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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구채구 기행 < 3 > 2012. 10. 23(화) ~ 28(일) 성도 → 낙산 → 황룡 → 구채구
2012. 10. 24(수) 성도 / 무후사 & 금리거리
무후사로 이동하며 본 성도 거리 풍경
성도의 팬더 사욱 기지를 방문한 후 무후사와 금리거리를 가기 위해 1시간 정도 이동하였다.
중국을 찾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거리는 깨끗하고 질서도 있어 보이나는 점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환경미화원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쉬지 않고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거리와 퍽 대조적이다.
1시간 정도 이동하여 11쯤 무후사에 도착하였다.
삼국지의 인물들이 봉안되어 있는 무후사를 관광한다.
청두에 와서 먼저 가봐야 할 곳은 단연 무후사(武候祠, 우허우츠)다. 무후사에는 제갈량의 사당과 유비의 묘가 함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기 제갈량과 유비를 기념으로 만들어진 사당 '무후사' (武侯祠)
성도 무후사는 중국 최대의 삼국 유적 박물관이며 178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 한소열묘보다는 무후사로 더 알려진 현실이다.
사실 제갈량의 묘는 제갈량이 죽은 산시(陝西)성 한중(漢中)시 멘(勉)현 딩준산(定軍山)에 있다.
제갈량을 기르는 사당도 중국 각지에 수십 곳이나 된다. 유비의 묘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로 더 알려진 이유는 후대인들이 제갈량을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무후사 배치도
북쪽에 위치한 본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구조이다.
본당 아래에 大門, 二門, 유비전, 과청, 제갈량전, 오중전이 있다.
서쪽에는 유비의 묘가 있으며, 얼먼에서 유비전과 동서전, 꾸어팅에서 제갈량전의 동서방향으로 각각 두 개의 곁방이 붙어 있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무후사 입구에 도착하면 한소열묘(漢昭烈廟)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소열제(漢昭烈帝)는 유비 사후 추존된 시호로, 곧 유비 묘를 가리킨다.
유비와 제갈량의 제사를 모신 사당으로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쓰촨(四川)은 우리에게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이 활약한 무대로 잘 알려졌다.
청두(成都)는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이자 쓰촨성의 성도(省都)다.
청두는 기원전 7~8세기 촉나라가 흥기하면서 중국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청두에 촉한을 건국하여 천하통일을 꿈꾸었지만, 대업을 이루지 못한 채 양쯔강(長江) 백제성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촉한은 40여년 만에 멸망했지만 청두의 지명은 오늘날까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유구한 중국 역사 속에서 옛 지명을 지키고 있는 곳은 청두, 뤄양(洛陽), 쉬창(許昌)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무후사에는 제갈량의 사당과 유비의 묘가 함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후사 입구에 도착하면 한소열묘(漢昭烈廟)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소열제(漢昭烈帝)는 유비 사후 추존된 시호로, 한소열묘는 곧 유비 묘를 가리킨다.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 입구 명칭이 어떻게 유비 묘로 불리는 것일까. 본래 청두의 제갈량 사당은 유비의 아들 유선에 의해 도시 외곽에 작은 봉분 형태로 조성됐었다.
5세기 초 남북조시대 청두에 성한(成漢)을 건국한 이웅은 제갈량의 사당이 도시 교외에 있어 백성들이 찾아 가기 힘든 것을 아쉬워 해 청두 시내로 무후사를 옮겼다.
이를 다시 명나라 초기에 오늘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한소열묘와 합치게 됐다. 사당 내부에는 촉한(삼국의 하나로 유비가 세움)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명비(明碑) 1547년에 조각하여 세웠으며 장시철이 문장을 짓고 고등이 비석을 세웠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매우 많았던지 안내판에 영어, 일어와 함께 한글이 병기 되어 있다. 그런데 한글이 日語 위에 있어 기분이 괜찮았다.
유비전 전각의 중앙에는 유비상이, 왼쪽에는 유비의 손자인 유심(劉諶)의 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 대군이 침범하자, 유선은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들고 나가 항복하려 했다.
유심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청두의 군사를 모두 모아 결사 항전하려 했다.
유선과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심은 유비묘를 찾아와 대성통곡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촉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원래 유비전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유선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 헌데 한 해가 채 넘어가기 전에 누군가 유선상을 훼손해 버렸다.
지방관청은 바로 유선상을 복원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파괴되었다.
한동안 새로 만들고 없애지기를 반복하다가, 청나라에 들어와 중건할 때 유선 상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내다버린 유선에 대한 청두 사람들의 반감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지금도 유선 상 자리에는 커다란 나무뿌리 하나만 쓸쓸히 놓여 있다.
