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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거창 갈천서당 (居昌 葛川書堂)
경남 거창군 북상면 송계로 767-34 (갈계리)
이 서당은 조선 명종 때 육현신의 한 사람으로 광주목사를 지낸 갈천 임훈이 후학 양성을 위하여 그의 아우 임운과 1573년에 건립하였음. 그 후 1878년에 후손들이 중건한 목조와가건물임.
건물구성은 강당과 대문으로 되어 있는데, 강당은 정면 5칸,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홑처마이고 양측 면에 풍판을 달았음. 처마 밑에는 그 당시 사용하던 큰북의 외통이 걸려있음. 대문은 맞배지붕 솟을 대문이며 뜰에는 후손들이 세운 두 형제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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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민속문화유산
거창갈계리임씨고가 (居昌葛溪里林氏古家)
경남 거창군 북상면 샘골길 6 (갈계리)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 임훈 선생의 집이다. 중종 2년(1507)에 지었으며, 안채, 사랑채, 사당, 장판각,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정면에 사랑채가 있고 안채 오른쪽 뒷편에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방·대청·방·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대청과 방 2칸으로 이루어졌다. 대문채는 방·대문·헛간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랑채의 앞면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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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거창 서간소루 (居昌 西澗小樓)
경남 거창군 북상면 샘골길 6 (갈계리)
서간소루는 첨모당 임운 선생이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서간 임승신 선생이 덕행과 학문을 닦던 곳이다.
서간소루가 있는 경남 거창군 갈계리는 대부분이 임씨로 씨족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서간소루는 이 마을의 종가 구실을 하고 있는 임씨 고택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살림채 없이 대문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으로, 본래 임씨 고택과 서간소루가 하나의 주거 영역이 아니었나 추측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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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임훈 갈천문집 목판 및 임운 첨모당문집 목판 (林薰 葛川文集 木板 및 林芸 瞻慕堂文集 木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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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임훈 갈천문집 목판 (林薰 葛川文集 木板)
임훈 갈천문집 목판 및 임운 첨모당문집 목판은 조선 시대 유학자인 효간공(孝簡公)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과 아우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1517~1572]의 글들을 모아 두 사람의 후손이 편집하여 만든 책판이다. 목판은 총 177매이며, 현재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임씨 고가[경상남도 민속문화유산]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갈천선생문집 책판
목판은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인 시언(詩言), 2권에는 소(疏)·묘갈(墓碣)·명(銘)·행장(行狀)·서(序), 3권에는 명(銘)·제문(祭文)·통문(通文)·기(記), 4권에는 행장·묘갈·만사(挽詞)·제문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집 중 「언양 진폐소(彦陽陳弊疏)」는 임훈이 언양 현감으로 있을 때 고을의 어려운 실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해결을 촉구한 글이다. 가혹한 세금 때문에 고통받는 농민의 생활상을 호소하고 있어 당시 언양 지역의 사회 실정을 생생히 전해 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안음현감에게 문집 판각을 명하여 판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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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임운 첨모당문집 목판 (林芸 瞻慕堂文集 木板)
임훈 갈천문집 목판 및 임운 첨모당문집 목판은 조선 시대 유학자인 효간공(孝簡公)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과 아우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1517~1572]의 글들을 모아 두 사람의 후손이 편집하여 만든 책판이다. 목판은 총 177매이며, 현재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임씨 고가[경상남도 민속문화유산]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 첨모당선생문집 책판
1665년(현종 6)에 갈천선생문집 책판을 제작할 때 함께 제작한 것이다. 문집은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그중 2권의 「유천마록(遊天磨錄)」은 기행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글을 실어 조선 시대의 사상적 경향을 잘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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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거창 은진임씨 정려각 (居昌 恩津林氏 旌閭閣)
