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甲子/文城府院君 柳亮卒。 亮字明仲, 文化人也, 密直使繼祖之子。 其先有車達者, 有功於麗祖統合之時, 賜號三韓功臣, 子孫世爲達官。 亮少卓犖不群, 爲儕輩所憚。 洪武壬戌, 年二十八, 以護軍辭職赴試, 中第一, 累遷判宗簿寺事。 己巳冬, 隨順安君 王昉赴京, 會有讒人造言, 交構於上國者, 亮隨事辨析。 國初, (陛)〔陞〕 商議中樞, 太祖以亮久侍潛邸, 命參元從功臣。 丙子出尹雞林。 丁丑倭虜大熾, 太祖遣右政丞金士衡往討之。 會倭寇適至, 亮與邊將共擊, 賊勢窘欲降, 邊將許之, 賊尙覘虛實, 逡巡不決。 亮解弓矢, 馳入賊中, 以示無他, 賊信之, 握手開懷, 贈之良劍。 亮卽率降倭使者十人, 赴士衡幕, 士衡留置倭船于蔚山浦, 乃送倭使于朝, 命厚贈糧米慰諭之, 密使邊將殲之。 徵兵船未集, 賊聞飛語, 遂執蔚山郡事李殷吏一妓一以去。 柄用者謂亮嗾之, 使憲司劾問, 太祖命勿治, 止配合山。 柄用者憤無所洩, 復請逮問, 繫獄數月, 拷掠備至。 我殿下愍其見屈, 乘間極言, 太祖感悟得釋, 命於羅州安置。 戊寅起爲江陵大都護府使, 民皆懷之, 爲立生祠。 上卽位, 授參知三軍府事。 辛巳賜號推忠翼戴佐命功臣, 自是歷遷要秩。 乙未, 拜右議政, 未幾以疾辭。 以文城府院君, 加功臣號同德二字就第。 至是病疽卒, 年六十二。 訃聞, 上甚悼, 輟朝三日, 遣代言李種善, 賜祭于第, 致賻有加, 官庀葬事。 亮性高亢剛躁, 爲政務大體, 不喜變更, 是是非非, 不爲詭隨。 諡曰忠景。 子五人, 佐、謹、京生、江生、漢生。
.........................
세종실록60권, 세종 15년 5월 7일 기미 3/3 기사 /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우의정으로 치사한 유관의 졸기
| 유관(柳寬) | 1346 | 1433 | 문화(文化) | 몽사(夢思), 경부(敬夫) | 하정(夏亭) | 유안택(柳安澤) |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곧 거애(擧哀)하고자 하니,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오늘은 잔치를 베푼 뒤이고, 또 예조에서 아직 정조장(停朝狀)을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니, 내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흰 옷과 흰 산선(繖扇)으로 홍례문 밖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과 같이 거행하였다. 관의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인데, 뒤에 이름은 관(寬), 자를 경부(敬夫)로 고쳤다. 황해도 문화현 사람으로 고려 정당 문학(政堂文學) 공권(公權)의 7대손이다. 신해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옮겨서 전리 정랑(典理正郞), 전교 부령(典校副令)이 되고, 봉산 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성균 사예가 되고, 내사 사인(內史舍人)과 사헌 중승(司憲中丞)을 거쳤다. 태조가 원종 공신권(原從功臣券)을 하사하고, 대사성·좌산기(左散騎)와 이조·형조의 전서(典書)를 거쳐, 강원·전라 두 도의 관찰사와 계림 부윤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예문관 대제학, 형조 판서를 지나, 두 번 대사헌이 되고, 의정부 참찬과 찬성으로 옮겨 갑진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관은 공순 검소하고 정직하며, 경사(經史)를 널리 보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며, 《무경(武經)》에 이르러서도 모두 섭렵(涉獵)하였다. 집에 있을 때 살림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서사(書史)로 스스로 즐기고, 비록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이단(異端)088) 을 배척하여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불공을 하지 말고 일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르되, 포해(脯醢)만은 없애라. 시속에서 놀라고 해괴히 여길까 두렵다. 비록 기일(忌日)을 당할지라도 불공을 드리고 중을 먹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수(壽)가 88세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치조(致弔)하며, 관에서 장사를 다스렸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한결같이 닦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간(簡)이다. 아들 셋이 있으니, 유맹문(柳孟聞)·유중문(柳仲聞)·유계문(柳季聞)이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右議政仍令致仕柳寬卒。 上聞訃, 卽欲擧哀, 知申事安崇善啓曰: "今日設宴之後, 且禮曹停朝狀尙未上, 日昏而雨, 請於明日行之。" 上不從, 以白衣素繖扇, 御弘禮門外, 率百官擧哀如儀。 寬初名觀, 字夢思, 後改寬, 字敬夫。 黃海道 文化縣人, 高麗政堂文學公權之七代孫也。 中辛亥科, 累遷典理正郞、典校副令, 出守鳳山, 入爲成均司藝, 歷內史舍人、司憲中丞, 太祖賜元從功臣之券。 歷大司成、左散騎、刑吏曹典書, 出爲江原、全羅兩道都觀察使、雞林府尹, 入歷藝文館大提學、刑曹判書, 再爲大司憲, 轉議政府參贊贊成。 甲辰, 陞右議政。 寬恭儉正直, 博覽經史, 敎誨不怠, 至於武經, 亦皆涉獵。 居家不治産業, 惟以書史自娛, 雖至屢空, 略不介懷。 排斥異端, 敎諸子曰: "我死之後, 不作佛事, 一從《朱文公家禮》, 但去脯醢, 恐有流俗之驚駭也。 雖當忌日, 亦不供佛飯僧。" 至是卒, 壽八十八。 停朝市三日, 致弔官庀葬事。 諡文簡, 學勤好問文, 一德不懈簡。 有子三: 曰孟聞、仲聞、季聞。
.........................
