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說所說分 第二十一
비설소설분 제이십일
須菩提여 汝勿謂如來作是念하대 我當有所說法이라 하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若人이 言 如來-有所說法이라 하면
卽爲謗佛이라 不能解我所說故니라
須菩提여 說法者는 無法可說이니 是名說法이니라
爾時에 慧命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聞說是法하고 生信心不잇가
佛言하사대 衆生衆生자는
如來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수보리여, 너희는
‘여래께서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하리라’는
생각을 짓지 말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여, 법을 설한다고 하나 가히 설할 만한 법이 없나니,
곧 그 이름이 설법이니라.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래의 세상에 자못 어떤 중생이 있어
이 법을 설하심을 듣고 신심(信心)을 내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도 아니요 중생이 아님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중생 . 중생’이라 함에 대해
여래는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나니,
곧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제20 「이색이상분」에서는 일체의 색이나 형상을 떠나야
무량공덕을 갖춘 반야(般若)가 드러나고,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바라 볼 수 있게 됨을 설하셨으며,
여기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에서는
진정한 법은 말을 여읜 것이요 설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샘솟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설법이란 무엇인지를,
두 법째 단락에서는 수보리 존자가 설법을 듣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생이란 무엇인지를 밝히고 계십니다.
앞의 제20 「이색이상분」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서 아무리 거룩한 겉모습을 하고 계시더라도
그것은 인연들이 잠시 모여 이루어진 것이요,
방편으로 나타낸 허망한 육신에 불과합니다.
그 허망한 육신으로는 충만하면서도 텅 빈 법신자리에 대해
마땅히 설할 수 없고 설할 것도 없습니다.
참된 부처님은 법신(法身) 그 자체입니다.
메아리가 부름에 응답하듯 아무런 집착이 없으며,
따라서 무엇을 설했다는 생각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설하였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설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相)을 가진 범부의 설법에 불과합니다.
실로 진리의 말을 여읜 것이며,
말을 여읜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 그것을 설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이 구절을 두고
송나리의 야부(冶父)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토끼뿔로 만든 지팡이요 거북이의 털로 만든 먼지털이개로다[兎角杖龜毛彿].”
토끼의 뿔이 어디에 있으며 거북이의 털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우스운 소리 같지만,
만공스님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조금 지견이 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 방귀에 털이 난 것을 쳐다본 놈이다.”
이처럼 깨달음의 세계, 진리의 세계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세계입니다.
이에 관한 한 편의 이야기를 음미해 봅시다.
☆
어느 날 석가모니 부처님께 한 외도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외도였지만 깨달음을 갈구하는 진지한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예를 갖추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당신께 말이 있음으로도, 말이 없음으로도 묻지 않겠나이다.
부디 부처님께서도 저에게 말이 있음도 아니고, 말이 없음도 아닌 법문을 하여 주십시오.”
그가 말을 마치자, 부처님께서는 한폭의 그림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마치 금강경의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에서,
사위성에서 탁발을 하신 다음 기수급고독원으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드시고 발을 씻으시고 가부좌를 틀고 앉으신 모습처럼,
부처님께서는 평상시와 같이 단정하고 고요히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어떤 말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문득, 외도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벅찬 희열과 충격을 느꼈습니다.
말없는 행위 속에서 그는 진리의 참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위대하신 부처님이시여, 당신의 자비가 세상에 가득하옵니다.
저의 미혹한 마음을 씻어 주심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리옵니다.”
외도가 기쁨의 눈물을 를리고는 부처님께 예경을 하고 물러가자,
이를 지켜보던 아난 존자가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모셔왔지만 오늘과 같은 일은 처음이옵니다.
세존께서는 어떠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지만,
그는 모든 의문이 풀린 듯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습니다. 어찌된 까닭이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준마(駿馬)는 채찍만 보아도 달릴 줄 아느니라.”
결국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불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깨달았을까요?
부처님과 부처님의 설법이라는 상(相)에 너무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제 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서도 밝히셨듯 부처님의 설법은 뗏목과 같습니다.
뗏목을 의지해 저 언덕으로 가지만 저 언덕으로 올라서면 뗏목은 버려야 합니다.
중생들도 부처님의 설법을 등불 삼아 진리를 깨우칠 수 있지만,
진리를 증득하면 모든 설법들은 떨쳐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요, 내가 설한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수보리여, 법을 설한다고 하지만 가히 설할 만한 법이 없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설법이라 하느니라.”
두 번째 단락에서 수보리 존자는
문득 설법을 하는 주체인 부처님과 설법을 듣는 대상인 중생에 대한 분별심을 일으켜,
미래 새상의 중생이 이런 법문을 듣고 믿음을 낼 수 있을 것인지를 질문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깨우쳐주십니다.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도 아니요 중생이 아님도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중생이다 중생이 아니다’ 고 하는 것에 대해
여래는 모두가 아니라고 설하나니, 곧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이 말씀은 ‘부처도 아니요 부처가 아닌 것도 아니다’ 라는 말과 똑같은 뜻입니다.
‘중생이다’ 해도 집착이 되고, ‘중생이 아니다’ 고 해도 집착이 되기 때문에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집착과 시시비비를 털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중생들은 이름이 중생일 뿐이지
중생이라고 정해진 부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이라고 하는 단어로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 중생이라고 규정 되어진 어떤 고유한 것은 있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들은 자꾸 집착을 하여 미한 사람을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에게 있어 중생은 그저 평범한 하나의 단어일 뿐이므로
차별심이나 분별심이 없으며, 아무런 얽힘이나 집착이 없습니다.
곧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중생이라고 하는 대상이 없고 부처라고 하는 대상이 따로 없습니다.
오직 일승법(一乘法)이 있을 뿐이며, 설법의 주체와 객체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실로 중요한 것은 집착과 분별을 떠나는 것입니다.
주객(主客) . 염정(染淨) . 선악(善惡) 등의 분별을 떠난
우리의 실천이 중생을 부처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를 꼭 명심하시어 집착과 분별을 놓아버리는 수행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