유약하고 무능했던 유선을 꾸짖는 듯한 후대인의 회초리처럼 냉엄하다.
긴 귀와 수염에 후덕한 풍모가 느껴지는 유비상.
유비전(昭烈殿) 전각 안에는 황제의 면류관을 쓰고 황금색 곤룡포를 입은 유비 상이 안치되어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무후사 내 모든 인물상은 청나라 때 찰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인물상이 그러하듯 유비 상은 긴 귀와 수염을 강조하고 후덕한 얼굴 표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비(161~223년)는 자가 현덕이고 하북성 탁주 사람이다. 한나라 말기 의병을 모집하여 천하를 다투었다.
221년 성도에서 항제로 칭하였고 국호는 '한'으로 하였는데 후세에서는 '촉한'이라 하였다.
오나라를 공격하고 대패하여 백제성(중경시 봉절)에서 병사하였다.
악비가 쓴 제갈공명의 '출사표' 전장(戰場)에 출진(出陣)하며 왕에게 올리는 소회(所懷)와 격문(檄文) 후출사표와 더물어 고금에 길이 남는 명문으로 꼽힌다.
문 안쪽 바로 옆 벽면에는 출사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제갈량이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후주(後主) 유선에 바친 출사표는 고금의 명문으로 통한다.
후대 수많은 문인들이 출사표를 되새겨 남겼지만, 무후사의 출사표는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가 쓴 친필이다.
악비가 쓴 출사표는 처음에는 해서체로 단정하게 써나가다가 뒤로 가면 행서체로 바뀐다.
악비는 북방 유목민족에게 시달림을 당했던 남송의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기에,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출사표를 써나갔다.
원래 출사표(出師俵)는 신하가 적을 정벌(征伐)하러 가면서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표문(俵文)으로서 전장에 나간다는 표현이다.
예로부터- 남자가 이를 읽고 울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고 했다. 제갈량은 관우 장비에 이어 유비 마저 백제성에서 유명(幽冥)을 달리 한 후 17세 된 유선을 황제로 모시고 자신은 丞相이 되었다.
제갈공명은 그 당시 실질적인 촉한의 권력자였으나 끝까지유비와의 약속을 지켜 스스로 패권을 잡지 않고 묵묵히 선제(先帝)의 어린 아들 유선을 보필(輔弼 : 임금을 도움)함으로서 훗날 진정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사람으로 추앙(追仰)받게 되었다.
공명은 북벌을 결심하고 위나라를 치겠다는 출사표를 두 번에 걸쳐 유선에게 올렸는데 전에 올린 것을 전출사표(前出師俵)라 하고 뒤에 올린 것을 후출사표(後出師俵)라 한다.
227년에 올린 이 출사표 한 편에는 남자의 삶이 이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담겨 있다. 그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쳐 생사를 잊고 승패를 초월하는 불꽃같은 삶의 아름다움이다.
제갈량은 건안 12년 (207)년 장판교 전투에서 조조에게 대패한 유비가 곤궁한 처지에 놓였을 때 서서와 사마위의 천거로 삼고초려의 예를 다 한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 (진하면서 군신수어지교 (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209년 겨울 적벽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얻어 근거지로 삼은 다음 다시 익주를 공략하고 한중(漢中)을 점령 하였다.
223년 유비가 병들어 죽자 제갈량은 아들을 부탁한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후주 유선을 받들었고 227년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위나라를 쳤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선제창업미반 이중도붕조)로 시작되는 전 출사표는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 된다.
“신 제갈량 고합니다. 선제께서 창업을 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붕어 하시어 천하는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현 사천성 성도) 피폐해져 진실로 위급한 때입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신하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직한 장수가 밖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은 선제의 각별한 우대를 잊지 않고 섬돌아래 엎드려 보답 고저 함입니다."
이어서 아래의 그 유명한 말을 올린 후 끝맺음을 ' -- 신은 감격하여 지금까지 개나 말처럼 닫고 헤매 임을 무릅썼습니다.' 로 쓰고 마쳤다.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芶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候- 신본포의 궁경이남양 구전성명어난세 부구문달어제후-
신은 본래 남양에 묻혀 밭이나 갈며 난세에 목숨이나 부지하기를 바랄뿐 조금이라도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그들에게 쓰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 於草廬之中 諮臣 以當世之事 선제부이신비비 외자왕굴 삼고신 어초려지중 지신 이당세지사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 하다 아니 하시고 황송하게 몸을 굽혀 세 번이나 신의 초막을 찾으시고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유시감격 수허선제이구치 신은 감격하여 지금까지 개나 말처럼 닫고(달리고) 헤매임을 무릅썼습니다.
