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42
4월29일[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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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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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DJXjNwC3D8
[예수회 김정현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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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던 카타리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는 당시 대부분 여성처럼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도미니코회 재속회 회원으로서 탁월한 영적 생활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타리나의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 빛나는 수덕 생활, 사심 없는 이웃 사랑의 실천은 즉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성덕의 찬란한 빛을 발견하고 큰 존경과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살아있을 때 성인 소리 듣는 사람이 결국 성인이 되는가 봅니다. 살아있을 때, 쌩 양아치처럼 살던 사람이 죽기 일보 직전에 크게 회개를 해서 성인이 되는 경우는 벼락 맞기보다 힘든 일일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성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성인의 길을 걸어야 함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카타리나가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을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불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짧은 생애 동안 보여준 삶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덕은 나이나 연륜과 비례하는 것도 아님을 그녀는 잘 보여준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단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매일을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만났으며, 사랑으로 주님과 일치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벌거벗음을 덮어주는 의복입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이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하신 삼위일체이시여!”
깊은 묵상과 관상 기도 중에 주님을 만나 뵙고 난 카타리나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시자 두근거리던 제 가슴이 진정되었습니다. 저도 그분을 향해 방긋 웃었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자 제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길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카타리나가 봉사하러 다니던 성 라자로 병원에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괴팍한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테카였습니다. 그녀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였습니다. 언제나 불평불만이 한가득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의사나 간호사에게 대들었습니다. 강제 퇴원당한 그녀는 거리를 헤매다녔는데, 다니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카타리나가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테카는 카타리나를 저주하면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를 할퀴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방문하여 위로해주었고, 상처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친절의 결과는 늘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쩐 일이야? 성당에 앉아 계시기가 지루했던가 보지? 나를 준답시고 맛있는 과일 케이크를 받아서는 남몰래 다 먹어 치웠군? 내 말이 틀림없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느 날 드디어 테카가 카타리아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직접 어루만져주던 카타리나의 손에 나병 징후가 생긴 것을 본 것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카타리나, 나 때문에 당신께서 나와 똑같은 몹쓸 병에 걸렸군요. 날 간호하다가 이렇게 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카타리나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더 큰 상을 주시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병에 걸리게 하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테카의 장례식이 끝난 후, 주님께서는 카타리나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있는 주님이신 가난한 이웃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카타리나에게 주님께서는 오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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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HqlAVR6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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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준 계명을 실천하면 반드시 그에게 칭찬받게 되어 있습니다. 칭찬은 영광과 비슷한 말입니다. 칭찬을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어른 보면 무조건 인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무조건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가 인사를 너무 잘하고 다닌다고 다른 어른들에게 칭찬받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칭찬해 주셨고 우리는 이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칭찬은 사실 선생을 지속시키는 힘입니다. 어느 정도는 칭찬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팩 초프라도 두 아들에게 모든 것은 아버지가 책임질 테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녀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두 아들 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아버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훌륭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이 영광으로 그들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시켰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해오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자기 낙타들과 자신에게 선행을 할 줄 아는 레베카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각종 폐물과 옷을 주었습니다. 이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이미 선행을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으로 레베카는 이웃에게 선행을 더욱 잘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선행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에게 주어지는 칭찬, 영광, 성령의 은총은 내가 지금 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이신데, 사랑의 말씀은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에 축일 잔치를 본당에서 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날입니다. 도망을 치고 싶지만, 신자들이 아쉬워할까 봐 어쩔 수 없이 국수 잔치하였습니다. 신자들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받는 영광은 정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왜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광이 감당하기 어려워 숨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광이지만, 자기 양심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늘 나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영광은 나 자신이 합당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너무 두렵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 부담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신자들에게 사비로 국수를 대접해 드렸습니다.
