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요가 문화원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나눔과 소통) 스크랩 류상태2
징검다리 추천 0 조회 56 09.01.08 18:5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질 때부터 기독교를 떠나기까지



   
 
   
 
내가 기독교의식개혁운동에 나서고부터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온 문제가 있다. ‘류상태는 위선자’라는 것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진보적인 목사나 신학자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공격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예수를 (신으로) 믿지도 않았으면서 목사가 되었고 지난 20년 동안 설교를 해왔으므로 위선적인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보수 기독교인들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비난에 대해 변명하거나 부정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비난이 일정 부분 정당함을 인정하고, 지난 세월 나에게 배웠던 학생들과 교인들에게 정직하지 못했던 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사과드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 교계에도 깊이 사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


또한 지난 시절 내 신앙과 신학의 변화를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바른 선택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기에, 내 지나온 과거에 대해 매우 솔직하고 자세하게 글을 쓰고자 한다.


우선, 내가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 또는 다원주의 신학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은 2004년 6월, 강의석군 사건 이후였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그 사실을 감추어왔다. 감춘 이유는 학교와 교단에서 쫓겨나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주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눈치를 보느라고 할 말 못하는 진보신학자와 목사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예수를 (신으로) 믿지 않았다거나 자유주의 신학을 감춘 채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비난은 수용할 수 없다. 내가 처음에 가졌던 신앙과 신학이 변화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대학시절 - 근본주의 신앙기 또는 혼란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 재수를 한 후, 1976년에 중앙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철학과에 들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성적이 낮아서 철학과에 간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철학을 전공한 다른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성적이 좋았다면 법대나 경영학과 등 인기학과에 갔을 것이다.


물론 중앙대를 선택한 것도 서울대나 연고대에 들어갈 실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고려대와 중앙대, 두 대학의 원서를 사다놓고 깊이 고민했다.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었던 나 역시 일류대학에 대한 미련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무리해서 고려대를 지원했다면 아마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대는 넘볼 수 없는 산이었고 연세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는 이유는 조금 후에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나는 기독교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사탕을 준다기에 구세군교회에 한번인가 두 번 갔던 기억이 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당시 모 교회 중고등부 회장을 지냈던 형(우리 집 장남인 바로 위 친형)의 강권에 못 이겨 몇 번 교회에 가보았지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거부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철학을 전공하면서 종교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고, 대학 1학년 때 종교 문제를 주제로 졸업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특히 죽은 후의 세계로 모든 중간 단계를 부인하고 천국과 지옥만을 말하는 극과 극의 논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천주교에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 또는 전단계로 연옥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원시적 흑백논리로 현대인의 사고를 묶는 이 종교가 매우 해롭다고 생각했고,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학부 졸업 논문은 ‘안셀무스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허접하기 짝이 없는 논문이었다.)


그런 나에게 슬쩍 찾아온 두려움이 있었다. 만일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이 맞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독교의 신을 부정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기독교적인 표현을 빌자면) 두 차례에 걸쳐 신의 손길이 찾아왔다.


1학년 말, 그러니까 1976년 10월경이었던 같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데다 비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여자친구가 없이 축제를 맞았다. 그 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고 기독학생회 멤버였다. 그 여학생의 초청으로 가을수련회에 참석했다.


수련회 강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막 <예수전도단>이라는 선교단체를 창립하여 활동했던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 로스(오대원) 목사였다. 그는 한국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했고, 저녁사경회를 마치면서 다같이 기도하자고 하였다. 나는 그 지겨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때 데이비드 목사의 기도가 내 가슴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는 기도 중에 잠깐 뜸을 들이더니 참석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하는 학생은 손을 드십시오. 나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지만, 내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학생들은 망설이지 말고 손을 드십시오.”


평소에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욕을 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해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을 무조건 믿으란 말인가, 그건 맹신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지만 그 때는 그의 말이 이렇게 들렸다. “네가 뭔데, 어떻게 네가 감히 신의 존재와 그의 뜻을 네 머리로 이해하겠다는 거냐? 네가 어떻게 감히 신을 인식하겠다는 거냐? 그 건방진 생각을 버려라.”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상당 부분 무너지고 있었다. 이후 수련회를 통해 알게 된 기독학생회 멤버들을 간간이 만났고 대화도 나누었다. 그들은 대부분 매우 친절했고 따뜻한 사람들로 느껴졌다.


