회가 개최되어, 보통은 그곳에서 만장일치로 우구데이가 제2대
대카한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진실은 의심스럽다.
우구데이는 얌전한 것이 장점인 듯한 인물이었다. 이렇다할 뾰족한 것이 없다. 평범했다고 해도 좋다.
일대의 영웅 칭기스 죽음후의 운명을 맡음에 족한 인물로써 몽골 유목민들이 우구데이의 즉위를 바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구데이의 상속에는 정치상으로도 무리가 많았다. 몽골본토와 몽골 유목민의 대부분은 톨루이의 몫이 정해져
있었다. 우구데이는 겨우 4개의 천호와 에미르코보크의 사이의 유목지만이 소속영지였다.
그 우구데이가 대카한이 되는 것에는 동생 톨루이의 본토와 울루스를 양도받지 않으면 안된다.
몽고에는 특히 정해진 상속제도는 없었다. ‘가독(家督)’의 계승은 실력주의, ‘가산(家産)’의 상속은 막내가 유리
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동서의 몽골정권에 손에 의한 사서는 어느것이나 아름다운 ‘나라 양도’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러나 어느것이나 붓의 움직임은 극히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필시 서정(西征)중 후계를 둘러싸고, 지금은
죽은 형 조치와 격심하게 다투었다는 강열한 개성과 야심의 소유자인 주인공 차아다이가 얌전한 우구데이를
밀어세워 우수한 실력자인 막내 톨루이의 후계지명을 저지했다는 것이 진상은 아닐까?
차아다이는 조치와의 싸웠던 체면상, 새삼스럽게 제위를 노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점이 있는 차아다이는 중요한 인망(人望)이 부족하여 수습책임자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어쨌든 우구데이는 1229년 ‘주위에서 떠밀려’ 신제(新帝)가 되었다.
주목할 만한 제2차 대금(對金)전쟁
칭기스라는 위대한 창시자가 세상을 등진 뒤에 몽골이라는 4반세기 정도의 역사밖에 없는 유목민연합체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주위의 세력은 그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의외로 싱겁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우구데이 신정권은 출발을 황하의 남쪽에 궁색해 있던 금조를 치는 것으로 장식하려고 했다.
제2차의 대금전쟁은 아시아 동방제국이 주시하는 싸움이 되었다.
이 작전에는 제국을 대표하는 4명의 유력자가 모두 참가했다. 제국서방을 막는 차아다이는 몽골본토를 맡았다.
톨루이는 우익군을 이끌고, 섬서로부터 크게 우회하여 금의 수도인 개봉의 남쪽에서 돌아 들어간다.
신제 우구데이는 중군을 이끌고 산서를 남하, 적 정면에 해당하는 황하의 방어선에 육박한다. 그리고 제국동방을
대표하는 옫치긴은 좌익군을 이끌고 하북을 경유하여, 남류하는 황하의 동쪽에 해당하는 산동으로부터 개봉에
이른다. 황하의 수비를 믿으려고 하는 금조를 북․남․동에서 크게 포위하여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단지 금조도 결코 얏볼 수는 없었다. 금조는 군대를 끌어 모을 수 있는대로 끌어모아 동관(潼關)과 개봉의 사이에
집중배치하고 있었다. 그 수는 약 30만. 이때 몽골이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전력은 통털어 합계 10만이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전력․병량 모두 충분한 중장비지대가 된 적의 심장부에 직접적으로 병사를
투입하여, 이것을 무너뜨린다는 것이기 때문에 몽골로써는 괴로운 선택이었다.
우구데이 신정권은 도박과도 같은 작전을 감히 선택했다. 그것만이 신정권의 아래로의 결속을 몽골 울루스들에게
강하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인구압작전(人口壓作戰)
1230년부터 시작된 작전에서 가장 괴로운 역할을 맡은 자는 톨루이 우익군이었다. 섬서의 거점도시인 경조(京兆),
지금의 서안에서 지킨 금군을 쫓아버린 뒤에 섬서․하남․사천의 경계지역에 해당하는 산악지대에 나뉘어 들어갔다.
강행군을 되풀이하며 험악한 산하를 지나서 개봉남방으로의 돌파구를 얻었다.
서둘지 않고 산서를 내려간 우구데이 본군은 화하의 북안에 이르자, 남안의 금조의 대부대를 끌어당길대로 끌어
당겨 시간을 벌었다.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한 것은 옫치긴의 좌익군이었다. 태행(太行)산맥에서 동측의 화북평원을 놀라울 정도로
천천히, 마치 양을 몰듯이 남하했다. 옫치긴 좌익군의 움직임은 황하의 북쪽에 있던 주민들의 공포를 불렀다.
여느 때라면 바람처럼 와서 바람처럼 가는 몽골군이 한발한발 다가드는 것처럼 육박해온다.
소문은 소문을 부른다. 몽골측과 관계있는 재지세력의 아래에 있던 주민들을 제외하고, 황하의 북의 주민들은
속속 황하를 건너, 개봉지구로 도망갔다. 이래서 개봉내외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여 아무리 적게 추산하더라도
3백만, 필시는 5백만을 넘었다.
단번에 식량부족과 사회불안이 발생했다. 충분할 터이었던 금측의 병량은 이제 부족했다. ‘인구압(人口壓)’이
일어난 것이다. 설령 황하를 돌파당하더라도 몽골을 안쪽을 끌어들여 수를 의지하여 육탄전으로 자웅을 가리더
라도 상관없다고 하던 금군수뇌의 계획은 무너졌다. 금군은 적과 싸우기 전에 배고픔이라는 내부은 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톨루이 우익군이 드디어 한수를 건너려고 하고 있다는 소식에 금조정부는 수도방위를 위해, 즉각 황하남안에
주둔하고 있던 금군주력의 20만을 남쪽으로 급파했다.
눈앞이 열린 우구데이본군은 여기에서 백파(白坡)의 나룻터에서 적앞을 강행 도하했다. 전쟁국면은 단번에 긴박
해졌다.
톨루이군과 금군주력은 서로 노려보면서 서로 동행하는 것처럼 북상했다. 때는 1232년 음력 정월. 심한 한파가
도래하고 있었다. 개봉의 서남교외인 균주(鈞州)의 삼봉산(三峰山)에서 완얀하다(完顔哈達) 휘하 금군 약 15만과
톨루이 우익군이 회전했다.
톨루이군은 어느 책에 4만, 어느 책에는 1만3천이었다. 세력이 약한 몽골군은 놀랍게도 말에서 내렸다.
참호를 파고 말과 몸을 숨겼다. 뒤가 없는 금군은 공격에 공격했다. 그러나 허기와 추위로 체력은 순식간에 다하
였다. 몽골군은 반격에 나섰다. 금군은 닥치는 대로 베어지는대로 그대로 쓰러졌다. 금군주력은 전멸했다.
이후 우구데이군은 톨루이군와 합류했다. 주력을 잃은 금군에 저항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방대한
인구를 그 안에 품고 있는 개봉만이 하남평야의 속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신제 우구데이와 톨루이는 북으로 향했다. 뒤는 우랸카족의 숙장 수베에데이와 흐루신족의 부장 타가챨이 이끄는
소부대만이 개봉을 감시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개봉성내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90만 이상의 옹관이 나왔
다고 기록되었다. 목재가 부족한 화북에서 옹관은 고가였기 때문에 실제로 죽은 자는 훨씬 많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개봉을 도망간 금왕실은 2년후인 1234년 1월, 남송국경에 매우 가까운 채주(蔡州)의 땅에서 몽골․남송연합
부대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벌써 삼봉산의 회전에서 금조의 운명은 다 했었다.
조작된 미담
몽골은 금국작전에서 완벽에 가까운 승리를 이루었다. 이것에 의해 세상에 드문 영웅 칭기스 사후에도 자신들은
흔들림없이 계속 무궁한 정권이고, 무적의 군대라는 것을 내외에 자랑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금국작전의 영웅은 톨루이였다. 신제 우구데이는 실제로 거의 싸우지 않았다. 완전한 후방지원의 차아다이는
말할 것도 없이 좌익군을 이끈 옫치긴은 ‘인구압작전’에 의해 승리의 유인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황하변에
군대를 머문 채, 도하하여 위험한 땅에 결국 가지는 않았다.
4명의 유력자의 행동은 각각의 입장을 웅변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삼봉산의 영웅 톨루이는 형 우구데이와 함께 북환하는 도중, 몽골고원에 도착하자,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급사(急死)를 맞이한다. 삼봉산의 회전부터 겨우 8개월 여 뒤의 일이었다.
톨루이는 병을 얻은 형 우구데이의 대역이 된다고 하여, 술잔을 단숨에 들이켜, 의식이 혼탁해서 죽었다고 한다.
기묘한 ‘미담’이다. 먼저의 ‘국가양보’도 좋고, 톨루이와 우구데이에 관한 동서사서의 서술은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톨루이의 급서의 이상함을 완전히 덮지 못하고, ‘이야기’를 꾸민 붓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쪽의 ‘중국정사’인 원사는 명조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몽골과 명의 항쟁이 계속되는
한가운데 홍무제(洪武帝), 즉 주원장(朱元璋)이 몽골은 ‘멸망했다’고 말하고 싶은 정치상의 목적에서 어거지로
단시일에 만들게 한 것이다.
거의 대원 울루스에서의 기록인 각종의 실록이나 경세대전(經世大典) 등을 조잡하게 ‘베꼈을’ 뿐이다.
내용은 쿠빌라이왕조의 입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한편, 서쪽의 ‘몽골정사’인 집사는 틀림없이 프레그
울루스에서 만들어졌다.
쿠빌라이도 프레그도 톨루이의 아들이다. 망부(亡父) 톨루이와 제2대의 대카한인 우구데이와의 사이에서 불화가
있었다는 것은 어느쪽이라도 쓰고 싶지 않다.
톨루이 일문은 ‘몽골 공동체’ 때문에 아름다운 ‘국가양도’를 하고, 더군다나 톨루이 자신은 황제 우구데이 때문에
감히 그 몸을 팽개쳐 ‘대역’이 되었다. 그 정도까지로 ‘몽골 공동체’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구데이일문은 우구데이의 사후 권력을 사물(私物)화 하여 ‘몽골 공동체’의 운영을 오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3대 구육의 사후, 톨루이의 적자(嫡子) 몽케가 ‘몽골 공동체’의 대카한이 되었던 것도 당연하였다.
나아가서는 쿠빌라이와 프레그의 정권도 당연한 존재인 것이다.
-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설정으로 집사도 원사도 말하고 있다.
조작은 뚜렸하게 드러난다. 필시 그것이 쿠빌라이정권과 프레그 울루스의 공통된 ‘통일견해’였다. 이후 전개하는
제국의 분쟁에 있어서 최종의 승리자가 된 두 정권으로써 그 나름대로의 제국을 운영한 큰 실패가 없었던 우구
데이를 굳이 들추어서까지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우구데이 등에게 톨루이가 ‘제거되었다’라고 정식으로 표명하는
것은 ‘몽골 공동체’라는 명목의 유지를 위해서는 역효과이다.
요약하면 집사와 원사, 이 두 ‘정사’는 모두 몽골이 쿠빌라이왕조의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거대하게
느슨한 ‘세계연방’으로 변신하였던 조금후의 시기의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도 어느 쪽이나 사찬의 책이
아니라 국가편찬물이다.
원사의 기초가 된 칭기스에서 쿠빌라이에 이르기까지의 실록과 집사의 편찬시기도 거의 같다.
정당화 혹은 정통화는 모두 철처히 하고 있다.
거추장스러운 존재를 없엔 삼두체제(三頭體制)
금국작전 종료후, 실력․명성․공적 모두 다른사람을 압도하게 된 톨루이는 신제 우구데이를 비롯한 3명의 거두들
로써 정말로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톨루이가 살아 있는 한 무엇에 관해서든 그의 협력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 상태가 된 순간, 톨루이는 훌륭할 정도로 알맞은 순간에 타계했다. 다른 3명으로써는 정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역사의 전개상 적어도 그것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약 10년간 몽골제국은 사실상, 중앙에 우구데이, 동방에 옫치긴, 서방에 차아다이라는 3명의 거두에
의해 일종의 삼두체제가 계속되게 되었다.
옫치긴은 제국의 최연장자로써 카사르, 카치운, 그리고 자신의 왕가도 포함하여, 이른바 ‘동방3왕가’를 장악했다.
그것뿐일까? 칭기스의 숙장 무칼리의 혈통을 이은 쟈라일국 왕가를 필두로 하는 몽골 좌익세력의 전체, 더욱이는
각종의 키탄군단이나 한인재지세력에 이르기까지, 몽골 동방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위엄을 꽃피웠다.
한편, 차아다이는 자신이 신제 우구데이의 틀림없는 보호자인 것을 꺼림없이, 자타공히, 오히려 자랑했다.
그는 동생 우구데이의 아래로 빈번히 찾아가, 함께 있고 싶어했다. 직함은 대카한이 아니었지만, 정권을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것과 동시에 천산산중의 자신의 본영에서 서쪽로 펼쳐진 몽골령을 반은 자신의 영역처럼 해 버렸다.
그리고 이제 우구데이는 실력자 톨루이의 그림자에 두려워하지 않고 명실공히 몽골 대카한으로써, 흔들림없는
지위를 굳혔다. 완전히 톨루이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것을 계기로 그는 점차 새로운 정책을 내놓아
간다. 몽골제국은 새로운 시대로 들어간 것이다.
초원의 메트로폴리스
1235년 우구데이정권은 몽골고원의 중앙부에, 카라 코룸의 도성을 건설했다. 카라 코룸은 ‘검은 사력(砂礫)’의
의미이다. 몽골이 처음으로 가진 수도였다.
올콘강의 상류에 펼쳐진 이땅은 몽골고원의 ‘한가운데’였다. 고원의 동서남북을 꿰뚫는 교통로도 교차한다.
옛날부터 역대의 유목국가의 근거지나 본영지가 된 유서깊은 땅이였다. 흉노의 선우(單于) 왕정(王廷)도, 돌궐
의 카간의 본영(本營)도, 이땅에 두어졌다.
위글 유목국가의 시대에는 ‘오르도 바리크’ 즉 ‘본영의 마을’이라고 불리우는 도성마저 지어졌다.
그 성벽이나 유구(遺構)는 몽골시대에도 남아있었다. 지세(地勢)상으로나 역사상으로도 몽골고원을 기반으로
하는 초원국가의 정치의 중심으로써는 가장 어울렸다.
칭기스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 ‘카라 코룸 지구’는 이동하는 본영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단지 우구데이가 지은 카로코룸의 도시 그 자체의 규모에서 말하면 큰 것은 아니었다. 1948~1949년에 행해진
키세료프를 대표로 하는 소련․몽골 공동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조금 세로로 긴 역사다리꼴을 하고 있는 형태를
나타내고, 남북 약 2천5백m, 동서 약 1천5백m이다. 단지 이 조사는 당시의 사정도 있어, 극히 불충분한 예비
조사정도 쯤의 것이었다. 금후의 발굴조사는 물론이고, 상당히 남아있는 문헌기술과의 조합도 필요하다.
카라 코룸은 방대한 주민들을 살도록 하기 위한 마을이 아니라, 몽골정권의 중앙 기능을 사람이나 물건, 있어야
할 것은 전부, 치밀한 형태로 한 점에 집중시킨 도시였다. 완전한 인공의 마을이었다. 몽골이라는 정권이 없었
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정치도시였다.
그리고 또하나 몽골제국의 영역을 반영하여, 다종족, 다문화가 서로 섞인 도시였다.
이 초원의 메트리폴리스에서 제국 각지를 향해, 역전망이 연결되었다. 우구데이로써 가장 친밀한 형 차아다이의
본거지인 천산산중의 이리계곡을 향해 무엇보다도 먼저 역전이 부설된 것은 당연하였다.
차아다이는 제도와 이리의 본영의 사이를 빈번하게 왕래했다.
서기국(書記局)의 실태
카라 코룸은 제국지배의 중심이 되었다. 그곳에 모인 제국의 여러 기능은 우구데이 숙장인 몽골 무장 이르게이
노얀이 이끄는 집행부의 아래에 두어졌다. 각종의 재무․행정기구도 일단 모습을 가지기 시작했다.
재무청을 겸비한 서기국에는 위글인인 칭카이를 수반으로, 하여 제국서방의 재무․행정을 주로 담당하는 호라즘
출신의 마프무드 야라와치, 동방의 재무․행정을 담당하는 키탄족출신의 야율초재와 여진족 출신의 점합중산
(粘合重山) 등 다종족의 간부가 모였다. 대카한의 명령은 여기를 통해서 문서화되어, 제국 각지로 보내졌다.
단지 이 서기국겸 재무청을 현재의 감각에서 너무 과대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실권자인 몽골들로부터 보면,
그들은 좋든싫든, 문서와 장부의 정리를 담당하는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지위와 입장은 정말로 하잘것
없고, 위험했다. 하물며, ‘참모’ 등이라는 것과는 먼 존재였다.
그들이 때로 페르시아어의 사료에 ‘바지르’, 한문기록에 ‘재상(宰相)’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같은 존재를 그 기록자가 속해 있는 문화체계의 속에서 발견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장과
얼마간의 추종을 알면서도 그 표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담당업무의 일면을 나타내더라도, 지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몽골들은 그들을 모두
‘비축치’ 즉 ‘쓰는 사람’ 혹은 ‘서기(書記)’라고 불렀다.
겉보기와 현실과의 차이는 그중에서도 특히, 야율초재가 극심하다. 그는 스스로 ‘중서상공(中書相公)’, ‘영중서
(領中書)’ 등 현실과는 먼, 중국풍의 칭호를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자칭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앞에서는 조금은, 겸허한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자칭했다.
칭기스시대에는 그는 ‘점사(占師)’의 한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우구데이시대가 되어 몽골이 화북경영에 본격적
으로 나서자, 키탄왕족의 말류에서 태어난 그는 야율아해․야율독화․석말야선(石抹也先) 등을 초대로 하는
유력한 키탄계 군사집단과 연락을 취하기 쉬운 것도 있어 화북정책의 가운데 특히 화북․산서․산동방면의 문교
(文敎)․세수(稅收)사업을 떠맡게 되었다.
이야기나 이미지는 어쨌든, 현실의 야율초재는 조금은 거짓이라도 좋으니까 허영의 직함을 좋아하는, 조금
비틀어진 인격을 가진 장본인이었다. 그러한 허세에 가까운 언동이나 저술을 하고 싶었다. 중국의 전통에서는
황태자 등 상당히 특별한 사림이 명목상의 정부대표가 된 때에 밖에 주어지지 않는 ‘중서령(中書領)’ 등이라고
화북의 한문화인 등으로부터 알랑거림을 받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다.
또, 스스로도 패거리의 가운데에서는 ‘중서상공’ 즉 ‘중서의 대신’이라고 접합중산과 함께, 두사람이 당당히
자칭하거나 ‘직위가 신하로써는 가장높다.’라는 표현을 스스로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특히 한문화권
의 사람들에게 보여진 거만함․잘난척 하는 태도에 비교하면, 실제로는 서글픔을 느낄 정도로 무력하였다.
그의 이름이 집사를 비롯한 페르시아어의 사서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록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후 10년 정도의 동안 화북의 인간과 몽골들의 사이를 호가호위처럼, 이것저것을 움직인 끝에 우구데이시대의
말기와 그 사후에는 버려져, 실의의 가운데 번민하다 죽은 초재의 모습은 그 시기의 몽골 서기국의 실태를 보다
잘 나타내는 반어적인 존재였다.
카라 코룸의 서기국에 있어서 대카한의 명령이나 지령을 문서화할 때, 한문으로의 번역은 초재나 점합중산 등이
작성했지만, 수반의 칭카이가 그 문서의 말미에 위글문자로 ‘첨서’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효였다.
그 의미에서는 서기국에서 그 나름대로의 힘을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칭카이뿐이었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칭카이의 직무권한은 어쨌든, 제국 동서의 모든 것에 걸쳐 있었다.
그의 이름과 그 활동은 페르시아어․한문의 기록의 어느것에나 보인다. 구육시대의 로마교황의 사절 프라노 데
칼피니의 여행보고서에도 ‘정부수반’으로 명기되어 있다.
중앙과 속령(屬領)
이 서기국겸 재무청을 갖춘 카라 코룸 중앙정부의 아래에 직접 연결한 모습으로 화북․중앙아시아․이란의 3대
속령에 대해 각각 ‘총독부’가 두어졌다. 중앙정부가 우구데이의 숙장․측근의 몽골부장을 중핵으로 하여, 비몽골
로 이루어지는 실무처리기관이 부설되어 있는 것처럼 속령의 총독부도, 각각의 지역의 진주군 본부와 중앙재무
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출향․파견된 세무․민정담당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들 총독부의 본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징세업무였다. 오히려 징세때의 강제집행력과
징세대상이 되는 관할지역의 반란방지를 위해 각 지역 각종군대의 위에서 사령부가 두어져, 세무부문에 대해
그 상당의 군사력의 뒷받침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몽골의 점령지 정책은 본격적으로는 우구데이시대에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대게 몽골로써는 그다지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는 정도의 출신의 인물을 중심으로 몽골에서 준비한
위글나 키탄족의 유력자를 몇사람, 총독부의 장관 직위에 놓는다.
그것에 중앙파견의 이란계 무슬림재무관료를 짜맞춘 다음에, 재지의 유력자를 발탁하여 하부조직으로 했다.
순몽골 자신은 행정․재무에는 직접 관계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무인으로 있으려
했다. 군사와 정치 이외의 자질구레한 것은 ‘비천하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점과 점을 연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중앙과 속령을 꿰뚫는 인간조직이 어쨌든 만들어졌다.
그것은 후의 대원 울루스시대에 비교하면 아직은 정말로 조촐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처음으로 통치기구다운 것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후 대카인의 우구데이는 벌써 카라 코룸 일대의 야영지나 행궁을 둘러싸고 사는 이외에, 카라 코룸지구를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유흥과 수렵, 그리고 주연으로 해가 밝고 해가 지는 날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국은 유지되었고, 발전했다. 그것만으로 일단 조직화되어 버린 후의 몽골의 군사력은 강력
했다. 몽골제국은 전쟁을 자기목적으로 조직이 제멋대로 확대재생산되어 가는 일종의 자동장치 처럼 되었다.
인간의 테두리와 영역은 급속하게 넓어졌다.
화북(華北)재편
신도(新都) 카라 코룸의 조영이 진행되고 있던 1235년, 근교인 야영지에는 몽골 제실․여러 장수에 의한 쿠릴
타이가 열렸다. 회의는 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되었다. 장소도 카라 코룸지구의 교외에 펼쳐지는 춘영지,
하영지, 추영지 점에서 점으로 바뀌었다.
의제의 하나는 금조멸망후의 북중국의 전후처리였다. 이해 몽골 여러 장수의 가운데에는 뛰어나게 계수에
밝은 시기쿠토크가 수반이 되어 북중국에 있어서 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그것을 기초로 만들어진 호적대장은
이 해에 간지로써 ‘을미년보(乙未年譜)’라고 불린다.
문제는 전리품의 분배라는 몽골의 대원칙에 입각해서, 이 호적을 기초로 몽골 제실․족장․여러 장수에 대해 화북
에 있어서 영지와 영민을 어떻게 잘, 모두가 납득하도록 나누어 주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였다. 이것은 난항했다.
몽골의 습관으로는 도시나 집락을 항복시킨 경우, 그 토지와 인간은 그 장관이나 소속집단의 소유물이라고
여겨졌다. 그렇지만 이미 화북일대에는 가지가지의 기득권익이 난입하여 뒤섞였다.
결국 몽골의 좌․중․우의 3극 구조의 원칙에 준하여 동에 해당하는 산동방면에는 동방3왕가․오투하 등의 좌익
세력, 중앙에 해당하는 하북․하남지방에는 우구데이가(家)와 톨루이가(家)를 비롯한 중앙 울루스 소속의 왕족과
여러장수들 그리고 서쪽에 해당하는 산서방면에는 우익왕가의 조치가(家)와 차아다이가(家)가 각각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주어진 호구의 수는 칭기스 초창시대의 천호의 수에 준거하여 대개 왕가는 10배, 여러 장수는
5배가 기준이었다. 특별한 공적이나 은전이 가미된 경우는 각각 그 배 정도로 올라가기도 했다.
이것과 동반하여 화북각지에 난립하고 있던 크고작은 한인 재지 무장세력도 정리통합되었다. 큰 세력의 아래에
중소의 집단이 배속되었다. 각각의 재지세력권도 큰폭으로 변동이 일어났다. 이것을 당시 ‘획경(劃境)’이라고
했다.
이 결과 몽골의 권위의 아래에 보정장씨(保定張氏), 진정사씨(眞定史氏), 동평엄씨(東平嚴氏), 제남장씨(濟南張氏),
익도이씨(益都李氏) 등의 대군벌이 출현했다. 이들의 세력권과 몽골 영주의 속령과는 완전히 교차하고 있었다.
화북일대는 몽골 분권세력과 재지군벌과의 2중 권력구조 상태가 되었다. 좋든싫든 상관없이, 이 2개의 세력은
화북각지에서 각각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경우는 접근․일체화했다. 어떤 경우는 반목․대립했다.
이 화북호구의 분배는 다음해인 1236년에 실시되었다. 이것을 역사상, ‘병신(丙申)년의 분발(分撥)’이라고 한다.
이것에 의해 화북에 출현한 새로운 상태는 결국 30년후에 쿠빌라이정권에 의해 다소의 조정후 추인․공식화되기
까지 금대까지의 행정구획이나 지방제도와 거의 변함없이 현실이 선행한 모습으로 실체화를 깊게해 간다.
세계전략
또 하나 큰 의제는 동서로의 대원정이었다.
이미 금국작전과 거의 병행하여 동방에 관해서는 우구데이의 서장자 구육이 일군을 이끌고 만주의 두만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인 포선만노(蒲鮮萬奴)의 동하(東夏)국을 멸해버렸다.
서방에 관해서도 이란방면에 있어서 호라즘샤 왕조의 쟈라르 압딘이 북서이란의 땅을 중심으로 왕조재흥의 활동
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1229년, 부장 쵸르마군에게 ‘타마군’ 3만을 이끌게 하여, 서정시켰다.