세종실록68권, 세종 17년 4월 15일 병진 1/1 기사 /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유관에 부의할 것을 명하다
임금이 상정소(詳定所)에 명령하기를,
"일찍이 의정을 지낸 대신이 죽으면 특별히 쌀과 콩 합하여 7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 하여 왔는데,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에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상례(常例)가 아니라.’ 하였고, 근신(近臣)이 또 아뢰지 아니하여 진작 부의(賻儀)를 보내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심히 뉘우친다. 이제 비록 이미 장사는 지냈으나 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았으니, 추후하여 부의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모두들 아뢰기를,
"상감 분부가 윤당합니다."
하매, 곧 호조에 전지(傳旨)하여 추급(追給)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丙辰/上命詳定所曰: "曾經議政大臣之卒, 特賻米豆共七十石、紙一百卷, 其來尙矣。 柳寬之卒, 有司謂非常例, 近臣又不啓, 未卽致賻, 予甚悔之。 今雖已葬, 喪制未畢, 追賻之何如? 其議以聞。" 僉曰: "上敎允當。" 卽傳旨戶曹, 追給。
.........................
세종실록75권, 세종 18년 12월 26일 정해 4/8 기사 /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이 단군의 사당을 평양에 건립하는 것이 그릇되었음을 아뢰다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사눌(柳思訥)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가 날 때는 사람들보다 달랐으며, 그가 죽어서는 화하여 신이 되었으며, 그가 나라를 누린 역년(歷年)의 많음은 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문을 짓게 했는데, 그 때에는 유사가 그 사실을 살피지도 아니하고 평양에다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신의 숙부 유관(柳寬)이 그 그릇된 점을 변론하여 일이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
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前判漢城府事柳思訥上書曰:
臣伏覩《世年歌》, 檀君, 朝鮮之始祖也。 其生也異於人, 其歿也化爲神, 其享國歷年之多, 未有若此也。 曩者殿下命攸司建廟致詞, 當其時也, 攸司未究其實, 請立廟於(於)平壤, 臣叔父寬辨論其非, 事未施行。 臣以《世年歌》考之, 檀君初都平壤, 後都白岳, 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 山爲神。 其歌曰: "享國一千四十八, 至今廟在阿斯達。", 則豈無所據乎? 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 其堂宇位版猶存, 與《世年歌》合, 臣愚以爲捨此而更立廟於他處, 恐非其所, 伏惟上裁。
命下禮曹。
.........................
세종실록89권, 세종 22년 6월 20일 경인 3/4 기사 /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의 졸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사눌(柳思訥)이 졸(卒)하였다. 사눌의 자(字)는 이행(而行)인데, 황해도(黃海道) 문화현(文化縣) 사람이다. 나이 어려서 부모가 다 돌아가고 숙부 유관(柳寬)의 집에서 자라났다. 힘써 배워서 과거에 뽑히어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 이조(吏曹)·병조(兵曹) 정랑(正郞)을 지내고, 정해년에 중시(重試)에 뽑히어 특별히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제수되고, 얼마 아니 되어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에 옮기고 여러 번 사헌부 집의(執義)에 옮기어 일을 말하다가,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으로 귀양갔다. 뒤에 사간원 좌사간(左司諫)에 승진하고, 신묘년 여름에 승정원(承政院) 좌부대언(左副代言)에 뽑히고, 지신사(知申事)에 옮기었다가 죄를 얻어 안악군(安岳郡)에 귀양가고, 병신년 겨울에 판홍주목사(判洪州牧事)가 되고, 정유년 가을에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고, 함길·강원·경기 3도의 관찰사(觀察使)를 거치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고, 항상 관습 도감(慣習都監)의 제조(提調)로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6이었다. 유명으로 불사(佛事)를 짓지 말게 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매, 하루를 철조(輟朝)하고 조의(弔意)를 보내어 부의(賻儀)를 주고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하였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마음을 잡아 결단하는 것을 숙(肅)이라 한다. 사눌의 인품은 헌앙(軒昻)하며 작은 절도에 구애하지 않고, 숙부 유관(柳寬)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고, 유관이 졸(卒)하매 복을 입고 애통하기를 아버지와 똑같이 하였다. 아들 세 사람이 있으니 유희생(柳喜生)·유우생(柳偶生)·유갱생(柳更生)이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藝文館大提學柳思訥卒。 思訥字而行, 黃海道 文化縣人。 早歲, 父母俱歿, 養于叔父寬家, 力學擢第, 歷司諫院左正言、吏兵曹正郞。 歲丁亥, 擢重試, 特授司憲掌令。 未幾遷議政府舍人, 累遷司憲執義。 以言事貶于黃海道 安岳郡, 後陞司諫院左司諫。 辛卯夏, 擢承政院左副代言, 遷知申事, 得罪流安岳郡。 丙申冬, 判洪州牧事, 丁酉秋, 拜同知摠制, 歷咸吉、江原、京畿三道觀察使, 至判漢城府事、藝文大提學, 常提調慣習都監。 至是卒, 年六十六。 遺命不作佛事。 訃聞, 輟朝一日, 致弔賜賻。 諡文肅, 學勤好問文, 執心決斷肅。 思訥器宇軒昻, 不謹小節。 事叔父寬如事父, 寬卒, 持服哀慟, 一如父。 有子三人: 喜生、偶生、更生。
.........................
