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 '모사'란 '이쉬 아차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그의 조언의 사람'이다. 본문은 당시 군왕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정치 전문가들에 의존하였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을 조언할 책략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과 초월성을 가르친다.
[사 40: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하나님의 피조 세계조차 헤아릴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에 통달하고 하나님을 유일 무이성, 초월성 및 무한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세상 존재와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
[사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저울의 적은 티끌 - 원문 직역은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이다. 본절은 물동이의 물 한 방울,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 등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눈에 보이는 가시적 물리 집단인 당시의 국가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사 40:16]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표면상으로 본절은, 하나님이 비교할 상대가 없는 위대한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의미는, 그 유명한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이나 짐승들로도 그분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기에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땔감용 나무와 희생 제사용 짐승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틴이 가장 울창한 삼림과 가장 풍성한 동물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사 40: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아무것도 아니라...없는 것...빈 것 - 이에 해당하는 세 히브리어 '아인''메에페스', '토후'는 우상과 관련한 묘사에서 자주 언급된다. 물론 여기서는 제 힘만 믿고 제국주의적 야심에 불탔던 열방들에 대한 풍자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 앞에서 그들의 존재란 무기력하고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점에서 허탄하고 허무한 우상(18절 이하 참조)에 비교될 수 있겠다..
[사 40: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인간이 가진 특징 중에 하나는 경험한 세계를 토대로 경험치 못한 세계를 상상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그 같은 기능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피조 세계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나 인간을 연관시키는 목적에 사용할 때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극악한 죄에 빠지게 되는데 바로 이점을 본절은 지적하고 있다.
[사 40: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본절은, 우상이 인간의 고안물임을 밝히고 있다. 앞부분에서 열국을 말하고 나란히 우상을 말하는 까닭은 고대 세계에서 한 나라와 우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단지 전쟁 당사국간의 싸움이 아니라 나라마다 섬기던 신들 간의 싸움으로 믿었다. 따라서 싸움 후 진 편의 신은 없어지든지 이긴 편의 신에게 종속적 존재가 되곤 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당시 이방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바벨론의 말둑 신에 의한 하나님의 패배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18절에서부터 저자는 우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물건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사 40:20]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 우상을 세운 사람이 그 마음대로 옮기거나 고정시킬 수 있음을 암시함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