제갈량은 출진중 성에 머무는 유선이 유념해야 할 모든 것,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길, 인재의 등용 문제, 진인사 대천명의 자세, 위급시의 대처방안, 황제에 대한 여러 가지 훈계, 이제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한 한결같은 충성의 마음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끝맺음을 했다.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泣 不知所言 신불승수은감격 금당원리 임표체읍 부지소은 ”신은 성은의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 멀리 떠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 하겠나이다."
후 출사표(後出師俵) 서문(序文)에는- “선제께서 한나라를 훔친 역적과는 함께 설 수 없고 왕업은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 한 것에 만족해 주저앉을 수 없다‘ 하시며 신에게 역적을 칠 일을 당부 하셨나이다. 선제께서는 신이 역적을 치는 일이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알고 계셨습니다만 역적을 치지 아니하면 도리어 왕업이 망할 것 이니 일어나 치지 아니하고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의심 하지 않으셨습니다." 라고 썼다.
말미엔- 凡事如是難可逆見 臣鞠躬盡力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 逆竟睹 左左右見也 범사여시난가역견이어늘 신국궁진력사이후이이어 지어성패이둔 비신지명소능 역경도 좌좌우견야라 "모든 일이 그러하니 미리 헤아려 살피기란 어렵고다만 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 그만 둘 것이며 성패와 이롭고 해로움은 하늘의 뜻에 맡기나이다"라 했다.
중국의 강력한 카리스마의 포청천 이라고 일컬었던 주룽지 전 총리가 밤낮으로 즐겨 썼던 그 유명한 8 글자 鞠躬盡力 死以後已 (국궁진력 사이후이)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서기234년 제갈량은10만 대군을 일으켜 오장원(五丈原)에 본진을 치고 사마의와 대치하였으나 강풍에 깃발이 부러진 것을 보고 자기의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을 예측하였으며 100일이 넘은 그해 8월, 병으로 쓸어져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몰(病歿 : 병으로 죽음)하였다. 그때 집에는 뽕나무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 만이 있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유비전 오른편 회랑에는 조자룡을 좌장으로 한 14명의 촉한 무신상이 전시되어 있다.
유비상이 있는 대청의 양 옆 방에는 관우와 장비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 모여 같은 장소, 같은 날에 죽을 것을 결의했다.
비록 삼형제는 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무후사 유비전 아래 모여 대업 성취를 위해 분투하는 듯하다. 관우와 장비 상 바로 앞에는 그들의 아들과 손자 상도 안치되어 있다. 문신상에는 염통을 위시하여 14명의 촉한 문신들이, 무장상에는 조자룡을 좌장으로 14명의 촉한 무신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각 좌상은 관직에 맞는 복장, 인물과 어울리는 얼굴 표정 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실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촉한의 기라성 같은 영웅호걸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때이다.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로 폐허가 된 무후사를 강희제가 직접 명령하여 대대적으로 중건, 확장했다.
중건 후 무후사는 크게 유비전과 제갈량전으로 나누어졌는데, 이를 통해 군신 합장사당의 특색을 갖추게 됐다. 무후사가 뒤늦게 이전되어 제갈량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유비의 묘였던 장소였기에 유비전은 제갈량전보다 호화롭고 위엄이 넘친다.
유비전의 전체적인 배치도 임금인 유비를 중심으로 관우, 장비와 녹을 받는 신하들이 도열해 있어 중요한 의식을 집전하는 듯하다.
마초[馬超]도 보이고……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출신이며 자는 맹기(孟起)이다. 마초가 후한에 반란을 일으키자 부친 마등(馬騰)이 조조(曹操)에게 참수당하였다.
한수(韓遂)와 연합하여 조조와 싸웠지만 조조의 계략으로 패하였다. 만족(蠻族) 사람들을 모아 양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다시 확대하였으나 실패하고 촉한의 유비(劉備)에게 투항하여 촉한의 장수가 되었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황충(黃忠)과 함께 촉한의 오호장군(五虎將軍)으로 불렸다.
221년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양주목을 겸임하였고 222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후사는 제갈량의 시호를 따서 지어졌다.
1997년 무후사로 자리를 옮긴 삼의묘에는 언제나 향냄새가 진동한다.
제갈량전 뒤에는 삼의묘(三義廟)가 있다. 삼의묘는 유비, 관우, 장비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삼의묘 내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좌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묘당 마당에는 도원결의부터 유비의 죽음까지 삼형제와 관련된 다양한 고사를 벽화로 전시하여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본래 삼의묘는 청나라 강희제 때 티두제(提督街)에 조성됐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파괴로 폐허가 된 것을 1997년 무후사 내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유비전이나 제갈량전과 달리 절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 언제나 관광객이 절하면서 꼽은 향냄새로 진동한다.