세종실록107권, 세종 27년 1월 2일 병자 2/2 기사 /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개성부 유수 유계문의 졸기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유계문(柳季聞)이 졸(卒)하였다. 계문의 자는 숙행(叔行)이며, 우의정 유관(柳寬)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을 여러번 옮겨 이조 정랑에 이르고, 의정부 사인(舍人)·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겸지형조(兼知刑曹)로 발탁되었다. 갑진년에 교서(敎書)와 선온(宣醞)을 받들고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에게 훈유하러 갔는데, 맹가첩목아가 의심하여 들판에 장막을 설치하고 접대하는지라, 계문이 교서의 뜻과 하사한 술을 설명해 이르고 술잔을 수없이 주고받으면서, 말씨와 웃음이 친절하고 흐뭇하니, 맹가첩목아가 의심을 풀고 기꺼이 복종하고, 곧 처첩(妻妾)을 내어 보이고 술을 치게 하였다. 이 해에 또 선온을 가지고 아목하(阿木河)에 갔다가 돌아왔고, 우사간(右司諫)으로 옮겼다. 을사년에는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형조 참판·공조 참판·사헌부 대사헌 과, 경기도·강원도·황해도의 관찰사를 잇달아 지냈다. 신유년에는 한성 부사(漢城府事)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로 옮겼고, 계해년에는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행궁(行宮)에 문안드리러 오다가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길에서 갑자기 졸도해 숨졌다. 향년이 63세다.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조상(弔喪)과 부의(賻儀)를 의식대로 하였다. 시호를 안숙(安肅)이라 하였으니, 안(安)은 너그럽고 부드럽고 화평함[寬柔和平]을 뜻하고, 숙(肅)은 마음을 굳게 가져 결단성 있음[執心決斷]을 뜻한 것이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용납성이 있어서 소소한 말절(末節)에 구애됨이 없었다. 아들은 유권(柳睠)·유보(柳䀯)·유환(柳睆)·유정(柳𥇓)·유제(柳睇)·유조(柳眺)이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開城府留守柳季聞卒。 季聞字叔行, 右議政寬之子。 登第, 累官至吏曹正郞, 擢議政府舍人、判司宰監事、兼知刑曹。 歲甲辰, 奉敎書宣醞, 往諭童猛哥帖木兒, 猛哥帖木兒疑之, 設帳草野待之, 季聞開諭敎旨, 賜酒酬酢無算, 言笑款洽, 猛哥帖 木兒解疑悅服, 乃出見妻妾, 使行酒。 是年, 又奉宣醞, 往阿木河而還, 遷右司諫。 乙巳, 拜禮曹參議, 出爲忠淸道觀察使, 歷刑工曹參判、司憲府大司憲、京畿ㆍ江原ㆍ黃海道觀察使。 辛酉, 拜漢城府事, 尋轉刑曹判書。 癸亥, 爲開城府留守, 至是來問起居于行宮, 至迎曙驛路上暴卒, 年六十三。 輟朝二日, 弔賻如儀。 諡安肅, 寬裕和平安, 執心決斷肅。 爲人寬容, 不拘小節。 子睠、䀯、睆、𥇓、睇、眺。
.............................
