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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입성
막 1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막 11:1-11 / [예루살렘 입성;마21:1-11,눅19:28-40,요12:12-19]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먼저 보내시며 2) 말씀하셨다. `저쪽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라. 마을에 들어서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이 눈에 뛸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이리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우리 주님이 쓰시겠답니다' 하고 말하라. 그러면 곧 보내 줄 것이다.' 4-5) 두 제자가 마을 어귀에 가보니 과연 어린 나귀가 집 앞 길가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풀고 있는데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이 `그 나귀를 왜 풀어 가는 거요?' 하고 물었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자 그들이 허락하였다. 7) 제자들은 새끼 나귀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등에 얹어 놓은 다음 예수를 그 위에 올라 앉으시게 하였다. 8)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기도 하고,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 9) 그리고 행진이 시작되었는데 예수께서는 한가운데서 나귀를 타고 가시자 앞뒤로 에워싼 군중이 일제히 환호하며 걸어갔다. ㄱ)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임금이 오신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ㄱ. 시118:25-26) 10)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돌아온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한없이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11) 그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거기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둘러보신 후 날이 이미 저물어 열두 제자와 같이 베다니로 나가셨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참된 메시야의 목적을 모르고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를 외치는 백성들의 대립된 구도의 예루살렘 입성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1-3)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군사적, 정치적 왕으로 오셔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인 예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죄 가운데 빠져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인 예수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희생을 기초로한 나라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길에 많은 사람들이 펴준 나뭇가지(8), 소리지름(9), 찬송하는 소리(10)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하셨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를 향한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제자 둘을 보내시고(1),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하시고(2) ‘왜’라고 하는 이가 있으면 '주가 쓰시겠다'하면 즉시 보내리라는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4-6) 황당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대로 진행되는 체험을(6) 하게 되었습니다. 황당한 명령임에도 순종하는 제자들이나 주가 쓰시겠다고 한 한마디 말에 나귀를 내어주는 순종함을 보여준 나귀 주인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봅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나의 상식과 이해의 범위에 있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7-11)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곳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를 위하여 희생제물로 드려져야 할 제단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은 살고자 하면 들어오셔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면’,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면’하는 사랑의 의지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죽을 곳이요 고난의 장소임을 알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선택하신 예루살렘의 입성을 주님의 마음으로 묵상해 봅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하나님 나라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사람들은 겨울잠을 잔다고 하는데 사실 겨울은 식물들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계절입니다. 특히 뿌리가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 입니다. 잎마저 떨어뜨리고 모든 에너지를 뿌리로 집중시키는 때입니다. 바깥은 춥지만 땅은 뿌리와 물 에너지들로 가득합니다. 인간이 모르는 땅의 세상입니다. 이렇게 겨울 땅은 인간의 봄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의 모든 명예와 직분과 영광의 옷을 다 벗어버릴 때 잎이 떨어지면 뿌리는 더 바빠지듯 속사람의 영성은 더 활발해질 것입니다.
< 설 교 >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장광영 목사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 날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그 분이 욕을 당해서 우리가 영광을 얻게 되고 그가 멸시를 받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그가 찔림을 받아서 우리의 아픔이 낫게 되었도다"
우리 기독교인이 가장 엄숙하고 감사하며 기뻐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격자가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부를 만한 자격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아니며 온통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우리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무시를 당했습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봉변을 당하는 것을 옆에서 보는 제자들의 속이 터진 것은,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영권을 동원해서 그들을 능지처참하면 될 것 같은데, 예수께서 그렇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그런 일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존심이 있으시고 그 분이 능력도 있잖아요? 그 분이 말을 하면 그대로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9절에서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얼마나 멋있는 분입니까?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을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저 질시와 수모를 당할 뿐입니다. 어떻게 삭은 가지가 부러지듯이 저렇게 쉽게 부러질 수 있을까요?