두 번째 찾아온 신의 손길은 그로부터 1년 5개월 정도 지나서였다. 나는 그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한다. 1978년 2월 22일 새벽 1~2시경. 3학년 진학을 앞둔 봄방학이었고 중앙대 기독학생회 겨울수련회 중이었다. 한 학생이 간증(자신의 신앙체험을 교인들과 나누는 것)을 하다 부끄럽고 힘겨운 과거를 고백했고 기도를 요청했다. 그 곳에 참석한 동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 사람 앞에 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그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용서와 치유를 위해 신에게 한 마음으로 빌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기도는 꽉 막힌 내 마음의 문을 흔들었다. 나는 신에게 처음으로(?) 기도했다. “나는 당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계신다면, 저 사람들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어야 합니다.” 눈물이 났다. 기독교에 대한 빗장이 풀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있건 없건 나도 이 무리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크게 동요하는 것을 눈치 챈 학생 한 명이 나를 지도자에게 데려갔다. 그의 인도를 받으며 나는 통곡을 하고 울었다.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경계하며 살아왔던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친구를 형제라 부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 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했고 죄인임을 고백했다. 나는 펑펑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이후 나는 지금도 해석하기 어려운 이상한 경험을 한다. 걸을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고, 땅에서 1미터 쯤 떠서 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 이유 없이 즐거웠고 실없이 웃고 다녔다. 그냥 행복했다. 그런 시기는 3달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3학년 1학기, 그러니까 1978년 전반기에 나는 미친듯이 기독교에 몰입했다. 성경과 근본주의 신앙서적을 읽는 것, 기도와 찬양하는 것, 전도하는 것이 거의 내 생활의 전부였다. 나는 용돈을 털어 종로서적센타(지금은 없어졌다)에 가서 전도지를 샀다. 가방에 전도지를 챙겨넣고 버스를 탈 때마다 전도를 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거의 대인기피증까지 있던 내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등교 때마다, 버스가 용산을 출발하여 한강대교를 건너고 흑석동까지 이르는 긴 거리를 이용하여 버스 안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는 버스 기사나 승객의 허락도 받지 않고 연설을 했다. “저는 중앙대 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류상태라는 학생입니다. 저는...” 바로 지난 토요일 저녁에 SBS-TV <그것이 알고 싶다>의 길거리 전도자였던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몰입의 시기는 3달 정도 계속되었지만, 그 때 내 무모한 질주에 브레이크를 거는 사건이 있었다. 천주교인인 한 교수를 비롯하여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교수가 몇 명 있었는데, 한 분은 숙제를 매우 많이 내주었다. 내 기억으로 그 때 <종교철학>을 배우면서 <꾸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기독교 성서의 복음서에 해당)>를 자세히 읽었고, <인도철학>을 배우면서 <우파니샤드(힌두교의 경전인 베다의 해설서로 매우 방대하다)>를 부분적으로 읽었다.


<꾸란>은 나에게 커다른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 모세에 이르기까지 성서와 뿌리가 같았다. 다윗도 예수도 꾸란에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어느 것 하나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독교는 이슬람교를 사악한 종교로 보고 있는데 반해 이슬람은 기독교를 포용하고 있었다.


지금도 충격 가운데 기억하는 구절이 있다. “진실로 너희의 종교는 하나이니라.” 나는 지금 그 구절이 꾸란의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의 충격과 당혹감, 두려움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형제종교로 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에 귀의한지 몇 달 만에 찾아온 충격, 그건 이미 근본주의 신앙에 투항한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었다. 뒤늦게 내가 너무 쉽게 백기를 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삶을 통해 만난 예수와 기독교가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예수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혼란을 스스로 극복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4학년이 되자 신앙적인 고민과 함께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함께 찾아왔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좁았다. 나는 아버지와 의논하여 경영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한 일이 있었지만, 신학대학원을 가기로 했다. 신학대학원에 가서 신앙적인 방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또 하나의 부끄러운 진학 동기가 있었다. 신학대학원을 나와 목사가 되면 생계문제도 해결되리라는 기대감이었다.


