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 TV '동물농장' 946회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
투명 공병으로 살기
하나의 정물을 볼 때도 각도를 꺾어서 본다. 정면을 보여주더라도 굳이 빙 둘러 뒷모습을 본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의 뒤편 전경을 보고 싶다. 사람들의 밑면. 가령 발바닥 아래를 보는 거다. 발바닥은 사람을 이루는 외연 중 다른 사람에게 가장 보이지 않는 부위일 테니까. (어쩌면 이런 반골 같은 나의 기질이 글의 원동력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 마음을 읽는 거 같다고들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보는 창. 그런 뜻에서, 다른 사람의 발바닥보다 마음이라는 것을 더 자주 들여다본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꼭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러나 형태가 없다는 것만으로 등한시되는 게 바로 마음이기도 하지. 마음과 사랑, 감정 같은 것. 시는 이미지의 장르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점토처럼 빚는다. 보이지 않는 걸 설명할 때도 상상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시는 은닉이고, 은닉으로써 시각화하는 이상한 장르다.
모두가 눈을 보고 이야기할 때 옆모습을, 뒷모습을 바라본다. 글을 쓴다는 건 멀리 아주 사소한 비틀림에서 시작한다. 모든 게 정확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계. 23.5도로 기울어진 지구. 조금 기울어진 세계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아침이 되면 출근하는 사람들.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오전에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는 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존재하는 나. 은밀하게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모를 세계. 어디에도 모를 곳에 미지의 모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테다.
대학에 다닐 때 아무도 없는 캠퍼스에 남아 겨울을 한 해 꼬박 넘기면 등단을 한다는 농담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내심 믿고 싶은 마음으로 겨울방학 동안 대학에 남았다. 대학가는 방학이 되면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문을 열지 않는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살얼음이 깔려 언덕을 조심히 내려가야 했다. 그때가 살면서 가장 자주 죽은 동물을 만난 때였다. 사람이 없으니 죽은 동물을 치울 사람도 없었다. 차게 얼어붙은 채 방치되는 몸을 조용히 지나치며, 내가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도시에 살면서 가장 자주 목격하게 되는 죽음은 의아하게도 한 무리 개미 떼처럼 몰려다니는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있는 줄도 몰랐던 동물의 죽음이었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는다. 사람의 발에 밟히고 차여서, 지나가던 어느 차에 치여서, 누군가 악의로 독을 섞어둔 밥을 먹고, 그런 죽음의 원인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거의 모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다. 방음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새도 그렇지.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데, 방음벽을 따라 걷다 보면 몇 마리의 새가 머리를 박고 시체가 되어 있다. 공해를 막기 위해서 지어진 벽. 방음벽은 대체로 투명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머리를 부딪친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속는 거다. 가시와 비가시 사이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누구나 보이지 않는 것에 속는다. 지구가 누구나 보이지 않는 것에 속는다. 지구가 조금씩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인과와 사실은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건 일종의 보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들 말하는 문학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아도 마음이란 건 있다고 증명하고 싶으니까.
「벽」은 딱 그맘때. 2020년에 발상해서 쓴 글이다. 오래된 글이라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쩐지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몇 년 동안 끊임없이 퇴고를 거듭한 시이기도 하다. 곧잘 싫증이 나는 성격인 내가 하나의 글을 가지고 다시 쓰기를 몇 번이나 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 보면 끈기보다는 집념으로 썼던 글인 것 같다. 내 마음을 조금씩 토막 내서 쓰는 게 글이라면, 누구나 하나라도 포기하기 싫을 테니까. 「벽」은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시 하나가 복잡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내 글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어떤 글이라도 그렇다. “세계는 이렇다”고 규명하는 화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A는 B다. 1+2=3. 이런 식으로 합당한 계산식으로 계산해 단정 지을 수 있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의 논리는 아니다. A라는 사건 하나가 있더라도 여러 가지 사정이 그곳에 얽혀있는 거다.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처럼. 그래서 나는 내 글이 사회적인 메시지 단 하나를 가지고 있는 시로 읽히고 싶지 않았다. 거시적인 의미나,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은 생각일랑 없어요. 차라리 그렇게 읽히기를 바랐다. 내 마음 안에는 이런 게 있어요. 단순히 보여주는 것뿐. 나의 마음은 방음벽을 넘지 못하고 죽어버린 새, 투명한 컵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게 될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늘 그때마다 쓰고 싶은 것을 썼으니까. 때마다 관심사가 바뀌는 건 나의 장점이고, 단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내면으로 깊이 조성된 나의 마음을 얇게 저민 생햄처럼 조금씩 잘라내면서 쓰게 되겠지. 단 하나만 확실히 한다면, 나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모습’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사실이다. 나의 글은 언제나 유리 공병. 투명하지만 안에 무엇을 담는지에 따라서 형태가 생기고, 작고 희박한 의미가 깃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게 좋다. 투명하지만 단단한 것. 무엇을 만나도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언제나 시를 쓰는 게 즐겁다.
―계간 《시인시대》 2024 여름 -------------------- 추성은 /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