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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진감화상 비명병서[眞監和尙碑銘 竝序]>는 신라말의 승려 진감선사 혜소의 덕을 기려 887년에 세운 탑비(塔碑.국보 47호)의 글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쓴 우리나라 최고의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신라 사산비명(四山碑銘)》에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로 되어 있다.
대저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른 차이가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방 출신의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할 수도 있고 유교를 공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에 배를 띄우고 거듭 통역을 바꿔 가면서 유학을 해야 한다. 목숨은 조각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주(寶洲)에 이르기를 고대하면서, 빈손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니 먼저 어려운 일을 겪어야만 뒤에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또한 험준한 곤륜산(崑崙山)을 꺼리지 않고 옥을 캐는 사람이나 여룡(驪龍)이 서린 심연(深淵)을 사양하지 않고 구슬을 찾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교의 혜거(慧炬)를 얻으면 오승(五乘)의 광채와 융화되고, 유교의 가효(嘉肴)를 얻으면 육경(六經)의 진미를 만끽하게 되어, 1천 가문이 다투어 선에 들어오게 하고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 중에는 신독(身毒.불교의 의미)과 궐리(闕里.유교를 의미)에서 설하는 가르침이 흐름도 다르고 체제도 달라서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한 모퉁이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시험 삼아 논해 보겠다.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하나의 글자 때문에 한 문장의 뜻을 해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문장 때문에 전체의 의미를 해쳐서도 안 된다.〔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라고 하였다. 또 《예기(禮記)》에서도 “말의 뜻이 어찌 한 가지뿐이겠는가. 상황에 따라서 각기 해당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은 논을 지어 “석가여래(釋迦如來)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귀착점은 동일한데, 두 종교의 정수를 함께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둘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能兼者 物不能兼受故也〕”라고 하였고, 심약(沈約)은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窮其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심법(心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일컬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月指〕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坐忘〕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멀리 오르려면 가까운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니, 언어로 비유를 취해서 말한들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겠는가.
옛날 공자(孔子)는 문제자(門弟子)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予欲無言 天何言哉〕”라고 하였다. 이는 저 정명(淨名)이 침묵으로 문수(文殊)를 대하고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하늘이야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람들이야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의사를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멀리 현묘한 도를 전하여 널리 우리나라를 빛낸 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또 어찌 우리와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禪師)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요,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에서 벼슬하는 집안이었다. 수(隋)나라 군대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적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었는데, 그때 뜻을 굽혀 고구려의 백성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 뒤 성당(聖唐)의 시대에 와서 옛날 한사군(漢四郡)의 지역이 판도로 들어올 적에, 지금의 전주(全州) 금마(金馬)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부친은 창원(昌元)이라고 하는데, 재가 중에 출가인의 행동을 보였다. 모친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든 사이에 꿈을 꾸니 범승(梵僧)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阿㜷〕의 아들이 되고자 합니다.”
하고는, 유리병을 주는 것이었다. 이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사를 잉태하였다.
선사는 태어날 적에 울지 않았다. 이는 바로 일찍부터 언성(言聲)을 내지 않는 상서로운 싹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갈 무렵에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도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을 피우는가 하면 꽃을 꺾어 헌화하곤 하였으며, 간혹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해 그림자가 옮겨 가도록 꼼짝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사의 선본(善本)은 원래 백천겁(劫) 이전부터 길러진 것으로서 사람들이 발돋움해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머리를 땋은 아동 때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될 때까지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절실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는 한 말의 곡식도 저축한 것이 없었고, 또 천시(天時)를 훔칠 만한 조그마한 땅도 없어서 구복(口腹)의 봉양을 위해서는 오직 자기의 노동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생선 파는 일에 종사하며 어버이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리려고 노력하였는데, 손은 수고롭게 그물을 짜지 않았어도 마음은 물고기 잡는 일을 이미 잘 알아서 철숙(啜菽)의 봉양을 넉넉히 하며 채란(采蘭)의 노래에 걸맞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흙을 직접 등에 지고 날라 봉분하고는 말하기를,
“길러 주신 은혜에 대해서는 애오라지 힘닿는 대로 보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희미(希微)의 경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 뒤웅박〔匏瓜〕처럼 젊은 나이에 그냥 한 곳에만 죽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정원(貞元) 20년(804, 애장왕5)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겠다고 청하여 서쪽으로 가는 배에 발을 붙인 뒤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험난한 길도 평탄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자비의 배를 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넌 뒤에 피안(彼岸)에 도착하고 나서 국사(國使)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뜻이 다르니, 여기에서 작별할까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창주(滄洲)에 와서 신감 대사(神鑑大師)를 찾아보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올렸는데, 절이 끝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생에서 아쉽게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다시 만나니 기쁘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둘러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힌 뒤에 얼른 인계(印戒)를 받게 하였는데, 마치 불이 마른 쑥으로 타 들어가고 물이 저습(低濕)한 곳으로 번져 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승도(僧徒)들은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聖人)을 여기에서 다시 뵙게 되었다.”
