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양왕(1345~1394. 재위 1389~1392)은 제20대 신종의 7세손이었다. 이성계가 정몽주와 손을 잡고
우왕과 창왕을 폐위한 뒤 공양왕을 옹립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4세의 노년이었다. 이성계는 우
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폐위했는데, 당시에도 이성계의 측근들이 악의적으로 꾸며서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공양왕은 그때까지 왕요(王瑤)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꿈에서조차
왕위를 바란 적이 없었고, 보위라는 게 그다지 영광스러운 자리도 아니었다. 나라는 이미 이성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이성계는 후환을 근절하기 위해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살해했다. 이성계는 두 임금을 죽인 사실을 축
하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아홉 명이 공신첩지를 나눠 가진 뒤,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모든 분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뜯어고쳤다. 6부로 되어 있던 원나라 관제도 명나라 관제를 본떠서 이‧호‧예‧
병‧형‧공 6조로 개칭했다. 이로써 고려의 기득권층은 완전히 몰락했다. 개경과 지방에 공교육기관을
설치했으며, 억불숭유 정책을 확고히 했다. 모든 절의 재산을 몰수하고 중들을 군인으로 전환시킴으
로써 불교 말살정책이 절정에 이르렀다.

과전법을 시행하기 위해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던 모든 땅문서를 빼앗아다 소각했다.
경제정책의 핵심은 과전법(科田法) 실시였다. 과전법이란 직급에 따라 전‧현직 관리들에게 토지를 차
등 지급하는 제도였는데, 대소신료들은 비로소 안정된 생계유지가 보장된다는 기대에 전폭적으로 지
지했다. 한양의 서강에는 광흥창과 풍저창을, 개경의 5부에는 의창을 설치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
식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제도였지만, 그때까지 고
려에는 공창(公倉) 제도가 없었다. 1390년에는 도참설에 따라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1년 만에 개경으로 돌아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남은‧정도전‧조준 등 이성계의 최측근 급진세력은 이성계를 옹립하기 위해 각개격파로 중신들을 설
득하기 시작했고, 같은 개혁파로되 온건한 정몽주‧이색‧이숭인‧이종학 등은 이성계 일파의 왕위 찬탈
계획에 극구 반대했다. 양쪽 정적들은 서로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낙마로 중상을 입고 운신을 못하자 온건파는 강경파인 이성계의 측근들을 탄
핵하여 모조리 유배형에 처했다. 이성계의 최대 위기였다. 이에 이방원은 수하들을 시켜 조선 건국에
최대 걸림돌인 정몽주를 살해하게 된다.

1392년 4월 4일, 이성계가 중태라는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동태를 살피기 위해 문병을 핑계 삼아 이
성계의 저택을 방문했다. 첩보와 달리 이성계는 경상이었고, 그것으로 자신도 고려도 끝이라는 직감
이 들었다. 정몽주는 나이는 자신보다 2년 위지만 관계에는 어디까지나 굴러온 돌에 불과한 병상의
이성계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선택한 길은 달랐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군주였다. 밖으로 나온 정몽주는 이방원이 이끄는 대로 사랑채로 들었다. 이내 조촐한 술상이 나왔
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읊조리며 술을 권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는 이방원이 따라준 술잔을 비운 뒤 <단심가>로 화답했다. 그러나 시조를 읊조리는 정몽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혈기
방장한 스물다섯 살의 이방원이 충절의 의미를 이해할 까닭이 없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한잔 술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 밖으로 나온 정몽주는 말머리를 등지고 마상에 올랐다.
“포은 선생님. 어째서리 말을 거꾸로 타심메?”
이방원이 안색이 변하며 말을 걸었지만 정몽주는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
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선죽교 가까이 이르자 정몽주는 하인에게 말
고삐를 놓고 다른 길로 가라고 명했다. 지금부터 자신이 갈 길은 무고한 하인과 동행할 길이 아니었
다. 하인은 영문도 모른 채 주인을 흘깃거리며 뒷걸음질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말이 저 혼자 고삐를 질질 끌며 선죽교를 절반 남짓 건넜을 무렵, 기다리고 있던 이
방원의 심복 조영규가 마상에서 철퇴를 휘둘러 정몽주를 한 방에 살해했다. 정몽주는 집을 나서기 전
에 이미 사당에 향을 올리고 참배를 해둔 터라 恨도 아쉬움도 없었다. 저무는 고려의 마지막 한 줄기
찬연한 낙조였다.
정몽주가 암살된 이후 차례로 조정에 복귀한 이성계의 측근들은 정몽주를 지지하던 온건파 중신들을
모조리 유배하고 건국 준비를 마무리했다. 마침내 1392년 7월, 남은‧배극렴‧정도전‧조준 등은 수순에
따라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옹립하는 역성(易姓) 찬탈을 마무리했다. 1393년 2월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조선의 역사적 기점이 책마다 다른 이유다. 이로써 고려는 34왕 474년 만에 국운
이 다했다. 무신정권에, 원나라의 속국에, 국권 찬탈에, 참으로 고달픈 역사였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정몽주의 묘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왕씨들마저 멸족시켰다. 고려 부흥의 싹을 자른다는 명
분이었지만 전국을 피바다로 물들인 잔인한 학살극이었다. 살아남은 王씨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갓을 덮어써서 全씨로 변장하기도 하고 점을 찍어서 玉씨로 변장하기도 했다지만, 모두가 王씨들이
안타까워 후대에서 지어낸 부질없는 해학일 뿐. 수많은 王씨들을 집단학살한 이성계는 1394년 4월,
공양군으로 강봉되어 유배 중이던 공양왕마저 살해했다.
王씨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꼴을 본 고려의 충신‧학자들은 이성계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며 깊숙한 산골짜기로 집단 피신했다. 오늘날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산속에 있는 두문동이었
다. 그들은 두문동의 앞뒤 출입구에 육중한 문을 세우고 아무도 문밖으로 나가지 않는 ‘두문불출(杜
門不出)’을 고수했다. 그때 두문불출을 고수한 충신‧학자들이 72명이라 하여 후세에서는 그들을 ‘두
문동 72賢’이라고 불렀다. 이방원은 군졸들을 이끌고 두문동을 찾아가 살고싶으면 나오라고 명했지
만, 아무도 나오지 않자 불을 질러 그들마저 모두 학살했다. 재위 7년(1783), 정조는 성균관에 표절사
(表節祠)를 세운 뒤 해마다 문묘제례에 준하여 두문동 72현의 충절을 기리는 제를 올리도록 명했다.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제는 오늘날까지 시행되고 있다.
고려사 소개 끝

※ 한 달 가까이 고려사를 함께 공부했다. 고려사는 의외로 공부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주마간산
격이나마 낯선 시대를 훑어볼 수 있어 보람있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장면이 더 많았지만, 부정적이고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다. 그 동안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준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당사국인 우리의 입지는 북미회담의 결과를 그냥 기다리는 처지 일뿐, 달리 나설일 없지만 전쟁없는 평화를 기대할 뿐 입니다. 그토록 경제적 압박으로 입지가 좁아진 북의 선택일수 밖에 없는 핵포기가 잘이행 되었으면 하는 바람 입니다. 활기찬 한주 시작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