갈계리 정려각은 조선 명종 계해(1563)년에 안음 현감 박응순이 임훈, 임운 형제의 효행을 널리 알려 생전에 내려진 생정려 2위와 순조 임진년(1832)에 정려된 임한신과 한신의 처 고령 박씨, 고종 28년 신묘년(1891)에 정려된 임경원, 광무 9년(1905)에 정려된 임지예를 추가하여 모두 6위의 정려를 모시는 정려각이다. 하지만 6위의 정려 현판은 물론 정려기 현판도 전해지지 않고 현재 6기의 비석이 서있다. 이 정려각의 초창은 1564년 현감 이효언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1600년에 중수가 있었다고 하나(정온의 정려각중수기) 현존 건물은 1905-19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갈계리 정려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다진 지반위에 통돌로 초석을 놓고 아래는 방형으로 위는 육각으로 깎아 그 위에 굵은 원주를 세웠다. 벽체는 배면은 판벽, 좌우면은 중방상부 살창 중방하부 판벽으로 하였고 정면은 중방상부 살창 중방하부 교살로 처리하여 환기를 고려하고 정면성을 살렸다. 내 2출목 외 1출목의 공포를 두고 주칸 사이에도 공간포를 두었으며 이를 위하여 창방위에 평방을 올렸다. 앙서형의 초익공식이며 익공위에는 대들보 끝단에 붙인 봉두가 올려져있다. 가구는 3량 구조형식으로 대들보 위 사각형의 판재에 초각한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형식이며 천장 측면은 빗천장으로 하고 종도리와 가로부재(중도리) 사이를 연결하여 우물반자 천장으로 처리하였다. 처마끝은 막새로 처리하였고 양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외곽은 협문과 토석혼축 한식담장으로 경계를 지웠다.
정려 현판 없이 비석으로만 남아 정려각의 요건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건축물의 규모와 양식적 완성도는 경남지역에서 유례를 찿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은 건축물이다. 또한 학자이자 효자로 이름 높은 임훈, 임운 형제와 관련된 인물유적이기도 하므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하여 후손에 대한 전통문화 교육자료와 건축역사 연구자료로 보존함이 마땅하리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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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거창 모리재 (居昌 某里齋)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673번지
모리재는 1637년 인조(仁祖)가 중국 청 태종 앞에 나가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척화파인 정온(鄭蘊)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전의(典醫)와 광주목사의 손에 구명된 후 낙향하여 죽을 때가지 은거했던 곳을 기념하여 유림들이 건립한 재사(齎舍)로 사당 · 모리재 · 서무 · 화엽루 · 내삼문 · 협문 등과 유허비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으로 사용된 화엽루(花葉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자연석을 둥글게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또 화려한 팔작지붕의 처마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방 처마 끝에는 받침기둥을 세워 지붕을 떠받쳤다. 본당인 모리재는 자연석 초석 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一)자로 된 팔작지붕의 건물로,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선생의 학문을 추모하며 공부하였던 곳이다.
모리재는 재실(齋室)로서 특이하게 남부 지방의 민가 형식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매우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1년에 중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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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계숲
위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문화재 지정 거창군 천연보호림 제2호(1982년 11월 23일 지정)
덕유산 기슭에서 발원한 물이 송계사 계곡과 소정천을 지나 갈천에 이르러 동서로 나뉘어 흐르면서 시냇물이 자연섬을 만들고, 수목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고 있는 곳이 갈계숲이다. 조선조 명종 때 유현 석천 임득번과 그의 아들 효간공, 갈천 임훈 등 삼 형제와 문인들이 시를 지으며 노닐던 곳으로 숲 안에는
가선정,
도계정,
병암정,
경모재,
신도비
등이 세워져 지조 높은 선비들의 학덕을 기리고 있으며, 오래된 정자와 건물들이 숲과 어울려 운치를 더하고 있다. 갈계숲은 갈천 선생의 호를 따서 세워진 정자인 가선정이 있어서 가선림이라고 도 하고, 마을 이름을 따 치네 숲이라고 도 부르며, 청학교가 놓인 뒤 청학림이라고도 한다. 수령 200~300년 된 소나무, 물오리나무,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 많은 나무로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봄에 숲 안으로 들어가면 겹벚꽃이 피는 명소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산책길을 따라 숲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걷다 보면 저절로 힐링이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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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거창 용암정 (居昌 龍巖亭)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63번지
용암정은 조선 순조 1년(1801)에 용암(龍巖) 임석형(林錫馨,1751∼1816) 선생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임석형이 지은 『용암정 창건기』와 이휘준의 『중수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종 1년(1864)에 보수 공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자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자 안에는 ‘용암정(龍巖亭)’, ‘반선헌(伴仙軒)’, ‘청원문(聽猿門)’, ‘환학란(喚鶴欄)’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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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거창 용암정 일원 (居昌 龍巖亭 一圓)
Yongamjeong Pavilion and Surroundings, Geochang
용암정(龍巖亭)은 순조 원년(1801)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조부와 부친을 따라 노닐던 용암 위에 세운 정자로, 고종 원년(1864) 증손 임수학(林秀學)이 중수하였다.