참으로 그 분은 이웃 나라가 꼼짝 못하던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 이상으로 샬롬(평화)을 주시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인 줄로 알았는데, 저렇게 부러지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무척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길을 갈 뿐이었습니다. 화가 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었을 때 주님은 이것까지도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부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번 한 주간 동안을 경건하고 의미있게 보냄으로써 신앙에 가장 보탬이 되는 주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어느 목사님이 기독교 TV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는데, 교회는 말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순종하는데서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이권을 차지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 주장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묵묵히 순종하며 사는 곳입니다.
하고 싶을 말을 다 하고 따지고 싶을 것을 다 따지면서 흑백논리를 따지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모세가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 하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도록 배려하면서 맡기고 살아가는 곳이 교회 공동체요 하나님 백성의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고난 주간 7일 동안 예수께서 가진 생각, 예수께서 가진 마음, 예수께서 행한 자세를 본받음으로써, 금년 한 주간이 여러분의 일생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가정을 빛나게 하고 우리 사회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주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은 21장 4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십 년 간 예수를 믿어도 이것을 받지 못하고 사는 불행한 신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고난주간의 첫 날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역사가 일어난 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을 일명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교만과 권력과 금력과 종교 지도자들로 꽉 차있어서, 예수처럼 나사렛 동네에서 태어난 서민 출신은 근접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는 대제사장이 교권을 휘두르는 자리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율사들이 법으로 약자는 무시함으로써, 강자들이 판을 치는 곳입니다. 권력으로 온통 들끓는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에 왜 예수님이 들어가야 합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들을 쫓아내야 할 예수가 거기에 무엇을 하러 갑니까?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승리자로 들어가서 교만한 자는 겸손하게 하고 강자는 약하게 하고 불법 행위를 하는 권력층들을 회개케 해야 합니다. 참으로 예루살렘은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평양은 세계 모든 사람에게 공연을 하는 사람으로 꽉 차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평양에 오면 마치 크리스찬인 것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연극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아무 감동이 없으면서도, 마치 연극하는 사람처럼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처럼 찬송을 부르면서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지난 삼일절에 북한 사람들이 소망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불렀는데, 이북을 찬양하는 기자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북한의 찬송 소리에 남한이 울었다" 이 글을 쓴 기자는 굉장한 논란이 일어나자 해고 조치가 되었습니다.
평양 밖에서는 서민들이 먹지 못해서 아사하고 추위에 얼어죽었지만, 평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립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면 다른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꼭 평양에 있게 합니다.
과거에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동상 앞에서 참배를 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은 사람은 추방을 당하거나 감금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이북의 체제는 탄탄하기 그지없습니다.
전세계에서 독재 일 번지가 북한입니다. 이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으며 기독교인들을 말살시켰습니다. 교회를 공장으로 만들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아오지 탄광에 보내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는데, 이라크도 북한과 똑같은 나라입니다. 사담 후세인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람입니다. 반체제 인사들을 축출하거나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예루살렘은 그보다 더 엄청나게 악한 도시였습니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은 지금보다도 더 강한 철권 정치를 하고 교권자들이 아부하면서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건물은 있었지만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물건을 파는 사람으로 꽉 차있었습니다. 비둘기를 파는 사람과 돈 바꾸는 사람으로 꽉 차있었습니다
거기 어디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거기 어디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곳을 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기에 왜 갑니까?" 하고 말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무가내로 가야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날아다니는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었지만, 주님은 머리를 둘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가난한 자들고 같이 있었고 병든 자들과 같이 있었으며 버림받은 자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아! 예수께서 이제야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하는가 보다" 하고 착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은 왕이 되려고 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예루살렘답게 하고 성전을 성전답게 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메마른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찬양 소리가 있게 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쫓아내고 이제 거기서 찬송 소리가 드높아지고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과 평안을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성을 일명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악이 악을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악은 패배하고 선이 이겨야 합니다. 불신이 패배하고 믿음이 이겨야 합니다.