이 2가지 동서작전은 조촐한 규모였다.
그러나 금조를 섬멸한 뒤의 상황에서 기획된 이번의 동서대원정은 훨씬 그것을 웃도는 장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서방원정은 당시의 국제어였던 페르시아어로 ‘다슈트 이 킵착’ 즉 ‘킵착 초원’이라고 불리운 서북 유라시아의
대초원의 완전제압이 우선 첫째목표였다. 그리고 그것이 달성된다면 더욱이 서방으로 어디까지라도 돌진하게
되는 것이었다.
서북유라시아는 원래 칭기스의 구상으로는 장자 조치에게 위임할 터였다.
서방3왕가의 가운데 가장 서북에 있는 일티슈강(江)의 상원(上源)지역에 조치의 울루스가 설정된 때부터 필시
그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치는 호라즘샤 왕국으로의 원정후반, 병사를 시르강 이북의 현재의 카자흐스탄의 땅으로 나아가게하여
예정된 경략활동을 한창 전개하던 도중에 죽었다.
따라서 이 서방원정에는 조치가 못다이룬 사업을 실현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에는 조치의 둘째 아들인 조치일문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던 바투가 임명되었다. 조치의 큰아들
올다는 병약하여 부친의 옛영지 일티슈의 본거지를 지키고, 우두머리의 지위는 동생인 바투에게 양도하였다.
올다라는 이름도 부친의 ‘본영(오르도)’를 지키기 때문에 지워진 별명인지도 모른다.
바투 휘하에 조치가의 여러 왕 이외에 차아다이, 우구데이, 톨루이의 여러 왕가로부터 각각 장자나 그것에 준하는
왕자가 참가하게 되었다. 후에 몽골 황제가 된 우구데이가의 구육, 톨루이가의 몽케도 중요한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들 칭기스가의 왕자들을 보좌하여 필시는 실제상의 주장의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역전의
장군, 스베에데이였다. 그는 칭기스가 서정할 때, 술탄 무함마드를 추적하라는 사명을 받아 부장인 제베와 함께
2만기를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루시(러시아)로 토벌하러 갔다. 15년 정도 전의 일이다.
칭기스칸의 ‘도루벤 노가이(4마리의 개)’의 한사람으로 헤알려질 정도로 제국 굴지의 전투지휘관으로 현지의
체험도 있고, 지리․정세도 상세한 스베에데이가 이번에 부장으로써 참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 서정은 사상, ‘러시아․동유럽 원정’ 등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매우 유명하다. 그것과 쌍을 이루는 또 하나의
원정이 남송원정이었다.
이쪽은 주로 제국동방의 여러 세력이 참가했다. 총사령관은 우구데이의 세쨍아들로 황태자로 불리우고 있던
쿠츄였다. 그는 중앙군을 이끌고 한수유역을 남하한다. 우구데이의 둘째아들로 옛 서하령에 새로운 울루스를
세우고 있던 코덴은 서로군을 이끌고 감숙․섬서의 경계지대로부터 사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동로군은
카치운가의 알치다이 이하의 좌익세력이 각각의 화북분령에 있는 산동방면에서 남하한다.
몽골전통의 3군단 방식이 취해졌다.
바투의 서정, 쿠츄의 남정, 함께 참가한 왕자들은 칭기스의 손자 세대로 옮겨져 있었다. 황제 우구데이는 물론,
차아다이도 옫치긴도 직접적으로는 참전하지 않았다. 카라 코룸을 사령기지로하여 역전을 통해서 원정군을
원격조정하려고한 것이었다.
이 동서 2대원정을 기획한 무렵부터 몽골은 ‘세계전략’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을 조금씩이지만 의식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몽골군 소년부대
바투의 서정을 비롯하여 이러한 원거리의 오랜세월에 걸친 외정의 경우, ‘민족이동’의 방식이 보통이었던 칭기
스시대와는 달리, 몽골고원에 있는 어느 하나의 천호가 완전히 그대로 참가하는 형태는 오히려 적었다.
주력이 된 군단은 예를 들어 고원 유목민들에게서 10호마다 2명의 젊은 전사를 공출시켜 편성했다.
몽골 원정군의 주력은 소년부대였다. 몽골고원을 출발할 때에는 10대 전반의 소년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오랜 원정의 과정에서 갖가지 체험을 하고 실지의 훈련을 통해 점차 훌륭한 어른 전사가 되어 갔다.
몽골 원정군의 각 부대의 지휘관은 솜씨가 능숙한 사람이 맡았지만, 병사 그 자체는 젊고, 민첩한 자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사행동도 신속했다. 솔직히, 지휘관의 말하는 것도 잘 들었다. 대체로 아직 처자도 없고,
홀가분한 만큼 원정지에도 익숙해지기 쉬웠다. 장년병이나 노년병보다도 힘든 것에도 잘 견디고, 오로지 전투
의 승리에 매진했다. 이러한 소년병으로써 원정에 출발은 인생으로의 여행이었다.
이러한 방법이라면, 몽골본토의 천호군은 그대로 유지된다. 우리들은 무심결에 대원정을 몇번이나 되풀이하면,
몽골고원에서 성년남자는 없어져 버리지 않았을까하는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필요없다.
그들은 원정지에서 그대로 정착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경우,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된 이전의 소년병
이나 더욱이 그 자손들도 역시 ‘몽골’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아득한 몽골본토의 고원에는 형제자매, 일족
친족이 있었다. 돌아가야만 할 마음의 고향은 모두 몽골고원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확대에 동반하여 여러곳에
흩어진 ‘몽골’들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확실히 묶어주고 있는 것은 고원에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몽골 울루스’
였다.
이제 명실공히 세계제국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에케 몽골 울루스’로써 몽골고원의 천호군이야말로 모든 것의
핵심이었다. 고원은 ‘조종흥륭(祖宗興隆)의 땅’이면서 확실히 ‘국가근본의 땅’이었다. 그리고 그 땅과 이 유목민
들의 보유야말로, 몽골 대카한이라는 증거이며 모든 권력의 근원이었다.
최초의 대실패-쿠츄의 남정(南征)
동서의 원정 모두 1236년부터 개시되었다. 동방에 있어서 쿠츄의 남정은 제1차몽골-남송전쟁이라고 해도
좋지만,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개전후 얼마되지 않은 1236년 2월 주장인 쿠츄가 급사했다.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너무나 돌연하고
그것도 교묘할 정도의 타계이고, 자연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어쨌든, 시작부터 총사령관을 잃게 되어 몽골측의 작전구상은 근본부터 무너졌다. 중앙군은 쿠츄의 유해를
받들고 후퇴해 버렸다. 작전의 중핵을 잃어버린 몽골군은 완전히 통제를 잃고, 여러 부대가 제각기 남송측의
도시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방위력을 가진 남송의 성곽도시에 어찌할 바 없이 격퇴되었다.
거의 장강에까지도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명장 맹공(孟珙)이 최전선에서 지휘를 맡은 남송군에 눌리었다.
한수유역은 점차 남송측에 탈환되어 중류최대의 거점도시인 양양(襄陽)도 잃었다.
몽골이 행한 대원정의 가운데 최초의 대실패였다. 이후 몽골-남송 국경선에서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고,
전선이 교착상태인 채로 20년 정도가 경과하게 된다.
루시의 대지(大地)-바투의 서정(西征)
한편, 조치가의 유목지는 이미 시르강 이북, 우랄산맥의 동남쪽에까지 뻗쳐졌다. 현재의 카자흐 초원의 동반이다.
1236년, 바투의 서정군은 야이쿠강, 즉 현재의 우랄강를 건너서, ‘킵착 대초원’에 들어갔다.
킵착라는 것은 카스피해․카프카스․흑해의 북부의 일대, 서쪽는 도나우강 입구에 이르는 이 광대한 서북 유라시아
대초원에 옛날부터 살던 튀르크계 유목 여러 집단의 이름이다 러시아인은 포로베츠라고 부르며, 유럽에서는
또한 쿠만, 혹은 코만이라고 불리운다.
그들은 크고작은 가지가지의 부족집단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족장․수령을 받들고 있다.
몽골군은 우선 이것을 쳤다. 킵착족의 가운데 저항하거나 서방으로 도주․이동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바투서정
군은 킵착 여러 집단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일거에 거대한 군단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모두 유목민의 기마군단
이었다. 게다가 몽골이라는 통제가 듣는 군사조직에 배속․편성됨에 따라 제각기 였던 킵착 유목민들은 강력한
대군단으로 변신했다. 원정의 첫째목표는 달성되었다.
바투 등은 이 새로이 편성된 거대군단을 가지고 1237년 당시 ‘루시’라고 불리우던 러시아로 향했다. 이미 킵착족
정토(征討)하는 한편, 볼보강 중․상류 유역의 ‘볼가․불가루 왕국’과 ‘대헝가리’에 대해서도 석권하여, 뒷걱정을
없앴다. 그곳에서 우선, 불가루의 바로 옆의 북동 루시에 침공한 것이다.
이 무렵의 루시는 수많은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져 분열과 반목이 한창이었다. 루시는 몽골의 침입에 대해 결속
하지 못하고, 완패를 맛보았다. 이때 루시 전토는 폐허가 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즉 ‘타타르의 멍에’의 시작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정을 필요로 한다. 몽골은 루시를 훌쩍 지나가 버렸다. 실은 많은 루시 여러 도시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몽골 대침공의 피해를 입은 것은 몽골군의 진공루트에 있었던 도시 가운데 개성권고에
응하지 않았던 마을 뿐이었다. 그것도 그러한 마을도 전후, 급속하게 복구되었다. 1240년에 행해졌다고 일컬어
지는 키에프의 파괴와 대학살도 후술할 프라노 데 칼피니가 과장하여 썼기 때문에 유명하게 되었지만, 남쪽의
키에프에 대해 냉정한 입장에 선 같은 시대의 북동러시아의 연대기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루시의 괴멸’의 ‘상식’은 의문이 많다. 오히려 몽골측이 스스로 실제로 파괴된 몇 개의 예에 관해서 일부러 격심
하게 공포를 선전했다. 그래서 상대방이 스스로 개성․굴복하도록 연출한 흔적이 있다. 몽골의 군사확대의 시대
거의 일관되게 보이는 ‘공포의 전략’의 하나였던 것은 아닐까?
몽골이 아직 러시아로부터 되돌아오지 않은 1240년, 노브고르드공 알렉산드르는 네바강변에서 스웨덴군을 쳐부
수었다. 그 때문에 ‘네바의’라는 의미의 ‘네프스키’가 그의 이름이 되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1241년에도 독일기사단을 격퇴했다. 그는 러시아 구국의 영웅으로써 뒤에까지 칭송
되었다.
나치스 독일과의 전쟁에의 ‘민족의식’을 앙야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독일기사단’을 격파한 알랙산드르 네프시키
를 고대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왕에도 필적할만한 인물로써 영화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 몽골군이 ‘러시아․동유럽’을 휩쓸고 지나갔었을 터인 시기였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존재와 활동은 ‘몽골 대침략’에 의해 루시가 괴멸되지 않았다고 하는 가장 큰 증거가 된다.
오히려 ‘타타르의 멍에’는 아렉산드르 네프스키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루시 권력자가 되었기 때문에
몽골에 나아가 신종(臣從)하고, 자신의 형제도 포함한, 반몽골 활동을 탄압했다. 1252년에는 몽골의 힘으로
동방정교회, 이른바 러시아정교의 주교좌에 있는 브라디미르대공이 된다. 대공위는 루시 여러 공국의 지도자를
의미했다.
이것이 그후 모범이 되었다. 자기의 보신과 루시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루시 여러 공은 나아가 몽골에 아첨
했다. 그 최후의 성공자가 모스코바였다. 모스코바는 몽골이 오기까지는 존재했는지 여부마저 알 수 없을 정도
의 마을이었다. 루시의 사람들로써 ‘타타르의 멍에’는 실은 ‘루시 여러 공의 멍에’이기도 하였다.
동방으로부터의 광풍
몽골군은 더욱이 2개로 나뉘어, 주력은 헝가리, 분대는 폴란드로 침공했다. 차아다이가의 바이다르 등이 이끄는
별동대는 쿠라코프를 거쳐, 1241년 4월 9일, 레구니챠 동남쪽의 평원에서 슈레지아공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독일기사단의 연합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이 평원에는 뒤에 봐르슈타트라는 마을이 들어서기 때문에 이 전투를 ‘레쿠니챠의 싸움’ 또는 ‘봐르슈타트의 싸움’
이라고도 한다.
봐르슈타트라는 것은 독일어로 ‘사체의 마을’을 의미한다. 전투후 사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지 세계사상 잘 알려진 이 전투도 실은 정말로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같은시대 문헌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15세기의 문헌에 갑자기 크게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폴란드 여러 공도 또 당시는 기껏해야 2백에서 3백 정도의 동원력밖에 없었다고 이야기되는 독일기사단도
이 ‘전투’을 계기로 크게 그 성원이 변하는 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없다.
객관적인 정세는 이 ‘전투’가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바투 휘하의 본대는 이 이틀후 1241년 4월 11일 사요강변에서 국왕 베라4세의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역사상 ‘사요강의 싸움’ 또는 ‘모히초원의 싸움’이라고도 부른다. 이 싸움뒤 도나우강을 둘러싼 브다와 페스트의
두 시를 비롯하여, 헝가리는 몽골의 겁략(劫略)을 받았다고 한다.
단지 이 피해는 베라가 개입한 후 위험분자로써 일부 숙청된 킵착족의 유망집단에 의한 피해와 과연 어느쪽이
컸던가는 알 수 없다.
바투군의 한 부대는 빈 교외의 ‘비나 노이슈타트’에 까지 뒤쫓았다. 또 다른 한 부대는 아도리아해의 섬에 도망간
베라4세를 추적하여 달마치아의 연안에 향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폴란드나 헝가리로부터의 피난민이 넘쳐,
서유럽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1242년 3월, 바투의 아래에 우구데이 붕어의 소식과 서정군의 귀환명령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바투는 곧바로는 병사를 철수시키지 않고, 헝가리 등을 유린하면서 천천히 선회했다. 서유럽은 파멸의
직전에서 구해졌다고 한다.
종래 이 원정을 ‘러시아․동유럽 원정’이라고 불렀지만, 과연 정당한 명칭인지 어쩐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면 동부과 남서의 2개의 루시지방에로 침공하는 동안, 1238년부터 다음해 1239년에 걸쳐서는 몽골군은
가프가즈 북쪽산록 일대를 향해, 해 킵착의 잔여부대를 섬멸함과 함께, 아스족을 평정․접수했다.
이것에 의해 킵착초원은 완전히 몽골의 것이 되었다. 킵착초원과 그곳에 전개하는 킵착족과 아스족의 흡수는
몽골로서는 루시․동유럽 작전 이상으로 중요하였다.
그러한 현실에서 말한다면, ‘킵착․카프카즈․루시․동유럽 원정’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에 한하지 않고,
러시아도 포함하여, 어쨌든 지금까지 서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지나치게 말해지고 있는 것은 재고를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결국, 서유럽에는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서유럽으로써는 몽골의 내습은 결국 일과성의 ‘동방으로부터의 광풍’에 지나지 않았다.
거대한 조치 울루스
우구데이 서거의 소식에 원정군을 구성하고 있던 몽골 여러 왕가의 부대는 차례로 동방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바투휘하의 조치가의 군단은 몽골본토로 향하지 않았다. 바투는 1243년 무렵전부터 자신의 본영지로써
선택하고 있던 볼가강 하류의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그 후, 후계자 선출에서 분규하는 몽골본토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바투를 총수로 하는 조치일문은 대카한 부재의 결과, 이 원정의 거대한 성과를 거의 고스란히 독차지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들은 킵착 여러 종족이 분포하고 있던 대초원을 그대로 자신들 독자의 토지로 삼았다.
그리고 가장 동방에 조치의 장자 올다를 시조로 하는 ‘올다 울루스’, 반대측 서방에 바투 자신이 이끄는 ‘바투
울루스’ 그 사이에 그 다른 조치 여러 아들에 의한 소형 울루스가 점재하는 3극 구조가 되었다. 또, 루시와 카프
카스의 북쪽 산록일대는 속령이 되었다.
칭기스로부터 조치에게 나누어 주었던 몽골 유목민은 겨우 4개의 천호였다. 조치의 아들들은 이 유목민들을
나누어 가져, 각각의 집단의 기간부대로 삼았다. 그 아래에 방대한 킵착 유목민들이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 울루스는 몽골국가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그 실태는 튀르크계의 킵착족이 태반을 차지하는 독특한
구성이 되었다.
조치 울루스 사람들은 언어도 용모도 급속하게 튀르크화했다. 바투의 서자 베르케가 우두머리가 되고 부터는
이슬람화도 진행한다. 현재, 서북유라시아가 튀르크계 이슬람의 땅이 되어 있는 직접적인 계기는 몽골에 있다.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면, 조치가의 몽골이 킵착족의 큰 파도에 흡수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치 울루스를 ‘킵착칸국’ 등이라고도 속칭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인종․민족
을 넘어선 집단이야말로, ‘몽골’의 본질이었다.
몽골 도래후 서북유라시아의 정치지도는 크게 변했다.
비는 적어도 비옥한 남쪽의 대초원은 유목민세계. 비가 많아도 토지가 척박한 북쪽의 삼림지대는 그 서북부의
루시를 비롯한 그럭저럭 살아가는 영세농민의 세계. 그 기본구도를 계승하면서도 초원의 힘을 유효하게 조직화
한 신래자(新來者) 몽골에 의해 그때까지는 유목민․농민 모두 제각각 구심력이 없었던 상태가 완만하게 통합
되었다.
이들 전체가 하나의 체제를 이루었다. 그 다중구조의 연합체의 정점에 있는 것이 볼가강변을 남북으로 ‘오르도’
를 계절이동케하는 바투가의 우두머리였다. 그 거대한 천막을 러시아어로 ‘조로타야 오르다’ 즉 ‘황금의 오르도’
라고 했다. 황금색으로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골든 홀드’ 한자어 로는 ‘금장(金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장의 칸국’이라는 통칭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거대한 서북유라시아 세계가 하나의 역사세계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치가의 몽골을 중심으로하는 이 도식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느슨해지고, 무너지고, 변형되면서도,
어쨌든 거의 3백년 계속되었다. 러시아제국도 그 가운데에서 탄생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지금까지 서유럽
중심 때문에 자칫하면 놓치기 쉬웠지만, 세계사상의 극히 단순한 사실인 것이다.
3. 제국의 동요
어지러운 상속인
1241년 12월, 우구데이가 서거하는 것을 전후하여, 차아다이도 죽었다. 그 시기는 우구데이의 죽음의 7개월 전
혹은 우구데이의 죽음이후 바로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우구데이정권의 중심인물이 2명 모두 거의 같은
시기에 타계한 것이다.
이것은 10년간 그 나름대로 안정되어 온 정치구조를 근본에서부터 바꾸었다. 칭기스의 아들은 없어진 것이다.
이 이후 몽골은 경이로운 확대를 멈추고, 몽케가 정권을 확립하기까지 약 10년간 혼란과 정체에 휩싸인다.
우구데이는 그 생전 7명의 아들 가운데 우선 넷째 아들인 카시, 다음으로 셋째아들인 쿠츄를 ‘황태자’로 뽑았다.
그러나 2명 모두 차례차례 죽었다. 그래서 우구데이는 쿠츄의 남은 아들인 시레문을 장래의 상속자로 지명하는
한편, 옛 서하령에 새로운 울루스를 만들고 있던 둘째아들 고덴에게 ‘동궁황태자의 보(寶)’라고 새긴 도장을
주었다.
단지 몽골시대의 한문기록이 전하는 ‘황태자’가 어느정도의 의미와 실질을 동반하고 있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페르시아어의 문헌에는 쿠츄, 카시, 코덴에 대하여 ‘바리 압드’ 혹은 ‘바리 알 압드’였다고 한다. ‘통치의 대행자’
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이 한문의 ‘황태자’에 해당하는지 어쩐지 그것 자체가 연구상에서는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하지만 우구데이는 그 나름대로 ‘황태자’풍모의 인간을 지명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보통사람과는
눈에 띄이게 유난스러운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단지 그것은 결국 우구데이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야말로 의미를 가진다. 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몽골들로써,
유일하게 받들어야만 할 것은 대카한 한사람이었다.
대카한을 결정하는 것은 대카한이 아니었다. 몽골사람들의 총의였다. 그 터가 몽골의 국회인 쿠릴타이이다.
대카한이 자신의 판단으로 상속인을 지정하든 않던 결국은 상관없다. 그 대카한이 타계하면 생전에 정한 것은
효과를 잃는다. 대카한이 바뀌면 모든 것은 바뀐다.
그 의미에서 몽골에 있어서 대카한이 바뀌는 것은 왕조가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구데이가 타계할때 칭기스의 손자세대에서 유력자로 눈에 띤 자는 코덴이외에도 톨루이가의 몽케와 조치가의
바투였다. 차아다이가 귀여워한 모에 투겐은 이미 죽고, 차아다이의 상속인은 더욱이 그 적손인 카라 프레그가
잇고 있었다. 칭기스로부터는 이미 증손이 된다. 적격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코덴은 그 본거지인 감숙(甘肅)지방의 양주(涼州)평원에 있고, 티벳․사천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바투는 먼 헝가리에 있다. 몽케는 천천히 동방귀환의 길를 계속하고 있었다. 킵착족의 경략에 대활약을 한 후,
루시침공 전에 주장 바투과 분쟁을 일으켜 황제 우구데이의 격노를 산, 그 아들 구육과 차아다이가의 브리의
귀환을 감시하라는 의뢰를 받아 그는 몽골본토로 향하려고 하고 있었다. 유력한 자는 모두 부재였다.
노웅(老雄) 옫치긴의 야망
미묘한 것은 그 구육이였다.
그는 부친의 수환명령에 의해 급히 돌아오는 길에 올라, 몽골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구육은 우구데이의 장남이라고는 하지만, 6번째의 ‘카톤(황후)’에 지나지 않는 두르게네의 소생이었다.
말하자면 서장자이다. 부친의 치세동안은 부친의 즉위전의 옛 영토 에미르 코보크 지방의 주인으로로 정해져
있었다. 우구데이 여러아들의 가운데 쿠츄, 카시, 코덴의 3명과 비교하면 분명히 격하된 취급을 받았다.
우구데이는 구육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한편, 우구데이의 ‘궁정’에 해당하는 오르도에서는 우구데이의 정황후로 몽골어로는 ‘에케 카톤’ 즉 ‘대황후
(大皇后)’라고 불리운 보라쿠친 카톤은 이미 우구데이보다 조금전에 타계했었다. 우구데이의 유해는 다음 서열
의 황후라고 생각되는 프쿠이 카톤이 지키고, 그녀로부터 우구데이 붕어의 통지가, 유라시아 각지에 흩어진
제실 여러왕의 아래로 보내졌던 것이다. 몽골 중앙은 벗겨낸 껍질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좋았다.
그 틈을 동방의 웅 옫치긴이 헤치고 나오려고 했다. 제실 여러왕이 우구데이의 장의(葬儀)에 모이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옫치긴은 필시 동부 몽골지역의 흐룬 브율지방에 있는 자신의 본영에서 군사를 이끌고 우구데이
의 유궁(遺宮)에 접근했다.
라시드의 집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때 마중을 나간 것은 두르게네였다. 그녀는 옫치긴에게 향해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많은 자를 이끌고, 자식의 처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는가?”
‘자식의 처’라는 것은 조금은 기묘하지만, 몽골들은 세대마다 부, 자, 손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칭기스의 막내
동생인 옫치긴으로써는 조카인 우구데이의 처는 ‘자식의 처’가 된다.
옫치긴의 목적은 선제의 유해와 과부들을 방패로 삼아, 정국을 자신쪽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명령
을 우구데이의 유조로 칭하는 것도 가능하다. 장의와 그 후의 쿠릴타이를 책임지고 관리하면 제위는 그 손으로
굴러들어올 지도 모른다. 그 점 칭기스의 동생은 있어도 칭기스의 자손이지 않은 약점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구육이 몽골본토의 서쪽에 위치하는 영지 에미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구데이의 장자 구육이 돌아왔다는 것은 우구데이의 유궁을 지킨다고하는 명목은 이미 통하지 않는다.
다음 세대의 사람이 모두 나가고 없는 긴급사태이기 때문이야말로 제실최고 장로인 옫치긴이 나온 장면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자식의 처’라는 두르게네의 수수께끼같은 말은 옫치긴에 대해 세대의 차이를 말하였던지도 모른다.
이 다음의 제위에 오를 자에는 당신은 ‘조부’에 해당한다. 이제 2세대나 전의 인간이 나올 무대가 아니다.
자신의 연령과 입장을 잘 생각하라고 한 의미를 언외(言外)에 포함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어쨌든 노웅 옫치긴의 야망은 펼치지 못한 채로 꺼져 버렸다.
두르게네의 도박
브쿠이 카톤도 얼마후 죽었다. 두르게네와 그 아들인 구육은 행운이었다.
우구데이의 오르도를 장악한 두르게네는 새 황제선출하기까지의 ‘국사(國事)’를 맡는 입장에 올랐다.
그녀는 구육을 세우기 위해서 뇌물, 협박, 울음 할 수 있는 것은 다해 포섭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좀처럼 결착이
지워지지 않고, 4년 이상의 세월이 덧없이 지났다. 그러나 마지막은 두르게네의 맹렬하고 끈질긴 다수파 공작이
성공했다.
구육은 가장 빨리 몽골본토에 되돌아 온 점, 그리고 자신을 끔찍이 사랑하는 친어머니가 우구데이의 오르도를
장악한 점, 이 두가지의 행운에 의해, 5년후인 1246년 여름 드디이 쿠릴타이에서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
두르게네의 도박은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구데이의 유지를 무시한 두르게네의 폭주에 의해
우구데이가는 사실상 이때 분열의 틈이 벌어졌다. 그리고 구육의 즉위는 구육파일당으로써도 결코 행운만은
가져오지 않았다.