지금의 월성계곡에 해당하는 위천을 따라 독특한 형상의 바위들을 정원 요소로 삼고, 주변의 수려한 경치를 한데 모은 명승으로 이를 노래한 임석형의 용암팔경 시가 전하고, 이휘준(李彙濬, 1806∼1867)은 안의삼동(安義三洞)의 원학동(猿鶴洞) 가운데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수승대와 함께 용암정 일원을 꼽았다.
* 용암팔경(龍巖八景): 성령명월(城嶺明月), 금원청풍(金猿晴爐), 위천야우(渭川夜雨), 농산모연(農山暮煙), 덕유효하(德裕曉霞), 종산부운(鍾山浮雲), 석문노송(石門老松) 황강조일(黃崗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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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속집 제3권 / 부록(附錄)
게판사기(揭板事記) [윤면흠(尹勉欽)]
윤면흠(尹勉欽)
모리재(某里齋)는 덕유산의 궁벽한 곳에 있다. 선생께서 이 산에 들어와서 숭정역시(崇禎曆詩)를 지었고 또 복거시(卜居詩)를 지었으니, 시어(詩語)가 비분격렬(悲憤激烈)하여 아직도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게 한다. 정조조(正祖朝)에 이르러서는 친히 제문을 지어 사제(賜祭)하고, 또 칠언절구를 지어 주셨으니, 광세(曠世)의 감개(感慨)로 말하면 수백 년이 마치 하루와 같다 할 것이다. 어찌 아름답고 성대하지 않은가.
영남의 인사들이 모두 이 재실에 시를 모사(模寫)하여 게판(揭板)함으로써 존모(尊慕)하는 정성을 부치기로 의논했으나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다. 이때 부사(府使) 안동(安東) 김인순(金麟淳) 공이 제창(濟昌)에 부임하여 교화를 돈독히 하고 절의를 숭상하되 무엇보다 선생과 관련된 일에 지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임석형(林碩馨) 공이 향인(鄕人)들 -임지목(林之穆), 박윤광(朴潤光), 정호(鄭瑚), 정양학(鄭陽學), 정민제(鄭民濟), 임치욱(林致郁)- 과 의논하기를, “지금이 그 시기이다.” 하고, 마침내 그 전말을 갖추어 말하니, 부사공(府使公)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어제시(御製詩)와 제문을 모각(模刻)하고, 또 선생의 두 시를 새겼다. 또 당세의 명공거경(名公巨卿)에게 편지로 부탁하여 각각 크고 작은 편액의 글자를 써 오도록 하니, 이는 모두 부사공의 힘이었다.
아, 모리에는 옛날부터 누(樓)가 있었다. 불행히 중간에 폐해졌으나 오래지 않아 중건되었다. 그 전말은 우산(愚山) 정지헌(鄭持憲)이 지은 기문에 매우 상세하니, 내가 어찌 감히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겠는가. 그러나 게판(揭板)한 사실도 전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사실을 기록한다.
