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김충정 선생의 기행 [1] 러시아 자이루비노항에서
자이루비노에서 만난 고려인 여인의 눈물
자이루비노 뱃길에 오르다
2013년 12월 15일 속초-자루비노(러시아)-훈춘 노선의 뱃길에 올랐다. 한국에 근 10년을 살면서 한중 간을 무수히 다녀왔지만 러시아 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자루비노라 하면 속초와 중국 동북3성을 연결하는 거점이며, 백두산 관광의 통로이다. 먼 옛날에는 해동성국으로 불릴 정도로 강성했던 발해가 위치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다.
자루비노항 주요 경관으로는 안중근 단지동맹비, 발해성터. 기암괴석이 연속 이어지는 자루비노 해안에 위치한 자루비노항이다. 스테나대아라인 회사가 투입한 16.485톤급의 “뉴불루오선” 선박을 15일 오후에 타고 16일 자루비노항에 내리니 오전 9시경이였다.
러시아의 시간은 중국과 4시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으니, 한국시간, 중국 시간, 러시아 시간이 헷갈리면서, 모두 오리무중으로 되어 버렸다. 러시아에 내리니 모든 것이 이국 풍경이지만 산만은 연변의 산들과 다를 바가 별로없었다. 높지 않은 산 마루엔 참나무(가둑나무),봇나무(자작나무) 등 잡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사람들에게 ‘헐 벗었다’ 하는 느낌을 주었다. 호텔 안내자(한족)의 공지에 의하면 다음날 9시에 훈춘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여 24시간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자이루비노 시장을 들르다
16일 점심시간 후 발이 가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따라가니 호텔부근에 있는 작은 시장이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여 가보니 생김새나 키 꼴이나 피부색이나 우리 백의 민족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50세 좌우의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 곁에는 러시아 남편 같은 사내가 함께 소고기를 팔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면서 서슴없이 말을 건넸다.
“혹시 한국 사람이예요?!”
그녀는 즉시 “다. 다.” 라고 말하였다. 러시아 말로 “옰슴니다”라는 뜻이다. 필자는 학생시절 중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중조우의’ 때문인지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외국어로 배운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녀도 한국어로는 잘 말하지 못하여도 듣는 데는 별로 큰 장애가 없는 모양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데 소통이 좀 되는 듯 싶었다. 그녀와 나눈 눈물의 대화를 적어 보련다.
“저희는 한국사람으로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1910년 한일합방 때 일본놈들이 보기싫어 만주로 들어온후 북로군정서에 있으면서 경신년(1920) 홍범도 봉오동전투와 그해 10월 김좌진 청산리대첩에 참가한 후 훈춘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제의 3광 정책으로 된 ‘경신년 대학살 사건’(학계에서는 ‘경신년 참안’)으로 부대가 러시아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저희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 후 여러가지 원인으로 부대는 러시아에서 해산 되어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하바롭스끼에 있다가. 지금의 자르비노에 왔습니다. 다행이도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중앙 아시아 고려인 집거구에 있었기에 조선인끼리 살게 되어 고려말을 지금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인으로 나처럼이라도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요. 왜 중앙 아시아 이야기가 나오는 가구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 때에 1937년 10월 스딸린시기에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저희 이름은 마리아나 김이죠.”
고려인 마리아나 김
고려인의 이주역사를 읽다
. 필자는 그녀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얼마 전 중국 연변대학 조선-한국학 연구중심 김호응 박사로부터 받은 <정판룡_세계로 가다>(김호응 편찬) 책 내용이 생각났다.
이 책에서 서술한 바를 참고하면, 고려인들의 근대 역사는 이러했다.
고려인들은 1934년 극동지구에서 ‘일본인 간첩’과 ‘인민의 공적’을 청산하였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였으며 1938년말 비(非) 러시아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는 소련 중앙정치국의 내부 지시가 있었다. 이러한 고난의 노정 끝에 백의 겨레는 언어와 문자를 잃거가는 길에 들어섰다.
1937년부터 1953년까지의 민족차별 정책은 극심하여 결국 고려인 후대들은 마리아나 김처럼 한국말을 모르게 되었다. 1937년 10월 연해주와 울라지보스토크, 하바롭스키에 거주하던 조선인 36,422호, 인구 17만 1781명이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당시 소련 내무부장이었던 예조부가 부장회의 주석(총리) 몰로또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37년10월 25일 원동 지방의 조선인 이주는 전부 끝났다. 36,422호, 17만 1781명의 조선인들이 124개의 수송열차에 실려 모두 이주하였다. 깜챠까와 오호쯔크지방에 남아 있는 700명 조선인도 금년 11월 1일 전으로 모두 이주하게 될 것이다. 16,272 호 7만6,525명은 우즈베크공화국으로, 20,170호의 9만5,256명은 까자흐공화국으로 분산시켜 이주하였다.”
이 보고서는 비밀문건으로 여태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소련학자들에게 발견되었다
강제 이주민들은 경찰들의 감시 하에 죄수들처럼 제각기 가정을 단위로 하여 화물차 바곤에 올랐다, 3만 6천여호의 인원이 124개 수송열차에 실려갔다고 하니 열차 한 줄에 300호가 탄 셈이다. 짐차 하나에 적어도 40~50명의 사람이 짐과 함께 실려 있었다.
열차 바곤 안에는 침대가 없으니 바닥에 무엇인가를 깔고 수십 명이 짐승들처럼 몰려 자야 했다. 먹을 것은 차가 이따금씩 섰을 때 남비에다 끓여먹어야 했다. 그때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가장 어려운 것은 짐차 바곤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수십 명이 한차 바곤안에 있으니 거기에서 대소변을 볼 수밖에 없었고, 차는 몇 시간을 간 다음에야 정차하곤 했으니. 어른들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나 늙은이들은 큰 일이었다고 한다. 강제 이주 기간에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근 40일 동안에 수 십 명이 더러운 짐차 바곤에 앉아 있었으니 앓는 사람도 많고, 사고도 많이 났다고 한다. 도중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사람만 해도 몇천명은 될 것이며, 기차 사고로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차가 가다가 서는 곳곳마다 묻어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40여일의 이주가 끝나니 까자흐스탄과 우즈베크스탄의 인적없는 초원지대가 그들을 기다 렸다. 일설에는 끼르끼즈스탄의 고려인 이주민도 그때 강제이주 주민이라 한다.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24호 2014년 10월 30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26호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