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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 - 국파 전원발 선생님(고려말-조선초)|
문장대 ・ 2020. 1. 24. 12:40
문경 영순면 달지리와 삼강마을 - 회룡포를 답사하면서 주변 관광지를 돌아보는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전원발 선생님의 명당 묘역과 생가터, 그분에 관한 유명 유적지인 청원정, 선생님을 배향한 소천서원 등의 명승지를 답사했다. 고려말 조선초 문신이자 서예가인 국파선생에 대한 여러자료를 초록하여 서술해보기로 합니다.
전원발 선생님이 태어난 곳은 문경시 영순 땅 달지리 이었으나 과거에는 축산-원산-용주-용궁 지역이였다. 과거에는 용궁도 상주땅이었으며 근래에 와서는 용궁의 달지리도 문경땅으로 변했다. 따라서 전원발 선생님이 태어날 당시는 상주땅이고 용궁은 근래는 예천이었으며 달지는 현재는 문경 땅이라 상주-문경-예천에 모두 관련된 인물이다. 다만 관할지 변경으로 고향이 이리저리 바뀐 셈이다.
* 전원발 선생님 출생과 사망
역사 자료에 의하면 1288년 출생-1421년 사망인데 이사실이 맞다면 133세를 살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청나라에 254세 산 사람도 있지만 당시 상황으로 볼때 생몰 연대는 조금 부적합하다. 따라서 어떤 자료에는 생몰 연대 미상이라 기술하고 있다. 1315년에 원나라에 가서 장원으로 급제한것은 맞다. 원나라에서 병부상서 역임한 것을 추적하면 1288년 태생은 맞은듯 하다. 생가터는 아직 답사하지 못해 사진은 추후 올립니다. 문경사랑의 사진과 글을 우선 올립니다.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선생 기념관이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삼강나루터 입구 선생의 생가터에 마련됐다. 생가를 상상케하는 작은 기념관은 국파 선생 연구위원회에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애국애족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건물을 마련하고 2009년 12월 18일 오후 2시 개관식을 가졌다. 개관식에서 전경수 한국마약범죄학회 회장은 경과보고와 개회사에서 “국파 전원발 선생은 고려 때 관리로 38년간 원나라에서 볼모 아닌 볼모로 재임을 하면서 고려가 원나라에 바쳐야 하는 금, 은, 명주, 말 등 조공을 삭감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셨다”며 국가를 위해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국파 선생(1288~미상)은 고려 공민왕 3년(1354년), 원나라가 망하고 귀국했을 때 원나라에 조공을 감면케 한 공로로 축산부원군에 봉군되고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소천강 일대를 하사받아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전원발 선생님 출생지
출생당시는 상주땅이었다. 지금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삼강나루터 입구에 그의 생가터를 발굴했고 전원발 역사관이 새워져 있어 당시 많은 유명인사가 다녀간 자리다. 당시 시장군수 유명인사 등이 참석하고 박찬종 변호사도 참석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예천, 문경의 유명인이 많이 참석해다고 한다.
* 전원발 선생의 정치 생활과 말년에 귀향한 생활 조명
국파 선생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원나라가 지배하여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다. 너무 과중하여 나라가 위태로웠다. 흉년이 들면 조공을 바치지 못하자 원나라 관리들은 우리나라의 처녀들과 어린 청년들을 조공대신 잡아갔으며 처녀들은 궁에서 시녀노릇을 했고, 결혼 못한 병사와 강제결혼시켰다. 이때 견디지 못한 여자들은 고국으로 천리길을 물어물어 추위와 기아를 견뎌내며 고향에 왔지만 화냥녀라고 취급했고 억지로 참은 여자 중 기황후는 황제의 부인인 황후가 되기도 했다. 행주에서 출생한 기황후는 고려말 행주기씨를 흥하게 한 공녀출신 황후이다. 남자들은 끌려가서 노동이나 힘든일을 하고 미소년은 거세당하여 궁중일을 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를 뼈아프게 한다. 이때 전원발 선생도 하급관리로 끌려가서 적응하며 다행히 원나라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에 오르는 쾌거를 이룬 성공적인 인물이다. 1315년에 과거 장원급제한 사실은 유명하며 신라때 최치원이 당나라에가서 과거급제한 사실에 비해 손색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국파선생은 원나라 병부상서에 올라 큰 관리가 되었으나 원나라가 망하고 난뒤 귀국하여 이곳 고향에 돌아와 무이리에 청원정을 짖고 말년을 유유자적 했다. 당시 유명한 홍건적을 물리친 김득배 장군과 이제현 등과 교유했다.