게판하는 날에 많은 선비들이 함께 의논하여 어제시와 제문은 영당(影堂)의 북쪽 벽 위에 걸고, 선생의 두 시는 누의 정청(正廳) 위에 걸고, 그 나머지 크고 작은 편액은 누의 사방에 나누어 걸었으니, 만 겹의 산중에 광명이 다시 회복되었고, 한 조각 깨끗한 땅은 《춘추(春秋)》를 읽기에 정히 좋게 되었다.
아, 어제시와 제문은 부사공의 글씨이고, 선생의 숭정역시는 선생의 글씨를 모사한 것이고, 복거시는 부사공의 글씨이다. 크게 쓴 ‘백세청풍루(百世淸風樓)’는 송원공(松園公) -상국(相國) 김이도(金履度)- 의 글씨이고, ‘채미헌(採薇軒)’과 ‘험시재(驗時齋)’는 풍고공(楓皐公) -부원군 김조순(金祖淳)- 의 글씨이고, ‘구소(鳩巢)’는 부사공의 글씨이다. 또 시 한 편은 부사공이 짓고 쓴 것이니, 모두 청음(淸陰) 선생의 후손이다. 임석형 공은 하정공(夏亭公) -세명(世明)- 의 손자이다. 하정공은 일향(一鄕)의 기덕(耆德)으로, 모리의 일에 대해 늙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않아 선생의 후손 -영복(榮福)ㆍ선(僐)- 과 함께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서로 의논하면서 이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다. 영당(影堂)을 중수한 것은 공이 실로 주관한 것이다. -관련된 말이 본재(本齋)의 유사(遺事)에 실려 있다.- 이번에 임석형 공이 게판(揭板)하는 일을 시행하면서 온 힘과 마음을 다했던 것은 또한 선대의 뜻을 추념한 것이다.
이에 감히 전말을 간략히 엮어 뒷사람들이 살펴보는 데 대비한다.
[주-D001] 제창(濟昌) : 거창군(居昌郡)과 거제현(巨濟縣)을 합하여 설치했던 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林世明 (1643~1726) | 夏亭林公墓碣銘 幷序○丁未 | 墓碣 | 郭鍾錫 | 俛宇集 |
면우집(俛宇集) 곽종석(郭鍾錫)생년1846년(헌종 12)몰년1919년자명원(鳴遠), 연길(淵吉)호면우(俛宇), 유석(幼石)본관현풍(玄風)개명도(鋾)특기사항이진상(李震相)의 문인. 허유(許愈), 이종기(李種杞), 이승희(李承熙) 등과 교유
俛宇先生文集卷之百五十七 / 墓碣銘 / 夏亭林公墓碣銘 幷序○丁未
林世明 | 1643 | 1726 | 恩津 | 君善 | 夏亭, 養性堂 |
安陰之有林氏。自縣監諱千年始。其孫進士諱得蕃號石泉。隱居淸修。矜式于鄕邦。自是厥后。世有聞人。石泉之子有孝簡公葛川先生諱薰贈參判。瞻慕堂先生諱芸。幷以正學純行。爲一時宗師。其仲氏諱英。亦擩染庭訓。著譽聯璧而不幸早世。是有子承慶同知。是有子眞惠趾美敦行。屢登鄕剡。是有子汝相。是有子東發。俱不達。是娶豐山洪命弼之女。以我 肅廟癸未生子。諱世明字君善。號曰夏亭。神姿瑰偉。雅量宏夷。自幼有遠大望。旣長篤於人倫。急於實踐。不規規於文藝之末。其事親極志體養。居喪哀禮兩至。當祭齊潔致愨。老不懈。慟慕動人。別置祭田以贍宗。延及旁親。俾資香火。有一姊友愛特甚。拊恤諸甥猶己出。治家以禮。閨門肅而雍。敎子孫必先行義而後擧業。循循警誘。納于規矩。尊慕先賢。出於至誠。如某里影堂之重修。嶧川院資之別補。皆爲之竭力以經紀。宗戚鄕里之貧無以自濟者。莫不傾貲割囷以周之。聞知舊之訃。必爲之行素。平居夙興盥櫛。斂飭端跽。非甚病未甞踞倚自便。堂室几案。必灑拭明凈。書籍器用。必放頓齊整。毛髮爪牙之毁落者。必謹收而藏之。未甞慢棄。扁所居之堂曰養性。書思無邪毋自欺二句于壁間。以寓觀省。常以心經自隨。誦讀體認。不舍晷刻。其篤實不倦有如此者。而早謝公車。未甞一毫萌情於見知。月朝品題縱騰於鄕道之公評。而禮羅之致。漠然不及於丘園。世之嗟矣。公則何有。公之沒在英廟丙午閏五月十五日。享年八十有四。始葬于中山先兆。後遷于幷谷丑原。就劉孺人之同岡也。六世孫柄煕將樹石于塋門以表之。來請銘于鍾錫。鍾錫不敢辭。公之先恩津人。高麗版圖判書諱績始祖也。太常博士諱成槿中祖也。縣監則其曾孫也。公娶士人劉世瑾之女。居昌古家也。有三男二女。男尙權,尙玄,尙桂。女適盧說國,姜謙煥。尙權一男碩馨。四女適趙尙洙,金希天,孫鎭翼,典籍金相度。尙玄二男碩奎,碩茂。三女適黃耆,朴慶新,李潤晉。尙桂三男碩珍,碩培,碩苾。一女適李明運。曾玄以後甚盛。今不能具載。銘曰。
