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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터처럼 녹아내리기 직전. 박선민「버터」를 읽고
by 형태소.
1. 생태 시, 기후 위기 시의 가능성「버터」를 추천한 경위에 대하여
박선민의 「버터」는 202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작이다. 이를 다른 말로 치환하면, 이제 막 문학의 제도권 장(場) 안으로 편입한 신인의 첫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함은 박선민 시인의 공개된 작품은 이 시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고,
더불어 시인의 경향성이나 일관된 스타일, 문학
관 같은 것도 미지수로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박선민의 「버터」를 소개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해당 작품이 새로운 활기를 지닌 생태 시로 읽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비약에 가까운 넘나듦이 거슬릴 수도 있지만, 이 시가 지닌 상상력의 진폭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전의 생태 시는 고리타분하게만 다가왔다. 이미 연로한 시인들의 작품들 중 자연과 생태계를 다룬 것들이 흔히 생태 시로 명명되어 왔고, 이러한 소재나 주제의식을 다룬 시인들의 작품이 있어도 돌올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인간과 동물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탈피하고, 육식에 대한 부정성(김선오의 「비와 고기」, 「냉동육」
등)을 내보인 시도 있었으나 생태 시로 접합하기
에는 다소 부분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또한,경향신문 신춘문예의 심사평에는 이전 신춘문예 심사위원의 자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름, 바로 송경동이 있었다. 심사위원이 송경동 한 명뿐인 것은 아니지만, 기후 위기와 같은 당대 사회적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박선민의 「버터」가 호평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어렴풋이 그의 시선이 작용했음을 추측하게 된다.
사실 박선민의 「버터」를 완전히 생태시로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후 위기라는 주요 맥락을 제거하면 아예 다른 독법으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라는 키워드나 맥락을 아예 배제한 채 시를 읽으면 이 시가 생태 시인지 의구심이 드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
다면 어쩌면 이런 식의 분류는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차단하는 명명의 폭력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 심사위원의 심사평
에서 오는 권위에 약간 의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태 시의 가능성을 탐색해 봐도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기후 위기라는 코드로 읽었을 때 재미있는 부분들이 존재하기에 박선민의 「버터」를 소개해 보았다.
2.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박선민의 <버터>
기후 위기 코드로 박선민의 「버터」 텍스트 분석하기
박선민의 「버터」는 'A=B'라는 은유의 구도를 뛰어넘어서 ‘C, D, E, F...'까지 무한하게 비유를
확장해 나간다. 이런 점에서 현대 시의 문법과 경향성을 착실히 따라간다. 그러나 박선민의 「버터」가 빛나는 지점은 이 비유의 거리가 상당히 먼 것들로 시를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다.
성공적인 비유가 이질성이 큰 관념들을 설득력 있게 접붙인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버터”를 “펭귄”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창문”에 다다르는 폭넓은 상상력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버터」는
매력적이다. 이 상상력의 진폭과 넘나듦을 자유자재로 보여 주는 재기발랄한 시를 기후 위기 코드로 읽는다면 그 상상력의 깊이와 그 폭에 깃든
사유는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린다. 그렇다면 기후 위기의 코드가 읽히는 지점을 바탕으로 박선민의 「버터」를 읽어 보겠다.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
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 니다”라는 구절을 보자.
