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들, 여옥의 노래
-2011년 5월 8일 일요일-
새벽 3시
잠을 깬 시간이 새벽 3시였다. 그런데도 푹 잤다는 느낌이었다. 늘 그러듯 선뜻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왔다. 죽은 듯 있어도 잠을 깨고, 꼼지락거려도 잠을 깨는 아내의 옅은 잠귀 때문이었다. 나온 김에 호텔 로비에 비치되어 있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내 그동안의 일정을 정리했다. 역시 공무원들이 많이 이용하는 호텔이어서인지 컴퓨터 이용이 참 용이했고, 속도감도 빨랐다.
아침 7시
길을 나섰다. 양쪽 발에 생긴 물집도 부담스러웠고, 이젠 발가락 끝까지 무리가 있어 아팠다. 평지를 걸어도 발바닥이 아픈 판이었고, 어쩌다 울퉁불퉁한 돌이라도 밟히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그 아픔이 심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그렇게 아픈 발이 한 30여 분 걷다보면 어느새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작은 새재를 넘었다.
낮 10시
작은 새재를 일단 넘었으니 문경새재 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내 중학교 동기동창인 이정인 친구가 전날 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날 오전부터 문경새재 제 3관문인 ‘조령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이른 시간에 그곳에 닿으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양쪽 발바닥 앞쪽과 발가락 사이로 두루 잡힌 물집이 터졌는지 양말 앞쪽이 젖은 느낌이긴 했지만, 신발을 벗어 확인할 틈도 없었다. 확인해봐야 어차피 대책도 없는 판이어서, 그냥 내쳐 걸었다. 새재 끝자락 마을인 고사리를 코앞에 둔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오른쪽 발목에 문제가 생겼다. 뻐근한 느낌이 발목에서 시작해서 장딴지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무시했다. 그 지점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옆걸음으로 오르기도 하고 뒷걸음으로 오르기도 하면서 발목의 그 뻐근한 통증을 달래가면서 올랐다. 호텔을 나서서 딱 3시간이 지난 낮 10시 정각에 나와 내 아내는 드디어 조령관을 지나쳐갔다.
낮 10시 30분
신발을 벗었다. 문경새재 황톳길을 걸어보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물집이 터져 문드러지고 있는 양쪽 발에 숨통을 터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발바닥이 맨땅에 닿을 때의 그 시원함에 통증은 어느 정도 마비되는 것 같았다. 문경새재 제 2관문인 ‘조곡관’쪽으로 향하다가 나와 내 아내를 마중하려고 조령관 쪽으로 올라오는 이정인 친구를 만났다. 힘이 났다. 언제 지쳤냐는 듯 ‘동화원’ 휴게소를 지나고 곧 조곡관에 닿았다. 거기서 다시 신발을 신었다. 거기에 이르면 늘 그랬듯, 조곡 약수터를 들러야 했는데, 그 약수터까지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어가려면 맨발로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원한 약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인 나는 곧바로 다시 길을 재촉해서 문경새재 제 1관문인 ‘주흘관’으로 내리 달리다시피 걸었다. 고일림 친구가 권영식 친구와 함께 나와 내 아내를 위해 점심을 같이 하려고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
조곡관에서 주흘관으로 향하는 도중에 고일림 친구와 권영식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문경새재 입구 음식점 거리에서 산채비빔밥이랑 더덕구이 정식이랑 묵밥이랑 해서 점심을 같이 했다. 그렇게 다시 힘을 얻은 후, 서둘러 발걸음을 점촌으로 향했다. 문경에서 점촌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고 생각했고,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저녁 6시쯤이면 도착하려니 했다. 그래서 이정인 친구에게 부탁하기를 저녁 8시 30분에 서울 가는 고속버스 표를 예매해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오후 4시
마성 동성초등학교를 지나고, 진남교 뒷길로 들어서서 고모산성을 올랐다. 거기에서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박희구 친구 부부와 황원현 친구 부부를 만났다. ‘애향심이 묻어나는 기원섭 법무사의 국토 대장정, 고향길’이라고 쓴 플래카드까지 걸어놓고 있었다. 아내도 그렇다고 했지만, 나 역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고마웠다. 먹을 것 한 보따리도 이미 풀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잠깐 앉아서 쉰 그 휴식,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편했던 시간이 아니었는가 싶다.
오후 4시 30분
예상은 빚나가고 있었다. 문경에서 점촌까지의 거리가 약 50여 리 될 것이며, 그 정도 거리라면 4, 5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내 몸이 급격히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놓쳤고, 내 양쪽 발바닥의 고통이 인내의 한계점으로 치닫고 있는 사실을 깜박 놓쳤다. 게다가 그런 몸 상태로 내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벼랑길을 걸었다. 그 길을 안내한 이정인 친구가 말하기를 그 옛날 태조 왕건이 토끼가 가는 것을 보고는 거기에 길이 있으려니 하고 따라간 것에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토끼비리’라는 길이었다. 발 디딜 자리가 어느 하나 편한 곳이 없어, 발을 디딜 때마다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미 들어선 그 길,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당연히 걸음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최종목적지인 문경시청 도착시간은 밤 깊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후 6시
불정을 지날 때쯤 해서 서울에서 김형래 친구가 내려왔다. 그날 밤으로 나와 아내와 이정인 친구를 서울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이정인 친구가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그 밤으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표는 매진되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밤을 내 고향땅에서 머물 수도 없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폐가 될 것이 분명할 것이어서도 그랬지만, 그동안 지친 내 몸을 서둘러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서울 서초동 우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참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김형래 친구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고, 김형래 친구는 선뜻 내 뜻을 잘 받아들여줬다.