지금도 불신앙은 돈이 안 들어가도 흉용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돈이 들어가고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레샴의 법칙처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악이 팽창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실망으로 가득 찬 여러분이 유일하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하고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멘 하고 화답하는 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남다른 바가 있었습니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이 새끼 나귀는 헌납된 나귀입니다. 돈을 주고 산 나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벳바게 건너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새끼 나귀가 매여 있을 것이다 거기에 가서 그 나귀 새끼를 풀어 오는데, 만약 누가 뭐하고 하면, 주께서 쓰신다고 말하라"
제자들이 거기에 가보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새끼가 있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자 주인이 나와서, "왜 나귀 새끼를 푸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주께서 쓰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나귀 새끼를 예수께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몸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은혜를 받은 여러분은 나귀 새끼 주인처럼 나귀 새끼를 예수께 헌납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1장 5절에 보면,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를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나귀 새끼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순수한 나귀 새끼입니다.
이 나귀 새끼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이 탄 적이 없기 때문에 고물차가 아니라 세단차입니다. 이것은 벳바게 건너편에서 가져온 세단차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서민처럼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하는 대단히 당당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타고 가신 나귀 새끼는 시원치 않은 나귀가 아니라, 아주 순수하고 남이 써보지 않은 나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으로 나가는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주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잡한 마음을 가지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순수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과 21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아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것은 금그릇, 은그릇이라고 해서 귀히 쓰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일지라도, 깨끗하면 주인이 쓴다는 뜻입니다.
오늘 주님이 타고 가신 나귀 새끼처럼, 여러분이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귀 새끼는 헌납된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헌금을 한 것입니다. 헌금은 어떤 조건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너무나 감격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나귀 새끼는 큰 재산이었는데, 나귀 새끼의 주인은 그 재산을 주님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아마 여러분이라면 따졌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기른 나귀 새끼인데 어떻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할까? 예수님이 너무 하신다" 그러나 벳바게 건너편에 있는 나귀 새끼의 주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귀 새끼를 내놓았습니다.
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겉옷은 체면, 위신, 위선인데, 주님 앞에 나갈 때는 이것을 벗어서, 얹어 놓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갈 때 소리를 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제자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 잠잠 하라 하면서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그를 불러오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 하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가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께로 달려갔겠습니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겉을 보는 분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가 얼마나 억센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잘라서 길에 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고의 존경을 표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서 펴거나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은혜를 받고 따라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의 소문이 온 성에 퍼지니라"(눅5:15)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소문을 듣고 낮 예배에도 저녁 예배에도 철야 집회에도 꽉꽉 차는 전도의 불길이 붙을 때, 능력있는 교회, 승리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4.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찬송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나와서 예수님에게 최고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막11:9-11)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눅19:38)
이에 분개한 제사장과 율법주의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앞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무엄한 짓을 못하게 하소서 저들을 책망하소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19:4) 이것은 만약 사람들이 주님을 찬송하는 것을 제지하면 돌들이 찬양을 한다는 것입니다.
