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슈레이
왜 우리는 먼저 축하하고 그 다음에 속죄할까요?
9월 11일 해가 지면 시작되는 로쉬 하샤나(유대 신년)가 왜 욤 키푸르(속죄일)보다 먼저 오는 것일까요?
어쨌든,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지난 한 해 동안의 실수를 인정하고 속죄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 큰 결의를 가지고 다가올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 마음속의 정서적·영적 짐을 어느 정도 덜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반대의 순서, 즉 먼저 축하하고 그 후에 속죄하는 것일까요?
데이비드 월프(David Wolpe) 랍비는 답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감사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가능성과 희망이라는 감정에서 자라나며, 거기서부터 추진력이 쌓여갑니다. 따라서 욤 키푸르의 의무를 다하기 전, 우리가 실패했던 모든 방식을 되돌아보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해낸 모든 일과 여전히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로쉬 하샤나는 세상의 창조를 기념합니다. 이 명절은 우리에게 삶과 가능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을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일단 그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무언가가 변합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집니다. 시간을 지혜롭게 쓰고 싶어집니다. 현재에 더 온전히 머물고 싶어집니다. 우리 삶이 축복이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욤 키푸르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날이 아니라 기회의 날이 됩니다. 희망이 주는 힘을 얻어 진정한 ‘헤슈본 하네페쉬(חשבון נפש)’, 즉 영혼에 대한 솔직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욤 키푸르에 ‘마흐조르(מַחֲזוֹר)’라고 불리는 대절기 기도서를 펼치고, 유대교의 고백 기도인 ‘아샴누(אָשַׁמְנוּ)’와 ‘알 헤트(עַל חֵטְא)’를 낭송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배신하고, 상처를 주고, 속이고, 마음을 굳게 닫았는지를 하나하나 털어놓습니다. 랍비로서 저는 한 사람이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내가 너를 상처 입혔다는 걸 알아”라고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목격해 왔습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변합니다. 무거운 짐이 내려집니다. 치유가 가능해집니다.
고백은 필수적이지만, 우리가 잘못한 일에만 집중한다면 죄책감이 희망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개혁파 기도서인 ‘미쉬칸 하네페쉬(Mishkan HaNefesh)’는 욤 키푸르 아침 아미다 기도문의 ‘비두이(Vidui)’ 부분에서 또 다른 형태의 고백을 제시합니다.
“모든 선행에 대하여”라고 불리는 이 구절은 우리에게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을 인정합시다”라고 말하도록 요청합니다.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관대함과 연민을 통해 행한 선행”을 언급합니다. 제가 다니는 회당에서는 이 구절을 함께 낭독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공동체에서 이 관습이 없다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읽거나, 지난 한 해 동안 행한 사랑, 용기, 혹은 화해의 행동 하나를 스스로 떠올려 보세요.
이러한 선행에 대한 고백은 많은 대절기 회당 예배에서는 새로운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토라에는 ‘비두이 마아세르(וידוי מעשר, vidui ma’aser)’라고 불리는, 십일조에 대한 고백 의식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서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요구된 예물을 드렸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기억했습니다.”
라브 아브라함 이쯔학 쿠크는 이 의식에서 자신이 ‘비두이 라-토브(וִדּוּי לַטּוֹב, vidui la-tov)’, 즉 ‘선한 일에 대한 고백’이라고 부른 것의 본보기를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때때로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자랑하거나 변화할 필요가 없다고 가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선한 일들을 명명함으로써 계속해서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랍비 아비 바이스는 나중에 ‘아샴누(Ashamnu,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하브누(Ahavnu, “우리는 사랑했습니다”)’로 시작하는 긍정적인 고백문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축복했습니다. 우리는 위로했습니다. 우리는 용서했습니다. 우리는 화해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샴누’와 ‘아하브누’라는 두 가지 고백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 것은 랍비들만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긍정 심리학의 선구자 역할을 한 마틴 셀리그만은 매일 하루를 마무리하며 세 가지 좋은 일을 떠올리는 간단한 실천법을 권장합니다. 나중에 다시 되돌아보며 그 일이 가능하게 된 계기를 기억할 수 있도록 충분히 상세하게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은 일종의 영적 근육 기억을 형성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피르케이 아보트’는 오래전부터 같은 통찰을 표현해 왔는데, 유대인 여름 캠프 노래 시간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미쯔바 고레렛 미쯔바(Mitzvah goreret mitzvah)”입니다. 한 가지 미쯔바가 또 다른 미쯔바로 이어집니다. 선함은 추진력을 만들어 냅니다.
한 번의 인내심은 다음 인내심을 더 가능하게 만듭니다. 한 번의 관대한 선택은 우리가 다시 관대함을 선택하도록 이끕니다. 한 번의 사과는 우리를 더 큰 겸손으로 이끌어 줍니다. 한 순간의 용기는 우리가 용감해질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고백의 목적입니다. 이는 로쉬 하샤나(유대 신년)의 감사를 욤 키푸르(속죄일)까지 이어지게 합니다. 이는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가 변화해 온 모든 방식을 상기시켜 줍니다.
This essay is an excerpt from My Jewish Learning's new High Holiday reader, New Fruits.
By Rabbi Evan Mof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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