물론 신자분들이 축하한다고 주시는 축하금이 그 비용보다 많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본당에서는 저의 어머니와 제가 아는 지인들을 초대하여 같이 식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국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할 수 있다면 이 부담감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잔치는 잘 끝났습니다.
이것을 하는 중에 지금의 상황이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상황과 똑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먼저 에사우가 부담스러워 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되지 않아서 자기 가족들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되니 기도하였습니다. 겸손해진 마음으로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 절하며 에사우를 하느님처럼 경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자들에게 힘줄이 끊어진 장단지를 가진 야곱처럼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조금 받아들일 만했습니다.
이것이 왜 주님께서 당신 앞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지가 이해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라도 하느님 나라 영광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분 앞에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면 저는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것이 확실히 이해되었습니다.
성령의 영광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꼭 선행을 하고 영광을 받아봅시다. 그러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될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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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파티마 성모발현 성지에 처음 간 것은 1996년입니다. 그 뒤로 2005년에도 갔었고, 2012년에도 갔었습니다. 2017년에도 갔었고, 이번 2024년에 갔으니 5번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예전에는 미사를 봉헌하고, 성당에서 기도했는데, 이번에는 안내하는 분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습니다. 파티마 성지의 광장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동상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파티마 성지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교황님은 1981년 5월 13일, 한 청년에 의해서 총격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64년 전, 파티마의 성모 발현이 있었던 날입니다. 교황님은 1년간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감옥에 있던 저격범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격범을 용서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파티마 발현의 목격 증인인 루시아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교황님의 저격은 성모님이 루시아에게 알려 주었던 비밀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교황님은 몸에 박혀있던 총알을 성모님의 화관에 봉헌했다고 합니다.
교황님은 파티마의 성모님이 바란 것은 ‘회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황님은 전 세계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서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야기된 분열, 진리의 이름으로 행한 폭력,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은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평화의 사도가 되어서 160개가 넘는 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1989년 독일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해체되었습니다. 반세기 넘게 갈등과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냉전’이 비로소 막이 내렸습니다. 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과 묵주기도 행렬을 하였습니다. 개인의 평화, 가정의 평화, 본당 공동체의 평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들이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다시 가동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남과 북의 철도가 연결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규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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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아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작용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만 보았던 진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과 지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나와 아버지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의 마음에 오시어 그 안에 사신다. 이 말씀은 그분이 당신 친구라고 부르신 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말씀을 하신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드님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다. 외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는 위에서 오는 빛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의 권위를 따르게 되었다. 즉,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은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지혜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사랑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과 함께 온전히 깨닫게 되며 아들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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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복음서의 특정 문구 “나는 -이다.”가 등장합니다. 좀 특별한 점은 “너희는 -이다.”라는 문장도 함께 등장하여 ‘나’와 ‘너희’의 ‘상보성’이 강조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이후 ‘당신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제자들에게 “너희가” 앞으로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당부의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이 표현은 ‘열매를 맺다.’라는 표현과 함께 연결되어 ‘머무름’의 결과가 ‘열매 맺음’이라는 것까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독서의 본문들 또한 주님 안에 머물러서 맺게 된 열매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불신을 감수하여야 하였던 바오로는 예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그러한 의혹과 소외의 상황을 이겨 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고”, “교회는 …… 굳건히 세워지고, …… 그 수가 늘어나게” 되는 찬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수도자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기에 늘 제 마음에 담고 있던 물음입니다. 주관적 판단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일차적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머문다는 것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곧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일단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확신이 들지 않고, 하느님께 버려진 듯하며, 잔인하게 느껴지는 도전들이 연이어 다가온다 하여도, 그분을 떠나거나 공동체(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머물기’가 아닐까 합니다. 붙어 있는 가지는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그 때와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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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1-26)