저녁 7시
이제는 콩알만 한 돌이 밟혀도 발이 아팠다. 아내가 조언한 대로 뒤꿈치를 먼저 땅에 대고 걷는 식으로 걸어도 아팠다. 아니,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아팠다. 아프다고 해서 걷지 않을 수도 없다. 어쨌든 걸어야 한다. ‘여기 철길 침목이 더 편한 것 같아요.’. 아내의 그 말에 불정에서부터는 철길을 타고 올랐다. 그 철길도 도톰하게 턱이 있어, 아내가 내 손을 잡아줘서야 겨우 올랐다. 아내의 말마따나 침목을 밟고 걷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그리고 침목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어, 어기적거리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빠른 걸음걸이가 조금은 강제되기까지 했다.
저녁 8시
너무나 힘든 고개를 넘었다. 유곡고개였다. 작은 새재를 넘을 때보다도, 그 보다 더 높은 문경 새재를 넘을 때도, 내 그렇게나 지치지는 않았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역이었다. 아내와 이정인 친구는 저만치 앞에서 어울려 가고 있는데, 뒤쳐진 내가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적잖이 약이 오르기도 했다. 유곡 마을을 지날 때쯤 해서 밤은 더욱 깊어져 주위가 깜깜했고, 터벅터벅 내 발걸음은 더욱 지쳐만 갔다. 그래도 어두움 속에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 소리가 내 귀에 시원하게 얹혀들고 있었다.
밤 8시 30분
공평을 지날 때쯤 해서, 박희구 친구 부부와 황원현 친구 부부가 다시 나타나 길 안내에 나섰고, 곧이어 홍만부 친구와 조방연 친구도 그 얼굴을 내비쳤다. 조방연 친구가 들고 온 얼음냉수로 갈증의 목을 축인 후, 내 지친 발걸음엔 다시 힘이 실렸다.
밤 9시
유곡 고개가 마지막 고개인줄 알았는데, 고개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도 문경시청을 100여m 앞둔 곳에서 만난 것으로, 너무나 야속한 고개였다. 질러가는 길이라고 해서 들어선 골목길에 그 고개가 있었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고개로 느껴지지 않을 작은 오르막 정도였을 뿐인데, 그때의 내겐 그 골목고개 넘기가 그동안 내가 올랐던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이나 한라산 백록담보다도 더 높은 것 같았다. 내 두 다리의 힘은 거기서 다 빠져나가버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왜 이런 길로 접어들었느냐고 화내고 싶었지만, 차마 화내지 못했고, 너무 힘들다고 펑펑 울고 싶었지만, 차마 울지 못했다. 내 스스로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밤 9시 20분
드디어 문경시청 앞마당에 섰다. 마지막 순간에 아내를 따라잡지 못해서, 아내보다 5분 늦고 말았다. 이날로 60,000여 보 110여 리를 걸었고, 내 고향 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 그 첫날로 모두 30여만 보, 220여km, 560여리를 걸었다.//
11년 전으로 거슬러 2011년 5월 4일 수요일 아침에 문득 한 생각이 일어 서울에서 반 천 리길인 내 고향땅 문경까지 걸어서 내려가기로 작정하고, 바로 그날 오후 3시에 옷가지 몇 개에 세면도구만 담은 간단한 배낭차림으로 서울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을 나서서, 닷새 만인 같은 달 8일 일요일에 목적지인 문경시청에 들어서는 작은 성취를 이뤄냈었다.
위의 글은 바로 그 마지막 날의 일정을 시간대 별로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
해발 650m의 백두대간 영남대로 제 3관인 조령관(鳥嶺關)을 넘어서서 고향땅 문경으로 들어섰을 때, 노래 한 곡을 불렀었는데, 그 기록이 빠진 것이다.
그때 부른 노래, 곧 이 곡이었다.
‘여옥의 노래’
또 불렀다.
조령관에서 영남대로 제 2관인 조곡관(鳥谷關)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그랬다.
다음은 그 노랫말 전문이다.
불러도 대답 없는 님의 모습 찾아서
외로이 가는 길엔 낙엽이 날립니다
들국화 송이송이 그리운 마음
바람은 말 없구나 어드메 계시온지
거니는 발자욱 자욱마다 넘치는
이 마음 그리움을 내 어이 전하리까
가까이 계시올 땐 그립기만 하던 님
떠나곤 안 계시면 서러움 사무치네
소나무 가지마다 그리운 말씀
호수도 잠자누나 어드메 계시온 지
그날의 손길을 가슴 속에 지니고
이 목숨 다하도록 부르다 가오리♪
첫댓글 이제와서 다시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그때 그 용기의 여정이
새삼 장하기만 하다
그냥 객기겠거니
도중하차 불에뻔!~
했드니 발이불어터져
그저사 진정성 알아
속인이 우찌 대인의
깊이를알까하고~
한숨 한번 크기벧어~
다시 되뇌이는
이여정에 이젠 전율이
돋는다
여옥의노래와 더불어
카츄샤의노래도
생각키게 하는
어쩌면 고난을 이기는
인생여정의 승리리라
진짜 자네는
주변 사건이 많아조타
그 알밤같은 사연,
우찌 뭍고 갈래~
아까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