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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제국주의를 향해 쏘다
시사뉴스 기사 등록 : 2007.04.18.
글 : 정춘옥
우리나라 최초 여성 파일럿 故 권기옥 여사가 화제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청연’에서 故 박경원 씨가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소개됐지만 사실은 최초의 여자비행사는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 여사라는 것이 정설이다. 권 여사는 박씨보다 3년이나 빠른 1925년 운남 항공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권 여사는 친일 행적이 논란이 돼왔던 박씨와는 반대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더욱 ‘국민적 위인’으로 조명 받고 있다.
한일 관계가 과거청산을 하지 못한 채 갈등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하지만 여전한 성적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구조에서 권 여사의 삶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 권 여사에 대한 평전 ‘우리나라 최초 여성 파일럿 권기옥’(작은 씨앗 펴냄)을 출간한 저자 임복남 씨의 도움을 받아 권 여사의 삶을 살펴봤다.
항공학교 군장성과 담판
190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권 여사의 어릴 적 이름은 ‘갈례’였다. 아들을 학수고대하던 아버지는 첫째 딸에 이어 둘째도 딸이 태어나자 홧김에 어서 죽으라는 뜻으로 이름을 ‘갈례’라고 지었다.
이 같은 가부장적 환경에다 가난하기까지 했던 집안 형편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권 여사는 장대현 교회 목사의 추천으로 숭현초등학교에 늦은 입학을 하게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 ‘애를 업고 학교에 다닌 아이’로 불린 정도로 젖먹이 동생을 돌보며 어렵게 학교에 다녔던 권 여사는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고 빠른 속도로 월반을 했다.
1917년 미국인 아트스미스의 평양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16살 소녀의 낭만적인 꿈은 일본제국주의의 횡포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전투기를 몰고 일본천황궁과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바뀌게 된다. 숭의여학교 재학시절 송죽결사대에 가입해 3·1만세 운동 주도하다 체포돼 3주간의 구류처분을 받은 후 권 여사는 본격적인 독립투사의 길을 걷는다. 대한애국부인회의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벌이고 임시정부공채를 판매하다 붙잡혀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출옥 후에도 브라스밴드단을 결성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민중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이고 임시정부 산하 청년들을 도와 평남도경을 폭파한다. 그리고 1920년 일본경찰의 끈질긴 추격으로 중국으로 밀항한다.
중국으로 간 권 여사는 파일럿이 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먼저 시급한 문제는 언어. 영어와 중국어를 완벽하게 공부하기 위해 앨런 피터슨이 운영하는 홍도여학교에 입학해 피나는 노력으로 4년제인 학교를 2년 반 만에 졸업한다. 그리고 혼자서 비적들이 들끓는 위험한 여정을 거쳐 운남항공학교를 찾아간다. 당시 중국에서도 여성이 전족을 하는 시대였으니 한국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항공학교에 입학을 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었다. 권 여사의 당당한 배짱과 야망에 탄복한 당계요 군장성은 남자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규칙을 깨고 입학을 허가한다. 1923년 권 여사는 첫 여성으로 당당히 운남 항공학교에 입학한다.
일본과 전투에서 최전방 활약
1923년 운남 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 권 여사는 훈련비행 9시간 만에 단독비행이 허락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다. 항공학교에 재학 중인 시절, 일본 영사관은 첩자를 보내 권 여사를 사살할 계획을 도모하나 비행동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에 분개한 일본영사관은 권 여사를 제거하기 위해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권 여사는 항공학교 측의 배려로 은신하게 된다.
이 같은 위험 속에서도 권 여사는 1925년 2월28일 운남 항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드디어 자랑스런 ‘윙배지’를 달게 된다. 파일럿이 된 권 여사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천황궁을 폭파하겠다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로 달려가서 비행기를 사달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건물임대료도 못 낼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1926년 4월 동로항공대의 부비행원으로 임명되어 중국 공군으로 10년 동안 활동하며 일본과 벌이는 전투에서는 언제나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1932년에는 전투기를 몰고 일본을 향해 기총소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1935년에는 중국인 비행사 이월영과 선전비행을 계획하고 선전비행의 마지막에 일본을 폭격할 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기다렸지만 일본군의 전쟁도발로 아깝게 무산됐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단체의 조직화에도 기여했다. 1939년에는 남편 이상정(독립운동가)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하며 여러 개로 분열돼 있던 부인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선정부장을 맡아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도모하는데 주력했다.
1943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비행사 최용덕, 손기종과 함께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 계획을 구상하고 1945년 3월, 임시정부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중 이 계획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권 여사는 비행동료들과 함께 일본 천황궁과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거사를 기다렸지만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게 된다.
공군의 ‘아주머니’
해방 후에도 권 여사는 상해에서 동포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고국으로 돌아와 제헌국회의 외무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한다.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던 경험을 살려 한국 공군의 창설과 발전을 위해 일하며 ‘공군의 아주머니’로 불렸다. 그리고 최초의 여성 파일럿에 이어 최초의 여성출판인으로 한국연감을 발행했다. 1975년에는 나라를 이끌어 갈 젊은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장학 사업에 기탁했다.