1)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라는 질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안 나타나셨을까?”라는 초대교회의 의문이 반영된 질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면 선교 효과가 대단히 컸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으니(루카 24,37), 안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모두 달아났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라는 21절의 말씀과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2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다시 정리하면, “나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만 나를 알아보게 된다.”, 즉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데 믿는 사람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나를 알아본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다음에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을 ‘믿음’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의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을 믿음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됩니다.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2)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믿으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전부 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가? 실제 현실을 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또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이 말을 다시 ‘사랑’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라고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는 말씀을,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고, “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여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에 적용하면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라는 말씀을, “너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고,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너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전부 다 바치는 것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여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칩니다. 만일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다 바친다면, 그것은 그냥 위선일 뿐입니다. 다 바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사랑을 믿음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만일에 믿지 않으면서도 다 바친다면? 안 믿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뭔가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믿음이든지 사랑이든지 간에,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과 순수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지는 바로 ‘정성’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온갖 정성을 다하는 생활, 목숨을 걸고 하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기도나 전례나 봉사활동 등을 그냥 대충대충 한다면, 그것은 믿음도 사랑도 많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취미생활 하듯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 흔히 그렇게 정성도, 간절함도 없는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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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송제호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계명 실천으로>
부활 5주를 맞이하는 교회는 부활축제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움과 절망의 끝에 서서 모든 희망을 포기하려 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산을 넘어서야 하는 단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의 전부이신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절망감이 찾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제촉 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심지어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할 순간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가질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당신과 성령께서 늘 함께 하여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선포된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 고별 담론을 통해 성령의 보내심과 주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만이 그 제자 됨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일치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힘이 된다고 하십니다.(15절)
즉 예수님의 계명은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천, 제자들이 체험한 사랑의 실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계명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겹고 마치 멍에처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마치 계명의 실천이 나의 자유와 의지를 구속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변명을 준비해두고 일탈의 삶에서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늘 소극적으로 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더 크고 완전한 자유의 삶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을 통한 진정한 친교는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고 축복되게 합니다.
사랑을 살지 않는 이에게는 계명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멍에이지만, 사랑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라면 계명은 너무나도 가볍고 편한 멍에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선포함에 조금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필립보는 낮선 사마리아지방으로 달려가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복음을 선포함에서 더 큰 기쁨을 알게 하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1독서)
우리는 생명에로 초대받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증거만이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은 늘 우리의 사랑 고백보다 먼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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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사랑과 계명은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떠올려 봅니다. 자신은 아파도 상대가 건강하기를, 자신은 슬퍼도 상대가 웃기를 바라는 일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하여 더 움직이고, 더 살피고, 더 챙기게 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고, 사랑은 그렇게 애틋한 습관으로 서로에게 남습니다.
계명은 지켜야 할 의무 규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일구어진 습관입니다. 거창한 이벤트를 준비해서 사랑을 일구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습관적 체험 안에서 사랑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노력을 통한 자기 계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연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냅니다.
삶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계명을 지키는 일이 됩니다. 주위 환경이 달라도, 서로의 관점과 사상이 엇갈려도, 어쨌든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모두들 마음 편히 살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고 그 터가 때로는 우리 집일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참 외로운 일이지요. 참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1세기 말엽, 기다리던 메시아께서는 오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증언하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죽어 가고, 의지할 데 없어 헤매는 신앙인이 나약해졌을 때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님과, 어쨌든 살아 낼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으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오로지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히 들려주시는 역할을 도맡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쨌든 살아 내기’였습니다. 어쨌든 오늘 하루 살아 내었으면 그만큼 사랑한 것이고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참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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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흔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이를 답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이가 아니라, 설령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넘어 그를(그의 인격을) 받아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 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인 그 말을 지키는 이, 곧 실행하는 이가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버리고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곧 그를 믿고 신뢰하고 마음으로 결속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는 말씀은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곧 내적 일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전제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저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울 것입니다. 설령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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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주님!
말씀이 되어 오소서. 살아있는 쌍날칼로 오소서.
함께 살며, 저의 살과 뼈를 가르고, 생각과 속셈을 가르소서.