지호집(芝湖集) 이선(李選)생년1631년(인조 9)몰년1692년(숙종 18)자택지(擇之)호지호(芝湖), 소백산인(小白山人)본관전주(全州)시호정간(正簡)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芝湖集卷之十 / 行狀 / 左議政柳公行狀 戊辰五月
| 柳灌 | 1484 | 1545 | 文化 | 灌之 | 松庵 | 忠肅 |
| 숙종 | 14 | 1688 | 무진 | 康熙 | 27 | 58 | 金煥과 金益勳의 일로 다시 양사의 탄핵을 받다. |
公姓柳。諱灌。字灌之。號松菴。文化人。始祖諱車達。高麗大丞。自是世有衣冠。有諱公權。參知政事,政堂文學。文簡公。有諱澤。尙書右僕射。有諱璥。僉議中贊。文正公。有諱陞。都僉議司事。貞愼公。連四代皆以勳業致大位。入國朝。有諱亮。左議政文城府院君。忠景公。是於公爲五代祖也。曾祖諱尙榮。司憲府監察贈吏曹判書。祖諱霔。衿川縣監贈議政府左贊成。考諱廷秀。司憲府掌令贈議政府領議政。妣密陽朴氏。萬戶潤孫之女。贈貞敬夫人。三代之贈。以公貴也。公以 成化甲辰生。少孤力學。事母夫人至孝。正德丁卯。以新榜生員。首登高第。歷敭華貫。出入中外。所至皆有聲績。以履歷之可紀者言之。則常歷吏郞。己卯。爲執義。癸未。以判決事。出按海西。甲申。以大諫召還。乙酉。又爲全羅監司。丙戌。辭遞。甲午。爲禮判。己亥。判秋曹。是年。秉東銓。辛丑冬。由貳公。特除關西伯。朝廷留之。癸卯冬。又以贊成。申前命。三司以內外輕重。連章固爭。上終不許。仁宗初乙巳正月。自關西擢拜右議政。秋。陞左議政。先是。尹任與尹元老,元衡兄弟。結釁。金安老嗾三司。論竄元老兄弟。而安老以密旨。旋敗死。元衡等。唱謂任謀危國母。及其東宮有火災。任又指謂人火。飛語藉藉。時朝紳。又各有所主。遂有大小尹之說。而如李芑,林百齡,鄭順朋,崔輔漢等奸凶之輩。皆陰結元衡兄弟。動搖宮禁。有易樹之志。公正色朝端。使不得行其志。固爲群奸所深惡。而其爲銓長也。入侍親政。中廟特以李芑爲兵判。公卽啓曰。芑以贓吏女壻。未通顯列。不合是職。命由是寢。至是。芑先公入相。兩司卽彈劾改正。以公代之。 a143_504d上又擢元衡爲工曹參判。蓋欲慰慈聖。而宋都憲麟壽力爭逾月。竟奪其資。群凶之怨。於此益次骨矣。及仁廟疾大漸。傳于大臣曰。先王嫡子。惟我與慶原大君。某雖年幼。聰睿夙成。可付後事。卿等其共輔立之。是時。明宗春秋僅十二歲。公與領相尹仁鏡。請親承傳敎。遂引見于臥內。七月一日。仁廟賓天。明宗卽位。公與領相。問安于三殿。文定王后答曰。今者幼沖嗣位。凡國家大事。專恃大臣。且往者浮言之輩。造爲邪說。欲亂國家。而自上欲盡洗之。務定人心。以安朝廷。大臣亦宜知此意。鎭定人心。盡 a143_505a忠輔國。公與仁鏡等啓曰。伏承下敎。欲務定人心。以安朝廷。辭旨懇惻。不勝感激。今幼主新立。國家多艱。臣等日夜號慟。思進輔護之策。不知所爲。易曰。開國承家。小人勿用。又曰。小人勿用。必亂邦也。今擧朝皆以爲。鎭人心安宗社。莫先於去邪勿疑。臣等伏見天之降喪國家。未有甚於此時。先王昇遐。只隔八朔。大行王又至斯極。是雖曰天之降喪。其所以致孼者。實由於人。軍器寺僉正尹元老。其情兇險。其心詭詐。依憑肺府。日以造言爲事。離間天親。大行王孝友。出於天性。兄弟之好。無纖毫間。然而此人謂 a143_505b東宮將加害於大君。以此恐動宮掖。交構兩間。以先王聖聰。不能無惑。日夜以未得保幼子憂慮。遂成心熱。終至大故。大行王亦以不能順於親友于弟。常懷憂懼。乃遭大變。重成羸毀。曾未幾時。又至大故。輿情痛憤。欲食其肉。此宗社之大賊。國家之禍胎。此人雖是慈殿之至親。以大義言之。實慈殿之讎也。請亟命遠竄。一以慰兩朝在天之靈。一以慰臣民積鬱之憤。宗社幸甚。文定王后答曰。實有如此事。則宮中豈無所聞乎。元老雖無狀。不推言根而罪之。無乃不實乎。三啓。答曰。