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수복, 대만을 청나라의 통치 아래 두다
대만은 원래 중국의 영토였으나 명나라의 무능과 부패로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자 정성공은 군사와 전함을 거느리고 대만 공략에 나서 코예트가 통솔하는 네덜란드군과 맞붙었다. 정성공은 대만성을 포위해 네덜란드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여 결국 네덜란드의 항복을 받아 내고 대만을 되찾았다.
대만은 일찍이 중국의 영토였으나, 명나라 말에 이르러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네덜란드의 점거를 허용했다. 17세기 초, 세계 최강의 해상 패권국으로 등극한 네덜란드는 1624년에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팽호도(澎湖島)를 점령했다. 이에 명나라의 복건총병 유자고(兪咨皐)가 출병해 네덜란드 장교를 생포하는 등 승전을 올렸지만, 잔당 추적에는 실패했다. 이후 네덜란드군은 대남(臺南)으로 후퇴했고, 안평현에는 대만성(臺灣城), 대남에는 적감성(赤嵌城)을 쌓아 본격적으로 대만을 식민 통치했다. 당시 대만은 수많은 고산족(高山族)과 한족들이 함께 생활했는데, 네덜란드의 가혹한 식민 통치로 고산족과 한족들은 종종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대만 현지인의 봉기는 매번 네덜란드군에게 진압당해 정성공(鄭成功)의 대만 진군 이전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성공, 네덜란드로부터 대만을 되찾은 명나라 유신으로, 청나라에 저항하여 반청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성공은 본명이 삼(森)이며, 복건성 천주(泉州) 사람이다. 그는 1624년에 일본 히라도(平戶)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당시 해적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정지룡은 명나라에 투항한 후 해전에서 공을 세워 복건총병이 되었다. 1630년, 정성공은 홀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정지룡과 정성공 부자는 청나라가 산해관으로 진입해 명나라 조정이 남하하자, 복건성의 복주(福州)에서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융무제(隆武帝, 재위 1645~1646)로 옹립하여 항청 투쟁에 참여했다. 정지룡을 통해 정성공을 만난 남명의 융무제는 정성공을 중용하여, 1645년 '주(朱)'라는 성과 '성공'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어영중군도독(御營中軍都督)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복건과 대만 일대 백성들은 그를 국성야(國姓爺)라고 불렀다.
1646년,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투항하자, 정지룡은 정성공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투항했다. 정성공은 정지룡과 결별하고 하문(廈門)과 금문(金門)을 거점 삼아 항청 운동을 전개했다. 1648년, 그는 남명의 영력제(永曆帝, 재위 1647∼1662)에 의해 위원후, 연평공으로 책봉된 후 조직적으로 수륙군을 양성했다. 1658년, 드디어 정성공은 수륙군 17만 5천여 명을 이끌고 북정에 나섰다. 그러나 정성공 군대는 양산(羊山)에서 태풍을 만나 배와 군대를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온주(溫州)의 주산(舟山)으로 퇴각해 군대와 군선을 재정비했다. 1659년, 정성공은 다시 한 번 북상하여 양산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어서 과주, 진강 등을 함락하고, 남경을 포위한 채 절강의 장황언(張煌言)과 연합해 반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남경성에 도착한 정성공은 청나라의 위장 전술에 속아 감휘, 장영, 임승, 진괴, 만례, 이필 등 장군 14명을 잃고 대패했다.
정성공은 청나라에게 크게 패하고 하문으로 돌아왔지만, 청나라의 천계령(遷界令) 선포로 새로운 항청 근거지가 절실해졌다. 천계령으로 광동, 복건, 절강, 강소, 산동 등의 백성이 강제로 이주해야 했으므로 병사 모집과 급료 지불에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성공은 바다 건너 대만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마침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 통역을 맡던 하빈(何斌)이 도망쳐 정성공에게 대만을 구해 줄 것을 간청했다.
1661년, 정성공은 마침내 2만 5천 군사와 200여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대만 공략에 나섰다. 정성공 대군은 팽호도에서 태풍을 피하고 전열을 정비한 뒤 대만 섬을 향해 전진했다. 반면 네덜란드군은 정성공군의 출병 소식에 대만성에 대형 대포를 설치하고, 해저가 얕아 전함의 이동이 힘든 북항로에는 파괴된 갑판들을 깔아 놓아 방어했다. 이로써 네덜란드군은 정성공이 북항로를 포기하고 대만성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정성공은 해수의 만조 시기를 이용해 녹이문항(鹿耳門港)을 통과했다.
