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추억은 저축할 수 없다네!"
일본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성의 단풍.
이제부터 10월 12~17일 친구 8명이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단풍 트레킹을 즐기고 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귀국하자마자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막 출간된 제 책의 후속 작업에 매달리느라 짬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귀국 후 한 달 안에 마치려고 애썼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이 올라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셨을 독자 여러분께 사과 말씀 드립니다.
지난해 6월 스위스 원정기(유람기)를 쓰고 났더니 대원들도 그렇고 주변 사람도 그렇고 일본 여행기도 당연히 제가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 은근히 부담스러웠습니다. 막상 읽고 나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텐데, 혹시라도 실망하실지도 모를 독자 여러분께 미리 양해 말씀 드립니다.
원정대원(이라고 하니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중년 유람객에 가깝습니다)은 모두 8명이었습니다. 성균관대 민주동문회 80학번 동기회 멤버로 지난해 한국에서 출발한 스위스 원정대원 7명 가운데 김현근을 제외한 이희용·오영수·김정형·김태성·박동규·홍갑표가 동행했고 2명이 가세했습니다. 이번에는 올 1월부터 10만 원씩 곗돈을 부었는데, 한상철 대원은 처음부터 합류했고, 민병래 대원은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하는 8월이 돼서야 동참 의사를 밝혔습니다.
스위스 원정 때는 대원이 모두 7명이어서 패키지 일정 내내 한 사람이 3인실 엑스트라 베드에서 자야 했습니다. 융프라우 자유여행 때는 2층침대가 놓인 롯지(오두막)의 한 방에서 함께 묵었죠. 그때 엑스트라 베드에 가장 많이 당첨되고 롯지에서도 유일하게 침대 윗칸에 배정된 태성이는 이번에도 원정 일정과 세부 계획이 확정될 때까지도 원정대원 인원이 7명으로 홀수가 되자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수소문했으나 신입 대원이 쉽게 구해지지 않다가 다행히 민병래 대원이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지난해 스위스에 동행하고 싶어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가 "죽을래?"란 모골이 송연해지는 대답을 들었다는 친구죠.
이번에는 행선지가 비교적 가까운 일본이고 일정도 11박12일에서 5박6일로 줄었기 때문으로 풀이되지만,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카톡 문자로 대화하면서 권유하자 처음엔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니 흔쾌히 수락했죠. 나중에 아내에게도 이 문자를 보여주니 선선히 다녀오라고 하더랍니다.
“너 사실 작년에 우리끼리 스위스 갈 때 부러워했잖아. 그래서 축하 플래카드까지 만들어줬고. 그땐 너무 멀고 일정도 길어서 강력하게 권유하기 어려웠는데 이번에는 일정도 짧고 거리도 가까워서 괜찮지 않을까 싶어. 단풍 구경한 뒤 온천에 몸 담그고 청주 한 잔 마시며 인생 이야기를 나눠보자꾸나. 아름다운 추억과 행복한 경험은 저축했다가 나중에 찾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네. 그때그때 흘러가는 것을 잡아채서 즐겨야 하는 거지.”
여러분도 그럴 만하다고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병래는 성대민주동문회 80학번 정기 모임이나 산행 때 묵직한 DSLR 카메라를 들고 와 친구들 얼굴을 찍어 주곤 합니다. 서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꾸며 블로그에 연재하기도 하죠. 인물 사진 찍는 솜씨가 프로급인데 정작 본인은 사진을 배우는 중이라며 겸손해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일본 원정 기록을 훨씬 품격 있고 아름답게 남길 수 있게 됐네요.
저는 종교 담당 기자 시절인 1998년 8월 눈물을 흘린다는 기적의 성모상을 취재하러 아키타(秋田)와 아오모리(靑森)를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적하고 평화롭고 깨끗하고 그곳 분위기에 매료됐죠. 더욱이 아키타가 단풍과 쌀과 미인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취재가 아닌 여행으로 꼭 다시 오겠다는 마음을 먹었답니다. 쌀이 좋으면 밥과 술도 맛있는 법이죠.
아키타는 2009년 김태희·이병헌 주연의 KBS 2TV 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 장소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오모리는 사과와 참치가 특산물입니다.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장으로 쓰인 일본 아키타 쓰루노유 온천. 김태희와 이병헌의 사진이 붙어 있다.
그러고 보니 아오모리와 아오리 사과, 아키타와 아키바레(秋晴) 쌀이 발음상으로도 연관이 깊어 보입니다. 그런제 자세히 알아보니 아오리는 아오모리현 사과시험장에서 개발된 품종이 맞지만 아키바레는 아키타가 아닌 아이치(愛知)현 농업시험장에서 만들어졌다는군요.
일본 도호쿠 지방은 일본 혼슈(本州) 동북부의 아오모리·이와테(岩手)·미야기(宮城)·아키타·야마가타(山形)·후쿠시마(福島) 6개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큰 피해를 봤습니다. 특히 일본의 동쪽 바다 태평양에 면한 현들이 직격탄을 맞았죠. 그래서 우리도 동쪽은 피하기로 했습니다.