政丞不必至於如此。雖曰 a143_505c豈偶然而啓。予亦豈偶然而不從乎。政丞豈親聽乎。必傳聞而然。推得言根。然後可以定罪。公等以大行王在東宮時。下賓僚之書啓曰。自上若覽此。則可知朝廷之意也。時公將啓此事。累日會議。李芑每稱不平。出臥他處。丁玉亨亦退坐不參。權橃責曰。當其被禍。豈以退坐而獨免乎。仁鏡初使尹漑。起啓草。翌日來言曰。昨日會議。未能詳知。未得製來。左右默然。是日問安後。欲啓之而慈殿備忘記先下。公驚謂曰。自上知其幾微矣。其啓初以請亟加顯戮定議。李相浚慶獨不可曰。如此啓之。亦已太速。況可言 a143_505d戮乎。遂改以遠竄。公又啓于文定王后曰。古者皇帝幼沖。則太皇太后聽政有例。故近日公事。出納于上殿矣。貞熹王后時日記。未見有垂簾之事。然垂簾古也。今則不可不設。請令政院備其儀。從之。政府六曹。請罪尹元老。大王大妃答曰。予豈惜元老而不從朝廷公論乎。以有隙之人所爲故也。再啓曰。 中宗大王時。欲論啓而不果者。以中宗亦不能無惑邪說。恐或事有難處也。大行王時不果啓者。恐有傷母后之心。今則無如此之嫌。而正極言正罪之時也。副提學羅淑,大司憲閔齊仁,大司諫金光準 a143_506a等。亦交章請罪。時大臣則啓于慈殿。三司則啓于大殿。領府事洪彥弼等。知中樞府事鄭士龍任權,僉知金舜皐,大司成趙士秀等。莫不請罪。奉敎王希傑等。政府舍人六曹郞官等。各上疏請罪。此則不報 都承旨宋麟壽等。請快從公論。擧朝咸請。大王大妃答曰。擧朝之臣。論執至此。故玆以勉從。遂付處南海。時判義禁丁玉亨。噤無一言。元老猶肆毒曰。明年天使當有大赦。吾豈可久於彼。二十二日壬子。李芑,許磁,鄭順朋,林百齡等。詣闕啓急事。請召領相及兩司長官。俄而大王大妃御忠順堂。垂簾而坐。上御東向 a143_506b西。李芑等及洪彥弼,尹仁鏡,權橃,李彥迪等。亦入侍。以尹任有不自安之心。不宜在都下。遠竄星州。柳仁淑爲稍存形迹罷職。以公爲物論。亦云不自安。可遞相職。定議而出。蓋前一日。文定王后下密旨于元衡。使兩司。論公及任仁淑等罪。長官閔齊仁,金光準一會中學。發論欲罪。執義宋希奎,司諫朴光佑,掌令鄭希登李彥忱,獻納白仁傑,持平金䃴閔起文,正言金鸞祥柳希春。堅拒不從而罷。故至是芑等。有此來啓。文定王后引丁酉年許坰推案。以證任動搖 國母之罪。俾於遠竄。傳旨添入此語。時入侍諸臣。皆 a143_506c以鎭定人心爲言。而李彥迪之言尤甚切。至文定亦優容問答。雖以許磁,林百齡之姦。猶不敢肆然發凶言。獨李芑之言。終始陰慘。蓋芑已受密旨。內外相議定故耳。希奎,光佑等諸臺啓曰。昨日大司憲閔齊仁,大司諫金光準。欲論啓尹任等三人。與臣等會議。臣等以爲三人雖有可論之事。當主少國疑之時。奸細之徒。胥動浮言。論啓甚非其時。適以陷奸計而增士禍。議不能一而罷。如此莫重之事。不卽論啓。不職甚矣。請遞臣等之職。閔齊仁,金光準亦避。院相並請出仕。癸丑。獻納白仁傑。獨啓極言罪三臣也。密旨不 a143_506d降于政院。而降于元衡。只曰。遠竄罷職遞差。而無傳旨辭緣。俱失事體。而元衡徒知承順。不爲救正。請推考。齊仁以憲府長官。聞密旨之下。奔走奉行。臺諫體面掃如矣。執義宋希奎,司諫朴光佑等。與臣所啓之意相同。而不卽決啓。徒煩辭避。未免逡巡之跡。請齊仁以下並遞。答曰。密旨。乃宗社切迫。不得已之事。啓意當與朝廷議處。甲寅。命招大臣及六卿。傳曰。白仁傑假托以正。庇護逆賊。使深憂國事者。不得自安。其先罷職囚治。宋希奎以下。亦並罷職加罪。任南海安置。仁淑茂長遠方付處。公舒川中道付處。仁鏡等以 a143_507a仁傑事。回啓曰。臺諫以言得罪。則士氣摧沮。請恕其愚妄。不允。原情後。因兩司啓。見釋。後竟遠竄。丙辰。贊成權橃詣闕啓曰。自先朝七年凶荒。今年。秋雨不正。民生可憐。自昨日。大風連雨。蒙昧不止。小臣之意。以謂大臣竄逐。此國家重事。而其罪亦不分明。恐或天意有所感而然也。近者會議。人皆不知其端。今若以謀危宗社罪之。則乃人臣極罪。罪名不可不明。 幼主卽位。