생계 문제에 대한 돌파구로서의 신학대학원 입학, 나는 그 사실을 오래 동안 부끄러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분명 사실의 일부분이었다. 만일 내가 법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했다면, 그리고 중앙대가 아니라 서울대나 고려대였다면(중앙대 동문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래서 취직이 보장되었다면,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까.. 아마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앞서 중앙대에 입학한 것도, 철학과를 선택한 것도, 다 인기학과나 일류대에 들어갈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이렇게 말하는 것 또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못한 분들에게는 건방진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우리나라 학벌지상주의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바보가 되고 매장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겪었던 얘기를 정직하게 말하고 싶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신학대학원(장신대 신학대학원의 경우 입학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든 때도 있었지만, 내가 입학했던 1980년에는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아무나 갈 수 있었다. 이것 또한 동기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이나 신학대학교, 또는 학부 신학과의 경우, 일류대학이라도 (예를 들면 연세대학교 신학과) 다른 과에 비해 현격하게 낮은 성적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을 거쳐 목사가 된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심지어 몇 년 전까지도, 대학을 가지 못한 사람들이 도피처로 갈 수 있는 무인가 신학교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 무인가 신학교들이 좁은 대학입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로 대학을 인가하기 시작한 최근 십여 년 동안에 대부분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번듯한 대학 간판을 걸게 되었다. 최근에 무수히 늘어난 대학들의 전신이 바로 그 무인가 신학교들인 경우가 매우 많다.)


지금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들의 학력을 조사해 보면, 학부조차 졸업을 하지 못하고 무인가 신학교를 나와 쉽게 목사가 된 사람들이 정규과정을 밟은 사람들보다 더 많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 중 상당수는 석사학위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가장 낮은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신학대학이며 가장 낮은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과가 신학 계통의 학과라는 이런 현상은, 성적이 낮아 대학에 입학하기 어려운 교회 청년들을 신학교로 끌어들이고, 기본이 안된 형편없는 목사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계속 낳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공부를 못해서 신학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소신에 의해 신학을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불붙는 사명감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며 고난의 길을 걷고 있노라고 자신을 속이고 교인들을 속이는 위선자들이 교회 지도자라는 사람들 중에 부지기수로 많은 것이다.


이 점은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위해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신학대학이나 신학과에 입학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막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2. 장신대 신학(대학)원 시절 - 근본주의 신앙에서 포용주의 신앙으로


1980년 봄, 나는 3년 과정인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신학(대학)원’이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정식 명칭이 ‘신학원’이었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만 입학할 수 있었지만 당시 문교부(지금은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석사 과정 인가를 받지 못하고 예장 통합측 교단이 미국의 대학과 연계하여 석사 학위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원이라고 해야 정식 명칭이 된다. (학력위조 사건이 사회문제가 된 지금은 이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보통 신대원이라고 말하므로 앞으로는 ‘신대원’이라고 표기하겠다.


신대원 1학년 때 내 별명은 ‘알보수’였다. 타종교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신대원에서 처음 만난 진보신학은 내 근본주의 신학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지금은 장신대가 그 때보다 훨씬 더 보수화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때만해도 장신대는 어느 정도 열린 학풍과 신앙적 경건성을 조화롭게 견지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던 교수가 지금 장신대 총장이 되었다.)


타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려 있었으면서도 정작 기독교 내의 신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이 맹목적인 근본주의 신앙을 수용하고 있었던 나에게 진보신학은 타종교 문제보다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 되었다. 나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하나님, 이것이 사탄의 음성이라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알보수’였던 내가 진보신학에 대해 문을 열게 된 계기는 신대원 2학년 때 한 선배 목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는 후암동의 한 평범한 교회 담임목사로 당시 크게 유행하던 <베델성서연구> 과정을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신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나도 그 과정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그의 명쾌하고 진솔한 강의에 빠져들었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진보신학(지금 생각하면 진보라고 할 수도 없지만)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내가 다원주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신대원 3학년 때였다. 당시 하버드대학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막 따고 돌아온 젊은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가르치는 <비교종교학>이 선택과목으로 개설되었다. 나는 이 강의를 들으면서 다원주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고, 졸업 논문으로 비교종교학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졸업논문 제목을 <기독교와 타종교의 비교 연구>라고 넓게 잡았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어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 연구>로, 또 다시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에 대한 비교 연구>로 좁혔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칼 라너, 한스 큉 등의 포용주의 학자와 존 힉, 한국의 변선환 등 다원주의 학자들을 글로 만났다. 불교에 대한 많은 논문도 접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불교에 대한 깊은 매력에 빠지면서 다원주의에 마음을 뺏기기 시작했지만, 다원주의로 가서는 안된다는 두려움으로 마음을 다잡으면서 포용주의로 논문의 맥을 잡았다.


나는 최근에, 내 신앙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위선의 시기를 이때부터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위선의 시기로 보기에는 어렵다. 다원주의로 기우려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직 다원주의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포용주의 쪽에 더 가능성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한 점도 분명히 있었다. 흔들림이 있었지만, 학교나 교계가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분위기였다면, 그래도 포용주의 신앙과 신학을 갖게 되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어쨌든 내 졸업논문은 포용주의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정직한 결론이 아니라는 마음의 불편함이 늘 따라 다녔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교회 목회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한국 교회에서 목회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기에는 그릇이 작다는 느낌, 내 신앙과 신학으로는 교회 목회가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 등이 어우러져 나는 교회 목회를 포기하고 학원 선교로 일찌감치 방향을 잡았다.