새 황제가 된 구육은 과거의 옫치긴의 행위를 조사했다. 결국, 장교들이 책임을 치고 처형되어, 옫치긴본인은
불문에 부쳐졌다. 그러나 옫치긴도 그 후 곧 타계한다. 완전히 구육 즉위의 쿠릴타이가 끝나면 가치없는 인간인
것처럼 극히 애매한 처단과 부자연스러운 타계였다.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들
구육의 즉위를 둘러싼 일련의 경위는 몽골 전체로써도 큰 화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육의 죽위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원래 무리한 점에 덧붙여, 바투가 강경하게 반대를 계속한 점도
있었다. 견제하고 있던 두명의 숙부 우구데이와 차아다이가 차례로 타계한 것에 의해 바투는 서정의 성과를 독점
하게 되었던 조치가의 우두머리로써 이제 칭기스의 손․증손들의 가운데 실력․연령․가품․성망․실적 모두 탁월한
존재가 되었다.
단지 부친인 조치의 출생의 의문이 제기되는 바투는 스스로 대카한에 오르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조치(客人)’
이라는 이름이 가져오는 출생의 의혹은 진위를 넘어서, 조치의 자손들에게 자신들은 조금 다르다고 하는 기분을
다분히 느끼게 했다.
바투는 구육과 사이가 나빴다. 그는 볼가강변에 있은 채, 참가를 구하는 두르게네의 필사적인 요청에도 수긍하지
않았다. 바투의 마음은 서정에 톨루이가의 대부대를 이끌고 참전한데다가, 킵착 서정이나 구육과의 다툼도 일관
되게 자신쪽에 서 준 몽케에 있었다. 바투와 몽케는 모두 불운한 부친을 가진 일문의 우두머리로써 마음이 통하
는 맹우였다.
게다가 또 하나 놓치면 안되는 것이 있다. 몽케와 바투는 모친끼리가 자매였다. 두사람은 외가쪽으로도 ‘사촌’
이었던 것이다. 몽케, 쿠빌라이, 프레그, 아리크, 부케의 모친인 소르코쿠타니와 바투의 모친 베쿠토미슈는 몽골
에서 최고의 혈통인 옛 케레이트왕국의 왕녀로,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도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모친을
가진 두사람은 가정환경에서도 공통하는 면이 있고, 모친의 출신이 뛰어나지 않은 구육 등을 한단계 낮게 보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몽골은 모친의 혈통에 까다로웠다.
구육은 즉위 후 얼마되지 않아, 대서정의 기획을 발표했다. 신임하는 신하 에르지키데이를 선견부대장으로 하여,
동지중해방면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준비를 위해서 도상에 있는 옛 영지인 에미르 코보크지방에
이르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군대을 서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런데 이 도중인 1248년 4월, 쿰센기르라는 땅에서 갑자기 죽었다. 2년에도 미치지 않는 재위였다.
제위는 다시금 비게 되었다. 이때 바투도 구육도 서진의 소식에 볼가를 떠나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급진하고
있었다. 사태는 새 황제 구육과 실력자 바투의 대전투의 직전이었다. 구육의 급사는 바투가 푼 자객에 의한다고
하는 의문이 옛날부터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바투는 구육의 사후, 조치가의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국인사를 좌우했다.
관례에 반해 몽골지역도 아닌 중앙아시아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몽케의 추천을 강행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동안 잠시 특히 몽골본토에 관해서는 구육의 정후(正后) 오쿠르 가이미슈에게 오르도를 중심
으로하는 서무의 처리를 명령했다. 그것도 두르게네의 옛 모범을 취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실의
일원에 지나지 않는 바투로써는 ‘분’에 넘치는 월권행위였다.
이러한 바투의 강인한 방법에는 우구데이, 차아다이 양가의 가운데, 구육에 친한 사람들이 반대했다.
이대로는 칭기스 네아들의 계통이 이분되어 무력전쟁으로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방3왕가의 중심을 이룬
옫치긴가의 노신들이 습봉를 인정하고 얼마안 된 옫치긴의 적손 타가챠르라는 어린 아들을 세웠다. 다른 두
왕가도 모두 바투 주최의 쿠릴타이에 참가했다. 이것은 옛 구육일당에 대한 강열한 의사표시가 되었다.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타가챠르의 계승을 인정한 것은 두르게네였다. 그녀로써 보면, 타가챠르의 습봉에 의해
옫치긴가의 위협은 당분간 피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두르게네는 구육의 즉위를 보자, 얼마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필시 숙원을 이루고 만족해서 죽었다. 그러나 제국에는 큰 부적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구육에 대한
옫치긴가의 한도 없어지지는 않았다.
동방3왕가의 의사표명은 명분상에서는 바투주최의 쿠릴타이를 정당화했다. 이미 대세는 결정되었다.
지나치게 유능해서 일어난 비극(悲劇)
몽케의 즉위는 그 2년후인 1251년 7월, 이번에는 몽골본토에서 개최된 두 번째의 쿠릴타이에서 정식으로 실현
되었다.
몽케는 그때 44세, 그는 수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비롯해 동서의 학술․문화에 능통
하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부친 톨루이의 삼봉산 결전에도 종군하고, 서쪽에서는 카프카즈에도 나누어 들어갔다.
직견․능력에 넘치는 실력․실적․명망․혈통의 어느것을 가지고서라도 불평이 없는 왕자중의 왕자였다.
인류사상으로도 그만큼 태어나, 기대받고 제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났으며, 그것도 현실적으로 유라시아의 동서에
걸친 실지체험을 가진 정진정명의 실력을 개인으로써도, 권력자로써도 어느쪽으로도 갖추고 있는 인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구육은 병약한데다가 섬세한 신경질적으로 사람의 됨됨이 나쁘고 특히, 유능함과 신뢰성이 요구되는 몽골 황제
에는 걸맞지 않았다. 감히 말한다면 구육은 무리를 극복하려고 허세를 편것에 비극이 있었다.
그 점 부친인 우구데이에게는 스스로를 범용이라고 인정한 뒤에, 주위에 휩싸이면서도 주위를 휩싸는 평범하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이 있었다.
그것에 비해 몽케는 무조건적으로 유능하였다. 오히려 사람의 위에 서기에는 모든 것에 걸치 그 개인이 지나치게
유능한 것이 그의 비극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그는 제위에 즉위하자 반대파를 근본에서부터 숙청했다. 우구데이, 차아다이 양가의 가운데 자신의 즉위에 반대
하고, 쿠릴타이에 ‘불참’한 데다가 즉위의 축연을 급습하려고 했다고 이야기되는 사람들은 처형내지 유죄했다.
그 위에 양 울루스에 관해서는 영토를 세분하여 특히 파미르 이서에 관해서는 맹우 바투와 공동통치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유력장관만으로도 77명이라는 대량 숙청의 폭풍우는 전에 없는 처절함이었다. ‘모두 부귀를 누린다’는
것을 마음의 지주로 삼는 ‘몽골 공동체’의 전통은 여기에서 크게 훼손된다.
우구데이 일문은 감숙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의 고덴 울루스와 에미르고 보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의 그 밖의
여러 다들 영토로 확실히 분열했다. 역사상 ‘우구데이 울루스’ 혹은 통칭 ‘우구데이칸국’ 등이라고 할 수 있는
실태는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에 널리 힘을 떨치고 있던 차아다이일문은 원래의 초창기의 본거지인 천산산중의 이리계곡으로 들어
갔다. 남은자들은 모치 에베의 계통이나 아비슈카 등의 방류가 코덴령과 섞여 들어가면서 동방으로 점재(點在)
하게 된다.
몽케는 놀랄만큼 전제군주인 것을 즉위의 초부터 보였다. 그의 목적은 칭기스 타계이후의 엉킨 실타래를 끊고,
느슨한 제국의 통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과단, 과격했다. 제국의 불안정한 요인은 오히려
증폭된 채, 강권자 몽케의 아래로 잠재화했다.
제2차 세계정복계획
몽케는 실로 훌륭했다. 대량 숙청과 동시에 친동생 쿠빌라이에게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경략을 위임하는
것을 발표, 즉위식 다음달에 해당하는 1251년 8월에는 쿠빌라이는 임지에 도착했다.
이것과 병행하여 챠라일족의 숙장 몽케세루를 수반으로 하는 중앙정부 인사를 비롯하여, 화북․중앙아시아․이란
의 3대 속령의 재무․징세기구의 담장자도 임명했다. 중앙정부는 토박이인 몽골과 위글로 굳히고 어디까지나 그
파견기관에 지나지 않는 3대 징세관구에 관해서는 우구데이시대부터의 기본형을 계승한 위에 대폭적으로 인사
를 일신하여, 각각 몽골 주유군의 군단장과 이란계 무슬림 재무관료를 끌어안는 형태를 보다 명확하게 취했다.
동쪽은 화북․티벳에서 서쪽는 루시에 이르는 인구조사와 세수의 재조사마저 실시하게 되었다. 여러 면에 걸친
우구데이 이래의 좋든싫던 애매하고 멋대로까지이던 구폐를 일소하고 중앙통제를 엄중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더욱이 세 번째의 친동생 프레그에게 ‘이란의 땅’에서 서쪽 모든 땅의 경략을 위임하는 것을 발표했다.
이 대서정에는 몽골본토의 유목민으로부터 10호당 2명의 젊은 전사를 공출하게 하는 방법을 취했다. 또 서정의
일환으로 부장 사리노얀에게 한 부대를 주어, 카시미르 힌두스탄방면, 즉 인도방면으로의 진공도 꾀했다.
페르시아어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사리노얀은 황제몽케에게 자신들은 언제까지 그곳에 있으면 좋을까를 물었다.
몽케의 대답은 ‘영원히’였다.
이미 부임한 쿠빌라이와 함께 몽골제국은 다시 동서 2대작전을 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몽케의 정권구상의 기본
은 유라시아를 크게 분할하여 서북쪽은 바투 휘하의 조치가, 서남쪽은 프레그 휘하의 서정군, 동남쪽은 쿠빌라이
휘하의 동정군, 동북쪽은 타가챠르를 필두로하는 동방3왕가, 그리고 서몽골지역에 크게 펼쳐지는 톨루이가의
막내동생인 아릭 부케라는 도식이었다. 대카한인 몽케는 몽골본토에서 모든 것을 통괄한다는 것이었다.
바투와 타가챠르라는 동서 2명을 제외하면, 톨루이와 그 정후 소르코쿠타니와의 사이에 태어난 몽케, 쿠빌라이,
프레그, 아릭 부케 4명에 의한 ‘형제 정권’이었다. 몽케는 물론 몽골 수뇌부에는 이미 분명한 ‘세계정복’의 의도
가 있었다.
몽케는 패기만만해 있었다. 우구데이시대의 동서 2대정에는 적어도 그 기획당초에 있어서 과연 ‘세계정복’이라는
명확한 의식이 었었을까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의 제2차 세계정복계획은 처음부터 그 기미가 있었다.
몽케는 스스로의 체험․견문으로도, 동쪽은 남송, 서쪽는 중동․유럽을 노려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4. 유럽과의 만남
프레스타 죤의 전설
1096년,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제창에 의해 제1차의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다.
도중에 튀르크족인 셀주크조의 부대를 격파한 이 군단겸 순례단은 1099년, 이집트를 본거지로 하는 파티마조가
장악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때 이스라엘왕국의 이외에 시리아연안부에 에뎃사백령, 안티오키아후령,
트리폴리백령 등의 ‘십자군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슬람측의 대립에 틈탄 서유럽의 성공은 잠시 동안이었다. 특히 아이유브조의 창시자 사라흐 압딘이
출현하자, 형세는 변했다.
그는 1187년 7월, 힛틴의 싸움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회했다. 영국의 리처드 사자심(獅子心 ;
라이온 하디드)왕 등과 유명한 역사활극을 펼치는 것은 이 직후인 제3차 ‘십자군’과의 앗코을 둘러싸고 공방할
때의 일이었다. 힛틴의 싸움을 경계로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아이유브조의 세력이 팔레스티나로부터 시리아
에 이르는 시리아연안부의 ‘십자군왕국’이라는 이름의 라틴소왕국들도 차례로 존립이 어려워졌다.
그러한 무렵 유럽에 하나의 소문이 퍼졌다. 적인 이슬람의 뒤쪽 저멀리 아득한 동방에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
교도의 나라가 있다. 그 땅의 왕으로서 사제인 인물은 ‘페르시아’의 무슬림과 싸우고, 그 수도를 함락하여 예루
살렘을 향하려고 하고 있다. 그 왕은 이름은 ‘프레스비테르 요안네즈’ 즉 사제 요하네. 영어로는 프레스타 죤이다.
위기에 있는 ‘십자군’의 구세주가 될 지도 모른다고 하는 기대가 유럽과 ‘십자군’의 사이에 차례로 부풀어 올랐다.
‘프레스타 죤 전설’이다.
지금 알려져 있는 한, 프레스타 죤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옥일의 유명한 크리스트교 성직자 프라이징 옷트
의 연대기로 그 1145년의 몇군데에 보인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의 아래로 ‘십자군’의 어려움을 전하는
사자가 찾아온 때의 일이다. 그 사자가 불가사의한 동방의 성왕에 관해 말한 것이다.
이때의 이야기만으로 한정해 말한다면, 반드시 근거가 없다고 할 수만는 없었다. 그 4년전에 해당하는 1141년,
중앙아시아를 동쪽에서부터 석권하고 있던 야율대석이 이끌고 있던 ‘서요’의 군대가 사마르칸드 근교에서
셀쥬크조를 처부수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무슬림화라는 것은 필시 셀주크조를 가리킨다. 그래서 키탄왕족
인 야율대석 자신은 불교도였지만 그 휘하에는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의 유목민 사병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서안의 비림에 현존하는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로 유명한 것처럼 당대에 중국
본토로 전해진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景敎)도는 당대말기의 무종에 의한 ‘법란(法亂)’에 의해 불교도와
함께 탄핵되어 그 후는 위글이나 몽골고원의 유목민세계로 퍼졌다. 칭기스칸과 패권을 다툰 게레이트부 나이만
부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신도였다.
야율대석에 의한 중앙아시아 제압은 이슬람세계 동방에 있어서는 다소간의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동지중해연안부에 찰싹 달라붙은 ‘쿠루세이다(십자군전사)’들로써도 오히려 광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무언가 그럴만한 사실은 나름대로 있었다. 정보는 그 정확함은 차치하고 동서에 전달되기 쉽게 되어
있었다.
단지 기대는 사실을 넘어서 크게 부풀어졌다. 허상은 점점 꼬리를 물고 이어갔다. ‘프레스타 죤으로부터의 편지’
가 유럽에 유행했다. 그것은 당시 로마교황과 심각한 대립의 한가운데 있던 신성로마황제라는 이름의 독일왕의
입장에서 퍼뜨려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프레스타 죤이라는 ‘성자’의 이미지를 빌어, 로마교황을 핍박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십자군’과 ‘프레스타 죤 전설’에 흔들인 유럽. 현실과 환상이 섞여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때까지와는
격단적으로 달랐다. 동방으로의 관심은 확대되고 있었다. 그것이 몽골 등장 전후의 서방이었다.
동경과 공포의 동방
칭기스칸의 서정이 시작되자 바로 전설은 현실화한 것처럼 해석되었다.
프레스타 죤은 다비드왕과 이름을 바꾸어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땅까지 왔다고
하는 정보가 로마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에 전해졌다. 때는 마침 1221년, 제5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한창 공격
하고 있던 중이였다.
확실히 칭기스가 이끄는 몽골군은 이 해에는 호라즘샤 왕조를 해체로 몰아넣었다.
다비드왕이 이끄는 군세는 총세력 3만7천이라는 다른 정보도 전해졌다. 재미있는 것으로 라시드의 집사가
말하는 12만9천이라는 칭기스시대의 몽골 천호집단 세력의 합계수의 정확히 3배에 해당하는 수이다. ‘전설’이
제멋대로의 상상과 왜곡, 그리고 수적 증가를 낳았다. 단지 정보 자체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이 해를 넘기지 않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이슬람 중동세계는 동서 양쪽에서의 침공을 받고 있었다. 환상의 구세주의 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쪽으로부터의 침공군인 ‘십자군’은 아이유브조의 수도인 카이로를 향해 억지로 공격을 걸었다.
그러나 당연히 동방으로부터의 원군은 찾아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비참한 대패배를 맛보았다.
그뿐 아니라 이번에는 두려운 이야기가 루시․흑해방면에서 전해졌다. 수베에데이와 제베가 이끄는 몽골 별동대
가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그리고 루시를 석권했기 때문이다. 어느것이나 로마카톨릭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크리스트교국이었다. 루시의 노브고르드 연대기는 1224년의 조에서 말한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족이 찾아왔다. 그들이 도대체 누구일까? 어디서부터 와서, 어떠한
말을 이야기하고 어떤한 인종으로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까? 누구 한사람 알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자신
들을 타르타르라고 부르고 있다”
라탄어로 ‘타르타르스’라는 것은 ‘명계, 지옥’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해를 낳아, 공포를 더욱 부풀렸다. 당시 몽골
은 이전에 고원의 큰 세력이었던 타타르족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신흥의 몽골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보다도 옛날부터 주변지역에 알려진 타타르라는 이름 쪽이 같은 동몽골지역을 원래의 근거지로 하는 것도
있고, 사용하기 쉽고, 알기 쉬운 면이 있었다. 이 타타르라는 이름과 ‘지옥’을 나타내는 ‘타르타르’라는 단어가
겹쳐져 이미지가 중복했다. ‘지옥의 사람’의 도래였다.
‘프레스타 죤’과 ‘지옥의 사람’이라는 정반대의 이미지는 해결나지 않은 채, 당분간 몽골의 그림자는 유럽으로
부터 멀어졌다. 이슬람의 저쪽 아득한 동방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더럽혀진 것으로 가득찬 서방, 즉 자신들
유럽에 비해, 평화와 풍족함이 넘치는 지상의 낙원이라는 동경은 생겨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기분 나쁘고 무서운, 너쿠니 없이 요괴들이 사는 땅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유럽의 사람들의 마음에는 동방에
관해서 모순된 두가지의 상이 맺어졌다.
마슈 파리스의 증언
1237년 바투 서정군이 루시방면에 모습을 나타내자, 그 소식은 바로 유럽 각지에 충격으로 전해졌다.
벌써 프레스타 죤 등이라는 현실과 거리가 먼 기대는 급속히 멀어지게 되었다.
현재 서양의 몽골제국사연구를 대표하는 영국의 데이비드 모건씨는 13세기 서유럽를 대표하는 잉글랜드의
역사가 마슈 파리스의 대년대기(大年代記)에 적혀진 몽골 침공에 관한 몇가지의 흥미깊은 정보를 소개
하고 있다.
“고트란드와 후리스란트의 주민은 그들 몽골의 공격을 두려워 하여, 청어의 시기가 되어도 보통때처럼
잉글랜드의 야마스에 찾아오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그들은 그곳에서 배에 가득 화물을 싣지만.
그 때문에 청어가 너무 남아돌아 공짜나 마찬가지로 보여, 바다로부터 엄청나게 떨어진 곳에서도 최상등급의
청어라도 40마리 혹은 50마리가 은화1매로 팔리고 있었다.”
발트해적이 몽골군을 두려워하여 모항에 머문 결과, 청어가 폭락했다고 하는 것이다. 1238년의 일이다.
더욱이 같은 해 이슬람세계로부터 ‘산의 노인’의 사절이라고 밝힌 자가 찾아왔다.
프랑스왕, 이어서 잉글랜드왕인 헨리 3세에게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크리스트교국의 원조를 구한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정말이라면, ‘아사신’ 즉 ‘암살자’ 혹은 ‘암살교단’ 등이라고 속칭되는 이스마일파가 서유럽 크리
스트교에 대몽골 협동작전을 제안한 것이 된다.
얼핏보아, 황당하게 보이는 이 이야기는 오랜동안 의심의 눈으로 보아져 왔다.
그런데 모건씨에 의하면 그것을 어쩌면 뒷받침할지도 모르는 방증이 하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어느 잉글랜드의 기록에 의하면, 헨리3세는 1241년에 10페니 무게의 금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알려져
있는 한, 이러한 무게의 금화는 아프카니스탄의 가즈나에서 고르 왕조의 술탄이 주조한 것 뿐이었다.
페르시아어의 사료에서 오르조의 사자가 몽골 출현무렵 이스마일파의 교주의 아래를 방문하고 있는 것이
알려져 있다.
고르조의 금화가 13세기의 전반기에 어떠한 경위로 잉글랜드에 전해진 가능성은 확실히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과연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하는 아라무트의 ‘산의 노인’의 사절이 가져온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은
지의 여부, 수수께끼는 오히려 매력을 증가시킨다.
바투 휘하 몽골군이 1240년 이후 루시로부터 더욱이 동유럽으로 진격하자, 서유럽 크리스트교 세계에는 이미
남의 일이 아니라,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슈파리즈는 그 충격과 도요의 모습을 잘
전하고 있다. 단지 그가 말하는 몽골상은 여전히 상상과 허구의 색에 뒤덮혀 있다. 현실의 몽골은 아직 잘 알지
못했다. 사실을 전하는 정보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공포의 쪽이 먼저 일어섰다.
1241년 바투군은 당시유럽에서 최강이라고 말해지던 헝가리왕국을 격파했다.
국왕 베라4세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9세에게 원군을 구했다. 그러나 교황으로써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대립의 쪽이 우선되었다. 세인트 오르반즈교회의 마슈 파리스로써 그 위기에 있어서 더욱이 멈추지
않는 교황과 황제의 싸움은 충격이었다. 베라가 바랬던 유럽연합군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분명히 헝가리평원에 걸터 앉으려고 하고 있었다.
옛날의 훈왕 압티라가 근거하고 있던 이 초원은 몽골의 군마로써 좋은 조건이었다고 생각되었을 듯하다.
124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바투군은 헝가리평원에서 동영(冬營)했다. 속설이 아니라 정말로 서유럽 크리스트
교세계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헝가리초원이라는 절호의 목지겸 전진기지를 얻은 바투군은 어디까지라도
나아갈 작정일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행운스럽게 바투는 병사을 되돌렸다. 그것도 2번 다시 헝가리 평원에 진주하는 일은 없었다.
연합군을 조직하는 것마저 불가능했던 서유럽은 구원받았다. 그리고 아드리아해의 작은 섬에서 되돌아온
베라4세는 ‘몽골 내습’의 경험과 교훈, 더욱이 재습격의 위험을 부르짖어 방비를 굳히고, ‘헝가리 제2의 건국자’
라고 불리우게 된다. 몽골이 국가나 권력의 조직화를 촉진한 수많은 예의 하나이다.
거인 인노켄티우스 4세
몽골이 다시 찾아 온 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도 보증할 수 없었다. 1243년 로마교황으로 선출된 제노바 출생의
인노켄티우스 4세는 로마교황청으로써 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싸움을 계속하면서
불가사의하게 위험성으로 가득찬 아득한 저쪽 동방과 몽골에 대해 몇가지의 대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책동 때문에 로마를 떠난 인노켄티우스는 교황령의 하나인 프랑스의 리옹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역사상 유명한 제1 리옹공회의를 열었다. 1245년 6월 바투의 철퇴로부터 3년 뒤의 일이다.
의제는 프리드리히 문제나 제4차 ‘십자군’의 결과, 콘스탄티노플에 성립해 있던 라틴제국으로의 지원 등 이외에
‘타르타르’ 즉 몽골의 다음번 공격으로의 대책도 있었다. 몽골군의 통과를 차단하는 방어벽의 구축, 몽골 정보의
교황에게로 연락, 그것들 경비의 교회에 의한 지불 등이 상의되었다.
몽골에 관해서는 직접의 방어책이외에 유럽으로의 공격을 멈추게하여 가능하다면 몽골 자체를 크리스크교로
개종케하는 것이 요망되었다. 그 때문에 몽골령으로 탁발수도회사에 의한 사절단을 몇 개 파견하는 것으로
했다. 물론 적정 정찰도 중요한 임무였다.
동방전도의 가운데 중동방면은 이미 선교활동을 시도하고 있던 도미니크 수도회에 맡겨졌다.
그리고 북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독일․동유럽․루시방면에 관해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담당하고, 그 창설이래
의 중요한 요원이었던 프라노 데칼피니의 죠반니가 이미 리옹공회의의 2개월전에 인노켄티우스의 명령으로
몽골로 파견되었고, 교황은 회의에서 그 추인을 요구했다.
이러한 서유럽 크리스트교세계의 몽골 대책은 로마교황청, 특히 인노켄티우스 4세 자신의 강력한 주도에 의해
추진되었다.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을 비롯한 북이탈리아로부터 더욱이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에까지
세력을 펼치고 있었지만 바투의 침공군의 공포가 정점에 달한 때만, 통일행동을 구하는 편지를 유럽의 군주들
에게 보내는 것에 그쳤다. 스스로 나아가 유럽을 대표하여 공통의 외적에 대하는 자세를 결여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공포와 위험의 근원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고, 냉정하고 확실하게 손을 쓰려고 더욱이 나아가서 ‘적’과
의 직접교섭과 정보수집에 노력하려고 한 것은 교황이었다.
인노켄티우스 4세는 대망을 품고 있었다. 교회내부에서는 개혁을 추진했다.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중동방면의
네스토리우스파를 비롯한 여러 분파나 루시방면의 정교회도 포함하여, 크리스트교회의 대통일을 지향했다.
그는 성속양면으로, 유럽을 대표하는 지도자는 황제도 그 누구도 아니라 교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대몽골 정책에는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의 ‘동방정책’과 그것에 의한 교황권력의 한층 확대의 의도
가 숨겨져 있었다.
10년이상에 걸친 재직기간의 후반에는 인노켄티우스 4세는 남이탈리아의 제압에 성공하여 호헨 슈타우펜가의
황제지원에 쐐기를 박았다. ‘몽골의 공포’가 최고조에 달한 시대였기 때문이었기야말로 오히려 그것을 이용
하여 유럽과 크리스트교라는 2개의 ‘세계’를 영도한 교황의 권력은 빛났다. 인노켄티우스 4세는 중세 서유럽의
‘십자군시대’의 종막을 장식한 거인이다.
반세기 정도후에 편찬된 라디드 압딘의 집사의 ‘프랑크사’에 있어서 유럽최대의 권력자는 이의없이 로마
교황이라고 되어있다. 그것에 다음가는 것은 프랑크왕이다. 신성로마교황이라는 이름의 독일왕의 힘은 몽골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비춰졌다. 필시 그것이 현실의 모습이었다.