■ 강릉중앙교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교회는 굵은 통나무로 지은 교회인데, 현대 문명에 밀려서 조한걸 목사님이 시무할 때에 통나무 예배당을 헐어버리고 새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가 너무나 좋은 나무라서 제재소 주인에게 팔았는데, 그 사람이 처음에는 백만원을 주겠다고 하다가, 80만원으로 깎았으며, 결국 더 깎아서 60만원에 샀습니다. 제재소 주인은 그 나무로 경포대로 가는 언덕에 별장을 잘 지었습니다. 별장에 입주해서 첫 날 밤을 자는데, 새벽 4시 30분이 되자 별장 건물에서 찬송가 소리가 나왔습니다. 강릉중앙교회에서 늘 새벽기도 때마다 부른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는 찬송이 울려나왔습니다. 집에서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는 찬송소리가 들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그 주인은 그 찬송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아주 끔찍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부르는 찬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그 주인은 아침에 교회로 달려가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서 찬송가 소리가 나오는데. 웬 일입니까?" 그러자 조 목사님은 "잘 되었군요. 그것은 당신이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집이 얼마나 비싼 집인가 하면, 당시에 삼천 만원이었습니다. 그러니 묵은 통나무로 얼마나 잘 지었겠어요? 집주인은 조 목사에게 "교회에서 이 집을 사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배당을 짓고 있어서 돈이 모자라는 형편인데 어떻게 그 별장을 삽니까? 그래서 그 교회에서 돈이 있는 분이 누굴까? 하고 찾았는데, 문방구를 하는 권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권사님을 찾아가서 아주 싸게 나온 집이 있는데 사라고 했습니다. 그 권사님은 목사님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분입니다. 집주인에게 집값을 묻자, "삼천 만원짜리인데, 이천오백 만원만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권사님이 안 산다고 하자, 이천만원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또 안 산다고 하자 계속 집값을 깎아 주었는데, 무려 집값이 천이백 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결국 이백 만원을 더 깎아서 일천 만원에 그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집을 산후에 서울에 있는 모회사의 사장이 와서 그 집을 일억 원에 샀다고 합니다. 제재소 주인은 복을 주셨는데도, 찬송가가 무서워서 삼천 만원짜리 집을 천 만원에 팔고, 그 집을 산 권사는 일억에 팔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나무 값으로 받은 돈의 몇 배를 교회 건축헌금으로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집을 판 돈으로 버스 회사를 운영해서 벼락부자가 되었는데, 그 분이 지금 강릉중앙 교회의 장로님입니다.
이처럼 나무가 찬송을 부르고 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자 난리가 났습니다. 왜 난리가 났을까요? 그것은 성전에 들어가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뒤엎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교회에서 다 내쫓아 버리고 깨끗이 청소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본연의 일을 하셨습니다.
1)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소경들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 네 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이요 하나는 영안이요 하나는 양심의 눈이요 하나는 지식의 눈입니다.
지식의 눈이 떠진 사람은 까만 것은 글씨고 하얀 것은 종이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식의 눈이 떠진 사람은 지식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의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양심이 없는 파렴치범이 됩니다. 영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제일 먼저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눈이 고쳐지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산의 합성교회에서 열린 삼남연회에 참석했는데, 구동태 감독에게 눈이 흐릿해서 잘 안 보인다고 하자 그 교회의 교인인 백내장 수술의 권위자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내가 시간이 없다고 하자, 다음 날 오전 7시 30분에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뿌옇게 잘 안 보였는데, 수술을 받고 나자 잘 보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적인 백내장이 없기를 바랍니다. 백내장이 껴서 잘 안 보였는데, 백내장 수술 후 시력이 제대로 나왔습니다. 시력을 재보니 1.2였습니다. 제가 본래 눈이 제일 좋을 때가 2.0입니다. 그리고 1.5, 1.2였는데, 눈이 희미해지면서부터 마이너스 시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술을 하고 나자 시력이 1.2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소경을 고쳐준 이유가 이것이구나!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면 멍청이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뻔히 망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처음 은혜를 받고 난 후 여러분의 심령이 열려서 그것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속을 들여다보니 가까이 해서는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도적 같은 사람이 많고 고양이 같은 사람이 많고 염소 같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속에 개와 같은 마음이 들어있는데, 그 사람에게 아, 위대하신 분이여! 하고 말하겠어요?
그러므로 오늘 소경이 고쳐주시는 축복을 받기 원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2) 절뚝발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영적으로 보면 다 절뚝발이입니다.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세상 것을 좋아하고 어떤 때는 주여, 하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이 콱 들어가 있어야 뭐가 됩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질이 됩니다.
