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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9. 18. 주일 큐티
요한복음 7:37 ~ 52
부인할 수 없는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
관찰 :
1)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예수님은 초막절 설교를 시리즈로 준비하신듯하다. 초막절의 클라이맥스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는 생수 설교를 하셨다. 원래 초막절은 한 주간이었지만, 이들은 거기에 하루를 더해서 8일간 지켰다.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 기간에 매일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가지고 행렬을 지어 성전 문으로 돌아와 물을 붓는 행위를 했다. 이것의 의미는 조상들이 광야에 있을 때 바위에서 솟은 물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러한 행위를 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생수 설교를 하신 것이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은 누구도 할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메시지였다. 이 예수님의 메시지는 메시야를 그 어느 때보다 갈망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는 메시지였다. 메시야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을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강력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 갈증을 해소하게 되었듯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영적 갈증이 해결될 수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하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어지고 있는 혁명적 메시지였다.
-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나를 믿는 자”와 연결해서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뜻이 된다. 성령께서 성도 개개인 마음의 좌소에 좌정하심으로 역사하시게 되고, 충만하게 되심을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성령과 더불어 동행하며, 성령의 소욕으로 가득 채워지는 존재가 됨을 알려주시고 있다.
- 39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예수님은 실로 자신이 떠나시고 성령이 오시게 되는 모든 프로세스를 알고 계셨고, 그것을 많은 무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이 메시지를 받는 이들 중에는, 성령의 강림 이후에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임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온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예수님의 메시지 이후에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아 일어난 사건이 되었다.
2) 그리스도 논쟁
- 40절.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고 담대하게 선포되자 영이 살아있는 자들이 반응을 하고 있다. “그 선지자”는 신 18:15에서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를 의미한다. 이미 구약에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가득 차 있고, 이들이 마음을 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예수님을 알아챌 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되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41절.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견해가 갈리게 되었다.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이 갇혀서 자신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만 그리스도를 판단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증거를 취한 자들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 지역을 묻지 않고, 단지 그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에 생각이 함몰되어 있다.
- 42절.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 성경에 메시야에 대한 기록은 탄생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역사는 다른 모든 것들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몇 가지의 모순된다고 여기는 것들을 크게 붙잡고 자신들의 생각을 굽히려 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굽히려 하고 있다.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탄생 지역을 물어보아야 했다.
- 43절 ~ 44절.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이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어찌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럼에도 이들이 계속해서 묻고 또 묻는 것이 “네가 누구냐?”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답이 나오면, 그 답이 정답이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대답에 대해서 기억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3) 예수님을 부인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빈약한 논리
- 45절.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보고하러 온 이들의 대답은 오히려 진실하다. 아랫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보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왜 잡아오지 않았냐는 추궁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빈 손으로 돌아온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느끼고 경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46절.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었다. 이들도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이었기에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있다는 확신에 접근하게 된 것이었다.
- 47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들의 주장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모든 생각과 판단을 닫아버리고자 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가 된 상황과 사정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신앙은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 48절.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 향후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 때에도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부인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싶은 것이지 어떤 논리나 정황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 49절.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 그들의 아랫사람들이 과연 율법을 알지 못했을까? 바리새인들은 이제 완전히 미쳐 돌아가고 있다. 저주를 발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랑인데,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지도자임을 자처하고, 경건에 누구도 자신들을 따라올 수 없다 자부하는 이들이 율법의 핵심가치를 파괴하고 있다.
- 50절.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가 여기에서 중재를 하고자 매우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사실은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51절.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 율법을 운운하는 이들에게 율법의 프로세스를 지적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니고데모는 율법에 정통한 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바른 지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화된 신앙으로 똘똘 뭉친 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된다. 니고데모도 그러한 반응이 있을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향후에 니고데모가 사도 요한과 만나서 이 때의 정황을 자세히 말해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은 이 때 니고데모가 한 말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간의 은밀한 대화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 52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 이 말은 이미 그들의 아랫사람들이 무리들에게 했던 바의 주장이었다. 갈릴리에 산다고 모두가 다 갈릴리에서 태어난 갈릴리 출신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이렇게 빈약한 논리를 가지고, 그것도 검증되지 않은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것에 불과하다.
가르침 :
1) 예수님은 초막절에 딱 맞는 메시지를 증거하셨다. 성전 문에 물을 붓고 있는 예식을 거행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하게 된 이유, 즉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이 나온 역사를 상기하시면서, 그것이 메시야를 통해서 성령이 넘치도록 채워지게 되는 역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될 것임을 가르쳐주셨다. 이 때 메시지를 들은 이들이 바로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해서 주님께 상당수가 돌아오게 되었다.
2) 예수님의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이 유대인들 무리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쟁점이 예수님이 어디 출신이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일부러 이들은 피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과거 로마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호적이 어디인지 정리된지 30여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충분히 예수님의 호적이 어디에 있고, 그의 출생지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의적으로 예수님의 출신에 대해서 갈릴리로 국한하고 있다. 분명히 예수님이 유다 지파로서 그의 출생이 어디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정황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가 메시야의 정체를 규명하는 중요한 요소였다면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아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 그 당시에 예수님이 규명하지 못한 것을 향후에 제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일축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탄생 설화를 만든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만든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들이 주장했듯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그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호적을 정리하는 칙령을 통해 역사속에 기록으로 남겨지게 하신 것이다.
3) 생수가 되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사실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존재는 부인할수록 그 존재가 더욱 드러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규명해보고자 도전했지만 그 모든 수고들과 노력들은 다 실패로 돌아갔을 뿐이다.
4)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이 세상의 악과 대결을 펼치시고자 하신다. 그 결과가 죽음이지만, 그것이 패배가 아닌 뱀의 머리를 짓이기는 승리가 되는 것임을 예수님만 알고 계셨다. 그 괴롭고 고통스러운, 그러나 우리 죄인들을 위한 그 사랑의 비아돌로로사의 길을 걸어가시게 되는 것이다.
적용 :
1) 예수님만이 생수이시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으로만 만족이 있고, 예수님으로만 다시 다른 존재를 구하지 않고 충만할 수 있다. 날마다 다른 존재로 채울 필요없이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성령 충만의 비결이다. 성령의 충만은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날마다 충만할 수 있고, 충만하게 되면, 그 용적이 더 커지게 되어 더 풍성하게 채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성령의 충만이 부족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성령의 충만으로 인한 넓어짐으로 더 큰 기쁨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그렇게 미리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삼위일체로서의 연합의 사역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 은혜의 삶을 내가 누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부인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고 아무리 주장한들, 그분이 태어난 베들레헴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는 언제나 불편한 분이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없애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도 예수님만 없어지면 마음대로 이것 저것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은 역사속에 친히 들어오셔서 자신을 증거하셨고, 결국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승리, 그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 내셨다.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성령의 충만으로 생수를 부으시기에 오늘을 사는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