행운의 사나이 칼피니
1180년무렵 태어났다고 하는 칼피니는 이미 독일방면을 중심으로 20년 이상에 걸친 선교활동의 책임자이고 60
세를 넘은 상당한 ‘거물’이었다. 그는 타르타르의 군주에 전해주는 2통의 편지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들고 있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바티칸공문서관에 전해지고 있다. 가장 위에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설명하고 침략과 파괴를
그치고, 크리스드교에 의한 평화의 길을 권하는 자신에 가득찬 내용이다.
칼피니 일행은 1245년 4월 16일에 리옹을 출발하여, 바투가 본영을 설치한 볼가강 유역을 향했다.
도중 본래의 임지인 케룬을 거쳐, 쿠라코라, 블라디미르, 키에프와 육로를 통해 바투의 아래로 향했다.
자기 자신은 몽골본토의 동향을 싫어하고 있었던 바투였지만 편지의 내용에서 새로이 선출되었을 터인 대카한
아래로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칼피니는 단지 한사람 폴란드인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베네딕트만을 동반하여,
바투가 인가한 역전루트를 이용하여 1246년 7월 22일, 카라 코룸 근교에 있는 여름 대막영지 ‘시라 오르도’
즉 몽골어로 ‘황금의 천막’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두사람은 새 황제 구육의 즉위식에 참가한 행운을 가졌다.
칼피니 등은 4개월에 조금 모자란 정도의 체재동안 구육과의 알현이나 서기국 수반 칭카이 등과의 회견을 비롯
하여, 갖가지의 체험과 견문을 쌓았다. 새 황제즉위의 쿠릴타이에는 제국의 요인들로부터 속령의 왕후․유력자
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인물은 모조리 참석하고 있던 것으로 몽골을 관찰하는 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동년 11월 13일, 돌아가는 길에 있던 칼피니 등은 전에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다시 바투의 본영을 거쳐
1247년 가을에 리용에 도착했다. 칼피니는 그 귀환도상에서 루시에서 몽골인의 역사라는 보고서를 기록
했다.
그 내용은 대개 몽골의 실정분석과 전쟁대책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명히 적정를 살피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서술은 솔직하고 사료성이 높다고 인정된다. 단지 칼피니 자신의 성격인지 로마교황청을 비롯한
당시의 크리스크교회관계자가 일반적으로 그러했는지 아무것에도 의하지 않고, 독선적이며 사태를 과도하게
자신의 입장으로 평가․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칼피니가 말하는 몽골의 모습은 짐짓 ‘야만성’이나 파괴․살육이
강조되어 있다. 자신들 ‘크리스트교 문명’의 우위를 서술하고 있는 한편,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의 가치를 높게
말하고 ‘위기’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칼피니는 그럴만한 바탕의 인물로써는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수수께끼의 사람들인 몽골의
진실한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일약 유럽의 유명인이 되고, 오늘날 말하는 강연여행을 하여 각지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구육의 답장
칼피니는 구육으로부터 교황에 보내는 답장을 지니고 있었다. 몽골의 황제가 유럽의 권위자에게 보내는 최초의
‘국서’였다.
그 편지는 칼피니의 보고서에 의하면 몽골어로 기록되어, 그것을 칭카이 등이 페르시아어로 번역하여, 더욱이
칼피니 등은 라틴어로 적었다고 한다.
그 후 오랜동안 라틴어 번역문만이 전해져 왔었지만 1920년에 바티칸공문서관에서 페르시아어에 의한 편지가
우연히 발견되어 3년후 프랑스동양학을 대표하는 대학자 폴 뻴리오에 의해 역주․연구가 발표되었다.
첫머리 3줄만은 튀르크어로서 몽골 명령문서에 거의 공통한다고 인정되는 정형구이다. 남은 본문은 모두 페르
시아어로 지어져 있다. 그리고 길이 112cm, 폭 20cm의 종이 두군데에 위글문자 몽골어에 의한 문장을 새긴
큰 구육의 옥새가 붉게 찍혀 있다.
편지의 내용은 교황을 ‘위대한 파파’ 즉 ‘대교황’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스스로 제후를 이끌고 찾아와서 몽골에
신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세계의 각지는 모두 그곳이 몽골에 따르고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언젠가는 모두 몽골의 신하가 될 터의 것이라는 생각이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문장중에는 ‘신의 힘으로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은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에서 몽골의 ‘세계정복선언’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몽골 아니라 구육은 자신과잉의 기미마저도
보인다.
인노켄티우스 4세를 비롯한 교황청의 사람들의 반응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의 큰뜻을 설명한
교황의 편지와는 너무 정반대의 답장이었다. 환영되었을 리가 없다. 칼피니의 보고서쪽은 여러 사본이나 판본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잘 알려지고 흔히 읽혔다.
한편 최고권위자의 교류의 실물에 틀림없는 이 편지은 6백 수십년에 걸쳐 알려져지 않은 채 두어졌다.
혹은 ‘숨겨’졌을 지도 모른다.
이 편지에 관해서는 실은 아직 미해결점이 많다.
예를 들면, 이것이 페르시아어에 의한 ‘번역문’이라면, 어째서 구육의 인새가 찍혀 있는 것일까?
적어도 이 페르시아판도 ‘원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페르시아어는 당시의 국제어이다. 서유럽에 대해서는
몽골어보다도 오히려 유효하다. 칼피니가 말하는 것처럼 몽고어의 ‘원 편지’가 정말로 있었을까? 일부러 ‘원본’
을 두통이나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또 이때까지 어쨌든 몽골어로 된 도장에 새긴 튀르크어에 의한 첫머리의 말을 근거로하여 몽골은 ‘왕권신수’의
사상을 가지고 그것에 의해 스스로의 ‘세계정복’을 정당화하고 있었다고 말해지기 쉬웠다.
그러나 몽공의 소박한 ‘상천(上天 ; 텡그리)’숭배는 정말로 유럽풍의 ‘왕권신수사상’ 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것보다도 조금전 우구데이시대의 몽골을 관찰한 남송사절의 수행원들의 기록 흑달사략
(黑韃事略)에 의하면 이미 그때부터 극히 보통의 몽골들이 입을 열면 ‘영원한 天(텡그리)의 힘으로’라고 말하
고서부터 서로간의 대화를 시작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몽골들로써는 극히 흔한 일상적인 정해진 문구였다.
이러한 관용구를 방패로 삼아 인노켄티우스 4세의 현지에 보인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세계관과 비교한 ‘야만
적인 신권사상의 발로’ 등이라고 말하거나 한 것은 어찌 된 것인가.
단지 적어도 편지에서 몇 가지의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골은 당시 이미 ‘세계’라는 것을 확실히
의식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점. 그 ‘세계’는 ‘이르’와 ‘부르가’ 즉 ‘평화, 동지’와 ‘불복종, 적’이라는 극히 간단한 2대
개념으로 나누어져 있던 점. 그것은 ‘다르 알 이슬람(이슬람의 집)’과 ‘다르 알 할브(전쟁의 집)’이라는 2대개념
으로 ‘세계’를 구별한 이슬람의 세계관과 의외로 닮아 있는 점. 그리고 몽골은 크리스트교 세계의 유럽을 그다지
중시도 강대시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중심은 로마교황인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은 점.
이러한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한 사절단
칼피니의 ‘성공’에 비해 도미니코회의 사절단은 불운이었다. 필시는 북부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지방의 사람
이라는 아스케리누스를 대표로하는 사절들은 서아시아방면에 있어서 몽골군단 ‘타마’의 진영을 찾았다.
서북이란의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소아시아의 룸 셀쥬크령에 걸친 땅을 위압하고 있던 이 특수군단는 춀마군
에서 바이쥬에 지위권이 인계되어 당시, ‘대(大) 아르메니아’의 지지안에 군영을 두고 있었다.
1247년 바이쥬의 진영에 도착한 아스케리누스들은 교황으로부터의 편지를 꺼내어 바이쥬와의 회견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숙이지 않고, 크리스트교의 우월을 주장하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고자세로 행동하였기 때문
에 몽골 장관들은 격노했다. 동행한 산칸탄의 시몬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은 솔직히 발언하였지만 나쁜쪽은
몽골측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그 대화내용을 읽으면, 어떻게 보더라도,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들의
쪽이 지나치다. 좋든싫든 노련했던 칼피니에 비교하면 외교에 불가결한 유연함이 모잘랐다.
그들은 결국 바이쥬와 만나지 못하고, 1247년 7월 20일발의 교황에게 보내는 바이쥬의 편지를 건내받고 되돌아
갔다. 그 편지는 황제 구육의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 바이쥬가 발한 ‘우게’ 즉 몽골어로 ‘언어’라고 말해지는 명령
문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몽골의 관방상의 습관에는 단 한사람의 지고의 권위자인 대카한의 명령이나 그 문서는 ‘쟐리크’ 즉 몽골어로는
‘우르러다. 명령’이라고 불리운다. 그 다른 왕족․후비․족장․장관․신료가 발한 명령에 관해서는 모두 ‘우게’라고
하여 확실히 구별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국서이든 보호특허장이든 몽골로써는 모두 ‘명령’인 것이었다.
바이쥬의 편지는 역시 교황 스스로가 선두에 서고 신종해 올 것을 바라고 있었다. 칼비니가 가져온 구육자신의
답장의 내용과 분명히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구육이 황제가 되고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 의사는 몽골 서방의
최전선에 있는 바이쥬에까지 철저하게 전달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칼피니가 가지고 돌아온 답장에서 필시 그때를 거치지 않고서 바이쥬의 편지도 보게 되었던 인노켄티우스 4세
이하의 로마교황청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기분으로 그것을 읽었을까 상상의 여지는 있다. 원래 ‘몽골의 공포’
는 줄어들 수 없었다.
성왕(聖王) 루이의 좌절
여기에 교황과는 별도로 또 한사람의 권위자가 서유럽측에 등장한다. 그것은 ‘산(聖王)’이라고 불리운 프랑스왕
루이 9세이다.
루이는 극히 경건한 크리스트교도였다. 그리고 프랑크왕권의 확대와 동방진출이라는 강한 의욕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십자군’이 되어, 그는 스스로 제7차 ‘십자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떠나게 되었다.
1248년 이집트진공의 준비를 위해 키프로스섬의 니코시아에 머물고 있던 루이 9세의 아래로 몽골 장군 엘지기
데이로부터 보내졌다고 칭하는 2명의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도의 ‘사자’가 찾아왔다.
엘지기데이는 구육 새 정권에 있어서 새로운 중동진공군의 전선사령관이 될만한 인물이었다.
2명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엘지기데이의 편지를 내놓았다. 루이 9세는 이것을 도미니크수도회의 론쥬모의
안도르에게 명령하여 라틴어로 번역케 했다. 안도르는 인노켄티우스 4세의 명령으로 중동에 파견되어 있던 또
하나의 도미니크사절단의 한사람으로 아제르바이잔방면의 네스토리우스파의 대표자 시메온 랍반 아타와 회담
을 가지고 교회 대연합의 가능성을 구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몽골이 크리스트교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문맥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2명의 사자도
분명히 루이 9세에 그렇게 생각되도록 언동을 힘섰다. 그들은 황제 구육도 사령관 엘지기데이도 크리스트교도
가 되었다고 밝힌 것이다. 확실히 구육에 관해서는 사실 그렇게 말해도 좋은 점이 있다.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해
신자로까지는 말할 수는 없어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성왕 루이의 마음은 움직였다. 그는 우호와 제휴를 구하기 위해 안도르를 포함한 3명의 도미니크회
수도사를 프랑스국왕의 정식사절로써 몽골의 ‘사자’ 2명과 함께 출발시켰다. 1249년 2월의 일이다.
그러나 이미 구육은 전년도에 타계했었다. 중동진공계획은 사라졌다. 그리고 몽골의 정세는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엘지기데이는 자신의 군영에 도착한 안도르 등 일행을 황제가 없는 동안의 서무를 맡은 구육의 미망인,
오구르 가이미슈에게로 보냈다. 1250년에 일행이 도착한 오구르 가이미슈의 오르그는 구육의 옛 영토인 중앙
아시아의 에미르강변에 있었던 것 같다. 그 땅에서 안도르 등은 몽골 황제의 개종을 축하하는 선물로써 루이 9
세로부터 맡아온 화려한 천막으로 만든 예배당과 성서․성기(聖器) 등을 내놓았다. 휴대용인 그 예배당은 진한
붉은 색의 직물로 만들어진 크리스트의 생애를 묘사한 자수가 베풀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구르 가이미슈의 반응은 완전히 쌀쌀맞았다. 1251년 4월. 팔레스티나에 있던 루리9세의 아래로 귀환한
일행이 가져온 답장은 루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금은의 공납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멸망될 것이라고 루이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9세는 사절을 보낸 것을 후회했다. 몽골 황제와 동서협동하여, 무슬림세력을 타도하고 성지를 회복한다고
하는 루이의 야망은 단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부정할 수 없이 통감했다. 루이는 이것으로 1년만에 2번의 굴욕
을 맛 본 것이 되었다. 그는 전년도 이집트 진공중에 아이유브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진공하면서 주의부족으로
소수의 수행원만으로 전선으로 나아가서 포로가 되었다. 다미에트의 프랑스군 진영은 루이의 신병과 교환으로
막대한 몸값과 군의 철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존심 강한 루이의 마음은 거듭된 실패에 상처입었다.
본래 오구르 가이미슈의 대응도 졸렬했다. 몽골로써는 프랑스왕이 나아가 내뻗친 중동공격의 좋은 기회를 빤히
보고서도 스스로 잡지 못했다. 결국 오구르 가이미슈에게는 그 만큼의 판단력도, 정략도 그리고 책임감도 없었
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루이의 사절단이 돌아간 그 다음해 새 황제 몽케의 명령에 의해 칭카이나 그 밖의
옛 구육계열의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어 버렸다.
루부릭의 여행
유럽으로써 ‘몽골의 공포’가 계속된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 유익한 몽골에 관한 보고서를 남긴 것은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 기욤 두 루브릭이다. 그러나 그 보고서 이데이네라리움(旅行記)는 겨우 4종류의
사본밖에 전해지지 않고, 칼피니의 몽골인의 역사와는 크게 다른다. 그 여행기의 중요성도 겨우 근년이
되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동안 일부러 그 존재가 숨겨졌던 가능성마저 있다.
1253년부터 1254년에 몽골고원에 도착한 루브릭의 여행은 하나부터 열까지 행운이었던 칼피니와는 완전히
반대로 일종의 알 수 없는 여행이었다.
그는 루이 9세로부터 파견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정식의 사절은 아니었다. 루이 9세는 전번의 실패에 혼줄
이 나 있었다. 안도르수도사 등의 보고에 의해 몽골령에는 많은 네스토리우스파나 야곱파의 신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투의 장자로써 그 계승자로 예정되어 있던 사르타크가 크리스트교도가 된 것 같다고 하는 소문
도 들었다. 루이 9세는 동방에 관해 새로운 희망의 등불을 발견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시 굴욕
을 맛보게 되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루브릭은 어디까지나 일개의 수도사로써 스스로의 의지로 살타쿠 등의
아래로 ‘전도’를 위해 동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루이 9세와 인노켄티우스 4세의 친서를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2명의 종자를 데리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9년 전의 칼피니에 비교하면 훨씬 고달프고 불우한
여행이 되었다.
팔레스티나를 출발한 루브릭 일행은 여전히 라틴제국이 제압한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해로로써 흑해를 건너,
크리미아반도의 유명한 이탈리아 식민무역항인 스다크에 상륙했다. 이른바 킵착초원에 들어간 일행은 당면의
목적지인 사르타크의 막영으로 찾았다. 사르타크는 ‘바투 울루스’ 가운데 루시를 포함한 서방영토를 부친으로
부터 맡아 있었다. 그것이 집사를 비롯한 모든 페르시아어 사료에서 바투의 ‘카임 마캄’ 즉 ‘후계자’가 된
사르타크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사르타크는 크리스트교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전도의 가부는 자신 한사람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고 해서 일행을
볼가강변의 바투의 막영지로 보냈다. 그런데 바투도 또 루브릭에게 나아가 황제 몽케의 아래로 보내, 전도의
허용을 받도록하라고 이야기했다.
더욱이 보통 이때 ‘바투 사라이’라고 통칭되는 도시 혹은 ‘수도’가 존재하고 그곳에서 바투와 루브릭이 만났던
것 처럼 말해진다. 그러나 이 무렵 조치 울루스에는 아직 고정된 ‘수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라이’라는 페르시아어는 ‘집, 숙, 궁전’ 등 폭넓은 단어이고, 필시 이동식 천막의 ‘궁전’인 바투의 ‘오르도’를
페르시아어로 ‘사라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바투 사라이’라는 도시는 실은 환상이다.
일개의 ‘전도자’에 지나지 않는 루브릭은 심한 고난을 거쳐, 1253년 12월 27일, 추운 겨울을 카라 코룸 남쪽 교외
에서 동영하는 몽케의 오르도에 도착했다.
그때로부터 7개월 여 동안 머문 루브릭은 몽케와의 회견, 카라 코룸성의 관광, 네스토리우스파․무슬림․도교․불교
등의 종교자에 의한 토론 등을 맛보았다. 몽케는 루브릭이 사르타크의 땅에서의 전도를 위해 찾아왔다고 주장
해도, 몽골로의 종신을 위한 사절이라고 보았다. 그 때문에 오히려 루브릭은 그 나름대로의 대우를 받았다고
하는 은혜를 입었다.
1254년 7월 루브릭은 루이 9세에 전하는 몽케의 답장을 받아, 되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3년전의 오구르 가이미슈의 답장에 대신할 만한 답장이었다. 루브릭이 써놓은 그 내용은 확실히 오구르
가이미슈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루이를 ‘프랑크’의 군주로 인정하고 ‘프랑크’의 땅, 즉 유럽에 몽골의 명령을
전하라고 명하고 있다.
물론 몽케의 답장도, ‘세계’의 패자 몽골의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단지 구육이나 오구르 가이미슈의 답장에는
기묘할 정도의 어떤 종류의 허세가 느껴지는 것에 비해 이쪽은 그 나름대로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 납득이 가는
문맥이다. ‘세계’의 ‘안녕’, ‘기쁨’, ‘평화’를 대의명분으로 호소하는 부분, 실은 인노켄티우스 4세가 구육에게
보낸 편지도 그 크리스트교 색채를 빼버리면 그렇게 큰 차이 없다. 이 점에 관해 몽골의 ‘야만적인 정복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루브릭은 돌아가는 길은 쟈무치 루트에 의해 신속하게 볼가강변의 바투의 오르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남하
하여 카프카즈를 넘어, 소아시아를 거처 1255년 8월 15일 트리폴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루이 9세는 이미 프랑스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루브릭은 아코에 가서 루이 9세에 보내는 복명서를
적었다. 그것이 전술한 여행기이다.
루브릭의 여행기는 칼피노의 몽골인의 역사나 그 종자 베네딕트 혹은 산칸탄 등의 기록의 어느것보다도
훨씬 장문으로 정보에 풍부하고 기술도 극히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관찰로 가득차 있다. 몽골과 13세기의 중앙
아시아에 관해서 유럽인의 손에 의한 가장 뛰어난 기록이다. 칼피니나 그 밖의 종종보이는 과장이나 혹은 몽골을
위험하고 야만적인 ‘파괴자’라는 핑계로 헐뜯는 분명한 곡필 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루브릭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기록한 여행기가 루이
9세 개인에게 바치는 복명서였기 때문이라는 그것만의 이유도 아닌 것 같다. 몽골의 이미지형성를 위해 칼피니
가 행한 역할은 좋든싫든 컸다. 그러나 역사의 재구성를 위해서는 루브릭쪽이 훨씬 현대의 역사연구자의 친구
가 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Ⅱ. 세계사의 변모
1. 쿠빌라이의 권력 탈취
쿠빌라이와 프레그
몽케정권의 성립에 의해 역사의 표면에 부상한 인물이 있다. 몽케의 친동생 쿠빌라이, 프레그, 아릭 부케이다.
그들은 몽케즉위에 의한 톨루이가의 복권이 없다면 과연 역사상에 지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름을 남겼을까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특히 쿠빌라이와 프레그가 다른 운명을 더듬어 갔다면, 대원 울루스도 프레그 울루스도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계와 세계사의 진행도 어쩌면 크게 달랐을 지도 모른다.
역사는 극히 자질구레한 운과 선택에 의해, 그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형 몽케에 의해 쿠빌라이는 동쪽, 프레그는 서쪽을 할당받았다. 동서의 담당에 몽골국가로써의 의미지움이나
서열이 있었을까? 어쩌면 쿠빌라이와 프레그의 2명에 각각 동쪽과 서쪽을 담당케 했을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쿠빌라이도 프레그도 거의 의문에 싸인 전반생 속에서 1251년에 갑자기 역사의 겉 무대에 등장했다고 해도 좋다.
그것도 처음부터 당시의 세계에서 굴지의 중요한 인물로써 2명에 관한 모든 것은 그때부터 이후의 활동에 있다.
격동(激動)의 해
1259년 8월. 쿠빌라이는 막 평성된 보기(步騎)의 대부대를 이끌고, 중국본토의 거의 중앙, 회하(淮河)의 상류부,
여수(汝水)변인 여남(汝南)의 땅에 진주하고 있었다. 남송과의 국경선이다. 목표는 것은 장강중류유역에 있어서
최대의 거점도시, 악주(鄂州). 현재의 무한(武漢)이다. 그곳은 운남고원을 출발하여, 남송의 배후에서 적지
(敵地)을 종단해 온 우랸카다이군과 만날 지점이었다.
그곳으로 사천의 몽골 본대로부터 황제 몽케의 급사를 알리는 배다른 동생 모게로부터의 밀사가 도착했다.
원사는 모게의 통보를 1개월 정도 후인 9월 26일(서력환산), 쿠빌라이군이 장강북안에 도착한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집사 그외의 기록과의 대조에서 여남 주영중에 우선 ‘밀사’가 도착하고 뒤에 ‘정식적인 사자’가 찾아
왔다고 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원사는 정치상 정말로 미묘한 이 시기의 일에 관해서 ‘명분’을 기록하고 있다.
쿠빌라이와 모게는 같은 나이의 이복의 형제일 뿐만이 아니라, 몽골에서는 강한 인연으로 연결된 젖형제이기도
했다.
쿠빌라이의 친어머리로 톨루이의 정후였던 소루코쿠타니는 쿠빌라이가 태어나자, 거의 바로 모게를 출산한
톨루이의 측실에게 이를 맡겼다. 귀부인은 자신이 양육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게는 이때 몽케의 친정기,
사천에 진공하고 있는 몽케본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행운이었다. 자신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게가 재빨리 이 중대사를 정식적인 사자에 앞서 일찌감치 전해주었다. 그것도 이 후 제각각 후퇴해 간 몽케
본군속에서 그 잔류부대의 지휘권은 다름아니라 모게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칭기스의 초창부터 이미 반세기이상, 유라시아의 상당한 지역을 그 손안에 장악하고 있을 터인 제왕인 몽케가
최전선의 군여에서 돌연히 타계해버린 이상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몽케는 그때 52세. 제국의 정세는 단번에
긴박해졌다.
이 때 제국은 유라시아의 동서에서 2대 작전을 전개중이었다. 동방에서는 남송에 대한 황제 몽케 스스로의 원정.
서방에서는 황제의 동생의 한사람인 프레그에 의한 서정군이 이미 북시리아에 진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동방작전 쪽은 본래라면, 쿠빌라이의 임무일 터이었다. 정세에 따라서는 제국 그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게 되었다. 몽골 분열의 가능성과 후계다툼으로의 염려을 함께 가지고, 1259년부터 다음해인 1260년은 세계
사상으로도 드물게 보이는 규모에서의 격동의 해가 되었다.
확집(確執)
이것에 앞서 대카한인 몽케와 동방을 위임받았을 터인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갈등이 전사가 있었다.
1251년, 몽골고원의 동남쪽 구석, 중도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은 금연천(金蓮川)의 초원에 들어간 쿠빌라이는
그곳을 동방경영의 본거지로 정했다. 그는 ‘막부’의 아래에는 칭기스이래, 동방경략의 임무를 맡아왔던 쟈라일족
의 무칼리국 왕가의 이외에 제국동방의 여러 세력이 새롭게 조직화되었다. 쿠빌라이막부가 동방제압의 제1탄
으로 선택한 것은 운남(雲南)․대리(大里)로의 원정이었다. 이것은 최대의 목표인 남송을 측면 내지 배후로부터
공격할 수 있는 의도가 있었다.
중국본토의 중앙부, 서로부터 동으로 흐르는 회하의 남북 양측의 띠모양의 지역은 금국과 남송과의 120년에 걸친
남북항쟁의 결과 거의 황폐화되어 있었다. 폭은 약3백에서 4백km 정도에 걸친, 거대한 ‘공백의 벽’이 가로로
걸쳐져 있었다. 화북에서 직접적으로 강남으로 진공한다고 하면, 이 사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행군상으로도
보급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만약 운좋게 이것을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장강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물의 벽’이 가는 길을 막아 선다.
게다가 강력한 성호(城濠)로 지켜지는 남송 여러도시는 그 하나하나의 공략마저 쉽지 않았다.
필시 당시의 유라시아 전역에서 비교하더라도 남중국의 성곽도시는 굴지의 방어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쿠빌라이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금련천막부는 이러한 남송에 대해 성급한 정면공격에 의한 단기결전을 피하려고
했다. 그 때문에 1253년 가을부터 시작된 운남원정이 성공하자, 쿠빌라이 자신은 재빨리 뒷일을 부장인 우랸카
다이에게 위임하고 1254년말, 금련천으로 귀환했다. 그 후 잠시동안 눌러 앉아, 장기전의 구상을 선명히 했다.
금련천 고원의 한쪽에 개평부라는 중국식 소형도성을 건설한 것도 이 시기, 1256년 봄이다.