권 여사가 꿈꾸었던 광복은 한국광복군의 단결된 의지로 일본을 무릎 꿇게 하고 당당히 사과를 받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허망하게 일본의 식민지가 됐듯이 광복 또한 일본의 패망으로 찾아왔다. 이 점은 1988년 4월19일 눈을 감을 때까지도 권 여사의 가슴에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파일럿 권기옥’의 저자 임씨는 “우리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일본의 망언은 계속 되고 있고 친일파들과 그들의 후손은 여전히 권력을 가진 채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다”며,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어른들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권 여사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독립 운동가이자 최초의 여성 파일럿인 권 여사의 삶을 재조명하는 의미이자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는 누구인가
[초기 비행사들 ②] 영화 <청연>의 주인공 박경원의 '최초' 논란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 : 2005.12.23. 08:39 l최종 업데이트 05.12.25 11:45l
글 : 정혜주(bridalpink)
영화 <청연>의 개봉을 앞두고 평소에 관심도 두지 않았던 우리나라 여류비행사의 '최초' 문제에 깊은 관심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안창남부터 그 이전에 비행기를 탔던 서왈보에 이르기까지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봉건시대, 더구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의 여성이 하늘을 날았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화 <청연>은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그 한 여성에 주목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주인공 박경원의 모습이 실존했던 인물 박경원의 시대적 삶과 너무도 달랐기에 현실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도전의 핵심은 '최초'와 '친일' 문제이다. 여기서는 '최초'의 문제를 다루어 본다.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우리나라의 여성은 세 명이었다. 식민지시대 암울했던 민중들에게는 영웅과 구경거리가 필요했다. 당시 유행가 중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박경원, 권기옥, 이정희. 그들은 모두 마음속에 날개의 꿈을 품었던 진취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미래를 철저하게 갈라놓았다. 나이는 박경원이 제일 많았고 권기옥, 이정희가 뒤를 잇는다.
최초의 공군기 조종사?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
권기옥은 3ㆍ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초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들어간다. 1925년 2월 28일 항공학교를 졸업하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쏟아붓겠다는 일념으로 상해로 돌아온다. 그러나 임시정부에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고민 끝에 원로 독립운동가의 추천으로 중국 군대의 항공대에 들어가서 비행기 조종사로 10년 넘게 활동한다.
한편 박경원이 일본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1927년 1월 28일이었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 것으로 치면 권기옥이 박경원보다 2년 정도 앞선 것이 된다.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박경원 측에 '최초'의 리본을 달아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권기옥씨의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권씨는 군인의 신분으로 비행사가 된 것이며, 영화에서 조명한 것은 민간인 신분으로 비행사 자격증을 딴 박경원의 입지전적 스토리… 엄밀히 말하면 민간인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맞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라고 표현한 것은 불필요한 혼동을 막기 위해서이다."(스포츠조선 기사 중 영화 <청연> 마케팅팀장의 말).
즉 민간인과 군인 신분을 나누고, '비행사'라는 자격증에 큰 의미를 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비행사 자격증이란 무엇인가?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1921년부터 시행한 민간인 비행사 자격시험에서 주는 자격증을 말한다. 즉 '비행사'라는 명칭은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시행하는 시험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2년이나 먼저 날았지만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인정하는 자격증이 없는 권기옥은 비행사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당시의 신문자료를 살펴보면 그 시절 사람들은 권기옥과 박경원을 똑같이 '여류비행사'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1926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中國 蒼空에 朝鮮의 鵬翼- 中에도 女流飛行家'라는 제목으로 권기옥을 소개하고 있다. 1928년 5월 25일자 <중외일보도> 권기옥을 '女飛行士'로 호칭하고 있다. 박경원을 소개한 <동아일보> 1926년 9월 4일자 기사 역시 '朝鮮의 女流飛行士 박경원 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민간인 비행사와 전투기 조종사를 구분하는 것은 비행기가 무기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훨씬 후대에 와서이다.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충북 청원 소재)의 자료실에는 "권기옥은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 졸업(1925년)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며 중일 전쟁 참가, 총 7000시간을 비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초창기 여자 비행사로 권기옥-이정희-김경오를 기록하고 있고, 박경원은 아예 기록에도 없다. 국가보훈처 자료집에서도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서술하고 있다.
정부 관련 자료만이 아니다.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소개하고 조명하고 있는 수많은 언론 보도들이 있었다. '중국 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 최초의 우리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사와의 인터뷰' '한국 최초의 여자파일럿 권기옥씨의 슬픈 8ㆍ15 (<주간여성> 1969년 8월 27일자)' 등….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78년 2월부터 24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나의 이력서'이다. 여기에서는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일 뿐만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1년에는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권기옥의 일대기를 '인물 춘추 -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이라는 제목으로 46회에 걸쳐서 방송했다.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것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공인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되어온 사실이다. 최근 영화 <청연> 제작사 측은 박경원과 관련 '최초' 시비가 일자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라고 홍보 문구를 바꾸었다.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다
누가 '최초'인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최초' '최고'를 중시하는 것은 물질만능 시대의 속도주의, 성과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최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사실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흔히 안창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1919년 가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군의 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왈보를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공군박물관은 1920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미주교포들의 후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 6명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자료를 기록 전시하고 있다.
안창남과 서왈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들 중 과연 누가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인가? 이견은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우리의 하늘을 최초로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윌로스비행학교를 졸업한 6명의 1기 졸업생들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는 자랑스런 하늘의 용사들이다.
그러나 박경원과 권기옥은 다르다. 박경원은 일본이 인정한 최초의 조선인 여자 비행사일 뿐이다. 일장기를 흔들며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박경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권기옥, 둘 중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인가?
비행복장을 한 권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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