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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나뭇잎숨결
사티쉬 쿠마르 ― 땅 위를 걷는 사람 대담자 ― 데릭 젠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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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월의 어느 맑은 날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막 방송을 마친 참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작은 카페로 걸어가 케이크 한조각을 앞에 두고 앉았다. 나는 그의 온후함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곧바로 생태적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곧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미처 녹음기를 켜기도 전에 그는 생태적 문제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데릭 젠슨) 쿠마르 나는 매 순간을 창조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예전에 내가 썼던 것이나 말했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현재를 살고, 항상 주의를 집중하며 산다는 거지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듣는 것, 보는 것들을 항상 의식하는 겁니다. 내 주위와 정신과 감정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것 말입니다.
젠슨 그건 너무 많은 일이 아닌가요? 쿠마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된 일은 아니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창조적인 일이고, 그래서 도전적이며 즐거운 일입니다. 삶을 '벼랑'에서 살기 시작하면, 그래서 진정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산다면, 매 순간이 모험이 됩니다. 물론 매우 힘든 삶의 선택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런 삶을 통해 일 자체로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삶이 정해진 틀속으로 들어가버리면 ― 수입, 집, 생활, 책 등 모든 게 정돈되고, 계획되고, 조직된다면 ― 일의 양은 적어지겠지만, 아마 … 글쎄요, 당신의 느낌이 어떨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나라면 불만족스러워질 겁니다.
젠슨 어떻게 이런 삶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까? 벽돌 한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한장을 놓았던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핵무기에 반대해서 평화행진을 하면서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 디씨까지 걸어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걸었던 겁니다. 도보여행을 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인생을 살아가거나 모든 긴 여정들은 끈질기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보면 "굉장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만,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한번 붓질을 하고 그 다음에 또 한번의 붓질을 한 겁니다. 매번 여기에는 어떤 색을 넣을 것인지, 어떤 질감을 나타낼 것인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젠슨 그럼 의식적으로 당신의 삶을 만들어왔다는 말씀인가요? 쿠마르 언제나 그래왔죠.
젠슨 그 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는 걸 느끼십니까? 쿠마르 나는 다행하게도 어머니나 교육에 의해서 억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홉살에 자이나교 승려가 되는 것 같은, 위험하고 모험적인 길을 걸을 기회가 있었던 거죠. 그 당시에도 그것은 모험적인 일이었습니다.
젠슨 삶의 과정이 바로 예술창조라는 개념은 여러 예술가들의 말을 연상시키는데요.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만. 쿠마르 예술이 그런 식으로 세상과 분리된다는 건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나의 관점으로는 예술과 삶, 그리고 세상은 크게 보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튜디오나 뭐 그런 곳에서 순간적으로 고립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아주 커다란 오류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명상을 할 때 혼자 있다고 느끼기는 합니다만, 내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점에 관련해 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곳으로부터 고귀한 생각들이 내게 오게 하라. 그리고 그 보답으로 나의 고귀한 생각들이 온 세상으로 퍼지게 하라."
젠슨 만일 삶이 예술과 같다면, 삶은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긴, 60년 동안의 대화이죠.
젠슨 누구와 말입니까? 쿠마르 타자들이죠. 이 타자들은 결국 모든 것입니다. 나무나 강, 새나 산, 배우자, 자식들, 조상들 모두입니다. 내 어머니 얘기를 했는데, 어머니도 이 대화 속에 있습니다.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의 스승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베다에 대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은 과거와의 대화이고, 미래와의 대화입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화인 것입니다.
젠슨 당신의 생각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입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은 바로 내 삶에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네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주검과 어머니가 울며 상복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젠슨 죽음이 삶의 대화를 시작하는 보편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모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특별합니다. 모든 대화가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각각 독특한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내가 죽음의 공포와 그 존재, 그리고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홉살에 나는 자이나교 승려가 되었습니다.