진정 당신께서는 제 안에 계시고 제 곁에 머무시고 저와 함께 사시오니
제가 말씀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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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는(14,23.24)
여러분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 살아오면서 참으로 자신이 신뢰하고, 비록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가슴에 새기며 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엄마를 그렇게 사랑했고 그래서 어머니께서 임종 전에 하셨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그 말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를 부탁해!” 어쩌면 당신 떠나시고 난 뒤 홀로 남으실 아버지가 제 형제자매들과 힘들고 불편하실 것을 아셨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저에게 잘 보살펴 주길 부탁하셨지요. 물론 엄마 곁에서 마지막 임종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특별히 저에게, “신부를 믿어!”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되돌아보면 아버지께 죄송하지만, 전 아버지를 잘 모시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 보다는 어쩌면 엄마를 더 사랑했기에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었습니다. 엄마를 사랑했기에 엄마의 마지막 유언을 사랑으로 마음에 새기며 아버지 돌아가신 날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십니다. 분명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말을 지킬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신 것은 사랑에 있어서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편애나 차별이라기보다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자 다짐에 차이가 드러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와 제 형제들의 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온도가 달랐다고 봅니다. 배우자와 자식이 없는 저에게는 어머니는 제 사랑의 전부였기에 ‘엄마의 말’을 지키려고 하는 내외적 강도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형제들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에 견주어 봐도 인간관계(=부모와 자식, 형제들 간의 우애)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사랑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루7, 47) 저는 분명 예수님의 말씀처럼 다른 형제들보다, 저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신 후 어머니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 라는 표현에서 ‘지키다.’는 말의 뜻은 규정, 법, 예의 따위를 어기지 않으려고 그대로 실행한다, 고 사전은 풀어 났더라고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키다.’는 의미는 단지 지켜야 할 계명 준수나 이행의 강제성보다 사랑에 대한 자연스런 내적 동의요 응답으로써 늘 마음에 새기며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랑하면 어찌 사랑하는 분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원의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 말씀을 실천할 때 초래하는 많은 어렵고 힘듦이 수반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모든 것을 말하고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제 엄마가 남기신 유언을 명심하고 저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런 저를 제 엄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이해하고 또 제가 이해한 대로 살려고 합니다. 사랑받은 만큼 깨닫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리라, 는 점입니다. 마치 제 엄마가 당신의 당부를 제대로 온전히 실천하지 않은 제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이상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알고 계시기에 당신의 말씀을 지키며 살면서, 깨달아 실천해 주시기를 바라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요가 아닌 사랑의 당부요 바램으로써, 왜냐하면 어떤 형제들은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았음에도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지금도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나 어머님의 사랑이 부족하기보다 인간의 한계이요 욕심인가 봅니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결국은 짧은 인생살이에서 스스로 행복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혹은 제 경우처럼 엄마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이 더 자유로워졌고 행복했으니까요. 하느님을 위한다고 지나치게 떠들거나 나팔을 불지 마세요. 다 우리 잘되라고 하신 말씀이니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결국 삶이 불행하고 자신을 어렵고 힘들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시렵니까? 저는 제 경험으로 깨달은 바는 모든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저를 힘들게 한 게 아니라 저의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온도가 미약할 때 힘들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코니온에선 배척과 냉대를 겪습니다. 그런데 리스트라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사14,8.10) 하고 큰 소리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이는 바오로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느님의 활동이며 아울러 그리스도께 대한 그 앉은뱅이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군중이 그들을 마치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내려오셨다.”(14,11) 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교주처럼 받들어 모시며 칭송하려 합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선포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 영광을 독차지하고 자신에 대한 업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두 사도는 자신들의 옷을 찢고,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14,15)라고, 말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칭송과 영광을 거부합니다. 모름지기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보다 자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신 것처럼 복음 선포자들 역시 자신들의 영광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들을 파견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이 먼저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시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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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방에 강의 갔다가 강의를 거의 마칠 때, 청중에게 “저, 어때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청중 중 몇몇이 “멋져요. 좋아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사랑해요.”라고 크게 외치시기도 했습니다.
