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650
사실대로 보는 것은 실상관이라. 실상관이란 우주를 전부를 부처님의 견해를 내 견해로 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부처님이 보시는 대로 우리도 본단 말입니다. 조금도 가림이 없이 전부를 다 하나의 불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의 견해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누어 보는데, 부처님의 참다운 혜안,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다 하나로 보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하나로 보는 견해를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자기가 가진 견해대로 보고 배운 지식대로 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업장이 가벼운 분들입니다. 따라서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如語)하시고, 참다운 진리를 말씀(眞語)하시고, 헛된 말씀(不異語)을 하지 않으시고,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씀(不誑語)은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정말 온전히 인정하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면,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견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처님 소견을 따르는 것은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하는데,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 쉽습니다. 육조혜능이란 스님은 위대한 도인인데 일자무식입니다. 그분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통하고 보니까 우주가 훤히 보이는데,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한테 법문을 들으러 수천명이 아주 멀리서 오고 그러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저 같은 사람 말을 들으려고 멀리서 자주 오지 마시고 부처님 법문은 제일 간단하고 확실하고 명백한 가르침이므로, 꼭 믿어버리면 두 번 다시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 법문을 들으러 오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꼭 신인(信認)하시고 바른 신앙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심작시불(心作是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 이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위대한 부처님의 마음을 대비(對比)해 보아도 조금도 차이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달마스님께서 2조 혜가스님께 하신 법문도 마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2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 마음을 해결해 주십시오.”하시니까, 달마스님이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라. 그러면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시게 해주마.” 그러나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여요.
아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 따로 있단 말입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미워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똑똑한 척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고,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합니다. 김가나 박가나 예수나 맹자나, 그 마음은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얼마만큼 크다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어디 국한되게 크고 작은 것으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입정(入定) 후에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 그 때 마음은 사실 허공과 똑같은 것입니다. 허공이 한도 끝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 그 마음 자리를 열어서 온전히 간직한 분인 것이고, 우리 중생은 내 마음, 내 몸뚱이 내 심장이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어서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한 사람은 몸뚱이도 제 것이 아닙니다. 범부와 성자를 구별한다면 범부는 꼭 제 몸, 제 집, 제 가정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봉사를 권하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남한테 베풀더라도 자기 몫은 남겨두고 남한테 베풀어야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조금도 주저가 없습니다. 주저함이 없으니까, 주린 범한테도 순간 자기 몸을 몽땅 바쳐 버립니다.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나찰귀신(羅刹鬼神)한테 조금도 주저없이 자기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부처님은 십이겁(十二劫) 동안을 앞당겨 성불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뚱이를 개인적인 존재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지 어느 누구 것이라고 소속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몸이나 자기 남편 몸이나 아내 몸이나,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고 금생에 잠시간 만난 것이지, 꼭 내생에서도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업장이 같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요. 그것도 역시 그냥 헤어지고 맙니다. 기왕 만났으면 영원히 만나야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만나는 것은 극락세계에 가서 가능합니다. 극락세계에서는 영원히 한곳에서 만납니다. 구회일처(俱會一處)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 믿고 부처님 믿고 염불 많이 하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에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임종 때, 그 순식간에 업장을 다 녹여 버립니다. 그때 극락세계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제 말의 요지는 절대로 자기 소견 하나로 옳다고 고집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부처님 법에 비추어서, 부처님 법으로 해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체, 본바탕 주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르게 세우셔야 함부로 덤벙거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볼 때는 정말로 그 부처님 정신, 본래 부처님 성품이 인간의 마음이며 우주 참다운 실상인 진여불성에서 천지우주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 모양을 냈단 말입니다. 모양을 냈지만 그것도 역시 진여불성에서 왔기 때문에 조금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바람따라 파도가 천파만파 친다하더라도 똑같은 물이듯이 산이나 내(川)나 사람이나 본래의 근원자리는 다 부처이기 때문에, 나와 있는 모양이나 형상도 이것이 다 부처입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악인이라 하더라도 근본바탕에서 본다면 다 부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좋은 일하면 “아, 저 사람은 부처와 가깝고 앞으로 부처님이 쉽게 될 것이고 나쁜 일 많이 한 사람은 부처가 되지 못 할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근원자리에서 본다면 좋다 궂다 이런 모두가 순간적인 환영에 불과합니다. 천지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모두가 다 무차별하게 부처 뿐 이예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불안의식을 온전히 없애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우리 중생의 최상의 행복을 위한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할 때는 본바탕은 정말로 부처라고 생각할지라도 인간생활은 역시 업장 많은 생활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많습니다. 제 아무리 자기가 옳게 생활한다 하더라도 옆에서 미혹 중생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불공정하고 무서운 산업사회 아닙니까?
어려운 세계에 휘말리지 않고, 7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끝끝내 자기 신념을 바꾸지 않고 불에 타서 죽은 이탈리아 수사(修士) 부르노같이, 우리가 부처님만 믿는 굳건한 신앙심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어디 있으나 바로 그것이 최상의 사회적인 봉사가 됩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봉사는 물질로 남한테 베풀고, 어려운 데 가서 같이 도와주고 일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은 남들이 해 주는 것을 다 먹고 쓰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봉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중생들한테 신세만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은 끝도 없는 바닷물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 운동하는가 그것에 따라서 전자가 생기고, 결합에 따라 물질이 생기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항시 그대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더함도 덜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생명자체, 에너지의 실제 자체는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중 선방에서 가만히 눈감고 참선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산에서 공부하면 사회봉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깨달음과 사회봉사는 둘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아 버리면 그때는 집에 있으나 산중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결국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것입니다. 가령 많은 돈을 절에 시주하고 사회에 봉사한다 하더라도, 저는 저고 나는 나다, 이와 같이 구분을 짓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래 못갑니다. 불교로 말하면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라. 상(相)을 떠나지 않는 보시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반야바라밀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반야바라밀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지혜입니다. 여러 불자님들! 무엇보다도 먼저 아실 것은 제법공(諸法空) 지혜입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제법이 공(空)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모두가 부처란 말입니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제법이 공이라 하면,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허망하지 않는가, 허무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만 공만이 아니라, 그 공 자리가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으로 충만돼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제법이 공한 자리입니다. 말로는 제법공이지만, 정말로 우리 마음을 깨달아서 자타(自他)를 떠난 하나의 자리에 들어가면 성자가 되어 버려요. 그 자리가 진여불성이 충만한 자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중생 버릇이 굉장히 많습니다. 법문 듣다가도 금방 세속의 분위기에 말려들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불자님들은 마음을 가다듬는 데 제일 쉬운 염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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