젠슨 섹스는 어떻습니까? 쿠마르 금지됩니다. 섹스는 세속의 것입니다. 자이나교에서는 목샤 ― 영혼의 구원 ― 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과 몸에 대한 집착과 관계를 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아버지나 어머니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사랑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젠슨 제게는 상당히 끔찍하게 들리는군요. 쿠마르 그것은 자이나교의 죽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만일 삶이 삼사라 ― 탄생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 ― 라면 자이나교 승려의 목표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젠슨 왜 자이나교를 떠났습니까? 쿠마르 주된 원인은 내 친구 하나가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책을 준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종교적인 책이 아니면 읽을 수 없다고 했더니 그 책은 매우 깊은 의미에서 종교적인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읽었습니다. 간디는 바로 지금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삶과 세계에서 사람을 분리시키려는 종교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신을 대면하기 위해 승려는 이 세상에는 등을 돌려야 한다는, 내가 배운 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젠슨 그래서 더이상 세상을 포기할 수 없게 되었군요? 쿠마르 그러나 승려생활은 그 이후 나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생활의 경험으로 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을 체득하였습니다. 맨발로 뜨거운 땅 위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거나, 돈과 집, 부모 없이 살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온 것은, 되돌아보았을 때, 내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정신과 세상을 분리시키는 것 ― 영성은 성자를, 예술은 예술가를, 음악은 음악인을 위한 것일 뿐이며,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 ― 이 옳지 않다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길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젠슨 세상을 포기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의 질식 사이에 관계가 있습니까? 쿠마르 내 경우에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실제로 나를 아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얼마나 적절하고 유익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영혼에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게 되자 내가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 "나는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자이나교를 떠난 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쿠마르 나는 비노바 바브와 같이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간디와 함께 일했던 분으로, 간디의 정신적인 후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로 가장 빈곤한 계층, 즉 하리잔 ― 불가촉천민 ― 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기 위한 토지개혁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전역을 걸어서 다니면서 하리잔들과 지주들에게 땅도 공기나 해, 물과 같이 신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들 ― 그는 '흙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 은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의 위는 무척 작지만 가난한 자들의 위는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5천만에이커의 땅을 요구했습니다. 300에이커를 소유한 지주가 단 1에이커만 내놓을 때에 그는 만일 사원을 짓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되겠지만 가난한 이들이 땅을 갖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6분의 1은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땅을 내놓았습니다.
젠슨 그러나 동반관계란 그 개념에 있어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 근거하는 게 아닙니까? 어떻게 한쪽은 부유하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데 동반자 관계가 성립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나는 영성적 동반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주들이 소작인들의 선의와 선한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힘의 균형은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동반자 관계는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겠지만, 당장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비노바의 토지개혁은 영성적 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반자의 관계로 살 수 있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그런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작을 했습니다. 많은 지주들이 그들의 땅의 6분의 1이 아니라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대화를 거부하는 지주들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쿠마르 우리는 그들이 "오늘은 대화를 거부해도 내일 일은 모른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앉아있는 이 카페에 들어오려면 먼저 출입문을 찾아야겠지요. 다른 곳으로 들어오려고 하다가는 벽에다 머리를 부딪히게 될 뿐입니다. 지주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비슷합니다. 기다리고 찾으면 약한 부분, 마음을 여는 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문을 찾지 못했어도 다음날은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문이 잠겨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열쇠를 찾았다 해도 녹이 슬어있을지도 모르며, 기름칠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이 많기는 했지만, 우리가 한발자국씩 나아간다면 궁극적으로는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만일 저항에 부딪히면 물러났다가 다음에 다시 그 지주의 친구 ― 이미 땅을 내놓은 ― 와 같이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주는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니라면, 다시 다음에 찾아가는 겁니다.
젠슨 만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착취를 멈추지 않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면요? 히틀러 같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쿠마르 집이 불에 타서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물을 많이 끌어와서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예방책으로서의 원칙입니다. 집에 불이 붙기 전에 먼저 소화기와 탈출 통로, 비상구를 확보해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비폭력적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미디어도 비폭력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불만을 가진다면 무시하거나 억압해선 안됩니다.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의논해보자"고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젠슨 아직 평화로운 토착문화가 많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의 시메이나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오카나간스 같은 곳 말입니다. 쿠마르 이들 문화가 많은 경우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도 비폭력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축장에서 동물들을 죽이고 공업의 형태로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가혹하게 다룬다면, 그런 잔혹성이 우리의 마음에 배어들어 다른 인간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젠슨 우리가 먹는 것들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들지요. 쿠마르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비폭력은 히틀러와 관계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죠. 비폭력은 삶의 방식입니다.
젠슨 비노바 바브와 함께 당신은 땅을 위해 걸었습니다. 1962년부터는 평화를 위해 걸었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마치 지금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다가 신문의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90세의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핵 반대 시위를 하다가 투옥되었다는 글이었습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90세에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동료 프라바커 메논과 의논하여, 핵 강대국들의 수도인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까지 평화행진을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버트란드 러셀에게 우리가 도우러 간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나는 매우 늙었으니 빨리 걸으라"고 답장을 했더군요.
젠슨 그것이 당신의 삶의 패턴인 것 같습니다. 아무런 방비 없이 미지의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것 말입니다. 쿠마르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과 토지를 구하는 것, 그리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땅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베풀어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게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나의 삶은 믿음으로 이루어져왔던 것입니다.