하였다.
선사는 형모(形貌)가 검었으므로, 대중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며 말없이 처하는 것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後身)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니, 어찌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邑中之黔〕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만 비교될 뿐이었겠는가. 길이 적자(赤頿)와 청안(靑眼)과 더불어 색상(色相)으로 드러내 보일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원화(元和) 5년(810, 헌덕왕2)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니, 이는 성선(聖善)의 예전의 꿈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을 구슬처럼 맑게 한 뒤에 다시 배움의 바다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서 마치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쪽보다 더 푸른 것처럼 스승을 능가하였다. 마음은 지수(止水)와 같이 맑았지만 행적은 조각구름과 같이 떠돌았다.
본국의 승려인 도의(道義)가 선사보다 먼저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는데, 해후하여 평소의 소원을 풀었으니〔適願〕, 이는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었다. 사방으로 멀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불지견(佛知見)을 증득하고는 의공(義公)이 먼저 고국에 돌아가자 선사는 그 길로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만 길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송실(松實)을 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3년이요, 그 뒤에 다시 자각(紫閣)으로 나와 번화한 교통의 요지에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布施)하며 바쁘게 왕래한 것이 또 3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행(苦行)의 수행을 일단 마친 뒤에, 다른 지방에 만행(萬行)을 하는 일도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를 터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몸의 근본인 고향이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태화(太和) 4년(830년)에 귀국하니, 대각(大覺) 상승(上乘)의 빛이 우리 인역(仁域)을 환히 비췄다. 흥덕대왕(興德大王)이 봉필(鳳筆)을 날려 영접하여 위로하며 이르기를,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지난번에 돌아왔는데 상인(上人)이 잇따라 이르러서 두 분의 보살(菩薩)이 되셨도다. 예전에 흑의(黑衣)의 인걸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납의(衲衣)의 영걸을 보게 되었도다. 미천(彌天)의 자애와 위엄을 온 나라가 기뻐하며 의지하고 있으니,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雞林)의 경내를 가지고 길상(吉祥)의 집을 이룩하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露嶽) 장백사(長柏寺)에 석장(錫杖)을 머물렀는데, 의원의 집에 환자가 많은 것처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사원이 비록 널찍하긴 하였지만, 물정(物情)이 스스로 비좁게 여겼으므로, 마침내 걸어서 강주(康州) 지리산(智異山)으로 갔다. 그때 몇 마리의 오도(於菟)가 포효하며 앞길을 인도하였는데, 위험한 길은 피하고 평탄한 길로 향하는 것이 유기(兪騎)와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따르는 자들이 겁내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이것은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 영산(靈山)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할 적에 맹수가 앞길을 인도한 결과 깊이 산혈(山穴) 속으로 들어가서 석가모니의 입상(立像)을 보게 된 일과 사적(事跡)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니, 저 축담유(竺曇猷)가 꾸벅꾸벅 조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서 송경(誦經)하는 소리를 잘 듣게 한 일만 전적으로 승사(僧史)에서 미담으로 꼽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화개곡(花開谷)의 고(故) 삼법 화상(三法和尙)의 난야(蘭若)의 옛터에 당우(堂宇)를 수축하니, 엄연히 조물(造物)이 이루어 놓은 것만 같았다.
