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희 시인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문학동네, 2018.
1968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남.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불태운 시집, 오리막, 오리발에 불났다(동시집), 지렁이 일기예보(동시집), 뒤로 가는 개미(동시집), 손바닥 동시(동시집)
<시인의 말>
삶이 자꾸 나를 속이려 들거나
혹은 시가 삶을 속이려 들 때마다
나는 우두커니 먼 데를 바라본다.
먼 데가 와서 나를 태우고
끝없이 날갯짓하여
부디 날 서럽지 않게
어디론가 더 멀리 데려가주기를
그 먼 데는 그렇다면 새이어야겠다.
먼 데가 먼 데로 하나로 딱 붙어
사랑의 지극한 말씀이어야겠다.
하여 부질없고 헛되이 나는
별들의 반짝임이 실은 아프디
아픈 별의 속엣생피라고
그대 앞에 그제야 겨우
귀엣말할 수 있으리.
돌 / 유강희
아직 던져지지 않은 돌
아직 부서지지 않은 돌
아직 정을 맞지 않은 돌
아직 푸른 이끼를 천사의 옷처럼 두르고 있는 돌
아직 말하여지지 않은 돌
아직 침묵을 수업중인 돌
아직 이슬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돌
그리고 잠시 손에 쥐었다 내려놓은 돌
아직 조금 빛을 품고 있는 돌
하늘을 걷는 사람
- 봄비
유강희
그끄저께 내린 봄비는
죽다 다시 살아난 영감의 이야기
하지만 한 무더기 찔레꽃에는
입이 커다란 가죽가방이 없다
구름에게 들킨 사소한 첫사랑의 흉터가
산맥처럼 그의 몸속을 흘러다닐 뿐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다시
돌호수에서 돌수련으로 환생하고
까치 혼롓날을 알려줄 꿀벌은
언제쯤 바람의 페달을 밟고 날아오나
네가 오고 있는 곳으로 눈썹만큼씩만
밀고 가는 나의 힘겨운 가엾은 쪽배
사슴반 / 유강희
사슴반에 갔다
사슴반은 시골에 있다
고향 가까운 고향에 있다
사슴반 선생님이
뿔을 흔들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왔다
“나도 사슴반에
끼워주세요?“
사슴반을 몰랐던 나는
참나무숲 안경을 쓴
선생님에게 말했다
‘근데 난 사슴반을
어떻게 알았을까?’
냄새나는 가방에서
청록의 칼을 든
이순신 동상을 꺼냈다
“사슴반이 되려면
먼저 사슴이 돼야 해!“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선생님은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가시덤불과 큰 바위와
긴 굴을 마침내 통과해
난 사슴반 교실 앞에 섰다
그러나 문 안은 너무
고요하고 고요한 세계여서
난 그냥 밖에 울며 서 있었다
식탁 위를 달리는 말 / 유강희
이 어둡고 침침한 부엌에도
둥근 식탁이 하늘에서
내려왔네
어머니 왈,
달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하늘은
오늘 저녁부터 어디서 밥을 먹남
바보 아들 왈,
식구도 많지 않은걸
이왕이면 하늘도 함께 불려
밥 먹으면 좋지 않을까나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 걸)
어머니 왈,
그럼 그러자꾸나
근데 하늘이 하늘을 놔두고
내려와 우리랑 밥 먹을라나 몰라
바보 아들 왈,
하늘은 할 일도 많은데
밥 안 먹고 무슨 힘으로 버텨요
(참, 걱정도 팔자라더니 끌끌 쯧쯧)
달랑 두 식구인
귀가 잘 안들리는 어머니와
그 바보 아들은 그날 저녁 늦도록
먼지 묻은 달의 모서리를 털고 닦느라
둘 다 깜박 저녁 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나는 산불감시초소를 작업실로 쓰고 싶다 / 유강희
어떤 작가는 성당을 작업실로 썼다지만
나는 산불감시초소를 작업실로 쓰고 싶다
긴 철제 사다리가 마치 천국으로 가는
계단처럼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그러나 결코 천국에 가지 위한 것은 아님)
그리고 작은 창이 달려 있고
녹색 양철 지붕이 있는 집,
이 산불감시초소에서 한 계절을 나고 싶다
나는 매일매일을 뜬눈으로 지샐 것이며
밤에는 모르는 별의 문자를 해독하고
잠 못 드는 새의 울음소리를 채집하여
나의 자서전에 인용할 것이다
(그건 아직 먼 후의 일이지만)
그리고 나는 먼 구름을 애인으로 둔
늙은 바위로부터 겨우겨우 모은 전설을
바람의 피륙에 한 땀 한 땀 기록하리라
나는 또 사라진 짐승들의 발자국을 쫓아
하루종일 숲속을 헤맬 것이다
나의 관심은 그러나 그것들에 있지 않다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의 불타오르는 내면을
나의 열렬한 정부로 삼고 싶을 뿐,
멀리 도시의 불빛도 잠재우고
나는 홀로 외롭게 마음속 산적을 불러
그들과 함께 녹슨 칼을 푸른 숫돌에 갈며
절망이 타고 가는 말의 급소를 노릴 것이다
마침내 나는 산불을 지르고 도망칠 것이다
비겁의 검은 숲을 모조리 불태울 것이다
아직 펄펄 숨쉬는 짐승들의 시간을 불러올 것이다
비명, 비명, 비명의 바윗돌을 구르게 할 것이다
나는 미친 듯 길길이 산비탈을 뛰어내려오며
결국 아무것도 태울 수 없는 빈산이 내 안에 있음을
숨죽여 몸서리칠 것이다
일요일에 어머니는 아무데도 안 가고 / 유강희
일요일 오전 어머니는
쇠절구를 끌안고
마늘을 찧는다
두개골을 찧는다
늙은 화장장이는
타고 남은 시체 더미 속에서
장물애비에게 팔아넘길
치금(齒金)을 긁어모은다
일요일 오전 어머니는
쇠절구를 붙들고
희고 깨끗한 마늘을 찧는다
희고 깨끗한 두개골을 찧는다
늙은 화장장이는
타고 남은 시체 더미 속에서
장물애비에게 팔아넘길