이러한 쿠빌라이에 몽케는 불만을 나타냈다. 과단한 그는 쿠빌라이 개인영지로써 운남원정의 직전에 주어진,
섬서의 경조(京兆)지방에 관해 회계에 의혹이 있다고 하는 명목으로 몽케정부요인에 의한 현장감사를 실시한
것이다. 감사는 준렬함의 극치였다. 쿠빌라이가 경조영지의 경영에 기용한 한인관료들은 처영되거나, 추방처분
되었다. 더욱이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1257년 봄, 대카한인 몽케 자신에 의한 남송친정이 발표되었다.
몽케는 단기결전을 바란 것이다.
쿠빌라이는 남송원정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원사의 「헌종본기」도, 「세조본기」도 그 이유를 적고 있지 않다.
몽케의 치세를 기록한 「헌종본기」의 기초인 헌종실록은 쿠빌라이의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쿠빌라이
의 일대기인 「세조본기」의 기초인 세조실록은 쿠빌라이의 손자인, 그 후계자가 된 성종테무르시대에 정리
되었다. 진상은 적을 수 없었을 것이다. 라디드 압딘의 집사는 쿠빌라이는 ‘다리의 통증’ 즉 ‘통풍(痛風)’이기
때문에 이 때는 쉬어라고 하는 몽케의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몽골에서 ‘다리의 통증’이라는 것은 무엇보다고
불참가의 구실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참가하지 말라’고 말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집사도 또한 쿠빌라이 제외의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다.
몽케와 쿠빌라이의 사이에 원사, 집사에서는 기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 확집(確執)에 관해서 다른 사서도 거의 기록한 곳이 없다.
몽케의 급서(急逝)
어떻든 두 영웅은 불화하게 되었다. 몽케는 곧 아랫동생 쿠빌라이의 대역을 동방3왕가의 맹주 옫치긴가의
타가챠르에게 기대했다. 타가챠르는 아직 20세도 될까말까 하는 젊은이였다.
작전구상은 몽골전통의 3군단방식을 밟고 있었다. 타가챠르는 동방3왕가와 오투하를 중핵으로 하는 좌익군단을
이끄는 ‘동로군’이 된다. 몽케자신은 중앙군단과 우익계의 여러 왕․여러 장수를 이끌고 경조-육반산지구에서
사천의 동부에 치고 들어간다. 이것이 ‘중앙군’. 그리고 나머지 ‘서로군’은 운남에서 발진한 우랸카다이군이다.
작전의 성부는 타가챠르에 걸려있었다. 그의 좌익군단은 ‘공백의 벽’을 피해, 중국본토의 중앙부 조금 서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사행하는 한수를 타고, 그 유역을 남하해서 장강중류유역을 제압한다. 몽케본대는 그 후를
서서히 진군한다고 하는 도식이었다. 그런데 타가챠르 휘하의 좌익군단은 1257년의 가을 양양(襄陽)․번성(樊城)
이라는 한수를 사이에 둔 쌍둥이도시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겨우 1주일만에 철퇴해 버렸다. 몽케는 당연
히 격노했다.
타가챠르의 철퇴는 수수께끼이다. 원사는 그 이유를 단지 2개월에 걸친 ‘장마’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즉 ‘가을 장마’이다. 그러나 가을의 장마정도로 제국 굴지의 강력한 부대가 왜 작전행동을 모두 방기하고 병사를
물려버렸는 가는 적고 있지 않다. 한편 집사는 몽케가 타가쟈르에게 보낸 질책의 말로써 타가챠르가 ‘주식
(酒食)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왜 공포의 제왕 몽케의 격노를 살줄 알고 있으면서도 ‘주식에
빠져있었’는가 하는 그 이유나 마음의 움직임은 적지 않고 있다.
작전계획은 시작부터 크게 틀어졌다. 거듭 과단한 몽케는 급히 타가챠르를 ‘동로군’의 주장에서 끌어 내렸다.
대신에 하명한 것은 뜻밖에 쿠빌라이의 재기용이었다. 계획은 신속하게 수정되었다. 성미가 급한 몽케는 2명의
문제의 인물 쿠빌라이와 타가챠르에게 더욱이 가혹한 작전행동을 할당한 것이다.
새로 편성된 쿠빌라이 ‘동로군’은 북에서 똑바로 황하․회하를 건너 장강에 이른다.
쿠빌라이에게 편성된 타가쟈르는 쿠빌라이보다 훨씬 동쪽을 동방3왕가의 부대만을 이끌고, 회하 하류유역의
형산(荊山)에서 양주(揚州) 그리고 장강하류유역을 향한다. 어느쪽도, ‘공백의 벽’을 돌파하여 ‘물의 벽’을 맡으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몽케 자신에게 튕겨졌다. 쿠빌라이․타가챠르 양군은 신편성과 재편성으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때문에 몽케는 대카한이면서 최전선에 돌출하여 사천에서 스스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빠졌다.
사천의 더위와 남송측의 산채(山寨)와는 몽케를 이중으로 괴롭혔다. 심하게 진전없는 전황에 화가나서 속태운
몽케는 스스로 전선에 섰다. 여름의 염서를 피하기 위해서 잠시나마 북환할 것을 권하는 주위의 의견을 무시
하고 어디까지나 강공을 계속했다.
그때 어떤 전염병이 사천의 몽케군을 습격했다. 집사는 그것을 ‘바바’라고 한다. 페르시아어․아라비아어로
‘전염병, 역질, 콜레라’ 등을 의미한다. 엄밀하게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른바 ‘페스트’가 아니었을까라고
억측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그랬었다면 14세기에 몽골을 중심으로 하는 유라시아의 거대한 번영을 무너뜨리게
되는 흑사병은 13세기 중반 이후에 동방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페스트’라고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어쨌든 1259년 8월, 몽케는 ‘바바’에 의해 쓰러졌다. 남송군으로부터 입은 상처가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진위의 정도는 결국 알 수 없다. 어느것이라고 하더라도 몽케는 무리에 무리를 더해 스스로 비극을 그 손으로
불러 들였던 것이다.
후계의 자격
라시드 압단의 집사에 의하면 형 몽케 타계의 밀보를 받았던 쿠빌라이는 곧 모장(謀將)인 바아트루와 둘이
서만 의논했다. 바아트루는 무칼리국왕가에서 금련천막부에 보내진 비장의 카드였다. 그는 점차로 쇠퇴를 향
하고 있던 무칼리가의 부활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무엇보다도 그는 쿠빌라이의 정후 챠브이의
친언니의 남편. 결국 쿠빌라이의 동서인 것이다. 쿠빌라이로써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나아갈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후계다툼를 생각하면 곧바로 북으로 되돌아가는 편이, 본디 득책이라고 생각
되었다.
이 시점에서 몽케의 후계후보로써는 두 무리의 인물이 생각되었다. 하나는 몽케 동복(同腹)의 동생인 쿠빌라이,
프레그, 아릭 부케이다. 또 하나는 몽케의 남은 아들 바루트, 아스타이, 시리기, 우룬, 타슈 등이다.
그러나 몽케의 자식들은 실제로는 어려웠다. 그들은 그 무렵 겨우 20세대였다. 몽골인으로써는 충분히 한사람
역할은 맡지만 대카한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몽골의 대카한은 초대인 칭기스칸에서부터 시작하여 우구데이, 구육, 그리고 몽케까지, 즉위한 나이는 누구든지
모두 40세대였다. 당시의 몽골들의 평균수명은 확실하지 않지만 40대는 상당한 연배라고 해도 그다지 잘못은
없을 것이다.
대카한은 일면으로는 확실히 절대 권력자였다. 단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몽골 울루스’라는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가져오기 때문이야말로 주어진 절대권한이다. 그 때문에 가장 적격자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자가 ‘호선’
으로 뽑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면에는 ‘몽골 공동체’의 의장이기도 하고, 조정역이기도 했다.
얼마나 혈통이 좋고, 또 우수하더라도 ‘조정역’으로써는 어느 정도의 연배가 없으면 무리였다.
유라시아의 각지에 흩어진 몽골왕족 가운데 아직 칭기스의 손자의 세대는 대부분이 장년기를 맞이하여 ‘몽골
울루스’의 중핵으로써 활약하고 있었다.
즉, 몽케의 세대이다. 몽케의 친동생으로 혈통도, 연령도 흠이 없는 3명이 있기 때문에 몽케의 여러 아들은 ‘시기
상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3명에 관해서는 어떻것인가. 누구나 자격에 있어서는 손색이 없다. 그러나 아득히 멀리 있는 프레그
는 그때 논의의 밖에 있었다. 새로운 대카한을 선출하는 쿠릴타이는 몽골본토에서 열릴 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쿠빌라이일까, 아니면 아릭 부케일까. 실력은 어쨌든 명분에 있어서는 몽케와 대립한 쿠빌라이는 불리
하였다. 몽케는 타계했지만, 옛 몽케정부는 카라 코룸에 건재했다. 아릭 부케는 톨루이 적출의 막내로써 몽골
본토의 서반에 해당하는 한가이에서 알타이에 걸친 광대한 톨루이가령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번의 몽케 친정에 있어서는 몽골본토의 유수(留守)를 맡아, 카라 코룸지구에 있었다. 당연히 옛 몽케정부의
사람들은 아릭 부케를 지지한다. 몽케의 남은아들들이나 후들도 몽케와 대립하여 그 비극의 원인을 만들었다
고도 할 수 있는 쿠빌라이를 지지할 리는 없었다. 누가 생각하더라도 객관적인 정세는 아릭 부케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운명의 도박
그런데 바아토르의 답은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진이었다. 바아토르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들은
군을 이끌고, 개미나 메뚜기처럼 이땅에 찾아 왔습니다. 소문때문에, 임무를 이루지 않고,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집사는 씩씩하게 매우 단순명쾌한 쿠빌라이와 바아토르의 모습을 그리려고 하고 있다. 왕가 근본의 미묘한
기밀에 관한 사건을 몽골의 누구에게도 알기쉽게, 납득하기 쉬운 방법으로, 본심을 적지 않고, 피하고 있는
것이다. 집사가 말하는 바아토르의 말은 결국 결론만이다. 실제는 그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운명을 건 선택
이었다.
바아토르의 판단은 정확했다. 명분에 있어서 열세인 쿠빌라이가 애태우고 바로 북환하더라도 그가 쿠릴타이
에서 새 황제로 선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선제 몽케의 작전계획 그대로 악주를 포위하는
쪽이 좋다. 누구도 북환을 예상하고 있다. 그 한창일 때 몽골들은 마치 ‘바다’처럼 두려운 장강을 건너 선제의
유지를 계승하는 자세를 보인 것은 다시없는 호소가 된다. 그것은 중국본토에 흩어진 몽골 각 부대의 ‘후미’를
굳이 일부러 사낸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 부각은 강렬하다.
그것은 또 적지(敵地)를 북상해 온 우랸카다이군을 구출하는 것도 된다. 맹장 스베에데이를 부친으로 하는
우랸카다이는 톨루이가의 숙장이기도 하고, 몽케 즉위의 쿠릴타이에서는 적측의 주장을 분쇄하는 당당한 논리
를 펼친 것이 페르시아어의 기록에 보인다. 그는 필시 순연한 친몽케파였다. 부장으로써 참가한 운남원정에서
는 주장쿠빌라이와의 불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쿠빌라이가 이상할 정도로 재빨리 귀환한 것에 원인 혹은
결과가 있었는 지도 모른다. 쿠빌라이로써 놓아두면 우군이 죽는 것을 못본척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는데가
가 그가 만약 생환한다면, 가장 강력한 적의 한사람이 될지 모른다. 그 우랸카다이를 적지에서 구출하는 것은
단지 우군 구출의 미명을 얻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본심이 있었다. 몽케의 즉위가 조치가와 톨루이가의 대병단에 지켜졌던 것처럼 새 황제 선출
의 쿠릴타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되었다.
힘의 뒷받침을 가지지 않으면, 얼마나 유능하고 성망이 높더라도 어쩔 수 없다. 특히 이 때의 이상사태는 무력
투쟁을 수반하는 격동하게 될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다.
쿠빌라이는 대부대를 이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편성하고서부터 1년도 되지 않았다. 집사에 의하면 쿠빌
라이가 1258년 12월 27일, 재기용을 명받자마자 받아야될 보급물잘르 못받은 채로 본거지인 금련천의 개평부를
떠난 때, 직속의 몽골부대은 1만이었다고 한다. 본래라면 쿠빌라이군에 참가해야만 할 터인 오투하의 군단은
옛 타가챠르 동로군의 해체후에도 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이 1만마저도 조금은 과장일지도 모른다. 그 후 남하
함에 따라서 많이 증가하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여남에 진주한 시점에 있어서 순 몽골 기병이 그만큼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키탄, 여진, 한족 등으로 이루어진 ‘한인’ 부대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정식적
으로 편성하고서부터 겨우 4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다음해인 1259년 여름, 화북평야를 남하한 쿠빌라이군은 산동서반의 한인대군벌인 엄충제(嚴忠濟)의 영내에서
하영했다. 동평지방의 ‘조복(曹濮)의 사이’ 즉 황하의 퇴탄지(退灘地)가 망망하게 펼쳐지는 조주(曹州)와 복주
(濮州) 사이의 초원이다. 이 야영지에서 여름의 더위를 피해 지내면서, 엄씨의 막료들을 비롯하여 많은 화북의
사람들과 철저한 대화가 반복되었다.
‘동평오십사성(東平五十四城)’을 묶는 엄충제는 지방정권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실력을 갖추고, 당시 가장 반몽골
자세가 강한 군벌이었다. 쿠빌라이로써는 자칫 잘못되면, 문자그대로 생명보존도 어려운 세력의 안주머니에
뛰어 들어간 것이다. 정말로 대담하였다.
쿠빌라이가 생각한 하영지의 선택은 성공이었다. 이후 쿠빌라이정권에 참가하게 되는 송자정(宋子貞)을 비롯한
엄씨 군벌의 막료들은 쿠빌라이에게 복종했다. ‘공백의 벽’을 넘기위해서 병참과 보급선의 확보는 이루어졌다.
병량만이 아니라 한인부대도 여기에서 대편성 되었다. ‘공백의 벽’과 ‘물의 벽’에서 가만히 앉아서 자멸하지
않을 만큼의 준비를 우선은 갖춘 쿠빌라이 동로군은 가을이 찾아옴과 함께 황하를 건너 남진해 간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북환한다면 모처럼 대편성한 지 얼마되지 않는 군단은 산산조각이 날지 모른다. 특히 한인부대는
‘양날의 칼’이다. 일단 황하의 북쪽으로 돌아가 버리면, 각각 본거지의 잔류분대와 연동하여 배신하지 않는다고
는 할 수 없다. 이릭 부케의 우위는 원래 몽골 내부의 사정에 관해서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한인군벌들에게는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이리라.
요 다음번 제위다툼을 위해서도 그리고 현재의 안전유지를 위해서도 군단편성을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이대로
남하하여, 이 대부대를 계속 장악하는 편이 좋다. 주장 몽케 자신을 잃은 사천의 본대에서는 이미 군대로써의
통제가 되지 않았다. 몽골고원의 주력부대는 다 나가고 없고, 아릭 부케의 손아귀에는 실은 큰 병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몽골동방 전역을 훑어볼 때 그것만큼 대병을 뭉뚱그려 유지하고 있는 것은 쿠빌라이와 타가챠르밖에
없었다.
바아토르의 말에는 이러한 계산과 수읽기가 들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남하를 결의했다.
곧바로 여남의 진영중에서 한인참모도 섞어서 주된 장관들을 모은 긴급회의가 열렸다. 그곳에서 몽케의 죽음을
전하는 밀사의 도착이 알려졌다. 유력한 한인학자 참모의 한사람인 학경(郝經)은 그의 문집 학경충공집(郝經
忠公集)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쿠빌라이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1259년 9월 10일(서력 환산) 여남을 출발하여 회하본류를 건넌 쿠빌라이 동로군은 단번에 남진하여 겨우 2주간
만에 장강북안에 도착했다. 곧바로 배를 모으자 같은달 29일, 도강했다. 미신을 많이 믿는 몽골 장병들을 안심
시키기 위해 ‘호부(護符)’ 즉 ‘부적’을 붙히고 장강을 건넜다고 집사는 전한다. 역사상으로 유명한 악주의
전투은 이렇게 해서 생기게 되었다.
장강변(長江邊)
장강의 남안변에 위치한 악주(鄂州)는 이른바 무창(武昌)이다. 북에서 유입하는 한수의 북안에 있는 한양(漢陽),
더욱이 장강과의 합류부에 면하는 한구(漢口)와 합쳐, 무한 3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훨씬후의 일이다.
현재의 무한은 이것들 전체를 가리킨다.
악주는 장강중류유역에서 최대의 도시일뿐만 아니라 수륙의 교통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몽골이 이
악주에 공격목표를 정한 것은 장강을 의지하는 남송을 동서로 정확히 양단할 것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그점에서는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구츄의 남정’도 다카챠르의 옛 동로군도 기본구상은 아마 마찬가지였다.
몽골로써 처음으로 장강을 건넌 쿠빌라이군은 악주를 포위하는 태세를 취했지만, 정말로 공격할 작정은 아니
었다. 그러나 남송측은 생각지도 못한 쿠빌라이군이 장강을 건넌 것에 의표를 찔렸다.
그것도 강력할 터인 남송 수군이 뻔히 알고서 그것을 허용해 버린 것에서 크게 동요되었다. 이미 사천의 동반부,
동천지방의 각 수비 부대로부터는 몽골 본대가 병사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보고가 도착하고 있었다. 한편, 광서․
호남․강서의 각 도시로부터는 우랸카다이군이 완전히 목적지를 찾는데 길을 잃은 것처럼 갈팡질팡 진로를 바꾸
면서 점차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남송정부는 쿠빌라이군의 도강과 함께 몽골측의 움직임을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다.
쿠빌라이군의 남하와 도강은 몽골 각 부대에도 놀라움과 충격을 낳았다. 그리고 우선 중국본토의 각지에 흩어진
여러 부대가 이것에 호응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여 무칼리국 왕가의 현 우두머리쿠르무시는 쟈라일부족군을
중핵으로 한 몽한 혼성군을 이끌고 숙부 바아토르가 있는 쿠빌라이 진영에서 장강을 건너 직접 찾아왔다.
오투하의 가운데 무칼리국왕가와 나란히 큰세력인 콘기라트 부마가는 칭기스의 정후 호르테의 친정이고,
이때 우두머리 나친은 ‘회전’ 즉 회수방면에서 주유하고 있었지만 쿠빌라이군과 호응하여 그 후방지원을 맡았다.
실은 나친은 이 전년에 죽은 형인 전 우두머리 오친과 함께 쿠빌라이의 정후 챤브이의 친오빠였다.
즉 나친도 또한 챠브리를 통해 쿠빌라이의 처남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타가챠르 휘하 동방3왕가의 군단이 쿠빌라이군으로의 합류를 표명했다. 몽케 및 그 정부와의
사이가 나쁘게 되어 있던 타가챠르는 쿠빌라이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그 영향력은 심대했다.
이것을 계기로, 상황은 크게 변했다.
정세의 흐름을 조망하고 있던 몽골 여러 세력은 눈사태를 일으킨 쿠빌라이쪽에 붙으려고 한 것이다. 사천방면의
여러 군단에서마저 옛 몽케본대의 잔류부대도 포함하여 상당히 많은 자가 쿠빌라이에 호응하는 자세를 밝혔다.
이렇게 되면, 쿠빌라이로써는 장강변에 언제까지나 머물 필요는 없었다. 이미 11월 24일의 시점에서 학경은 북
으로 돌아갈 것을 원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있었다. 그 ‘반사(班師)의 의(議)’의 전문은 그의 문집에 남아있다.
북상해버린 우랸카다이군과의 연락도 취한 쿠빌라이는 자파의 여러 군단에게 북환을 지령했다.
그리고 우랸카다이군 구출을 위해 부관 바아토르를 전군(殿軍)으로써 남기고 쿠빌라이 자신은 12월 23일(서력),
악주동쪽 근교인 청산기(靑山磯)에서 다시 장강을 건너 기마로 단숨에 화중․화북의 들을 달리고 달렸다.
자파의 여러 군단의 회합장소는 중도(中都)였다.
남송측에서는 이종(理宗) 황제의 총신 가사도(賈似道)가 구원부대를 이끌고 악주동방에 진주하여 쿠빌라이진영
과의 사이에서 은밀한 정전협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랸카다이군과의 합류를 이룬 바아토르의 부대가
그 합의에 따라서 군대를 끌고 장강을 건너려고 할 때 남송군의 일부는 습격을 가했다. 몽골측의 손해는 경미
했지만 가사도는 이것을 적군격멸의 대승리라고 보고하여 영웅이되어 임안(항주)의 수도로 되돌아가,
이후 독재권력자가 된다.
‘악주의 전투’ 그것은 극히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그곳에서의 전투는 이후의 역사의 전개
에 큰 영향을 주어 시대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즉 제왕 쿠빌라이와 대원 울루스의 탄생을 가져오고 그 한편으로
는 15년간에 걸친 가사도 정권을 이끌었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1259년의 가을에서 겨울의 악주와 장강변은
당시 몽골․남송의 사람 어느쪽으로부터도 주시의 표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되풀이하여 보더
라도 다시 주목할만한 의의를 가진 때와 장소였다.
황제 아릭 부케
서력 1260년은 쿠빌라이군의 중도집결로 밝았다.
아릭 부케는 몽골본토의 ‘유수(留守)역’이 된 자의 당연의 책무로써 몽케의 장례와 그것으로의 참집을 제국전토
에 알렸다. 그것도 그 한편, 얼마안되는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각지에서 옛 몽케정부 요인을 급파하여 열심히
징병을 했다.
쿠빌라이파의 여러 군단은 중도근교에서 집단 월동하고 봄이 찾아옴과 동시에 개평부에 있는 금련천의 초원
으로 북상했다. 그곳에서 몽골본토의 아릭 부케 등에 대해 선수를 쳐, 자파만의 ‘쿠릴타이’를 열고 쿠빌라이가
대카한에 추천되어 즉위했다. 쿠빌라이는 46세였다.
쿠빌라이 일당의 장의에의 참가를 요구하고 있던 아릭 부케 등 카라 코룸 중앙정부도 쿠빌라이 등의 태도가
밝혀지자 이제 주저하지 않았다. 쿠빌라이의 ‘즉위’에 다그쳐진 것처럼 몽골본토와 수도 카라 코룸주변에 체류
하고 있던 자들을 모아서, 그 다음달 카라 코룸성의 서쪽 근교 아르탄강변의 하영지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아릭
부케는 황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몽골제국에서는 처음으로, 2명의 대카한이 병립하게 되었다. 정통성으로 말한다면 몽케의 장의를 책임
지고 관리한, 몽골본토의 중앙에서 쿠릴타이를 열어서 즉위한 아릭 부케야말로 진정한 대카한이었다. 선제의
장의에도 참가하지 않고, 몽골고원의 동남쪽 구석에서 대카한을 칭한 쿠빌라이는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반란자
였다.아릭 부케가 정통황제라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예를 들어 형 바투의 타계후 그 적자 사르타크 나아가서는 적손 우라쿠치가 차례로 죽는다고 하는 이상사태의
속에서 부득이하게 조치 울루스 우두머리의 지위에 올라있던 베르케는 아릭 부케 즉위의 쿠릴타이 그것에 대해
서는 긴급의 개최였다는 것과 멀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참가는 불가능했지만, 분명히 아릭 부케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아릭 부케의 이름을 새긴 동전마저도 발행했다.
차아다이가에 관해서도 부친인 카라 프레그의 죽음후 몽케에게 계승을 명령받았던 여성 우두머리 오르쿠나가
직접 쿠릴타이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태도는 분명하였다.
더욱이 이 제국분쟁에서 결국 새로운 울루스를 ‘이란의 땅’에 수립하게 된 프레그 일문도 서몽골지역의 프레그령
과 그 오르도를 지기키 위해 부친인 프레그의 서정에 참가하지 않고, 잔류하고 있던 적자 쥬무쿠르가 아릭 부케
추대의 쿠릴타이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제위계승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필시 쿠빌라이파의 우세를 전하는 것을
들은 프레그로부터의 긴급한 밀명을 받고 몽골본토를 이탈하여 이란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프레그 울루스에서 편찬된 집사에 있어서 마저 아릭 부케에 관해서는 ‘쿠빌
라이기’의 뒤에 있어서도 그것에 준하는 것처럼 따로 항이 설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왕통도’라고 할 수
있는 페르시아어의 계보집 슈아브 이 판슈가나 즉 오족보(五族譜)에 있어서 확실히 아릭 부케를 역대
황제의 한사람으로써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단지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가 각각 몇대째인 것은 밝히지 않는다.
오족보가 집사와의 강한 관련의 아래에서 프레그 울루스에서 편찬된 것은 틀림없다. 아릭 부케이 ‘재위’
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치상의 입장에 있을 터인 프레그 울루스마저도 ‘대카한’으로써의 아릭 부케를 기록
에서 말살할 수 없었던 만큼의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후 티무르조 샤루프치하의 중앙아시아에서 그 장대한 역사편찬사업의 중심인물이었던 하페즈 아브르
등에 의해 칭기스가와 티무르가의 양통을 한짝으로써 페르시아어의 일대 계보집이 만들어졌다. 무이즈 아르
안사브 즉 고귀계보(高貴系譜)라고 한다. 몽골제국와 티무르조의 왕족에 관해 근본사료가 된 이 거대한
자료군의 전반에 있어서도 역시 아릭 부케는 이미 당연한 것처럼 역대 몽골 황제의 재위를 차지하고 있다.
집사, 오족보, 고귀계보가 아릭 부케에 관해 일련의 견해를 세우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각각의 편찬시기가 내려감에 따라 아릭 부케를 터부시하는 정치상의 올가미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모습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스탄불의 토프카프 사라이박물관의 도서관에는 현존하는 유일의 오족보의 사본과 함께 바이슨
구르 엘범이라 통칭되는 티무르조의 회화․뎃상․디자인집이 있다. 그 중의 십 여장은 칭기스․티무르 양 왕통의
간편한 왕통도로 주요한 역대 군주에는 인물상이 붙여져 있다. 여기에서도 아릭 부케는 몽케나 쿠빌라이와 동격
으로 다루어지고 젊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국 아릭 부케가 ‘대카한’이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적어도 그가 쿠빌라이의 군문에 항복한 1264년까지의,
해수로 5년에 관해서는 몽골제국의 대부분의 성원은 현 황제는 아릭 부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종래 ‘아릭 부케의 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화풍의 ‘정통주의’에 선 한문문헌에 오염된 결과이다.