38년간 원나라에서 관리로 생활했으며 귀국시 황제에게 고려의 조공을 탐감하도록 건의하여 성공했고 조선이 개국하고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의 조공은 나라의 재정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공민왕은 국파선생에게 축산부원군의 벼슬을 내리고 청원정 일대의 토지를 식읍으로 주었다. 이때 유유자적하며 지친새라는 한시도 짓고하여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 전원발 선생님의 사망과 묘역
전원발 선생님은 조선초에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며 이곳 무이리 청원정을 짓고 편하 생활을 하다가 1421년 사망하였다. 영순면 오룡리가 명당이라 그곳에 유택을 정했고 그 자손 3형제 전강, 전근, 전경이 오룡리 마을 뒤산에 안장했다. 풍수지리학회에서는 이곳이 명당이라고 많은 풍수가들이 찾아오고 있다. 산양-삼강주막가는 도로 옆에 오룡리가 있고 좁은 농로를 500미터 올라가면 마을이 있으며 마을 끝에 큰 주자장과 묘역이 존재한다. 옆에는 개성고씨 묘역도 자라하는데 며칠전 묘지에서 앞을 바라보니 달봉산과 주변산이 좌청룡-우백호 형상으로 보인다. 묘지도 마을뒤 평지나 다름없는 안쪽이고 앞의산들도 200미터 높이의 야산이다. 마을 끝에 넓은 주차장이 존재하여 묘역을 쉽게 방문 할 수 있다. 후손은 3형제로 전강, 전근, 전경 3형제 아들을 두었으며 3명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조선에 이런집안이 몇명 있을까? 대단합니다.
오룡리 마을 안쪽에 주차장도 있고 재실이 있어 차로 답사하기 좋은 명당이다.
* 전원발 선생님 유적
달지리의 작은 역사관은 현재 초라하지만 용궁면 무이리에 있는 청원정과 바로옆에 있는 소천서원은 역사적인 유적이다. 청원정은 새로 건설되었지만 산양구곡 중 마지막 9곡 정자이다. 금천강변의 바위는 멋지고 바위에 청원정 글씨는 무척 고풍스러워 서예가들이 많이 답사하는곳이다. 보은 법주사에도 전선생님의 글씨가 남아있다. 법주사를 답사하면 스님들에게 문의하여 글씨를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소천서원은 청원정 바로옆에 존재하며 대원군 시절에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국파선생님만 배향하는 서원이다. 예천 용궁면에서 금천리 입구에 안내판을 새웠다고 한다. 위의지도를 참조바랍니다. 지친새라는 국파 선생님의 시는 김득배 선생님의 운을 따라 지은 시로 유명하다. 용궁전씨(축산전씨라고도함)의 후손들이 청원정 옆에 많은 비석과 유적을 마련하여 조상의 업적을 빛내고 있다.
들머리 : 입구- 무이리 마을회관 앞 추월정 지나 마을 관통하여 금남리 용궁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도되고, 반대로 용궁면소에서 금남리로 가다가 느티나무에서 좌측으로 가도됩니다.
또 용궁향교 앞 입구에서 아래와 같은 이정표를 보고 가도된다. 무이서당 구경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삼강가는 도로따라가다가 우측동네로 들어가면 추월정도 나타남. 무이리에 존재하지만 좀 찾기가 거북한 것은 사실입니다.
말년에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낸 청원정=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됨
금천 옆 청원정 - 산양구곡중 제9곡 정자
문이 잠겨 담장 밖에서 촬영해 봅니다.
청원정 바로 옆에는 전원발 선생님을 모시는 소천서원이 있네요.
소천 서원이 문이 잠겨 담넘어에서 찍은 사진
제목 -- 지친새 : 국파선생님이 김득배 선생님의 운을 따서 지는시입니다.