젠슨 사람들이 실제로 도움을 주었습니까? 쿠마르 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온 마을 전체가 먹을 것을 들고 우리를 환영하러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를 위해 잔치를 열고 우리의 발을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난처하게 여겼지만 사람들이 굳이 그렇게 하겠다더군요.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발을 주었습니다. 우체국 직원은 우표를 주었습니다. 이발사는 면도를 해주고, 택시기사들은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은 거절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었지만 그것도 또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어떤 아이가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정 코스에서 상당히 벗어나야 했지만 우리는 그 청을 받아주었습니다. 동베를린 경계에서 한 보초는 자신도 총을 버리고 평화를 위한 싸움에 동참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행진에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쿠마르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 평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한 마을에서의 일인데, 그 집의 남편이 우리를 초대했습니다만, 그 아내는 우리를 쫓아내더군요.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밤을 묵어갈 손님을 데리고오는 데 그만 질려버렸다고 말했습니다만, 실은 정치와 평화를 얘기하며 인도에서 온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젠슨 보통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한다고 나선 이들의 반응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쿠마르 정부들의 반응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접하는 데서부터, 문제는 자신들이 아니라 적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다양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감옥에 갇혔다가 국외로 추방당했습니다.
젠슨 환경운동이나 반기업운동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차이가 나타납니다. 보통 시민들은 연어의 멸종을 원하지 않고, 다국적 기업들을 좋아하지도 않죠. 그러나 실제 행동에는 큰 차이가 … 쿠마르 한편으로는 기업과 정부기관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보통 사람들이 있죠.
젠슨 그리고 또 이런 기관들 내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그 기관들 자체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쿠마르 그것은 일자리와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저당권, 보험, 연금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가 선전이나 광고, 교육,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조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반사회적이라고 믿도록 세뇌된 거지요.
젠슨 동감입니다. 나는 콜로라도 광산학교에서 물리학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창들은 대부분 핵잠수함이나 다국적 정유회사, 광산기업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틀에 묶여서 살 수 없었던 거죠. 어떤 이들은 내게 마련되어 있는 삶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용감하다고 합니다만, 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나는 불행했습니다.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함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두려움은 우리 사회의 지배요소입니다. 어린시절부터 부모, 학교, 정부가 두려움을 키워줍니다. 두려워하도록 양육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갈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아주 쉬운 형태의 거짓 안정을 제공합니다. 돈이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달러의 독재 밑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공적 삶뿐만 아니라 사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젠슨 이런 사고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 걸까요? 쿠마르 광고가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상품을 사면 행복해지고, 안전하고, 사랑받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존경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매일 봅니다. 매일 10억달러가 광고에 쓰여집니다. 매일 말입니다! 일년에 3650억달러입니다!
젠슨 그런 수치를 들을 때마다 몇년 전에 읽었던 비교 수치가 떠오릅니다. 70년대 후반에 천연두를 없애는 데 약 3억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좀더 적은 비용으로 5억명의 어린이들에게 수두, 디프테리아, 홍역의 예방접종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매년 25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억달러면 제3세계의 5백만 어린이들을 1년 동안 학교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광고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깨끗한 물이 부족한 모든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쿠마르 단지 악하거나 부패한 지도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주들보다 하리잔들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더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리, 핵폭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권리나 온전한 세상에서 깨끗한 공기와 물을 마시며 살아갈 권리가 모두 자신들에게 있음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세뇌되고, 조작된 대로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의 마음, 존재, 눈, 사고는 한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전지구적 단일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생산자이고 제조자이며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젠슨 산업문명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라 보십니까? 쿠마르 소련은 붕괴했죠. 아파르트헤이트도 사라졌습니다. 이 산업주의, 물질주의의 단일문화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영구히 노예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시스템은 모래 위에 서있습니다. 생태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이런 체제는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젠슨 많은 환경운동가들은 회색곰이나 연어 혹은 그밖의 생물들이 산업문명이 붕괴할 때까지 멸종되지 않게 하여 그들에게도 삶을 지속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일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그때가 되었을 때, 다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남기기 위해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토착민들도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도 그와 같은 요소가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공동체의 의미를 유지하고,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보존하려는 시도 말입니다. 쿠마르 그런 문제에 관련해서 내가 사용하는 두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구명보트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문명이라는 배가 침몰할 때 우리도 함께 가라앉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대안적 기술, 공동체, 예술, 작은학교, 수공예 ― 이런 것들이 바로 구명보트입니다.
이 대담기록의 출전은 The Sun 1999년 8월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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