3) 온통 찬양이 넘쳤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적에게 뺏긴 진지를 다시 탈환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아세요? 아미 이번 이라크 전쟁도 그랬을 것입니다. 영국군과 미군이 연합해서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도인 바그다드 시내를 들어가서 후세인 동상을 넘어뜨리고 거기에 미국 국기와 영국 국기를 꽂았을 때 병사들에게는 아마 한없는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 승리했다!" 군인의 최고는 적진을 함락시키고 거기에 기를 꽂는 순간입니다. 등반대는 남이 올라가 보지 못한 산을 처음으로 올라가서 자기 나라의 국기를 꽂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함하고 시기하고 죽이려는 살기가 있는 예루살렘에 예수께서 당당하게 들어갔을 때, 예수를 반대하던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서기관과 정치 지도자들 앞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고 팡파레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리뿐만 아니라 고난주간에 여러분의 승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난도 이기고 질병도 이기고 절망도 이기고 실패도 이기고 희망과 기쁨과 평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아지는 아름다운 고난주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태우는 나귀가 되자
노경모 목사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 명절을 앞두고 축제에 참석하려고 원근 각처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예수님도 이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지만 실은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큰 무리가 손에 녹색의 잎들이 붙어 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이 손에 들고 흔든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개선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정복자가 승리를 기념하여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 하는 것처럼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정복자로, 강력한 구원자로 환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정치적인 메시야, 왕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에 대한 심판자나 정복자가 아닌 영혼을 구원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을 보내면서 "맞은 편 마을로 가라고 하시며 거기에 가면 나귀가 놓여 있을 테니 그 나귀를 끌어오고 만일 그 일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면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즐거운 마음으로 내어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부를 받들어 두 제자가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풀고 끌고 오려고 하니까 "왜 허락도 없이 나귀를 끌고 가려고 하느냐?"고 하여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그 고귀한 나귀를 아낌없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드디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내가 환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환영할까? 어떻게 환영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환영일까? 이것이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이어야 하고,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를 위해서 오신 주님을 이 종려주일에 어떻게 영접하고 싶습니까? 내가 어떻게 영접하는 것이 가장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오늘 상징적으로나마 흔들며 종려주일을 지키는 것은 어떨까요? 이 당시 사람들처럼 겉옷을 벗어다가 바닥에 깔면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호산나하고 소리지면서 종려주일을 지키면 어떨까요? 물론 이렇게 하는 것도 종려주일을 의미있게 지키는 한 방법이 되겠지요. 지금 그렇게 한다고 주님이 정말로 기뻐하시겠습니까?
나에게 귀한 손님이 온다면 우리는 그 손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 분이 좋아하는 음식은 그 분이 좋아하는 분위기, 그 분이 좋아하는 색깔, 그 분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침대, 그분이 좋아하는 커튼..
2009년 1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마바를 환영하고 영접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까? 경호, 의전, 숙소, 식사.. 어떻게 영접하고 환영을 해야만 오마바가 기뻐하고 감동을 받을까..
오늘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주님을 어떻게 영접하고 환영해야 할까? 고민합시다. 연구합시다. 2011년 종려주일은 예년과 달리 고민해봅시다. 그리고 정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접을 해보도록 합시다.
저와 여러분이 이번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시는 주님을 제가 나귀가 되어 태워드리겠습니다. 저를 타십시오.’
아니 주님은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나를 너를 사용하고 싶다. 나는 너를 타고 고난의 길을 가고 싶다. 나의 나귀가 되어 줄 수 있겠니?’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오 구원주가 되시는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나의 나귀가 되어 다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주님 나는 안 됩니다. 나는 바빠서 안 됩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안 됩니다. 나는 건강이 약해서 안 됩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안 됩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안 됩니다. 이렇게 핑계대고 요리저리 빠져 나가려고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주님의 나귀가 되어 드리겠다는 우리의 결심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기쁘게 고난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주님도 함께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빌립보서 1:29 말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로마서 8:17 말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둘째, 주님의 쓰심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5분 대기조 아시지요? 출동 명령이 내리면 5분 안에 출동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필요한데’ 라고 말씀하시면 머뭇거림이 없이 여기 준비되어 있습니다.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군병입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3-4에는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주님의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항상 준비합시다. 아무리 집에 금 그릇, 은 그릇 등 귀한 그릇이 많이 있다할지라도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지만 않으면 주인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사용하세요.’