본래라면 몽케의 다음에 ‘제5대’ 몽골 황제는 아릭 부케이다. 실력으로 그 제위를 찬탈한 쿠빌라이는 1260년부터
가 아니라 1264년부터 1294년까지 재위한 ‘제6대’ 황제로 해야할 터이다. 단지 그렇게 하면, 당시의 문헌에서의
황제순위와 맞지 않게 된다. 쿠빌라이왕조에서는 쿠빌라이는 ‘제5대’ 몽골 황제이지 않으면 안되고, 그후의 역대
대카한도 그 순번으로 헤아려서 오히려 그 순위를 높혀 과시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마이너스 유산
그러나 정통일까 그렇지 않을까라는 인식과는 달리 제위는 몽골사상 처음으로 무력에 의해 쟁탈되었다. 여기에서 4년간에 걸친 제위계승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황은 ‘반란군’인 쿠빌라이 진영이 초전에서 우세였다. 쿠빌라이군의 중핵을 이룬 동방3왕가와 오투하는 강력했다. 그것에 쿠빌라이는 원래 그에게 도박을 건 타가챠르 이하의 사람들은 만약 여기에서 진다면 자기 몸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일문․가계도 내일은 없었다.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한편, 아릭 부케는 엉급결에 몽케정부를 계승하여 정정당당한 ‘현 황제’인 만큼 몸 움직임도 부자유스럽고, 이렇다고 할 필사적이 되어 생명을 걸어줄 부하도 적었다. 아릭 부케에게 붙은 자들, 그리고 그 군에 동원된 자들로부터 한다면 이긴다면 당연하고, 현상이 유지될 뿐의 것이었다. 옛 몽케계열의 인간이 세력을 떨치는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반대로 힘껏 싸워서 만약 쿠빌라이파의 승리라도 되는 날에는 비참하다. 열심히 싸울 리가 없었다.
원래 아릭 부케파라고 말한 것에 몽케이래의 카라 코룸정부에 감히 반대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반란군’인 쿠빌라이 진영에 몸을 버리고 뛰어들지 않으면 안될 만큼 절박한 이유가 없었는 뿐이다. 오히려 주르르 무너진 몽케체제를 아릭 부케체제로 바꾸려고 하고 있는 옛 몽케정부의 사람들에게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현정권’이라는 이름의 , 끼어들어가서 결국은 행동을 같이해버려지게 된 그러한 상황에 어쩐지 섬찟한 불안을 안고 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내심으로는 분명히 억지가 심한 몽케 이래의 체제에 반발하면서도 태도에는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는 상태의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
아릭 부케의 진영의 속에서 그 나름대로 필사적이 되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자는 바라 아릭 부케 자신과 그 일가를 제외하면 적은 수의 인간들 밖에 없었다. 그를 몽케의 ‘대역’으로 선택한 몽케일문과 옛 몽케정부의 요인들 그것에 아릭 부케정권이 확립하면 일문의 영화가 약속된 아릭 부케의 처의 친정, 오이라드족 정도였다. 요컨데 칭기스시대이래 독립되어 억메이지 않은 강력한 집단으로 알려진 서북몽골의 ‘호이 인 이르겐(숲의 사람)’ 오이라트 이외에는 이렇다할 의지할만한 세력은 없었던 것이 실정이다.
표면에서는 ‘현정권’일 터의 아릭 부케측을 좌익군단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전의왕성하게 질량 공히 강력한 쿠빌라이군이 압도하는 전개가 되었다. 일단 힘의 틈새가 보이게 되자 몽케체제하에서 참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마이너스 유산’이 되어 단번에 아릭 부케정권을 습격한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차아다이가의 반란
차아다이가의 이반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군사상의 열세에 더해 화북에서 카라 코룸방면으로의 식량․물자의 수송을 금지한 쿠빌라이측의 경제봉쇄에 의해 아릭 부케정부는 점차 빈곤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궁지의 타개책으로써 아릭 부케는 1261년, 자신의 신변에 있던 차아다이가의 방류 아르그에게 우두머리의 지위와 바꾸어 차아다이가 영내에 있는 오아시스지대로부터 식량을 보내줄 것을 약속받고 출발시켰다.
그런데 아르그는 여성 우두머리인 오르쿠나로부터 그 지위를 빼앗자, 이번에는 아릭 부케의 카라 코룸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몽케즉위의 시기 눈에 두드러진 성년 남자의 제왕은 거의 처형 혹은 유죄되어 시조 차아다이이래의 거대한 세력권도 몽케와 바투에 의해 거의 몰수되어 버렸던 차아다이일문의 여러 왕․여러 장수에 의해 몽케체제를 계승한 현 정권은 본심으로는 한만이 남아 있을 뿐, 용인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차아다이가의 가운데 아릭 부케에 주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망부 카라 프레그의 남은 아들인 자신의 아들인 무바라크샤로의 양위를 단지 일편단심으로 원한 오르쿠나뿐이었다고 해도 좋다. 다른 일문 여러 장수는 차아다이가의 혈통도 아닌 이 여성이 몽케의 완전한 괴뢰가 되어 차아다이가의 이해를 무시한 채 말하는대로 중앙정부로부터 조종되고 있었던 상황에 분루를 삼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그가 오르쿠나로부터 우두머리의 자리를 ‘찬탈’하더라도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오히려 남자가 해야만될 우두머리의 아래에 결속하여 내일의 차아다이가의 영광을 되찾아 올 절호의 기회라고 환영했다. 또 아르그 자신으로써도 일단 우두머리가 되어버리자 몽케 이래의 차아다이가에 대한 강경자세를 계속한 아릭 부케정권은 이미 타기(唾棄)해야 만할 될 존재였다.
부활과 복수에 불탄 차아다이가는 일문을 들어 반아릭 부케, 현 정권 타도로 나섰다. 쿠빌라이와 아르그는 손을 잡았다. 아릭 부케정부는 앞뒤에 적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릭 부케 등은 스스로의 정통정권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는 제도 카라 코룸을 버리고 차아다이가 역대의 본거지인 이리계곡으로 나아갔다. 정면의 적인 쿠빌라이군과는 이미 이 1년전 펼칠 것인가 반할 것인가의 결전을 도발하고 물너나 있던 아릭 부케군으로써는 배후의 ‘반란자’ 아르그와 차아다이가로 가서 뛰어들어 그 영지를 빼앗아 그곳에서 한숨 쉬는 이외에,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몽케의 탄압이후 약체화되어 있던 차아다이군은 황제 아릭 부케가 친히 이끈 ‘정부군’의 필사의 공세를 지탱하지 못하고, 이리계곡을 버리고 마와라안나푸르로 퇴각했다. 아릭 부케는 몽골 황제로서 처음으로 창조 칭기스가 정한 제국 체제의 원칙을 범하고, 일족 올루스의 본거지를 점령했다. 그래서 1262년부터 1263년의 겨울을 이땅에서 지내, 퇴세만회(頹勢挽回)를 꾀했다.
그런데 이 동영동안 아릭 부케는 되돌리지 못할 실패를 범했다. 포로로 잡은 차아다이가의 장졸을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어리석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몽골 황제는 ‘몽골 공동체’를 위해서 있다. 몽골은 몽골에 대해서 한없이 부드럽다. ‘대카한위의 쟁탈’이라고 하더라도, ‘골육의 싸움’이라고 하더라도 유혈은 극히 정해진 당사자간의 것이었다. 일반 ‘몽골 공동체’ 성원이 그것에 의해 상처받거나,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지금까지 그다지 없었다.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감히 그것을 범한 몽케는 많은 몽골들의 원한을 샀던 것이다. 아릭 부케는 형의 실패를 실패로써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형이 범한 마이너스가 실은 아릭 부케 자신에게 닥쳐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체포된 차아다이가의 사졸도 또 아릭 부케군의 장관․병사들도 이미 몽골이 같은 몽골을 학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아릭 부케는 우세한 ‘반란군’ 쿠빌라이파를 앞에 두고 한사람이라도 많은 여당을 바라고 있던 현역 ‘황제’였다. 아릭 부케군의 상하는 동시에 놀라고 어처구니 없어 그리고 이 황제를 단념했다.
중앙아시아 방면에 분산한 우구데이 여러 파도 몽케파에 대한 원망을 아릭 부케에게 오버랩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확실히 내리막길에 들어선 그와 그의 ‘정부’에게는 거의 누구도 협력하지 않았다. 감숙지방의 옛 서하령에 울루스를 건설한 코덴가에 이르러써는 현우두머리 지비크 테무르가 개전초기 단계에서 자존심 강한 옛 몽케정부 요인의 태도에 화가나, 완전한 쿠빌라이파가 되어, 섬서․감숙방면에 있어서 쿠빌라이파의 승리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몽케의 맹우 베르케가 이끄는 조치가만이 일족 울루스로써는 믿을만 하였지만, 그 동방부분에 해당하는 ‘오르타 울루스’의 우두머리 코니치는 필시는 그 영지가 전장과 그리 멀지 않았단 점과 당연한 보신을 위해서 아릭 부케로의 적극적인 지원을 보류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릭 부케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더욱이 그곳에 1263년의 봄부터 이리계곡은 심한 기근에 빠졌다. 죽은자가 속출하는 참담한 상황이 되었다. 안과 밖, 자연과 사람 모두 타격이 겹쳐졌다. 아릭 부케군은 해체되었다. 고영초연(孤影悄然)한 황제 아릭 부케는 조금밖에 없는 옛 몽케정부 요인에 이끌려 쿠빌라이의 군문에 투항한 것은 1264년 7월의 일이었다.
쿠데타정권
현 정권은 타도되었다. 현역의 대카한이 무력으로써 그 지위에서 끌어내려졌던 것은 몽골국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정권은 바로 ‘쿠데타정권’이라고 해도 어울릴 것이었다. 정권획득의 제일의 요인으로써 최대의 기둥이 된 것은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동방3왕가와 오투하의 2대세력을 중핵으로 한 몽골 좌익군단이었다.
그때까지 칭기스 여러동생의 3왕가는 우구데이 서거때 옫치긴이 제위를 노린 허무한 시도를 한번한 이외에는 칭기스 여러아들 왕가의 ‘골육의 싸움’의 와중에서 직접적으로 참가는 하지 않았다. 그때그때의 유력한 측에 붙어서 오히려 ‘몽골 울루스’의 동방의 힘의 균형의 원칙에 바탕한 ‘정통성’을 우세한 측에 부여했다. 신정권 형성의 ‘케스팅 보트’를 쥐는 역할에 철저했다고 할 수 있고, ‘이기는 말’을 냉정하게 판단하여 그것에 빠짐없이 타는 것을 처세의 방침으로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붙을까 반할까의 승부에 나왔다. 그리고 훌륭하게 성공했다. 그것은 이때의 제국분쟁이 머리와 꼬리 모두를 가진다고 하는 애매한 태도를 허용하는 것은 이미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택의 심각함은 오투하의 쪽이 한층 심했다. 칭기스이래의 유력한 인족(姻族)․동맹자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왕족이지는 않은 그들의 경우, 패자가 된다면 무조건으로 ‘죽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명의 현역 우두머리의 모두가 걸음을 나란히하여 쿠빌라이파의 가장 선봉이 되었다. 어지간한 것이었다고 해도 좋다.
지금까지 이 제위계승전쟁에 관해 몽골 본지파와 한지파, 혹은 유목파와 정착파의 다툼이라는 견해가 대게 취해졌다. 그것은 이 전쟁의 결과 탄생한 대원 울루스를 ‘중화왕조’라고 하는 고정관념에 이끌려, 더욱이 그 이미지를 분쟁의 진영구성에까지 거슬러 올린 결과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는 매우 멀고, 단순히 억지로 추측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종래, 아릭 부케파를 ‘보수파’ 쿠빌라이파를 ‘혁신파’라는 분류마저 종종되고 있는 것이다. 유목체제에 고집하는 자와 정주농경사회에 기반을 두려고하는 자라는 도식이다. 보수파․혁신파의 의미 그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만약 가령 그 도식대로 묘사한다면 당시의 두파는 거의 ‘보수파’가 될 것이다. 중국본토만이 의미있는 토지라는 ‘생각’에 선 위에서 극히 일부의 한문사료의 한두마디를 극단적으로 확대해석하게 되면, 혹은 자칫하면 그러한 견해도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편협한 시야에 의한 근거없는 이미지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미지론을 기뻐하는 자는 쿠빌라이파의 군사승리는 한인부대에 의해 가져오게 된 것 등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곡해이다. 쿠빌라이가 당초는 1만, 뒤에 3만의 ‘시위친군’이라는 이름의 수도부대를 한인군벌의 세력으로보터 선발한 것은 대부분은 동영지로 하는 중도지구의 만일의 방어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은 그것마저 표현상의 이유 때문으로, 실제의 목적은 내몽초원에 근거지를 둔 쿠빌라이 진영으로써 후배지에 있는 화북전체에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위해 ‘남쪽을 향한’ 포석은 아니었을까?
양파 주력의 주된 전투장이 된 동부몽골고원은 일망천리의 평탄한 평지이고, 기동성이 풍부한 기마부대 이외는 거의 전력이 되지 않는다. 사실 양군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후 3번의 전투에서는 양군 어느쪽이나 순 몽골기병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1261년의 ‘시무르트 노르의 싸움’이다. 아릭 부케군이 당초의 대패전에서 빼았긴 카라 코룸을 항복한다고 거짓으로 탈회한 후, 뒤집기 어려운 열세를 뒤집기 위해 전군으로 일거에 고비를 건너 개평부의 쿠빌라이 본영에 급습했다. 양파 주력에 의한 사실상의 결전이고 집사를 비롯한 동서의 문헌에 관련기록도 많고, 양군의 진용이 대충 파악된다.
전투는 몽골고원의 동서결전의 모습이 되었다. 아릭 부케군은 서몽골지역의 오이라트 부족군을 주력으로 한다. 쿠빌라이군은 전통의 3군단 방식으로 전개하여 쿠빌라이 직속부대로 이루어진 중군을 끼고, 좌군은 동방3왕가에서 칭기스의 배다른 동생 베르구데이 왕가를 더한 ‘좌익 제자왕가’의 군단, 우군은 콘기라트의 나친부마, 이키레즈의 데레게이부마, 쟈라일의 쿠르무시국왕, 우르우트의 카다쿠군왕 만구트의 쿠투크군왕과 바로 각 우두머리가 이끄는 오투하의 군단이다. 여기에서 지게 된 아릭 부케군은 식량을 거의 가지지 않은 채 출발한 기습공격이었기 때문에, 재빨리 고비의 북에서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자력에 의한 승리의 꿈은 깨어졌다.
결국은 무엇보다도 우선, 쿠빌라이진영은 유목전투력에 있어서 이기고 있었던 것이다. 유목파․한지파 등이라는 도식은 허구이다. 보급․병참의 문제는 양파가 고비를 끼고 있는 상황이 된 후반부터 분명해졌다. 한지라는 보급기지를 직접의 후배지로 가진 쿠빌라이측과 평소에 물자공급을 주로 쿠빌라이파 본거지의 저쪽인 한지에 두고 있던 카라코품에 의지한 아릭 부케측으로도 장기전이 되면 될수록 차이는 분명해졌다.
결국 군사력과 병참의 두가지 모두 쿠빌라이측이 윗돌고 있었던 것이다. 좌익에 속하는 유목집단을 주력으로 하는 제국동방이 반란을 이르킨데다가 그곳을 근거로 수립한 정권이 쿠빌라이정권이었다. 정권의 기반은 처음부터 동방에 기울어 있었다. 이것이 몽골제국의 행방도 세계의 행방도 함께 크게 바꾼다.
2. 프레그의 선회(旋回)
서정(西征)의 목적
1260년은 몽골제국으로써도 세계사에서도 큰 분기점이 되었다. 동방에서의 변용과 함께 서방으로도 이슬람세계와 중동의 역사, 그리고 혹은 유럽의 역사로써도 잊혀지지 않는 해가 되었다.
프레그의 서정군은 1253년 가을 몽골고원을 출발했다. 그 원정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각 몽골 천호에서 십호당 2명의 비율로 공출되었다. 젊은 몽골 전사들이었다. 프레그군의 중핵은 바로 ‘소년부대’였다. 몽골본토와 그 주변에 있는 각 부족에서 모든 출신자가 모였다. ‘몽골 울루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영이었다. 그리고 이 원정의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써 원정부대를 중핵으로 성립하게 되는 ‘프레그 울루스’도 또한 당연한 것이지만 ‘예케 몽골 울루스(대몽골국)’ 즉 몽골제국을 그대로 축소한 크기로하여 배껴낸 ‘국가’가 되었다.
프레그의 서정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을까? 사실은 잘 모른다. 확실한 것과 확실하지 않는 것이 있다.
첫 번째 목표는 암살자교단이라고 말해지는 이스마일파의 타도였다. 이것은 틀림없다. 루브룩의 기욤에 의하면 그들은 대카한인 몽케를 살해하기 위해 4백명이나 되는 자객을 카라 코룸으로 보냈다고 한다. 마약 그렇다면 확실히 무조건으로 복멸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몽케 암살계획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이란방면에 있어서 몽골이 보다 한층 확고한 지배를 세우려고 한다면 최대의 장애가 된 것은 이스마일파임에 틀림 없었다.
두 번째로 바그다드의 압바스조 칼리프정권의 토멸이었다. 순나파의 상징인 이 정권은 십 수년전부터 오랜동안 기진맥진한 상태를 벗어나 보잘 것 없기는 하지만, 실권 회복의 틈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프레그의 서정의 목적이 보통 일컬어지는 것처럼 이스마일파와 바그다드의 양세력의 토멸 및 이란전역의 평정만에 그쳤다고 한다면, 왜 엄청나게 그렇게까지 큰 준비와 배려를 행하고, 대병단을 발진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인가?
다른 해석을 하는 의견이 있다. 프레그의 서정은 ‘이란의 땅’에 있어서 ‘프레그 울루스’의 형성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몽케가 떠나는 프레그를 가만히 불러들어 그렇게 하라고 몰래 요청했다고 하는 라시드 압딘의 집사의 기술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집사는 ‘프레그 울루스’의 정통성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성격의 책이다. 제국분쟁의 혼란에서 어지러운 제실 공유의 영토일 터인 ‘이란의 땅’을 ‘고유영토’로 독점해버린 사실을 그대로 기락할 리 없다. 우연의 결과를 당초부터의 기정의 목적이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은 ‘프레그 울루스’의 견해이다. ‘프레그 울루스’의 이란통치는 실제로는 몽케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이겨 얻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란과 그 저쪽
이란방면에 관해서 말하면 몽골의 지배력은 이미 그 나름대로 미치고 있었다. 우구데이시대에 설치된 ‘이란총독부’는 당초, 동부이란의 호라산과 카스피해 남안의 마산다란의 양 지방만을 관할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후 점차 관할지역은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프레그가 서정으로 출발한 당시, 암강 이남의 이란총독부는 그 영향력을 본거로 하는 동부이란에서 이미 그 전 지역에 미치고 있었다고 해도 괜찮은 상황이 되었다.
그 서쪽, 서북이란의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카프카즈 남쪽산록, 그리고 아나토리아고원의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는 그 산과 계곡이 만들어 낸 초원을 목지로하여 바이쥬 노얀이 이끄는 3만의 ‘타마군’이 이미 전개하고 있었다. 이 군단은 중동에 있어서 몽골 최전선의 주둔부대로써 이란고원 뿐만 아니라 실은 이렇다 할 강력한 통치세력이 없었던 이슬람 동방전체를 그 나름대로 위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몽케는 힌두쿠슈에서 이란방면으로의 포석으로써 ‘케시미르’에 사리 노얀의 일군을 파견하고 있다. 또 호라산의 주요도시 헤라트에는 골왕조이래의 토착세력인 쿠르트가의 샤무스 압딘 무함마드가 몽골체제내의 지방권력으로써 인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암강이남의 ‘이란자민’ 즉 ‘이란의 땅’에는 몽골측의 각종 세력이 요소를 압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 출발한 프레그에 대해 대카한인 몽케는 이러한 몽골 여러 세력을 흡수․통합하여 더욱이 ‘무엇’인가를 요구한 것이다.
암살교단
이슬람 가운데 다수를 점한 정통의 술탄파에 대해 소수파인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으로 그 딸 파티마를 처로 삼은 제4대 칼리프인 아리를 진정한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하여 그 자손만이 무슬림의 지도자라고 한다. 그 시아파의 가운데 일파는 ‘12이맘파’로 또 하나가 ‘이스마일파’이다. 이스마일파는 다른파와의 격심한 대립항쟁 가운데 10세기초에 이집트를 중심으로 파티마조를 세워, 카이로를 건설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밀려든 튀르크족의 파도가 셀쥬크조에 의해 바그다드 입성과 이란방면을 중심으로하는 대판도의 건립이 된 11세기후반 무렵, 다마스쿠스를 거쳐 카이로에 이르러 1년반 동안 이스마일파의 교학에 몸을 담근 후, 다시 순나를 받드는 셀쥬크조가 제압한 이란으로 돌아갔다. 선교여행을 계속한 후, 1090년 아르볼즈산중 깊은 골자기인 아라무트의 산성에 눌러 앉았다. 그때부터는 하산 사바흐 자신은 두번 다시 성을 나가지 않았지만, 아라무트의 바위산을 근거지로 아르보르즈 일대에 산성을 늘려, 동이란의 쿠히즈탄, 서남이란의 자구로스산성에 교선을 넓히고, 더욱이는 아득히 먼 서방의 시리아에도 산성을 건설했다. 셀쥬크조의 탄압과 공격에 대한 1092년에 유명한 재상 니잠아르 물크를 암살한 것을 시초로 하여 ‘히다이’ 즉 ‘헌신자’라는 이름의 자객을 가지고 대응했다.
이러한 산중의 독립봉이나 거대한 바위산 등의 천연의 요새에 독특한 축성기술을 통해 난공불락이 된 산성군과 언제 누구의 아래로 보내질지 모르는 암살자의 공포라는 2가지의 기둥에 의해 지탱된 이 ‘동방 이스마일파’는 두려워 해야만 할 존재로 급성장했다. 파티마조와의 관계도 끊어졌다. 때로 셀쥬크조의 권력세분화와 그것에 동반한 정세의 유동화도 가해져 ‘진정한 이슬람’에 의한 세계 신질서를 부르짖은 이스마일파는 대부분의 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편, 교단의 영역을 넘어서 은연중에 종교국가가 되었다.
이슬람 타파에 대한 심한 적개심을 불태운 이스마일교단은 예루살렘 회복을 기도한 ‘십자군’과 시리아방면에서 접촉하고 그곳에서 ‘아사신’ 즉 ‘암살자’라는 단어와 함께 공포에 가득한 이 교단의 소문이 유럽에도 전해졌다. 그것은 이슬람의 과격파라는 것 뿐만 아니라 ‘산의 노인’, ‘미녀의 낙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객’ 등의 불가사의하게 왠지 으시시한 이미지를 동반하고 있었다.
후에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의 누군가가 백만의 서에서 마약의 사용도 포함하여, 이 이야기를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무섭고 베일에 가득한 인상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 실상은 아직 알 수 없는 점이 많다. 또 ‘아사신’의 어원도 확실히 아라비아어의 ‘하시슈’ 즉 ‘대마’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약의 상용이라는 이미지는 오해라고 한다.
몽골에 대해서는 칭기스칸 서정의 때에 제6대 교주 하산 3세가 가장 먼서 신종의 사자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우구데이시대이후 몽골이 이란통치에의 의욕을 보이기 시작하자 점차 대립관계가 되어, 몽골부장이 이스마일교단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미 구육의 대에는 그 미수로 그쳤지만, 지중해 진공계획의 일환으로써, 선견군의 사령관 엘지기데이에게 ‘마라히다’ 즉 정통무슬림으로부터 ‘사종자(邪宗者)들’이라고 조롱당한 이스마일교단의 공격을 명할 정도가 되었다.
알보르즈의 눈
몽골 서정군의 가운데 프레그 자신이 이끄는 본대의 걸음은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거의 2년 가까이 걸려 몽골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마치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나아갔다. 연회나 수렵 등의 유흥을 반복하고 아르마리크에서는 오르쿠나이하 차아다이가 전체적인 환대를 받았다.
그러는 두중에 병량의 준비를 갖추고, 병사도 차츰 합류하여, 마와라안나푸르에 들어갈 무렵에는 프레그 본대는 대군단의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다. 왕족인 테쿠데르 휘하 차아다이가의 병사만이 아니라, 조치가로부터도 왕족인 바라가이, 투타르 등이 지휘하는 공출부대가 만단위로 참가했다.
1255년 초가을, 사마르칸드에 도착한 프레그군은 그 교외에서 사자사냥을 즐기거나 한 후, 같은해 11월, 케슈에서 이란총독 아르군의 마중을 받았다. 그곳에서의 1개월 여는 프레그로써 원정 성부의 열쇠가 되는 중요한 진영구축이 되었다. 프레그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이스마일파와 그 산성군이라는 것을 밝혔다. 더욱이 ‘이란의 땅’의 모든 왕후․지도자들에게 찾아올 것과 병량․무기의 제공을 요청했다. 적군인가 아군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서쪽는 아나토리아 고원의 룸 셀쥬크조의 술탄을 비롯하여 이라크, 파루스,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등의 먼지방도 포함하여, 각지에서 수장들이 속속들이 케슈의 프레그 막영으로 찾아왔다. 이란방면의 대부분의 세력은 몽골측에 붙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2년을 걸쳐 완만한 진군에 의한 무언의 압력은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1256년 1월 1일, 드디어 프레그는 암강를 건넜다. 암강까지의 신중한 행동과 분명히 상징적인 길일을 의식한 암 도하라는 것는 몽골이 암강으로써 지배영역의 한 선을 긋고 있던 것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이란의 전통관념에서는 ‘이란쟈민’이라는 것은 ‘암에서 미수르까지’ 즉 암강에서 이집트까지의 광대한 지역을 가리킨다. 거의 옛날의 아케메네스제국의 영역에 상당한다. 프레그는 일부러 ‘이란’을 의식하는 행동일정을 취한 것이 된다.