교사가 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목사도 되고 교사도 될 수 있는 길, 바로 학원 선교였다.



3. 1983~1994년까지 - 포용주의 신학으로 학원 목회를 하던 시기


이쯤에서 잠시 배타주의와 포용주의, 다원주의에 대한 설명을 좀 해야겠다.


배타주의는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포용주의는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지만 예수의 구원은 기독교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포용주의에 의하면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지만 비기독교인이 구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상대화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여러 종교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다원주의 신학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다원주의 신학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대학시절에 너무나도 강하게 만났던 근본주의 신앙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포용주의까지 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다원주의로 가려면 근본주의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당시 나로서는 너무 두려운 선택이었다.


“그런 천국, 그런 지옥은 없다” 라든가, “나도 나의 구세주 예수를 신으로 믿는다. 위대한 성현들이 신의 본성에 참여하셨듯이, 나의 구세주 역시 신의 본성에 참여하셨다.” 이런 고백은 지금은 내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 꽉 막힌 교리주의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일부러 골라 쓰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내 진실된 고백이다. 하지만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초기만 하더라도 내 신앙과 신학은 그렇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신앙적으로도 버겁고 두려웠으며, 현실적으로도 선택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포용주의 신학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1983년 2월에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했다. 그 해 1학기에는 염광여자고등학교 2부에서 시간 강사를 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나자 영락교회에서 전임전도사 한 명을 구한다는 소식을 동기들이 보내왔다. 그 해 8월부터 1984년 말까지 영락교회 전도사로 일했다. 1985년에 숭의여자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했고 그 해 가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90년 5월, 대광중학교 교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나는 다원주의로 기울지 않도록 자신을 억눌러가면서 포용주의 신앙과 신학을 견지했다. 이 시기에는 교단은 물론 학교와도 거의 갈등이 없었다. 내 설교의 중심에는 항상 예수님과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런 관계로 내 신앙의 고민을 눈치 채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열려있는 복음주의자로 인식하였다.


숭의여중 시절에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신앙심 깊은 감리교회 장로인 교장이 여름방학 중 교사수련회에서 같이 산책을 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했던 문제라며 목사님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면서 말을 꺼냈다. “부처님 같은 성현이나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의 구원 문제는 어떻게 봐야 되나요?”


나는 가슴 서늘해지는 긴장을 느꼈다. 존경하는 교장이었고 믿을 수 있는 분이었지만 혹 말이 잘못 새어나갔다가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들은 잘 모르죠, 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둘은 그냥 말없이 걷기만 했다.



4. 1995년 이후 - 다원주의 신학을 감추고 일하던 위선의 시기


다원주의 신앙과 신학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억지로 떨쳐내고 포용주의 영역에서 버티던 내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사건이 벌어졌다. 현직 교목들에게 교사자격증을 주기 위한 연수과정이 서울대에 개설된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1995년 일년 내내 들어야 했다. 수업을 모두 오전으로 돌리고 오후에 3시간 정도 종교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서울대 종교학과가 주축이 되어 실시하는 종교학 강의는 아무런 전제 없이 객관적으로 종교문제를 다루었다.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던 나는 자유롭고 즐겁게 다양한 종교여행을 즐겼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내 안의 음성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아직 이론적으로 정립하지 못했던 다원주의의 이론들도 하나 둘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었다.


마침내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다원주의 신학이, 예수님이 처음 전하신 복음의 원형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내 선택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현실 기독교와의 충돌을 각오하고 내 신념을 정직하게 피력하든지, 거짓말을 하며 조직 안에 안주해야 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괴로웠지만 나는 (나의) 진실을 은폐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1995년 이후로는,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위선자가 된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신앙과 양심을 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심을 파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나는 자신과의 괴로운 씨름을 해야 했다. 영혼을 팔아먹는 나같은 놈보다는 차라리 몸을 파는 여자들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 2학기가 시작되면서 대광학원의 기독교교육 전체를 책임지는 교목실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기독교교육에 관한 모든 부분은 내가 책임지고 바로 교육해야 했다.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일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개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직한 신앙과 양심의 판단을 따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 교목실장으로서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말하고 행동하자면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넘어서야 했다. 나는 일 년에 한두번 정도 학교가 수용할 수 없는 설교를 했다. 학교 운영자들이 내가 변한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강의석 사건이 일어나기 몇 해 전, 당시 학교의 실질적 최고책임자였던 부이사장에게 불려갔다. 교사예배 때 했던 설교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다원주의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나는 학교를 떠나는 것은 물론 한국교회에서 매장될 것이었다. 나는 “다원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포용주의자이며, 포용주의와 다원주의는 이렇게 다르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교장실을 나오면서 안도감보다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학교에 있어야 하나? 그로부터 나는 한 달 정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를 그만둘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이후로도 나는 한번인가 두 번인가 더 그에게 불려갔지만 그 때마다 겨우 위기를 넘겼다.