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셋째, 주님의 소유임을 항상 인정하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었던 우리를 주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어나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주님께서 나를 사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주의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주님께서 나를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사셨으며 나는 이제 주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자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로마서 14:8의 말씀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주인되시는 주님이시여 나를 타소서 내가 당신의 나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감격스럽게 외쳐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을 태운 나귀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메시야 예수님을 잉태됨을 거절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38을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10달 동안 예수님을 나귀로서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아니 33년 동안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로 예수님의 나귀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어릴 때부터 사무엘은 죽기까지 늘 이런 준비된 자세로 살았습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하는 멋진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번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멋지게 태워드리는 주님의 나귀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쓰임받는 영광
이중표 목사
마가복음 11:1-11 마태복음 21:1-11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있었던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왕으로, 우리의 영원한 죄를 대속하는 구속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한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친히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응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해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두번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모든 왕들은 말 타고 개선장군처럼 입성합니다. 또 군마를 타고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칼찬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기에 평화의 짐승인 나귀, 큰 나귀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입성한 것이 아니라 민중들과 어린 아이들의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치는 환호 속에서 입성합니다. "호샤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 '호샤나' 환호속에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제자 둘을 불러서 건너마을로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막 11:2-3)
과연 제자 둘이 가서 보니까 거기에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귀를 푸니까 주인이 왜 그러는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자 나귀 주인이 그대로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러 등극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우리에게 우레소리처럼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주인은 즉시 순종해서 주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주님은 나귀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아셨고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사역에 언제나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을 쓰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천년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간 것은 이 음성을 듣고 순종했던 사람들 때문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쓸모없는 인간으로 되어버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구속하시고 값을 지불하여 다시 우리를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나를 쓰시려고 찾고 있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쓰시겠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레이아'는 말인데 이 말은 '필요 불가결한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쓰이고 싶은 욕망은 살고 싶은 욕망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데도 쓰이지 못한다고 할 때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을 찾는 것은 자기가 쓰임받고 싶어서 직장을 찾는 것입니다. 일터를 찾는 것은 '나를 좀 써다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에게 쓰임받고자 하는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쓰임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지 않으면 결국 나는 마귀가 써야 합니다. 내 시간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사탄이 침략해갑니다.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서 쓰지 않으면 사탄이 빼앗아 세상에 다 탕진하게 합니다. 내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아니하면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쓰려고 택했노라, 내가 너를 쓰려고 불렀노라, 내가 너를 쓰려고 죄에서 구속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쓰고 있는 주인이 누구입니까 회사에 들어가서 인정없고 포악한 주인을 만나면 삶이 힘듭니다. 그러나 주인을 잘 만나면 그 주인을 통해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신 주님, 자비와 긍휼과 비전을 가지고 나를 살피시는 주님께서 나를 쓰셔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나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질 때는 가차없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행복한 존재로, 창조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시고 가장 나약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을 눈으로 보십시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약한 자로, 쓸모없는 자로 부정해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가진 것도 없고, 재능도 없고, 배운 것도 없다' 하고 자기 자신을 열등화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십니다. '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왕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새끼 나귀 존재로 생각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택함을 입을 때 지극히 작은 자였습니다. 