“저, 어때요?”라고 질문을 던진 이유는 저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저의 부족한 강의를 듣는 청중이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이상을 강의하는데 온전히 제게 집중해 주시는 모습, 그 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 어때요?”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멋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멋짐이 드러나는 곳은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사로 이 자리에 있어서 ‘멋지다’라는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만취해서 비틀거리며 이 자리에 서 있다면 ‘멋지다’라는 말보다는 ‘흉하다’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있기에 멋집니다. 그 멋짐이 너무 좋아 보여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 계속 멋질 수 있도록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물든 곳은 멋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학교에서, 그밖에 삶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멋집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멋짐을 흉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곳으로,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만든다면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가장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소홀하게 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모습이 과연 멋져 보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날수록 더 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더 멋지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멋지게 하시려고 계속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멋진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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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하면 사랑이 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2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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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사랑해요>
요한 14,21-26 (성령을 약속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우리 사랑해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리
사랑을
사랑하도록
사랑해요
우리
사랑에게
사랑받도록
사랑해요
우리
사랑처럼
사랑이도록
사랑해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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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다-
“주님, 저희에게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옵니다.”(시편115,1)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이 신선하고 유익하여 우선 소개합니다. 주님 중심의 겸손한 삶일 때 이런 경지일 것입니다.
“본질에 가까워진 단순함 속에는 무수한 복잡함이 담겨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모든 과잉을 제거한 것이다.”<다산>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다.”<채근담>
오늘은 그 유명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 기념일입니다. '순수함'을 뜻하는 이탈리아 이름 가타리나 성녀하면 두 분이 떠오릅니다. 형제들의 축일 때마다 LA갈비를 선물하는 신림동의 가타리나 자매와, 형제들의 축일 때마다 축하 케이크를 선물하는 춘천의 가타리나 교수입니다. 두 분 다 우리 수사님들이 고맙게 기억하는 참 순수한 사랑의 봉사로 유명한 성녀같은 자매들입니다. 특별히 가타리나 축일을 맞이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성인 축일때 마다 꼭 확인하는 생몰연대입니다. 중세의 신비가 성녀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1347년에 태어나 1380년 선종했으니, 예수님과 똑같은 33년을 사셨으며 저는 성녀보다 배를 훨씬 넘어 살고 있습니다. 성녀의 33년 생애, 정말 불꽃같은 참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서사로 가득한 삶이요 스토리와 컨테츠가 참 풍부한 삶이기에 삶의 요약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후대의 평가를 통해 얼마나 성녀의 삶의 위대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 자녀중 막내딸로 태어난 성녀는 이미 6세때 예수님으로부터 축성을 받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성녀는 도미니코회 제3회 소속으로 세속의 삶의 자리에서 온갖 교회활동에 전념합니다. 선종하기 3년전 1375년 미사를 드리던 중 오상의 은총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네게 지식과 웅변의 은혜를 준다. 여러나라를 다니며 여러 지도자들에게 나의 소망을 전하여라.”