未逾月。遽竄受遺大臣。人心不測其端。又囚諫臣。人心畏言。而不敢有所論啓也。尹任雖被重罪。不足惜。竊料王大妃因此用心。不食而生病。則 a143_507b豈非嗣王之累哉。上於王大妃。有母道焉。尤不可不思也。飛語自古有之。明君不以此罪人也。柳灌素有腹病。朝歇則暮。來于朝堂。常依屛壁而坐。又無子息。不敢呈辭扶病力行者。是爲國而然也。柳仁淑又得上氣證。此等老病儒生。位極人臣。豈有他心。縱有逆心。分明定罪。則可以鎭安人心。今若遠行路中。得病而致死。則人皆曰國殺之也。伏願平心察之。使情罪相稱。群心安焉。答曰。此事孰不知之。且引災變。反以加罪爲非。予甚寒心。災變若出於罪後。則猶可說也。此災之出久矣。恐有奸人而然也。世宗朝昭 a143_507c憲后父。亦被重罪。若有罪焉。則不可以至親貸之。朝廷如是。國家尤誤。翌日丁巳。順朋投疏。極論公曁尹,柳兩公之罪。文定御忠順堂。引見大臣及諸宰。乃並命賜死。安置李霖。遞橃兵判。又命大臣以下皆錄功。二十九日。公到溫陽西村民舍。郡守申健。卽公之姻家也。相對朝飯。金吾郞以後命至。申以權辭出。公知而不動。食旣盡。寫家書數紙訖。着布團領。北向四拜曰。天日照臨。飮毒酒四器。猶不死。金吾郞以時稽懼。公命取裏肚中帶來。遂縊而逝。年六十二。殯于郡東席匠里。居數日。子光纘扶櫬到索沙川邊。時畿伯 a143_507d金明胤起桂林,鳳城之獄。任壻注書李德應被誣服。與修撰李輝同日死。於是公與尹柳兩公。並被發棺追刑之禍。卽九月十日也。且以公之被罪。謂之討逆。乃有告廟頒赦之擧。丁未秋。鄭彥慤上良才壁書之變。大加罪乙巳諸公。凡名賢正士前後無得脫免者。如宋圭菴,李若氷,李霖,羅湜,鄭源,李若海,李中悅,成子澤,金䃴,林亨秀。皆賜死。朴光佑,鄭希登,郭珣。皆杖死。宗室桂林君瑠被極刑。王子鳳城君岏賜死。被禍諸臣及凡死於緣坐者。又皆籍其家產。自晦齋以下。或極邊。或絶島安置者。凡六人。自權忠定公橃以下 a143_508a流竄者。又三十餘人。嗚呼。此不但公之冤上徹蒼穹。士林之禍。實振古所無也。當是時。冤氣塞天。國人飮泣。群奸又以淫刑。箝制人口。史官安命世,趙璞。以直書國乘而被誅竄。南士安瑞順。以抗章訟冤。而嬰極刑。奸黨中許磁。亦以追悔自貳。竄逐而死。天運循環。無往不復。惟我明廟以上聖之資。春秋旣鼎盛。深燭其冤狀。及親庶政。卽屛黜權凶。量移在謫諸臣。乙丑。罪元衡之後。量移盧守愼於槐山。柳希春於恩津。金鸞祥於丹陽。 方將漸次開釋。不幸弓劍遽遺。未及施行。仁順大妃於宣祖初。深追遺旨。亟用盧守愼柳希春等五臣。五臣。卽盧,柳及金鸞祥,李湛,閔 a143_508b起文也。李,閔則前已蒙放矣。 又首復宋圭菴諸公官爵。庚午。兵曹參判白仁傑。首發昭雪乙巳,己酉冤枉之論。大臣率東西壁。陳啓請雪丁未,己酉之冤。削李芑,鄭彥慤官爵。而三司又亟請直雪乙巳以下罪籍。玉堂繼發衛社削勳之論。自是。政府三司與夫擧朝宗親儒生忠義之屬。皆連請削勳。六月。命丁未,乙巳罪人。並許伸雪。削奪李芑,鄭彥慤官爵。八月。又削奪鄭順朋,林百齡官爵。於是三公率百官立庭。請削僞勳。伸雪公曁柳公仁淑之冤。自是兩司日五啓。玉堂日三上箚。自九月。兩司辭職。十月。始命雪公叛逆之名。因停論後 a143_508c萬曆丁丑夏。因恭懿殿不豫。乃命還給公職牒。十一月。又因三司論請。始許削勳。命復任瑠官爵。乃播告中外。又錄用其子孫。噫。公之抱深冤。歿地凡三十三年。至是而國論始大定。無餘憾矣。丁亥年間。趙侯廷樞守溫陽。欲依寇忠愍舊事。立祠俎豆。而因倭變。未果。竊惟公稟性貞亮。遇事慷慨。正色立朝。棘棘不阿。事涉宮闈。必盡言不諱。一心奉公。人不敢干以私。中廟末年。賢人舊德。起廢收召。蔚然滿朝。而莫不以公爲重。相與砥礪激揚。恢張淸議。當三司爭執關西之命也。公甚不悅曰。老臣隨地效忠。自分一死。今朝 a143_508d論如此。所以促吾死也。孝陵初服。凡進賢退邪。興廢去滯。數月之間。大更政化者。皆公之力也。逮至群奸堵立。大禍垂發。