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는 참 푸근한 고장이다.
참외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이 고을은 봄이 무르익은 4, 5월경에 찾으면 가장 좋다. 제철 과일인 달콤한 참외도 맛볼 수 있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여행지가 곳곳에서 반겨주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군청이 있는 읍내 동쪽의 한개마을(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푸근함이 감싸는 우리네 고향마을 같은 곳이다. 누구나 이 마을을 찾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돌담이 인상적인 고샅길과 산자락 밑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진 모습은 어린 시절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한개마을의 ‘한개’는 ‘큰 나루’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옛날 낙동강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나룻배가 마을 앞 백천(白川)까지 왔다고 한다. 당시 큰 나루터를 끼고 있던 한개마을은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늘 복작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지금의 백천을 보고 옛날의 영화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한개마을은 500여 년을 이어온 성산 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이다.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처음 정착한 이래 지금껏 꿋꿋하게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는 낙동강(백천)이 뒤로는 영취산 줄기가 아늑하게 뻗어내린 전형적인 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으로, 옛날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길지 중 하나로 꼽혔다. 조선시대의 주거 양식을 대부분 보존하고 있는 한옥에는 사람이 살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는다.
'Y'자 형태의 마을길을 따라 다정다감한 초가집과 기와집이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 관광안내소를 지나 고샅길을 조금 오르면 진사댁이 있고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면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이 차례대로 나오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하회댁, 극와고택, 한주고택이 잇달아 반겨준다.
왼쪽 길의 첫 집인 교리댁에 들어서면 오랜 세월 집안을 지켜온 탱자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제주에서 귤나무 3그루를 옮겨 심었는데 추운 날씨 때문에 탱자처럼 변했다고 한다. 정면 7칸 측면 1칸의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는 소담스럽고 중후하다. 영조 36년(1760) 사간원 사간을 역임한 이석구가 지은 집으로 마을에서 가장 오래됐다. 집 이름은 이석구의 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어서 나타나는 북비고택(北扉古宅)은 대감댁이라고도 불린다. 이석문이 영조 50년(1774년)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비고택 사랑채에 걸린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이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마을의 가장 안쪽 산울타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주고택은 정자가 있는 구역과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집 앞쪽에 있는 연못과 정자(한수헌)는 분위기를 사뭇 고즈넉하게 만들고 있다.
영조 43년(1767) 이민검이 세웠으며 고종 3년(1866) 유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새로 고쳐 지은 후 지금까지 원형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안채는 한개마을 안채 중 가장 온전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집 이름도 그의 호(한주)를 따라 한주종택으로 부른다. 옆에 연못을 둔 한주정사는 그 특이한 배치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연못은 대개 건물 앞쪽에 두는데 이곳은 옆에 연못이 들어섰다. 종택 뒤로는 울창한 대나무숲이 드리워져 풍경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한주고택은 한국형 정원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갖고 있어 영화 '성춘향뎐'을 비롯해 전설의 고향 등 숱한 TV사극 단골 세트장이 된 곳이기도 하다.
- 명당에 묻어 놓은 세종대왕자 태실 -
한개마을에서 나와 월항면 쪽으로 가면 선석산 자락 한 봉우리(태봉)에 ‘세종대왕자태실’이 묻혀 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항아리에 넣어 묻어둔 것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세조인 수양대군을 비롯해 세종의 18왕자와 손자인 단종의 태 등 19기의 태실이 있다. 그 당시 조선왕실에서는 태실을 묻을 곳을 찾아 땅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는데 이곳을 둘러보고는 주저 없이 낙점했다고 한다. 사실 풍수학자들도 이곳이 산세가 황금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며, 연꽃으로 치자면 꽃술에 해당하는 자리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초 이곳에는 성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실에서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이장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19기의 태실은 땅을 파서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분청사기로 만든 태호를 넣었다. 뒷줄 앞에 자리잡은 수양대군의 태무덤 앞에는 귀부와 이수까지 갖춘 태비가 하나 더 세워져 있는데 이는 훗날 임금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큰 규모이며, 비교적 온전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다.