제 딸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고 아오모리도 방사능 피폭 우려로 농산물 수입 금지 지역에 포함된 것을 확인하더니 아내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바꾸라고 성화였습니다. 일본에 안 가본 곳도 많고 단풍 좋은 곳이 거기만 있는 게 아닌데 왜 하필 그곳이냐는 거죠.
우리 대원 가운데 일부도 찜찜하다는 의견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사는 사람도 있는데 잠깐 들르는 게 무슨 상관이냐”는 목소리에 이내 묻히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아키타가 미인으로 유명하고 김태희가 그곳 온천에서 목욕했다는 얘기에 꽂힌 모양입니다. 저를 제외한 7명 모두 도호쿠는 초행입니다.
한때 아키타에도 직항편이 있었는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폐쇄됐다고 합니다. 따라서 직항편 공항이 있는 아오모리도 행선지에 포함시켰습니다. 저도 20년 전 아키타 직항편이 생기기 전이라 두 개 현을 들렀죠. 미야기현의 센다이(仙台)에도 직항편이 있지만 후쿠시마에 가까운 곳이어서 아예 대상에서 뺐습니다.
아키타와 아오모리로 가자는 작당은 제가 앞장섰지만 어디를 들러서 뭘 할 건지 모의는 영수가 주도했습니다. 올해 3월 후쿠오카(福岡) 일대를 인문학 공부 모임 회원들과 렌터카 타고 자유여행으로 둘러보는 최신의 경험이 있었거든요. 구경할 곳, 걸을 곳, 먹을 곳 등을 정하고 동선을 짜고 항공편과 숙소와 렌터카를 예약하는 일 등을 도맡았습니다.
물론 다른 친구들의 조력도 있었죠. 정형이는 월간 ‘산’에 나온 이 지역 일본 명산의 소개 기사를 뒤졌고 전 인근의 명소를 알아봤습니다. 나머지는 모든 결정에 승복하고 리더의 지시에 순명한다는 충직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일본 100대 명산의 하나인 아오모리현 핫코다산의 풍경
저는 이동할 때도 모두 한 차를 타고 가며 수다를 떠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는데 난점이 있었습니다. 국제운전면허는 1종이든 2종이든 8인승 자동차까지만 몰 수 있도록 돼 있는데, 8인승 승합차에 8명이 타면 짐을 실을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상 큰 차를 운전하려면 대형 면허가 있어야 합니다.
일본도 우리와 운전면허 종류가 비슷해 1종은 15인승까지 몰 수 있지만, 그 면허를 받으려면 현지에서 따로 발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5인승 승용차를 두 대 빌리기로 했습니다.
1호차에는 사회대·경상대 팀이 타기로 하고 영수가 주운전자, 제가 부운전자로 등록했습니다. 2호차에는 문과대·유학대 팀을 배정하고 갑표와 정형이를 운전자로 지정했죠. 정형이는 일본 사정에 비교적 밝은 저와 영수가 한 차에 타면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이동 중에 어떤 결정을 내리려면 수뇌부가 한 차에 타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국제운전면허 소지자인 영수를 제외한 저와 갑표와 정형이는 인근 경찰서에서 국제운전면허를 발급받았습니다.
숙소에 관해서도 저는 독채를 빌리거나 큰 방에서 여러 명이 모여 자는 게 낫겠다는 의견을 냈으나 유럽처럼 마땅한 곳을 찾기도 어려운 데다, 비용이 크게 절약되는 것도 아니고, 잠은 편하게 자는 게 낫다는 등의 주장이 우세해 호텔로 결정했습니다.
현지 가이드 역할을 맡은 영수는 기획과 예약을 도맡았을 뿐 아니라 일정표, 식당 소개 글과 함께 일본어 기초회화 학습 영상, 일본 온천 이용법, 일본 운전 요령 등을 단톡방에 올리는 수고로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 준비물과 단체 준비물을 점검해 공지하는 한편 공금 환전, 포켓 와이파이(도시락) 예약 등을 마쳤습니다. 또 각자의 역할도 원정대장(희용), 가이드(영수), 총무(태성), 부총무(한상철), 의무(동규), 보급(갑표), 검색(정형), 촬영(병래) 등으로 맡겼습니다.
그에 앞서 떠나기 전 몇 차례 준비 모임을 열어 주요 사안을 논의하고 결의를 다졌는데, 한국에서 미리 술을 사가는 것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공금에서 지출하면 술을 덜 먹는 친구들이 손해라는 주장이 제기된 거죠.
“우리끼리 치사하게 그런 것까지 따지냐”는 반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세를 뒤엎지 못해 결국 750㎖ 양주 기준으로 희용·동규·갑표는 각 1병, 태성·정형·영수·병래는 2인1조로 1병씩 각자 자기 돈으로 사가기로 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상철은 면제됐습니다.
대단한 원정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준비 과정에 대한 설명이 길었습니다. 그러나 여행 기간보다 준비 기간이 더 설레고 즐거운 법이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