개성(開成) 3년(838, 민애왕1)에 민애대왕(愍哀大王)이 갑작스럽게 보위에 오르고 나서 깊이 부처의 자비에 의탁할 목적으로 새서(璽書)를 내리고 재(齋)를 올리는 비용을 보내며 특별히 발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행하면 될 것입니다. 발원은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이 왕에게 복명을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한편으로 깨닫는 점이 있었다. 선사가 색(色)과 공(空) 두 가지를 초월하고 정(定)과 혜(慧)에 모두 원만하다 하여, 왕이 사신을 보내 혜소(慧昭)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이 ‘소(昭)’ 자는 성조(聖朝)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이와 함께 대황룡사(大皇龍寺)에 사적(寺籍)을 편입시키고 경읍(京邑)으로 올라오도록 징소(徵召)하였는데, 왕복하는 사신의 말고삐가 길에서 교차하였지만, 선사는 산악처럼 우뚝 서서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에 승조(僧稠)가 원위(元魏)의 세 차례 초빙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大道)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在山行道 不爽大通〕”라고 하였는데, 깊은 산속에 거하며 고상한 뜻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달라도 그 지취(志趣)를 서로 같이 한다고 하겠다. 여러 해를 머무는 동안 가르침을 청하는 자들이 벼와 삼대처럼 대열을 이루어 거의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이한 지역을 두루 물색하다가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전망이 트이고 상쾌하기가 으뜸이었으므로 이곳에 선찰(禪刹)을 경영하였다. 뒤로는 노을 진 산봉우리를 기대고 앞으로는 구름 이는 시내를 굽어보았다. 시계(視界)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악이요, 귀뿌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와 날리는 여울물 소리이다.
여기에 또 봄에는 냇물에 꽃잎이 떠서 흘러가고,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이 길에 드리우고, 가을에는 골짜기에 달빛이 부서지고, 겨울에는 산마루에 흰 눈이 뒤덮인다. 이처럼 사시에 따라 모습을 뒤바꾸고 만상(萬象)이 빛을 교차하는 가운데, 100가지 자연의 피리 소리가 조화롭게 연주되고 1천 개의 바윗돌이 빼어난 자태를 경쟁한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에서 노닐었던 자들도 여기에 와서는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기를,
“원공(遠公)의 동림(東林)을 바다 밖으로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蓮花世界)야 범인의 상상으로 추측해서 될 일이 아니겠지만, 호리병 속〔壺中〕에 별도로 천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하다.”
하였다. 대나무 홈통을 시렁처럼 이어 물을 끌어 와서 섬돌 주위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사원의 현판을 삼았다.
선종(禪宗)에서의 법통을 손꼽아 세어 보면, 선사는 바로 조계(曹溪.혜능)의 현손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六祖.혜능)의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분 바른 벽에 채색을 하여 널리 중생을 유도(誘導)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이는 경(經)에서 말한 바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까닭에, 현란하게 채색하여 여러 가지 상들을 그린 것이다.〔爲說衆生故 綺錯繪衆像〕”라고 한 것이다.
대중(大中) 4년(850, 문성왕12) 1월 9일 아침에 문인(門人)에게 고하기를,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하니, 내가 이제 가려 한다. 일심(一心)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塔)을 세워서 육신을 보존하려 하지 말고, 명(銘)을 지어서 행적을 기록하려 하지 말라.”