이 구절은 생태학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버터”에서 원초적 자연으로의 “풀밭”을 떠올리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의 “색깔”을 먹어
치우는 식욕의 이미지는 흡사 인간이 자연을 고갈시킬 정도로 재빠르게 자연을 소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또한 무언가를 교체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는 기후 위기 코드로 「버터」를 읽어 나가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버터”에 새겨진 “밀항선”과 “항로”. 원래 “풀밭”이었던 “버터”가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드는 모습. 그리고 그 “항로”가 기록된 “버터”. 고루한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들추어 보지 않아도 “항로”가 자연과 생태를 부지런히 착취하고 소진해 온 인간의 손길을 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가 “국경선"을 가로지르고, 이 “국경선"을 통해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한 지점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버터”가 지나간 자리는 인간이 지나온 자리이며, 녹아내리는 자연을 응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끝내 “버터”는 “창문”이 된다. 정확히 시의 문법을 따르면, “창문”에 넣고 굳힌 것이 “버터”이다. 이 형태적 유사성에 기반한 은유는 비약에 가까울 정도로 진폭이 넓지만, 일단은 이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버터”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해낸 흔적을 보여 주는 "창문”이 되기도 한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격렬한 속도입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보자. “창문”은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데, 이는 “격렬한 속도”를 수반한다. “악천후”를 뚫고 미래로 내달리는 이 “격렬한 속도”는 굉장히 가파른 동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격렬한 속도”의 내달림은 더욱더 극심한 (기후) 위기 상황으로 진입 해가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3. 우리는 버터처럼 녹아내리기 직전
- 박선민 「버터」를 읽고 나서
악천후를 뚫고 내달리는 창문처럼 연과 행을 넘나드는 시적 상상력의 진폭을 보여 주는 박선민의 「버터」.나는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지나온 “항로"가 되새겨진 “버터”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전에는 “풀밭”, 즉 자연이었던 "버터”. 슬금슬금 녹아내리면서도 추위에는 뭉쳐지는 버터. 그러나 이 버터는 버터가 되어감으로써 포크를 긁은 듯한 국경선을 품게 된다. 그리고 버터는 우리가 가로질러 온 “국경선"과 "항로”를 보여 주는 "창문”이 된다. “악천후”를 뚫고 “격렬한 속도”로 내달리는 “버터”는 끝끝내 녹아내릴 것이다. 마치 북극의 빙하가 서서히 녹아내리듯이. 녹아내린 만큼 해수면이 상승하고 다른 섬이 수몰 되듯이.
우리는 달군 프라이팬 위에서 녹아내리는 버터처럼 놓여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버터’와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기민하게 체감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버터가 녹아내릴 때, 프라이팬에서 끓어오르는 연기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 연기에 가려져 녹아내리고 있는 버터를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렴풋한 온기나 열기 정도만 느낄 뿐이다. 어떨 때는 비가 왔다가 또 어떨 때는 심각한 가뭄을 반복하는 기후속에서, 때에 맞지 않는 열기와 냉기에 짜증을 내면서도.
by. 돌고래
2023년도 『시와 편견』 여름호(vol.26) 시편이 초청한 박선민 시인- 신작시,대표시
<시편이 초청한 시인_ 박선민 대표시>
버터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 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자아 이전의 맛
박선민
그림자에 눌어붙은 고양이가 한때 내겐 선생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사탕을 한 주먹 주곤 했는데
대부분은 어느 과일 맛을 흉내 내었거나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 맛들이었는데
그건, 잘한 맛이라고 했다
주름진 포장을 역방향으로 돌리면
정점에서 풀리는 지점에 나와 할머니가 있다
처음 핥아본 사탕은 물맛이었다
손발을 태우던 계모가 파도에 삼켜지는 상상을 하느라
조각난 입안을 굴리고 굴렸더니
웅크린 말투가 어느새 다 녹았다고 했지만
그때는 아는 맛이 없었다
온갖 흉내들과도 친하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맛의 밖에서 빙빙 돌았다
내가 가진 사탕이 많았지만 달고 녹지 않으니까
단맛은 영원히 철들지 않으니까
농도가 일정하지 않은 단맛들은
둥글게 녹지 않고 세모나 네모로 녹는다는 것을
흔적도 없이 기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붓자식처럼,
그때는 몰랐으니까
할머니는 천천히 녹았다
마당에 자란 까만 털들을 뽑지 않았더니
키우던 개가 집을 나가고 새벽에 버려진 종이들은 죄다 구겨져 있고
까끌까끌한 혓바닥을 달래서
뱉어, 뱉으라니까
현관은 뭉친 열쇠를 뱉어내고
대문은 자꾸만 굽어졌다
달이 거꾸로 도는 밤
고양이가 어린 할머니를 물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