프레그군의 ‘암살교단’토벌작전에 관해서는 일본이 자랑하는 몽골시대사 및 이란․이슬람사연구자인 혼다 미노부(本田實信)씨에 의한 정치한 원전연구가 있다. 이하 주로 그것에 의거해 서술한다.
이미 프레그본대의 몽골고원출발에 앞서 황제 몽케는 나이만족 출신인 키트브카에게 1만2천의 선봉군을 주어, 1252년 7월에 먼저 출발시키고 있다. 키토브카군은 다음해 3월 암강를 건너, 쿠히스탄방면의 이스마일세력을 석권한 후, 아르보르즈 산중의 적의 여러성에 도착하고 있다. 그러나 키토브카군의 공세는 강력한 산성군에 반격을 받아 이렇다할 전과를 올릴 수 없었다. 다소의 공격정도로는 이스마일교단의 견고한 진영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는 이 군사활동은 몽골이 대작전의 출발에서 종종 행한 ‘선승부대’에 의한 소규모의 사전조사였다. 한번 정도 쳐보고, 본격행동으로의 정지작업을 한다. 일족의 위력 정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프레그 본대의 도착을 기다리는 것을 전제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놀랍게도 제7대 교주인 알라 압딘 무함마드 3세가 돌연 그 측근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때는 1255년 12월. 케슈 체재도중의 프레그가 이스마일교단의 섬멸과 이란방면의 모든 우두머리에게 찾아오라고 명령한 미묘한 시기였던 것이다.
무함마드 3세는 특히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반몽골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대신에 제8대의 교주가 된 그 아들 루쿤 압딘 프루샤는 쫓아오는 몽골에 대해 아버지와는 달리, 신종과 평화에 의한 그 종교왕국을 지키려고 표명하고 있었다. 프루샤에 의한 아버지의 암살이 시사되는 이유이다.
신교주 프루샤의 아래에서 이스마일교단의 태도는 일전했다. 프루샤는 교섭에 의해 몽골의 공세를 바꾸어, 가능하면 무사하게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젊은 프루샤보다도 프레그는 2단계나 3단계나 위에 있었다. 프레그는 스스로의 본영은 후방에 물려둔 채 휘하의 제대를 이란동부로부터 아루보르즈의 남북에 걸쳐 크게 전개시켜 교섭과 임기응변을 되풀이하면서 그 실은 목표를 적의 중추, 아라무트지방에 좁혔다. 조금씩조금씩 포위의 망을 좁혀갔다.
종신의 증명을 요구받은 프루샤는 일부의 산성의 파괴나 인질의 제공 등의 양도안을 조금 냄으로써 프레그의 태도를 보았다. 그러나 프레그는 양보안을 얻은때마다 더욱이 새로운 양보와 보다 명확한 태도를 요구했다. 게다가 전선의 부대에 의한 위협공격은 계속되었고 강온 양면으로 위협과 흔듬을 계속했다. 아람트지방은 완전히 봉쇄되어 연락이 차단되었다. 이스마일교단의 결속은 점차 무너졌다.
1256년도 가을을 맞이하자, 꾸물꾸물 주저하면서 대항하려고하지 않는 프루샤에 결단을 촉구하기위해 프레그는 전군에게 전투대세에 들어가도록 하달했다. 그것도 더욱 어디까지나 조건을 내놓고서 잔재주의 연명책을 기도한 프루샤는 분명히 겨울이 찾아오는 것과 눈이 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내린 아르보르스에서 군대를 계속 전개하는 것은 틀림없이 추위에 익숙해진 몽골군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하였다. 일단 철퇴하면 다음해 봄에 눈이 녹기까지 때는 지난다. 상황도 변할 것이다.
시간이 임박한 개전이냐, 강화냐 프레그군이 프루샤의 거성 마이문디즈에 육박한 중 해를 새긴 사자가 내왕했다. 몽골 전군이 마이문디즈의 산아래에 집결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프루샤는 개성했다. 1256년 11월 19일. 결국 눈은 내리지 않았다. 적대라고도 신종이라고도 교단전체에 명확한 지령을 내리지 않고, 그나마도 중요한 그 중추부가 완전히 탈진하게 되어 사실상 파멸해 버린 이스마일파의 여러 성에는 이미 조직된 저항은 무리였다.
프루샤는 정중하게 다루어져 그 자신의 요청으로 본성인 아라무트도 무혈개성했다. 다른 여러 성도 그의 설득으로 차례로 투항하여 파괴되었다. 프레그는 프루샤를 가장 유효하게 이용함으로써 쉽사리 공략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이스마일교단의 산성군을,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전투없이 시간도 걸리지 않고서 성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세계와 ‘십자군’을 흔든 중동최강의 세력은 166년에 걸친 활동을 사실상으로 끝냈다. 예상을 훨씬 초월한 짧은 기간의 공략이었다. 그 멸망은 이스마일파이외의 모든 무슬림으로써 낭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한편 놀랄만큼의 단시일의 섬멸은 몽골로에의 공포를 한층 높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투항한 프루샤는 프레그로부터 우대되어 그 후 자신의 희망대로 대카한의 궁정에 갔다. 1257년 남송친정 출발 직전의 몽케는 교주가(敎主家)의 존속을 바라지 않고, 알현을 거부했다. 허무하게 돌아로는 길에 오른 프루샤는 몽골 호위부대에게 살해되었다. 이란에 도착해 있던 그 일족도 몽케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단지 그 혈통은 근근히 이어지기는 한 것 같다. 이리저리 치인 끝에 현재는 인도에 그 이름의 흔적을 남긴 아가카한은 그 후예라고 한다.
바그다드 함락
몽골의 진격은 재빨랐다. 이스마일교단의 복멸로 이란고원에서 적성세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방면의 ‘타마군’과도 연동하여 군대를 크게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프레그는 하마단을 거쳐 현재의 이라크지방으로 기마를 진격했다. 그리고 북방으로부터 크게 바그다드를 포위한 것처럼 여러 군대를 배치했다. 바그다드의 칼리프정권을 구원하려고 하는 자는 없었다. ‘바그(신)’이 ‘다드(주었다)’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이 마을은 8세기이래 압바스조 칼리프의 수도였다.
용이주도하고 신속한 프레그의 지령에 의해 바그다드일대는 몽고의 겹쳐진 포위망 속에서 고립되었다. 프레그는 그곳에서도 신중했다. 완벽한 포위의 포진과 언제라도 발진할 수 있는 임전태세를 가지면서 더욱이 교섭과 교란책을 병용했다. 시간과 병사의 손실을 가능한한 피하려고 한 것이었다.
프레그와 압바스조 칼리프의 무스타심과의 방법은 집사를 비롯한 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 상호의 대응은 매우 흥미깊고, 또한 역사의 풍자에 가득차 있다. 무스타심의 언사는 너무나도 현실에서 떨어져 존재하였다. 그는 이 땅위의 모든 무슬림이 자신의 군대라고 하고 마음껏 허세를 펼쳤다. 칼리프는 ‘아미르 암 무슬리민’ 즉 ‘무슬림들의 장(長)’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이고, 현실과는 상당히 달랐다. 한편 프레그는 몹시 냉정한 대답으로 무스타심에 응했다. 시대착오의 허세와 이상할 정도로 냉철한 현실주이자. 그것을 전하는 사서는 무슬림의 손에 의한만큼 그 대비는 한층 분명하게 비춰진다.
교섭의 끝에 프레그의 개성 권고는 거부되었다. 그럼과 동시에 칼리프정권은 내부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칼리프의 재상은 시아파의 인물이었지만, 내심으로 무력항전을 무익하다고 포기하고 있었기는 하지만, 강화․투항을 칼리프인 무스타심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그는 프레그의 교란책에 대해 바그다드의 방위를 오히려 엷게 했다. 이러한 정부수뇌의 계획상의 혼란이 한층 바그다드의 혼란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이렇다 할 유효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바그다드시의 4방을 바짝바짝 죄어 온 몽골군의 압력에 굴하여 칼리프는 투항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58년 2월 바그다드는 거의 전투하지 않고 함락되어, 시내와 주민을 포위군의 약탈에 맡겨졌다. 칼리프는 투항후 탑에 갇혀 굶어죽었다고도, 융단에 둘둘 말려 말굽에 밟혀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후자라면 몽골이 귀인의 생명을 빼앗을 때의 방법이다.
여기에서 압바스조는 37대, 5백년에 걸친 역사를 닫았다. ‘마디나트 압사람’ 즉 ‘평안의 수도’라고 말해진 바그다드는 이 후 활기를 잃어 몽골시대에도 그 나름대로의 도시로는 계속되었지만, 이미 전과 같은 영광스러움 없이 근현대가 되기까지 긴 역사의 겉무대에서 멀어졌다.
칼리프의 일족은 이집트로 도망가 잠시후 마무룩조의 영주 술탄 바이발스에 의해 정통 칼리프가 되어 이후 카이로에서 일종의 괴로정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초라하고 조촐한 칼리프는 마무룩권력의 대의명분과 정통화를 위해서는 도움이 되었지만 바탕이 되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제외하면, 인도의 데리 사르타나트정권 등 극히 일부 이외에서는 승인되지 않았다.
정통이슬람의 상징이었던 칼리프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많은 순나파의 사람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놀랄만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후 오랫동안 이슬람세계에서 사실상 칼리프는 사라졌다. 아득한 후세 오스만조의 말기에 가까운, 오히려 그 술탄권력에 그림자와 동요가 보이기 시작한 때 그 권력은 칼리프의 권위와 함께 가진 술탄칼리프라는 해석과 전설만들기가 행해졌다. 그때까지 ‘칼리프 없는’세계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순나를 받드는 사람들로써 현실면에서의 영향력은 어쨌든, 적어도 정신상에서는 압바스조의 멸망과 바그다드의 함락은 충격이었을 터이다. 특히 학자․문인들 가운데 ‘천마(天魔)의 소업(所業)’이라고 간주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무슬림이 이스마일교단의 괴멸을 기뻐한 것은 아니없던 것처럼, 칼리프와 바그다드의 불행에 관해서도 모두가, 모두 비탄해 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시아파의 대부분은 그것을 신앙이 흩트러졌기 때문에 맞이한 철퇴라고 해석하고 기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몽골은 시아파와 순나파의 각각의 핵이 된 존재를 겨우 2년 동안에 차례로 소멸시켰다. 그것에 의해 이미 이슬람세계와 무슬림의 사람의 대부분으로써는 현실의 것이 되어 있던, 양파의 상대화를 부정할 수 없는 형태로 결정지워 역사의 위에서 명확하게 새긴 것이라고 할 수있다.
어쨌든 몽골은 이슬람과 중동의 역사에 큰 전기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로써는 정말 서전에 지나지 않을 터이었다. 프레그가 암강을 건너 ‘이란의 땅’에 발을 딛고서부터 아직 2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서정은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운명의 선회
프레그는 일단 병사를 몹시 건조한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북상시켜, 잠시 동안 휴양을 준 후 새로운 진용을 정리하여 시리아방면으로 향했다. 1260년 운명의 해였다.
이미 그 진격을 멈추게할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시리아에 잔존하는 아이유브조의 권력은 조촐한 것이었다. 다마즈쿠스의 군주 아르나시르 유스프는 일전하여 순식간에 포로가 되었다. 2월에는 난공불락을 자랑한 아네포가, 4월에는 거점도시인 다마스쿠스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프레그군의 아래에는 갖가지 부대가 모여 있었다. 룸 셀쥬크조나 모수르의 아다베크조를 비롯하는 서아시아 각지로부터의 무슬림부대도 있었다. 한편 키리키아에 구축되어 있던 아르메니아왕국의 헤투포리의 ‘십자군’부대도 있었다.
‘십자군’의 지휘관 안티오키아의 보헤몬드는 교회로부터 파문되었지만, 만약 프레그군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그 작은 권력은 간단하게 분쇄되었음에 틀림없다. 이미 종교의 차이를 말할 상황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특정의 종교를 특별히 우대도 냉대도 하지 않고, 평등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일단 몽골에 속하여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히려 종교의 여하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원정군에 부대를 공출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였다.
한세기반 정도 동지중해의 연안지역에서 반복해 펼쳐져 왔던 ‘십자군’과 이슬람세력과의 격투는 어느쪽도 결정력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기묘한 균형상태마저 낳아왔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그것들을 모두 뒤집는 강대한 힘이 출현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정복하고 좋든싫든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였다.
아코의 ‘십자군’ 당국의 아래에는 이집트의 마무룩조 술탄의 쿠두즈에서부터, 몽골을 맞아치려고 행해지는 작전에 원조를 구하는 의사표시가 나와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원군은 보내졌지만 크리스트교도가 지배하는 땅을 마무룩군이 통과하는 것은 인정되어 그것으로의 물자공급도 시인되었다.
영국의 피터 젝슨씨 및 데이비드 모건씨는 이것을 ‘십자군’으로써 크리스트교에 ‘호의’를 가진 몽골군과 연결되어 성지를 탈환하여 이슬람세력을 일소하는 큰 ‘좋은 기회를 잃은’ 결정이었다고 한다. 이때까지의 유럽 크리스트교 세계의 견해를 부정한다. 그것은 그 말대로이다.
이 시점에서 몽골이 어떠한 종교에도 참가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2, 3년후 ‘프레그 울루스’가 크리스트교세계에 대해 우호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치구조가 근본에서부터 변화했기 때문이다. 1260년이라는 정말로 절박한 시점에서 아코당국이 적일터인 마무룩조에 노골적인 원조는 절제했지만, 그 나름대로 대응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프레그 울루스의 진공은 두려울만큼 모든 것을 삼키는 기세였다는 증거이다.
1260년 2월 갖가지 인종․종교로 이루어진 성난파도와 같은 대군단을 이끌고 프레그는 아레포를 공략하고 그대로 이집트의 마무룩조로 향해 더욱이 진격을 꽤하려고 했다. 그때, 프레그 본영에 황제 몽케타계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프레그는 곧바로 귀환을 결의했다. 현장 가까이에 있던 아르메니아왕 헤두무의 기록에 의하면 프레그도 또 제위로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프레그는 뒷일을 선봉부대의 지휘관 키토 브카에게 위임하고 스스로는 남은 전군을 이끌고 곧바로 선회하여 아제르바이잔방면으로 향했다. 타브리즈까지 되돌아 갔을 때, 쿠빌라이의 즉위를 알리년 사자가 도착했다고 한다.
프레그는 당연히 제위를 포기했다. 대신에 그대로 ‘이란의 땅’에 나아 원정군을 기초로 서아시아․중동에 독자의 세력권을 구축하려고 결의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러한 기초위에 제국의 행방을 보아가면서 잘 되면, 기회가 있으면이라고 생각했다.
1260년의 이때를 가지고 ‘프레그 울루스’의 탄생이라고 한다. 이때까지 자칫하면 1258년의 압바스조 멸망을 경계로 성립했던 것처럼 기술이나 연대구분이 되어 왔다. 그것은 압바스조의 소멸을 가지고 하나의 시대의 구분으로 한, 이슬람연구자들의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심정이 투영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거의 그 20년전 우구데이의 타계가 서유럽을 파멸의 늪에서 구했던 것처럼 몽케의 급서가 마무룩조와 이슬람세계 서방을 구했다고 일컬어진다. 확실히 그렇다. 프레그가 선회하지 않는다면 그 대군단에 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순전히 객관적인 군사력의 비교에 그치지 않고, 몽골에는 그것에도 더하의 ‘무적의 신화’와 ‘공포의 전략’이 있었다.
중동세계의 사람들은 최강의 수비를 가진 이스마일교단과 지고의 권위를 가진 압바스조를 순식간에 파멸시켜 버린 프레그군은 인류상 전에 없는 무적의 군단이라고 보였던 것이리라. 모든 것을 눌러버리고, 아무것도 신경에 쓰지 않는다. 게다가 몽골은 칭기스의 서정이래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공포를 부채질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그도 또 점령지의 민중을 동원하여 속하의 세력을 밀어붙혀 자신들은 한없이 무량․무류의 대군단인 것처럼 꾸몄다. 게다가 적어도 역으로는 터무니없는 살육과 파괴를 스스럼없이 해치우는 인간같지 않은 집단인 것처럼 일부러 소문을 흘렸다.
5백년이나 수도이던 바그다드가 함락한 때 80만이나 되는 주민이 학살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도 분명히 이 일환이었다. 전의 최성기에도 바그다드에는 그 만큼의 사람은 없었다. 하물려 이 무렵의 바그다드는 분명히 그림자가 들어 섰었다. “빛낸 문명․문화의 파괴”는 알기 쉽더라도 다분히 정신상의 측면도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1262년에 프레그가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20만명 이상의 사람이 바그다드에서 살해되었다고 하는 말을 더없는 확실한 실수(實數)를 전하는 증언으로써,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프레그의 말이기 때문에 거꾸로 믿기 어렵게 한다. 과대하게 말했던 것은 당연하다.
원래 프레그는 그 편지의 속에 있어서 자신이 시리아를 나간 것은 마필에게 줄 사료와 목초가 다해버렸기 때문이고 서술하고 있다. 그것을 프레그철퇴의 ‘진상’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가가 있는 것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만약 정말로 초료(草料)․추말(芻秣)이 없었다고 한다면 후방의 아제르바이잔․아나토리아 방면으로부터 보내오면 될 것이다. 몽골은 병참(兵站)과 양도(糧道)의 확보에 극히 열심이었다. 시리아에 적당한 목지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는 설명은 얼핏보아 멋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허튼소리이다. 몽골들이 ‘말이 야위었다’, ‘말먹이가 없다’라는 것은 가고 싶지 않은 때나 철수할 때의 ‘변명’이다. 프레그가 루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왕 몽케의 타계에 의해 제국이 혼란했기 때문등이라고 ‘진상’을 쓸 이유가 없다. 가령 1262년의 시점에서는 제국분쟁의 귀추는 아직 누구에게도 보였던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의 사람들에게서 ‘몽골의 공포’가 어느정도로 심한 것이었는 가는 상상의 여지가 있다. 때로 공포는 실제의 무력이상으로 유효한 공격력이 된다. 가령 이때의 프레그군에게는 ‘세력’이 있었다. 현실에 몇중으로도 조직화된 최대의 군단을 가진. 적어도 때로는 후방에 걱정은 없고, 더하여 공포와 세력이 상승효과를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침입군으로써는 우선은 이것 이상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프레그는 선회했다. 모두 계산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원정행동은 드디어 그 주도한 준비의 성과를 훌륭하게 보여낼 때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아 이서의 아시아․북아프리카․유럽은 행운이었다.
미완의 원정
그런데 프레그의 서정의 최종 목표는 어디였을까? 예의 ‘시리아의 땅’에 있어서는 그다지 싸우지 않았다. 정말로 실재로 싸운 곳은 동부 이란의 쿠히스탄지방과 아라무트를 비롯한 아르포르즈 산중에 점재한 이스마일파의 산성군을 공격한 후, 바그다드에 있던 압바스조 칼리프정권을 공격한 것 뿐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도 대부분은 교란공작과 외교전술에 의해 적군을 자멸시켰다. 결국 거의 전투다운 전투는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프레그 본대는 몽케 타계라는 돌발사건에 의해 진공중인 북시리아로부터 곧바로 선회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선봉부대는 더욱이 이집트를 향했다. 적어도 프레그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이집트를 공략할 작정이었다. 동지중해 연안지역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다.
바꾸어 말하면 지중해 진출의 의도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몽골은 이미 구육시대에 지중해방면으로의 진공을 생각하고 있었다. 키프로스섬에 체재중의 루이 9세의 아래로 그 본심의 여하는 어찌되었던 우호와 제휴를 구한 사자를 보냈다고 보여지는 엘지기데이는 그 선견부대의 사령관이었다. 겨우 5, 6년전의 일이다.
그것에 바투의 서정도 그러했지만 이러한 ‘나라를 든’ 대원정의 경우 몽골은 갈 수 있을 만큼 가려고했다. 원래 몇단계의 목표를 미리 설정하고는 있다. 그러나 제1목표가 달성되더라도 제2, 제3으로 그때마다 새로운 목표로의 향해서 진용을 고쳐 정비하고 진행하고 있다. 현실에 일어나는 사태와 상황에 대해서 그때 가장 타당한 방침을 취한다. 칭기스는 암강 이남의 작전행동의 계속을 무용하다고 보고, 전군에게 선회를 지령했다. 바투의 경우는 폴란드․헝가리를 석권하고, 그대로 서유럽으로 향하려고 한 때 우연히 우구데이가 타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회했다.
프레그의 원정군이 가령 시리아로부터 이집트를 제압한 경우, 그 후 어디로 향하려고 했을까? 답은 쉽게 상상된다. 바로 앞에는 루이 9세가 지중해를 서로부터 동으로 진공한 실례가 있었다. 몽골에 선단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마음막 먹으면, 빌릴 수 있는 해상세력은 베네치아, 제노바도 포함하여 많이 있었다. 그곳에는 기존의 선박을 재조직한 ‘선단’으로 꾸며내는 것도 동방의 쿠빌라이정권의 예를 보면 몽골은 의외일 정도로 유연하여, 그다지 곤란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프레그군의 지중해․서유럽진공을 부정하는 요인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물론 모든 것은 가능성이라는 가정속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프레그의 서정이 몽골로써 그 나름대로 압도하지 않는 이란과 그 주변만을 보다 안정한 형태로 확보하는 것 만을 목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떠벌리는 것이다. 현대도 옛날도 변하지 않는 많은 인간과 대량의 물자를 그것도 어느정도 오랜 세월에 걸쳐 그것만으로 펼치는 것을 전제로하여 동원하려고 하는 대형사업의 경우 그것에 합당한 만큼의 목표가 설정되어 있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프레그는 선회하고 그 서정은 ‘미완’의 원정이 된다. 그 진정한 목적과 목표는 사실(史實)가운데에는 나타나지 않는 채 끝나는 운명이었다.
아인 쟈루트의 참패
본대는 모두 되돌려졌다. 그러나 시라이를 위임받았을 터인 키트브카는 1260년 4월에 다마스쿠스를 함락한 후 이집트의 마무룩조에 항복권고의 사절단을 보내, 그 사절단이 사형에 처해져, 이집트군이 시리아진공의 계획을 보이자 바로 남하의 태세를 보였다. 휘하의 부대는 1252년에 선발한 이래 그의 수족이 된 선두에 계속 서고 있는 1만2천의 선봉군이었다. 왜 키트브카가 직속의 자기세력만으로 남진한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잘 알 수 없다. 마무룩군을 약하게 본 것일까?
순전히 객관적으로 말하면 본대가 선회하고 부터는 그의 부대는 시리아확보에 전념했어야만 했다. 상황은 더욱이 몽골에 유리하였다. 이집트의 마무룩조를 제외하고 분명한 적성세력은 중동에 보이지 않았다. 설령 프레그의 대군단이 이란을 더욱이 동쪽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이미 몽골로 기운 여러 세력의 위에서 그것을 잘 조직화하여 대처하면 키트부카는 마무룩을 압도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가 이끄는 1만2천은 그것만으로 전면 진공하는 것은 분명히 열세였다. 그러나 잡다한 몽골측의 여러세력을 합쳐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부족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순수 기마부대의 1만2천이라는 수자는 당시의 세계에 있어서 실은 상당히 강력한 진용이라고 해도 좋다.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단숨에 이집트를 돌격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승리가 예상되는 객관적인 정세였던지도 모른다. 혹은 프레그본대의 선회의 진상이 만약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키토브카는 오히려 그 상황을 기화로 하여 몽골의 거대한 환영이 살아있는 동안에 혼란을 돌파하여 적의 본거를 급습해야한다고 전황을 읽었던 것일까? 마무룩측은 분명히 북벌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에 남아서 맞아 치면 모인 몽골측 재지세력은 자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고, 오히려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 언저리의 사정은 알 수 없다. 어쨌든 사실은 키토브카군은 단독으로 남하하여 바람처럼 이집트를 급습하려고 했다.
술탄 쿠투즈가 이끄는 마무룩군도 이집트를 출격하여 몽골을 맞아치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집트 특히 수도인 카이로는 피난민으로 혼잡하고 있었다고 말해진다. 마무룩군이 과연 승산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 또한 알 수 없다. 단지 남하하는 키토브카군이상으로 불안과 공포의 속에서 나아가고 있었다고 보아 일단은 틀림없을 것이다.
1260년 9월 3일. 양군은 팔레스티나에서 만났다. 정확히는 바이산과 나브루스의 사이의 땅이다. 그 건조한 구릉부를 실개천이 흘러, 그 조촐한 물의 상원(上源)일대를 아라비아어로 ‘아인 쟈르트’라고 했다. ‘고리아트 샘’이다. 구약성서에서 젊은 다윗이 페리시테인의 거인 골리앗을 투석기의 기습으로 쓰러뜨렸다고 하는 이야기에 기인하는 이름이었다.
마무룩군의 병력은 마무룩측의 기록에는 12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몽골군의 수도 한단위 달리 많게 기록되어 있다. 실수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대개 마무룩측이 많았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싸움은 마무룩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키트브카는 전사했다고도 포로가 된 후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몽골군은 산산조각으로 타격을 받아 도망갔다. 몽골측의 거점은 차례로 탈취되어 얼마 뒤에 몽골은 시리아로부터 물러났다. 바로 5개월 전과는 전혀 상황이 달라졌다. 몽골은 단숨에 위신을 잃었다. ‘불패의 신화’는 깨어졌다. 몽골은 이 이후 결국 시라이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도저히 계속 존속할 것처럼 생각되지 않았던 마무룩조는 이집트 민중의 열열한 지지를 받게 되고 이집트와 시리아에 강고한 기반을 구축하여 장기정권이 된다.
몽골의 서진은 멈추었다. 이슬람 중동세계는 1256년부터 1260년까지의 사이에 2개의 옛 세력의 소멸을 사이에 끼워 몽골과 마무룩이라는 동서 2개의 새로운 세력이 버티는 시대로 일변했다. 이 변화는 중동만에 그치지 않았다. 좋든싫든 동방으로의 관심과 이해를 꾀하였던 유럽은 몽골과 이슬람의 변화에 의해 역시 크게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제국은 동쪽의 쿠빌라이정권, 서쪽의 프레그 울루스라는 생각지도 않은 권력의 핵을 낳았다. 제국 전체는 그 내용도, 성격도 크게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로 돌입했다. 제국과 세계는 동시에 그때까지와는 다른 면모의 시대로 돌입했다.