하고는, 말을 끝내자 앉은 자세로 입멸하였다. 세속의 나이로 77세요, 승려의 나이로 41세였다. 이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갑자기 일어나고, 범과 늑대가 슬피 울부짖었으며, 삼나무와 잣나무가 변하여 시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색(紫色)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귀로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양사(梁史)에도 시중(侍中) 저상(褚翔)이 사문(沙門)을 청해 모친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복을 빌었을 때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러고 보면 거룩하게 말 없는 가운데 감응한 것에 어찌 속임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道)에 뜻을 둔 자들은 말을 전해 조문하였고, 정(情)을 잊지 못하는 자들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해하며 애도한 것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영함(靈函 .관곽)과 유수(幽隧.묘혈)를 사전에 준비해 두게 하였던바, 제자 법량(法諒) 등이 호곡하며 선사의 시신을 받들어 하루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 묘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잃지 않았으며, 말도 기교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입는 것은 허름한 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거친 음식도 맛있게 여겼으며, 도토리와 콩이 뒤섞인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다. 현귀한 자들이 때때로 찾아와도 대접하는 음식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문인이 배 속을 거북하게 할 것이라면서 난색을 표명하기라도 하면, 선사가 이르기를,
“마음이 있어서 찾아왔을 것이니, 거친 밥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고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이 대하였다. 매번 왕인(王人.사신)이 역마(驛馬)를 타고 왕명을 전하러 와서 법력(法力)을 멀리서 기원할 때면 말하기를,
“왕토(王土)에 거하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자라면 그 누가 마음을 기울여 호념(護念)하며 임금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또 뭐하러 꼭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 같은 이 몸에게 멀리 와서 왕명을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역마가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실로 안쓰럽기만 합니다.”
하였다. 혹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자가 있으면, 질화로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만들지도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을 경건히 할 따름이다.”
하였으며, 또 중국차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돌솥에 불을 지피며 가루로 만들지도 않고 달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
하였다. 진성(眞性)을 보지하고, 속정(俗情)을 멀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선사는 본디 범패(梵唄)를 잘하였다. 그 음성은 마치 금옥(金玉)이 울리는 것 같았는데, 측조(側調)로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고도 애잔하여 제천(諸天)의 신들을 환희하게 할 정도여서 길이 먼 곳까지 유전(流傳)될 만한 것이었다. 이를 배우는 자들이 당우(堂宇)에 가득하였는데, 선사는 싫증을 내지 않고 이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동국(東國)에서 어산(魚山.범패)의 묘음(妙音)을 익히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막는 것〔掩鼻〕처럼 하면서 옥천(玉泉.진감 선사)의 여향(餘響)을 본받고 있으니, 이 어찌 성문(聲聞)으로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조정 때였는데, 상이 마음속으로 측은하게 여긴 나머지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가 선사의 유계(遺戒) 내용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겨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3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문인들이 능곡(陵谷.세상이 크게 변함)을 염려하여 선사의 법도를 흠모하는 제자들에게 불후하게 할 방도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내공봉(內供奉) 일길한(一吉干)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 낭(嵩文臺郞) 정순일(鄭詢一)이 쇠를 자를 정도로 마음을 같이하여 선사의 행적을 비석에 새기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헌강대왕(憲康大王)이 지화(至化)를 드넓히고 진종(眞宗)을 흠앙하는 뜻에서 진감 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追諡)하고 대공령탑(大空靈塔)이라는 탑명을 내리는 한편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누리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해는 양곡(暘谷.전설 속의 해 뜨는 곳)에서 떠서 으슥한 곳을 비추지 않는 때가 없고, 바닷가 해안에 뿌리박은 향초는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더더욱 향기를 발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선사가 명(銘)을 짓지도 말고 탑(塔)을 세우지도 말라고 유계(遺戒)를 내렸는데, 서하(西河)의 문도(門徒)에 내려와서 선대(先代)의 뜻을 확고하게 봉행하지 못하였다. 이는 임금에게 억지로 청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임금이 자진해서 그렇게 해 준 것인가. 그저 흰 옥의 흠이 되기에 알맞은 일이라고 하겠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이렇게 비난한다면 그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도〔不近名〕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대개 선정(禪定)의 힘에 의한 결과로 받는 보답이다. 재처럼 싸늘하게 사그라지고 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함으로써〔爲可爲於可爲之時〕 그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거북이의 등에 비석을 올려놓기도 전에 용이 승천하듯 헌강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今上.정강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 부촉한 그 뜻에 잘 부응하여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였다.
이웃 산의 초제(招提.사찰)에 또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이 서로 겹쳐서 사람들이 듣고 의혹하였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취하려면 의당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라야 했으므로, 사원의 앞과 뒤의 경관(景觀)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문간에 두 개의 시내가 임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상이 사원의 제호(題號)를 내려 쌍계(雙磎)라고 하였다.