교목실장이 되고 난 후 조금씩 내 소신을 피력하면서 생겨난 학교 운영자들과의 갈등, 위기를 해쳐가는 과정에서 내가 보인 비겁한 변명, 현실 기독교에 대해 처절한 절망과 분노, 이런 것들이 내 마음에 깊은 상처로 자리잡아갔다.


교사예배 설교 시간에는 가끔 울기도 했다.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다 스스로 감동이 되어 울었다고 생각했지만 원인은 따로 있었다. 예수의 삶과 메시지를 흉측하게 변질시킨 교리 기독교에 대한 분노, 진실이라고 느끼는 점을 그대로 설교하지 못하는 아픔, 목사라는 놈이 설교를 하면서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비굴함, 이런 요소들이 내가 선택한 본문의 메시지와 만나 주책스럽게 울음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나는 오직 생활비를 벌기 위해 힘겹게 한 해 두 해 버티고 있었다. 강의석 사건은 그 와중에서 나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피할 수 없는 가로막이었다. 아이는 한마디 상의 없이 일을 저지른 다음에 와서 보고하였다. 아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아이가 정직하다고 느꼈다.


나는 아이의 설명을 듣는 도중에도 내 살 길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도망갈 수 있는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아이의 당당한 모습과 나의 비굴한 모습이 대비되었다. 아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눈이 맑았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잘 알았다. 너는 너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말하고 행동해라. 나도 그렇게 하겠다.”


나는 그렇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갑자기 한 사건을 만났다. 사건은 급박하게 진행되었고 나는 갈팡질팡 하면서 사건에 끌려갔다. 학생들을 달래면서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친분이 두터웠던 교사들 앞에서는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했다. 교사들이 다칠 것이 염려되어 나서지 말라고 말렸으면서도 외면하는 교사들이 야속했다.


의석이가 제적되었던 날, 나는 종일 끓어오르는 분노에 쌓여 지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여전히 제 살길을 찾는 처량하고 비참한 자신을 고통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저런 상념에 시달렸다. 분노와 오기가 용기를 주었다. 새벽에 학교가 잘못된 선택을 했으며, 제적을 취소하고 아이를 무조건 품어주어야 한다는 글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나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여기서 내 생명이 끝나도 하나도 아쉬울 것 같지 않았다. 싸우자고 생각했다. 대광, 아니 한국교회와 한판 싸움을 벌이자고 생각했다.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어느 순간 언론들이 찾아왔다.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대화 중 폭발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울기도 했다. 길을 걸을 때도 혼자 생각에 잠길 때도 나는 주책없이 참 많이도 울었다.


나는 그렇게 내 위선의 종말을 맛보았다. 강의석군이 승소하던 날, 어느 기자로부터 강군처럼 대광에 대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대답했다. 강군과는 달리 나는 학교로부터 강요받은 것이 없다. 오히려 내가 학교에 부임할 때 학교 신념을 잘 따르겠다고 서약했던 약속을 저버렸다. 예장 통합측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교단의 신념에 따르겠다고 서약을 했다. 약속을 저버린 쪽은 학교나 교단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내가 학교와 교단을 떠나게 된 것은, 지난 세월에 내가 선택했던 위선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나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내 신념을 감추고 일했던 것에 대해 대광학원 운영자들과 내가 일했던 교회, 그리고 교우들께 정중히 사과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기독교 신앙을 모두 잃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떠난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금 분명 기독교인이 아니다. 나는 이제 비로소 기독교로부터 자유롭다. 기독교에는 아무런 미련도 애정도 희망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절망과 분노는 남아 있다. 그리고 기독교로 인해 벌어지는 해악을 막기 위해 해야 할 일도 남아있다. 나는 그 일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할 것이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것은 세상이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09.01.15 00:59

    첫댓글 읽을 만 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