삼의묘에서 한소열묘로 가는 붉은 벽담 길. 청두를 소개하는 TV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명소다.
청나라 강희제가 친히 쓴 비문 이다.
삼의묘를 나와 걸음을 유비의 묘로 옮겼다. 도중 지나는 붉은 벽담 사이의 길은 무후사의 숨은 진주다. 수백 년 된 대나무 숲 사이에 닦여진 길은 1980년대 초반에 닦여졌다. 그리 길지 않은 연륜을 지녔지만 회색 돌바닥, 붉은 벽, 푸른 대나무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걷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 길은 청두를 소개하는 선전 광고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비석은 강희제가 직접 쓴 친필로 새겨진 것이다. 유비묘는 본래 둘레 180m, 높이 12m의 웅장한 능원이었다. 지금은 벽돌담에 둘러싸여 볼품없이 변했지만, 한때 중국 서남부에서 가장 큰 황제릉이었다. 유비묘는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황제릉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 재미있는 두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첫째는 서민적이었던 유비의 평소 생활에 비추어 무덤에 금은보화를 묻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실제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국력이 뒤처졌던 촉한은 유비 사후에 화려한 능원 건설을 엄두도 못 냈다. 한둘이 아니었기에 도굴을 꺼려했다는 것이다.
청두 민중들 사이에는 유비묘 위에 자란 나무를 꺾었다고 해서 후손이 팔 병신이 됐거나 무덤 풀을 뜯어먹은 양이 돌연 죽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유비묘를 둘러싼 무서운 전설은 도굴꾼으로 하여금 의욕을 상실케 하여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되어 왔다.
무후사는 둘러보는 시간은 넉넉히 잡으면 2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공명원 경내 곳곳에는 그늘지고 쉴 곳이 많고 찻집도 있어 찾는 이의 편의를 돕고 있다.
공명원 안쪽 모습 정원인 것 같았는데 시간 관계상 입구에서 만 처다보고 돌아 나왔다.
무후사는 육열식 배열구조로 된 청나라식 전통 정원이다. 무후사에는 쉴 곳이 도처에 있어 편안히 감상할 수 있다.
금리(錦里)거리 관광
무후사에서 진한 역사의 향기를 맛보고 나오면, 또 다른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여행객의 발목을 잡는다.
무후사 바로 옆에 있는 금리(錦里)는 옛 청두의 전통 저잣거리를 복원한 장소다.
금리는 2004년에 문을 열었는데, 입구에는 붉은 색 도포를 입은 점쟁이가 찾는 이를 맞는다. 대문을 들어서면 식당, 찻집, 상점, 술집, 객잔, 노천무대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청두는 티베트로 들어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동측의 '금리'는 성도의 특색음식, 특산물 및 민풍 민속을 한몸에 지니고 있으며 삼국민속문화를 재현하고 있다.
사천성의 역동적인 도시 청두(성도)의 첫인상은 현대도시의 이미지이지만 성도에는 그 수천 년의 역사가 가득 담긴 장소가 곳곳에 있다.
예전 저잣거리를 재현해 놓은 금리거리도 그 중 한 곳.
성도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필수 코스인 금리 골목을 들어가면 먹자거리가 나온다.
예로부터 서민들이 즐겨 찾던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금리거리는 세상의 모든 요리를 다 모아놓은 박람회 같다
홍등을 걸어놓고 여행객을 유혹하는 진리의 식당과 카페. 밤에는 홍등에 불을 켜서 낭만스런 운치를 연출한다.
노천가게에는 쓰촨과 청두에서만 볼 수 있는 먹거리와 기념품이 판매되고 있다.
금리의 상점 중 그림자 인형극에 쓰이는 인형과 천극(川劇) 관련 캐릭터 상품을 파는 가게는 놓쳐서는 안 될 장소다.
밤에는 가게 입구마다 걸어놓은 홍등에 불이 들어와 낭만 넘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꽂이가게가 많이 보였다.
가게 주인의 분장이 옛스럼을 자아내고 있다.
오전 시간이라서 그리 혼잡하지는 않았지만 관광객들로 골목이 붐비고 있었다.
관광객이 커메라를 응시하며 포즈를 취해 주고 있다.
주마간산이라 했나요. 일정을 맞추느라 한 번 지나가는 식이다 보니 아쉬운감이 많았던 코스였습니다.
이제 낙산으로 이동하여 낙산대불을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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