3. 다극화시대의 개막
사문(査問)
1264년, 제국의 분란은 일단 수습되었다. 그때 제국에는 거의 5개의 정치세력의 파벌이 존재하고 있었다.
동북쪽에는 타가챠르 휘하의 동방3왕가. 몽골본토와 화북, 및 그 주변에 대카한인 쿠빌라이와 그 직속세력.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아르그 휘하의 차아다이가, 서북유라시아에 베르케를 우두머리로 조치가. 서아시아에
프레그 휘하의 프레그 울루스. 이 가운데 앞의 2개는 물론 일체화 해 있었다.
아르그의 아래에서 부활을 한 차아다이가는 쿠빌라이와 동맹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좋았다. 베르케를 대표자로
한 조치 울루스는 이 중에서는 쿠빌라이 신정권과는 누가보더라도 가장 인연이 먼 입장이었다. 그러나.
프레그가도 또 실제로 쿠빌라이정권에 대해 반드시 자세를 분명히 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제국내전이 한창인 때 어지러움을 틈 탄 점에서는 확실하게 프레그는 아르그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단지 아르그의 쪽은 타도되었던 아릭 부케 옛 정권과 유혈이 낭자한 격투를 한 과정에서의 ‘쿠빌라이 지지’였다.
그것에 비해 프레그의 경우는 쿠빌라이든지, 아릭 부케든지 실은 어느쪽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하다면
두쪽 모두 무너지게 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기미’도 없지는 않았다. 프레그는 결과적으로 ‘쿠빌라이 지지’
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쿠빌라이 신정권과의 관한 구조는 다른, 또 하나의 대항논리가 출현해 있었다.
그것은 조치 울루스와 프레그 울루스의 남북대립이었다.
조치가는 전부터 카프카즈 이남의 짙푸른 계곡과 산야,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초원을 탐내고 있었다.
그것은 숙망(宿望)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터무니 없이 프레그가 그곳을 본거지로써 ‘이란의 땅’에 새로운
울루스를 만들어 버렸다. 프레그원정군의 파견에는 조치가는 협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이란총독부의 흡수도 인정하고 대부대의 원군도 제공했다. 조치가로써는 쿠빌라이 신정권의 출현도 아마
계산밖이었지만 프레그의 이란점거의 쪽이 훨씬 예상밖이었다. 직접의 이해에 관한 점에서는 비교할 바
안된다.
노련한 베르케는 프레그의 동향에 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1261년부터 1262년, 즉 프레그의 이란을 혼자서 차지
하려는 눈치를 막 보이기 시작했을 때, 바로 스스로 대군을 일으켜 볼가강변을 출발해 곧바로 남하하여 카프카즈
를 넘으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프레그의 쪽도 자기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휘하의 서정군 본대로써 맞아 치기
위해 북상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군의 충돌은 결착이 지워지지 않았다.
설령 프레그에게 동방에 있어서 제위쟁탈전에 개입할 의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북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그것과 동시에 서방에 있어서도 키토브카의 패멸과 시리아 함락의 보복을 마무룩조에
대해 가하려고 하더라도 곧바로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1260년의 후반부터의 프레그는 어쨌든 ‘프레그 울루스’
를 수립했다고는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가 그를 ‘순풍에 돛단 듯’이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 자신은 그
사실 ‘자기 마음대로는 되지 않는 것이 계속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에서 쿠빌라이 신정권에 대해 문자그대로 거리를 둔 입장에 있을 터인 프레그과 베르케도 지고의 권위자인
대카한의 동향에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차아다이가 가운데에서는 완전히 방류로써 우두머리에 오른
풍운아 아르그는 자신의 입장이 내외 모두에 극히 위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위계승전쟁에 있어서
‘실적’을 방패로 쿠빌라이에 의한 정식적인 승인을 바라고 바랬다. 결국 3명모두 그다지 변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쿠빌라이와 타가챠르는 이 정세를 살렸다. 1264년 음력 7월 아릭 부케와 그 무리들이 투항해 오자 제빨리 손을
썼다. 하나는 이제까지의 제도 카라 코룸에서 쿠빌라이 자신의 본거지인 개평부를 고쳐 ‘상도’와 이전 금의 수도
인 중도(中都)라는 2개의 신도(新都)에로의 천도 선언이고 또 하나는 아릭 부케 등 ‘반란자’의 사문(査問)이었다.
어느쪽도 보통이라면 몽골 전체에 저항이나 이론이 들고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쿠빌라이 신정권의 중심을 이룬 제실 여러왕만으로 긴급의 군사법정이 열렸다. 그 전말은 라시드의 집사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릭 부케 자신을 비롯한 그를 떠 받들다가 살아남은 브루가, 투멘, 아르챠, 도쿠즈 등
장료들은 집사에 보이는 것 대로라도 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집사는 피고가 된 사람들의
입을 빌어서 진실의 일부를 말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릭 부케는 쿠빌라이나 타가챠르들에게 말한다. “처음
에는 우리들이 올 발랐지만, 지금은 당신이 올바르다”라고.
섬서․감숙방면에 있어서 쿠빌라이파의 승리를 가져온 우구데이계 코덴가의 우두머리 지비쿠 테무르가 실은 당초
아릭 부케진영에 속해 있던 것 같은 점도 스스럼없이 나타낸다. 사문이 일단락 되었을 때 쿠빌라이는 이렇게
말한다. “브루가․비챠쿠치는 우구데이카한, 몽케카한의 말을 듣고 있다. 그를 살리고 석방하라. 그리고 프레그나
그 밖의 여러 왕들에 대해서 일의 사소한 것에 대해 증인으로 삼으라”. 옛 몽케정부의 서기국 수반인 브루가는
단 한사람 위글인 숙장으로 진기하게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다. 쿠빌라이가 그만을 구명하여 프레그이하의 출석
하지 않는 제실일족에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시키려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몽케의 아들로 가장 열심인 아릭 부케파였던 아스타이는 브루가의 석방을 알자 “브루가가 살아 남는다고
하는 것이 어째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녀석과 논쟁하겠다. 녀석의 대죄를 밝혀주마”라고 했다. 브루가와
대치했다. “너는 몽골의 속담을 인용하여 말한 것은 아닌가? 우리들은 일을 일으켰다. 되돌릴 수는 있어도, 게으
름을 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네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대죄이다.” 브루가는 이것을 인정했다.
쿠빌라이는 그것을 듣자 “그렇다면 녀석을 법대로 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집사가 여기에서 말하는 ‘대죄’라는 것은 어디까지 쿠빌라이가 현황제가 된 시점에 선 위에서의 ‘대죄’라고
말하는 점 그것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릭 부케와 아스타이는 몽골왕족이 왕족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는 원칙에서 일단 구명처분이 되었다고 한다.
아릭 부케는 2년후 타계한다. 그러나 브루가 이하의 여러 장수는 전원이 ‘유죄’가되어 ‘쟈사’ 즉 칭기스의 군율에
걸려 처형되었다.
이러한 제실을 포함한 몽골 성원의 처분은 본래 쿠릴타이에서의 총의로 결정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것은 집사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쿠빌라이와 타가챠르를 필두로 한 ‘쿠데타정권’의 수뇌부는
이 원칙을 승인한 위에 제국서방의 유력자 베르케와 프레그의 대립 그리고 아릭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가 참가
하지 않는 동안 빠짐없이 방해군을 제거한 것이다.
꿈속의 통일 쿠릴타이
집사에 의하면 쿠빌라이와 타가챠르 등은 아릭 부케일당의 처분에 관해서 양해와 승인을 얻기위해 사절단을
중앙아시아 이서의 3명의 유력자에 보냈다.
사절단은 우선 가장 가까운 아르그의 아래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이 차아다이가의 우두머리 취임이 신체제의
가운데 인지되는 것을 바래 제국전체를 망라한 통일 쿠릴타이의 개최를 제안했다. 아르그의 바램은 쿠빌라이측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오히려 쿠빌라이의 의향을 받아 아르그의 연기였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은 2명이었다. 사절단은 ‘이란의 땅’으로 향했다. 프레그는 이때 이미 베르케와의 사이에 카프카즈를
사이에 두고 두 번에 걸친 대전과 대립을 겪고 있었다. 프레그가 정말은 어떻게 이 사절단에 대응했을까?
집사는 상세하게 기술하지 않는다. 어쨌든 프레그는 베르케의 참가를 조건으로 쿠릴타이의 개최에 동의해
출석을 약속했다.
사절단은 북으로 향했다. 최후의 방문지가 되었던 볼가강변의 ‘황금의 오르도’에서는 베르케는 심하게 꺼려했던
것처럼 집사는 기록한다. 그러나 베르케로써도 자신 혼자 참가하지 않는다고할 수는 없었다.
문자그대로 제실 총회의가 되는 것이 분명해진 요 다음번은 쿠릴타이에 ‘불참’을 표명하는 것은 신체제의 불승인,
즉 ‘반역’을 의미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남벌’군을 움직였던 충분히 무위를 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야위
었다’라는 구실도 쓸 수 없었다.
바투이래 20년에 걸친 독자의 길을 걸어, 스스로가 만들어 낸 몽케체제하에서는 제국서반을 생각한 대로 마음
대로 다루었던 것처럼 보인 조치 울루스도 이미 쿠빌라이신체제가 틀림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고립하는 것은
위험했다. 신황제 쿠빌라이의 역량은 아릭 부케에 대한 전쟁의 4년간 의심할 바 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에 더해 본래는 쿠빌라이의 대항마가 될지도 몰랐던 프레그는 서정할때의 훌륭한 군사지휘가 나타내는 듯이
방심할 수는 없고, 전술과 기술에 풍부한 작전가․전략가였다. 그 프레그가 제위를 포기하고 자기의 새로운 울루
스확립 때문에 두 살 연상의 친형 쿠빌라이와 제휴하고 동서 연동하여 조치 울루스와 베르케를 쫓아내려고
한다면 조치 울루스의 와해는 피할 수 없었다.
다음날 형 바투의 대역이 되어 조치 울루스의 대군을 이끌고, 오농상원의 땅에서 몽케의 즉위식를 연출한 베르케
로써 쿠빌라이와 프레그는 옛날부터 알던 친구이기도 하였다. 그 점 아르그 등의 진행과는 달리, 일단 이때까지
의 진행을 보류하면 이야기는 빨라진다. 몽케에 대신한 쿠빌라이신체제의 아래에서 프레그와 때가 맞는 것을
보면 톨루이일문과 조치일문의 우호는 다시 읽을 수 있다. 결국 베르케는 프레그가 확실히 참가한다는 조건부로
역시 개최에 찬동했다. 그리고 다음다음해 즉 1266년에는 쿠빌라이의 아래로 도착하겠다고 약속했다. 쿠빌라이와
타가챠르의 수읽기와 계산은 맞아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제국은 1266년의 통일 쿠릴타이를 향해 모든 것이 움직였다. 이 쿠릴타이가 실현된다면 전 제실이 참가하는 쿠릴
타이로써는 우구데이시대의 동서 2대정을 결의한 때 이래, 실은 30년 만의 것이 될 터였다. 제국은 우구데이 타계
를 계기로 시작된 오랜 혼란과 대립․분란을 거쳐 다시 대화에 의한 ‘몽골 공동체’의 운영과 안녕을 되돌릴 터였다.
어쨌든 일단은 대화노선이 깔려졌다. 각각 가지가지의 생각과 경위를 품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쿠빌라이를 중심
으로 이들 유력자가 전원, 협의의 자리에 앉으면, 어러가지의 조절이 시도될 것이다. 바로 제국과 세계의 행방을
결정지우는 대회의가 될 터였다.
당연히 베르케와 프레그의 항쟁도 의제에 올랐을 터이다. 어떠한 형태로 결착이 지워졌을까는 상상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제국과 유라시아의 서반을 계속 흔들게 되는 남북대립은 그 진행이 이 시점에서 그 나름대로 수습이 되었
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후술할 마무룩조의 술탄바이바르스가 끼어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 시리아 이서의 땅에는 위기가 닥치는 것도 분명하였다. 이전의 바투의 서정과 프레그의
서정의 2가지를 각각 동시에 재현한 것 같은 대기획이 혹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몽골제국 전체는 타가챠르, 아르그, 프레그, 베르케 등 몇사람의 거두들에 의한 몇 개의 대형의 정치덩어리
로 나누어지면서도 그 모든 것의 위에 대카한인 쿠빌라이가 군림하고, 인류사상 전에 없는 초특대의 강대한 정치
통합체가 출현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세계의 역사는 지금 알려져 있는 것 보다는, 보다 격심하게 누구의 눈에도,
싫든좋든 뚜렸한 모습으로 단일의 주권에 의한 하나의 시대를 처음으로 내놓았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허구속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러한 허구의 구도를 묘사하고 싶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황제가 된 쿠빌라이로써는 그것
은 한시기의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하나의 정치계획으로써 그 가슴속에 가지가지의 색채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그가 그 후 30여 년의 치세를 걸쳐 건설하고 계속 도전한 실로 많은 사건이나
국가기획은 그러한 장대한 극히 하나의 이미지가 그 바탕에 없다면 도저히 성립하기 어려운 규모와 주도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용이케하는 더없는 기회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들어 맞는 우연이 겹쳐져서 쿠빌라이의
손에서 영원히 달아나게 된다. 그 결과 쿠빌라이는 주어진 좋은 기회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오히려 힘으로 결투하여 꿈에 가까이 가려고 한 것이 된다.
이 우연이라는 것은 제국서반의 3명의 거두가 모두 차례로 1년동안에 죽어버리는 것이다. 우선 1265년, 프레그
가 돌연히 타계했다. 다음으로 베르케는 프레그의 급사를 좋은 기회로 보고 프레그 울루스의 혼란을 틈타 급하게
군사를 일으켜 남하했다. 그러나 다음해 그도 맞아치려고 북상한 프레그의 서장자 아바가의 군대와 카프카즈의
남쪽 구카강를 사이에 두고 대진중에 돌연 병을 얻어 버렸다. 더욱이 그 시기를 확정하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
하지만 아르그도 또 1265년부터 1266년의 언젠가에 병사했다.
어느것이나 불가사의하다면 불가사의하다. 어쨌든 프레그와 베르크의 병사에는 부자연한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러나 모든 역사서에는 각각의 죽음의 내막에 관해 입다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하수인이 있다면 그 가능성
과 후보자는 몇가지로 생각된다 무엇인가 하나로는 정리할 수 없다. 원래 모두가 자연사였던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놀랄만한 우연이었다.
제국과 세계의 행방
차아다이, 조치, 프레그의 3개의 ‘울루스’는 동시에 신우두머리의 선출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아르그에 의해
먼저 정리되어 있던 중앙아시아가 다시 동란에 휩싸여 간다.
쿠빌라이의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기본구조에는 근본부터의 변경은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제국의 동서를 잇는 위치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혼란은 쿠빌라이로써 큰 아픔이었다. 제국전체가 쿠빌라이의
직접 지령의 아래에서 일체화되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프레그 울루스와 조치 울루스의 남북대립은 대카한인 쿠빌라이에 의해 직접개입 혹은 조정의 기회가 잃어버린
것에 더해 프레그와 베르케의 연이어 죽은 그 자체가 이 항쟁을 한층 크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이미 풀리기 어렵게 되었다. 이 대립은 세대를 넘어서 양 울루스로써 숙명이라고마저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조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원래 양 울루스의 남북대립은 아인 쟈르트의 싸움 후 술탄쿠두즈를 살해하고 마무
룩조의 주인공이 된 바이바르즈로써 다시없는 것이 되었다. 프레그의 아래에서 공출부대로서 종군하고 있던
조치가의 군대는 프레그의 이란점령이 분명해지자 탈출을 시도했다. 북으로 도망할 수 없었던 자들은, 놀랍게도
서쪽으로 향해 마무룩조에 몸을 맡겼다.
술탄 바이바르즈는 조치가의 부대를 환영하면서 해상루트를 통해 조치 울루스와의 연락․교섭을 시도했다.
육상루트는 프레그 울루스에 제압되어 있고, 너무 위험했다. 그 해상루트라는 것은 지중해에서부터 에게해,
다다넬즈해협을 통과하여 마르마라해로 들어가고 더욱이 보스포라스해협을 거쳐 흑해, 그리고 아조흐해에 이르
는 것이었다. 타나의 마을에서 배로부터 오르면 동쪽으로 가서,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볼가의 흐름에
이른다.
문제는 보즈포라스였다. 전부터 목덜미를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에는 기묘하다고 하면 기묘한 ‘제4회
십자군’의 결과 라틴제국이라는 어떤종류의 식민국가가 이미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었다.
프랑도르백 보두안을 초대로 한 이 불가사의 한 국가는 서유럽 크리스트교 세계의 ‘본심’을 정직하게 체현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존립의 열쇠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마을이 가진 역사상․지리상의 위치에 있었다.
마무룩조로써는 중요한 보스포라스를 적인 라틴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도 또 우연이라고 하면 너무
나도 우연일 정도의 때마침 1261년의 변화가 일어났다. 니카에아에 쪼그리고 있던 비잔틴제국이 콘스탄티노플
을 되찾은 것이다. 바이바르스로써 시야가 열렸다. ‘비잔틴황제’라고 하더라도 극히 사소한 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황제 미카엘 파라에올구스는 프레그의 동향을 신경쓰면서도 방해는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프레그 울루스를 적으로 하는 볼가와 나일의 남북동맹이 성립한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킵착동맹’이라고 해도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바르스 자신을 비롯하여 마무룩전사의
대부분은 킵착초원의 출신자였다. 오래전부터 제노바를 필두로 하는 흑해무역에 종사한 노예상인의 손을 거쳐,
그땅의 젊은이는 중동으로 팔려, 그곳에서 ‘마무룩’ 즉 ‘노예군인’이 되었다. 키토브카의 몽골군을 토멸한 것은
이러한 튀르크계의 기마전사군단이고, 실로 몽골군과 마무룩군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급속하게 튀르크화,
킵착화한 조치 울루스와 이집트의 마무룩조와는 ‘형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베르케가 이슬람신앙을 수용한 것은 바이바르즈로써 ‘이슬람의 대의’를 주장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협공당하는 형태가 되었던 이란의 프레그와 그 후계자들은 이 ‘세로’의 동맹에 대해서 유럽의 크리스트교 세계로
‘가로’의 동맹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무렵 프레그가와 그 울루스에는 아직 이슬람색은 엷고, 오히려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의 쪽에 친근감을 가진 자들이 많은 정도였다.
이 세로와 가로, 두 종류의 조합에 베네치아, 제노바를 필두로 하는 이탈리아 통상국가가 가세했다. 정략과 경제,
외교와 통상이 복잡하게 얽혀, 눈이 팽팽 돌 정도로 전개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몽골이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단순한 ‘공포의 시대’는 종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몽골 자신이 다극화의 시대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도 또한 전에없이 거대한 규모로의
국제화․다극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대는 군사에서 정치, 대결에서 통상으로의 전환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변모의 시기
하나의 시대는 확실하게 끝을 알리려고 하고 있었다. 칭기스의 금국 출병이래, 반세기정도 계속한 몽골에 의한
경이로운 군사확대는 1260년을 정점으로 한 일련의 변동속에서 급속하게 창끝을 거두어들인다. 물론 동방에서
는 아직도 남송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더욱이 일본을 포함한 바다의 세계로의 출병이 30년정도의 동안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까지의 군파와 정복 그것을 목적으로 한 확대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조직화와 경제지배를 주된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몽골의 변모와 함께 세계의 각지도 변화한다. 몽고의 출현에 의해 대부분이 그 의미를 잃고 있던 ‘십자군’은
더욱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몽골 서진의 벽이 되어 서있던 마무룩조의 북진에 의해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이후 거의 30년으로 동지중해 연안에 퍼져있던 소세력도 모두 일소된다. 좋든싫든 유럽과 이슬람중동의 역사로
써 무시할 수 없는 동인(動因)이 되어왔던 ‘십자군시대’는 몽골과 마무룩에 의해 종막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군시대’를 통해서 전성기를 보이고 있던 유럽에 있어서 교황의 권위와 권력은 몽골의 공포의 속
에서 일단 더욱 빛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몽골의 공포가 급속하게 감퇴하자 교황으로써는 가장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십자군’이 그 존립의 의미와 근본을 잃어가게 됨에 따라, 교황권력 그 자체도 쇠퇴를 향한다.
그것과 거의 반비례하는 것처럼, ‘십자군시대’를 통해서 동방으로의 눈을 점차 열어간 유럽제국과 그 사회는
몽골을 중심으로하는 정치구조의 다극화와 그것에 동반한 국제정세의 안정화에 의해 동방무역의 이익과 동방의
자유스러운 다원세계 그것에 물심양면으로 눈을 뜨고, 촉발되고, 변신한다. 유럽각국에 있어서 왕권의 자립화도,
이른바 르네상스도 이 파도속에서 일어난다. 유럽은 ‘중세’의 잔재(殘滓)를 떨쳐 버리고, 다음 시대로의 태동을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변모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1260년 무렵을 경계로 일어나기 시작하여 거의 그 후 30년 정도의
사이에 명확하게 모습을 가지기에 이른다.
그 30년 정도의 사이에 오랜동안 분열의 시대를 거쳐왔던 중국은 몽골의 아래에서 다시 정치통합을 되찾는다.
그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보다 큰 규모의 국가 테두리를 그 후의 중화의 역사에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이슬람 중동세계는 몽골과 마무룩조의 대치에 의해 두가지 색을 각각 띠게 되는데 동쪽의 페르시아어
문화권과 서쪽의 아라비아어 문화권이라는 구도가 고정된다. 이러한 중국과 중동의 변화는 거의 현재에까지
통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모든 대부분의 시기를 하나로하고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몽골 자신이 쿠빌라이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세계제국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놀라울 만큼의 변신을 거쳐,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지평속으로 이끌고
간다.
1260년이라는 해는 몽골로써도, 세계로써도 그 큰 변모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일어나는 갖가지
의 변화는 거의 1세대를 걸쳐 유라시아의 모든 것을 비집고 들어가, 그때에 이르기까지의 반세기 남짓의 변화
보다 어느 의미에서는 더욱 격심하게 세계사를 크게 바꾸게 되는 것이다.
12) 쟈발은 아랍어․페르시아어 ‘쟈아파르’의 전와음(轉訛音).
17) 쟈라일, 콘기라트, 이키레스, 우르우트, 망구트.
18) 驛亭마다에 말을 갈아타고, 지령을 전달했다. 후에는 소․낙타․개썰매(犬橇) 등도 사용된 통신․교통․운수망이
되었다. 더욱이 보통에는 ‘역정에 관련된 사람’이라는 뜻인 ‘쟈무치’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다.
20) 한문기록에도 그들을 ‘令史’ 즉, 하급의 사무직이라고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 것도 있다.
24) 한문으로는 探馬, 페르시아어로는 ‘타마’ 혹은 ‘타무마’라고 표기된 이 부대는 전선주둔용으로 특수편성된
것으로 종종 다부족의 혼성부대였다.
26) 고대의 아란족. 현대의 오세트족.
29) 혹은 핫틴. 현 이스라엘국의 최북부. 갈리아호에 임한 티베리아즈의 마을의 서북에 위치한다.
30) 현 이스라엘국의 최북부, 하이파 북북동쪽의 항구도시. 아라비아어로 앗카. 유럽어로는 아쿠레.
31)아라비어어․페르시아어의 ‘샤이흐 알쟈바르’를 그대로 번역한 것. 이스마일파의 교주는 강고한 산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운다.
33) 1204년, 베네치아의 상선대의 유도에 의해 비잔틴제국을 구축해 버렸다고 이야기붙은 원정.
34) 중부 이탈리아, 페르시아의 서북부에 해당하는 마을의 라틴명. 이탈리아어로는 피안데르 칼피네. 출신지의
이름을 가지고, 이 인물의 통칭으로 한다.
35) 현재의 브레스라우 출신. 그도 여행기록을 남기고 있다.
36) 혹은 이탈리아어로 앗세리노.
37) 카프카즈 남쪽산록에 있어서 본래의 아르메니아인들의 토지. 이 무렵 동지중해 연안의 가장 북쪽. 키프로스
섬의 대안에 위치하는 키리키아의 땅에 또 하나의 아르메니아가 이루어져 있었다.
38) 프랑스 북부, 란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 더욱이 란은 파리 북동쪽 120km에 위치.
39) 얄리크는 그 튀르크어에 의한 발음.
42) 러시아어 이름. 서유럽어로는 솔다이아.
45) 더욱이 부마라는 것은 황제의 사위를 말한다. 몽골어로는 쿠레겐, 튀르크어로는 큐네겐. 유명한 티무르가
티무르 큐레겐이라는 것은 칭기스칸家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48) 사료상에서의 서술. 현실적으로는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방면.
54) 서남이란의 지방. 옛날 아케메네즈고가 여기에서부터 흥기했다. 유럽인들에 의한 이른바 페르시아라는
타칭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55) 아라비아명 하라브.
56) 아라비아명 디마슈크.
57)이라크북부의 주요도시. 아라비아명 마우시르.
59) 유명한 미케란젤로의 다비드상은 그때의 모습을 조각한 것.
60)더욱이 개평부를 ‘上都’로 한 것은 아릭 부케의 패세가 역연하게 되기 전해 음력 5월, 금의 중도를 고쳐 정식
으로 中都로 삼은 것은 아릭 부케가 투항한 다음달인 음력 8월 17일이었다. 더욱이 그 이틀 후 ‘中統’을 고쳐
‘至元’이라고 改元했다.
62)‘예루살렘의 열쇠는 카이로에 있다’라고 보았던 프랑스국왕 루이 9세는 이미 서술한 것처럼 이집트진공을
시도하여 실패한 후, 1270년에는 카이로에의 측면공격으로서 튜니스로 해상진공한다. 이것이 ‘십자군’으로써
마지막 원정대가 되었다. 더욱이 루이 9세의 동방경영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졌지만, 그는 동방에서 보고
들은 축성법을 가지고 돌아갔다. 극히 견고한 구조와 아름다운 모습으로 알려진 카르카손느성은 루이 9세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