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설화》
역적으로 삶을 마감한 세자빈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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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조선시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의 비인 민회빈 강씨의 묘소가 있다.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 간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그곳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힘든 생활을 했다. 그리고 8년의 인질생활이 끝나갈 때, 청나라 황제는 소현세자 일행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위로잔치를 열었다. 위로잔치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용연 벼루를 선물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되고, 회빈 강씨도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는다.
광명시 노온사동에 소재한 민회빈 강씨의 묘소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조선시대 16대 임금인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비 민회빈 강씨의 묘가 있다. 온신초등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약 1.5km쯤 떨어진 곳이다.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민회빈 강씨의 묘소를 ‘아왕릉(兒王陵)’, ‘민회묘’, ‘영회원(永懷園)’등으로도 부른다. 민회빈 강씨는 1627년 세자빈이 되었으며, 소현세자가 병자호란에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죽자, 민회빈이 죽였다는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은 인물이다.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민회빈 강씨
조선시대 인조 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있고 나서,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는 청나라의 요구대로 소현세자와 세자빈 민회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을 인질로 보냈다.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 간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낯선 땅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생활하였다. 그리고 8년의 인질생활이 끝나갈 때, 청나라 황제는 소현세자 일행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위로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청나라 황제가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생활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 세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으니,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라. 한 가지 소원은 내가 들어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청나라 황제가 미심쩍은 소현세자는 “폐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돌보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아끼시는 용연 벼루를 갖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청나라 황제는 “좋다. 이 벼루는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나 그대에게 주리라.”라고 하였다. 용연 벼루를 선물로 받은 소현세자 일행은 8년 만에 귀국 길에 올랐다.
한편,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세자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인조는 크게 기뻐하여 일행들을 맞이하였다. “내가 부족하여 너희를 지금껏 고생시켰구나. 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라며, 소현세자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밤새도록 “청의 임금은 어떠하냐?” 꼬치꼬치 물었고, 세자가 “저희가 조선으로 돌아올 때 잔치를 베풀어 주고,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가 아끼는 용연 벼루를 받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청나라 황제에게 용연 벼루를 받아왔다는 소현세자의 말을 들은 인조는 “예끼 이 못난 놈아. 겨우 벼루를 달라 했더란 말이냐.”며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던졌다. 벼루에 맞은 소현세자의 이마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그리고는 앓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은 민회빈 강씨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점점 말수가 줄어갔다. 그 무렵, 궁궐에서는 민회빈 강씨를 시기하는 이들이 생겼다. 인조의 귀여움을 받은 조귀인이 민회빈 강씨를 모함하였다. “민회빈이 저를 죽이려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저주한다 하더이다.”, “소현세자를 죽인 일로 임금님을 원망한다 하더이다.”등의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을 들은 인조는 결국 “민회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하였다. 인조가 내린 사약을 앞에 두고 민회빈 강씨는 “살아서 효를 다하는 것도 자식의 도리옵고, 부모가 죽으라 하면 따르는 것도 효이오니, 기꺼이 사약을 받겠습니다.”라며,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고 한다.
민회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설화
위의 설화는 봉림대군와 소현세자, 그리고 소현세자의 비인 민회빈 강씨 등 역사적 인물과 사실을 토대로 창작된 설화다. 소현세자는 1644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한 후 두 달 동안 병중에 있다가 34세로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이 민회빈을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켰다. 민회빈은 인조의 거처에 가서 통곡을 하고, 인조에게 조석문안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민회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의심까지도 받게 되어 후원 별당에 유치되었다. 그리고는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고 한다. 위의 설화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면서도 민회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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