天禀之近于道也。家模之篤于修也。居而有政。施而不求。古有孝友先生隱君子者。其若人之儔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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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亭集卷之一 / 詩 / 三洞紀行 二十五首○朴聖範,沈極瑞同遊。
龍巖亭 亭主林錫馨
龍巖平卧水西頭。滿壑風雷日不休。客到虛亭怊悵久。林花含馥向人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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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亭集卷之三 / 詩 / 哭漢濱沈友極瑞 三首
行年五十命知天。人事生前苦未圓。萱春已暮蘭先折。烏鳥招魂淚徹泉。
門戶撑支賴自家。一生邊幅也無華。自去典型猶有寓。滿庭珠樹待時花。
華極先亡子又歸。晩來措大更誰依。冥司亦有搜賢否。從此山南正士稀。
晦亭集卷之五 / 書 / 答沈克瑞
漢濱非無風月。明谷非無憂患。而果所趣之不同故也。務使世間憂患。一切不入于中。則風月卽一公物也。何曾有別樣閒者唐突買得耶。在我措置之如何耳。何不使飛廉鋪紙。姮娥奉硯。以寫程夫子富貴不淫貧賤樂之句耶。此是消憂散之本方也。仙侶庸夫之敎。何其自處太約。處人太夸。若是相懸耶。言若健羡。實含微笑之意。以高明平日汎愛之心。似不當如是。簡傲靜嘿疎略迂恠八字。余之本病也。與世寡仇。故寧欲把風月於閒區。忘憂患於冗臼。誰肯與我同病者耶。好笑好笑。三洞之約。我有踐勝筇屐。何患負約乎。彼此寒暄。不須費墨。而只在嘿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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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거창 모리재 (居昌 某里齋)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673번지
모리재는 1637년 인조(仁祖)가 중국 청 태종 앞에 나가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척화파인 정온(鄭蘊)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전의(典醫)와 광주목사의 손에 구명된 후 낙향하여 죽을 때가지 은거했던 곳을 기념하여 유림들이 건립한 재사(齎舍)로 사당 · 모리재 · 서무 · 화엽루 · 내삼문 · 협문 등과 유허비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으로 사용된 화엽루(花葉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자연석을 둥글게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또 화려한 팔작지붕의 처마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방 처마 끝에는 받침기둥을 세워 지붕을 떠받쳤다. 본당인 모리재는 자연석 초석 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一)자로 된 팔작지붕의 건물로,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선생의 학문을 추모하며 공부하였던 곳이다.
모리재는 재실(齋室)로서 특이하게 남부 지방의 민가 형식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매우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1년에 중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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