而公則屹然不動。終始一節。有一宰悶公將死。以書勸之曰。尹任自先朝。有交構之罪。宜與諸大臣。共請其罪。庶或免矣。公笑而却之曰。受先王顧命。士林有變死。乃吾職也。豈忍爲此乎。其臨死不變。有如此者。嗚呼烈哉。配貞敬夫人閔氏。僉正季曾女。先歿無子。取兄司導正渰之子光纘。爲后。光欑字宗伯。自少力學。有操行。蔭補侍直。公始賜玦也。已知禍將不測。作罷繼文卷以遺之。冀免孥戮 a143_509a之典。蓋入繼後。公側室有子。故乃執此爲辭。及至緣坐也。家人欲呈官乞貸死。不許曰。一名爲父子。休戚豈宜異視。遂袖其文不出。製自挽二章。卒從容就死。年僅三十。妻申氏。亦素有哲範。及遇家難。義烈益著。人莫不感歎流涕。申氏卒荷聖恩。復見天日。以壽終。又無子。以兄子澈爲后。官至牧使。以參宣武從勳。用贈侍直爲承旨。申氏封淑夫人。公墓在果川治北牛眠山孝寧大君墓傍。侍直牧使公墓。亦同在一麓。牧使有四子。曰增華。參奉。曰益華。縣監。曰泰華。曰得華。增華之子墺。女適許嶔,朴大相,李廷顯,蔡宗洙,沈 a143_509b柱。益華之繼子堉。泰華之子埱。堉,埴。直長。得華之子。㙫。墺有二子。曰用徽,用聖。居果川墓下 堉有三子。曰用魯,用賓,用賢。居龍山 埱有二子。曰用樟,用杞。居善山 埴無后。㙫有子。曰用卿。居安山 惟公禍福屈伸。無非關於國家之隆替。士林之興喪。有不可泯沒者。到今歲月幾至二百年。而尙無爲公記其顚末者。柳川韓公。雖有所錄狀文。亦甚草率。難以備攷。竊不自揆。謹取安鴻幽憤錄,許篈野言別集及乙巳定亂記。連綴始末。第錄如右。以備立言君子有所採擇云。
...........................
회헌집(悔軒集) 조관빈(趙觀彬)생년1691년(숙종 17)몰년1757년(영조 33)자국보(國甫)호회헌(悔軒), 광재(光齋), 동호퇴사(東湖退士)본관양주(楊州)시호문간(文簡)
悔軒集卷之二十 / 謚狀 / 左議政松庵柳公謚狀
公諱灌。字灌之。號松庵。文化之柳。爲我東大姓。始祖車達。當高麗太祖南征時。出車乘通糧道。以功拜大丞。錄三韓功臣。有諱璥。事高宗。誅權臣崔竩。復政王室。官僉議中贊。致仕。謚文正。入我朝諱亮。參開 國勳。錄佐命功。右議政文城府院君。謚忠景。卽公之五代祖也。高祖諱佐。典祀令。曾祖諱尙榮。司憲府監察贈右參贊。祖諱霔。衿川縣監贈左贊成。考諱廷秀。司憲府掌令贈領議政。戊午史獄。將戮金宗直屍。力爭。觸主怒。杖配理山以歿。妣贈貞敬夫人密陽朴氏。萬戶潤孫之女。以成化甲辰正月初七日。生公。公少孤。力學。事母夫人至孝。痛掌令公罹禍。若將自廢。正德丙寅。國運鼎新。始赴擧。丁卯。中司馬。仍魁文科。由成均館典籍。入玉堂爲修撰,校理。戊寅。爲宗簿正。甲申。擢拜黃海監司。內遷大司成。歷承旨,吏曹參議。出爲江原監司。復入爲承旨。特陞吏曹參判。壬辰。拜京畿監司。癸巳。擢禮曹判書。丙申。拜刑曹判書。丁內艱。己亥。復長天官。旋移左參贊。時華,薛兩 詔使來。公與金安國,蘇世讓諸公。儐接唱酬。華使
贈詩。盛稱公文章志操。記在皇華集。辛丑。陞贊成。冬。出按關西。癸卯。復拜貳相。甲辰。再按關西。臺閣館學連章。爭以內外輕重。公憫然曰。老臣隨地自效。已分一死。衆論如此。適所以促吾死也。及赴關西。公嘗曰。 東宮仁聖何憂。若有事。我當爲東宮死。是年冬。 仁廟嗣位。乙巳正月。公自關西。膺特卜入相。尋陞左議政。兼摠護使。國朝大喪。上下皆縗服。卒哭後視事。權着白衣烏紗帽。燕居白衣笠。成廟朝議者。謂帽笠不可異。遂着黑笠。因循不改。至是公獻議曰。未脫縗服。遽戴黑笠。甚乖先王制禮之意。請改以白
笠。公受知仁廟。輔翼弘多。嚴於賢邪黜陟之政。姦臣元老之竄也。公力主是議。人目以剛直大臣。七月。 仁廟大漸。公受顧命。明廟冲年嗣服。國勢危疑。公自任休戚。不顧利害。事涉宮闈。盡言無諱。凡所以扶護善類。裁抑姦黨。爲國遠慮。靡不用極。而李芑,尹元衡。怨公及尹任。百計陰中。始芑爲兵判也。公斥以贓吏女婿。不可顯用。芑之卜相。兩司劾罷。而公乃代之。以此積懷憾恨。元衡又自託肺腑。欲逞胸臆。常忌尹公以戚聯之舊。爲士類所倚。有不相容之勢。各立門戶。遂倡大小尹之說。欲間兩宮。其包藏
