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손뼉, 하얀 향기, 상처난 고추(수필) 코흘리개
애석하게도 지금은 학생이 없어 소풍을 가지 않는 학교가 대부분이지만, 초등학교시절 정확히 말하면 나 국민학교 시절엔 어느 국민학교나 봄가을엔 빠뜨리지 않고 소풍을 갔었다.
현재는 전교생 수가 70여명이지만, 당시 전교생수가 2,700여명인 우리 대야국민학교에서도 그랬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봄이나 가을이나 소풍은 늘 대야면 소재지 내에 있는 광법사나 운심사, 그리고 일명 새창이 다리가 있는 신촌마을의 강변, 이렇게 3곳으로만 갔었다.
그 당시 우리 국민학교는 전교생이 모이는 운동장 조회를 한주에 두 번 정도 했는데, 그 조회 때 교장선생님께서 훈시 중에 열흘 전쯤 소풍날을 알리면 그날부터 우리 학생들 대부분은 설레임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 소풍가는 전날이 되면 우리들의 가슴은 드디어 만삭이 된다. 그래서 소풍 전날 밤엔 만삭된 가슴으로 인하여 우리 학생들 대부분은 끝내 양수가 터져 다른 날과는 달리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잠을 몹시 설치곤 했다.
광법사는 우리 대야학교에서 2km 보다 조금 더 떨어진 산골에 있는데, 그곳으로 소풍 갈 땐길 양편으로 동오산 마을과 서오산 마을을 끼고 두줄 서 간 뒤, 오동리 방죽 좌측에 있는 서악마을의 모정을 지나게 되고, 거기서 또 약 1Km를 더 걸어가면 마침내 도시의 귀티 나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산허리에 좌정한 광법사가 햇빛 가득한 햇살 옷을 입은 채, 소풍 오는 코 흘리기 우리 일행들을 향해 금방이라도 버선발로 뛰어올 것처럼 소풍일행들을 반갑게 맞이해주곤 했다.
운심사는 1km 남짓 떨어진 산골에 있는데, 그곳으로 소풍 갈 때도 길 양편으로 동오산 마을과 서오산 마을을 지나 고아원인 상록원 앞길까지 총 700여m를 가면 오동마을 모정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또 300여m를 더 가면 우리 외할머니의 자태로 좌정한 운심사가 햇살 옷을 반쯤 입은 채, 소풍 오는 우리 일행들을 두 팔 벌려 껴안아줄 듯, 반갑게 맞이해주곤 했었다.
또한, 그 두 곳 사찰의 직원들과 신도들 역시 우리 소풍일행이 하산할 때까지 즐거운 소풍이 되도록 우리 일행들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두 줄로 서서 광법사나 운심사로 봄 소풍을 가면 길 가장자리에 피어, 서커스하듯 긴 허리를 넘어질 듯 늘어뜨린 개나리들이 양 길가에서 노란 손뼉을 우레와 같이 치며 소풍가는 우리꼬마들을 환영해 주었고, 서로 키 재기 하며 피어있던 민들레들도, 두 줄로 서서, 뜸북새와 오빠생각 노래를 연이어 부르며 소풍가는 우리 코 흘리기들을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쳐다보면서도 노래가 끝날 무렵이면 백일아기 손톱만한 노란 손으로 개나리처럼 노란 손뼉을 북처럼 치며 늘 우리 고마들을 환영해주었다.
신촌마을 부근의 강변 소풍은 지금의 만경강 다리까지 약 3km를 간 뒤, 거기서 우측 강변을 따라 약 500여m를 더 갔는데, 그곳으로의 소풍은 자동차 길(현재는 자동차 전용 도로)로 걸어 가야하므로 위험하기에 4학년 이상만 갔고, 그것도 어쩌다 운 좋은 학년만 갔다. 우리 학년은 운 좋게도 갔는데, 5학년 가을 소풍 때 갔었다.
그곳으로 소풍 갈때는, 김제 방향 자동찻길을 따라 남우마을과 상리마을, 장좌마을 및 신창마을 입구를 걸어서 지나가야 했다. 그래서 그곳에 소풍갈 때에 트럭이나 버스가 ‘휙’ 지나가기라도 하면 두 줄로 줄서서 도보로 소풍가는 우리 일행은 그 순간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차선도, 인도도 없는 자동찻길 가에 잠시 서서 공포에 떨며 뿌연 먼지를 구름이불처럼 뒤집어써야만 했었다.
그러나 가난으로 밥상에 먹을 찬이 별로 없던 그 시절, 어른이나 아이나 그런 먼지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신촌마을 강변 소풍은 부푼 기대로 인하여 강변에 도착하기 전 이미 모든 소풍일행들이 뒤집어 졌다. 그건 반찬거리를, 그것도 좋은(?) 반찬거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하니, 형들 말대로 벌린 입이 닫혀지지 않을만큼
어마어마한 광경이 갯벌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당시 고등학생인 우리 외삼촌의 허벅지처럼 살찐 게들이 가득 차, 그것도 장사꾼들이 다라에 이고 매일 집집마다 팔러 다니던 게들이 게반뻘반으로 광활한 갯벌 쟁반에서 가득히 활보하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마치 게들이 우리 일행들을 향해 “나 잡아봐요” 하고, 일제히 소리지르며 우리들을 부르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리하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 친구들과 나는 자동으로 갯벌에 뛰어들게 되었고, 곧 이어 각자의 방식대로 순발력을 발휘, 나와 우리 친구들은 게들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었다.
대족은 2족이요, 소족은 8족이라. 전진 후진하는 고기 사시오
생각난다 6학년때 배운 시조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오늘 나는 모처럼 홀로, 걷기운동하며 광법사를 가고 있다. 초등시절의 광법사소풍이 생각났다. 나이 70대 노년인데도 그시절이 그립다. 만감이 교차한다. 눈가에 이슬아닌 이슬이 맺힐 만큼 그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7, 8년 전엔 더 자주 매일 가다싶이 했지만, 그때는 걷기운동을 목적으로 5, 6명이 새벽에 떼를 지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듯 걸었기에 지금처럼 그 시절 소풍이 그리움으로 새록새록 많이 생각나지는 않았었다.
아까시아 꽃....
운심사입니다. 위치는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오동길 30-28입니다. 운심사 사찰이 붙여진 것에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이곳 운심사의 명칭이 구름이 깊은 곳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국 불교 태고종 사찰은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운심사를 찾아가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쉽게 찾아갈 수 있으며, 사찰 뒤쪽으로는 대나무 밭도 무성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나이 70대 노인이 되어 코흘리기 때의 소풍길을 가고 있다. 우리모두는 너무 가난했기에 내가 자가용을 타고 이길을 갈거라 상상도 못했던 그 시절, 그 시절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발로가 아니라 승용차로 만경강을 가고 있다. 달리다가 중간중간 내려 원근 경치를
살피면서 거북이처럼 가도록 액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