치금을 찾다 혀가 잘린다
어머니 두개골이 웃는다
봄의 기억 / 유강희
우연히 어느 식당의 뒤꼍에서
남자 혼자 벌겋고 희끄무레한 돼지 내장을
소금과 밀가루로 빨래처럼 벅벅 치대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가 쭈그려앉아서 하는 그 무심의 자세를
한낮의 정사처럼 나에게 들킨 남자는
그러나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를 한 번
힐끗 뒤돌아보았을 뿐이었다
내가 그 순간 한 그루 꽃나무였다면
우르르 단박에 시들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꽃도 그림자도 아닌
무일푼의 사내, 남자의 등을 큰 돌로 눌러놓고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몇 십 년이 지나 가까스로 맞이한 봄,
정육점 앞 모르는 남자가 핏물이 든 통을
하수구 위에 쿨럭쿨럭 엎지르며
날 빤히 쳐다본다
생일 / 유강희
엄마,
너무 큰 세숫대야는
얼굴을 달아나게 해요
내 생일날 아침엔
내 얼굴에 알맞은
세숫대야를 주세요
(떡과 미역국 대신
먼 나라에서 온)
키 큰 숲과 잘 익은 달을
검은 사슴을 부어주세요
목련 / 유강희
자넨, 누굴 그렇게 기다리고
있나
누구에게 한 방 먹이려고, 허나
눈뭉치를 감추려면
몸 뒤에 감춰야지
오호, 근데 이제 보니
자넨 뒤가 없군
툭 트였군
현대시 / 유강희
감정은 표절할 수 없다
쌍무지개의 고통이
기형아를 낳았다
돌이 돌과 붙어먹고
돌이 돌과 붙어먹고
돌이 장례식장을 낳고
구름이 구름과 붙어먹고
구름이 쇼핑몰을 낳고
바람이 바람과 붙어먹고
바람이 무인모텔을 낳고
물이 물과 붙어먹고
물이 스마트폰을 낳고
원조가 원조와 붙어먹고
원조가 돼지머리를 낳고
벌건 대낮에 울려퍼지는
오, 끔찍한 우주 대교향곡!
돌 / 유강희
돌의 팔은
얼마나 굵은가
바닥에
저를
내려놓기 위해
https://naver.me/xbAuQvcJ
아직 던져지지 않은 돌
아직 부서지지 않은 돌
아직 정을 맞지 않은 돌
아직 푸른 이끼를 천사의 옷처럼 두르고 있는 돌
아직 말하여지지 않은 돌
아직 침묵을 수업중인 돌
아직 이슬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돌
그리고 잠시 손에 쥐었다 내려놓은 돌
아직 조금 빛을 품고 있는 돌
―「돌」 전문
시집의 문을 여는 시 「돌」의 방점은 일곱 번 반복되는 ‘아직’과 한 번의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아직’에 찍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저절로 된 그대로의 현상’이라는 ‘자연’의 사전적 정의를 일곱 번의 ‘아직’ 속에 시인은 그렸다.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태로서의 ‘돌’. 그것을 바라보던 화자는 그 돌을 ‘잠시 손에 쥐었다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돌에서 ‘빛’을 발견하는 것. 이는 이 시집 전체의 방향과 대상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고봉준의 진단처럼, 유강희 시인에게 시적 순간은 “‘빛’을 통해 도래한다. 물론 여기서의 ‘빛’은 광학적(optical) 현상과 무관하게 사물-대상에서 “제 몸안에 오래 가두어두었던”(「기러기의 최후」) 어떤 것이 흘러나오는 존재의 ‘발음’이다. (…) ‘빛=시’가 ‘문명’보다는 그것에 대한 성찰로서의 ‘자연’에 가깝다는 시론(詩論)으로 읽을 수도 있다”. 상기한 서시에서처럼 무심코 집었다가 내려놓은 돌에서 빛을 발견할 때, 가을 아침 나무 아래에서 발견된 매미 사체에서 빛을 발견할 때(「매미의 임종」), 개의 날카로운 이빨에 목덜미를 물려 죽어가는 기러기의 눈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할 때(「기러기의 최후」), 겨울 산골짜기에서 잣 한 송이와 돌 한 개를 발견하고 마음이 반짝거림을 느낄 때(「잣과 돌」), 늦은 밤 시창작 교실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빛이 느껴질 때(「밤의 시창작 교실」), 그리고 밤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빛나는 밤의 종교”(「아버지가 깎은 건 밤이 아니야」)를 발견할 때.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들이 시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며, 인간 삶의 생래적 비애를 넘어서는 ‘먼 데’로 우리를 잠시 데려간다.
돌의 팔은
얼마나 굵은가
바닥에
저를
내려놓기 위해
―「돌」 전문
잠시 쥐었다 내려놓았다던 그 돌은 사실 화자가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던 걸까. 시집의 첫머리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배치된 시의 제목 역시 「돌」이다. 결국 유강희 시인의 지난 13년은, 돌 하나를 화자가 쥐었다 내려놓았다는 것에서, 돌 스스로 저를 내려놓았다는 깨달음으로 갈무리되는 것일지 모른다. 이렇듯 욕심 없고 사심 없이 써내려간 시들, 그 뭉근함이 시린 겨울을 맞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된 그대로의 현상’과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따스하게 섞일 수 있는 서정성을 선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