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8.21-35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연중 24주일이고 교우들 없이 혼자 미사 드리는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얼마 전에 평일 복음과 같은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는 참 신비로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지는데 베드로는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과 가까워집니다.
또 입바른 소리 할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기가 막힌 명언을 얻어냅니다.
제가 예수님을 좀 분석해보면은요, 예수님의 특징 중 하나가 뭐냐?
열받을 때마다 진리의 말씀이 튀어나오신다는 겁니다.
못 느끼셨습니까?
여러분들 12제자 중에서 예수님 앞에서 제일 덤벙대고 열받게 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베드로일 겁니다.
‘사탄아,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탄 소리까지 들었죠.
그렇지만 그때 베드로보고 사탄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어둠에 빠지게 했던 베드로를 장악하고 있는 베드로 안에 있는 사탄을 보고 얘기한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서도 베드로는 자기가 대단히 관대하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에게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답을 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답합니다.
답을 생각하고 질문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답이 예수님에게 분명히 칭찬을 받을 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7번 용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합니다.
본인이 자신만만했던 거죠. 칭찬받을 줄 알았던 겁니다.
베드로가 ‘7번 용서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대답한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따릅니다.
랍비의 교훈에 ‘세 번까지 용서해라’라고 나옵니다.
세 번까지의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용서하시지만 네 번째는 죄인을 벌하신다는 말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용서의 한계는 세 번이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베드로는 아주 넉넉하게 잡는다고, 랍비들의 가르침인 3번을 두 곱하고 또 좋은 숫자가 되도록 하나를 더 보태어서
7번, 자신이 넘치는 기분으로 7번까지 용서한다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푸짐한 칭찬을 들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뭐라고 그럽니까?
77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옛날 공동 번역에는 7번씩 70번이라고 나오지만 지금 새 번역에는 77번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77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신 뜻은 사실상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일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많은 빚을 탕감받은 종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비유는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일괄되게 흐르고 있는 말씀입니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일괄되게 흐르고 있는 게 뭘까요?
‘사람은 하느님에게 용서받기 위해서 먼저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일괄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네가 하느님에게 용서받기 위해서는 너에게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한다.
자기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느님의 용서는 기대할 수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사목하면서 신자들의 영혼을 들여다보면 미움의 상처, 분노의 상처가 제일 많습니다.
아주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가족에게, 아버지에게, 엄마에게 어릴 때부터 받은 상처들이 많습니다.
먼 곳에 있는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커서 생기는 거지만, 굉장히 오랫동안 박혀 있는 화살촉,
깊은 데 박혀 있는 화살촉은 대부분은 가족들에게 받은 화살촉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후에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치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장 14절-
또 야고보서 2장 13절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참 모질게 심판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을 용서 못 하고
아주 모질고 거칠고 못되게 심판하고 보복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대전에서 무자비한 심판을 받게 될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자비롭게 산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하는 심판은 엄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겠죠.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는 나란히 병행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한다고는 했지만, 완전히 용서하지 못할 때가 여러분들 많지 않습니까?
용서했다고 내 입으로는 말이 나갔는데, 속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또, 많은 경우에 조건을 붙이는 용서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편애라고 하는 형태의 용서가 있습니다. 차별하면서 용서합니다.
큰아들 용서할 때는 뜸을 들이는데, 막내아들, 그 귀여운 아들 용서할 때는 쉽게 용서합니다.
큰아들 입장에서는 ‘세상에! 용서해 주면서도 이렇게 차별해서 용서해 주는군.’ 합니다.
편애라는 형태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용서가 있느냐? 으름장을 놓으며 하는 용서가 있습니다.
잘못한 것을 일일이 짚어가면서 해야지, 협박하면서 하는 용서는 상대방을 완전히 자유롭게 해방시키지 못 합니다.
으름장 놓으면서 겉으로는 용서하는 것 같은데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라고 하는 옷을 입었을 뿐이지 협박을 합니다.
집 나간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는 조건을 안 붙였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도 조건을 안 붙였습니다.
여러분들, 사람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과 우리들이 하느님에게 빚진 것은 도저히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웃이 우리에게 빚진 것을 우리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용서받은 것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면 용서의 시작은 뭐냐?
제가 하는 얘기 아니라 주님이 하셨던 말입니다.
첫 번째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두 번째 거울에다 너 자신을 비춰보려는 겁니다.
비춰보면 나은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너도 살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하면 더 했어.’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살았다는 것을 하느님의 거울에 비춰보라는 얘기입니다.
세 번째 용서의 시작은 그 사람이 나한테 그렇게 못되게 했던 그 환경을 한번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려는 겁니다.
도대체 어린 시절에 어떻게 자랐길래 저렇게 삐뚤어졌을까?
나한테 저렇게 못되게 굴었던 그 사람의 환경을 이해하려고 애쓴다면 훨씬 더 용서하기 쉬워진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 사랑부터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에 용서할 줄 아는 훈련과 테크닉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 세 가지가 성경에 나오는 용서의 출발입니다.
미워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
나 자신을 내가 만든 거울로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거울에 비춰보는 것,
저 사람이 나에게 죄짓고 못되게 구는 그 환경을 이해해 보려고 한번 애를 써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3년 연중 제24주일 (9/1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