그는 이새의 여덟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가문에서 왕을 세우기 위해서 이새의 집에 갔을 때 큰 아들들 엘리압을 보고 용모가 준수하니까 그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양을 치고 돌아왔을 때 성령께서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땅에도 외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땅이 기름져서 비옥한 땅은 농사가 잘 되고, 경치가 좋은 곳은 관광지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같은 땅은 속에 지하자원이 풍부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땅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서 관광하지만 외모가 보잘 것 없는 땅은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 외모가 없습니까 화려한 학력이 없습니까 돈이 없어서 가난합니까 그렇다면 속이라도 채우시기 바랍니다. 인물이 잘 생긴 사람들, 출세한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길거리를 헤매니까 사람들이 밟고 다닙니다. 구경거리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은 주께서 "내가 네 속을 쓰겠노라. 네 속에서 석유같은 성령의 능력을 솟아오르게 해서 인류의 가슴마다 불길이 타오르게 할 것이다. 네 가슴속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빼서 인류에게 희망을 줄 것이니 능력없는 자들아 이리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존재를 살펴서 세상에서 별 것 없다고 생각한다면 주님의 전에 와서 속을 채우십시오. 은혜를 채우십시오. 그래서 성령의 불길이 솟아오르게 하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저는 최근에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서 어떤 땅에서 자라며 공부는 어떻게 할까 하버드 대학에 가서 실력있는 사람이 되어서 유창한 언어로 세계를 놀라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대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만약에 다른 아버지를 모시고 태어난다면 그때는 내가 아닙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오직 한번 역사에 태어나게 한 나, 이대로 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요, 인물 좋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내가 무슨 재능을 더 받는 것도 아니라 이대로 주님을 태우고 땅이 진동할 만큼 내 존재를 우뚝솟게 개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비록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주님께서 내 등에 타시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현재 남은 이대로 주님께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날 때부터 꼽추인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꼽추라 창피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에 수녀님이 찾아와서 그 수녀님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천주교 사경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천주교 사경회는 개신교처럼 찬송을 세게 부르거나 말씀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조용 조용하게 하는 세미나 비슷한 것인데 강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려오나 각각 감동을 받으시오. 과연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시는가 감동을 받고다시 모입시다."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갔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좋은 잔디밭과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꼽추 소녀는 더딘 걸음으로 나갔기 때문에 좋은 자리가 없어서 아무도 없는 쓰레기통 옆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어디를 가나 쓰레기구나' 하고 한숨을 쉬는데 그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곱추 소녀가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쓰레기통을 왜 뒤집니까?"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무엇하려구요." "이걸 가지고 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 사드리려구 그래요." 그 순간 곱추 소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같은 쓰레기 인생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런 감동을 받고 그는 들어가서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나같은 곱추 쓰레기도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시니 저 병들고 나약한 양로원으로 보내주세요. 나로 하여금 주께서 쓰시게 해 주세요."
드디어 '내가 너를 쓰겠다' 이 음성을 들은 꼽추 소녀는 양로원에 들어가서 굽은 허리로 수많은 노인들의 병수발을 들었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 키 큰 사람보다 곱추가 노인들을 섬기기에는 더 좋았습니다. 노인들을 섬긴 이후 곱추가 들어가면 병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곱추는 이미 곱추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보낸 천사였습니다. 땅이 진동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쓰시겠다' 하는 음성을 들으십시다. 지난 날 주일학교 부장을 했는데 이제 내가 나이가 들어 아이들이 싫어한다면 아이들의 신발을 정리하십시오. 음성이 쇠해졌습니까 자리를 채우십시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쓰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 쓸모없는 고물 인생이요, 폐품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여 이 고물같은 것을 써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헌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는 풍족한대로 넣었고 가난한 과부는 엽전 두 개를 넣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바쳐도 주님께서 쓰십니다. 가난한 자가 바쳐도 주님께서 쓰십니다. 그러나 누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바쳤느냐에 따라서 많이 바친 자를 많이 쓰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주님께서 쓰시게 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기 위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방문해서 헌금을 작정하는데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장로님, 부자시죠. 건축헌금 좀 하시죠?" "뭐가 있어야지요." "일산에 빌딩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들 것인데요." "분당에도 빌라가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작은 아들거에요." "파주에 산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손자거에요." "강남에 집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내거에요." 그때 목사님이 나오면서 혼잣말로 "다 있는데 하나님 몫만 없네." 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쓰실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나귀였지만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시니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그 위에 얹었습니다. 등에 가마니나 덮고 주인의 채찍에 맞으며 짐이나 나르던 나귀인데 제자들의 부드러운 옷이 그 위에 덮어지고 주님이 그 위에 타십니다. 그리고 나귀가 걸어갈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옷을 던지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칩니다. 그때 나귀가 '이게 웬일이야' 하고 놀랍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서 받으시지만 나귀는 덤으로 받습니다.