江闊脩鱗縱
(강활수린종)
林深倦鳥歸
(임심권조귀)
歸田是吾志
(귀전시오지)
非是早知機
(비시조지기)
강 넓어 큰 고기 마음껏 놀고
숲 깊어 지친 새 돌아오누나
전원으로 돌아옴은 내 뜻이지만
진즉에 기미 앎은 아니었다네
脩鱗: 큰 고기
倦鳥:지친 새
知機:기미를 알다
[출처] 지친 새 [전원발]|작성자 난초
전원발
[ 全元發 ]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다. 1315년 원나라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원나라에서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 등을 지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초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출생-사망 | ? ~ 1421 |
본관 | 용궁(龍宮) |
호 | 국파(菊坡)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정치 |
본관은 용궁(龍宮)이고, 호는 국파(菊坡)이다. 민부전서(民部典書) 진(珒)의 아들이다. 1315년(충숙왕 2) 원나라에서 고려인 인재를 뽑는 괴과(魁科)에 장원급제하여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榮錄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자주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나라는 작은데 세공(歲貢)의 폐가 많습니다’라고 말하여 세공으로 인한 고려의 부담을 덜도록 노력하였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도, 당시의 황제인 순제(順帝)가 소원을 묻자, ‘다만 고려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을 대폭 삭감해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공물의 특감(特減)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김득배(金得培)·이제현(李齊賢)·김구용(金九容)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유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의 글씨가 남아 있다.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두산백과)
전원발
[ 全元發 ]
이칭별칭 | 호 국파(菊坡) |
유형 | 인물 |
시대 | 고려 |
출생 - 사망 | 미상 ~ 미상 |
성격 | 관리,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용궁(龍宮, 경상북도 예천) |
저서(작품) |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
대표관직(경력) | 원 병부상서,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 |
정의
고려후기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 축산부원군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개설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 전법총랑(典法摠郎) 전충경(全忠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총랑(判圖摠郎) 전대년(全大年)이며, 아버지는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전진(全珒)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가 있다. 아들에 사복판사(司僕判事) 전한(全僩)이 있으며, 손자 전강(全强)·전근(全謹)·전경(全敬)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벼슬)으로서 현달(顯達: 높은 지위에 오름.)하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백씨통보(百氏通譜)』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다음은 전선생님 후손의 글을 올려봅니다.
원나라가 고려 조정에 모든일에 사사건건 간섭한 때는 칭기즈칸이 유럽과 러시아,동서아시아,중앙아시아 거의 세계를 지배하고 4대에 걸쳐 5대인 쿠빌라이 칸에 의해서 더더욱 전성기를 맞이하는 몽고시대때인데, 쿠빌라이 칸이 군사력을 증강시켜서 고려를 7차 침입까지 하였으나 막아냈다 .그런데 그때 더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자 고려 정권을 잡고 있던 최우와 고종이 강화도로 피신하자, 더 침입하고 끝내 고려가 원나라의 사위 나라가 되서 일을 사사건건 간섭 당하였다. 쿠빌라이 칸(황제)은 13만의 원나라 군과 고려 1만군을 억지로 동원하여 14만군으로 왜나라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태풍 때문에 실패 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의 미인,어린아이들도 데려가고 고려의 왕족들까지 데려가서 원나라의 풍습을 배우게 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 횡포가 극심했다.
수해나 한해로 고려국가 조공을 미쳐 내지못하면 젊은 청년을 잡아다가 거세 시켜 내시로 잡아가고, 부녀자를 공녀로 삼는등 인간 공물을 요구 하기도 했다. 고려와 원나라 관계는 약소국과 강대국간의 불안전 한 힘의 균형이었디. 더더욱 홍건적이 수시로 고려를 공격하기 때문에 원나라의 우화 관계를 위해서는 조공은 어쩔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러한 선상에서 경상북도 문경 예천 출신이 국파 전원발 선생이 원나라에 파견되어 조공을 깍는 일을 했다. (홍건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 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된 한족(漢族) 반란군)
* 국파 전원발 선생 기념관 개관식 축하해 주신분에게 감사 의 메시지
