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사계]
ㅡ옛시절ㅡ
농촌 출신인 우리 세대는 추억이 많다. 여름 찜통 더위를 지혜롭게 이겨낸 저력이 있다. 한여름엔 수박 한 통 들고 친구들과 분부내나 한강으로 나선다. 샛강에서 멱감으며 한나절을 보낸다. 입술이 파르르 떨도록 물속에서 나올 줄 모른다. 소꼴(소먹이)을 베어야 하는데 햇살은 좀체로 수그러들지 않는다. 냉장고와 에어컨이 없어도 여름을 거뜬히 이겨냈다. 지금보다 곤궁해도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을 되돌려 본다.
복중에 더위를 무릅쓰고 사계절을 음미하자며 영오에게서 유혹이 온다. 한동네 살던 화수와 용진의 의견이 일치되어 2박 3일 일정으로 가방을 멨다.
사통팔달 고속화 도로는 예전의 익숙한 시골길이 아니다. 차막힘 없이 천등산을 지나 후포리에 도착해 아구찜으로 만찬을 즐겼다. 반나절 생활권이 된 전국은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숙소는 산장에 아름답게 꾸며논 영오의 후포리 전원주택이다. 에어컨을 안 켜도 밤공기는 서늘한 가을 수준이다.
ㅡ청춘 고을ㅡ
아침을 알리는 뻐꾸기와 곤충 선비인 매미, 텃새의 알람이 맑은 공기를 가른다. 백암온천 온정리길은 다시 봄을 만난 분위기다. 백일홍 꽃길을 가로 지른다. 배롱나무 꽃방이 열리는 중이다. 2백리길 울진의 공통 분모는 금강송이다. 세월은 늙어가도 산을 메운 푸른 송松은 여전히 청춘(常綠樹)나무다.
복伏중에 온溫ㆍ냉冷에 단련된 오백년송(82년)을 만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네비는 첩첩산중 휴대폰도 안 터지는 지름길 오지(임도)로 안내한다. 통신이 단절된 상태다. 달리는 차에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네 명의 친구들은 간담이 서늘했다. 예전같으면 짚신 신고 종일 걷는 비포장 산길이다.
ㅡ구름 따라ㅡ
'영덕풍력발전단지' 앞에 편액도 없는 쉼터 평상에 몸을 뉘어 하늘을 바라본다. 살결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에 여름은 간데 없다. 공들여 지어논 목화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다. 산봉우리에서 바람을 만날까 구름이 걱정된다.
김삿갓의 뭉게구름 시 한 수 읽고 간다.
"한 봉우리 두봉우리 다시 서너 봉우리/
다섯 봉 여섯 봉 일고여덟 봉우리/
잠깐만에 다시금 천만 봉이 생겨나/
구만리 긴 하늘이 온통 봉우리로다." 생전에 구름 시를 많이 남긴 '서산대사'도 구름처럼 흩어졌다.
바람을 외면한 채 무심히 가는 구름은 해와 달을 닮은걸까.
세월은 오고 가는 데 관심 밖이다. 삶이 한조각 구름이라고 한다. 오늘 백일홍이 피지 않았다면 백날 뒤에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을. 우리네 삶도 그네처럼 갔다가 다시 오는 세상이라면 기쁠 따름이다.
내일 원적지로 떠나기를 기약하며 만찬은 한우 구이다. 복숭아 파는 과일가게집에서 적극 추천한 영해 푸줏간집에 들렀다. 에누리도 해주는 넉넉한 인심에 반한다. 코로나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겹쳐 지방도 4단계 격상조치로 2명 이상 맛집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아쉽다.
죽변항의 '고모령집' 복지리탕이 점심 메뉴다. 친구들과 식탁에선 이산가족이다. 주인의 요리 솜씨와 넉넉함에 입맛이 살아난다. 파도가 없는 수평선은 한낮의 햇빛이 바닷물을 말릴 기세다.
깊은 숲속의 덕풍계곡을 향해 겨울속으로 달린다. 푸른 산 계곡에 물소리가 곡조를 울린다. 지난 여름 장마에 훑고 간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사 차량이 연신 드나든다. 발등을 스치는 도랑물은 등줄기 땀을 식힌다.
도로가 끝인 오무, 영양 반딧불이 생태공원의 소나무 숲 등 일정을 다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남긴 추억은 훗날의 얘깃거리다. 식성과 입맛은 선택의 여지 없이 통일이다. 잠자리는 각자 습관대로 잤다.
첫날 풍기에서 점심으로 먹은 청국장은 아직도 입안에 향이 남았다. 일정 마지막 만찬은 여주 추어탕집이다. 또 가고 싶은 맛집으로 추천이다. 고래희古來稀에 유년 시절의 마음으로 3일을 1천km이상 쉼없이 달렸다. 자전거로 세계를 누빈 영오는 아직도 에너지가 넘친다. 타고난 체질을 닮을 수 있을까! 영오 덕분에 폭염暴炎속에서 사계절四季節을 체험했다.
2021.07.21~23.
첫댓글 올해는 기후변화로 유난히 폭염인듯 합니다. 정선생님은 시원한 곳에서 피서 잘 하고 오셨군요.
네네. 친구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