당시 네덜란드군은 총독 코예트(Coyet)가 통솔하는 2천여 명의 군사와 발렌틴(Valentijn)이 통솔하는 600여 명의 군사가 대만성과 적감성에 각각 주둔하고 있었다. 코예트는 정성공의 대만 상륙을 저지하고자 군대를 2개로 나누어 정성공군을 공격했다. 우선 코예트는 전함 헥토르 호와 스콜라프 호, 백로 호, 마리아 호를 출격시켰다. 이에 정성공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60척의 전함을 출격시켜 헥토르 호를 포위하고 일제히 발포하여 불태워 버렸다. 상황이 불리해진 네덜란드 전함들은 기수를 돌려 도망쳤다. 한편 베더(Beder)는 네덜란드 육군을 이끌고 북선미도(北線尾島)에 상륙했지만, 역시 정성공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베더는 전사했다. 결국 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정성공은 적감성 서북부 부근의 화료항(禾寮港)에 도착한 뒤 적감성을 포위하여 성을 고립시켰다. 시간이 흘러 성안의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발렌틴은 정성공에게 항복했다.
다음으로 정성공은 대만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군했다. 적감성 함락으로 연락이 단절된 상태였던 대만성의 코예트는 자바의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주둔하고 있던 네덜란드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정성공과 항복 협상을 벌였다. 이는 다분히 지원군 도착을 위한 시간 벌기용이었다. 코예트는 정성공에게 매년 2만 냥의 세금과 토산물 상납을 약속하며, 정성공이 군을 철수시키면 은 10만 냥을 지불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정성공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고, 코예트의 대만성 통치와 네덜란드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해 달라는 두 번째 제안도 거절했다. 결국 정성공과 코예트는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정성공은 대만성 함락을 위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네덜란드군의 강력한 화포로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성공은 점령 지역의 경계를 강화하고 장기간 대만성을 포위해 적군을 고립시켰다. 그러던 중 코예트가 요청한 네덜란드 지원 병력이 대만 해역에 도착했다. 이에 정성공은 직접 함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네덜란드 함대 2척을 격침시키고 작은 전함 3척을 사로잡아 승리했다.

정성공은 네덜란드군이 방어하는 요새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의 모든 상품과 재산을 질란디아 요새에 남겨두고 떠났다. 이로써 대만은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662년, 정성공은 대만성 공격을 재개했다. 먼저 대만성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킨 후 총공세를 펼쳤다. 결국 네덜란드의 코예트는 더 버티지 못하고, 정성공이 내민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662년 초, 네덜란드가 떠남으로써 정성공은 대만을 완전히 되찾았다.
대만 수복 후 정성공은 대만에 행정 기구를 설치하고 대만성을 평안진, 적감성을 안평성으로 고쳤다. 또한 천흥과 만년, 두 현을 두어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법률 제정, 학교 건설, 농업 생산력 향상을 위한 황무지 개간 장려, 농사 기술 전수, 해외 무역 발전 등을 통해 대만의 사회, 경제 발전을 촉진시켰다.

대만 수복 후 정성공의 반청 운동으로 청나라는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강희제는 시랑에게 대만 정벌을 명하고, 총공세를 펼쳐 대만을 청나라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성공은 대만을 수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62년 5월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정경(鄭經)이 대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1681년에 정경이 사망한 후에는 정경의 아들 정극장(鄭克藏)과 정경의 신임을 받은 대신 풍석범(馮錫範)이 권력 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풍석범은 정극장을 살해하고 정경의 둘째 아들 정극상(鄭克塽)을 옹립한 뒤 전횡을 일삼았다. 따라서 대만의 민심은 정씨 일족과 점차 멀어졌다.
한편 1662년에 남명의 항청 투쟁이 종식되고, 1681년에 삼번의 난이 평정되면서 청나라는 대만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정성공의 대만 수복은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위국하는 일이었지만,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정씨 일족이 벌이는 반청 운동 때문에 결코 방관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683년, 강희제는 시랑(施琅)을 복건수사제독으로 임명하여 대만 정벌을 명했다. 시랑은 총공세를 펼쳐 팽호도와 그 주변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결국 정극상은 같은 해 청나라에 항복했다. 이로써 대만은 청나라의 통치하에 들어섰다.
ㆍ 1624년 : 해상 패권자로 등극한 네덜란드가 팽호도를 점령하다.
ㆍ 1662년 : 정성공이 대만성에 총공세를 펼치자 네덜란드가 떠남으로써 대만을 완전히 되찾다.
ㆍ 1681년 : 삼번의 난이 평정되고 청나라가 대만 정벌을 논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