2009.12.18 오후2시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국파 전원발 선생 생가터에서 개최된 향토문화관 국파 전원발 선셍 기념관 개관식에 축하 화환을 보내주신, 민주당 정균환 대표(국회의원)님, 임태희 노동부 장관님, 한나라당 국회의원 조운환 의원님, 국민연금 공단 관리공단 전광우(국파 전원발 선생 후손) 이사장님 ,경찰발전협의희, 대한민국무궁화클럽. 한국사이버시민마약감시단 전북지역감시단, 문경 예천 새농민 단체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날 행사에 영하의 추운날씨에도 불구하시고, 기꺼히 참석하시여 사회를 봐주신 대한민국무궁화클럽 노철환 대변인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올바른 사람들의 모임 대표 박찬종 변호사님, 한국마약범죄학회 고문 전,국회의원 엄호성 변호사,문경시청 관계자. 문경시 영순면장 , 예천군청 문화관광과장 님,문경문화원 채대진 원장님,지역주민등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조상의 업적과 정신 문화를 잊지않고 전국 경향각지에서 오신 전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 전상근 실장님 , 대한불교 총화종 종무원장 전남정 스님을 비롯하여 국파선생의 후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고려 시대 경상북도 문경.예천에서 태어나 18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볼모아닌, 볼모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38년간 조공을 삭감시켜 세공으로 부터 피폐한 국민을 보호한 국파 전원발 선생의 애국 애족 정신을 영원히 보존하고 전파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화환을 보내주시고 뜻을 함깨해 주신 분께 그듭 감사드립니다. 저물어 가는 한해 나쁜것은 다보내고,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향토문화관 국파 전원발 선생 기념관
관장 전경수 올림
* 전원발(全元發) 선생님 - 네이브 검색자료 초록
여말 선초, 용궁면 무이2리 소천(蘇川) 사람, 호는 국파(菊坡), 본관은 용궁(竺山), 용성부원군 방숙(龍城府院君邦淑)의 5세손, 전법총랑 충경(典法摠郞忠儆)의 증손, 판도총랑 대년(版圖摠郞大年)의 손자, 민부전서 진(民部典書璡)의 아들,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1315년(충숙왕 2)에 원 나라가 고려인 인재를 뽑는 괴과(魁科)에 장원 급제(壯元及弟)하여 원 나라에서 영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 태학사(榮錄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올랐는데, 자주 입시(入侍)하여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나라는 작은데 세공(歲貢)의 폐가 많습니다."라고, 고려의 실정을 들어 여러 차례 세공의 폐됨을 원 나라 조정(朝廷)에 알렸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귀국할 때 원 나라 순제(順帝)가 이르기를, "소원을 말하라."라고 하자, "다만 고려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을 대폭 삭감해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공물의 특감(特減)을 허락받아 조선 개국 후에도 명(明) 나라까지 이 예에 따라 공물을 받았다 하니, 그의 사심(私心) 없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정녕코 본받을 만하다. 이때 원 황제(元皇帝)는 공복(公服) 1벌을 하사하여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래서 후손이 용궁(龍宮), 또는 축산(竺山)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소천(蘇川)에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난계 김득배(蘭溪金得培), 익재 이제현(益齋李齊賢), 척약재 김구용(척若齋金九容)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글씨에 뛰어나서 그의 글씨는 중국 원(元) 나라에도 알려졌고, 법주사 자정국존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 李叔琪撰)를 해서(楷書)로 썼다. 그의 필치(筆致)는 송설체(松雪體)도 아니고, 고려 재래의 서풍도 아니나 범속(凡俗)치 않았다. 용궁면 향석리에 이성 기단(二成基壇)의 삼층석탑(三層石塔)과 미륵불(彌勒佛)을 제작하여 세웠다. 왜냐하면 이 곳에 신라시대 축산군(竺山郡)을 처음 설립할 때 용(龍)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 징조(徵兆)가 있어 부락민(部落民)들이 서로 싸워 살인 사건이 자주 일어나므로 탑과 미륵을 세웠다. 그래서 평화를 소원하니 부근 주민들의 질병과 잉태(孕胎)까지도 부처님의 덕을 많이 입게 되었다고 한다. 소천(蘇川, 省火川)의 맑은 물이 물굽이치는 강 동안(東岸) 첩첩한 곳에 세워진 청원정(淸遠亭)이 그의 것이고, 이 정자의 바로 옆에 있는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고, 묘는 문경시 영순면 오룡동 분퇴동 사현산 병향 임좌(聞慶市永順面五龍洞分退洞沙峴山丙向壬坐)에 있는데, 1803년(순종 3)에 입재 정종로(立齋鄭宗魯)가 찬갈(撰碣)하였고, 용산 이만인(龍山李晩寅)이 신도비(神道碑)를 찬하였다. 실기(實記) 1권이 있다. 소천(蘇川)에 있을 때 난계 김득배(蘭溪金得培)가 증시(贈詩)하기를, "강물이 넓으니 물고기가 자유롭고,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온다. 전원(田園)에 돌아옴만이 나의 뜻이요, 부귀의 위태로운 기미를 일찍 안 건 아니어라(江闊修鱗縱 林深倦鳥歸 歸田乃吾志 非是蠶知機)"라고 하였다. 후손들은 이조 때부터 용궁면 가야리가 중심이 되어 용궁현(龍宮縣)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東文選 19卷(五言絶句), 大東韻府群玉, 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龍宮縣邑誌, 竺山勝覽 1934, 朝鮮寰輿勝覽 1929, 醴泉郡誌 1939, 族譜, 韓國人名辭典, 韓國藝術總覽 167쪽, 韓國書藝史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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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무이리의 무이서당에 사진입니다. 전원발 선생님 유적은 아닙니다.
[출처] 역사의 인물 - 국파 전원발 선생님(고려말-조선초)||작성자 문장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