상이 하신(下臣)에게 거듭 명하기를,
“선사는 행실로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진출했다. 그러니 그대가 명(銘)을 짓도록 하라.”
하기에, 치원(致遠)이 배수(拜手)하고 아뢰기를,
“예, 잘 알겠습니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물러 나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중국에서 명성을 낚으며 장구(章句) 사이에서 살지고 기름진 작품들을 저작(咀嚼)하였을 뿐, 구준(衢罇)에 대해서는 만끽하며 취해 보지 못한 채, 오직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진흙탕 속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린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더구나 불법(佛法)은 문자를 떠난 것으로서 언어를 구사해 볼 여지가 전혀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만약 뭐라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북쪽으로 수레를 몰면서 남쪽에 있는 초(楚)나라의 영(郢)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의 외호(外護)와 문인의 대원(大願)을 생각한다면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눈을 분명하게 밝혀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과감하게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두 가지 일을 한 몸에 떠맡고서 있는 힘껏 다섯 가지 기능을 한번 모방해 보기로 하였다. 돌에 신이 붙어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부끄럽고 두렵기는 하지만, 도(道)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서투른 솜씨지만 필봉(筆鋒)을 숨기는 일을 신이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앞서 언급한 뜻을 거듭 펼쳐서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입 다물고 선정 닦으며 / 杜口禪那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나니 / 歸心佛陀
근기(根機)가 성숙한 보살의 차원에서 / 根熟菩薩
도를 넓힐 뿐 다른 뜻이 없었다오 / 弘之靡他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고 / 猛探虎窟
고래 물결에 멀리 배를 띄워 / 遠泛鯨波
가서는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 去傳祕印
와서는 신라를 교화했다오 / 來化斯羅
그윽한 곳 찾아 승경을 가려 / 尋幽選勝
바위 벼랑에 터 잡고 쌓은 뒤에 / 卜築巖磴
물과 달을 보며 심회를 맑게 하고 / 水月澄懷
구름과 샘물에 감흥을 부쳤다오 / 雲泉奇興
산은 성과 더불어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 山與性寂
골에는 범패(梵唄) 소리 메아리치는 가운데 / 谷與梵應
부딪치는 경계마다 걸림이 없었나니 / 觸境無碍
기심(機心)을 쉬는 이것이 증입(證入)이라 / 息機是證
도로써 다섯 조정 협찬을 하고 / 道贊五朝
위엄으로 뭇 요괴를 꺾으면서 / 威摧衆妖
묵묵히 자비의 그늘 드리웠을 뿐 / 默垂慈蔭
임금님의 초빙은 한사코 거절하였다오 / 顯拒嘉招
바다야 원래 표탕하는 법이지만 / 海自飄蕩
산이야 언제 동요한 적 있었으리 / 山何動搖
어떤 생각이나 염려도 하지 않고 / 無思無慮
깎거나 새겨 꾸미지도 않았다오 / 匪斲匪雕
먹는 것도 두 가지 음식이 없었고 / 食不兼味
입는 것도 꼭 구비하지 않았으며 / 服不必備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 風雨如晦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오 / 始終一致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벋어 나는데 / 慧柯方秀
불법의 동량이 느닷없이 쓰러지니 / 法棟俄墜
동천(洞天)의 골짜기는 처량해지고 / 洞壑凄涼
연하(煙霞)의 등라(藤蘿)는 초췌해졌도다 / 煙蘿憔悴
사람은 없어도 도는 그대로 / 人亡道存
가신 님 끝내 잊을 수 없어 / 終不可諼
상사가 위에 탄원서를 올리니 / 上士陳願
임금님이 은총을 베풀었다네 / 大君流恩
해외에 불법의 등불 전하며 / 燈傳海裔
운근 위에 우뚝 솟은 탑이여 / 塔聳雲根
천인의 옷자락에 반석이 다 닳도록 / 天衣拂石
산사(山寺)에 영원히 빛나리로다 / 永耀松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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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액(篆額): 敭海東故眞鑑禪師碑. 첫자 敭(양)을 唐(당)의 古字로 본다는 학설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