- 왕버들이 하늘거리는 성(城)밖숲 -
다시 읍내로 간다. 성주읍 경산리 이천 변의 성밖숲(천연기념물 제403호)에서 잠시 쉰다. 벤치에 앉아 하늘바라기를 하노라니 여행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다. 이천 가에 휘늘어진 왕버들 이파리가 싱그럽기 그지없다. 이곳에는 300~500년생 왕버들 57그루가 자라고 있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이 숲의 사연이 예사롭지 않다. 조선 중기 성주읍성의 서문 밖 마을에서 어린 아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자꾸 죽어나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마을을 찾아온 지관이 마을 주변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보기 때문에 그렇다면서 그 중간 지점에 숲을 조성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즉시 서문 밖 이천변에 숲을 조성했는데, 하필이면 꽃 필 무렵마다 요상한 냄새를 풍기는 밤나무를 빼곡이 심었다. 그러자 임진왜란 직후에 마을의 기강과 도덕성이 해이해지고 인심조차 흉흉해졌다. 그래서 결국 밤나무를 베어내는 대신 왕버들나무를 심어 지금의 성밖 숲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밖 숲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음과 양의 기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왕버들로만 이루어져 학술적 가치도 높을뿐더러 전통적인 마을 비보림(裨補林)으로 향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숲이다. 숲을 제외한 빈 공간은 참외축제 등 크고 작은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아이들의 소풍 장소, 주민들의 산책 및 운동 공간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읍내에서 가까운 대가면 칠봉리 마을에는 한말 독립운동가이며 유학자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 생가가 있다. 김창숙은 동강 김우옹(1540∼1603)선생의 후손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민족지도자다. 광복 후에는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해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지금의 생가는 김창숙이 22세 되던 해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1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저서로 시문집인 『심산만초』와 『벽옹만초』 등이 있다.
- 수비실 마을에 있는 성산동 고분군 -
성밖숲을 보고 다리를 건너 성산(해발 389m) 쪽으로 가다 보면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따라 볼록볼록 솟은 반달 모양의 고분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현재까지 129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성주지역 고분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발견 당시 봉분의 밑지름이 10~20미터가 넘는 중· 대형 고분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걸로 보아 이 고분들은 성주읍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던 성산가야 고분으로 추정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은 인근 경북대와 계명대 박물관에 분산 전시돼 있다.
- 무흘구곡(武屹九曲)을 따라가면서 보라 -
대가천을 따라 펼쳐진 무흘구곡은 성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무흘구곡'은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이 중국 남송 시대 인물인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따서 '7언 절구'로 시를 지어 노래한 곳으로, 성주에 1곡부터 5곡까지 있고 김천에 6곡부터 9곡까지가 있다. 9곡 중에서도 3곡 배바위와 4곡 선바위 경치가 가장 멋있다.
특히 선바위는 우뚝 솟은 30미터 바위에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이채롭다. 성주군 가천면 화죽리에서부터 신계리까지 걸쳐 있는 포천계곡은 가야산에서 발원, 대가천으로 흘러드는 계곡으로 옛 선비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계곡의 상류 신계리에는 조선후기 성리학자 이원조 선생이 세운 만귀정과 만귀정 폭포가 있어 가볼 만하다. 물을 가둬 대가천으로 흘러 보내는 성주댐(호)도 빼놓을 수 없는 경치다. 풍광이 수려해 주말이면 호수의 경치를 감상하려는 나들이객들로 꽤나 붐비는 곳이다. 이밖에 가천면 금봉리 독용산 정상에 있는 독용산성은 영남지방에 구축된 산성 중 가장 크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에도 전쟁의 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성이기도 하다.
▶ 여행수첩(지역번호 054)=(수도권)=
영동고속도로로 여주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 성주나들목-성주읍-30번국도-신부교차로-한개마을. 경부고속도로 왜관 나들목-4번국도-죽전교차로-33번국도-월항면 소재지-한개마을. 88올림픽고속도로 성산나들목-용암면 소재지-성주-30번국도-신부교차로-한개마을.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청에서 905번 지방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되고 성밖숲과 성산동 고분군은 읍내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왜관북부정류장(975-2333)에서 성주행 직행버스가 다닌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하루 5회 고속버스 운행(3시간40분소요),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약 20분 간격으로 직행버스 운행(1시간20분소요), 성주-한개마을 : 하루 2회 시내버스 운행(20분소요), 성주공용시외버스터미널 (933-1208).
▶ 잠자리와 맛집==
가야산 쪽에 가야산국민호텔(931-3500)이 있으며 성주읍내에 이화장(933-4521), 대원장(933-9090), 별궁장(931-5601), 에이스모텔(933-5454), 왕금장(931-5504) 등이 있다. 성주읍내의 왜관식당(932-9554)은 구수한 청국장 맛이 일품이고, 성주시외버스터미널 옆의 감골식당(931-3100)은 시골밥상 같은 정식(1만원)이 꽤 알려진 곳이다. 색다른 맛을 원한다면 성주시장 안에 있는 분오칼국수(931-3296)도 괜찮다. 이밖에 용암면 용정리의 큰나무골 궁중약백숙(933-3651)은 한약재가 섞인 닭백숙을 잘한다. 한마리 2만 7000원∼3만 5000원. 예산리 혜성관가든(933-5229)은 소고기 숯불구이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