우리가 쓸모없는 존재일지라도, 허물많은 존재일지라도 내 등에 주님만 태운다면, 주님께서 쓰시게 한다면 여러분의 생은 기적적인 영광으로 화할 것입니다. 내 허물까지도 주님께서 쓰시도록 그 위에 태우십시오. 내 허물, 내 죄악을 나 혼자 가지면 망합니다. 그러나 그 허물까지도 주님이 타시면 그 허물을 들어서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윗은 살인자요, 간음한 자요, 악한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물 위에 주님이 타게 하실 때 주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드디어 그는 주님께서 죄사함의 의를 베푸시는 우리의 왕으로 오실 것을 계시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초라한 존재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입을 쓰시고자 할 때 입을 열고 복음을 외치십시오. 내 손을 들어서 쓰시고자 원할 때 내 손을 들어서 섬김으로 일하십시오. 내 발을 필요로 할 때 복음 들고 평화의 사도로 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높은 자를 쓰시기도 하시지만 보잘 것 없는 새끼 나귀같은 존재도 들어서 타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한 때 설레이는 꿈들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깨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요단강 계곡에 아름드리 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산들바람 부는 어느날 세 나무가 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나무가 "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들보나 기둥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어야지" 라고 말했습니다. 두번째 나무가 "나는 지중해 유람선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즐기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나무는 "나는 큰 나무가 되어 가지를 뻗어 수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를 때 내 그늘 아래 쉬어가며 나를 쳐다볼 때마다 하늘을 보게 해야지" 하고 자랑스럽게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날 목수가 와서 도끼로 큰 나무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자 했던 나무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가서 짐승의 밥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 그 위에 누웠습니다. 두번째로 큰 유람선이 되려고 했던 나무는 작은 돛단배가 되어 갈릴리 바닷가에서 생선 비린내나는 베드로의 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그 배에 타시고 수천명의 무리들에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세번째로 수많은 사람들의 그늘이 되고 하늘을 쳐다보게 만든다고 했던 나무는 조각 조각 잘라져 십자가가 되어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저들의 꿈은 다 깨어졌지만 결국은 깨어진 꿈속에서 다시 주님의 쓰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큰 꿈을 이루지 못하고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라도 예수님을 모신 구유처럼, 예수님이 타신 돛단배처럼, 예수님이 못박힌 십자가처럼 주님을 위해 쓰임받는다면 영원히 가치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큰 인물이 되리라, 큰 기업가가 되리라, 세상에서 큰 명성을 날리는 학자가 되리라' 했으나 그 꿈이 다 산산조각 되고 깨졌을지라도 그 위에 주님께서 타실 수 있다고 한다면 아기 예수를 모신 구유처럼, 주님께서 타시고 설교하신 돛단배처럼,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처럼 역사의 종말이 올 때까지 하늘가는 밝은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존재를 낙심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크게 쓰임받지 못했다고 탄식하지 말고 우러러 자기 존재를 주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면 하늘도, 땅도 소동하는 진동이 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소동했다'는 말은 지진이 일어나듯 천지가 진동했다는 말입니다.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초라한 존재지만 주님을 태우고 천국으로 입성할 때 천군, 천사, 하늘이 진동하는 그 날을 상상하십시오. 영광스러운 그 날을 그리워하십시오.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는 날 천국에 소동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나는 나귀 새끼같은 존재일지라도 나의 가진 재능, 재산, 시간, 이 몸으로 주님을 모시고 입성할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한 그 일로 대 환영하는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등에 태우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소동해야 됩니다. 직장이 소동해야 됩니다. 마을이 소동해야 됩니다.
주님이 쓰시려면 매어있는 나귀를 풀어서 예수께로 끌고와야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2절)
주님께서 타시기 원하셔서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매인 나귀를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와야 합니다. 매인 나귀는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할 나귀입니다. 주인에게 매여서 주인을 위해 일하고 팔리는 나귀입니다. 이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풀어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세상 죄악에 매여 있습니다. 세상 마귀에 매여 있습니다. 이 결박을 풀고 오라 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해도 우리가 전혀 쓰임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주께로 못가도록 무엇인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풀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푸십시오. 무슨 줄로 매여 있습니까 어디에 결박되어 있습니까 풀어놓으십시오. 예배를 방해하는 것, 기도 못하게 하는 것, 전도를 못하게 하는 것을 푸십시오. 그래서 주님께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