성녀는 각나라의 국왕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찾아, 당시 심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던 서유럽국가들간에 평화를 도모했으며, 프랑스에 머물던 교황을 로마로 돌아오도록 하였고, 사치와 향락에 떨어진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회개시켜 교회의 쇄신을 이뤄냅니다. 이 무렵 성녀는 예수님과 신비의 결혼식을 했다고 회고하며 예수님 말씀을 소개합니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나만을 찬미하기 위하여 너는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과 욕망을 억제했으므로, 나는 지금 너를 약혼자로 맞이하여 신앙 안에서 신부로 삼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신앙의 갑옷을 입고 모든 적과 맞서 이길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이어온 엄격한 금욕생활과 끊임없는 희생 끝에 쇠약해진 성녀는 33세 나이로 “성혈, 성혈, 성혈” 중얼거리다가 선종하며, 성녀의 33년 전 생애는 영적승리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대화>라는 책외에도 400여통의 서한을 남겼습니다. 1461년 교황 비오 2세가 가타리나를 시성하였고,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이어 1970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성녀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며,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치릴로, 성 메토디오, 성 베네딕도,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타,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와 함께 성녀 가타리나를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교회가 성녀의 업적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성녀가 즐겨 바친 성령께 바친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중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얼마나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에 삶에 항구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새삼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늘 사랑을 새롭게 강화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도 우리 삶의 중심을 새롭게 강화할 것을 촉구합니다. 한결같이 당신을 향한 사랑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참으로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분의 계명과 말씀을 항구히 지킬 때 주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그리스의 리스트라에서 선교하는,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어 우상숭배의 무지한 리스트라 사람들은 두 사도의 기적을 목격하고 신으로 모시려 합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두 사도의 열화와 같은 설교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확연히 구분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들과 삶의 중심이 없는, 우상숭배의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들로 구분되니 오늘날도 여전히 엄연한 인간현실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강조했다시피,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살아야 참으로 살아있는, 참으로 행복한 삶임을 널리 알리는 것이 복음선포의 핵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들이 이의 빛나는 모범이요 주변에서도 이런 성덕의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해 주면서,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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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영어에 비슷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Receive와 Accept입니다. 비록 제 영어 실력이 보잘것없지만 제 생각에 Receive는 그저 받는다는 뜻인 데 비해 Accept는 받아들인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말에서도 ‘받다’와 ‘받아들이다’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지 않습니까? 받는다는 뜻은 누가 보내기에 그저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받는 사람의 능동성이나 주도성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내서 받았지만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내게 달렸습니다. 받았지만 얼마든지 안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편지를 받았지만 수취인 거부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도 주님의 계명을 다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안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은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비신앙인은 안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받아들이되 억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열심하지 않은 신앙인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계명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열심한 신앙인이지요.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나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거절당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에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곧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의 뜻도 이런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아들이면 하느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다 받는데 어떤 인간은 줘도 안 받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참 한심한 인간이지요.
하느님 사랑은 안 받고, 인간의 상처는 다 받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인간의 명령은 무서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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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성령!>
오늘 복음(요한14,21-26)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호자, 곧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보호자,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제3위격이시며, 하느님과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보호자,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답입니다. 성령은 요란한 성령세미나나 성령기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 안에 온전하게 머물 때 주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시며 교회 학자로 선포되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는 그런 방법으로 성령의 충만함 안에 머물러 계셨던 분입니다. 카타리나 성녀의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 성모의 노래 후렴은 성령의 충만함 속에 있었던 성녀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녀 카타리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찾았고 만났으며, 사랑의 합일로써 주님과 일치되었도다. 알렐루야."
주님부활대축일 이후 매일 독서로 듣고 있는 말씀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어떻게 사도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와 또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도들은 보호자, 성령을 받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으며,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온전히 뒤따라갔습니다.
오늘도 답이신 보호자 성령을 받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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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F-PzKTYh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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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언제나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임은
하느님
사랑의
실천입니다.
싱싱하고
생생한
생명력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과 지혜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생활로
사랑을
공동체로
구현하고
전개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의 목적입니다.
생활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과 수도는
참다운 수도라
할 수 없습니다.
아프고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보다 뜻 깊고
소중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의견과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진정한
소통이며
교감입니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는 말씀과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말씀과 마음이
참된 개혁입니다.
말씀을 통한
의식의
개혁이야말로
모든 개혁의
조건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할
생활이며
만남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마음과 생활을
만나는 뜻깊은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이 마음이고
마음이 가르침이고
가르침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복음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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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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