禍心。非一夕之故。於是芑,元衡等。與其黨並力。必欲先除公。始投兇書於闕中。眩惑兩殿。又遣妖妾於宮內。讒訐百端。八月。下密旨于元衡。元衡嗾臺臣金光準等。會中學發論曰。一二大臣。爲慈殿所疑。有密旨。若不先發其端。恐貽禍國家。座中皆憤懣曰。當主少國疑之時。不可以胥動之言。論倚任之大臣。以中姦細陰擠之計。持平金䃴曰。忠賢自此魚肉矣。豈忍爲衮,貞所爲乎。執義宋希奎曰。吾骨可碎。不可從也。諸公聲色俱厲。其議不成而罷。元衡之黨鄭順朋,李芑,林百齡,許磁。以卿宰。夜會光化門。
上變請對。兩殿同御忠順堂。召入諸人。芑,順朋等請尹任罪。謂公稍存形迹。請遞相職。又謂陰結尹任。謀危宗社。請付處舒川。左贊成李彥廸曰。人臣之義。當專於所事。豈可深罪。權橃,洪彥弼,申光漢。亦一辭伸救。及公發配。權橃獨啓曰。上天屢降大灾。臣恐天意或有所憾。幼主卽位未久。大臣遠謫。人莫測其端。蜚言自古有之。而明主不以此罪人。柳灌本有腹病。每於朝堂。倚牆壁而坐。老病書生。位極人臣。豈有他心。今若遠行。病而死。人必曰國家殺之也。願平心察之。順朋投疏。構公益急。至謂以顧命大
臣。値危疑之際。不思協力輔導。曲從尹任之言。使 殿下孤立無依。嗣位之日。與首相耳語曰。當立何人。指意叵測。越三日。又於忠順堂入對。論以大逆。同月二十九日。金吾郞以後命追及。溫陽公臨死。無他語。惟以天日照臨爲證。尹任,柳仁淑。亦同時被禍。自後大起誣獄。半朝名流。殆盡於一網。當禍起之初。有一宰相。憫公將死。貽書於公曰。尹任自先朝有交構之罪。公宜先詣闕。與諸大臣共請尹任罪。則身必免矣。公笑而却之。曰吾受先王顧命。士林有變。死乃吾所。吾豈忍爲此態乎。公歿後數日。所後子
侍直光纘。扶櫬到素沙。亦坐死。公有破繼遺券。欲使免禍。而侍直泣不受。卒就死。其妻申氏。收葬公及侍直喪于果川縣北面芳背里艮坐之原。申氏沒爲城朝。猶抱二木主。顚沛不捨。以公之忠節。又有此孝兒烈婦。豈不懿且美哉。公歿之二十六年。隆慶庚午。先正臣文成公李珥。訟寃筵席。又連上四十一箚。參贊忠肅公白仁傑。疏辨甚力。大臣以下三司儒林繼之。同聲迭請。始有大處分。雪逆名。還給籍入之産。萬曆丁丑。復官爵。配貞敬夫人驪興閔氏。敦寧僉正季曾之女也。先公歿。於其葬也。公不用石灰曰。使我
死牖下。朝家自有帷盖之恩。若不然。人子爲親。雖在倉卒。多有不量力之事。曷若自吾爲法乎。其欲爲 國而死。自是素講矣。侍直繼子澈。侍直兄光縉之子。朝廷錄用。官原州牧使。四男長增華參奉。次益華縣監。次泰華直長。季得華參奉。後裔之稍顯者。五代孫濬。武科兵使。濬之子世復,世德。皆武科府使。餘皆不錄。嗚呼。公誠可謂有古大臣節矣。冲君新御。事多憂虞。姦臣傍伺。計在疑亂。而公追先朝付託之意。慮後日顓弄之患。竭其心膂而匡翼之。峻其隄防而抑遏之。彼羣不逞之畏忌公。怨嫉公者。乘時設
機。從中煽禍。半夜急書。終成白地之案。士禍之寃。未有如乙巳之慘毒。百載之下。尙令人於悒。而國史難誣。是非灼然。前有權橃,洪彦弼諸公之力救。後有栗谷,休庵兩賢之痛辨。實蹟炳烺。照人耳目。公議之不可掩。如是矣。明廟之旋察寃狀。宣廟之追施愍典。亦足以有辭於天下後世。九原有知。無復餘憾。而若公敦睦之行。淸謹之操。比公大節。特其餘事。略之如范狀之不言麥舟也。曾有韓西平浚謙所撰謚狀。議謚未及上。而値壬辰之亂。至今闕焉。公之六世孫世亨。誠於爲先。謂西平狀文失之。太略裒集舊聞。
作爲一錄。要余改撰。以請易名之典。余屢辭不獲。而第錄如右。以竢太常之採以上聞。
| 1 | 유경(柳璥) | 1211 | 1289 | 문화(文化) | 장지(藏之), 천년(天年) | 유택(柳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